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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열전
2019.12.27 16:14

41. 한국편 - 백곡(白谷)화상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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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백곡(白谷)화상

- 척불(斥佛)의 부당성 항의한 대장부 -

(3) 간폐석교소(諫廢釋敎疏)의 의의(意義)

백곡은 문장에 특하였고 또 차원높은 선교관 및 확연한 유불관을 지닌 고승이었다. 그러나 한국불교사에서 그의 존재는 배불정책하의 조선시대에 당당하고 기개에 찬 논조로 국가의 척불에 대해 항소를 제기했던 유일한 승려로서 더욱 크게 부각되어 있다.


가혹한 배불교시책이 단행되었던 조선초 무렵, 이에 대한 불교측의 항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태종 6년에 조계종의 승려 성민(省敏)은 누차 의정부에 조정의 지나친 척불시책을 시정할 것을 요구하였고, 수백명의 승도를 이끌고 가서 신문고를 쳐 왕에게 직접 척불정책의 완화와 사원 · 전토 · 노비의 복구를 호소하기도 하였다. 비록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는 못하였지만 불교측의 적극적인 항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함허당 己和처럼《현정론(顯正論)》을 저술하여 유불의 회통성을 주장함으로써 유학자들의 척불론에 대해 불교를 제대로 이해시키고 그 척불론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는 간접적인 저항활동도 있었다.


이처럼 법난이 계속되는 가운데 몇몇 사람의 항거가 있기는 하였으나 그러한 항거도 국초(國初)에 극히 짧은 시기의 일이고 그나마 미미한 것이였다. 또한 상소의 경우도 국초의 승려 상총(尙聰)을 비롯하여 임진왜란 당시의 사명·의암에 의한 몇 차례 예를 들 수가 있다. 그러나 상소의 내용은 불가 내의 자체문제이거나 국난에 대처할 국가 중대사에 관한 문제를 소진(疏陳)한 그야말로 위국충정의 글들로서, 배불시책에 대한 불교측의 저항 및 정당한 주장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었다.


이럴 때에 오직 백곡만이 국가의 배불시책에 대항하여 장문의〈간폐석교소〉를 올리고 있는데, 이는 백곡 이전의 여러 상소들과는 근본적으로 그 성격을 달리한다. 백곡이 생존했던 조선중기만 하더라도 그동안 계속 되어온 척불로 인하여 종단의 피폐상은 물론 승려의 사회적 지위 또한 소위 팔천(八賤)의 하나로 전략되어 있던 시대였다. 따라서 승려들은 국가의 부당한 대불시책에 대하여 저항할 기력조차 상실한 채 다만 현실을 수용하고 침묵하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시대상황에서 백곡은 정연한 논리로 척불을 논파하고 그 시정을 촉구하는〈간소(諫疏)〉를 제기한 것이다. 이 소(疏)는 조선조 500년간에 걸친 배불정책 하의 불교사에서 단 한 편의 항소라는 점에서 그 의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도 더할 수 없이 논리정연하고 간절긴요하다. 그런 점에서 백곡의〈간폐석교소〉는 단연코 우리 불교사 특히 조선조 불교의 역사에서 기념비적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백곡이 이와같은 항소를 제기하게 된 동기는 무엇일까? 물론 그 동기는 한마디로 국가의 배불정책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그 직접적인 동기는 백곡 자신이 밝히고 있듯이 인수(仁壽) · 자수(慈壽) 양원(兩院)을 철폐하여 니승(尼僧)을 환속시키고 봉은(奉恩) · 봉선(奉先) 양사(兩寺)까지도 폐하여 승중(僧衆)을 환속시켜 불교를 사태훼파(沙汰毁破)하고자 한 조정의 결의에 있었다.


즉 현종이 즉위하여 그 원년(1660)에 양민으로서 머리를 깎고 승니가 되는 것을 금하고, 만약에 승니가 된 자는 일일이 환속시키고 또 그것을 어기는 자는 죄를 과하도록 하였다. 그해 2년 정월에는 성 안의 인수원(仁壽院)과 자수원(慈壽院)의 두 니원(尼院)을 철폐하고, 봉은사와 자수원에 봉안했던 열성위패(列聖位牌)를 땅에다 묻었으며, 이어서 니중(尼衆)을 환속시키고, 또 봉은사 · 봉선사 까지도 폐하여 승중(僧衆)을 환속시켜 불교를 사태훼파(沙汰毁破)코자 하였던 것이다.

 

이와같은 불교계의 절박한 현실문제가 항소의 직접적인 동기가 된 것이지만, 그러나 도첩제 승과제의 폐지 등 백곡 이전에도 그가 제기한 문제 이상으로 가혹한 척불시책이 강행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백곡의 항소제기는 눈앞의 절박한 문제에서만이 아닌 또 다른 측면에서 당시 사회의 어떤 변화와 상황이 뒷받침되어 백곡으로 하여금 분연히 항소의 붓을 들게 했던 것으로 볼 수가 있다. 그것은 주로 임진 · 병자 양란의 과정과 그 후 승려들의 국가적 기여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즉 양란의 과정에서 의승군의 활동과 그 국가적 기여는 제한적이기는 하나 척불의 도를 둔화시키고 불교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백곡에 앞서 사명의 상소 등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그것이 비록 불교자체와는 무관할 지라도 불교와 국가와의 언로가 잠정적이나마 개설되어 있었으며, 승려의 지위가 어느 정도 상승된 것도 사실이다.


임진란 중의 사명 · 영규 등의 특기할만한 공헌은 말할 것도 없고, 백곡의 사승인 각성 또한 임진 · 병자 양란을 통해 크게 활약했던 인물이다. 그는 임란 중에는 스승 부휴를 대신하여 명나라 장수와 함께 바다에서 왜적과 대전하였고, 인조 2년(1624)에는 팔도도총섭이 되어 승도를 거느리고 3년에 걸쳐 남한산성을 쌓았으며, 병자호란 때에는 남쪽에서 3천 명의 의승군을 모아 스스로 의승대장이 되어 북상하기도 하였다.

 

그런 각성의 제자인 백곡은 그의 상소에서 승려들이 국가에 크게 기여하고 있음을 역설하고 있지만, 어쨌든 양란을 통한 불교계의 힘의 성장세를 배경으로 백곡이〈간폐석교소〉와 같은 강력한 항소를 제기할 수 있었으리라는 점 또한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무비 스님

 

[출처 : 염화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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