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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열전
2019.12.24 13:10

24. 한국편 - 일연선사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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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일연 (一然) 선사 ②


이 때는 그의 서른 두 살때(1237년)로 나라로부터 三重大師로 제수받았고 마흔 하나(1246년 고종 33)엔 禪師로 加資됐다. 1248년 (고종 35)까지는 포산에 있는 여러 사찰에 주석하던 시기인데 최우(?-1249) 집정기이자 대몽항쟁기로서 교단 내외, 국가가 침탈의 와중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강화도로 천도(1232년 고종 19년 6월)하고 더욱 항몽구도를 가졌으나 몽고병이 경주까지 가서 황룡사 9층탑을 불태웠다.(1238년 4월) 이미 符仁寺藏 초조 대장경이 소각되는(1232년 4월) 손실을 안은 강화도 정권은 난국을 불력을 통해 타개하려고 禪源寺에 大藏都監을 설치(1236년 고종 23)해 경판을 제조토록 했다.


이 경판은 16년간(1236 ~1251) 각고 끝에 완성돼 현재까지 합천 海印寺에 모셔져 있는 국보다. 교단은 정신적으로 국력강화에 나서는 기도·법회나 불심을 고양시키는 신앙 結社들(修禪社·白蓮社 등)을 감행하곤 했다. 비록 소극적이 나마 국난타개를 위해 호법·호국적 신앙을 고취시켰다. 일연 선사도 내우외환을 직접 목도하면서 뼈저린 시대적 반성과 민족적 자존심을 되새겨 보았을 것이다.

 

「무엇 때문에 이토록 국토는 쑥대밭이 됐으며, 무엇으로써 이 난국을 극복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그 해결책을 경전들과 화두에서 찾으려 애썼으며, 그 결과로 당시의 사조와 민심을 보아 ‘건전한 사상과 신앙’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출가 승려로서 이 문제에 대해 최선의 답을 찾기로 다짐하면서 정진했다.


그가 마흔 네 살이 되던 해(1249년 고종 36), 그는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최우와 인척 관계에 있었던 鄭晏(?~1251)이 중앙 정계에서 물러나 南海에 은거하며 자신의 私第를 定林寺로 만들어 일연을 초청해 주석토록 했는데, 선사는 이에 응해 남해에서 있으면서 최씨 정권과 연결되고 경판 조조 南海分司의 작업에도 참여하며, 普照知訥(1158~1210) 계통의 修禪社(지금 송광사) 眞覺慧諶(1178~1234) 門下와도 교류를 갖게 됐다.

 

최우가 죽자(1249년 11월) 아들 崔沆(?-1257)이 집권했는데 정안도 정계로 다시 진출해 參知政事에 올랐으나 술자리에서 최항이 사람을 함부로 죽인다고 비방한 것이 알려져 백령도에 유배돼 살해됐다.

 

일연은 그런 정황과 난세에서도 유연하게 정림사를 중심으로 활약했다. 대작불사 대장경 조조가 완성되고(1251년 9월) 이듬해에 修禪社 3세 淸眞國師 夢如(? ~1252)가 입적했으며, 일연은 쉰하나(1256년 고종 43)때 지리산 吉祥魔에서『曹洞五位』를 중편하기 시작했다.


쉰다섯 살 해(1260년) 初刊됐는데, 이 책은 조동종의 洞山良价(807-869)가 제창한 偏正 五位說(正中偏·偏中正·正中來·偏中至·兼中到)에 대해 曹山本寂(839-901)이 註를 보태 선양한 조동종의 중심 사상이다. 이는 그가 유교·불교에 널리 통했으며 會通佛敎的 신앙정신으로 시대적 위기에 대처했음을 말한다 하겠다. 쉰네 살(1259년)에 大禪師 호를 加資받았는데, 그의 남해·지리산 주석 시기는 (1249 ~1260) 禪·敎는 물론 그의 영향력을 교단 내외로 크게 진작시킨 때였다.


최의가 죽음을 당하고(1258년 고종 45) 강화 정부가 몽고에 항복해(1259) 개경으로 환도(1260)하면서 완전한 몽고 속국으로 국토가 유린당했다. 元宗은 1261(월종 2)에 일연을 서울(開城)에 불러들여 修禪社의 別院(?)인 禪月寺(개성 송악산 구산사 곁에 있던 절 仙月寺?)에 주석케 했다. 선사는 이곳에서 開堂해 ‘멀리 牧牛和尙 知訥의 法을 이었노라(遙嗣牧牛和尙)’고 선언했다.


이제 선사는 왕실과 깊은 관련을 맺으면서 이윽고 선종·교종을 망라한 거목으로 임했다. 5년간 지내다가 쉰아홉 살 해(1264년 원종 5) 가을 남쪽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왕께 여러 번 간청해, 마침내 영일 雲稊山 吾魚寺에 머물렸다. 얼마 아니되어 비슬산 仁弘寺 寺主 萬恢가 주석을 사양하매 선사는 인홍사로 옮겼다. 이때 배우려는 學侶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예순세 살 해(1268년 원종9) 여름 왕명을 따라 선종·교종에서 유명한 스님 100분을 모셔다가 雲海寺에서 두 번째 대장경 낙성법회를 크게 열어 일연이 主盟이 됐다. 낮엔 경문을 읽고 밤엔 宗趣를 담론했다.


사람들이 궁금히 여기던 바를 예리하게 파헤쳐서 해석하니, 마치 물 흐르듯 하고 정곡한 설명은 入神 경지까지 가니 듣는 이마다 탄복해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사가 仁弘寺에 있은 지 11년 동안 무수한 학려들을 깨우쳤거니와 절이 비좁고 낡아서 증개축을 해 말끔히 단장해 조정에 아뢰니 왕은 仁興寺로 개칭해 현액을 내렸다(1274). 또 선사는 包山 동쪽 기슭의 湧泉寺를 수선해 佛日社라 명명했다.(1274년) 보조지눌의 定慧結社, 圓妙了世의 白運結社의 뜻을 받들어 선사도 佛日結社를 맺어 강조하고 있다.


선사가 선월사·오어사·인홍사·운해사·용천사 등에서 활동한 시기(1261 ~ 1276)는 고려의 개경환도와 몽고 속국화로 피폐된 정국이며, 이에 반대하여 三別妙兵이 珍島→耽羅로 쫓겨가 토벌되는 암울한 국권 상실의 시대였다. 당시 불교계 지도자들은 談禪法會를 통해 항몽정신력을 고취시켰다.

 

고래로 국가관계 경전으로 護國三部經(「법화경」.「인왕경」.「금명경」)이 있는데, 이중『법화경』신앙은 보문품을 중심으로 널리 애송돼 왔다. 강력한 항몽정신을 여러 법회들을 통해 강조했으며 이는 난국타개의 도덕과 신앙의 건전한 무장을 고양시켰다.


비록 시대적 한계는 있을 망정 선사도「饒益衆生」차원에서 沙門의 本分事를 다하려고 했다고 보아지며, 따라서 시대적 격동기에서 그저 소극적으로 행동했다는 폄하는 지나친 부정적 시각이라 여겨진다.

 

일흔두 살 해(1277년 충렬왕 3), 왕명을 따라 일연은 淸道 雲門山 雲門寺에 주석했으며, 여기서 그의 신이한 玄風은 널리 퍼졌고 왕도 더욱 마음을 써서 선사의 위덕을 찬양했다.

충렬왕은


오죽하면 또 예의를 갖춰 넌지시 전하리까? 密傳何必更摳衣

좋은 곳 멀리서 뵈옴도 정말 기연인가 봅니다. 金地遙招亦是奇

연공을 대궐서 모시려 했건만 欲乞璉公邀闕下

스승께선 웬일로 흰 구름 가지만 그토록 사모합니까? 師何長戀白雲技

-<일연비문에서>-


라는 詩까지 지어보냈다. 선사는 학려들을 가르치면서 틈틈이『삼국유사』집필에 착수했다. 이미 고려 왕실이 몽고(元)에 예속돼 힘이 없는 데다 몽고가 日本을 정복코자 고려에 과중한 부담을 지워 두 번째로 일본정벌군을 파견하자 고려 조정은 金方慶(1212~1300)을 시켜 水軍을 이끌고 가담했으며, 왕도 東都인 경주로 내려갔다.


왕은 선사를 부르니 일연은 行在所로 달려갔다.(1281년) 그는 가는 도중 민중들의 피폐할 대로 피폐한 삶의 현장들을 목격했다. 아니 이미 오래 전부터 몽고전란으로 온 국토는 황폐돼 왔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왕의 행차 등에 부역 된 민중의 삶이란 처참하기 그지 없었다.

 

이듬해(1282년 충렬왕8) 가을, 왕의 부름을 받아 대궐(內殿)에서 禪法을 설하니 왕이 기뻐하고, 일흔일곱 살인 선사를 개경 廣明寺에 주석케 했다. 다음 해(1283년) 3월엔 왕이 신하들에게 “先王들이 다 불교를 믿었고 덕망있는 이를 王師나 國師로 삼았거니와 지금 운문사 스님은 도덕이 높아 사람들이 다 우러러 보므로 그를 國尊으로 모시려고 한다" 했다.

 

우승지 廉承益이 論旨를 받들어 예를 올렸으나 선사는 表文을 올려 굳이 사양했다. 왕이 사자를 보내 3번 청했다. 왕은 上將軍 羅裕(? ~1292) 등에게 명해 國尊으로 책봉하고 圓徑冲照라 호했다.

 

그러나 국존께선 본디 서울 생활을 싫어했고 또 90세 老母가 살아 있어서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빌어 간곡히 上奏했다. 왕은 여러번 묵살하다가 결국 허락하매 국존은 그 해(1283년)에 운문사로 돌아왔다. 왕은 近待佐郞 黃守命에게 명해 護行케 하여 조야가 그 드문 일을 찬탄했다.


이듬해(1284년) 모친 李氏는 96세로 세상을 떠났다. 조정에선 인각사에서 국존을 편히 모실 곳으로 삼고, 近侍 金龍劒에게 명해 절을 수리하고 田士 백여 이랑을 절에 넣었다.

 

국존은 여기서 九山門都會를 두 번이나 열어 禪法과 교단의 융성함을 크게 선양했다. 인각사에 들어간 지 5년 뒤1289년(충렬왕 15) 6월 국존은 병을 얻어,7월 7일에 왕께 올리는 글월을 손수 쓰고, 시자에게 일러 글을 지어 相國 廉承益에게 부쳐 영원히 떠남을 고했다. 그날 선사들과 문답한 후 밤이 되자 한 자 넘는 큰 별이 절 뒤에 떨어졌다. 다음날 대중과 법거량한 뒤 方丈으로 돌아가 禪床에 앉아 金剛印을 맺고 고요히 示寂했다.


丁亥日에 화장해 영골을 주워 禪室에 두었다. 왕은 시호를 普覺, 탑호를 靜照라 내리시고, 10월 인각사 동쪽 언덕에 탑을 세웠다. 세수 84요 법랍은 71 이다.

 

이상이 <일연비문>에 준거해 살펴본 일연선사의 생애다. 그는 모든 일에 느긋하고 세심했으며 豪氣를 부릴만한 성격도 갖지 못해 평생 두루두루 원만한 인격자였다고 판단된다. 한마디라도 진지했으며 전혀 꾸밈도 없이 진정 으로 사람들을 대했다고 <일연비문>은 전한다.

 

무비 스님

 

[출처 : 염화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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