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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열전
2019.12.26 14:27

28. 한국편 - 보조지눌(普照知訥)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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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 보조지눌(普照知訥) ②

‘韓國禪’ 확립한 고려불교의 巨峰

(3) 사상


지눌의 사상은 12세기 고려불교의 문제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밖으로 정치적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타락한 불교를 바로잡아 정법을 구현하고, 안으로 선교간의 대립과 갈등을 해소하는 일은 지눌이 살았던 고려불교의 과제였으며, 그는 실제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평생을 일관하여 진력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사상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고뇌의 산물인 것이다.

지눌은 무엇보다도 불교인 모두가 修心에 투철해야 한다고 믿었다. 즉, 수심불교로 돌아갈 때 정법은 구현될 수 있으며 선교간의 갈등도 해소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마음 닦는 일을 게을리할 때 불교는 정법과 멀어지며, 쓸데없는 시비에 떨어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눌은 수심에 가장 기본이 되는 깨침(悟)와 닦음(修)의 성격과 체계를 밝히는 일에 진력하였다. 깨침과 닦음의 바른 길은 수심인에게 나침반과 같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제 그의 중요사상을 항목별로 나누어 고찰해 보려 한다.


頓悟漸修思想


깨침과 닦음에 관한 바른 길을 제시하는 것이 그의 돈오점수설이다. 즉, 지눌에 의하면 올바른 수심의 길은 먼저 마음의 성품을 분명히 깨치고, 그 깨침을 의거하여 점차로 닦아 가는 先悟後修라는 것이다. 頓悟를 그는 이렇게 말한다.

 

“돈오란 범부가 미혹했을 때, 四大를 몸이라 하고 망상을 마음이라 하여, 제 성품이 참 법신임을 알지 못하여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아 헤매다가, 갑자기 선지식의 지시로 바른 길에 들어가 한 생각에 빛을 돌이켜[一念廻光] 제 본성을 보면 번뇌없는 지혜의 성품이 본래부터 스스로 갖추어져 있어 모든 부처님과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음을 아나니 그 때문에 돈오라 한다."

 

돈오란 ‘마음의 부처’라는 사실에의 눈뜸이며 자기 존재에 대한 명확한 파악이다. 그것은 [一念廻光]이란 자기 존재에 대한 돌이킴으로 가능하다. 밖으로만 치닫던 마음의 빛이 존재의 원천을 돌이켜 비출 때 우리의 실다운 모습은 밝게 드러난다. 그럴 때 우리의 참다운 나, 참 마음의 실상을 여실히 보게 되는 것이다. ‘내가 부처’라는 말은 이때에 터지는 탄성이다.

 

그것은 어둠(迷)으로부터 밝음(悟)으로의 전환을 말한다. 그것은 마치 어두운 방이 스위치를 올렸을 때 일시에 밝아지듯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이 아니므로 ‘頓’이라는 형용사가 붙는다.

 

‘心卽佛’이라는 사실을 돈오했으면 수심을 마친 것인가? 지눌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그것은 아직 완성인 부처의 경지는 아니라고 한다. 돈오를 기본으로 점차로 닦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漸修이다. 깨쳤으면 그만이지 왜 점수가 필요한가. 지눌에 의하면 깨치기 전 오랫동안 익혀 온 나쁜 習氣는 즉시 제거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한다.

 

“점수한 비록 본래의 성품이 부처와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으나, 오랫동안의 습기는 갑자기 버리기 어려우므로 깨달음에 의해 닦아 차츰 익혀 공이 이루어져서 성인의 胎를 길러 오랫동안을 지나 성인이 되는 것이므로 점수라 한다"


돈오가 자기 존재의 실상에 대한 눈뜸이요 앎이라면, 점수는 그 앎이 생활 속에 一如하게 하는 실천과정이요 닦음이다. 즉 돈오가 迷에서 悟로의 전환이라면, 점수는 범인이 성인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점차적인 것이다. 돈오가 아기의 탄생이라면, 점수는 그 아기가 어른이 되기까지의 성숙이며 개발과정이다.

 

그러므로 돈오만으로 닦음이 필요없다는 것은 마치 갓난아기가 어른 행세를 하려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다. 돈오점수란 이렇게 우리 존재의 실상에 눈뜨는 깨침과 그를 바탕으로 깨친 대로 행할 수 있는 점차적인 닦음을 통하여 온전한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수심의 체계이다.


定慧雙修


점수의 성격과 내용을 밝히는 것이 그의 定慧雙修論이다. 즉, 정과 혜는 함께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定이란 산란한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여 조용하게 하는 것이며, 慧는 사물을 사물대로 보는 것으로 三學의 덕목들이다. 그러나 지눌이 정혜쌍수라 할 때 정과 혜는 마음에 즉하여 쓰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즉 定은 마음의 空寂한 본체를 가리키며 慧란 마음의 신령스럽게 아는(靈知) 작용을 말한다. 따라서 마음의 본체와 작용이 분리할 수 없듯이, 정과 혜도 항상 함께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심의 실제에 있어서 정에만 치우치면 昏沈에 떨어지기 쉽고, 혜에만 치우치면 산란해지기 쉽기 때문에 항상 정과 혜를 함께 닦으라는 것이다. 그는 또 정혜쌍수라는 깨친 다음의 점수에서 모든 사람을 위한 이타행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看話禪思想


지금까지 우리는 지눌의 돈오점수, 정혜쌍수사상을 고찰해 보았거니와, 지눌은 그와 함께 단도직입적인 話頭禪을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 선양하였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즉, 그에 있어서 돈오점수의 수행문이 일반적인 근기의 사람을 위한 因敎悟心의 길이라면, 처음부터 일체의 語路, 義理, 思量分別을 거치지 않고 沒滋味한 화두를 들어 깨치는 이른바 徑截門은 특수한 근기의 사람을 위한 길이다. 이렇게 지눌에 있어서는 가르침을 필요로 하는 이의 능력과 소질에 따라 각기 다른 방편문을 제시하고 있다.


禪敎의 融會


지눌은 선과 교의 대립과 갈등을 보면서 그 둘은 과연 화합할 수 없는가 하는 의문에 사로잡혔었다. 그는 바로 이 의문을 풀기 위하여 보문사에서 3년간이나 대장경을 열람하였다. 선승인 그가 3년간이나 대장경을 열람하였다는 일은 그가 선교의 갈등 해소를 위해 얼마나 진지하였는가를 짐작케 하는 일이다.

 

그는 드디어 <화엄경>을 통하여 선교가 계합하는 구절을 발견하였다. 그때의 감격을 그는 “그 경책을 머리에 이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흘렸다”고 적고 있다. 그 후, 이통현의 <화엄론>을 읽으면서 더욱 선교가 하나라는 확신에 이르게 되어 드디어는 이렇게 말하였다.

 

”부처가 입으로 말한 것은 교요, 조사가 마음에 전한 것은 선이다. 부처와 조사의 마음과 입은 필연 서로 어긋나지 않는 것인데, 어찌 그 근원을 궁구하지 않고 각기 제가 익힌 데에 편안히 안주하여 망령되이 논쟁함으로써 헛되이 세월을 보내겠는가?"


선은 부처의 마음(佛心)이요 교는 부처의 말씀(佛語)이다. 마음과 말이 분리될 수 없듯이, 선과 교가 둘일 수 없다. 이것이 지눌의 선교융회정신의 기본이다. 그가 돈오점수를 강조한 것도 선교를 하나로 융화하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4) 사상의 성격과 의의


지금까지 살펴본 지눌사상에 나타나는 특성은 어떠한 것이며 그 의의는 어떠한 것일까. 먼저 그의 사상 전반에 흐르는 두드러진 성격은 妙合과 會通을 기본으로 하는 원융한 것이다. 이러한 성격은 그의 돈오점수, 정혜쌍수, 간화선사상, 선교융회의 사상에 그대로 나타난다.

 

지눌에 있어서 깨침과 닦음은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깨침(悟)을 통한 닦음(修), 닦음을 게을리하지 않는 깨침의 체계이다. 또 이는 悟를 강조하는 頓門과, 修를 강조하는 漸門의 회통을 말하기도 한다.

 

중국선에서 우리는 깨침과 닦음, 頓과 漸이 분리, 강조된 느낌을 버릴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지눌에 있어서 정과 혜, 그리고 선과 교는 항상 묘한 조화를 잃지 않는다. 그는 因敎悟心의 길과 함께 一超直入如來地하는 徑截의 길 또한 포용하였다. 치우치지 않는 妙合會通의 정신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듣는 이의 능력과 소질에 따라 각기 다른 길과 가르침을 펴고 있는 이른바 應機說法의 원융한 방편을 그의 사상 전반에서 볼 수 있으니, 이 또한 지눌사상의 한 특성이라 하겠다.

 

이러한 지눌사상의 사상사적 의의는 어떠한 것일까?

 

첫째, 한국선의 탈 중국적인 전통의 확립이다. 지눌 이전의 선이 중국선의 연장, 혹은 강한 영향 아래 있었다면, 지눌에 이르러 비로소 선과 교, 깨침과 닦음, 돈과 점을 하나로 보는 회통적 선의 전통이 이 땅에 수립된 것이다.

 

이러한 지눌의 사상적 전통은 오늘의 한국불교에도 면면히 전승되고 있다. 이는 외래사상의 주체적이고도 창의적인 수용의 한 훌륭한 예이다. 외래문화의 무분별한 수용으로 가치관이 크게 흔들리고 있는 우리의 실정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지눌의 사상에서 외래문화 수용의 창의적 자세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무엇보다도 우리는 지눌사상에서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에 대한 철저한 규명을 볼 수 있다. 깨침과 닦음을 통하여 인간의 본래적인 자기의 모습에 눈뜰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지혜와 자비의 구현자가 될 수 있다는 움직일 수 없는 확신을 그의 사상에서 볼 수 있다. 그가 그토록 강조하였던 깨침과 닦음이란 바로 우리가 우리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 우리답게 살기 위한 과정인 것이다.

 

이는 自己回復, 自己形成의 가장 직접적인 메시지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자기상실의 깊은 늪에서 허덕이는 현대인에게 이보다 더 절실한 생명의 원음이 없겠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눌과 같은 인류의 영원한 스승이 이 땅에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알아야 할 것이다.

 

무비 스님

 

[출처 : 염화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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