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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열전
2019.12.26 15:49

33. 한국편 - 편양선사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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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편양(鞭羊) 禪師

- 걸인과 함께 양치며 살던 聖者 -

(1) 시대적 배경

흔히 조선불교를 숭유억불의 법란시대라고 한다. 유생들로 가득 찬 조정 위정자들의 갖은 박해와 탄압과 멸시를 받으면서 근근이 명맥을 이어왔다고들 한다. 그러나 그러한 갖은 시련이 있었기에 전국 각지의 수많은 납자들이 오직 수행에만 전념하여 해탈장부가 된 것이다. 유생들의 박해는 도리어 도인들을 배출한 계기가 되었음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예는 숱하게 많다.

조선 초의 碧溪爭心선사는 沙汰를 당하여 황악산 古紫洞勿汗里의 어느 호숫가에 은거하면서 호수에 곧은 낚시를 드리우고 삼매에 들었다. 碧松智嚴선사는 함경도에 침입한 여진족을 소탕한 장수로서 出家爲僧하여 벽계선사를 찾아가 땔나무 장사를 하며 수도하더니 급기야는 見性悟道했다. 芙蓉靈觀선사는 천민출신으로서 남의 집 종살이를 하다가 뜻을 세워 출가하여 九千洞에서 10여성상을 용맹정진한 끝에 打破漆桶하여 벽송선사의 衣鉢을 傳受하였다.

서산대사는 조실부모하고 고아가 되었는데도 열심히 학문에 정진하여 과거에 응시하였고 낙방을 계기로 지리산의 신선을 찾을 양으로 義神洞天에 들어갔다가 崇仁長老를 만나 世塵을 벗은 뒤 西山窟에 처박혀 3년여를 씨름하더니 낮닭 우는 소리를 듣는 순간 대오하고는 조선불교의 중흥조가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수행풍조의 전통 속에서 유년에 출가한 鞭羊禪師도 선배 도인들처럼 수행에만 전념하여 解脫丈夫가 되어 종풍을 振作하는 한편 廣濟蒼生하였던 것이다.

 

(2) 생 애


선사는 선조 14년(1581)에 竹州縣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張氏이고 아버지는 張珀이며,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에 12세의 나이로 금강산 楡岾寺의 玄賓선사에게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왜구가 강산을 짓밟던 8년 풍진 동안은 은사의 슬하에서 三藏을 이수하며 티없이 자랐으며, 왜란이 가라앉자 捨敎入禪하여 제방으로 다니면서 여러 선지식을 찾았다. 선사는 19세 때 타파칠통하고 保任하면서 평안도 어느 목장에서 ‘양치기 생활’을 하면서 鞭羊堂이라는 법호를 얻게 되었다. 22세 때 묘향산의 淸虛禪師에게 입실하고 3년을 시봉하였으며 이때 스승의 진수를 체달하여 嗣法弟子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청허, 곧 서산대사의 법통을 잇게 된 편양선사는 그의 법을 楓潭의심에게 전수하였으며, 풍담은 다시 月潭설제에게로, 월담은 喚惺志安에게 전하여 편양선사가 입적한 지 3백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한국 승려 중 95% 이상이 모두 편양문손에 속하게 되었다. 편양선사는 서산대사의 제자 81인 가운데 가장 막내였다. 한 산중을 거느리는 조실자리에 앉은 도인들이 즐비하였으니 이 중에서도 四溟 · 逍遙 · 靜觀 · 鞭羊의 4대 문중을 이른바 ‘서산문하의 4대 문파’라고 한다.

 

하지만 3백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사명 · 소요 · 정관 등 3대 문파는 그 대가 끊긴 지 오래이고 현재는 오직 편양문손만이 크게 성하여 우리나라 전체 승려 중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편양선사의 어느 면이 그토록 장하기에 선사의 문하만이 크게 떨치게 된 것일까. 그것은 선사가 3년간의 양치기 생활과 평양성 내에서의 보살행의 공덕이 아닌가 한다.

 

양치기생활은 어떤 보수를 받고 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보림하는 가운데 양떼들을 돌본 것이었다. 선사는 양떼들을 자신보다 낮은 축생으로 다룬 것이 아니고 인간과 구별함이 없이 마치 赤子와 같이 여겨 그들의 보호자가 되고 선도자가 되어준 것이었다.

 

또 평양성에서의 보살행이란 선사가 보림하면서 평양성 내의 모란봉에 움막을 짓고 살았는데, 성 내에 사는 걸인들 수백 명을 한곳에 모아 그들을 보살펴주었다. 선사 자신이 문전걸식하는 형편인데도 수백 명의 걸인들을 친권속 같이 보살펴준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선사로서는 걸인들의 보호자 노릇을 하는 일이 수행의 한 방편인 두타행일 수밖에 없었지만, 선사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를 가리지 않고 근 10년을 헌신하였다. 이 作福行을 실천궁행한 공덕으로 오늘날 전체 승려의 조사가 된 것이 아닐는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서산대사 문하에는 81인의 悟道弟子가 있었고, 이 중에서 한 산중의 조실이 된 분만도 50여 명이나 되었다. 그 분들 모두가 편양선사보다 법랍이 높은 선배들이었지만 그들의 後福이 편양선사보다 못한 것은 편양선사만큼 큰 복을 못 지었기 때문이리라. 평양성에서의 이타행을 끝내고 묘향산으로 돌아와서 선사는 다음과 같이 읊은 바 있다.


맑은 성에 노닐기를 마친 뒤

묘향산에서 그름과 벗해 한가롭구나.

홀로 앉아 밤은 깊어가는데

앞봉우리 달빛은 마냥 차갑고녀.

(百城遊方畢 香岳伴雲閑 獨坐向深夜 前峰月色寒)


선사는 귀산 후 묘향산의 천수암과 금강산의 천덕사 등 사암에서 후학을 위해 개당 강법하여 널리 교를 선양하였다. 선사는 선을 닦아 깨친 도인이면서 전등 · 화엄 등 삼장을 강설하였으므로 선자에게는 本分宗師이고 교학자에게는 大講伯이었다. 이렇듯 선과 교를 雙修하고 幷闡한 것은 당시의 불교가 선교양종인 탓도 있겠지만 선교일치의 사상을 따랐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편양선사의 사상은 어디까지나 선에 주안점을 둔 것임은 말할 나위 없다.

 

인조 22년(1644) 5월 10일, 이 날은 편양선사가 세연을 거둔 날이다. 묘향산 內院은 선사의 스승이신 서산대사께서 입적하신 암자로서 스승의 최후를 지켜본 편양 자신이 또한 이절에서 坐化하였다. 임종에 이르러 제자 풍담의심에게 후사를 유촉하고 오되 오심이 없이 오신 길로 가되 가심이 없이 그렇게 가셨다. 선사의 세수는 64세이고 법랍은 53세였으며 은색 사리 5과를 수습한 제자들은 묘향산과 금강산에 부도와 비를 세웠다.

 

무비 스님

 

[출처 : 염화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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