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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공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부의 방법이 아니라, 공부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이다. 진실하고 올바른 마음가짐이 공부를 이루어 주는 원동력이 된다.

 

◎ 참으로 부처님의 길을 가려는가?

무엇 보다 중요한 것은 참으로 해탈을 원하는가 하는 것이다. 참으로 범부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부처의 삶을 원하는가? 선공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참으로 깨달아 해탈하기를 바라는가 하는 것이다. 현재의 삶이 만족스럽고 즐거워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면, 현재의 삶을 벗어나 깨달음과 해탈을 향하는 선공부는 할 수 없다. 삶과 죽음에서 해탈하는 이 공부를 하려면, 현재의 삶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삶을 원해야 한다. 불교 공부란 지금 온갖 사물들과 온갖 일들에 얽매여 자유롭지 못한 범부의 삶에서 멀어지고, 해탈하여 자유로운 부처의 삶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깨달음과 해탈은 진정으로 원하고 참으로 목마른 자에게 주어지는 응답이다. 깨달음과 해탈은 자신이 방법과 노력을 통하여 성취해내는 유위(有爲)의 일이 아니다. 깨달음과 해탈은 저 가슴 깊이에서 진실로 원하는 자에게 저절로 이루어지는 무위(無爲)의 일이다. 그러므로 선공부에서 방법은 단순히 하나의 방편일 뿐이고, 참으로 공부를 이루어주는 힘은 자신의 진실한 원(願)의 힘이다. 참으로 바란다면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이다.

선공부를 하는 사람은 어떤 방법으로 공부할 것인가에 관심을 두기 보다는, 자신이 참으로 깨달음과 해탈을 원하고 진실로 부처님이 가신 길을 자신도 함께 가기를 원하는가를 늘 스스로에게 물어 보아야 한다. 지금까지 살아온 정신적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완전한 해결책을 갈구하여야 비로소 해탈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정신적인 혁명인데, 현재의 상태에 안주하고 있는 입장이라면 혁명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공부를 하는 사람은 자신이 진실로 무엇을 원하는지를 물어보면서 현재에 주저앉아 머물지 못하도록 늘 자신을 일깨워야 한다. 석가모니가 일부러 출가하여 고난을 자초한 것도 안락한 중생의 삶에 안주하지 않으려는 방편이었다.

깨달아 해탈하기를 바라면서도 아직 막혀 있다면, 자신이 할 일을 마치지 못한 사람임을 늘 상기해야 한다. 마치 큰 돈을 빚지고 갚지 못한 사람처럼 늘 부담을 지고 있어야 한다. 내가 죽기 전에 꼭 해야 하는 일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한다. 현재의 삶이 만족스럽지 못하여 개선해야 한다는 요구가 분명해야 하는 것이다. 내면에서 저절로 일어나는 개선에 대한 요구가 있어야 비로소 새로운 삶으로의 변화가 온다. 공부를 이루어 주는 가장 기본적인 힘은 바로 이러한 내적 요구이다. 세속적인 가치에 대한 욕구가 있는 사람이라면 비록 한 때 불교에 관심을 갖더라도 결국 세속적 욕구를 따라가게 된다.

진실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는 사람이라면, 깨달아 해탈해야 한다는 요구는 필생의 사업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깨달아 해탈한다는 필생의 사업을 짊어진 사람이다. 이 필생의 사업을 마치지 못했다는 부담을 늘 지고 있는 사람이 곧 선공부를 하는 사람이다.

 

◎ 뜻이 있다면 선지식을 찾아야 한다

깨달음과 해탈이라는 필생의 사업에 뜻을 둔 사람이라면, 먼저 이 사업을 도와 줄 선지식을 찾아야 한다. 가장 큰 행운은 이 사업을 이미 마친 좋은 선지식을 만나는 것이다. 좋은 선지식을 만나 그에게 의지하여 공부하는 것이 가장 쉬운 길이다. 좋은 선지식을 만나는 올바른 길은 먼저 자신이 좋은 공부인이 되는 것이다. 좋은 공부인이란 어떤 사람인가?

첫째, 가슴 속 깊이 부처님과 조사(祖師)를 믿고, 자신도 그들처럼 깨달아 해탈하고자 하는 원(願)을 가진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세속의 어떤 일 보다도 이 공부를 우선으로 삼는 사람이며, 세속의 어떤 가치 보다도 이 공부를 더 큰 가치로 여기는 사람이며, 세속의 어떤 일 보다도 이 공부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며, 세속의 일과 이 공부를 놓고 손익을 저울질하지 않고 이유없이 이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세속의 일과 공부를 놓고 어느 쪽이 더 이익일까를 따지는 사람은 이 공부를 할 수 없다.

둘째, 좋은 공부인은 상대를 헤아리기 전에 자신을 먼저 되돌아본다. 공부란 결국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바르고 진실한 자세를 가지면 바르고 진실한 결과를 얻을 것이고, 바르고 진실한 자세가 없다면 바르고 진실한 결과도 없다. 자신이 바르고 진실한 자세를 가지고 있는가를 늘 돌아보아야 한다. 자신이 아무런 삿된 욕심 없이 참으로 순수하게 오로지 깨달아 해탈할 것만 원하고 있는지를 늘 돌아보아야 한다. 바르고 진실한 자세를 가지고 있다면, 비록 잠시 삿된 가르침을 만나더라도 결국에는 바른 길로 가게 된다. 자신의 순수함은 오직 자신만이 더럽힐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자신을 먼저 돌아보아야 한다.

셋째, 좋은 공부인은 자신의 세속적인 가치관으로 선지식을 판단하려 하지 않고, 오직 선지식의 바른 법을 보려고 할 뿐이다. 그에게 바른 법이 있다면 남녀노소 신분의 상하를 막론하고 스승으로 삼아 배우려고 하는 것이 좋은 공부인의 자세이다. 겉으로 드러난 여러 모습을 헤아려 선지식을 판단하려 하면 잘못 판단할 가능성이 크다. 공부인 자신이 진실하고 삿된 욕심이 없다면 선지식의 순수하고 바른 법이 보일 것이고, 공부인 자신이 여러 가지 잡다한 세속적 관심에 의지하고 있다면 선지식의 세속적인 면만 보일 것이다. 이처럼 공부인 자신의 내면이 곧 삿됨과 바름을 가려내는 기준이 된다. 공부인의 눈이 오직 진리만 보려고 한다면, 마치 진흙 속에서 보석을 찾아내듯이 어지러운 경계 속에서 경계에 물들지 않고 법을 보게 될 것이다. 동일한 경치를 두고도 아름다움을 찾는 사람의 눈에는 아름다움이 보이고 추함을 찾는 사람의 눈에는 추함이 보이는 것처럼, 오로지 진리를 찾는 사람에게는 결국 진리가 드러나는 것이다.

넷째, 좋은 공부인은 깨달음을 원하면서도, 깨달음을 욕심내지는 않는다. 깨달음을 원하는 것은 순수한 마음이지만, 깨달음을 얻으려 욕심을 내는 것은 삿된 마음이다. 순수한 마음은 부처님의 법을 믿고 그 가르침을 따를 뿐이지만, 삿된 마음은 욕심은 내어 깨달음을 얻을 궁리만 한다. 순수한 마음은 선지식을 믿고 그 가르침을 따를 뿐이지만, 삿된 마음은 자신의 가치관이나 느낌이나 판단을 믿고 자신의 생각을 따른다. 선지식을 믿고 그 가르침만 따르는 사람은 자신의 껍질을 깨고 나와 우주와 하나가 될 것이지만, 자신의 판단을 믿고 자신의 생각을 따르는 사람은 언제까지나 자신의 좁은 틀 안에 갖혀 있을 것이다.

 

◎ 삿된 공부를 조심하라

순수한 바람을 가지고 좋은 선지식을 만나 의지하였다면 공부의 절반은 성공한 것이다. 이 공부를 일생의 일로 삼아 물러나지 않고 꾸준히 한다면, 때가 되면 반드시 깨달아 해탈할 것이다. 다만 피해야 할 삿된 길들이 있다. 어떤 것들이 삿된 공부인가? 불법이라는 어떤 경계나 경지가 따로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 삿된 공부이다.

첫째, 법의 모습을 그려 보는 것이다. 경전이나 선지식의 말씀을 많이 읽고 듣고 열심히 궁리하여 이해한 것이 곧 법의 참된 모습이라고 여겨서는 안된다. 많은 사람들이 그럴듯한 법의 모습을 그려서 나타내고 앞뒤가 맞는 이치를 말하는 것을 공부로 삼고 있지만, 이들은 다만 자신의 분별망상 속에서 헛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일 뿐이다. 깨달음은 헤아려 볼 수 없고 해탈은 불가사의하다. 아무리 그럴 듯이 이해한다고 하여도 여전히 이해일 뿐이지 깨달음도 해탈도 아니다. 그러므로 법은 무념(無念)이요 무상(無相)이라고 하는 것이다.

둘째, 무슨 특별한 것을 얻었다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허망한 분별망상이 쉬어지는 것일 뿐, 따로 얻을 참된 실상은 없다. 보통 사람이 가지지 못한 어떤 특별한 능력을 얻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중도(中道)에 선 불자가 아니라 경계(境界)에 집착한 외도이다. 경전과 조사들이 늘 말씀하시듯이 법은 무엇을 얻거나 내버리는 취사선택의 길이 아니다.

셋째, 유무(有無)의 양쪽에 떨어지는 것이다. 불법은 불이법(不二法)이다. 있음과 없음 혹은 항상됨과 끊어짐의 둘을 나누는 이분법(二分法)은 범부나 외도의 법이지 부처님의 법은 아니다. 자나깨나 항상되어 변함없이 있는 경계에 머물러 있다든지, 언제나 텅비어 사라져 아무것도 없는 경계에 머물러 있는 것은 범부나 외도이다. 불도는 불이(不二)의 중도(中道)요 머묾 없는 무주(無住)이다.

넷째, 방편을 오해하여 진실이라 여기는 것이다. 경전과 어록에 있는 부처님의 말씀과 조사들의 말씀은 전부 병에 따라 약을 쓴 것들로서 방편으로 하신 말씀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병이 나으면 건강은 본래 스스로에게 있는 것이고 약은 필요 없다. 체온이 낮으면 체온을 높이는 약을 쓰고 체온이 높으면 체온을 낮추는 약을 쓰지만, 체온을 높이는 것이 곧 건강이라거나 낮추는 것이 곧 건강이라고 오해하면 안된다. 방편은 어긋남을 바로잡는 기능을 할 뿐이지, 바른 길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바른 길은 본래 스스로에게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출처 : 무심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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