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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열전
2019.12.31 16:25

51. 한국편 - 효봉선사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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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효봉(曉峰)선사

(5) 용맹정진(勇猛精進)

서른여덟에 중이 된다는 것은 불가(佛家)에서 흔히 말하는 <늦깎이>이다. 스님은 남보다 늦게 출가(出家)한 사실을 자각하고, 남들이 쉴 때도 쉬지 않고 잠잘 시간에도 자지 않고 분발하여 일로정진(一路精進)에만 애썼다. 그 후 여름과 겨울을 보운암(普雲庵)에서 지내고 나서 이듬해 여름에는 제력(諸力)의 선지식(善知識)을 친견(親見)키위해 걸망 하나를 메고 행각의 길에 나섰다. 남(南)과 북(北)으로 두루 다녀보았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결국 불가(佛家)의 공부는 남의 말에 팔릴 게 아니라 내 스스로가 실참실오(實參實悟)해야 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이듬해 다시 금강산(金剛山)으로 돌아왔다. 아무런 미련도 없이 얽힌 세정(世情)을 끊고 뛰쳐나온 스님에겐 생사(生死)의 고뇌에서 해탈하는 일만이 지상(至上)의 과제였다. 용맹심을 일으켜 화두(話頭)를 타파해야겠다는 일념(一念) 뿐이었다.

화두(話頭)란 옛 조사(祖師)들의 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참선하는 이가 참구(參究)해야 할 과제를 말한다. 스님은 <趙主無字(조주무자)>로서 평생 화두를 삼았다. 그리고 남에게 화두를 일러 줄 때에도 누구에게나 한결같이 이 무자(無字) 화두를 일러주곤 하였다. 중국과 우리나라를 통해서 이 무자(無字) 화두만큼 공부하는 이의 눈을 많이 띄워준 화두가 없다고 하였다.

1927년 여름 신계사(神溪寺) 미륵암(彌勒庵)에서 안거(安居)에 들어갈 때 스님은 미리 대중(大衆)에게 알렸다. “저는 반야(般若)에 인연이 짧은데다가 늦게 중이 되었으니 한가한 정진은 할 수가 없습니다. 입방선(入放禪)도 경행(經行)도 하지 않고 줄곧 앉아서 배기겠습니다" 이렇게 대중에게 통고하고 나서 스님은 꼬박 한철(석달) 동안을 하판(아랫목) 뜨거운 자리에 앉아 정진했다.

한번은 공양 시간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엉덩이에 무언가가 달라붙는 게 있어 돌아보니 엉덩이 살이 헐어서 그 진물이 흘러 중의와 방석이 달라붙어 있었다. 살이 허무는 줄도 모르고 화두일념(話頭一念)에 미동(微動)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가히 위법망구(爲法妄軀)의 정진이었다.

목욕할 때면 그때의 흉터가 커다랗게 나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스님은 그 뒤부터 더운 방을 싫어하였다. 스님과 함께 방을 쓰면 우리는 늘 추워서 골탕을 먹었다.

(6) 개오(開悟)

스님은 금강산에 있는 선원(禪院)을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용맹스럽게 정진을 계속했다. 밤에는 눕지 않고 앉은 채 공부하고, 오후엔 먹지 않았다[불가(佛家)에서는 원칙적으로 하루 두 끼만 먹고 오후엔 불식(不食)이다]. 한번 앉으면 절구통처럼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서 이때부터 <절구통 수좌(首座)>라고 별명이 생겼다.

중이 된지 다섯 해, 아직도 깨달음을 맺지 못한 스님은 초조했다. 자신(自身)의 두터운 숙세(宿世)의 업장(業障)과 무능을 한탄했다. 대중이 여럿이 거처하는 처소에서는 마음껏 정진(精進)하기가 어려웠다.

스님은 생각하던 끝에 토굴(土窟)을 짓기로 했다. 곳은 금강산 법기암(法起庵) 뒤. 구조는 단칸방. 한구석에 대소변을 볼 수 있는 구멍을 뚫어 밖으로 내고, 밥이 들어올 수 있는 조그만 창문 하나만을 내었다. 그리고 스님이 방에 들어앉은 뒤 밖에서 벽을 발라버리도록 일렀다.

1930년 늦은 봄, 스님의 나이 마흔세 살 때, 깨닫기 전에는 죽어도 다시는 토굴 밖에 나오지 않으리라 맹세를 하고 토굴에 들어갔다. 그것은 결사적인 각오였다. 그때 가지고 들어간 것은 입은 옷에 방석 석장뿐. 하루 한끼씩 공양을 들여보내 줄 것을 당부했다.

이제 스님에겐 기쁨도 슬픔도 편하고 괴로움도, 먹고 입고 자는 일도 다 아랑곳 없었다. 오로지 무자 화두(無字 話頭)를 타파하기 위한 용맹정진이 있을 뿐이다. 일체 인간의 풍속권(風俗圈) 밖에서 살아가게 되었다.

암자(法起庵)와 토굴과의 법래(法來)는 하루 한끼씩 공양을 토굴 안으로 들여 주는 일, 그날 빈 그릇을 챙기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 주는 일뿐이었다. 인기척 없는 토굴 안, 그 전날 밥그릇이 비어 있는 걸 보고 살아 있다는 것을 짐작 할 따름, 밖에서는 토굴 안의 동정(動靜)을 전혀 알 길이 없었다. 이렇게 여름이 가고 가을이 지나고 겨울 지나갔다.

그리고 새봄. 하루는 시자가 공양(供養)을 가지고 가니 그 전날 놓아둔 공양이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스님, 왜 공양을 안 드셨습니까?" 이 소리에 스님은 비로소 어제의 공양이 창구(窓口)에 있는 것을 의식했다. 그 전날부터 공양이 온 줄도 모르고 선정삼매(禪定三味)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1931년 여름, 비가 개인 어느날 아침. 드디어 토굴 벽이 무너졌다. 일년 육개월만에 토굴에 들었던 스님이 벽을 발로 차 무너뜨리고 나온 것이다. 필사적인 정진 끝에 열린 바가 있었다. 더 의심할 것 없이 이만하면 나가도 되겠다는 신념(信念)이 생긴 것이다.

스님은 발을 떼 놓지 못했다. 일년 반만에 걷는 걸음이라 어린애처럼 비틀비틀 걸음마를 해서 나왔다. 머리와 수염은 덥수룩하게 길었고 손톱과 발톱은 일년 반을 자랐다. 그 사이 세수 한번 하지 않았는데도 얼굴만은 환하게 빛났었다고 한다. 그때의 심정을 글로 읊었다. 그것은 오도송(悟道頌)이었다.

바다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

타는 불속 거미집엔 고기가 차 달이네

이 집안 소식을 뉘라서 알랴

흰구름은 서쪽으로 달은 동쪽으로.

 

무비 스님

 

[출처 : 염화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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