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보조지눌(普照知訥) ① ‘韓國禪’ 확립한 고려불교의 巨峰 (1) 시대적 배경
예종까지의 융성기를 지나 고려를 변란의 와중으로 몰아넣기 시작한 인종조의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은 지눌이 태어나기 각각 32년, 23년 전의 일이었으며, 의종 말 명종 초 일어난 정중부, 이의방을 중심한 이른바 무신의 난은 그의 나이 13세 때의 일이었다. 그 후 계속되는 무신들간 권력으로 서로를 모략하고 살육하는 정변의 와중에서 지눌은 성장기의 대부분을 보냈으며, 명종 26년 최충헌이 무신 상호간의 투쟁에서 승리하여 강력한 세습정치를 하기는 그가 38세 때의 일이었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불교는 上求菩提 下化衆生하는 종교 본연의 위치를 잃어갈 수밖에 없었다. 본래 고려불교는 태조 이래 왕실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그러므로 왕실이 정치적인 혼란에 휩쓸릴 때 불교는 초연할 수 없었다. 때로는 승려들이 직접 무력적인 행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명종 4년 왕실파의 입장에 서 있던 승려들이 정중부 토벌운동에 앞장서 백여 명의 승려가 희생당한 것은 그 좋은 예이다.
이렇게 승려들이 현실정치의 소용돌이 속에 휩쓸리는 가운데 고려불교는 종교적 위치를 크게 벗어나 승려의 기강이 극도로 문란해질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궁중의 옹호를 받은 불교는 납세의 의무를 면제받은 특혜를 이용, 토지와 농노를 겸병하고 노비를 사유하여 사원을 利窟化(이굴화)하는 폐단도 없지 않았다.
이렇게 궁중불교로 정치적 와중에 휩쓸리고, 승려의 기강이 해이되어 정법과 멀어진 것이 지눌 당시 고려 불교가 안고 있는 외적인 문제였다면, 불교 내적으로도 또한 선과 교가 대립, 갈등하고 있었다. 이는 고려 불교가 안고 있는 또 다른 문제였던 것이다.
敎外別傳 不入文字 直指人心 見性成佛의 종지를 가진 선이 신라 말에 전래되어 고려 초까지 9산선문을 형성하면서 발전하게 되자, 재래의 敎佛敎와 갈등을 일으키게 되었다. 불립문자를 내세우는 선이 경전을 중심으로 하는 교불교와 마찰을 일으킴은 필연적인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지눌보다 100여년 앞서 살았던 대각국사 의천의 화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교간의 대립, 갈등은 지눌 당시에도 여전하였다. 이러한 상황 상황에서 선·교를 회통시켜 내적인 갈등을 극복하고 정법을 구현하는 일은 당시 고려불교가 요청하는 시대적인 과업이었다. 지눌은 이러한 시대적인 사명을 자각하고 한국불교를 바로잡는 일에 헌신하게 된다.
불타와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그러했고, 예수의 마지막이 또한 그랬다. 보조국사 지눌의 생의 마지막 장면 또한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가를 잘 보여준다. <佛日普照國師碑銘>에 의하면, 그는 타계하던 날 새벽 목욕재계하고 법당에 올라가 향을 사르고 큰 북을 쳐 송광사내 대중을 법당에 운집시켰다.
그리고는 육환장을 들고 법상에 올라 제자들과 일문일답으로 자상하게 진리에 대한 대담을 계속하였다. 마지막으로 한 제자가 “옛날에는 유마거사가 병을 보이었고 오늘은 스님께서 병을 보이시니 같습니까, 다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같은가 다른가 하는 질문은 선가에서 진리를 시험해 보는 질문이다. 임종이 가까운 스승께 이렇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것은 오직 진리의 세계에서만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여기에 대하여 지눌은 육환장을 높이 들어 법상을 두어 번 내리친 다음 “일체의 모든 진리가 이 가운데 있느니라”하고는 법상에 앉은 채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이때가 1210년 3월 27일, 그의 나이 53세였다. 그이 생의 마지막 장면은 최후의 순간까지 제자들과 진리에 대한 가르침으로 일관한 불타의 入滅을 연상케 한다. 그는 진리 속에 살다가 진리 속에 간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다.
그의 생애는 41세 때(1198) 지리산 上無住庵에서의 깨침을 중심으로 그 이전과 이후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이전의 생애가 고려불교의 타락상에 대한 깊은 인식과 그를 바로잡으려는 정열이 깨침(覺)을 향한 줄기찬 정진으로 승화된 기간이었다면, 깨침 이후의 삶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정법을 펼친 자비의 실천 기간이었다.
전기에 의하면 국사의 휘는 知訥이며 자호는 牧牛子였다. 황해도 서응군에서 태어났고 속성은 鄭씨로 국학의 學正인 光遇의 아들이다. 佛日普照國師는 입멸 후 희종으로부터 받은 시호이다. 그는 어려서 입산하여 25세에 僧選에 합격하였다. 당시 승선은 승려의 과거제도로 그의 합격은 출세의 관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승선에 합격한 젊은 지눌은 생의 일대전환을 결심하기에 이른다. 당시 서울인 개경을 떠나 남하하여 깨침을 향한 정진에 몰두한다. 전남 창평 청원사에서 그의 일생에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六祖壇經>을 읽다가 깊은 종교적 체험을 한 것이다. 이 체험은 지눌의 구도열을 더욱 굳게 하였다.
3년 뒤 하가산 보문사에서는 선과 교가 계합하는 것을 찾기 위하여 3년간 대장경을 열람하였다. 여기서도 우리는 구가 선교의 융회를 위하여 얼마나 진지하게 탐구하였는가를 잘 볼 수 있다. 마침내 그는 李通玄의 <華嚴論>에서 선교가 둘이 아님을 확신하고 “세존의 입으로 설한 것이 교요, 조사가 마음으로 전한 것이 선”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이는 당시의 불교를 일선하려는 큰 혁신운동이었다. 그의 깨침을 향한 피나는 정진은 드디어 41세 때 완성되었다.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大慧語錄>을 읽다가 “선정은 고요한 곳에도 있지 않고 또 시끄러운 곳에도 있지 않으며 날마다 반연에 응하는 곳에도 있지 않고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에도 있지 않다. 그러나 먼저 고요한 곳이나 시끄러운 곳이나 날마다 반연에 응하는 곳이나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을 버리고 참구하지도 말아야 한다. 만일 갑자기 눈이 열리면 비로소 그것이 집안일임을 알 것이다”하는 구절에서 크게 깨친 것이다.
이제 그의 영향력은 세계 사상계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근래 지눌사상을 주제로 한 박사학위 논문이 미국에서 3편 일본과 대만에서 각각 1편이 나오고 있음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무비 스님
[출처 : 염화실] |
고승열전
2019.12.26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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