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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승의제상품(勝義諦相品) (24)

 

오늘은‘선현의 생각’할 차례입니다.

지난 시간에 37도품 또는 37조도품에 대한 공부를 했는데, 여기에 대한 내용은, 공부하는 스님들이 각자 자기가 수행하는 수행법에 의해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기별을 하는 것을 표현하는 얘기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수보리 선현의 생각은 어떤가 한 번 들어보죠.

 

世尊,

我見彼已,便作是念.

此諸長老,依有所得現觀,

各說種種相法,記別所解.

當知彼諸長老,一切皆懷增上慢,爲增上慢所執持故,

於勝義諦 遍一切一味相,不能解了.

 

세존이시여!

저는 그들을 보고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저 장로들은 얻은 바 현관(現觀)에 의하여 각기 갖가지 상법(相法)을 말하고 그 깨달은 바를 기별하는구나.’

또한 저 장로들은 모두 다 증상만을 품고 증상만에 깊게 집착한 까닭으로

승의제의 일체에 두루하는 한맛[一味]의 상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현관(現觀)’이라는 것은 자기가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하듯이

관찰해서 깨닫는 것을 얘기하는 겁니다.

여기서 상법(相法)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모양[相]이죠. 우리가 공부했던대로 보면 상법에는 오온(五蘊)이 있고 십이처(十二處), 십이연기(十二緣起), 사식(四食), 사성제(四聖諦), 팔정도(八正道), 사념주(四念住), 사정단(四正斷), 사신족(四神足), 오근(五根), 오력(五力), 칠각지(七覺支), 이렇게 많습니다.

이렇게 많은 것을 각 장로들이 누구는 오온을 공부해서 깨달은 분이 계시고 누구는 십이처, 십이연기, 사식...... 이렇게 해서 깨달은 바가 있다는 것을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본문에 뭐라했느냐 하면,

‘증상만을 품고 증상만에 깊게 집착한 까닭으로

승의제의 일체에 두루하는 한맛[一味]을 모른다’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위에 나열한 것은 수행법, 요즘 말로하면 명상법이죠. 깨달을 수 있는 명상법이 이렇게 많은데 자기가 깨달은 것에만 집착하고 최고인줄 아는 거예요. 그게 증상만(增上慢)인데, 증상(增上)이라는 것은 기존에 있는 위에 본래 없는 것을 하나 더 올리는 거죠. 그래서 그것이 진짜인양 착각을 하는 거죠.

 

예를 들어서 말씀 드리죠. 요즘 보면 다이어트법이 굉장히 많대요.

한방다이어트, 무슨 다이어트 해서 굉장히 많은데, 어떠한 다이어트를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살 빼는 데 목적이 있는 거 아닙니까?

그렇죠? 이렇게 살 빼는 데도 다양한 방법이 있듯이 깨달아가는 데도 이렇게 다양한 방법이 있단 말이에요. 그렇게 생각하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그러는 거예요.

‘내가 그 방법을 쓰니까 살이 잘 빠져, 그게 최고야.’

다른 사람은‘아니야, 이것이 최고야.’

이렇게 서로가 주장할 수 있는 것이죠. 알고 보면 결론적으로 똑같은데도 불구하고 방법에 집착해가지고 그것이 제일 났다고 얘기하면 그게 증상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어떠한 수행방법을 얘기 하더라도 끝에 가가지고 깨달음은 똑같은 거거든요.

그래서 원효스님께서「범망경보살계본사기(梵網經菩薩戒本私記)」에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성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길은 수없이 많지만 들어오면 다 하나가 되는 거죠.

그래서 원효스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불교수행에는 사마타[止]와 위빠사나[觀] 둘 밖에 없다는 거죠.

이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하는 이것 밖에 없는데 (성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길이 수없이 많아도 사마타와 위빠사나, 이 두 가지 방법 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방법을 따라서 들어오면 다 하나가 된다, 어떠한 길을 와도 상관없다, 모습만 다르지 기본원리는 사마타와 위빠사나라는 걸 얘기를 하는 거예요. 이 성은 열반의 성입니다.

앞에 상법에서 열거한 많은 수행법이 있지만 전부다 사마타와 위빠사나에서 안 벗어납니다.

 

그래서 각 장로들이 자기마다 다르게 수행해서 깨달았다고 하지만

방법상에 집착하면 안 되죠. 어떠한 방법을 쓰더라도 깨달음에 이르는 것은 똑같은 거죠. 이것을 한맛, 일미(一味)라고 얘기 합니다.

깨달은 내용이 일미입니다.

 

선가에서는 최고의 경지를 한맛으로 돌아간다, 일미선(一味禪)이라고 합니다. 음식 맛이라든지 그런 맛을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여기서 얘기하는 게 그런 겁니다.

‘일체에 두루하는 한맛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장로들은 그걸 모르고 자기가 공부했던 것만 최고라고 하지만 이것을 다 공부해가지고 귀결되는 것은 깨달음이고 그것은 한맛[一味]이라고 얘기를 하는 거죠.

 

그러면 한맛[一味]에 대해서 공부를 조금 해 봅시다.

진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하나라는 것은 이것과 저것이 경계가 없는 것을 말 하는 겁니다. 한맛이란 일미평등(一味平等)을 얘기합니다.

평등을 한맛이라고 얘기하는 거죠.

부처님이 깨달으신 내용은『금강경』에도 얘기 했듯이 고하가 없이 평등한 것을 바른 깨달음이다,

『화엄경』에도 중생과 부처와 마음은 차별이 없이 평등하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솔직하게 한 번 얘기를 해 보십시오.

여러분 하나 맞습니까? 아니죠?

우리가 살다보면 부부싸움도 곧잘 하죠?

부모자식 간에도 서운해지는 게 있죠?

형제간에도 싸우죠? 친구 간에는 어떻습니까?

서로가 너 나를 갈라놓고 싸운다는 겁니다.

그게 왜 그러냐 이거죠.

진리가 분명히 하나라고 했는데 왜 너 나가 갈려서 싸우느냐 이거죠.

 

자 보십시오.

괴로움[苦]이 일어나는 것은 너 또는 나로 나눠진 거죠. 그러니 고통이 온단 말이에요. 너 나 싸우는 고통이 어디서 오느냐 하면 번뇌에서 옵니다. 번뇌라는 것은 내 생각이 옳고 너는 틀렸다, 나는 잘났고 너는 못났다, 나는 나고 너는 너다, 이런 거죠. 그런 번뇌 뒤에는 자아가 있고, 그 뒤에는 진리가 하나인 줄 모르는 무명이 자리 잡고 있어요.

고통은 감각에서 오는 거고

번뇌는 의식상에서 일어납니다.

자아는 말나식[잠재의식]에서 오고

그리고 무명은 아뢰야식[무의식]에서 옵니다.

 

제가 한 번 물어보죠.

최초에 너와 나를 가르는 경계선은 언제 생긴 겁니까?

여러분 결혼 초에는 서로가 좋았죠. 그렇게 점점 살다보면 이가 안 맞듯이 부딪치기 시작하죠. 그러면 현재 부딪치는 것을 거슬러 올라가면 언제 너와 나 사이에 경계선이 그어진 겁니까?

과거 맞습니까? 과거에 벌써 그리 된 거예요? ㅎㅎㅎ

과거는 지나가서 없습니다. 미래는 오지 않아서 없습니다.

경계선은 언제 그었느냐 하면, 현재 한 생각이 탁 일어나는 순간 선이 착~ 그어지고 너 나가 분리되는 겁니다.

 

그런데 현재 일어나는 생각만 그런 줄 압니까?

느낌, 딱~ 보는 순간 느낌이 오죠. 느낌이 오면 선이 착~ 그어집니다, 감정도 마찬가지고. 그러니까 생각이든 느낌이든 감정이든 마음이 일어나면 벌써 선이 착~ 그어지는 거예요.

 

너나가 없는 도리, 한맛의 세계, 일미평등의 세계로 가려면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으면 되요.

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되려면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됩니다.

보고 듣고 하는 매순간 선이 그어지는 겁니다. 최초의 선은 과거에 그어진 게 아닙니다. 우리는 윤회해 왔으니까 과거에 그어졌다? 그런 거 없습니다.

진실을 말하자면 현재 순간이에요.

거기서 더 깊이 들어가면 현재 일어나는 감각 의식 이런 것들이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고 잠재되어 있는 말나식에 영향을 받고 말나식 그 이면에는 아뢰야식이라는 무의식이 있는 겁니다. 이 무의식 속에는 상상할 수 없는 정보[種子]가 있는 거죠. 이것하고도 관련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수행을 하면 제일 처음에 감각부터 관찰해 가는 거죠.

감각을 넘어서 의식의 영역에 들어가죠. 의식에 들어가서 탐진치만의견(貪瞋癡慢疑見), 여섯 개의 근본 번뇌가 없어지면 또 들어갑니다. 계속 미세하게 들어가다 보면‘나’라고 하는 자아(自我)가 잠재해 있는 말나식에서 일어난 것을 알게 되고, 이것을 타파하면 아뢰야식에 들어가고 무명(無明)이라는 것을 만나는데, 여기에서 세 가지 모습이 있는 거죠.

하나는 경계의 모습[境界相],

하나는 능히 보는 모습[能見相]이고,

그 다음에 업의 모습[業相]이라는 게 있습니다.

이때 아뢰야식에 들어와서 경계의 모습[境界相]을 발견했을 때,

‘아, 경계라는 게 아뢰야식이구나.’눈에 보이는 이 게 전부다 내 마음이 투사된 세계라는 것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겁니다.

여기서 조금 더 들어가 보니까 눈에 보여 지는 대상도 내가 대상을 봄[能見相]으로 해서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는 거예요.

그 다음에 업상(業相)이라는 게 주관과 객관이 나눠지기 이전의 상태, 주객미분(主客未分)이 업의 모습인데, 마음이 딱 한 번 움직였어요.

그러니까 주관이 생기고[能見相] 객관계가 생기면서[境界相] 여기서 심식이 쫘악~ 일어나는 거예요. 생각이 일어나버리는 거죠.

그래서 업의 모습[業相], 최초의 한 생각이 일어나는 이전은 뭐냐 하면 진리가 하나인 줄 모르는 근본 무명이 있습니다. 그것이 타파되면 부처님 경지에 올라가는 거죠.

 

「대승기신론」에서 이 얘기를 하는데요,

각심초기(覺心初起) 심무초상(心無初相)이라 그랬어요.

마음이 처음으로 일어나는 것을 깨달으니까 마음에는 최초의 모습이 없더라, 이런 얘기에요. 이 말은 애초 처음부터 경계선을 긋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거죠.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무지에 의해서 일어나는 겁니다.

 

그럼 이런 경계선을 긋는 무명이 왜 생기느냐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개인과 개인, 단체와 단체, 국가와 국가, 이렇게 대립하고 싸우잖아요. 이렇게 싸우는 게 밖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고 이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생각, 이 생각에서 다 그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벗어나는 게 중요한데, 딱 벗어나면 각심초기(覺心初起) 심무초상(心無初相)하면 벌써 일미(一味)의 세계가 나오는 거죠.

 

한맛을 다른 말로하면 연기(緣起), 분리되어 있지 않다, 득실이 없고 조작이 없는 것, 관계성을 갖고 있으니까 개체에 자아가 없는 것, 무아(無我)고 실체가 없으니까 공(空),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니까 중도(中道), 『화엄경』의 말씀을 표현하면 무경계(無境界), 저 자리는 그런 자리에요. 일미라는 게 그런 겁니다.

한 생각이 일어나면 이 세계가 펼쳐진다는 걸 아셔야 되요.

이 세계가 전부다 마음이 바깥으로 투사된 세계라는 걸 잊지 말아야 됩니다. 환영의  세계입니다. 거기에 집착하면 안 되는 거예요.

 

是故,世尊甚奇,

乃至 世尊善說.

謂世尊言, 勝義諦相 微細最微細,

甚深最甚深難,

通達最難通達,遍一切一味相.

 

이러한 까닭으로 세존께서는 매우 기이하시며

나아가 세존께서는 잘 말씀하셨습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신대로 승의제의 모습은 미세하고도 매우 미세하며,

매우 깊고 가장 깊으며,

통달하기 어렵고 가장 통달하기 어려운 일체에 두루 하는 한맛의 상입니다.

 

한맛의 상, 하나의 모습인데,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없으면 남이 없어요. 그러면 너 나가 없으면 구별할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렇지만 여러분들은 매순간 보고 듣고 하는 데서

‘내’라는 것을 느끼잖아요?‘내’라고 생각하죠,‘내’라는 감정이 있죠, 이러면 선이 쫘악~ 그어지는 거죠. 그래서 일미라는 게 진짜 어렵고 통달하기 힘든 거예요.

 

선정을 통해서 마음이 고요해지면 하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죠.

그리고 지혜가 열리면 확실하게 깨달음이 오는 겁니다.

 

世尊,

此聖敎中,修行苾芻,

於聖義諦 遍一切一味相,尙難通達,

況諸外道.

 

세존이시여!

이 성스러운 가르침 가운데 수행하는 비구[苾芻]들도

승의제의 일체에 두루 하는 일미의 모습을 통달하기 어려워하는데

하물며 저 외도들이겠습니까?”

 

우리 스님네도 수행하는 데 있어서 한맛을 체험하기가 이렇게 어려운데, 바깥에서 진리를 구하는 외도들은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겁니다.

 

무엇이든지 자기를 근거로 하면 남[他]이 있고, 남이 있으면 모든 것이 분리되어 버립니다. 이런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여러분 아셔야 됩니다. 항상 우리는 자기 감정, 느낌, 생각을 살필 줄 알아야 되요. 그래서 수행하는 사람은 자기를 되비춰볼 거울이 하나 생겨야 되요. 그래야만이 너 나가 분리된 세계에서 벗어나죠. 우리는 본래 하나에요. 너 나가 분리되는 매순간순간 일어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고, 그것은 뒤 깊숙이 보이지 않는 무의식 속에 있는 수많은 정보[種子], 이것이 자기에게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아셔야 됩니다.

 

오늘은 이만 마치겠습니다.

 

[출처] 42. 승의제상품(勝義諦相品) (24) |작성자 byunsd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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