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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경]  1


염관음(念觀音)·염미타(念彌陀)

관음염불이 곧 아미타 염불

『천수경』은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이 천수천안관세음보살에 대해서 말하는 경전이다.
그런 까닭에, 『천수경』을 독송하고 신앙한다는 것은 곧 관세음보살을 신앙하는
일이 된다. 관세음보살 염불이 『천수경』 신행의 중요한 프로그램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하나의 대상에 믿음을 지극히 한다는 것은 다른 대상에 대해서는
배제하려는 마음이 생기기 쉽다.

관세음보살을 염해 가면서 아미타불에 대한 믿음을 갖고 염불하려는
마음이 옅어지는 것이었다.

내가 어디에서고 공개적으로 말한 것은 아니지만, 내면 속에서는
이런 갈등이 없지 않았다는 말이다.

만약 이러한 태도를 올바른 것으로 유지하게 된다면, 어느 덧 우리는 종파적·
독단적 관점을 취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평소 회통(會通)을 추구하는 내 기본입장과 맞지 않게 된다.

어떻게 해야 관세음보살에 대한 신앙을 하면서도 아미타불 신앙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우리나라에서 편집된 ‘독송용 『천수경』’의 성립 과정을 살펴볼 때, 그 상한은 신라의
의상(義相, 625∼702)스님에게까지 소급된다.

의상스님은 화엄종의 창시자로서만이 아니라 『천수경』 신행의 입장에서 볼 때에도
매우 중요한 통찰력을 남겨주신 스승의 한 분이다.

그런데, 이 분이 관음성지인 낙산사를 창건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토신앙에 입각하여
부석사를 창건하셨던 것이다.

왜 의상스님은 관세음보살 신앙과 아미타불 신앙을 함께 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할 수 있게 된 논리적 근거는 무엇이었던 것일까?

신라 때도 관음신앙 유행

물론, 『무량수경』에서는 관세음보살을 아미타불을 모시는 존재로서 그리고 있고,
그러한 영향은 『천수경』에도 그대로 전달되고 있다.

‘원본 『천수경』’ 에서 관세음보살은 “지극한 마음으로 나의 이름을 염하고,
또한 마땅히 나의 스승(本師) 아미타불을 오롯이 염해야 한다”라고 하신다.

이러한 가르침에 따라 ‘독송용 『천수경』’은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우기 전에
“나무본사아미타불”을 염하고 있으며, “아미타불 속히뵙기 원하옵니다

”(원아속견아미타)라고 서원도 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관세음보살과 아미타불의 관계는 제자와 스승의 관계이며
시봉(侍奉)하는 자와 시봉 받는 자의 관계임을 알게 된다.

그런데 이와같은 이해에는 아직 두 분 사이에 계급이 존재하게 되어서,
관세음보살을 열심히 믿는 신자들에게는 못내 섭섭한 마음이 없지 않게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계기를 나는 작년 봄 일본 천태종의 원진(圓珍, 814∼891)스님을
통해서 만나게 되었다.

원진스님은 “천수경의 비밀을 말하다”라는 뜻의 책, 『천수경술비초』를 남겼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 책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불행 중 다행으로 단 한 줄이 전할 뿐이다.

“불공(不空) 삼장이 말씀하신 것처럼, 관세음보살을 서방정토에서는
무량수불이라고 말한다.…관음과 미타는 한 몸이면서 두 부처님인 까닭이다.”

관음-미타는 한 몸의 두 부처님

참으로 비수와 같은 말씀이고, 충격적인 말씀이었다.

그렇다. 관음과 미타는 같은 부처님이다.

기실, ‘원본 『천수경』’에서도 이미 관세음보살을 ‘정법명여래(正法明如來)’라고
하지 않던가. 이렇게 나는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염불이나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염불이나 모두 차별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함께 할 수 있는 것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관세음보살” 염불과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모두 수행하든지, 아니면
그 어느 하나를 수행하더라도 공히 두 부처님을 함께 염하는 것이나 다름없게 된다.

두 분이 곧 한 부처님이기 때문이다.

 

[천수경]  2


우리가 관세음보살을 도와야 한다

천수경』 강의를 법보신문에 연재했던 것은 내 나이 약관 삼십대 초반의 일이었다.

그래서 아쉬움이 없지 않다.

반드시 학문이 연륜과 정비례하는 것이 아닐지 몰라도 내 경우에는 세월이 흐르면서
이해가 더욱 깊어지고 있는 것 같다.

『천수경』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 하나의 예가 『천수경』을 『백화도량발원문(白華道場發願文)』과
심도 있게 연결시키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신라의 의상(義相, 625∼702)스님은 『백화도량발원문』이라는 글을 남기고 있다.

우리말로 옮겼을 때 3페이지에 지나지 않는 짧은 분량인데,
그 일부에 다음과 같은 발원이 있다.

“…제자 역시 관세음보살님을 정대하오니 / 십원육향,
천수천안과 대자대비는 / 관세음보살님과 같아지며 / 몸을 버리는 이 세상과
몸을 얻는 저 세상에서 / 머무는 곳곳마다 / 그림자가 물체를 따르듯이
언제나 설법하심을 듣고 교화를 돕겠습니다.…

”(졸저, 『해설로 읽는 우리말 법요집』, 민족사) “십원육향, 천수천안과 대자대비”라는
표현에서 이 발원문이 『천수경』적 관음신앙에 입각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십원육향은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속지일체법∼자득대지혜”를 가리킴.)

그런데, 나는 이 『백화도량발원문』을 처음 읽으면서 놀라움으로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는 “관세음보살이 우리를 돕는다”가 아니라

“우리가 관세음보살을 돕는다”는 생각이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분명 종래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관음신앙에 대한 문법을 깨뜨려 놓기에
충분한 것이 아닌가. 실제,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에 의하면, 무슨 소원이든지
관세음보살님의 이름을 일심으로 일컫는다면 모든 원이 다 이루어진다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관세음보살을 돕는다니…. 가히 혁명의 선언이 아닐 수 없었다.

자비행이 관음보살 돕는 일

여기서 우리는 선재동자가 관세음보살을 찾아가서 나눈 『화엄경』 입법계품의
대화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보살행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은지를 묻는 선재에게 관세음보살은
“자비를 실천하라”고 대답하시고 있는 것이다.

사실, 자비를 실천하는 것은 바로 관세음보살 자신의 일인 것이다.

따라서 자비를 실천한다는 것은 곧 관세음보살의 일을 도와드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관세음보살님은 어찌하여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

중생들로부터 오는 SOS(구조요청)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며, 일손이
부족한 까닭에서이다.

생각해 보라. 관세음보살님은 얼마나 힘드실까!

그래서, 이제 “십원육향, 천수천안과 대자대비는 관세음보살님과 같아지기”를,
즉 관세음보살이 되고자 발원하는 천수행자들은 관세음보살님을
도와드려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자비실천이야말로 바로 『화엄경』에서 말하는 보현행원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관음행원이 곧 보현행원이다.

관음행원이 곧 보현행원

이러한 까닭에 화엄종의 창시자인 의상스님이 보기에 『천수경』이 중요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천수경이야기』(1992) 출판 이후, 다시 『천수경』을 강의하는
기회들이 더러 있었다.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먼저 이 『백화도량발원문』의 의미부터 해석해왔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관음신앙을 한 단계 성숙시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근래 나는 『백화도량발원문』을 지은 의상스님과 거기에 주해를 덧붙여
『백화도량발원문약해』를 저술한 체원(體元, 14세기)스님 이후에 정확히
관음신앙을 그와같이 이해하고 계신 선지식 한 분을 만날 수 있었다.

바로 광덕(光德) 스님이셨다. 그 분은 지금 여기서 말하는 바와 정확히
같은 의미에서 『천수경』의 관음행원과 『화엄경』의 보현행원을 일음(一音)으로
파악하고 계셨다. 「천수경 이해를 통해서 본 광덕의 회통불교」(『종교연구』29집,
2002)라는 내 논문은 그런 만남의 즐거움을 토로한 내 신앙고백이다.


[천수경] 3

다라니는 번뇌 없애는 ‘의미 없는’ 도구

하나의 책이 마땅히 존재해야 할 이유는 다른 책들에는 없는 그 나름의 새로움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이런 기준을 나의 『천수경이야기』에 적용시켜 본다면, 무엇보다도 다라니의
의미를 번역하지 않고 있다는 데에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야….” 이러한 다라니는 얼른 들어서 그 뜻이
이해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은 그 의미에 대해서 의문을 갖게 되고, 또 알고자 한다.

다라니를 다시 산스크리트로 복원한 뒤, 그로부터 그 의미를 찾아내는
방법을 학자들은 앞다투어 취해왔다.

나 역시 정식으로 발표한 것은 아니지만, 학생들과 함께 현재 전하는
신묘장구대다라니의 이본(異本)들에 대한 언어적 해석을 탐구해 본 바 있다.

그 결과를 발표하지 않은 것은 다른 학자들이 상세한 연구를 발표하고 있다는 데에서만
찾아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내게는 그러한 의미 찾기가 애시당초 문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양의 언어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의미를 묻지 말고 용법을 물어라”고 말했다.

그렇다. 정히, 나의 관심은 다라니 속에 담겨진 의미에 있지 않고 다라니가
도대체 어떤 역할과 기능을 하고 있는가 하는 점에 있었던 것이다.

그에 대한 나의 견해는 사실 『천수경이야기』에 이미 제시되어 있다.

물론, 의미를 찾는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에는 좀더 보완된 논의가
필요함을 느꼈다.

「밀교 다라니의 기능에 대한 고찰」(『인도철학』 제6집)이라는 논문은
그런 의미에서 쓰여진 것이다. 그 논지를 간단히 이야기해 보자.

의미는 번뇌 타파 걸림돌

인도에서 최초로 다라니가 성립되었을 당시에는 의미가 있는 부분도 있었고,
의미가 없는 부분도 있었다.

의미가 있는 부분 역시 그렇게 의미가 파악된 이유는 그것이 그들의 모국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이해하면, 우리는 다라니를 번역함과 동시에 원문을 지우고 번역된
의미만을 읽는 것으로 충분하리라 본다.

그런데, 그래도 좋을까? 만약 그렇게 된다고 한다면, 불교 안에는 밀교(密敎)는
사라지고 현교(顯敎)만 남게 될 것이다.

나는 그런 현실에 반대한다. 밀교의 존재에는 그 나름의 다른 이유와 기능과 용법이
부여되어 있기 때문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엇일까?

다라니는 번뇌의 타파를 위한 도구로서의 기능을 한다.

다라니의 수지독송을 통하여 우리는 번뇌를 타파하고 성불할 수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그 다라니 속에 담겨진 애시당초의 의미가 무엇인지 하는 점은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아니, 그렇게만 말해서는 불충분하다. 오히려 그 의미를 탈락시키는 작업이 필요해진다.

이를 통찰한 분이 있었다. “다라니는 번역하지 않는다”라는 원칙을 세운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현장 스님을 비롯한 역경가들이었다.

소리로만 음사(音寫)함으로써 그것을 가능케 했던 것이다. 의미는 번뇌의 타파를
위해서는 장애일 뿐이다.

번뇌는 의미를 갖고 있는 언어로 구성되어 있는데, 언어라는 불을 끄는 데
또 다른 언어를 물로 삼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물이 되려면 의미가 없어야 한다. 의미 없는 것만이 의미의 연쇄로서의
번뇌의 불을 끌 수 있기 때문이다.

신묘장구대다라니가 곧 화두

의미 없는 다라니를 외움으로써 번뇌를 타파하는 기능을 한다.

바로 이 부분에서 다라니는 선에서 화두가 하는 기능을 정확히 담당하고 있음을 알게된다.

선과 밀교가 하나가 될 수 있으며, 함께 닦을 수 있는 이유이다.

이러한 나의 해석은 밀교에 대한 선적 해석에 다름 아니다.

「밀교 다라니의 기능에 대한 고찰」은 「선종에서 대비주를 외우는 이유」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더욱 새롭게 수정, 보완되어서 일본의 하나조노(花園)대학
선학연구회에서 발표된 바 있다.

일본 학자들 역시 선과 밀교, 화두와 다라니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임을
인정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천수경] 4

천수 수행의 중심은 다라니 독송

국내에서만 공부해온 사람은 누구나 유학에의 꿈을 꾼다.

내게 그 꿈의 성취는 교토에서의 1년(2002. 8∼2003. 8)으로 현실화되었다.

그 새로운 체험은 『천수경』을 보는 나의 눈을 더욱 깊게 하였다.

사람, 책, 그리고 현장이 새로웠기 때문이다.

고백하건대, 일본에 가기 전 『천수경』에 대해서 나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자신하였다.

“원본 『천수경』 자체에는 무슨 사상이 나타나 있는가?” 지도교수 다나카 선생의
이 질문에 나는 그것이 교만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사실 일본에 가기 전에 쓴 몇 편의 『천수경』관련 논문은 ‘독송용 『천수경』’에
몰려있었을 뿐, 그 성립의 모태가 되는 ‘원본 『천수경』’에 대해서는 진지한 성찰이
부족했다.

그런 나의 허물을 돌아보게 한 것이 다나카 선생이었다.

「원본 천수경과 독송용 천수경의 대비」(『불교학보』 제40집)라는 논문은
선생의 질문에 대한 대답 찾기의 결과였다.

‘원본 『천수경』’을 새롭게 자세히 읽었을 때, 그것은 ‘고본(古本) 『천수경』’과
그 이후의 부가부분으로 나눌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관세음보살이 이러한 다라니를 설하고 나자, 대지는 여섯 가지로 변화하여
진동하였고,…무량한 중생이 보리심을 발하였다.”(대정장 20, 107c∼108a)라는
부분은 바로 경전을 맺는말이 아닌가.

거기까지가 ‘고본 『천수경』’이며, 그 이후가 부가부분이다.

관음신앙은 타력신앙 아니다

그렇게 나누어 놓고 보니 ‘고본 『천수경』’과 뒤의 부가 부분에 나타난 신앙적
입장이 다르지 않은가. ‘고본 『천수경』’에서는 관세음보살이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설하면서 그것의 독송을 강조하고 있으며, 부가 부분은 다라니의 독송과 관련한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서 부연·해석하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부가 부분에서도 매우 중요한 핵심적 내용이 제시되고 있지만
28부의 신중들이나 31가지의 치료법 등이 나오는 등 좀더 잡다하다.

교토박물관 맞은편에는 ‘산쥬산게도(三十三間堂)’라는 관음도량이 있다.

거기에는 1001분이나 되는 천수천안관세음보살상과 이십팔부의 신중들이 모셔져 있다.

아, 신앙의 뜨거움이여!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근대 이전의 우리에게는 신라 경덕왕
당시 분황사에 천수천안 벽화가 있었다고 하는 경우(『삼국유사』 盲兒得眼조)가
거의 유일한 것이 아닌가 싶다. 왜 우리와 일본의 『천수경』 신행에는
이와 같은 차이가 생겼던 것일까?

우리의 경우는 ‘고본 『천수경』’을 중심으로 『천수경』을 받아들였으며, 일본은
부가부분을 중심으로 『천수경』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천수경』 신행은 다라니를 독송하는 행적(行的) 측면(내지 그것이
함의하고 있는 禪的 측면)을 강조하고 있으며, 일본의 경우는 관세음보살 그 자체에
대한 믿음을 중심으로 하는 신적(信的)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는 차이가 있다.

물론, 일본이라고 해서 다라니를 독송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 보편성은 우리보다
훨씬 적다. 겨우 선종의 3종(임제·조동·황벽종)에서만 독송할 뿐이다.

한국천수신앙의 특징은 ‘자력’

이러한 차이에 대해서 우리가 대륙과 육로로 이어져 있음에 반하여 일본은 바다에
가로막혀 있다는 점, 그래서 우리에게는 보편성 지향이 강한 반면 일본은 그들의
특수성에 자족(自足)하는 경향이 강해서라고 볼 수도 있다.

여기에는 앞서 말한 바 의상스님의 경우에서 보듯이 관세음보살 돕기라고 하는 행적
측면과 결부되어서 『천수경』적 관음신앙은 단순히 타력적 믿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나는 일본의 신앙적 특수성 역시 존중하지만(재미있어 하지만), 이러한 우리의 전통을
더욱 자랑하고 싶고 이어가고 싶다.

그것이 『천수경』 성립의 본의(本意), 관세음보살의 본의에
더욱 부합하는 일이라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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