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이 마음은 사대색신(四大色身) 속을 벗어나지 않는다. 만약 이 마음을 벗어난다면, 움직일 수가 없다. 이 몸에는 지각(知覺)이 없으니 마치 초목(草木)이나 기와조각 같고, 이 몸에는 정식(情識)이 없으니 무엇으로 말미암아 움직이겠는가? 만약 자기 마음이 움직이면, 말하고 행동하고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들이, 모두 움직이는 마음이 움직여 작용함이다. 움직이는 것은 마음의 움직임이니, 움직임이 바로 그 작용이다. 움직여 작용함 밖에 마음이 없고, 마음 밖에 움직임이 없다. 움직임은 마음이 아니고, 마음은 움직임이 아니다. 움직임에는 본래 마음이 없고, 마음에는 본래 움직임이 없다. 움직임은 마음을 떠나지 않고, 마음은 움직임을 떠나지 않는다. 움직임에는 마음이 떠나지 않고, 마음에는 움직임이 떠나지 않는다. 움직임은 마음의 작용이고, 작용은 마음의 움직임이다. 움직이면 마음이 작용하고, 작용하면 마음이 움직이니, 움직이 않으면 작용하지도 않는다. 작용의 바탕은 본래 공(空)인데, 공은 본래 움직임이 없다. 움직임과 작용은 마음과 같지만, 마음에는 본래 움직임이 없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길 ‘움직이니 또 움직일 것은 없다’고 한 것이다. 이 까닭에 종일 왔다갔다하지만 한 번도 왔다갔다한 적이 없으며, 종일 보지만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며, 종일 웃지만 한 번도 웃은 적이 없으며, 종일 듣지만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으며, 종일 알지만 한 번도 안 적이 없으며, 종일 기뻐하지만 한 번도 기뻤던 적이 없으며, 종일 다니지만 한 번도 다닌 적이 없으며, 종일 머물지만 한 번도 머문 적이 없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길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이 가는 곳이 사라졌다’고 한다.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이 본래 두루 고요하다. 나아가 성내고 기쁘고 아픈 것이 나무 인형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다만 아픔을 찾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길 ‘악업(惡業)은 고통스런 과보를 가져오고 선업(善業)에는 좋은 과보가 있다. 성을 내면 지옥에 떨어질 뿐만 아니라, 기뻐하면 하늘에 태어난다’고 한 것이다. 만약 성냄과 기쁨의 본성이 공(空)임을 알아서 집착하지 않기만 하면, 모든 업(業)에서 해탈한다. 만약 본성을 보지 못하고 경전을 읽는다면, 결정코 의지할 것이 없다. 말을 하려면 끝이 없으니 간략히 삿됨과 바름을 드러낸 것이 이와 같지만, 한두 가지에도 미치지 못한다. 출처 : 무심선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