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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12 11:01

[달마의 본성론 本性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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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그대의 본성 외에는 부처가 따로 없다[달마의 本性論]
 

                                        조셉 아르파이아·롭상 랍가이 저, 서보경 역
 
 

달마어록 본성론 本性論

만일 그대가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면 그대는 스승을 찾기 위해서 삶과 죽음의 밑바닥에까지 이르러야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찾은 스승이라도 그가 자신의 본성을 보지 못한 이상은 스승이 아니다. 그가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을 항상 암송한다고 할지라도 그는 삶과 죽음의 바퀴에서 빠져 나올 수 없다. 그리고 그는 해탈의 희망도 없이 삼계 속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
옛날에 선성(善星)비구는 경전을 모두 외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도 자신의 본성을 보지 않았기에 윤회의 바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선성비구도 이와 같을진데, 오늘날 몇 구절의 경이나 외우고서는 이것이 다르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어리석은 바보들이다. 그대가 자신의 마음을 보지 않는 한 아무리 많은 경전을 외우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
부처를 찾기 위해서 그대가 해야 할 일은 바로 그대 자신의 본성을 보는 것이 전부다. 그대의 본성이 바로 부처다. 그리고 부처는 자유로운 사람이다. 그는 모든 계획과 근심 걱정으로부터 자유롭다. 만일 그대가 그대의 본성을 보지 않고서 하루 종일 깨달음을 찾아다니더라도 그대는 결코 깨달음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진리를 찾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그 정도의 이해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대에게 스승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대 자신과의 갈등도 필요하다. 삶과 죽음은 귀한 것이다. 헛되이 그것들을 고통스럽게 하지 말라. 그대를 속여 봐야 아무런 이익도 없다. 그대가 보석을 산처럼 쌓아 놓고 갠지스강의 모래알만큼 많은 하인들을 거느리고 있을지라도 그대의 눈이 열린 뒤에야 그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대가 눈을 감고 있다면 무엇을 보겠는가? 그때 그대에게 보이는 모든 것은 꿈이요 환상임을 그대는 깨달아야 한다.
만일 그대가 곧 스승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대는 이번 생을 헛되이 살 것이다. 그대가 곧 스승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대는 이번 생을 헛되이 살 것이다. 그대는 불성을 갖고 있지만 그것은 진리이다. 스승의 도움 없이는 그대는 결코 그것을 알지 못한다. 스승의 도움 없이 깨달은 사람은 백만 명 중 하나 정도이다.
만약 인연의 결합으로 부처가 말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사람은 스승이 필요 없다. 그런 사람은 어떤 가르침보다 훨씬 뛰어난 각성을 타고난 사람이다. 그러나 그대가 그런 축복을 받지 않은 한 열심히 공부하라. 그러면 스승의 지도 아래에서 그대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공부하지 않아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흑과 백을 가릴 줄 모르는 미혹된 자들과 다르지 않다. 부처의 다르마를 엉터리로 선언하는 사람들은 부처를 모독하고 다르마를 뒤집어엎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마치 비를 마음대로 불러올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그들의 설법은 부처의 설법이 아니라 마귀의 이야기이다. 그들의 선생은 마귀의 왕이다. 그들 제자들은 마귀의 앞잡이 들이다.
그러한 가르침을 따르는 미혹된 자들은 부지중에 생사의 바다에 깊이 가라앉을 것이다.
그들이 자신들의 본성을 보지 않는 한 어떻게 자신들을 부처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그들은 사람들을 속여서 마귀의 세계로 이끄는 거짓말쟁이들이다. 그들이 본성을 보지 않는 한 그들이 십이연기설을 설법한다 해도 그것은 마귀의 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마라(摩羅)에게 충성하는 것이지 부처에게 충성하는 것이 아니다. 흑과 백을 구별할 줄 모르는 자들이 어떻게 삶과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는가?
자신의 본성을 보는 사람은 누구든지 부처다. 그렇지 않은 자는 누구든지 중생이다. 그러나 중생의 본성과 따로 떨어진 곳에서 부처의 본성을 찾으려고 한다면 그런 것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 중생의 본성이 곧 부처의 본성이다. 이 본성을 벗어나서는 어떤 부처도 없다. 부처는 우리의 본성이다. 이 본성 외에 더 이상의 부처도 없고 부처 외에 더 이상의 본성도 없다.

 

그대의 본성 외에는 부처가 따로 없다.

산스크리트어, 프라크리트어, 팔리어, 이 세 가지 언어는 과거 이 땅에 살았던 깨달은 사람들이 사용한 언어이다. 이 언어들은 내면적 경험에 관해서 풍부한 어휘들을 갖고 있다. 오늘날 서양에서는 과학적 기술과 연구 그리고 발명과 발견에 대해 많은 용어들을 갖고 있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그런 말들이 없다. 하지만 내면의 경험에 관한 한 동양의 언어들이 서양 언어보다 절대적으로 풍부하다. 이 세 가지 언어 중에서 산스크리트어는 우파니샤드와 힌두 신비주의자들에 의해서 사용되었고, 프라크리트어는 마하비라와 모든 자이나교 신비주의자들에 의해 사용되었다. 또한 팔리어는 석가모니 부처가 사용한 언어이다.
'선생'을 의미하는 말은 이 세 가지 언어에서 많은 어휘를 갖고 있다. 그리고 그 말들마다 조금씩 다른 맛을 갖고 있다. 하지만 영어에는 'teacher'라는 말밖에 없다. 그러면 이 세 가지 언어에서 그 어휘들을 살펴보자.
첫 번째 단어는 '시크샤크(sikshak)'란 말이 있다. 그것은 오직 정보만을 전달해 주는 선생을 가리킨다. 그는 자신이 말하는 내용을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정보는 정확하다. 그는 마음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다.
두 번째 단어는 '아디야팍(adhyapak)'이다. 그는 경험 속에서 약간 깊이 들어간 사람이다. 단지 정보만 전달해 주는 사람은 아니다. 그는 자신이 전달해 주는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정신적 차원까지는 아니다. 단지 그는 가슴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다.
세 번째 단어는 '우파디야이(upadhyay)'이다. 그는 좀더 깊이 들어간 사람이다. 그의 정보는 살아 있다. 그는 길을 여행하는 자이다. 그러나 아직 목표에 이르지는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챠리아(acharya)'란 말이 있다. 그는 궁극에 이르른 사람이다. 그가 전해주는 정보는 그 자신의 경험이다. 그는 완전한 진실만을 이야기한다. 그의 말은 그가 존재하는 것으로 완전히 증명된다.
그러나 영어에서는 오직 'teacher'란 단어밖에 없다. 그리고 이 말은 모든 종류의 사람들에게 다 쓰인다. 다른 말로 '마스터(master)'란 말이 있지만 그것은 영어를 말하는 사람들에게 그다지 사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 '마스터'라는 말을 '아챠리아'와 같은 뜻으로 사용하고 싶다. 그는 마음을 통해 아는 사람이 아니라 체험을 통해 아는 사람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 대부분의 경전들이 왜곡되지 않았다. 제자들은 달마 같은 사람들이 하는 말을 단순히 받아 적기만 한 것이다.

만일 그대가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면 그대는 스승을 찾기 위해서 삶과 죽음의 밑바닥에까지 이르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찾은 스승이라도 그가 자신의 본성을 보지 못한 이상은 스승이 아니다.

이런 스승은 스승이 아니다. 그는 단지 선생일 뿐이다. 그는 거의 컴퓨터와 같다. 그는 읽고 공부하고 모든 경전을 마구 머리 속에 집어넣었다. 그러나 그의 현존은 그가 아는 것을 전혀 나타내지 못한다. 그의 행동은 그가 논쟁에서 말하는 것과 다르다. 그의 말은 그저 마음의 피상적인 표면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것들은 존재의 깊은 내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는 말없이는 아무것도 가르칠 수 없다. 그러나 참된 스승은 오히려 침묵 없이는 가르칠 수 없다. 만약 그가 말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침묵을 만들어내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스승은 그가 말하는 것에 대한 살아 있는 증거이다. 선생은 단지 인용한 말들만 전해 준다. 그것은 교육되고 훈련된 마음이다. 하지만 스승은 존재 자체의 변화를 보여 준다. 그가 현존하는 것만으로도 제자는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눈이 있는 사람은 그의 아름다움을, 그의 축복을, 그의 웃음을 볼 수 있다. 그의 침묵 속에서조차 많은 것이 전달된다. 그의 침묵은 궁극적인 노래이다. 그는 움직이지 않고도 전 우주가 춤추고 있는 것을 나타낸다. 그의 존재가 바로 우주의 춤인 것이다. 스승은 선생과 차원이 다르다. 그것은 비슷한 말도 아니다.

만일 그대가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면 그대는 스승을 찾기 위해서 삶과 죽음의 밑바닥에까지 이르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찾은 스승이라도 그가 자신의 본성을 보지 못한 이상은 스승이 아니다.

나는 이 말을 이렇게 바꾸고 싶다.
'만약 그대가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면 그대는 스승을 만나야 할 것이다. 그 스승은 자신의 본성을 알기 때문에 그대의 본성 역시 알 수 있다. 모든 사람의 본성은 똑같기 때문이다. 그의 지식과 그의 얇은 그와 그의 제자들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가 된다.'

그가 십이연기설을 항상 암송한다고 할지라도 그는 삶과 죽음의 바퀴에서 빠져 나올 수 없다. 그리고 그는 해탈의 희망도 없이 삼계 속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

그대의 불멸성이나 그대의 영원성이나 전체와 하나되는 일체감을 단지 지식만으로는 경험할 수 없다. 지식은 그대의 마음을 말들로 가득 채울 뿐이다. 하지만 그대의 존재는 아무런 변화도 없다. 그대는 직접적인 경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진리는 오직 직접적인 경험으로만 알 수 있는 것이다. 간접적인 것이 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진리가 아니다. 그것은 생명 없는 죽은 말이다.
학자나 판디트(pandit)나 랍비(rabbi)와 같은 대단한 지식을 가진 사람은 절대로 생사의 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삼계에서 당하는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 석가모니 부처는 저승이나 이승이나 지옥이나 삼계 그 어디라도 종류가 다를 뿐 고통은 매한가지라고 말한다. 그리고 불교는 가장 차원 높은 종교이다. 천상마저도 궁극의 곳이 아니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고통은 여전히 있다. 그 고통은 매우 세련된 고통이다. 하지만 고통스럽다는 점에서 매한가지다. 고통을 전혀 받지 않으려면 사람은 삼계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것이 바로 니르바나(nirvana)이며 깨달음이다.

옛날에 선성(善星)비구는 경전을 모두 외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도 자신의 본성을 보지 않았기에 윤회의 바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신성비구도 이와 같을진대, 오늘날 몇 구절의 경이나 외우고서는 이것이 다르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어리석은 바보들이다.

달마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 불교 경전을 다 외울 만큼 지식이 많은 사람을 바보라고 부르는 것은 이 어록을 편집한 제자의 능력으로서는 한계 밖이다. 오직 달마만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절대적으로 지성적인, 에고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만이 그렇게 말해도 욕이나 비난이 되지 않는다. 달마 같은 사람에게는 그것이 단순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은 말해져야 한다. 그는 예의나 체면과 같은 겉치레를 차리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오직 무엇이든지 진리만을 이야기할 뿐이다. 나는 그에게 절대적으로 찬성한다. 나의 경험을 통해서 학식 있는 사람들은 잘 배운 바보일 뿐이라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그들은 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대단한 명예를 얻었지만 자신의 의식에 관한 한 보통 사람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그들은 단지 앵무새일 뿐이다. 그리고 어쩌면 앵무새가 그대의 판디트들보다 더 지성적일지도 모른다.
앵무새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때는 겨울이었고 한 여인은 밤이 되면 앵무새가 있는 새장 위에 두꺼운 담요를 덮어 주곤 했다. 앵무새가 추위를 탈까봐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낮이면 그 담요를 벗겨 주었다. 어느 날 태양이 떠오르자 그녀는 담요를 벗겼다. 그러자 아무도 노래를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앵무새는 노래를 시작했다. 사실 앵무새가 노래를 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런 일이다. 숲 속에 사는 앵무새조차 노래를 한다. 물론 우리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전달되지 않지만 그들에게는 매우 즐거운 일이다. 그리고 그때 그 여인은 남편의 차 소리가 현관 앞에서 멈추는 것을 들었다. 그녀의 남편은 비상 근무를 서는 군인이었다. 그래서 한번씩 갑자기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녀는 즉시 담요를 덮고는 침대 위로 가서 자는 척했다. 그러자 앵무새가 말했다.
"맙소사! 오늘은 해가 정말 짧군."
그런 말을 아무도 가르친 적이 없었다. 그것은 앵무새의 지성에서 나온 말이다. 매일 담요는 아침에 벗겨져서 저녁에 씌워졌다. 그런데 그 날은 이상했다. 그 날은 낮이 너무 짧은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소위 배웠다는 사람들은 그만한 지성조차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은 그들의 지식이 너무나 방대해서 지성이 일어날 모든 가능성을 완전히 삼켜 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식과 반대되는 지성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시해 버렸던 것이다.
그들은 확실히 바보들이다. 그 바보들은 다른 사람들을 속일뿐만 아니라 그들이 알지 못하는 것까지 이야기한다. 자신들마저 속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광설로 그들의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
진실한 삶은 말이 아니라 경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대는 전생애를 "사랑, 사랑, 사랑"이란 말만 되풀이하면서도 막상 진짜 사랑을 경험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대가 사랑을 경험하는 순간 그대는 무척 놀랄 것이다. 그 경험은 너무나 깊은 것이어서 단지 "사랑"이라는 말로는 절대로 표현할 수 없음을 알게 된 것이다.
사랑의 경험도 이러한데 진리는 어떻겠는가? 진리는 무한하고 영원하다. 그것을 아는 자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
진리를 경험할 때 그대는 경이 속에 빠질 것이다. 모든 말이 아무 쓸데없는 것이 된다.


 

그대가 자신의 무심을 보지 않는 한 아무리 많은 경전을 외우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

만약 그대가 무심을 안다면 그렇게 많은 경전들을 외우고 다닐 필요가 없다. 그것을 외우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모든 부처들이 말한 경전은 그대의 무심을 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무심을 보지 않고 경전만 외운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경전들은 그대가 이미 알고 있는 것 외에 어떤 것도 더 이상 주지 못한다.

부처를 찾기 위해서 그대가 해야 할 일은 바로 그대 자신의 본성을 보는 것이 전부다.

이것이 바로 내가 그대에게 말하고 또 말하는 것이다. 무지에서, 그대 영혼의 암흑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그대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이다. 그대가 자신의 각성을 인식하는 순간 모든 것이 멈춘다. 시간마저 멈춘다. 갑자기 그대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그리고 그대를 전체의 일부가 되게 해주는 문이 열린다. 전체의 일부는 결코 전체보다 작지 않다. 이것은 존재의 수학이다. 전체는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없다. 거기에 어떤 나눔도 불가능하다.

그대의 본성이 바로 부처다. 그리고 부처는 자유로운 사람이다. 그는 모든 계획과 근심 걱정으로부터 자유롭다. 만일 그대가 그대의 본성을 보지 않고서 하루 종일 깨달음을 찾아다니더라도 그대는 결코 깨달음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진리는 찾았다고 생각할 만한 어떤 사물이 아니다. 그래서 그대가 온종일 뛰어다녀도 그것은 헛수고일 뿐이다. 나는 이 말을 증명할 수 있다. 이 말은 틀림없이 달마로부터 나온 말이다.
찾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대 자신이 전부이다.
찾는 사람 자체가 바로 보배이다. 다른 어떤 것도 찾을 것이 없다. 그래서 나는 예수가 한 말을 인용하고자 한다. "구하라, 그러면 주어질 것이오.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오.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그대에게 열릴 것이다."이 말은 아름답고 시적이고 인상적이지만 진리는 아니다.
만약 그대가 달마에게 묻는다면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찾으라, 그러면 그대는 결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찾는 행위 자체가 그대를 자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찾으려고 애쓰는 그대는 누구인가? 그대는 하나이며 전체이며 부처이다. 그대가 어디로 가겠는가?
두드리지 말라, 자꾸 두드리면 문은 더욱 굳게 닫힐 것이다. 그대가 두드리는 행위, 그것이 바로 자신의 욕망과 바람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부처는 어떤 욕망도, 어떤 바람도 없다. 그래서 그에게는 항상 문이 활짝 열려 있다.
구하지 말라, 자꾸 그대가 구하면 그대는 계속 잃어버릴 것이다. 구하는 그대는 누구인가? 그대에게 구하는 것을 줄 존재는 아무도 없다. 그대는 이미 그것을 갖고 있다. 자꾸 구하러 다니는 동안 그대는 방황할 뿐이다. 그대는 다른 사람에게서 그것을 구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아무도 그것을 줄 수 없다. 그것은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대는 이미 그것을 갖고 있다."
그래서 그대에게 필요한 행위는 찾지 않는 것이며, 두드리지 않는 것이며, 구하는 행위를 그치는 것이다. 그리고 그대 자신의 본성을 인식하는 것이며 이미 그것을 알고 있다는 기억을 되새기는 것이다. 새로이 발견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그 정도의 이해에 도달하려면 그대는 스승이 필요하다.
왜 그대는 스승을 필요로 하는가? 그대 안에 이미 진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왜 편히 쉬면서 그것을 인식하지 않는가?
문제는 그대가 너무 오랜 세월 동안 세상을 방황했다는 것이다. 그대는 집으로 가는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대가 집을 떠난 이후로 그것은 정말로 길고 긴 여행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대가 집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집에 대한 그대의 기억은 마치 영화나 꿈속에서 본 것처럼 어렴풋하다. 아니면 어느 책에서 읽은 듯한 느낌이어서 멀리 골짜기에서 들려오는 메아리 같다. 그것은 그대에게 확실하지 않다.
그래서 스승이 필요하다. 스승은 그대에게 확신을 주는 존재일 뿐이다. 그의 현존 때문에 어떤 꿈보다도 그것은 그대 내면에 절대적인 확신으로 떠오른다. 스승의 눈은 그대에게 가능성을 보게 해준다. 그의 침묵으로 인해서 그대 안에서도 침묵이 일어나며, 그의 진실 덕분에 그대 내면에서 진실을 찾는 열망이 일기 시작한다. 달마의 말은 옳았다.

그러나 그 정도의 이해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대에게 스승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대 자신과의 갈등도 필요하다. 삶과 죽음은 귀한 것이다. 헛되이 그것들을 고통스럽게 하지 말라. 그대를 속여 봐야 아무런 이익도 없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속고 있다. 어떤 사람은 돈을 많이 벌어서 거부가 되면 그들의 잠재력이 실현될 것이라는 생각에 속고 있다. 또 어떤 사람은 지식을 축적하는 일에, 권력을 모으고 명예를 얻는 일에 속고 있다. 어떤 사람은 성자나 고행자가 되면 자신의 잠재력이 실현될 것이라는 생각에 속고 있다. 그러나 그대가 무엇을 하든지 그대의 본성을 보지 못하는 한 그대는 속고 있는 것이다.

그대가 보석을 산처럼 쌓아 놓고 갠지스강의 모래알만큼 많은 하인들을 거느리고 있을지라도 그대의 눈이 열린 뒤에야 그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대가 눈을 감고 있다면 무엇을 보겠는가?

그대가 눈을 감으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 그대는 간단한 실험을 통해서 달마의 말이 옳은지를 알아볼 수 있다. 그대가 궁전을 갖고 있더라도 눈을 감으면 그것은 사라진다. 그대의 세계가 그런 식으로 전부 사라진다. 아침에 그대가 눈을 뜨면 밤중에 꾸었던 모든 꿈들이 사라지듯이 말이다. 그대는 그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가? 한낮에도 그대가 보는 것이 그것의 사실성 여부를 증명할 수 있는 길이 없기에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의심을 해 본 적이 없는가? 그대는 여기에 앉아 있다. 이 모든 것이 꿈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가? 그대는 지금 꿈을 꾸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것이 진실인지 꿈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것이 꿈과 다르다면 단지 그대가 눈을 뜨고 있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밤중에 꿈속에서도 그대는 그것이 꿈이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이것은 그대에게 가장 이상한 신비 중 하나이다. 생시에는, 완전히 깨어 있는 동안에는 그대가 그것의 사실성 여부를 의심할 수 있다. 그러나 꿈속에서는 아무도 그 꿈이 진실인지 의심하지 않는다. 꿈을 꾸는 사람은 그것이 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달마는 그대에게 한 가지 예를 제시하려고 한다. 그대가 죽을 때 그대의 눈은 감겨질 것이다. 동양에서는 그것이 하나의 전통이다. 누군가가 죽으면 사람들은 즉시 그의 눈을 감긴다. 어렸을 때 나는 이 점이 늘 궁금했다. 왜 죽으면 눈을 감기는 것일까? 왜 그런 마지막 자유도 허락하지 않는 것일까? 나는 모든 사람에게 물었다. 그래서 나는 누가 죽는다는 소식을 들으면 항상 거기에 가서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물어 보았지만 아무도 내 질문에 대답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왜 사람이 죽으면 그의 눈을 감기는지 말이다.
잠을 자다가 죽지 않는 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을 뜬 채로 죽는다. 죽는 순간 눈을 감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눈을 감는 행위조차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주먹을 쥐고 죽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주먹을 쥐려면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손을 펴고 죽는다. 더 이상 에너지가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눈을 뜨고 있을 때 죽으면 그대로 눈을 뜨고 있다.
아무도 그 질문에 대답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스스로 해답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어릴 적에 나는 많은 위대한 성자들에게 가서 같은 질문을 던지곤 했다. 그러면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매우 이상한 질문을 하는구나? 우리는 그런 것에 대해서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리고 그런 말은 어떤 경전에도 없고 규정에도 나와 있지 않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만 이 일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을 나는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나는 거기에 무슨 의미가 숨겨져 있다고 봅니다. 사람이 죽을 때 눈동자는 위로 향해집니다. 죽은 사람의 눈을 보면 흰자위만 보입니다. 눈동자는 위로 향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보는 사람은 무시무시하게 만듭니다. 흰자위가 공포를 주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은 당신이 잠을 잘 때도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당신의 눈은 위로 향합니다. 그것은 눈이 휴식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이제 죽은 사람의 눈은 완전한 휴식에 들어갔고 사람들에게 공포를 주지 않기 위해서 즉시로 그 눈을 감기는 것입니다."
철학적인 의미로 보자면 눈을 감는 것은 더 이상 이 세상이 그대 앞에 있지 않다는 뜻이다. 그대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그대 앞에서 사라진다는 뜻이다. 사람이 죽는 순간 제왕이라 할지라도 그의 나라를 갖고 갈 수 없다. 그의 지식과 그의 권세와 그의 모든 소유를 갖고 갈 수 없다. 그가 갖고 갈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본성에 대한 깨어 있음이다. 그것만이 유일한 그대의 재산이다. 만약 그대가 살아 있는 동안 그 재산을 소유하지 못한다면 그대는 굉장한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그때 그대에게 보이는 모든 것은 꿈이요 환상임을 그대는 깨달아야 한다.

죽음이 모든 것을 가져가 버리기 때문이다. 죽음은 무엇이 실체인지를 판정해 주는 유일한 기준이다.


 

만일 그대가 곧 스승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대는 이번 생을 헛되이 살 것이다. 그대는 불성을 갖고 있지만 그것은 진리이다. 스승의 도움 없이는 그대는 결코 그것을 알지 못한다. 스승의 도움 없이 깨달은 사람은 백만 명 중 하나 정도이다.

이 말은 달마로부터 직접 나왔다. 이것은 스승의 말을 받아 적는 제자들의 능력을 넘어선 말이다. 단지 지식만 쌓은 사람들은 '스승의 도움 없이 깨달은 사람은 백만 명 중 하나 정도이다.'라고 말을 감히 할 수 없다. 달마조차도 스승의 도움으로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가능성은 있다. 그것은 그대 자신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사실 깨닫는 데에는 스승의 도움이 전혀 필요 없다. 만약 그대가 어떻게 되더라도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갈 용기가 충분히 있다면 그대는 스승의 도움 없이도 깨닫게 될 것이다.
스승의 도움이란 것이 무엇인가? 그는 단지 그대에게 확신을 줄뿐이다. 그것은 그대가 모험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확신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그것은 그대의 삶이고 그대의 권리이다. 하지만 그대는 열망을 가져야 한다. 이 모든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하는 열망을!
나에게는 스승이 없다. 나는 깨달은 사람들을 여러 번 만나 보았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나를 홀로 내버려두라고 말했다. 그들의 도움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단지 나에게 확신을 줄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확신이 필요 없었다. 사실 확신 없이 어떤 일을 한다는 것은 나에게 더욱 즐거운 일이었다. 그대가 어디를 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면서, 그대가 어떤 것을 찾게 될지 안 될지 전혀 예상할 수 없으면서 하던 일을 계속해 보라.
마치 영화를 두 번째 볼 때처럼 그대가 어떤 확신을 가질 때, 그대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알 때, 그것은 더 이상 모험이 아니다. 내가 항상 말해온 새로운 인간형에게는 스승이 필요 없다. 그는 모험 정신으로 가득 찬 인간이기 때문이다. 삶의 근원에 도달하기 위해 극심한 모험을 즐거움으로 여기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스승의 도움 없이 깨달은 사람은 백만 명 중 하나 정도이다.

이 말은 바로 나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나는 인류 역사상 스승의 도움 없이 깨달은 사람은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달마는 그 사실과 가능성을 인정했다. 비록 자신에게도 스승이 있었지만 말이다.

만약 인연의 결합으로 부처가 말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사람은 스승이 필요 없다. 그런 사람은 어떤 가르침보다 훨씬 뛰어난 각성을 타고난 사람이다. 그러나 그대가 그런 축복을 받지 않은 한 열심히 공부하라. 그러면 스승의 지도 아래에서 그대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은 달마에게서 나온 말이 아니다. 그대의 본성을 아는 것이 공부를 통해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대가 이 세상의 모든 경전을 다 공부해도 그대는 자신을 알 수 없다. 그것은 과외지도를 통해서도 불가능하다. 그것은 그대 밖에서 들어온 정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떻게 그대의 내면을 알 수 있겠는가?
스승과 대화를 통해서, 그대가 궁극에 이른 자와 사랑에 빠지는 것을 통해서, 그대는 자신의 미래를 볼 수 있다. 그대가 하나의 씨앗이라면 스승은 그 씨앗을 꽃을 피운 것이다. 그것은 그대에게 위로 향한 열망을 갖게 만든다. 그대 자신을 꽃피우려는 의지를 심어 준다. 그것은 공부의 문제가 아니다. 과외지도의 문제 또한 아니다. 그것은 스승과의 깊은 사랑의 문제이다.
그래서 나는 이것이 달마의 말이 아니라고 말한다. 달마가 지금 여기에 있으면서 그 말이 자기가 한 말이라고 해도 나는 믿지 않을 것이다.
달마와 같은 사람이 이런 쓰레기 같은 말을 할 수가 없다.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공부하지 않아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흑과 백을 가릴 줄 모르는 미혹된 자들과 다르지 않다.

이 말들은 모두 제자가 덧붙인 주석이다. 그는 공부에 대해서 계속 강조한다.
그대는 많은 학식을 지닌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깊이 잠들어 있다. 거기에는 아무런 빛이 없다. 그들은 축복의 빛과 향기를 발산하지 못한다. 사실 그들의 공부가 그들을 심각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빛을 주기는커녕 짐만 잔뜩 지워 주었다. 그들은 어떤 것도 알지 못하면서 너무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들의 존재에 심각한 긴장을 불러왔다. 실제적으로 아는 것은 하나도 없으면서 정리할 수 없는 정보만 잔뜩 모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들을 신봉한다. 그들을 존경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지식이 피상적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것은 존재에 아무런 성장도 가져오지 못한다. 그들의 말은 우리 안에 뿌리내릴 수 없다. 그대가 가진 모든 꽃들이 시장에서 사온 것들이다. 그것들은 그대의 내면에서 자라난 것이 아니다.
한 어부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느 날 그는 하루 종일 낚싯대를 드리웠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드디어 그는 마누라와 바가지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시장에 가서 크고 아름다운 물고기 세 마리를 샀다. 그리고는 장사꾼에게 그 물고기들을 땅에 던지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장사꾼은 시키는 대로 물고기를 던졌다. 그러자 어부는 얼른 그것을 다시 잡아 올렸다. 장사꾼은 이상한 행동을 하는 어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왜 그렇게 하는지 물었다. 그러자 어부는 말했다.
"아무것도 아닐세. 당신은 던졌고 나는 잡았지. 나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네, 그래서 내 손으로 이 물고기들을 잡는 것을 당신에게 보여주는 것일세. 나는 정직하게 살고 싶기 때문이지."
그는 아내를 속일 수는 있다. 하지만 자신을 어떻게 속이겠는가? 그것은 정직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거짓이다. 소위 배웠다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 그들은 물고기를 잡았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손으로 잡은 것이 아니라 시장에 가서 돈을 주고 산 것이다. 진리는 사고 팔 수 없는 것이다.
그대는 내면의 빛으로 자신의 본성을 인식해야 한다. 그 길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

부처의 다르마를 엉터리로 선언하는 사람들은 부처를 모독하고 다르마를 뒤집어엎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마치 비를 마음대로 불러올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그들의 설법은 부처의 설법이 아니라 마귀의 이야기이다. 그들의 선생은 마귀의 왕이다. 그들 제자들은 마귀의 앞잡이들이다.
그러한 가르침을 따르는 미혹된 자들은 부지중에 생사의 바다에 깊이 가라앉을 것이다.
그들이 자신들의 본성을 보지 않는 한 어떻게 자신들을 부처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그들은 사람들을 속여서 마귀의 세계로 이끄는 거짓말쟁이들이다. 그들이 본성을 보지 않는 한 그들이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을 설법한다 해도 그것은 마귀의 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마라(摩羅)에게 충성하는 것이지 부처에게 충성하는 것이 아니다. 흑과 백을 구별할 줄 모르는 자들이 어떻게 삶과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는가?
자신의 본성을 보는 사람은 누구든지 부처다. 그렇지 않은 자는 누구든지 중생이다. 그러나 중생의 본성과 따로 떨어진 곳에서 부처의 본성을 찾으려고 한다면 그런 것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 중생의 본성이 곧 부처의 본성이다.

단지 인식하는 것만 필요하다. 부처와 중생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 자신의 본성이 부처임을 인식하는 것과 인식하지 않는 차이뿐이다. 인식하지 않는 자는 자신의 내면으로 결코 들어갈 수 없다. 그 사람이 바로 중생이다. 그래서 그대와 깨달은 사람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만약 차이가 있다면 그는 자신의 보물을 알고 그대는 그것을 모르는 차이이다.
그래서 달마는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우리 중생의 본성이 곧 부처의 본성이다. 이 본성을 벗어나서는 어떤 부처도 없다. 부처는 우리의 본성이다. 이 본성 외에 더 이상의 부처도 없고 부처 외에 더 이상의 본성도 없다.

달마는 부처라는 말을 계속한다. 그래서 그대는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어떤 사람의 이름이 아니다. 부처는 단순히 '깨달은 자'란 뜻이다. 석가모니 부처는 가장 유명한 깨달은 자이다. 그 말은 오직 석가모니 부처만이 '깨달은 자'가 아니란 뜻이다. 그 전에도 많은 부처가 있었고 그 이후에도 많은 부처가 나올 것이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부처는 계속 나올 것이다 그리고 미래에는 새로운 부처들이 샘솟듯이 쏟아질 것이다.
모든 사람이 잠재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시간이 문제다. 지금은 그대가 기다려야 할 시간이다. 어느날엔가 그대는 그대 외부의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 때 내면으로 눈을 돌릴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의 개인적 이름은 고타마 싯다르타이다. 고타마는 그의 성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의 춤을 조르바 부처라고 이름 붙였다. 그러자 스리랑카 대사는 나에게 편지를 썼다. 스리랑카는 불교 국가이다.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춤에다 부처라는 이름을 붙인 것에 대해서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종교를 해치고 모욕하는 행위입니다."
나는 그에게 답장을 썼다.
"아마 그대는 불교도로 태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부처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춤을 조르바 부처라고 붙일 권리가 있다. 그것은 그대의 부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니 그대는 그 문제에 대해서 신경 슬 필요가 없다. 만약 내가 그것을 '조르바 싯다르타'라고 부른다면 그때는 그대가 항의할 수 있다. 그러나 부처는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니다. 석가모니 부처는 수많은 부처 중의 한 명일뿐이다. 그리고 조르바는 부처가 될 수 있는 모든 잠재성을 갖고 있는 말이다. 나는 그것을 방해할 수 없으며 그대 역시 방해할 수 없다. 그리고 그대는 단지 불교도일 뿐이다. 한 사람의 추종자이며 모방자인 것이다. 그대는 '부처'라는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있지 않다. 그대는 자신을 깨닫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해 보지 못했다. 그러니 원한다면 다시 편지를 써라."
그 후 그는 더 이상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 나는 아마도 그가 내 편지를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달마가 부처라는 말을 사용할 때마다 그것이 석가모니 부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라. 그는 깨달음이나 해탈의 뜻으로 그 말을 사용하고 있다. 사실 부처란 그런 뜻이다. 그것은 어떤 개인의 이름도 아니다. 모든 사람의 잠재성을 일컫는 말인 것이다.

알겠는가?
 

출처 : 세존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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