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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12 11:04

[달마의 진신론 眞身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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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부처는 무의미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달마의 진신론 眞身論]
 

                                        조셉 아르파이아·롭상 랍가이 저, 서보경 역
 

 
 

달마어록 진신론 眞身論

"만약 제가 저의 본성을 보지 못한다면 부처를 생각하고, 경전을 독송하며, 공양물을 바치고, 계율을 지키며, 불법에 헌신하고, 선을 행하더라도 여전히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습니까?"
그렇다, 그대는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다.
"왜 성취할 수 없습니까?"
그대가 어떤 것을 성취할 수 있다면 그것은 모두 인연에 의한 것이며 좋은 업을 쌓은 결과다. 그리고 그것은 여전히 생사의 바퀴를 돌리게 한다. 그대가 생사의 바퀴 속에 매여 있는 한 그대는 결코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다.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그대가 자신의 본성을 보아야 한다. 그대가 그것을 보지 못하는 한 원인과 결과에 대한 이 모든 말들이 무의미한 것이다. 부처는 무의미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부처는 업으로부터 자유롭다. 인연의 사슬에서 자유로운 이가 바로 부처다. 만약 그대가 부처가 어떤 것을 성취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부처를 중상 모략하는 것이다. 부처가 무엇을 성취할 수 있겠는가? 마음을 집중시키고 힘을 모으고 어떤 견해를 갖는 것이 부처에게는 불가능하다. 부처는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친 존재가 아니다. 부처의 마음은 비어 있는 것이 그 본성이라서 순수하고 순수하지 않은 것 모두를 초월한다. 그는 인과의 법칙에서 자유로우며 깨달음이나 수행에서도 벗어나 있다.
부처는 어떤 특정한 견해를 따르지 않는다. 부처는 선을 행하지도 않고, 악을 행하지도 않는다. 부처는 부지런하거나 게으르지도 않다. 부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며, 자신이 부처라는 생각에 매달리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부처는 부처가 아니다. 그러니 다른 부처들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라. 그대가 그대의 마음을 보지 않는 한 그대는 내가 말하는 것을 결코 알지 못한다.
자신의 본성을 보지 못하고서 그저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수행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쟁이이며 어리석은 바보들이다. 그들은 끝없는 허공에 덜어져서 마치 술 취한 자처럼 자신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들은 악으로부터 선을 가려낼 줄도 모른다. 만약 그대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행위를 수행하려 한다면, 그대는 먼저 자신의 본성을 봐야 한다. 먼저 그대의 논리적인 사고를 멈춰야 하는 것이다. 그대 자신의 본성을 보지 않고서 깨달음을 얻기란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여전히 모든 종류의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업이 없기를 바란다. 그들은 모든 것이 공허하다고 생각하면서 악행을 저지르고도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벗어날 희망이 없는 무간지옥(無間地獄)으로 떨어질 것이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그런 견해를 갖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에게 모든 상황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이 됩니다. 왜 누군가 그의 몸이 죽었을 때 우리는 이 마음을 보지 못합니까?"
마음은 항상 존재한다. 그대는 단지 그것을 보지 못할 뿐이다.
"그러나 그 마음이 존재한다면 왜 제가 보지 못합니까?"
그대는 꿈을 꾸어보았는가?
"물론입니다"
그대가 꿈을 꿀 때 그것은 그대인가?
"예, 바로 저입니다"
그러면 꿈속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그대와 어떻게 다른가?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르지 않다면 이 몸은 그대의 진짜 몸이 아니다. 그대의 진짜 몸, 즉 진신(眞身)은 그대의 마음이다. 이 마음은 시작도 없는 영겁으로부터 지금까지 한번도 달라진 적이 없었다. 그것은 결코 죽거나 새로 생기지 않는다. 사라지거나 다시 나타나지도 않으며, 불어나거나 줄어들지도 않는다. 그것은 선행이나 악행으로 깨끗해지거나 더럽혀지지도 않으며 진실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다. 그것은 남자도 아니며 여자도 아니다. 과거도 아니며 미래도 아니다. 그것은 승려나 속인으로 나타나지도 않고, 늙은이나 젊은이도 아니며, 성자나 바보도 아니다. 그것은 부처도 아니며 중생도 아니다. 그것은 깨달음을 얻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으며, 업으로부터 고통받지도 않는다. 그것은 어떤 모양이나 형체도 갖지 않는다. 그것은 허공과 같다. 그대는 그것을 소유할 수 없다. 물론 잃어버릴 수도 없다. 그것은 산이 막혀도 통과하며 강이나 바위벽도 그냥 지나간다. 그것의 멈출 수 없는 힘은 오대(五大)의 산을 넘어가고 삼사라(Samsara)의 강을 건너간다. 어떤 업도 이 마음을 제한할 수 없다. 이 마음이 진신(眞身)이며 바로 그대의 본성이다. 그것은 너무나 미묘해서 잡아내기가 쉽지 않다. 그것은 감각적인 마음과 같지 않다. 모든 사람이 이 마음을 보고 싶어한다. 그리고 이 마음의 빛에 의해서 손과 발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갠지스강의 모래알처럼 많다. 그러나 그들에게 물어 보라. 그들은 그것을 설명할 수 없다. 그들은 이 마음이 뜻하는 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와 같다. 그들이 왜 그것을 보지 못할까?


부처는 무의미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달마의 말이 어줍잖은 추종자들에 의해 잘못 전달되고, 엉터리 주석이 덧붙여지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너무나 슬프다. 그들은 달마의 말에 자신들의 혼란된 생각들을 마구 섞어 놓았다. 그들은 달마가 한 말이 본래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깨달음이 무엇인지 실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쳐 놓은 덫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엇이 달마의 말이며 무엇이 덧붙여진 사족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 상황을 보면서 나는 이 어록들에 대해서 그대에게 말할 때, 다시 한번 한가지 예를 되풀이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인도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 중의 하나인 타고르는 자신의 시 <기탄잘리>를 영어로 번역했다. 비록 그는 영국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마음은 언제나 벵골의 한 거부의 아들이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영국 국왕에 의해 왕이라는 작위를 받을 정도였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하지만 그의 모국어는 항상 그의 모국어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모든 시를 그의 모국어인 벵골어로 지었다. 그러나 그의 친구들이 <기탄잘리>를 영어로 번역한다면 노벨상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말을 몇 번이고 그에게 강조했다. 하지만 타고르 자신말고는 그것을 영어로 번역할 사람이 없었다. 그 자신보다 누가 더 훌륭한 번역을 해낼 수 있겠는가?
그래서 타고르는 자신의 시를 영어로 번역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망설임이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 타고르는 당시에 유명한 기독교 선교사인 앤드루스(C. F. Andrews)에게 조언을 요청했다. 그는 세계적인 인물로 위대한 학자이며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는데, 당시 벵골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그곳에서 벵골어를 공부하고 있었는데, 번역본과 원본을 대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타고르는 생각했다. 앤드루스는 타고르의 요청을 받아들여 그것을 대조하였고, 그 결과 단 네 개의 단어만 제외하고는 완벽하다고 말했다. 그 네 개의 단어도 문법적으로만 부적당한 것이었다. 그래서 앤드루스는 거의 같은 의미를 가진 다른 단어들을 제안했다.
타고르는 언어상으로 볼 때 앤드루스의 말이 확실히 옳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앤드루스가 제안한 단어들을 바꾸어 보았다. 그리고는 영국으로 가서 런던에 있는 그의 친구 문인들 중 한 사람인 예이츠(Yeats)에게 그것들을 보여 주었다. 예이츠는 타고르의 <기탄잘리>를 읽고서 감동을 받은 나머지 다른 친구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그 시를 낭송해 주었다. 그는 이 시가 노벨 문학상을 받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먼저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여러 시인들의 의견을 듣는 것도 좋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하여 20여 명의 문인들이 예이츠의 집에 모여서 타고르의 시 낭송회를 갖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대단한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그 작품을 노벨상 후보로 선정해야 한다고 만장일치로 동의했다. 그러나 예이츠는 뜻밖에 입을 열었다.
"모든 부분이 완벽하다. 그런데 여기 단 네 개의 단어가 좀 이상하다."
그 말을 듣자 타고르는 자신의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네 개의 단어는 앤드루스가 제안한 단어들이었다.
예이츠는 계속 말했다.
"그 말들은 문법적으로는 완벽하다. 하지만 시적으로는 완벽하지 않다. 그 단어들은 잔잔히 흘러가는 시의 아름다움을 거스르고 있다. 그래서 내 생각에는 이 단어들을 바꾸었으면 한다. 사실 나는 이 단어들이 타고르 당신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다. 어떤 시인도 한번 사용된 단어들을 반복해서 쓰지 않는다. 물론 문법적으로는 그것이 맞지만 시인들은 자유를 갖고 있다. 그들은 문법보다 시적 자유를 더 높은 가치에 둔다. 그래서 때때로 시인들에게는 문법이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그 말을 듣고 있던 타고르가 말했다.
"자네 말이 옳다. 이 단어들은 내가 쓴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앤드루스에게서 나온 말이다. 내가 쓴 단어들은 이런 단어들이다."
그리고는 그가 처음 사용했던 단어들을 예이츠에게 들려주었다. 그러자 예이츠는 굉장히 기뻐했다.
"이제 모든 것이 완벽하다. 이제 강속에 박혀 있던 네 개의 바위들이 뽑혀졌다. 타고르 당신의 단어는 문법적으로는 맞지 않지만, 시적으로는 완전하다. 그것들은 바로 그대의 가슴에서 나온 말들이다."
문법이란 마음의 장난이며 참된 시는 사념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마음은 본질적으로 산문이며 시는 가슴에 속한 것이다.
그래서 타고르의 시는 문법적으로는 틀렸지만 시적으로는 맞는 것이다. <기탄잘리>는 노벨상 수상 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이 이야기는 달마의 어록이 언어상으로는 훌륭한 것이지만, 깨달음의 경험과는 맞지 않도록 쓰여졌다는 예를 들기 위한 것이다. 추종자들은 많은 엉터리 문장을 첨가했고, 혼란된 생각들을 주석이랍시고 덧붙였다.
그래서 이 어록을 읽는 사람은 매우 예리한 지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달마의 말이 어디에서 끝나고, 제자의 말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알 수가 없다. 그것은 서로 섞여 있다. 달마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스승 가운데 하나이다. 하지만 그가 너무 위대했기에 몇몇의 제자를 제외하고는 그의 경지에 다가갈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들마저 어떤 글도 남기지 않았다.
그의 후계자로 선택된 혜가가 달마로부터 "나의 가르침의 본질이 무엇인가?"란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단지 엎드려 절만 했다. 그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 나왔지만, 그는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달마는 그를 일으켜 세우면서 말했다.
"비록 그대가 말을 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대의 대답을 들었다. 그대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나 그 눈물이 충분한 의미를 전달해 준다. 그대는 나를 이해했고, 나는 그대의 침묵을 이해할 수 있다. 그대의 침묵은 내가 말할 수 있는 어떤 것보다 더 큰 것이다. 그대는 나의 골수를 얻었으며, 바로 나의 영혼이다. 내가 떠나면 그대는 나를 대표할 것이다."
그러나 혜가는 어떤 글도 남기지 않았다. 그것은 이상한 숙명이었다. 사실 깨달은 사람은 그것이 말로 표현되는 순간 혼란만 일으킨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그런 실수를 저지르기보다는 차라리 침묵을 택한다. 그리고 깨닫지 못한 사람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도, 그 실수가 엄청난 혼란을 일으킨다는 것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그대에게 말하고 싶다. 이 구절이 겉으로는 옳지만 속으로는 달마의 말이 아니라는 점을 말이다. 이 구절들은 궁극적인 의식에 이르른 사람의 말일 수가 없다.
이제 그 구절들은 이렇게 시작된다.

"만약 제가 저의 본성을 보지 못한다면 부처를 생각하고, 경전을 독송하며, 공양물을 바치고, 계율을 지키며, 불법에 헌신하고, 선을 행하더라도 여전히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습니까?"
그렇다, 그대는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다.

이 구절은 달마에게서 나온 말이 아니다. 비록 이 세상의 모든 종교들보다 고차원적이지만 말이다. 소위 종교인이라는 사람들이 이런 행동을 하고 있다. 그들은 신을 생각하거나 부처를 생각하고 예언자나 메시아나 구세주를 생각한다. 그들은 경전을 독송한다. 거룩한 《꾸란(Koran)》을, 거룩한 《바이블》을, 거룩한 《기타(Gita)》를, 거룩한 《법구경》을 말이다. 그들은 사원이나 교회, 회당이나 모스크(mosque)에 많은 예물을 바친다. 그들은 또한 계율을 지키고 단식을 하며, 밤에는 아무것도 먹고 마시지 않는다. 그런 계율들은 수천 가지나 된다. 그리고 모두들 제각기 다르다.
내가 어느 날 탈무드를 보고 있을 때, 나는 눈을 의심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얼마나 바보 같은 말들이 많은지 말이다. 그대는 그 책 어디에서든지 그런 어리석은 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안식일에 당신은 밭이나 목장에 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당신은 그의 끝에 가까이 이르렀다. 그러나 끝은 아니다."이런 의미 없는 말들이 어떻게 성스러운 경전이 될 수 있는가? 그리고 거기에는 수많은 주석들이 줄을 잇는다. 한 랍비가 말했다. "왜 이렇게 말했는가?" 그러면 다른 랍비가 또 말한다. "그것은 왜 그렇게 말했는가?" 그러면 또 다른 랍비가 말한다. "거기에는 끝이 없다." 그런 바보 같은 말이 수백 번이나 계속된다.
그들은 문과 창문이 각각 하나씩 있는데, 그 창문은 문의 오른편에 붙어 있는지 아니면 문의 왼편에 붙어 있는지에 대해서 서로 토론하고 있다. 위대한 랍비라고 하는 사람들이 계속 그런 문제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어떤 문이 큰가? 작다면 얼마만큼 작은가? 등등 말이다.
계율이나 덕목, 온갖 종류의 난센스들이 헌신이나 선행을 한다는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다. 그래서 오직 달마 같은 사람만이 말할 수 있다.
'그대는 결코 그런 어리석은 행위로 부처나 깨달음을 이룰 수 없다.'
그대 자신을 보는 것이 유일한 길이다.

"왜 성취할 수 없습니까?"
그대가 어떤 것을 성취할 수 있다면 그것은 모두 인연에 의한 것이며 좋은 업을 쌓은 결과다.

이 말은 의미가 깊은 말이다. 그대는 이 말을 이해해야 한다. 인연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은, 인연이 다하면 언제든지 그것을 잃게 된다. 그러나 깨달음은 인연에 의해서 성취되어진 것이 아니므로 그것을 결코 잃어버릴 수 없다. 그대의 삶은 인연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그대를 죽일 수 있다. 그대는 자살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대의 깨달음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인연에 의해 조건지어진 것이 아니다.
인연에 의해 생겨나지 않은 것은 그대가 어떤 방법으로도 그것을 없앨 수 없다. 그것의 원인이 없다. 그래서 결코 파괴될 수 없다. 예를 들면 그대는 모닥불을 피울 수 있다. 하지만 그대가 더 이상 땔감을 넣지 않으면 결국 불은 꺼져 버린다. 불을 존재하게 하는 데는 반드시 연료가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인연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땔감이라는 원인의 결과이다. 원인이 제거되면 결과 또한 사라진다.
유물론자와 유심론자의 차이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유물론자는 삶이나 의식 같은 것을 모두 하나의 원인과 결과로 생각하며 철학적 용어로 그것들을 말한다. 원인이 사라지면 그 결과 또한 사라질 것이다. 그래서 그대가 죽으면 그대의 몸을 이루고 있는 다섯 가지 요소들은 제각기 흩어진다. 물은 물로, 흙은 흙으로, 불은 불로, 바람은 바람으로, 허공은 또한 허공 속으로 사라진다. 거기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거기에 영혼 같은 것은 없다. 생존이란 단지 이 다섯 가지 요소들이 함께 모이는 것의 결과이다. 원인이 사라지면 그대도 사라진다.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Karl Marx)가 "의식이란 단지 하나의 산물이며 그것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한 이유이다.


달마는 말하고 있다.

그대가 어떤 것을 성취할 수 있다면 그것은 모두 인연에 의한 것이며 좋은 업을 쌓은 결과다. 그리고 그것은 여전히 생사의 바퀴를 돌리게 한다. 그대가 생사의 바퀴 속에 매여 있는 한 그대는 결코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다.

깨달음이란 어떤 원인과 결과가 아니다. 어떤 수행의 효과도 아니며, 그대가 가득 채운 요소들의 집합이나 산물도 아니다. 그래서 그것은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다. 단지 발견될 뿐이다.
이미 그것은 거기에 있다.
그대는 단지 눈을 감고 있을 뿐이다. 그대의 눈이 열릴 때 그대는 자신의 불성을 볼 수 있다. 그대가 그것을 만들어냈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단지 발견한 것이다.
그대가 눈을 뜨든, 눈을 뜨지 않든 그대의 불성은 실재한다. 눈을 감아도 그대는 부처이다. 눈을 열어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 그대는 여전히 똑같은 부처이다. 변화가 있다면 그대가 이해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대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맙소사! 나는 지금까지 깨달음을 찾아왔다. 도처에서 모든 종류의 수행을 하며 부처를 찾아왔는데 그것들은 모두 어리석은 행위였다. 내가 부처이면서도 계속해서 '나는 부처다.' 라는 말을 억지로 외워 오다니! 나는 언제나 부처였고 그것은 무조건적인 나의 본성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달마가 '그대는 사람들이 말하는 모든 종류의 종교적인 행위를 통해서도 그대의 불성을 찾을 수 없다.'라고 말할 때 그의 말은 그토록 의미심장한 것이다.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그대가 자신의 본성을 보아야 한다.

여기에 언어의 문제점이 나타난다. 말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이 문장을 보면 오해할 것이다. 마치 깨달음이 성취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깨달음은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발견될 수 있는 것일 뿐이다. 그 보물은 항상 그곳에 있다. 그대는 단지 그것을 발견하지 못할 뿐이다.
그대는 그것을 만들어낼 수 없다. 그것을 창조할 수 없다. 그것은 어떤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 거기에 있어 왔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그대가 그것을 발견하든 안 하든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것은 조건지어지지 않은 영원한 것이다.

그대가 그것을 보지 못하는 한 원인과 결과에 대한 이 모든 말들이 무의미한 것이다.

나는 이 말이 달마에게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이런 대담한 말은 그런 제자들에게서 나올 수가 없다. 오직 달마만이 그렇게 말할 수 있다.

부처는 무의미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이 말은 완전히 사자후(獅子吼)이다. 보통 사람들의 말이 아니다. 사자에게서 나오는 표효이다.

부처는 업으로부터 자유롭다. 인연의 사슬에서 자유로운 이가 바로 부처다. 만약 그대가 부처가 어떤 것을 성취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부처를 중상 모략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취의 문제가 아니다. 그는 단지 발견했고 눈을 떠서 자신을 보았을 따름이다.

부처가 무엇을 성취할 수 있겠는가? 마음을 집중시키고 힘을 모으고 어떤 견해를 갖는 것이 부처에게는 불가능하다. 부처는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친 존재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에 대해서 초점을 잡을 수 없다. 그는 다차원적이다. 그는 우주이다. 오직 한가지 차원일 때만 초점 잡는 것이 가능하다. 그래서 그대는 일상적인 마음에 대해서는 초점을 잡을 수 있다. 그것은 집중될 수 있다. 그러나 부처는 어느 한 점으로 집중이 될 수 없다. 그는 모든 방향, 모든 차원으로 열린 하늘이다.

부처는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친 존재가 아니다. 부처의 무심은 비어있는 것이 그 본성이라서 순수하고 순수하지 않은 것 모두를 초월한다.

여기서도 마음은 무심으로 바뀌어야 한다. 만약 그것이 마음이라면 비어 있는 것이 그 본성이 될 수 없다. 마음은 항상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마음은 생각을 담는 그릇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마음은 사고의 진행 과정에 대한 다른 이름일 뿐이다. 낮에는 그것을 생각이라고 부르고 밤에는 그것을 꿈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것은 항상 어떤 것들로 채워져 있다. 그것은 결코 텅 비어질 수 없다. 텅 비어지는 순간 마음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을 통과해서 지나가는 생각이 어떤 종류인가에 따라서 마음은 항상 순결과 오염을 반복한다. 그대가 누구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나 어떤 것을 훔치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고, 누군가를 도와주고 싶은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대가 품는 생각에 따라서 마음은 수시로 변한다. 그래서 마음은 결코 텅 비어질 수 없다. 마음이란 선한 생각이든 악한 생각이든 생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어록에서 마음이란 단어를 무심으로 바꾸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에야 비로소 위의 말이 의미 있는 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은 결코 이중성을 초월할 수 없다. 그것은 항상 찬성이나 반대의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항상 나누어지는 것이며 결코 전체가 될 수 없다. 그래서 그대의 마음은 항상 망설이게 되는 것이다. 그대가 무엇을 하든지 그대의 일부분은 그대와 다른 생각을 갖게 된다. 무슨 일을 하려고 할 때 마음은 항상 "그것을 하지 말라, 그것을 하면 후회하게 될 것이다."라고 속삭인다.
이것이 모든 사람이 불행에 빠져 있는 이유 중의 한가지이다. 그대가 무엇을 하든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대 마음의 일부가 항상 그대가 하고자 하는 일에 반기를 드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 일이 잘못되면 그것은 이렇게 말한다.
"보라, 내가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내 말을 안 듣고 이 지경이 되었다."
그대가 그 말을 들었더라도 사실 상황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 말을 들었다면 "그렇게 하라."고 주장한 마음이 그대에게 투정을 부릴 기회를 가질 것이다. 그것은 그대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보라, 너는 내 말은 절대 안 듣는다. 그러니 좋아질 리가 없다."
오직 무심만이 어떤 이중성도 없다. 그것은 비어 있기 때문이다. 무심은 선택하는 마음이 아니다. 그것은 순수한 깨어 있음이다. 그것은 바로 텅 빈 하늘이다.

부처는 어떤 특정한 견해를 따르지 않는다.

이 말은 너무나 위대한 말이다. 황금 글자로 새겨 전 세계 곳곳에 붙여 두고서 모든 사람이 이해해야 할 말이다.

부처는 어떤 특정한 견해를 따르지 않는다.

그는 어떤 수행법도 다르지 않는다. 왜냐고? 그는 그런 견해나 수행법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는 완전한 각성 속에 산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도 어떤 도덕적 덕목도 따를 필요가 없다. 그는 완전한 각성 속에서 행동할 것이며, 그의 행동은 어떤 도덕 관념이나 경전에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그는 순간 순간 자신의 텅 빈 순수 속에서 행동한다.
그는 자신의 몸을 통해서 존재가 마음껏 반응하는 것을 고요히 구경하고 있다. 그는 하나의 거울과 같다. 그는 어떤 것도 하지 않는다. 그의 반응은 단지 거울에 반사되는 그림자일 뿐이다.

부처는 선을 행하지도 않고, 악을 행하지도 않는다. 부처는 부지런하거나 게으르지도 않다. 부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며, 자신이 부처라는 생각에 매달리지도 않는다.

자신 앞에 신이 서 있더라도 신은 그를 볼 수 없다. 그는 그저 순수한 비어 있음이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긴장도 갖지 않는다. 집중이란 하나의 긴장이기 때문이다. 그는 완전히 이완되어 있다.
그리하여 달마는 다음 말에서 자신의 경지를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부처는 부처가 아니다.

이 말은 사람들이 이해하기 매우 어려운 말이다.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이 세상에 있는 종교와 사상에 대해서 선입견을 갖고 있다. 부처는 부처가 아니다. 이 말을 그대는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너무나 중요한 말이어서 그대가 이것을 놓친다면 모든 것을 놓치는 것이다.
여기 한 가지 예를 들고자 한다. 아마 그것은 이 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갓 태어난 아기는 확실히 순수하다. 그 아기는 자신이 순수하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이 순수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더 이상 순수하지 않다. 아기는 자신이 순수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진짜로 순수한 것이다.
부처는 다시 태어난 존재이다. 그것이 의식의 새로운 탄생이다. 그는 두 번째로 신생아의 시절을 맞이한다. 그러나 그는 절대적으로 의식적이다. 하지만 그는 "나는 절대적으로 의식적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 그 말을 하면 그 의식은 절대적으로 순수하지 않다. 그의 의식은 아기의 순수함 바로 그것이다. 거기에 자아의식이란 존재할 수 없다. 다른 어떤 것을 위해 마련된 여지가 없다. "나는 부처다"란 생각조차 들어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다른 부처들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라.

부처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다. 그대가 바로 부처이다. 왜 다른 부처들에 대해서 생각하느라 그대의 시간을 낭비하는가? 왜 그대의 눈을 뜨고서 자신이 부처라는 것을 바라보지 못하는가? 부처에 대해서 생각한다고 해서 그대가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대가 그대의 마음을 보지 않는 한 그대는 내가 말하는 것을 결코 알지 못한다.
자신의 본성을 보지 못하고서 그저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수행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쟁이이며 어리석은 바보들이다.

여기에 한 가지 위험이 있다. 그리고 달마는 그 위험을 인식했다. 세상에는 교활한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거짓말쟁이이며 바보들이며, 남을 속이면서 자신도 속는 사람들이다. 나는 달마가 한 말과 같은 위대한 말들을 읽고 듣는 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행위, 즉 '무위(無爲)'를 가장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어떤 것이 옳고 그르다는 것을 분별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왜냐하면 달마 같은 사람들이 "그대가 바로 부처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눈을 뜨지도 않고 그런 말만 듣기를 즐긴다. 그들의 에고가 너무 강해졌기 때문에 그들은 눈을 뜨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본성을 경험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깨달았다고 선언하기 시작한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해를 끼치게 된다.
나는 자신이 깨달았다고 선언한 사람들을 많이 보았지만 그대보다 더 의식적이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서 이런 위대한 말속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 말들은 히말라야의 봉우리만큼 높은 것이다. 이 높은 데서 그대가 떨어진다면, 그대는 자신을 완전히 파괴할 것이다. 이 비밀들은 진지하고 정직하게 이해되어져야 한다. 사람들을 속여서도 안되고 그대의 에고를 키워서도 안 된다.


그들은 끝없는 허공에 떨어져서 마치 술 취한 자처럼 자신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들은 악으로부터 선을 가려낼 줄도 모른다. 만약 그대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행위를 수행하려 한다면 그대는 먼저 자신의 본성을 봐야 한다. 먼저 그대의 논리적인 사고를 멈춰야 하는 것이다. 그대 자신의 본성을 보지 않고서 깨달음을 얻기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것은 각자가 얼마나 자신에게 진실하고 진지한지에 달려 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그대를 막을 수 없다. 그대는 자신이 깨달았다고 선언할 수 있다. 그러나 그대의 삶은, 그대의 눈동자와 행동은 그 사실을 보여 주지 못한다. 그대 주위의 모든 것이 그대가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여 줄 것이다. 그것들은 어떤 식으로도 그대를 돕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겨우 몇몇 사람을 인도할 것이다. 그것도 잘못된 길로 말이다. 그리고 그 몇몇 사람을 얻는다면 그대는 자신이 깨달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는 그런 바보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런 바보들을 제자로 받아들이고서 그대는 자신이 확실히 깨달았다고 믿기 시작한다. "내가 깨닫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런 현명한 사람들이 나를 믿을 수 있겠는가?"하고 말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모든 종류의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업이 없기를 바란다. 그들은 모든 것이 공허하다고 생각하면서 악행을 저지르고도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벗어날 희망이 없는 무간지옥(無間地獄)으로 떨어질 것이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그런 견해를 갖지 않는다.

그것은 개인이 책임져야 할 문제다. 그리고 이것보다 더 중요한 책임은 없다. 항상 기억하라. 한 순간도 잊지 말라. 그대 자신이 아닌 것을 결코 말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어둠 속으로 떨어질 것이며, 거기서 빠져나오기란 여간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모든 상황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무심이 됩니다. 왜 누군가 그의 몸이 죽었을 때 우리는 이 무심을 보지 못합니까?"
무심은 항상 존재한다. 그대는 단지 그것을 보지 못할 뿐이다.

무심은 하나의 사물이 아니다. 그것은 상품도 아니며 어떤 대상도 아니다. 무심은 텅 빈 허공이다. 그것은 침묵이다. 그대는 그것을 들을 수 있다. 그대는 그것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그대는 그것을 절대적인 침묵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가? 그대는 침묵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어떤 소리도 그대는 거기서 들을 수 없다. 그대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침묵이라고 결론짓는 것이다. 그것은 그대가 어떤 고통이나 긴장, 근심, 걱정을 느끼지 못했을 때 그것을 축복의 상태라고 경험하는 것과같다. 하지만 그것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하나의 사물은 아니다. 무심은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사람의 몸에서 떠나는 것을 볼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내가 마음을 무심으로 바꾸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마음이라고 어록에 나와 있을 때 나는 그것을 무심이라고 바꾸었다. 마음은 보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것을 매일 볼 수 있다. 사람이 죽어야 그것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살아 있을 동안에도 그대는 그것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눈만 감으면 그것은 언제든지 나타난다.

"그러나 그 무심이 존재한다면 왜 제가 보지 못합니까?"

달마의 대답을 이해하려고 그 제자는 질문을 한다. 그는 틀림없이 대답을 들었다. 하지만 그는 그 대답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 방식으로 그것을 해석했다. 달마는 이렇게 말했다. '무심은 항상 존재한다. 그대가 단지 그것을 보지 못할 뿐이다.' 그것은 순수한 텅 빔이기 때문에 그대는 보지 못한다. 그것은 하나의 사물이 아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것은 글자 그대로 '공(空)'이다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 제자는 다른 말로 바꾸어 똑같은 질문을 하고 있다. 만약 마음이, 아니 무심이 있다면 왜 내가 그것을 보지 못합니까?
그 다음은 그가 달마의 대답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잊어버린 것같이 보인다. 질문은 거기에 있지만 답은 아무 데도 없다. 하지만 답은 반드시 존재한다. 그 답은 바로 그대 자신이다. 그래서 그대가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대의 눈동자 외에는 이 세상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대 자신의 손을 빼고는 이 세상 무엇이든지 손으로 만질 수 있다. 그처럼 무심이란 바로 그대 자신의 본성이다.
나는 그것을 느낄 수 있다. 나는 그것과 함께 살 수 있고, 만질 수 있으며, 그것을 노래 부를 수 있고, 춤출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볼 수는 없다. 내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것은 대답이 될 수 있지만, 기록될 수는 없다.
그래서 달마는 제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그는 제자에게 이렇게 묻고 있다.

그대는 꿈을 꾸어보았는가?
"물론입니다."
그대가 꿈을 꿀 때 그것은 그대인가?

그러나 여전히 그 제자는 이해하지 못하고 대답만 한다.

"예, 바로 저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달마나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에 반대되는 것이다. 모든 깨달은 사람은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 "그것은 내가 아닙니다."라고 말이다. 내가 어떻게 꿈이 될 수 있는가? 꿈은 내 앞에서 떠다니는 것이지 내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그것들을 볼 수 있다. 우리가 그것들을 볼 수 있기 때문에 그것들은 우리 자신이 아니다. 나는 보는 자이고 그것들은 보여지는 대상이다. 나는 아는 자이고 그것들은 앎의 대상이다. 나는 주체이고 그것들은 객체이다. 그래서 그 제자가 올바르게 대답하고자 한다면, 그는 "그것은 제가 아닙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면 꿈속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그대와 어떻게 다른가?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똑같은 이치이다. 그것은 그대의 행동과 다르지 않다. 꿈속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깨어있을 때의 행동과 다른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대의 행동이 그대 자신은 아니다. 그대는 그대의 몸이 행동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대가 그것 자체는 아니다. 그대의 의식이 걷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대가 걷거나 눕거나 무엇을 하더라도, 그대의 의식은 항상 변함 없이 그대 내면에 존재한다. 그래서 정확한 대답은 이렇게 말해져야 한다. "예, 그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그것은 내가 아닙니다. 나의 행동이 나 자신은 될 수 없습니다. 나는 항상 지켜보는 자로서 나의 행동 뒤에 남아 있습니다. 나는 그것들을 초월한 지켜보는 자입니다."

그러나 다르지 않다면 이 몸은 그대의 진짜 몸이 아니다.

그렇다, 그대의 진짜 몸은 그대의 의식이다. 그대의 행동이 그대의 진짜 몸이 아니다. 그대의 진짜 몸은 그대의 무심인 것이다. 그대의 몸은 그대가 죽고 나면 화장터에 가서 재로 변한다. 하지만 그대는 불에 타지 않을 것이다. 그대의 의식은 거기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체를 얻게 된다. 그래서 달마는 계속 말한다.

그대의 진짜 몸, 즉 진신(眞身)은 그대의 무심이다. 이 무심은 시작도 없는 영겁으로부터 지금까지 한번도 달라진 적이 없었다. 그것은 결코 죽거나 새로 생기지 않는다. 사라지거나 다시 나타나지도 않으며, 불어나거나 줄어들지도 않는다. 그것은 선행이나 악행으로 깨끗해지거나 더럽혀지지도 않으며 진실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다. 그것은 남자도 아니며 여자도 아니다. 과거도 아니며 미래도 아니다. 그것은 승려나 속인으로 나타나지도 않고, 늙은이나 젊은이도 아니며, 성자나 바보도 아니다. 그것은 부처도 아니며 중생도 아니다. 그것은 깨달음을 얻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으며, 업으로부터 고통받지도 않는다. 그것은 어떤 모양이나 형체도 갖지 않는다. 그것은 허공과 같다. 그대는 그것을 소유할 수 없다.

그대의 몸은 여러 번 죽고 또 죽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다시 태어난다. 그것은 그대의 진짜 몸이 아니다. 그대의 진짜 몸은 그대의 무심이다. 그래서 석가모니 부처는 "바닷물은 어디에서 맛보아도 그 맛이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그대의 진짜 몸이 그대의 진정한 존재이다. 바로 진신(眞身)인 것이다. 여러 가지 몸을 받더라도 그대의 진신은 변함이 없다. 지금 그대의 몸이 남자거나 여자거나 그대의 진신은 그런 구별이 없다.

물론 잃어버릴 수도 없다. 그것은 산이 막혀도 통과하며 강이나 바위벽도 그냥 지나간다. 그것의 멈출 수 없는 힘은 오대(五大)의 산을 넘어가고 삼사라(Samsara)의 강을 건너간다.

여기서 오대의 산이란 불교에서 말하는 다섯 가지 기본 요소를 말한다. 그것은 지(地), 수(水), 화(火), 풍(風), 공(空)이다. 이 다섯 가지 요소들이 소위 그대의 몸이라는 것을 구성하고 있다. 하지만 이 다섯 가지 요소들이 제각기 흩어져도 그대의 진신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장애를 초월해서 진정한 집에 이른다.
이 세상은 삼사라의 세계이다. 삼사라는 윤회의 강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이 강조차도 그대의 진신은 궁극의 집에 도착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궁극의 집은 그대 내면에 이미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에서 그대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대는 이미 거기에 있다. 단지 그대가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어떤 업도 이 무심을 제한할 수 없다. 이 무심이 진신(眞身)이며 바로 그대의 본성이다. 그것은 너무나 미묘해서 잡아내기가 쉽지 않다. 그것은 감각적인 마음과 같지 않다. 모든 사람이 이 무심을 보고 싶어한다. 그리고 이 무심의 빛에 의해서 손과 발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갠지스강의 모래알처럼 많다.
비록 그대가 그것을 보지 못할지라도 모든 사람이 그것을 갖고 있다. 그대는 그 빛 속에서 살고 있다. 바로 그대의 삶이 그대의 무심에 속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물어 보라. 그들은 그것을 설명할 수 없다. 그들은 이 마음이 뜻하는 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와 같다. 그들이 왜 그것을 보지 못할까?

그대는 살고 있다. 그대는 살아 있는 것을 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대에게 삶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혹은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그대는 당황할 것이다. 그것은 그대가 어떤 훌륭한 요리를 맛보고서 사람들이 그 맛을 설명해 달라고 하는 것과 같다. 어떻게 그것을 말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것을 전달할 수 있는 길은 물은 사람이 직접 맛보는 길밖에 없다. 거기에 어떤 설명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의 내면에 부처가 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꼭두각시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대 내면에 있는 이 부처를 왜 알지 못하는가? 왜 그대는 꼭두각시인 채로 남아 있는가? 그대 자신의 주인이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단지 조금만 흔들어도 그대 내면에 있는 자신이 깨어날 것이다. 모든 명상이 바로 깊은 영적 잠에 빠진 그대를 흔들어 깨우려는 수단일 뿐이다. 오스펜스키(P. D. Ouspensky)는 그의 저서 《기적을 찾아서(In Search of the Miraculous)》를 그의 스승 게오르그 구르지예프(Geroge Gurdjieff)에게 헌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의 잠을 깨운 분인 게오르그 구르지예프에게."
이것이 바로 스승의 역할이다. 어떤 식으로든 그대를 깨우는 것이 스승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다.
어디로 갈 곳도 없고 성취할 수 있는 것도 없다.
그대는 이미 있어야 할 곳에 와 있다.
그대에게 죄가 있다면 그것은 아직도 그대가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찾는 행위는 미혹되는 유일한 길이다.
그대 자신 속에 머물러 있으라. 그 모든 것으로부터 그대 자신을 벗어나게 하라. 모든 에너지를 그대 자신에게로 집중하라. 구르지예프는 그것을 '결정화'라고 불렀다. 구르지예프는 바로 달마와 같은 사람이다. 만약 달마와 같은 사람을 들어 보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구르지예프를 말할 것이다. 달마가 그대의 불성을 깨우라고 말했다면, 구르지예프는 그대의 존재를 결정화시키라고 말했다.
이 어록을 읽으면서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느꼈다. 그것은 여기저기에서 잘못 쓰여진 부분들이 발견된 것이다. 그 오류들은 깨달은 자에 의해서 쓰여진 것이 아니다. 그토록 무작정 쓰여진 것들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사람들에게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것들은 올바르게 고쳐져야 한다. 그래서 나의 주석은 아리송하고 틀린 것 모두를 신랄하게 꼬집었다. 나는 이 어록을 달마의 완전한 육성으로 고치고 싶다. 다른 제자들의 어떤 편견도 물들지 않은 것으로 말이다. 물론 그런 일은 항상 있어 왔다. 예수의 복음도 3백 년이 지난 후에 쓰여졌다. 그때 이미 예수의 진짜 복음은 사라져 버렸다. 기독교인은 아무도 또 다른 예수가 나타나서 자신들의 복음을 고치기를 원치 않는다. 그래서 내가 고칠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의 경전은 그가 죽자마자 씌어지게 되었다. 물론 그것은 불경 전부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죽고 나서 백 년도 못되어 32개의 학파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들의 주장은 제각기 달랐다. 석가모니 부처의 말에 대해서32가지 주석이 생겨난 것이다. 하지만 석가모니 부처는 더 이상 이 땅에 존재하지 않았고 그는 잘잘못을 고쳐줄 수 없었다. 그는 미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매우 명확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명확함이 마음을 초월하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서 혼란으로 바뀌고 말았다. 무심은 명확한 것이지만 마음은 혼란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무심에서 나온 침묵은 그대에게 명확함을 선사한다. 그대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렸는지 즉시 알 수 있다. 그것은 논쟁의 문제가 아니다. 이 어록을 읽으면서 나는 옳고 그름을 가려내기 위해서 한 순간도 머뭇거리거나 숙고하지 않았다. 잘못된 부분은 내가 보는 순간 즉시 나타났다. 거기에는 아무런 주저도 없었다.
이 어록을 보면서 나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 제자들에 의해서 쓰여진 모든 고대 경전들을 살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수정도 없이 몇 천 년씩 그대로 내려왔다. 그리고 지금은 그것들이 올바로 고쳐져야 할 시기인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너무나 광신적이고 깊이 빠져 있어서 어떤 변화도 원치 않는다. 예를 들어 내가 수정한 부분은 불교도에게는 환영받을 만한 일이 못 된다. 그들은 내가 마음대로 경전을 고치는 것에 대해서 상처를 입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 어록의 몇 부분이 달마로부터 나온 것이 아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책이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에 의해서 쓰여졌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는다. 많은 부분들이 왜곡되었고 엉터리 주석들이 덧붙여져서 결국 혼란만 더하게 되었다. 제자들은 이 어록을 하나의 완전한 철학으로, 논리적인 이야기의 줄거리로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그 일은 어려운 일이다. 그렇게 되면 더 많은 사람들을 괴롭힐 것이다. 나 역시 고대의 경전들을 고침으로 해서 수백만의 사람들을 괴롭힐 것이다. 물론 나는 전에도 수많은 사람들을 괴롭혀 왔다. 하지만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미래 세대에 출현하게 될 새로운 인간은, 전 세계가 한 사람에 의해서 괴롭힘을 당한다는 사실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일에 몰두한 그에게 적어도 감사함을 느낄 것이다. 그는 무엇이 진리이며, 무엇이 진리가 아닌지를 정확히 가려 놓았기 때문이다.

알겠는가?
 

출처 : 세존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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