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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12 11:36

[달마의 불승론 佛乘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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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죽은 사람은 피를 흘리지 않는다[달마의 불승론 佛乘論]
 

                                      조셉 아르파이아·롭상 랍가이 저, 서보경 역
 
 

달마어록 불승론 佛乘論

도의 본질은 집착을 벗어남에 있다. 또한 그것은 모든 모양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사람들에게 수행의 목적지가 된다. 경에 이르기를 "벗어남은 곧 깨달음이다. 그것은 모든 모양을 부정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삼계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세계다. 삼계를 떠나는 것은 곧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부터 떠나서 계(戒), 정(定), 혜(慧)로 돌아감을 말한다. 경에 일렀으되 "오직 사람이 세 가지 독(毒)에 물든 세상에 살면서 순수한 다르마로 자신을 키워갈 때 그가 곧 부처다."라고 했다. 세 가지 독이란 바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다.
대승은 모든 가르침 중에 가장 위대하다. 그것은 보살이 타고 가는 수레이다. 그들은 어떤 것을 사용함 없이 모든 것을 사용한다. 그들은 돌아다님 없이 종일토록 길을 간다. 그것이 바로 부처의 수레인 것이다. 경전에 이르기를 "수레 없음이 바로 부처의 수레(佛乘)이다."라고 했다.
또 경에 일렀으되 "오대(五大)가 한데 모인 동굴이 선(禪)의 마당이며 내면의 눈을 뜨는 것이 대승의 문이다."라고 했다. 무엇이 이것보다 더 명료할 수 있겠는가?
어떤 것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음은 곧 선이다. 한번 그대가 이것을 알면 걷고, 머무르고, 앉고, 눕는, 그대가 행하는 모든 것이 선(禪)이다. 마음이 비어 있음을 아는 것이 바로 부처를 아는 것이다. 선의 길에서 보면 부처는 어떤 마음도 갖고 있지 않다. 이 무심을 아는 것이 곧 부처를 보는 것이다.
아무런 후회 없이 자신을 포기하는 것은 가장 위대한 덕이다. 움직임과 고요함을 모두 초월하는 것이 가장 지고한 명상이다. 중생은 아라한이 고요함에 머무를 동안도 쉬지 않고 움직인다. 그러나 지고한 명상은 이들 중생과 아라한 둘 다를 초월한다. 이러한 이해에 도달한 사람은 노력하지 않고도 모든 모양으로부터 자유로우며 치료하지 않고도 모든 병을 낫게 한다. 그러한 것이 선의 위대한 능력이다.

 

죽은 사람은 피를 흘리지 않는다.

달마의 말은 다른 어떤 깨달은 사람보다 정확하다. 그의 말은 정수를 곧바로 찌른다. 그대가 깨달음의 경험을 표현할 때는 실수할 가능성이 있다. 이 점은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깨달은 사람은 전혀 실수를 할 수 없다고들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들의 기대일 뿐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다른 종교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그들은 자신들의 예언자는 절대로 실수하는 법이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꾸란》에도 실수는 가득 차 있다. 그들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예언자 마호메트는 결코 어떤 실수도 저지르지 않는다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역시 실수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2천 년 동안 자신들이 절대로 틀리지 않았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틀린 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를 들면 잔다르크는 당시 교황에 의해서 마녀로 낙인 찍혔다. 본래 마녀란 뜻의 '위치(witch)'란 단어는 '지혜로운 여자'란 뜻이다. 그런데 교황은 그 말을 악마와 간음한 여자로 정의했다. 그리고 중세 유럽에서 교황은 지혜로운 여자들은 모두 악마의 손아귀에 빠진 여자라고 선언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들은 그런 여자가 있으면 일단 잡아와서 참을 수 없는 고문을 가했다. 그리고는 그녀가 그 사실을 인정할 때까지 고문은 계속되었다. 고문을 멈출 수 있는 길은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번 그녀가 그 사실을 인정하면 곧바로 종교재판이 시작된다. 그들은 그 불쌍한 여인이 악마와 간음을 했다는 등, 추한 욕설로 그녀를 묘사했다. 그리고는 산 채로 불에 태워 죽였다. 유럽에서는 수천 명의 지혜로운 여자들이 그렇게 죽어갔다.
잔다르크는 그녀의 나라를 위해서 싸웠다. 그녀는 어렸지만 매우 용기 있는 아가씨였다. 그리고 그녀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서 싸워 이겼다. 그녀는 곧 영웅이 되었다. 그러자 시기심 많은 교황은 잔다르크를 그대로 놓아 둘 수가 없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잔다르크가 더 훌륭한가, 아니면 교황이 더 훌륭한가?"하는 비교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가장 쉬운 길은 그녀를 마녀로 낙인찍는 길이었다. 곧 그 불쌍한 아가씨는 잡혀 왔고 그 사실을 인정할 때까지 고문이 가해졌다. 그녀에게는 화형을 당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었다.
하지만 이 일은 교황이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결과가 발생했다. 그는 사람들의 눈에서 벗어났고 잔다르크는 순교자가 되었다. 그녀는 살아 있을 때보다 더욱 추앙 받았다. 사람들은 그녀를 숭배하기 시작했다. 3백 년이 지난 후, 다른 교황은 과거의 교황이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과거의 교황이 불필요한 순교자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안 것이었다. 그는 매우 신중한 사람이었다. 그런 일을 통해서 보통 여자는 그대로 매장해 버리기가 쉬웠지만 잔다르크 같은 여자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잔다르크가 죽은 지 3백 년, 교황은 그녀가 마녀가 아니었다고 선언했다. 그녀는 성자였으며 그녀의 뼈는 무덤에서 파내어져서 성인의 유골로 모셔졌다. 거대한 기념관이 세워졌고 이제 그녀는 '성녀 잔다르크'가 되었다. 그대도 알 수 있듯이 분명히 두 사람의 교황 중에 하나는 잘못된 것이다. 둘 다 잘못될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교황은 깨달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깨달음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동양은 일만 년 동안 깨달음의 현상에 대해서 연구해 왔다. 그것은 확실히 그대에게 빛과 명료함, 환희심과 불멸의 확신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그대의 깨달음이 그처럼 위대한 것이지만, 존재계는 너무나 광대해서 그대의 경험은 바다 속에 떨어진 한 방울의 이슬에 불과하다. 그대의 이해는 얼마나 투명한지 모른다. 하지만 항상 실수를 저지를 가능성은 거기에 있다. 그리고 동양에서는 그 사실이 인식되어졌다.
석가모니 부처조차도 존재계는 너무나 광대하고, 그것은 모든 차원에서 무한하기 때문에 깨달은 사람조차도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이 말은 진정한 종교적 자세이며 참된 겸손이다.
완전하다는 생각은 추한 에고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달마 역시 틀릴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니 내 말을 오해하지 말라. 달마가 깨닫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달마는 깨달았다.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 중의 하나이다. 그의 경지는 아무나 쉽사리 흉내 내지 못한다. 그러나 깨달음이 그대의 존재 전체에 봄을 가져다 주고 그대의 잠재성을 꽃피운다 할지라도, 그대가 어떤 실수도 하라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사실 깨달은 사람은 너무나 겸손해서 그대가 실수를 지적한다면 그는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그는 어떤 에고도 없다. 그는 상처를 받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자존심과는 분리되어 있다. 존재계는 다차원적이라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기에, 그리고 말이나 행동은 일방적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존재계는 모든 모순을 다 포함한다. 그리고 가장 지고한 깨달음의 관점에서조차도 모순들을 다 소화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인간은 인간이다. 그는 잠들어 있거나 깨어 있거나 둘 중 하나이다. 그리고 사실 모순은 모순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하나의 요소일 뿐이다. 차라리 한쪽 방향으로만 생각하고 다른 쪽은 반대하는 것이 더 쉬워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깨달음이 완전한 것이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깨달은 사람조차도 부분적으로 나타나 보일 수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주의 광대함 때문이다.
석가모니 부처가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마하비라와 동시대의 인물이었다. 그리고 마하비라의 제자들은 마하비라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아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는 존재했던 모든 것을 알며,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을 안다고 그의 제자들은 생각했다. 그들은 그가 전지전능한 신이라고 생각했다. 그 말을 들은 석가모니 부처는 웃었다. 이 사실은 기억해야 할 점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마하비라가 아무도 살지 않는 집 앞에 서서 음식을 구걸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사람들은 그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 환히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그는 그 집 안에 아무도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또 석가모니는 마하비라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어는 날 나는 마하비라가 새벽 일찍 돌아다닌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때는 한여름이어서 해가 뜨면 매우 덥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는 언젠가 한번 개의 꼬리를 밟은 적이 있었다. 그 개가 짖기 시작했고 그제서야 자신이 밟고 있는 것이 개의 꼬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곳은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두 아는 그 사람이 어떻게 자기 발 밑에 개가 있다는 사실을 모른단 말인가?"
나는 석가모니 부처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마하비라는 자신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해 달라고 결코 요구하지 않았다. 제자들이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사람들은 마하비라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기에 그를 좋아한다. 그래서 석가모니 부처의 제자들이 석가모니 부처에게 이렇게 물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아는 당신의 경지는 어는 정도로 높은 것입니까?"
석가모니 부처는 매우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전지전능하지 않다. 나는 단지 명확한 견해를 갖고 있을 뿐, 그것은 존재계의 광대함에 비교한다면 하나의 작은 현상일 뿐이다. 그렇다, 나는 과거에 대해서 알 수는 없다. 과거에 대해서 초점을 맞춘다면 말이다. 그리고 미래에 대해서도 초점을 맞춘다면 미래도 알 수 있다. 그리고 현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대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는 초점을 맞춘다는 일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초점을 맞춘다는 것은 집중의 또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집중한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온 것이며 깨달음은 무심에서 나온다. 무심은 초점이 없다. 그것은 어떤 경계선도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깨달은 사람이라도 때때로 미세한 실수를 저지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깨달음을 거스르지는 않는다. 나는 오늘 어록에서 달마가 보살에 대해서 찬성하고 아라한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이 그의 작은 실수임을 그대에게 밝히려는 것뿐이다. 그는 차라리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나는 아라한의 경험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나는 아라한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마하야나(Mahayana:대승)를 찬양하고 있다. 그리고 히나야나(Hinayana:소승)는 비난하고 있다. 그것은 소승의 가르침이며 아라한의 길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둘 중 어떤 것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한쪽 면에 있는 사람은 다른 쪽 면을 보지 못한다.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이야말로 양쪽 면을 모두 볼 수 있다.
어록은 이렇게 시작된다.

도의 본질은 집착을 벗어남에 있다.

그것은 진실이다. 우리의 모든 불행은 집착에서 비롯된다. 우리의 모든 무지와 어둠이 바로 이 집착의 수천 가지 결합에서 빚어내는 작품이다. 우리가 어떤 것에 집착할 때, 우리는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그것을 빼앗기게 된다. 그대는 아마 돈에 집착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일 그대는 파산할 수도 있다. 그대는 권력에 집착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들 역시 물거품이다. 오늘 있었다가도 내일은 흔적조차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러시아 혁명 때 총리였던 케렌스키(Kerensky)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도 차르(czar)의 가족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혁명으로 혼란한 시대에 차르는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죽임을 당했다. 혁명의 세력은 6개월 짜리 아기도 남겨 두지 않고 죽였다. 그들은 이 세상에 차르의 피를 가진 사람은 하나도 남겨 두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케렌스키는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그는 1960년까지 뉴욕에서 과일가게를 하며 살았다.
러시아 제국은 이 세상에 존재했던 가장 큰 제국이었다. 그 영토는 한없이 넓다. 그리고 그 나라의 총리라면 절대적인 권력자였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그는 식품점 주인으로 몰락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도 바꾸었다. 그가 죽고 나서 신문에 그의 일기가 발표되었고, 그가 차르 황족의 한 사람으로서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총리였던 사실이 밝혀졌다.
우리의 모든 지위, 권력, 재산, 명성, 이런 것들은 모두 물거품과 같다. 그래서 '도의 본질은 벗어남에 있다.'는 말은 확실히 옳다. 그러니 물거품에 집착하지 말라. 그렇지 않다면 그대는 계속 고통과 비극 속에 살아갈 것이다. 그 물거품은 그대를 봐주지 않는다. 그것들은 계속 생겼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면서 그것에 집착한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남긴다. 그대의 에고에 깊은 실패감과 자괴감을 들게 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그대의 삶을 지옥으로 만든다.
삶은 꿈과 같은 재료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도의 본질을 알게 될 것이다. 놓아 버리라! 세상 속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말라. 세상이 그대 안으로 들어와서 살게끔 하지 말라. 이 모두가 아름다운 꿈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 모든 것은 변하고 사라지기 때문이다.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말라.
집착은 그대의 무의식 때문에 일어난다.
그대가 놓아 버리기 시작할 때 거대한 에너지의 해방이 그대 속에서 일어날 것이다. 사물에 집착함으로 해서 묶여 있던 에너지가 해방되어 이제 그대를 깨어나게 할 것이다. 새로운 존재로, 새로운 빛으로 말이다. 거기에는 고통과 번민과 비극이 일어날 어떤 가능성도 없다.
오히려 이 모든 것들이 사라질 때 그대의 본래의 자신이 얼마나 고요하고 평화로우며 미묘한 기쁨 속에 있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대 속에는 웃음의 근원이 있다. 그것이 달마가 부처는 웃음 없이 웃는다고 말한 뜻이다. 아무도 웃고 있는 불상을 보지 않았다. 부처는 웃는 행동을 할 필요가 없다. 그의 전 존재가 웃음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웃음의 심리학을 이해해야 하다. 그대는 너무 일찍 웃는다. 그러나 그대의 웃음은 부처의 웃음과 질적으로 다르다. 그대의 웃음은 삶이 너무 불행해서 나오는 웃음이다. 우스운 일이 벌어질 때 그 순간 고통을 잊어버리는 그런 웃음이다. 그대의 긴장이 잠시 사라질 때 거기에 웃음이 나타난다. 그래서 웃음이란 건강한 것이고 푸근한 것이다. 단 한 순간의 웃음이라도 그대의 긴장은 풀어진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대는 다시금 어둠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부처의 웃음은 긴장이 풀어질 때 나오는 웃음이 아니다. 그는 긴장 속에서 터져 나오는 에너지를 축적하지 않는다. 그는 삶 자체가 우스개라는 사실을 안다. 지금 이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하는 짓이 모두 우스운 것이다. 웃음은 그의 세포 하나하나에 배어 있다. 그것은 그의 입술을 통해 나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한 여인이 침대 위에서 남자와 함께 누워 있다가 갑자기 소리쳤다.
"일어나욧, 빨리! 남편의 차 소리가 들렸어요. 그 차는 너무 낡아서 1킬로 밖에서도 소리를 들을 수 있어요. 그는 지금 집을 향해 달려오고 있어요. 그러니 빨리 일어나요."
그 사내는 허둥지둥 일어나서 말했다.
"어디로 가면 좋겠소?"
그녀가 말했다.
"창 밖으로 뛰어나가요."
다행스럽게도 그 건물은 60층 짜리가 아니었다. 단지 일 층 짜리였다. 그래서 그는 창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는 벌거벗은 채로 마구 달렸고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조깅을 하고 있는 무리들이 그의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거기에 뛰어들었다. 그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벌거벗은 채 서 있다가는 감기가 들 것이다.
무리를 지어 조깅을 하는 사람들은 한 20명쯤 되어 보였다. 때는 이른 새벽이라 아직 어두웠고 그럭저럭 견딜만했다. 그런데 한 남자가 그가 벌거벗고 있는 것을 보고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당신은 항상 벌거벗고 조깅을 합니까?"
그 사내가 말했다.
"그렇소."
그때 어둠이 사라지고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조깅하는 사람들은 그 벌거벗은 주자가 바로 주교라는 사실을 알아보았다. 그런데 그는 완전히 벌거벗은 것은 아니었다. 자세히 보니 콘돔을 끼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남자는 또 물었다.
"신부님, 당신은 항상 콘돔을 끼고 달리시나요?"
주교가 말했다.
"아니오, 항상은 아니오. 비가 올 때만 낍니다."
그대가 삶을 지켜보면 지켜볼수록 그대는 삶이 하나의 코미디라는 것을 더욱더 알게 될 것이다. 그대 주위에서 웃기는 일들이 계속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부처는 웃지 않는다. 하루 24시간 그는 깨어 있는 그의 세포마다 웃음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소리내어 웃을 필요가 없다. 그저 고요히 웃음 속에 있다. 이것이 바로 웃음 없는 웃음이다.
만약 그대가 집착하고 있는 손을 놓아 버린다면 그대는 사람들이 얼마나 사소한 일에 집착하고 고통을 받고 있는지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자신을 보고 웃을 것이다. 전에는 그대도 같은 배를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확실히 집착을 벗어나는 것은 도의 본질이다.

또한 그것은 모든 모양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사람들에게 수행의 목적지가 된다.

그대가 이 세상에서 보는 것은 실체가 아니다. 단지 껍데기일 뿐이다. 그 겉모습 뒤로 깊숙이 실체가 숨어 있다. 실체를 알려면 그대는 모양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대의 집착이 그대를 구속한다. 하지만 그대가 집착하는 것은 껍데기뿐이다. 그것은 그대가 아직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대는 단지 장난감을 계속 바꿀 뿐이다. 그대는 여전히 아이로 남아 있다. 그래서 가치 없는 것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대는 철도역이나 공항을 가보면 아이들의 손에 곰인형이 들려진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은 곰인형이 없으면 잠도 잘 수 없다. 곰인형은 그들의 절친한 친구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철이 들면 곰인형을 떠난다. 그들은 새로운 곰인형을 발견한 것이다. 곰인형의 겉모양만이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돈도 될 수 있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마을에는 지독한 구두쇠가 살았다. 나는 결코 그를 잊지 못할 것이다. 그는 매우 부자였다. 그리고 누구에게 말을 할 때면 항상 떠들썩하게 말을 한다. 또한 하루 종일 뭔가를 중얼거렸다. 그는 이상한 생각에 집착해서 불쑥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내 주머니에 100루피가 없으면 나는 오줌을 누지 않겠다."
그는 마을에서 유명한 존재였다. 100루피는 항상 그의 주머니에 들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소변을 볼 수 있었으니까. 그는 자신의 부유함을 항상 뽐내며 다녔다.
그런데 그때는 지폐가 흔하지 않을 때다. 그래서 그는 100루피를 금화로 바꾸어 갖고 다녔다. 그래서 그의 주머니는 항상 묵직했다. 사람들은 그를 보면 이렇게 묻곤 했다.
"어디를 가는가? 당신은 당신 돈을 세어 보았는가?"
만약 그가 돈이 99루피였는데 갑자기 소변이 마렵다면 그때는 곤란할 것이다. 그때마다 그는 갑자기 자신의 돈을 세어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문제없다. 100루피가 그대로 있다. 나는 일 루피만 없어져도 소변을 보지 못한다."
그것을 위대하다고 할 것인가? 그의 돈은 그에게 곰인형과 꼭 같다. 그는 100루피와 함께 잠을 잘 정도였다.
그대가 조금만 깨어 있어도 그대는 자신의 곰인형이 무엇인지 한번 조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모양들 때문에 그대는 세상의 실체를 알지 못한다. 눈에 보이는 것은 실체가 아니다. 실체는 겉모습 뒤에 감추어져 있다. 그대가 실체체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한 그 모습들은 그대의 꿈을 만드는 재료가 되어 그대를 계속 고문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고통과 번뇌 속에서 산다. 그러나 그것을 떨쳐 버릴 방법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것과 함께 살수밖에 없다.
달마는 그 방법을 말해 주고 있다. 모든 종교의 본질적인 도를 말이다. 그것은 모양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경에 이르기를 "벗어남은 곧 깨달음이다. 그것은 모든 모양을 부정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삼계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세계이다.

그대는 이 삼계를 지켜봐야 한다. 그것이 바로 그대의 깨달음을 막는 장벽이기 때문이다.
달마는 매우 간결하게 말했다. 그는 철학적인 논쟁을 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사실만을 진술한다. 그것이 그의 아름다움이다. 그는 종교의 가르침 전체를 축약시켜서 몇 가지 말로 그 본질을 제시한다.
탐욕은 그대를 이루고 있는 한 가지 구성 요소이다.
그것은 항상 좀더 뭔가를 바라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멈추는 법이 없다. 그것은 계속 좀더 많이 갈구한다. 그대가 갈구하기 때문에 그대는 항상 불행하다. 그대가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그대는 그것을 즐길 수 없다. 그대는 좀더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가 좀더 가진다면 그때는 그대의 욕심이 그대를 앞서 나간다. 그러면 그대는 다시 전과 같은 상태에 빠진다.
나는 캘커타에 가면 매우 부잣집에 머물곤 했는데, 그들 부부는 나를 공항까지 마중 나오곤 했다. 그 남편은 항상 명랑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꼭 한번 그가 슬픈 기색을 보인 적이 있었다. 그는 차를 몰면서 매우 슬픈 표정을 지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웃고 있었다. 그는 차를 몰면서 매우 슬픈 표정을 지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웃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아내에게 물었다.
"무슨 문제인가?"
그 아내가 말했다.
"당신께서 물으시니 나는 대답을 하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당신 책임입니다. 나는 죄를 지은 것처럼 보이기 싫습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웃었다.
"그가 저렇게 슬퍼하는 것은 50만 루피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말했다.
"그런데 당신은 계속 웃고 있지 않은가?"
그녀가 말했다.
"사실 50만 루피를 그가 땄기 때문에 나는 웃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100만 루피를 따리라고 기대했는데, 50만 루피밖에 따지 못해서 저렇게 슬퍼하는 것입니다."
그의 불행은 그가 50만 루피밖에 따지 못한 것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단 1파이사도 잃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뭐가 그리 문제인가?"
그가 말했다.
"그녀가 옳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진짜 슬픕니다 그 사업에서는 100만 루피를 따내는 것이 확실했는데, 겨우 50만 루피밖에 못 땄으니 나는 나머지 50만 루피를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기대에 따라 행복해질 수도 있고 불행해질 수도 있다. 그대의 기대는 항상 실제로 벌어지는 상황보다 앞서 나간다. 그래서 거기에는 항상 실패감이 뒤따른다.
탐욕은 존재계에 대한 공격적인 태도이다. 그대는 될 수 있는 한 많이 긁어모으지만 결코 멈추지 않는다. 왜 인생을 긁어모으는 데만 낭비하는가? 긁어모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죽음은 그대에게서 그리 멀리 있지 않다. 그것은 바로 다음 순간 그대에게 닥쳐올 수 있다. 그러면 그대는 그동안 긁어모았던 모든 것을 그대로 남겨둔 채 이곳을 떠나야 한다.
한 지독한 구두쇠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너무 욕심이 많아서 그의 아내가 거의 죽어가고 있는데도 돈 계산만 하고 있었다. 옆에서 의사를 불러야 할 때라고 말해도 그는 "돈이 너무 많이 들 텐데."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내가 죽으면 또 장가를 들 수 있다. 죽고 사는 것은 사람에게 달린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운명에 의해 결정되어진 것이다. 그러니 왜 쓸데없이 돈을 쓰겠는가? 만약 그녀가 살아날 운명이라면 어차피 살아날 것이다. 그러니 의사를 부르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러자 옆에서 그의 친구들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자네같이 욕심 많은 친구는 처음 보았다. 나는 자네가 욕심이 많다는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이것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 자네가 죽으면 이 돈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가 말했다.
"물론 나는 계획이 있다."
친구들은 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또 물었다.
"무슨 계획이 있는가?"
그가 말했다.
"나는 죽기 전에 이 돈을 배에 싣고 가다가 돈과 함께 바다 깊숙이 뛰어들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친구들은 기가 찰 지경이었다. 그들이 말했다.
"자네는 정말 미쳤군. 자네는 그 돈을 그대로 놔두고 가야 하네."
그러자 그가 말했다.
"나도 안다네. 하지만 적어도 내 돈으로 다른 사람이 즐기는 것은 막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대는 모든 종류의 욕심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또한 그대 속에도 모든 종류의 욕심이 들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욕심이 채워지지 않으면 화가 나고 좌절감이 뒤따른다. 그대는 이 세상을 저주할 것이다. 그대 자신을 저주할 것이다. 그대는 모든 사람을 저주할 것이다.
그대는 나이 많은 사람들이 왜 그리 잔소리가 많은지 아는가? 그들과 잠시도 같이 앉아 있기 힘든 이유를 아는가? 그들은 모두 좌절한 인간들이다. 그들은 삶을 긁어 모으는데 허비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아무리 긁어모아도 결코 만족할 수 없다. 이제 그들은 삶을 저주하고 있다. 그들이 화를 내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탐욕은 그것이 채워지지 않았을 때, 그대를 분노하게 만들고 좌절하게 만드는 근본 원인이다.
그리고 그대의 분노는 세 번째 것을 만들어 낸다. 그것은 바로 미혹이다. 어리석음이다. 그리고 미혹은 하나의 위로가 된다.
미혹은 그대 자신을 어떻게든 보존하려는 노력이다.
네루(Jawaharlal Nehru)가 인도의 수상이 되었을 때, 자신이 바로 네루 수상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적어도 열 명이 되었다. 그들은 이름이 똑같았으며, 똑같은 베레모를 썼고, 손으로 짠 카디와 자와르 재킷을 입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내가 사는 도시에 있었는데, 그는 어투도 네루와 똑같이 했다. 그래서 나는 그가 강의하는 대학에 가서 그의 강의를 듣기도 했다. 나는 그가 싫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를 보고 웃었지만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는 나에게 말했다.
"이 사람들은 바보들이다."
그리고 그는 칸하키슬리(Kanhakisli) 근처에 있는 아름다운 왕궁을 방문하러 가겠다고 전보를 치곤 했다. 그곳은 수천 마리의 사슴이 사는 아름다운 숲에 둘러싸인 곳이었다. 그는 전보에다 이렇게 썼다.
"네루가 그곳에 도착할 것이다."
거기에다가 그는 네루의 비서라고 서명했다.
그는 사람들을 여러 번 속였다. 네루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 저택의 사람들은 난리가 났다. 방을 비우고 청소를 했다. 그러나 결국 그가 동명이인임이 밝혀졌고, 그는 정신병원에 가게 되었다.
그것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영국에서도 처칠(Winston Churchill)이 살아 있을 때, 적어도 영국에는 세 명의 윈스턴 처칠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완전히 윈스턴 처칠 수상이라고 믿었다.
칼리프 오마르(Kalif Omar)의 생애에도 이런 기록이 나온다. 한 사람이 그에게 와서 자신은 신으로부터 새로운 메시지를 갖고 왔다고 주장했다. 그 메시지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이제 마호메트의 가르침은 구식이다. 그가 죽은 뒤로 천 년이 흘렀고 모든 것이 바뀌었다. 그래서 신은 나를 그의 새로운 예언자로 보내었다."
이슬람교도들은 매우 광적이다. 오마르는 이 사람을 7일 동안 고문하도록 명령했다.
"이 자를 벌거벗겨 기둥에다 묶고 매로 쳐라. 먹을 것을 아무것도 주지 말라. 7일 후에 이 자를 보러 오겠다."
7일이 지나자 그가 다시 왔다. 기둥에 묶인 사람은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그들이 너무 매질을 많이 해서 피를 많이 흘렸고 음식도 먹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마르가 말했다.
"이제 어떻게 생각하는가? 마음이 바뀌었는가?"
그러자 죽어가던 그가 웃으며 말했다.
"마음이 바뀌었냐고? 내가 신의 곁을 떠날 때, 신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모든 예언자들은 항상 고문을 당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대의 고문이 내가 진짜 예언자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그러자 그 옆 기둥에 묶여 다 죽어가던 사람이 눈을 뜨고 소리쳤다. 그는 자신이 신이라고 선언한 죄로 거의 한 달 동안을 묶여 있었다.
"이 바보의 말을 믿지 말라. 나는 마호메트 이후로 어떤 예언자도 보내지 않았다. 마호메트는 나의 유일한 예언자이며 그는 사기꾼이다."
이제 이 사람들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겠는가? 그들도 예외가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일종의 미혹에 빠져 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는 미혹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미혹들은 그대의 삶이 흘러가도록 윤활유 역할을 한다.
대단한 위로가 된다. 그대가 수상이 될 수 없다면, 적어도 그대는 수상이라는 미혹은 만들어낼 수 있다. 그대가 세상에서 가장 큰 부자가 될 수 없다면, 적어도 그렇다고 믿을 수는 있다. 그대는 자신만의 미혹을 만들어낼 수 있고 그것은 너무나 굳건해서 아무도 변화시킬 수 없다.
사람들이 어떤 미친 사람을 정신과 의사에게 데리고 왔다. 그는 아주 특별하게 미쳐 있었다. 그는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가족들이 상점에 갔다오라고 이야기하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상점에 가느냐?"
가족들은 그가 완전히 살아 있다는 것을 설득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해봤으나 허사였다. 그는 결국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죽은 것을 내가 아는데 어떻게 당신들의 말을 믿을 수 있느냐?"
결국 그들은 정신과 의사에게 그를 데려왔고 정신과 의사는 말했다.
"걱정하지 마시오. 그를 말끔히 고쳐 놓겠소."
그리고 그는 미친 사람에게 물었다.
"당신은 죽은 사람이 피를 흘린다고 생각하는가?"
미친 사람이 말했다.
"아니오. 죽은 사람은 피를 흘리지 않소."
그러자 의사가 말했다.
"그렇다면 간단한 실험을 하겠소."
그는 칼을 갖고 와서 그 미친 사람의 손가락을 베었다. 금방 피가 뿜어져 나왔다. 가족들은 그것을 보고 기뻐했다. 이제 그는 마음을 고쳐 먹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미혹이라는 것이 그리 쉽사리 없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몰랐다.
미친 사람은 웃고 있었고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자, 보시오. 이 피가 당신이 살아 있음을 증명하지 않소?"
그러자 미친 사람이 웃으며 말했다.
"이 피가 바로 '죽은 사람은 피를 흘리지 않는다.'는 속담이 틀렸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오. 죽은 사람도 피를 흘린다오. 내가 바로 그 증거요. 이제 당신은 어떻게 하겠소. 이제 그 속담을 고쳐야 할 것이오. '죽은 사람도 피를 흘린다.'로 말이오."
미혹은 그대 깊숙이 뿌리박고 있다. 좌절한 채로 계속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이제 미혹된 대로 사물을 보기 시작한다. 그래서 자신이 미혹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는, 그대는 먼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달마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삼계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세계이다. 삼계를 떠나는 것은 곧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부터 떠나서 계(戒), 정(定), 혜(慧)로 돌아감을 말한다.

사실 계, 정, 혜는 세 가지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 가지 것에 대한 세가지 이름일 뿐이다.
그것은 바로 명상이다. 명상을 '정(定)'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삶의 한쪽 면에 계율을 가져다 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다른 쪽 면에서 보면 지혜를 가져다 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대가 직접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완전한 계율을 지키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대가 직접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명상뿐이다. 계율과 지혜는 명상의 부산물이다. 계율은 그대의 행동을 나타내며, 지혜는 그대의 지성, 그대의 깨어 있음을 나타낸다.

경에 일렀으되 "오직 사람이 세 가지 독(毒)에 물든 세상에 살면서 순수한 다르마로 자신을 키워갈 때 그가 곧 부처다."라고 했다.

달마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대해서 걱정할 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부처조차도 그대가 겪는 것과 똑같은 경험을 통해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명상을 통해서 자신의 본성을 안 사람이다. 그때 이 세 가지 독은 모두 사라지는 것이다. 그들은 바로 해독제를 발견한 것이다.
명상은 그대의 삶을 해치는 모든 독에 대한 해독제이다.
그것은 그대의 진정한 본성을 키워나간다.

세 가지 독이란 바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다. 대승은 모든 가르침 중에 가장 위대하다.

나는 이것을 편견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는 계속 대승의 우월함을 강조했다.

그것은 보살이 타고 가는 수레이다. 그들은 어떤 것을 사용함 없이 모든 것을 사용한다. 그들은 돌아다님 없이 종일토록 길을 간다. 그것이 바로 부처의 수레인 것이다. 경전에 이르기를 "수레 없음이 바로 부처의 수레(佛乘)이다."라고 했다.

보통 사람들의 마음에는, 논리적인 마음에는 이 말이 매우 비논리적으로 들릴 것이다. 먼저 그는 말한다.

대승은 모든 가르침 중에 가장 위대하다. 그것은 보살이 타고 가는 수레이다. 그들은 어떤 것을 사용함 없이 모든 것을 사용한다. 그들은 돌아다님 없이 종일토록 길을 간다. 그것이 바로 부처의 수레인 것이다.

그리고 나서 또 말한다.

경전에 이르기를 "수레 없음이 바로 부처의 수레(佛乘)이다."라고 했다.

이 말은 걸음 없는 걸음, 행위 없는 행위, 말 없는 말…… 등을 말할 때와 같은 맥락이다. 거기에는 어떤 모순도 없다. 그는 단지 수레란 말을 더 사용했을 뿐이다. 가장 위대한 수레는 바로 '수레 없음'인 것이다.

또 경에 일렀으되 "오대(五大)가 한데 모인 동굴이 선(禪)의 마당이며 내면의 눈을 뜨는 것이 대승의 문이다."라고 했다. 무엇이 이것보다 더 명료할 수 있겠는가?

오대는 그대의 존재를 이루고 있는 다섯 가지 구성 요소이다. 그것은 지(地), 수(水), 화(火), 풍(風), 공(空)이다. 이 다섯 가지로 구성된 그대의 존재 속에 진짜 보물이 숨겨져 있다. 그것이 곧 선의 마당이다.
이 다섯 가지로 만들어진 사원 안에 그대의 깨어 있음이 있다.
이 몸은 사원이다. 그대의 의식은 사원의 신이다.
그리하여 그대가 점점 깨어날 때 그대는 제삼의 눈이 열리기 시작한다. 이미 있는 두 개의 눈은 그대의 외부를 보는 것이라면, 제삼의 눈은 그대의 내면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자신을 보는 것은 가장 위대한 경험이다. 한번 그대가 자신의 아름다움을 본다면 그때는 외부 세계의 모든 아름다움은 빛을 잃는다. 한번 그대의 순수함을 보게 되면 그때 외부의 모든 것은 오염되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한번 그대가 내면의 광채를 바라보면 그때는 아무리 아름다운 일출 광경도, 석양의 노을도 밤하늘의 별빛도 그것과는 견줄 수가 없다. 그때 그대는 진화의 정점에 있으며 의식의 봉우리에서 있는 것이다.


 

어떤 것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음이 곧 선(禪)이다.

어떤 사념의 구름도 없이 침묵 속에 있는 것이 바로 명상이 의미하는 것이다.

한번 그대가 이것을 알면 걷고, 머무르고, 앉고, 눕는, 그대가 행하는 모든 것이 선(禪)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말이다. 아마 그대의 생활 전체가, 24시간 행하는 모든 행위가 명상의 경험이라고 말하는 종교는 그 어디에도 없다. 선은 아침에 일어나서 한 시간 명상하거나, 자기 전에 한 시간 명상하는 것 따위는 믿지 않는다. 선에서는 명상을 특별한 행위로 나누어 놓지 않았다. 선에서는 그대의 존재 전체가 명상 자체가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대가 무엇을 하든지, 걷고, 앉고, 서고, 눕고, 나무를 베고, 물을 긷는 것 모두가 바로 명상이다. 그대가 무엇을 하든지 고요함 속에서 평화롭게 하라. 그대 마음이 만들어내는 사념 속에서 하지 말라.
그때 그대의 삶 전체가 명상이 된다. 그대는 침묵 속에서 하루를 살아간다. 그때 생각은 사라지고 꿈도 역시 사라진다. 그때 하나의 고리가 완성된다.
선에서는 명상이 24시간 해야 할 일이다. 선에서는 그것을 일상 삼매의 경지라고 부른다. 그대가 특별히 해야 될 종교적인 의무는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일요일에 사원이나 교회에 가는 종교가 아니다. 6일 동안은 아무렇게나 살면서 일요일 하루 교회에 가서 훌륭한 기독교인이 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논리에 맞지 않으며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일 주일에 한 시간 교회에 가는 것으로, 그대의 욕심내고 성내고 미혹되는 세속의 삶을 바꾸어 주지 못한다. 그러면 어떤 예수도 그대를 구원할 수 없다. 이 아쉬람 마당에는 재미있는 말이 플래카드에 붙어 있다.
"예수가 저축하고, 모세가 이자를 늘여주고, 라즈니쉬가 쓴다."
나는 이 말을 좋아한다. 예수는 마치 은행가처럼 보인다. 그리고 모세는 사업가다. 그는 모든 것을 사업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모든 것을 다 써 버린다. 하나도 남겨 두지 않고 말이다. 왜 죽음이 와서 그것을 빼앗아 버릴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가? 그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일요일 종교나 하루에 다섯 번 기도하는 이슬람교 같은 것은 어떤 사람도 구원할 수 없다.
종교는 심장의 고동 같은 것이 되어야 한다.
명상은 그대 호흡과 같은 것이 되어야 한다. 그대가 무엇을 하든지 그대는 숨을 쉰다. 그것은 그대와 분리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다. 그리고 그대 존재의 모든 근육은 명상적으로 될 때만이 그대는 완전히 몰입할 수 있다.

마음이 비어 있음을 아는 것이 바로 부처를 아는 것이다. 선의 길에서 보면 부처는 어떤 마음도 갖고 있지 않다. 이 무심을 아는 것이 곧 부처를 보는 것이다.

이제 그대는 왜 달마의 제자들이 잘못된 주석을 갖다 붙였다고 내가 계속 주장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장은 달마가 한 말이다. 그의 제자들은 드디어 달마의 무심이란 표현을 그대로 썼다. 부처는 어떤 마음도 갖지 않는다. 그는 무심을 갖고 있다.
이 어록이 천 년 동안 존재해 왔지만 아무도 반대 의견을 내지 않는 것은 정말로 이상한 일이다. 아마 사람이 종교에 빠질수록 장님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그런 신자들은 어떤 모순도 발견할 수 없다. 명백한 모순이 보이더라도 말이다.

아무런 후회 없이 자신을 포기하는 것은 가장 위대한 덕이다.

그러나 인도의 헌법에서는 그런 것을 믿지 않는다. 인도의 헌법은 기독교 국가의 그것을 따라 만들었다. 그것은 정말 이상한 헌법이다. 완전히 잡탕밥이다.
인도에서는 잡탕밥을 키치리(Khichri)라고 부른다. 헌법을 제정한 사람들은 각국에서 이것저것을 모아다가 만들었다. 물론 모든 문장은 미사여구로 장식되어 있다. 하지만 그 문구들이 어떤 모순을 일으키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여기저기서 부분적으로 이것저것 가려 뽑아지는 순간 그 헌법 조항들은 본래의 맥락을 잃게 되고 죽은 것이 된다.
인도의 헌법은 세상에서 가장 쓸모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다른 곳으로부터 빌려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저절로 자라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얼기설기 엮어 놓은 것이다. 모든 좋아 보이는 것들만 가려 뽑은 것이다. 클레오파트라의 눈에, 암라팔리의 코에, 알렉산더 대왕의 신체에, 아인슈타인의 머리를 짜 맞추어 놓았다. 비록 그것들은 가장 훌륭한 것들만 모아 놓았지만, 그대는 시체 토막만 잔뜩 모아 놓은 것이다. 그것은 어떤 생명도 갖고 있지 않다.
달마의 말은 명확하다. 우리는 인도 정부와 사법부에 대해서 거의 십년 동안 싸우고 있다. 그들의 덕에 대한 개념은 매우 빈약하다.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병원과 학교를 세우는 것이 그들이 말하는 덕이다.
달마가 덕에 관해 한 말은 훨씬 심오한 뜻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아무런 후회 없이 자신을 포기하는 것은 가장 위대한 덕이다.

그대 자신을 포기한다는 말은 그대를 우주에게 맡긴다는 말이다. 그대와 우주는 분리된 것이 아니다. 존재계의 바다에 빠져서 그것과 하나가 되라. 그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덕이다. 그것말고 그대가 어떻게 하겠는가? 그대는 세상에 빈손으로 나왔다. 그리고 빈손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대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이 그대의 것이 아니다. 그대의 집도 그저 주막일 뿐이다. 그대가 갖고 있는 돈도 그대의 돈이 아니며, 땅도 그대의 땅이 아니다. 그대가 오기 전에도 항상 있었고, 그대가 가고 난 뒤에도 계속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대의 것은 무엇인가? 그대는 오직 그대의 것만 줄 수 있다. 그대의 것이 아닌 것은 줄 수가 없다. 그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늘의 별들을 줄 수가 없다. 그대는 태양을 기증할 수 없고 달을 기증할 수 없다. 우선 그것들은 그대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그대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은 그대 자신의 존재뿐이다. 그래서 달마는 후회 없이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 가장 큰 덕이라고 말했고 그 말은 절대적으로 옳다. 그대는 기쁨으로 존재계에 자신을 내던질 수 있다. 그리하여 전체와 하나가 되어라.

움직임과 고요함을 모두 초월하는 것이 가장 지고한 명상이다.

그대가 고요히 앉아 있거나 혹은 침묵 속에서 걸을 때, 그대는 모든 동작과 침묵을 초월해야 한다. 행위와 무위, 낮과 밤, 삶과 죽음, 그 모든 것을 초월하라. 그러면 그대는 명상의 가장 지고한 향기를 그대 속에 지니게 될 것이다.

중생은 아라한이 고요함에 머무를 동안도 쉬지 않고 움직인다.

아라한에 대한 그의 편견이 또 나온다.

그러나 지고한 명상은 이들 중생과 아라한 둘 다를 초월한다.

그는 아라한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 아라한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도 역시 움직임과 고요함을 모두 초월한다. 단지 그들이 아무것도 말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무엇을 초월했는지 모를 뿐이다. 사실 그들의 초월은 매우 위대해서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부분에 달마와 동의할 수 없다. 그는 나를 용서해 주어야 한다. 모든 사과의 말과 함께 말하노니, 나는 아라한에 대하 그의 이해가 절대적으로 틀렸다고 말하고 싶다. 아라한 대신에 그는 '고행자'란 말을 사용해야 했다.

중생과 고행자는 이 초월을 모른다.

이러한 이해에 도달한 사람은 노력하지 않고도 모든 모양으로부터 자유로우며 치료하지 않고도 모든 병을 낫게 한다. 그러한 것이 선의 위대한 능력이다.

그러한 것이 명상의 위대한 능력이다. 그대 자신을 아는 것의 위대한 능력이다. 모든 병이 사라진다. 마음의 병, 영혼의 병이 사라진다. 모든 상처가 갑자기 치료된다. 영혼의 상처까지도 말이다. 그리고 모든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서 비롯되는 미혹은 그 흔적조차도 발견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깊은 명상 속에서 자신을 아는 것에서 나오는 능력이다.
달마는 아라한에 관해서 말할 때만 제외하고는, 그의 모든 말이 완전히 옳았다. 그러나 아라한에 대한 말은 바꾸어져야 한다. 사실 나는 달마에게 반대하지 않는다. 나는 그를 너무 좋아한다. 나는 그의 실수를 꼬집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빛이 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만약 그대가 어디에선가 어떤 생에서 달마를 만난다면, 그가 틀리게 말한 몇 가지 점들을 정정해 주라. 그는 아마 그 큰 눈으로 나를 겁나게 만들 것이다. 그러면 나도 역시 나의 큰 눈으로 그를 겁나게 할 것이다.

알겠는가?
 
 
출처 : 세존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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