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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12 11:38

[달마의 중도론 中道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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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마음에 머물지 않는 한 모든 것이 완전하다[달마의 중도론中道論]
 

                                      조셉 아르파이아·롭상 랍가이 저, 서보경 역
 

 
 

달마의 중도론 中道論

마음을 사용해 실체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망상이다. 마음을 사용하지 않고 실체를 찾는 것이야 말로 깨어 있는 것이다. 말로부터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해탈이다. 감각의 먼지에 때묻지 않고 머물러 있는 것이 다르마를 지키는 일이다.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것이 집을 떠나는 것이다. 다른 존재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는 것이 도(道)에 이르는 것이다. 망상을 피우지 않는 것이 깨달음이다. 무지에 몰두하지 않는 것이 지혜이다. 괴로워하지 않는 것이 곧 열반이다. 그리고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곧 피안(彼岸)이다.
치우치지 않은 다르마의 관점에서 보면 중생은 성자와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경에 이르기를 "치우치지 않은 다르마는 중생도 꿰뚫을 수 없고 성자도 행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했다. 치우치지 않은 다르마는 오직 위대한 보살들과 부처들만이 행할 수 있다. 삶을 죽음과 다르게 보거나 동(動)을 정(靜)과 다르게 보는 것은 이미 한쪽으로 치우친 것이다.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은 고통을 열반과 다르게 보지 않는 것을 뜻한다. 그 둘의 본질이 본래 텅 빈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고통에 종지부를 찍었다거나 열반에 들어갔다고 상상하므로써 아라한들은 결국 열반이라는 덫에 걸리고 만다.
그러나 보살들은 고통이 본래 텅 빈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리고 텅 빔에 머물기에 그들은 열반에 머문다. 열반은 탄생도 아니고 죽음도 아니다. 그것은 탄생과 죽음을 초월하며 열반이라는 것 자체도 초월한다. 마음이 움직임을 멈출 때 그것은 열반에 들어간다. 열반은 텅 빈 마음이다.
아무도 살지 않는 빈 집과 같으니 욕심도 성냄도 망상도 없다.
마음이 하나의 허구이며 전혀 실재하는 것이 아님을 아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님을 안다. 중생들은 마음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계속해서 마음을 만들어 낸다. 아라한들은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계속해서 마음을 부정한다. 그러나 보살들과 부처들은 마음을 만들어 내지도 않고 부정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바로 마음은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 마음을 중도(中道)라고 부른다. 그대 안에서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때 그대 바깥에서 세상도 일어나지 않는다. 바깥세계와 마음이 둘 다 투명해질 때 이것이 진정한 통찰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해가 진정한 이해이다.

 

마음에 머물지 않는 한 모든 것이 완전하다 

달마의 선어록은 순금과 같다! 다만 한가지만 제외하고는! 달마는 아라한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갑자기 장님이 되어버린다. 아라한에 대한 그의 편견이야말로 그가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 유일한 결함이다. 그가 궁극의 지혜로부터 추락해서 자신의 견해에 집착할 때마다 나는 그대에게 일러 줄 것이다. 달마처럼 큰 인물도 어떤 상황에서는 무지한 사람들처럼 해동할 수 있다는 사실은 무척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 존재의 나약함을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또한 이것은 그대가 자신의 견해에 너무 집착하지 않도록 타산지석이 되어 줄 것이다. 모든 견해는 결국 그대를 장님으로 만들어 반대편 견해를 볼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순수한 이해에 도달한 사람은 어떤 선택도 하지 않고 모순되는 것들 모두에게 마음을 열어 놓는다. 그는 선택하지 않고 다만 고요히 깨어 있을 뿐이다. 그는 모든 반대 극부가 궁극에 가서는 하나가 된다는 사실을 안다. 삶은 죽음과 만나며 낮은 밤과 만난다. 사랑은 증오와 만나며 '예'는 '아니오'와 만난다. 모든 견해를 벗어난 사람에게 '예'란 단지 하나의 부분이며 '아니오' 또한 부분이다. 사실 양극이 만나 하나로 녹아들 때, '예'는 더 이상 '예'가 아니며, '아니오' 또한 더 이상 '아니오'가 아니다. 절대적으로 정의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들은 서로 만나서 본래의 개념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마음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러나 달마 같은 사람조차도 어떤 점에 대해서는 눈이 멀 때가 있다. 그것은 과학자들이 전인류의 십분의 일이 색맹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십분이 일이란 적은 숫자가 아니다. 열 명 가운데 한 명은 어떤 색을 전혀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이 색맹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발견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하지만 버나드 쇼(Bernard Shaw)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났었다. 그는 60년을 살아오면서 자신이 색맹이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가 60회 생일을 맞이했을 때 한 친구가 아름다운 옷을 선물했다. 그런데 그 옷에 어울리는 넥타이를 보낸다는 것을 깜빡 잊었다. 버나드 쇼는 그 송이 매우 마음에 들었고 넥타이를 사러 가자고 비서에게 말했다. 그는 그날 밤 생일잔치에서 친구들이 오면 자기는 그 옷을 입을 작정이라고 말했다.
버나드 쇼는 비서와 함께 고급 넥타이를 파는 상점에 들어갔다. 그들은 거기서 많은 넥타이를 구경하다가 드디어 그가 넥타이 하나를 골랐다. 그런데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점원과 비서는 충격을 받았다. 그는 노란 넥타이를 고르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비서와 점원은 참지 못하고 동시에 말했다.
"그 색깔은 매우 이상하게 보입니다. 초록색 옷에 노란색 넥타이는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버나드 쇼가 말했다.
"무슨 소리야? 이것은 같은 색깔인데."
그는 노란색을 구분할 수 없었다. 그에게는 노란색이 초록색으로 보인 것이다. 그는 여태껏 노란색을 전혀 알지 못하고 살아왔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은 매우 우연하게 일어난다. 이 세상에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자신이 색맹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그 후 버나드 쇼는 40년을 더 살았지만 그 사건이 아니었다면 아마 일 세기를 자신이 색맹이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이와 비슷한 일이 사람들에게 일어나고 있다. 비록 자신이 위대한 각성을 얻었을지라도 어떤 점에 있어서는 완전히 장님이 될 수도 있다. 그에게서 맹점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한 그의 깨달음은 완전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완성되지 않은 불완전한 것이다. 달마는 많은 것들에 대해서 너무나 정확했고, 완전히 각성한 채로 사물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러나 몇 가지 점들에 있어서는 보통사람들이 갖는 편견과 선입견의 마음을 갖고 대한 적이 있었다.
그대는 이 점을 기억해서 그에게서 한 가지 비밀을 배워야 한다. 그대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의 어록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실체를 찾으려고 마음을 사용하는 것은 망상이다.

모든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이 이와 같은 일을 저지르고 있다. 위대한 사상가들 역시 말장난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은 실체를 알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눈으로 음악을 들으려고 하는 것이다. 눈은 음악을 들을 수 없다. 귀로 그대가 빛을 보려 한다면 그대는 그 일을 성공할 수 없다. 귀는 빛을 보는 통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귀는 소리를 듣는 통로이며 눈은 빛을 보는 통로이다. 그것은 각각 다른 차원의 기능을 갖고 있다.
마음의 기능은 생각, 꿈, 공상, 환각 등 모든 종류의 신기루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것의 기능은 실체를 찾아내기 위한 통로가 아니다

실체를 찾는 데에 마음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깨어있는 것이다.

마음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실체를 찾는 길이다. 어떤 생각에도 매달리지 않는 깊은 침묵 속에서 투명한 유리처럼 남아 있을 때, 그 투명함, 그 맑음 속에서 실체가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이다. 그때 안과 밖이 하나가 되어 드러난다. 실체는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안과 밖을 둘로 나누는 것은 바로 마음이다. 마음이 떨어져 나가면 분별 역시 떨어져 나간다. 그때 그대는 실체가 된다. 가장 멀리 떨어진 별 조차도 그대와 연결되며 풀잎 하나도 그대와 둘이 아니다. 존재계 전체가 하나인 것이다. 이제 그대는 더 이상 분리된 개체가 아니다. 그대는 전체 속으로 들어가고 그대와 존재계 사이의 벽은 허물어지고 만다.
이것을 인도에서는 우파니샤드의 경험이라고 부른다. 이제 그는 현자가 되었고 '아함 브라흐마스미(Aham Brahmasmi)'라고 선언한다. 그것은 '나는 신이다.'란 뜻이다. 그 말은 에고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그것은 겸손함의 극치이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마음이 사라지는 순간 그대는 전체와 하나가 된다.

말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해탈을 얻은 사람이다.

이 짧은 말속에는 경전의 모든 내용이 담겨있다. 달마는 단순한 사람이다. 그는 유식한 비유나 거창한 문구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위대한 진리와 궁극적인 경험을 단순하고 일상적인 단어로 말했다.

말로부터 자유로는 사람은 해탈을 얻은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부터 자유로워진다든지, 그대의 남편이나 아내로부터 자유로워진다고 말하지 않았다. 돈이나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말도 없다. 단지 말로부터, 언어로부터 자유로워진다고 말할 뿐이다. 그것은 그대의 세계가 말 이상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대의 아내가 정말 말 외에 아무것도 아닌가? 한때 그녀는 그대의 아내가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성직자가 그대가 알아 듣지 못하는 주문을 외운 후 그녀는 그대의 아내가 되었다. 사실 성직자가 거행하는 결혼 의식에 쓰여지는 말들을 전부 이해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 것이다.
한 산야신이 며칠 전 결혼을 했다. 그녀는 내게 와서 자신의 성직자에게 매우 놀랐다고 말했다. 성직자의 주례사가 한 시간 반이나 계속되었고, 그녀의 남편 될 사람이 5루피를 주자 그 순간에 성직자의 설교가 바로 끝났다는 것이다. 그 후 나머지 순서는 사진사가 사진을 찍는 것까지 합쳐서 15분 안에 모두 끝났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 성직자는 사진을 찍기 위해서 잠시 멈추었을 뿐 다시 시작했다. 도대체 말장난을 떠나서 아내가 무엇이며 남편은 또 무엇인가?
그대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어떤 것도 갖고 오지 않았다. 또한 죽을 때도 아무것도 갖고 갈 수가 없다. 어느 날 이 모든 것은 하나의 꿈이 될 것이다. 임종의 순간에 그대는 자신의 삶 전체가 하나의 꿈임을 보게 될 것이다. 그렇게 실제적인 것들이 죽음의 순간에는 비현실적인 것으로 보인다. 단지 마음속에 있는 말들처럼 말이다.
진짜로 포기할 것은 이 세상이 아니다. 이 세상을 포기하고 히말라야나 수도원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진짜로 버려야 할 것은 그대 마음속에 있는 말들이다. 그래서 그대는 그저 고요하게 지켜보는 자로 남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달마가 말하는 자유이며 해탈인 것이다.

감각에 물들지 않는 것은 진리를 따르는 것이다.

그대에게 필요한 것은 그대가 진정한 종교적인 자세를 갖는 것이다.
그것은 그대가 감정이나 분위기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대가 마음의 장난에서 벗어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깨어 있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종교적 자세이다.

그리고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것은 자신의 집을 떠나는 것이다.

나는 이 말에 대해서 두 가지를 덧붙이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이것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것은 이 세계를 떠나는 것이다."라고 말이다. 그것은 집이 아니다. 진정한 집은 그대가 향해 가는 곳이다. 이 세계는 그대의 진정한 집이 아니다. 이 세계를 집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지 위로의 말에 지나지 않는다.
바그다드에서 살았던 산 수피 신비주의자의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밤 왕은 자신의 왕궁 지붕 위로 누군가가 걸어가고 있는 소리를 들었다.


 

왕은 그 소리를 듣고 소리쳤다.
"거기에 있는 자는 누구냐?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그 사람은 도둑이 아니었다. 그는 침착하게 말했다.
"소리치지 마시오. 다른 사람들의 잠을 깨우지 마시오.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오. 나는 내 낙타를 찾고 있소. 내 낙타는 당신이 잠들기 시작한 시간에 잃어버렸소."
왕은 왕궁의 지붕 위에서 낙타를 찾고 있는 이 미친 사람의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왕은 호위병들을 불러 그 미친 사람을 잡아오도록 했다. 그런데 왕궁을 다 뒤져도 그를 찾을 수가 없었다. 다음날 왕은 궁전 뜰에 앉아 있었는데 어젯밤 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은 즉시 소리쳤다.
"여봐라, 그 사람을 데리고 오라."
그때 그는 왕궁의 대문 앞에서 상인들의 천막을 치려고 호위병과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호위병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이곳에서 쓸데없는 문제를 일으킬 필요가 없다. 이곳은 왕궁이지 상인들이 숙소가 아니다."
그러자 그 남자가 말했다.
"나는 이곳이 상인들의 숙소인 것으로 한다. 당신은 나를 귀찮게 하지 말고 들여보내 달라. 이 문제를 왕과 이야기하겠다. 만약 왕에게 이곳이 상인들의 숙소인 것을 확인시킬 수 있다면, 그때 나는 이곳에 머무를 것이다. 만약 왕이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나는 이곳을 떠날 것이다. 그러니 당신의 말을 듣고 싶지 않다."
그때 한 신하가 와서 왕이 이 사람을 부른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 수피는 왕에게 불려갔다. 왕은 그를 보자 입을 열었다.
"그대는 매우 이상한 사람이다. 나는 그대의 목소리를 알고 있다. 그대는 어제 내 궁전의 지붕 위에서 낙타를 찾고 있었고, 지금은 이 왕궁을 그대의 숙소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자 그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당신은 이해력이 있어 보이는 군요. 당신 같은 사람이면 내 말이 통하겠소. 그렇소, 내가 바로 어젯밤 왕궁의 지붕 위에서 낙타를 찾던 사람이오. 하지만 나를 미친 사람으로 보지는 마시오. 만약 당신이 황금보좌에 앉아서 축복을 받기를 원한다면, 또 산 사람을 불에 태워 죽이거나 칼로 처형하면서 신을 찾고 있다면, 내가 왕궁의 지붕 위에서 낙타를 찾는 것이 뭐 그리 이상하단 말이오? 만약 내가 미쳤다면 당신 역시 미친 사람이오. 나는 전에 당신이 앉아 있는 똑 같은 자리에 당신보다 좀더 늙은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소."
그러자 왕이 말했다.
"그 사람은 바로 나의 부친이오. 이제 그는 돌아가셨소."
그러자 그 수피가 말했다.
"그전에 나는 그 사람보다 더욱 늙은 당신처럼 생긴 사람을 보았소."
왕이 말했다.
"맞았소. 그 사람은 나의 할아버지요."
그 수피가 말했다.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소?"
왕이 대답했다.
"그분 역시 돌아가셨소."
그러자 그 수피는 또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언제 죽을 것이오? 나는 이전에 당신의 할아버지와 이 문제를 이야기했소. 그리고 그후에 당신의 아버지와도 이야기했소. 그들 역시 이곳이 자신들의 집이라 생각했소. 그런데 그 가엾은 사람들은 이제 무덤 속에 있소. 이제 나는 그 문제를 당신과 이야기하고 있는데 당신 역시 곧 무덤 속으로 들어갈 것이오. 집은 그대로 있는데 사람들은 잠을 자고 나면 다른 데로 가야하니 말이오."
왕은 그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아 말문이 막혔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 역시 모두 침묵에 빠졌다. 이윽고 그 수피가 말했다.
"만약 당신의 집이 어딘가를 진정 알고 싶다면 당신이 묻히게 될 무덤에 가 보시오. 그곳에는 당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있을 것이오. 그곳이 바로 당신의 진짜 나의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이오. 그래서 나는 이곳에서 상인들의 숙소에서처럼 하룻밤을 자고 가겠다고 말한 것이오."
왕은 이 사람이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왕은 자리에 일어나 말했다.
"용서해 주십시오. 내가 틀렸습니다. 당신이 옳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이곳에서 머물다 가십시오. 나는 진짜 내 집을 찾아가겠습니다. 이곳은 나의 집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상인들이 하룻밤 머물다 가는 여관이다.
달마의 어록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것은 자신의 집을 떠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것은 집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대의 진짜 집은 더 이상 그대가 떠날 곳이 없는 영원하고 궁극적이며 절대적인 귀환처이다.

존재하는 것에서 고통을 받지 않는 것은 도(道)에 이르는 것이며 망상을 피우지 않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이 말을 간단히 줄인다면 이렇게 말해야 한다.
마음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 모든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해탈이며, 진정한 집을 찾는 것이며, 도에 이르는 것이다.

무지에 몰두하지 않는 것이 지혜이다.

사람들은 무지에 몰두하지 않기에 이 말은 매우 이상스럽게 들린다.
아무도 무지 속에 몰두하기를 원치 않는다. 왜 사람들이 무지에 몰두하고 싶어 하겠는가? 그래서 나는 이 말을 다른 표현으로 바꾸고 싶다. 하지만 그 뜻은 똑같다. 그 말은 이렇게 바꾸고 싶다.
지식에 몰두하지 않는 것이 지혜이다!


 

지식에 몰두하는 것은 실제로 그대의 무지를 감추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학자나 판디트처럼 그대가 지식이나 학문에 몰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에 몰두하면 할수록 그대는 지혜로 가는 길이 점점 막히게 되는 것이다. 지혜는 어떤 지식에도 물들지 않을 때 나오는 것이다.
그대가 모든 지식에서 벗어나는 순간 무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것들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 남는 것은 순수한 어리석음 이다. 그 어떤 것에도 물들지 않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지혜이다.

괴로움을 당하지 않는 상태가 곧 열반이다.

어떤 고뇌와 번민, 어떤 탐욕과 분노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는 상태가 바로 열반인 것이다. 그대는 진짜 집에 도착했고 그 집의 이름이 바로 열반인 것이다.

마음이 일어나지 않음은 피안(彼岸)에 다다른 것이다.

마음이 사라질 때, 마음과 함께 이 세계는 모두 사라진다. 마음과 함께 모든 무지가, 모든 지식이, 삶의 모든 악몽이 사라진다. 마음은 그대가 보고 있는 이 모든 드라마를 만들어낸 주역이다. 마음이 한번 사라지면 그 즉시 피안이 나타난다. 그것은 점점 가까워지며 뚜렷해진다.
피안이야말로 그대의 진짜 집이다.
피안이야말로 그대의 불멸성이며 영원성이다.
차안(此岸)은 죽음과 질병, 늙음과 모든 불행을 갖고 있다. 그러나 피안은 희망이다. 해탈의 희망, 구원의 희망, 모든 살아있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악몽으로부터 구출 받을 수 있는 희망이다. 그리고 그 비밀은 간단하다. 그것은 그대가 그대의 마음에 안주하지 않는 것이다. 구름 없는 맑은 하늘처럼 순수한 의식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치우치지 않은 진리의 빛 속에서 본다면 중생은 성자와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경에 이르기를 "치우치지 않은 진리는 중생도 꿰뚫을 수 없고 성자도 행할 수 없다."고 했다. 치우치지 않은 진리는 오직 보살과 부처만이 행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아라한을 간과했다. 그가 잠시 눈이 멀었던 점이 바로 이곳이다. 비록 달마는 큰 눈을 가졌지만 그는 간단한 한 가지를 보지 못했다. 위대한 아라한은 위대한 붓다나 보살들과 같은 존재이다.

죽음을 삶과 다르게 보거나, 정(靜)을 동(動)과 다르게 보는 것은 이미 한 쪽으로 치우친 것이다.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은 번뇌와 열반의 본성이 똑 같은 공(空)이기에 그 둘이 다르지 않음을 보는 것이다. 고통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거나, 열반에 들어갔다거나, 아라한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열반이라는 망상의 덫에 걸린 것이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틀린 말이다. 아라한은 보살과 같은 경지에 있는 존재이다. 단지 길이 다를 뿐이다. 그러나 도달하는 정상은 같은 것이다. 출발점이 다른 길이 하나의 봉우리에서 만나는 것이다. 물론 소위 성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열반이라는 망상의 덫에 걸릴 수 있다. 하지만 아라한은 다르다. 아라한은 보살이나 부처와 똑 같은 존재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아라한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 생각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고 그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지 않은 사람들이다. 아라한들은 오직 자신의 깨달음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보살들은 다른 사람의 깨달음에도 관심을 가진다. 그것이 차이점이다. 하지만 그들이 얻은 경험은 같은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같은 경지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세상에는 아라한도 보살도 아니면서 소위 성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물론 그들은 금욕적인 고행을 한다. 그들은 자신을 학대하고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한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자신들의 마음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 그것이 보살이나 아라한과 다른 점이다. 그것은 자발적이거나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들의 행동은 사념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들은 계속해서 앞과 뒤를 재고 옳고 그름을 분별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편견에 빠져있다.
나는 그들을 '소위 성자라고 하는 이들'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거의 부처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깊은 내면에는 어둠이 자리 잡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본성을 깨닫지 못했다. 삼매를 얻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수만 갈래로 나누어지고 방황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그들의 위대한 고행, 위대한 금욕, 위대한 훈련이 모두 그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소위 성자라고 불리는 이들이 열반이라는 망상의 덫에 걸린다. 그들의 모든 노력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이다. 그대는 깨달음을 얻기를 갈망해서는 안 된다. 바라는 것 자체가 하나의 장벽이다. 그대가 깨달을 수는 있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으려는 욕망을 가질 수는 없다. 그대가 욕망을 갖는 순간 그대는 덫에 걸리는 것이다. 그대는 욕망의 덫에 걸린 것이다.
그대는 욕망의 대상으로서인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다.
그것은 야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소위 성자라고 불리는 이들이 이런 덫에 걸려있다. 그들은 깨달음이니, 해탈이니, 모크샤니, 열반이나 하는 것들을 목표로 잡는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에고의 여행이 시작된다. 그것은 매우 지독한 덫이다. 한번 걸려들면 결코 빠져 나올 수 없는 덫인 것이다.
열반은 그대 속에서 꽃피워져야 한다. 그대가 모든 욕망과 함께 마음을 비워 버릴 때, 그것의 모든 야심과 탐욕을 내던져 버릴 때…… 돈에 대한 탐욕이나 깨달음에 대한 탐욕이나 모두 같은 것이다. 그것은 어떤 차이도 없다. 마음은 이것에서 저것으로 그 대상을 계속 옮겨 다닌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탐욕으로 가득 찬 똑 같은 마음이다. 마음이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 깨달음이란 이루어야 할 목표가 아니라 그대 자신의 본성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때 갑자기 그대의 내면에 연꽃이 피어나고, 그대의 존재 전체는 그 향기로 가득 차게 된다. 그 향기는 아라한이나 보살의 향기와 다르지 않다. 그들은 모두 부처이며 그대 역시 부처이다.
나는 어떤 종교에도 속하지 않았기에 어떤 특정한 교리에도 속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에게도 구속받지 않는다. 나는 단지 나 자신에게 속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그들 스스로 쳐 놓은 이념이 덫에 걸리는 것을 바라볼 수 있다. 보살과 같은 존재들도 아라한의 생각을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보살이라는 영역에 속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보살의 경우뿐만 아니다. 아라한들 역시도 보살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누가 어떤 영역에도 속해 있든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는 어떤 영역에 속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독립해 있다. 그런 나의 독립이 바로 나의 문제이다. 그것은 내가 나의 말에 다른 사람들이 즐거워하든 즐거워하지 않든 전혀 개의치 않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매우 이상한 곳이다. 만약 내가 그대를 즐겁게 하는 말을 한다면 그대는 그것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대를 즐겁게 하지 않는 말을 한다고 해도 그대는 내 말을 잊을 수가 없다. 그대는 결코 나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예수에 대해서 어떤 기독교인도 하지 않았던 말을 한다. 나는 2천년 동안의 어떤 기도교인보다도 예수를 더 잘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가 예수에 대해서 칭찬할 때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들은 즐거워하고 한 마디도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예수에 대해서 몇 마디의 비판을 한다면 그 즉시로 기독교 전체가 나를 반대하고 일어선다. 그들은 거의 전세계의 반을 차지하고 있다.
내 말을 적어 놓은 책들은 교황이 직접 금서령을 내렸다. 단지 몇 개의 기독교 단체들만이 예수에 관한 나의 책들을 출판했지만, 내가 예수에 대해 몇 마디의 비평을 하는 순간 예수를 칭찬한 나의 모든 책들을 즉시 불태워 버렸다.
사람들은 너무 과민하게 반응을 한다. 만약 그대가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한다면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이 이해된다는 단순한 사실에 즐거워한다. 그것은 예수의 문제가 아니다. 기독교인들의 마음이 문제이다. 내가 예수에 대해서 뭔가 잘못되었다고 말을 할 때면 기독교인들의 마음은 상처를 입는다.
예를 들면 나는 달마에 반대하는 말을 몇 마디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은 그에게 찬성하는 말을 훨씬 더 많이 한다. 하지만 내가 좋은 것을 말할 때는 다 잊고 있다가 반대하는 말을 몇 마디 하면 대승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즉시 나를 싫어하게 된다.
그러나 내 삶의 모든 노력은 사람들의 마음에 충격을 주어 그들의 고정관념을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보살은 고통의 본질이 공허하다는 사실을 알며 공허함에 머무르기에 항상 열반에 들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열반은 삶도 아니고 죽음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것이며 열반이라는 것 자체도 초월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보살에 관한 말이지 아라한에 관한 말은 아니다. 나는 아라한이나 보살이 서로 차등이 나지 않는다는 점을 확실히 말해 두고 싶다.

마음이 움직임을 멈출 때 그것은 열반으로 들어간다. 열반은 바로 텅 빈 마음이다.

'텅 빈 마음'이란 말은 잘못 해석될 수도 있다. 나는 차라리 그 말을 '마음 없음'으로 부르고 싶다. 마음이란 결코 텅 빌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텅 비게 되는 순간 그것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텅 빈 마음이란 말의 모순이다. 그것은 역설적인 표현이다. '텅 빈 마음'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음은 사념의 흐름이다. 그것은 항상 생각이나 감정 혹은 꿈과 상상력으로 가득 차 있다.
마음이 텅 비게 될 때 '마음 없음(無心)이 거기 있다. '텅 빈 마음'이 라고 할 때에는 사람들이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대가 마음의 상태를 바꾸어 그런 마음을 갖고자 한다면 결코 그대는 마음을 비울 수 없다. 그대가 마음을 갖고 있는 한 사념들은 끊임없이 흘러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대는 마음을 떨쳐 버리든지 아니면 그것에 집착하게 되든지 둘 중 하나이다. 거기에는 어떤 타협도, 어떤 중도도 있을 수 없다.


 

그 어떤 곳에도 안주하지 않을 때 거기에 탐냄도 성냄도 어리석음도 없다.
마음이 하나의 허구이며 실재하는 것은 모두 공한 것임을 아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존재하지 않은 것도 아님을 안다. 중생은 마음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아라한은 그 마음을 부정하며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보살과 부처는 마음을 만들어내지도 않으며 부정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바로 마음은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는 뜻이다. 이것을 중도라고 부른다.

달마는 아라한을 비난한다. 하지만 그의 비난은 소위 성자라고 불리는 이들에게 해당하는 것이지 아라한이 아니다. 아라한이나 보살은 마음을 만들어내거나 부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마음을 넘어가 버린다. 그것과는 싸우지 않는다. 마음과 싸운다는 것은 마음을 하나의 실체로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과 싸울 필요가 없다. 단지 그것을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마음과 싸우지 않고 그저 지켜보기만 하면 그것은 사라질 것이다. 관조의 불빛 앞에서 마음은 잠시도 존재할 수가 없다. 각성의 불빛을 밝히라. 관조의 횃불을 밝히라. 그 점에 있어서는 아라한도 보살도 붓다도 아무런 구분이 없다.

그대의 내면에서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때 바깥 세계도 생겨나지 않는다.

이 말은 매우 아름다운 말이며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말은 그대 외부의 세계는 그대의 마음이 투사된 것이라는 뜻이다. 그대의 마음이 내면에서 일어날 때 외부세계도 만들어지는 것이다.
독일의 시인 하이네(Heinrich Heine)는 어느 날 숲 속에서 길을 잃었다. 그는 사냥을 하러 나갔는데 그만 동료들과 헤어져서 집에 돌아오는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는 숲 속을 사흘 동안 헤매면서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그는 너무 지치고 배가 고팠으며 맹수에 대해서도 걱정해야 했다.
밤이 되면 그는 맹수를 피하기 위해 나무 위로 올라갔다. 사흘째 되는 밤은 마침 보름달이 뜬 밤이었다. 피로와 배고픔이 극심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너무나 아름다운 달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곤란한 처지도 잊어버린 채 달에 대해 아름다운 시를 지었다. 그 날밤만은 달랐다. 그의 마음이 다른 상황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달을 보고 있었지만 그의 눈에는 보름달이 빵으로 보였다. 후에 그는 그날의 일을 이렇게 적었다.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나에게는 항상 저 달이 나의 사랑하는 여인으로 보여왔었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한번도 그것이 빵으로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사흘 동안 굶은 사람의 눈에는 달이 빵으로 보일 것이다. 그것은 그의 마음이 그렇게 투사한 것이다. 그래서 달은 사라지고 하늘에는 빵이 떠다니게 되었다.
그대가 보는 것은 그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보는 것은 그대 마음의 투사체일 뿐이다.
물라 나스루딘(Mulla Nasruddin)은 산 속에 아름다운 집 한 채를 갖고 있었다. 그는 매우 못생긴 한 여인을 고용해서 그 집을 돌보게 했다. 그러자 그의 친구들은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물라, 분명 이유가 있겠지? 왜 그렇게도 못생긴 여자를 선택했지?
물라 나스루딘이 대답했다.
"물론 이유가 있지. 때가 오면 말해 줄게."
이런 물라의 대답은 친구들의 궁금증을 더욱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직접 그 여자에게 찾아가서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라는 산에 가서 며칠씩 쉬었다 오곤 했는데, 어느 날 그는 그의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 산에 가면 3주일 동안 있을 걸세."
그런데 그는 일주일 만에 돌아왔다. 궁금하게 여긴 친구들이 그를 찾아와서 물었다.
"3주 동안 머물겠다고 말하고 떠나지 않았어?"
물라가 대답했다.
"물론 그럴 생각이었네만, 어떤 사건이 일어나서 돌아오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네."
그리고는 그는 다시 산으로 갔다. 이번에는 6주 동안 머물겠다고 말하고 떠났다. 그런데 갑자기 2주 만에 돌아왔다. 이런 일이 계속되자 드디어 친구들은 그에게 말했다.
"자네는 그녀를 불행하게 만들고 있네. 자네는 저번에도 3주 동안 있겠다고 말하고는 일주일 만에 돌아왔는데, 이번에도 또 자네가 한 말을 지키지 않았어."
물라가 말했다.
"이제 있는 대로 말을 하는 게 좋겠네. 사실은 내가 말일세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가장 못생긴 여자를 그곳에 머물게 했다네. 내가 그 산에 도착하면 처음에는 못생긴 얼굴로 보이지만, 며칠이 지나가면 다른 여자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못생긴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네. 2주일이 지나가면 그녀가 못생겼다는 생각이 들지 않지. 그리고 4주가 지나면 그녀는 이제 매우 아름다운 여자로 보이기 시작한단 말일세. 그때가 되면 나는 돌아와야 한다네. 위험 수위에 이르렀기 때문이지. 여자가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산이 더 이상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다네."
마음은 상황에 따라 제멋대로 변한다. 이제 마음은 진실 같은 것은 더 이상 따지지 않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허구를 만들어낸다. 4주 동안 여자를 가까이 안한 것은 확실한 굶주림이다. 그 굶주림이 못생긴 여자도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름다운 여자를 보고 맛있는 요리라고 부르는지도 모른다. 거의 모든 언어에서 아름다운 여자를 맛있는 요리라고 부르고 있다. 성적 굶주림이나, 본능적 굶주림은 굶주림의 차원에서 같은 것이다. 그대가 보는 세상은 거의 그대 마음의 투사체이다. 마음이 완전히 사라질 때, 그대는 전적으로 다를 세상을 볼 것이다. 모든 투사체가 사라지고 나면 오직 실재만이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그 실재에는 어떤 집착도 생기지 않는다. 집착만이 투사하는 마음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대의 내면에서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때 바깥 세계도 생겨나지 않는다. 바깥 세계와 마음이 둘 다 사라질 때 그것이야말로 참된 견해이다. 그러한 이해는 바른 이해이다.

달마는 모든 기본적인 관점에서 옳은 시각을 갖고 있다. 그의 말을 깊이 이해할수록 그대가 진실에 가까워지는 데 엄청난 도움을 줄 것이다. 그가 보지 못한 점도 없지는 않지만 그의 몇 안 되는 맹점에 비한다면, 그의 시각은 탁월한 것이며 거의 완전에 가까운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작은 맹점이 그로 하여금 편견을 갖게 했다. 그는 아라한을 비난하고 보살을 칭찬했다. 그러므로서 그는 한 가지 영역에 속해 버렸다. 그는 대승불교라는 종파에 속해 버린 것이다.
진정한 이해를 가진 사람은 홀로 서게 된다. 그는 어떤 종파, 어떤 조직체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은 모든 형태의 이해력을 갖고 있지만 어떤 곳에도 속하지 않아서 그의 그런 본질이 종교의 근본이 되었다. 나는 이것을 종교의 근본이라고 부른다.
기독교인은 단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진정한 종교인이 아니다. 힌두교도 역시 조직된 교리 체계의 일부분이기에 종교적이지 않다. 자이나교도도 한 가지 노선을 택했기에 역시 마찬가지이다.
진정한 종교적 인간은 홀로 서 있다.
그리고 그의 홀로 있음은 너무나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나는 그대에게 그런 아름다움을 말하고 있다. 나는 그대에게 진정한 위대함과 장엄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 홀로 있음은 에베레스트 산처럼 우뚝 솟아 있다. 그대는 그 속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별까지 갈 수도 있다. 그런 홀로 있음 곳에서 그대의 모든 잠재력이 꽃필 수 있다.
그러므로 그대는 하나의 교리를 고집하는 신앙인이 되지 말라. 추종자가 되지 말라. 어떤 조직체에도 가담하지 말라. 그대 자신에게 진실하라. 그대 자신을 저버리지 말라. 그러면 그대 자신이 바로 종교의 근본이 될 것이다.

알겠는가?



출처 : 세존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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