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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12 11:44

[달마의 실체론 實體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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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마음은 인간의 가장 큰 적이다[달마의 실체론 實體論]
 

                                      조셉 아르파이아·롭상 랍가이 저, 서보경 역
 
 

달마어록 실체론 實體論

경전에 이르기를 "지혜를 가로막는 것이 바로 무지이다."라고 했다. 마음이 존재하지 않을 때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 둘 다 진리이다. 마음이 존재할 때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 둘 다 거짓이다.
그대가 깨달아 알게 될 때는 실체가 그대를 따르게 된다. 그대가 깨닫지 못할 때는 그대가 실체를 따르게 된다. 실체가 그대를 따를 때는 실재적이지 않은 것도 실재적으로 되지만, 그대가 실체를 따를 때는 실재적인 것도 허구로 변한다. 그대가 실체를 따르면 모든 것이 거짓이 된다. 실체가 그대를 따를 때만이 모든 것이 실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실체를 찾을 때 그의 마음을 사용하지 않는다. 또한 그의 마음을 찾기 위해서 실체를 사용하지 않으며, 그의 마음을 찾기 위해서 마음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의 마음은 실체를 나타내지 못하며 실체를 그의 마음속에 일어나지 않는다. 실체와 그의 마음은 모두 고요하며 그는 항상 삼매 속에 있기 때문이다.
경전에 이르기를 '아무것도 제 본성을 가진 것은 없다."라고 했다. 행동하라. 질문하지 말라. 그대가 질문할 때 그대는 이미 잘못되었다. 그대가 미혹되는 순간 여섯 가지 감각과 그 경계는 고통과 죽음을 맛보게 된다. 그대가 각성하는 순간 여섯 가지 감각과 그 경계는 열반과 불멸을 맛본다.
도를 구하는 자는 자신을 초월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마음이 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마음을 발견할 때 그는 거기에 아무것도 없음을 알게 된다. 그가 도를 발견할 때 역시 거기에 아무것도 없음을 알게 된다. 그대가 도를 찾는 데 마음을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대는 벌써 미혹된 것이며 거기에 불성이라고 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깨어 있음이 곧 불성이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을 미워하지도 말고 사랑하지도 말라. 그대의 모든 생각이 미혹되지 않도록 하라. 삶 속에서 그대는 열반이 시작되는 것을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죽음 속에서 어떤 재생도 없음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형체에 미혹되지 않고 형체를 보며, 소리에 미혹되지 않고 소리를 듣는 것이 바로 해탈의 상태이다. 형체에 집착하지 않는 눈이 바로 선으로 들어가는 문이며, 소리에 집착하지 않는 귀 역시 선으로 들어가는 문이 된다. 간단히 말해서 모든 현상의 본질을 이해하는 자는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자유롭다.
미혹됨이 없을 때 마음은 불국토가 된다. 미혹되는 순간 마음은 지옥으로 변한다.

 

마음은 인간의 가장 큰 적이다.

그대가 몇 가지 요점들을 이해한다면 달마의 가르침은 알기 쉬워질 것이다. 그리고 그 첫 번째가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가정하는 것이다. 인도 밖에서 생겨난 모든 종교는 환생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인도에서 발생한 종교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서로 다르지만, 환생의 문제에서만큼은 일치한다. 그들 모두는 그대가 하나의 생만을 가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대는 과거에 수많은 생을 거쳐왔고, 자신의 본성을 깨달을 때가지 앞으로 계속 수많은 생을 반복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삶은 그대가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그것을 배우는 학교일 뿐이다. 그대는 계속해서 삶과 죽음의 바퀴를 돌게 될 것이다.
평균 수명 70년, 80년 정도의 한 생애가 인간 삶의 전부라면, 그것은 그대가 명상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깨닫는 데 있어서 충분한 시간이 못 된다. 그리고 그 70년 중에서 삼분의 일은 잠을 자며, 삼분의 일은 그대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교육으로 보낸다. 나머지 삼분의 일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런 식으로 그대는 여러 가지 것에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고, 그대는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알지 못한다.
나는 카드놀이나 장기를 두고 있는 사람을 보면 그들에게 가서 묻는다.
"당신은 이것보다 더 나은 어떤 것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까?"
그러면 그들의 대답은 모두 똑같다. 그들은 그것이 시간을 보내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소위 '킬링 타임'이란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의식적으로 사는 사람인 것이다.
그대는 시간을 많이 갖고 있지 않다.
그대는 시간을 그저 흘려 보낼 여유가 없다.
그대는 시간을 죽일 수 없다. 오히려 시간이 그대를 죽이는 것이다.
매 순간 시간은 그대를 죽음에 더욱 가깝게 가져간다.
만약 그대가 그대의 모든 행동을 헤아린다면…… 하루에 두 번 하는 면도 시간은 얼마이며, 라디오를 듣거나 텔레비전을 보는 시간은 얼마나 되는가? 그대는 그런 식으로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흘려 보내는지 모른다. 한 보고서에 따르면, 보통 미국 사람들은 하루에 평균 7시간 반을 텔레비전을 보는 데 사용한다고 한다. 그것은 하루의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시간을 그저 앉아서 모든 종류의 난센스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그대가 담배를 피우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쓰는가? 어떤 사람은 줄담배를 피우기도 한다. 그대는 신문을 읽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쓰는가? 신문이 어떤 유용한 뉴스를 가져다 주는 때는 드물다. 그저 온갖 비리들과 불행한 소식들만 가져다 줄 것이다. 살인, 강간, 자살, 전쟁 등등을 말이다. 그것들은 그대로 하여금 이런 것이 세상이며, 이런 것이 우리의 삶이라고 믿게 만든다. 그들은 그대에게 전 세계가 이와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거기 잘못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신문에는 어떤 사람이 깨달았다는 소식을 보도하는 일은 결코 없다. 아마 그런 것은 뉴스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명상의 깊은 경지에까지 나아갔다고 보도하는 신문을 본 적이 있는가? 어떤 사람이 분노와 욕심과 어리석음을 넘어서 고요한 평화 속으로 들어갔다고 전하는 신문이 있는가? 그것은 뉴스 거리가 안 되는 것이다.
한번은 버나드 쇼가 질문을 받았다.
"뉴스란 어떤 것입니까?"
그가 대답했다.
"개가 사람을 문 것은 뉴스가 되지 않는다. 사람이 개를 물어야 뉴스가 된다."
그대가 70평생을 살면서 사람이 개에게 물린 뉴스를 듣는 숫자를 세어 보면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인간이 오직 한 생애만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너무나 빨리 끝나 버린다. 왜 서양인들은 그런 빠른 생활 속에 사는가? 그런 생각은 바로 유대교나 이슬람교 그리고 기독교에서 나온 것이다. 사람들은 화살같이 빠른 세월 속에 산다. 그들은 항상 달려가고 있다. 그것도 오직 한번밖에 없는 기회이다. 인생은 짧고 이루어야 할 야망은 너무 많다. 그들은 가장 큰 부자가 되어야 하고, 많은 권력을 가져야 하며, 할 일이 수천 가지나 되지만, 인생은 하나밖에 없다. 그래서 모든 것을 될 수 있는 한 빨리 이루려는 것이다.
서양에서는 대부분의 주부들이 도무지 요리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통조림을 따는 것이 전부이다. 모든 것이 빠르고 간편하게 이뤄져야 하기 때문이다. 왜 요리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겠는가?
그래서 그들은 아무도 고요한 상태 속에 있지 못한다. 그것은 그들에게 불가능하다. 그저 고요하게 앉아 있는 것은 쓸데없는 시간 낭비처럼 보인다. 그래서 명상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들에게는 음악 감상조차 하나의 일이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명상이란 것이 그것을 하기에는 하나의 생애가 너무 짧다는 이유로 널리 퍼지지 못했다. 죽음은 너무 빨리 찾아오고 그들은 여유를 누릴 수가 없다.
동양에서는 영적 성장에 대한 개념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생각이, 삶과 죽음은 끊임없이 돌고 도는 하나의 바퀴라는 생각에서 나온 느긋함이 사람들에게 여유를 줄 수 있었다. 그대는 몇 시간이고 고요히 앉아 있을 수 있다. 삶이 급해져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대에게는 영원함이 쓸모 있는 것이 되었다. 그대에게는 단지 70년만 남은 것이 아니다.
서양인들은 매우 가난하다. 그들은 각자에게 모두 70년의 시간만 주어져 있다. 동양 사람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가난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내면은 매우 부유하다. 그 뒤에는 영원함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하나의 생은 그대를 지루하게 만들기에 충분하지 않다. 70년의 세월은 너무 빨리 지나가서 지루함을 느끼기가 불가능하다. 돈을 쫓아야 하고, 권력과 명예를 쫓아야 하며, 여자나 남자를 쫓아야 한다. 그대가 이 모든 것에 완전한 성공을 거두기 전에는 이런 일이 어리석은 짓임을 확실히 인식할 수 없다. 하지만 그대는 하나라도 완벽하게 얻지 못한다.
모든 생을 가나다라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대가 지금까지 살아온 수백만 개의 생을 돌이켜 볼 때, 그대는 모든 여자들을 사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대는 "나는 당신을 영원히 사랑할 것이다."라는 말을 모든 여자들에게 해 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수백만 번의 생을 통해 그렇게 말할 것이다. 그리고 단지 생각만 해도 이제 그것은 지겨운 일이다.
그런 철없는 짓을 이제는 그만두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일어난다. 그 생각 때문에 그대는 성숙할 것이다. 그대는 이런 놀이를 오랜 세월동안 계속해 왔고 이제는 이전에 해보지 않았던 특별한 일을 하고 싶어진다. 이제는 철이 들 때도 된 것이다.
명상은 이런 동양적 사고 방식에 완전히 적합한 것이다. 그것은 이전에 그대가 해보지 않았던 일이다. 그대는 돈도 벌어 보았고, 부자도 되어 보았다. 정치가가 되어 권력도 잡아 보았고, 성직자가 되어 명예도 얻어 보았다. 그대는 그런 모든 것을 다 해보았고 그럴 기회가 충분히 있었다.
한번 그대가 그 사실을 이해한다면…… 앞으로도 그런 무의미한 일들을 계속해서 반복할 것이라는 점을 이해한다면 말이다. 이제 실수는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같은 실수를 계속해서 반복한다는 것은 그대가 바보라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그래서 그대가 이전에 해보지 않은 일을 할 필요가 생겨난다. 그것은 그대 자신을 찾는 일이다. 그대는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추구해 보았고 그 결과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길이 그저 돌고 돌아서 그대는 어떤 목표에도 이르지 못한다. 거기에는 사실 어떤 목표도 없다.
이런 원대한 시각을 얻게 되면, 그대는 갑자기 지금까지 해 온 모든 행위에 대해서 싫증을 느끼게 될 것이다. 사랑과 다툼, 분노와 탐욕 그리고 질투 등을 말이다. 그대는 이제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나는 이제 진부한 삶이 아닌 새로운 차원의 삶을 찾아야 한다. 이제 나는 나의 진정한 고향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수백만 번의 생을 통해 나는 나 자신의 본질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이것이 바로 동양적 지혜의 토대가 되는 생각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삶에 대한 싫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삼사라(samsara)의 본뜻이다. 삼사라, 즉 윤회는 끊임없이 도는 생사의 바퀴다. 하지만 그대는 그것에 집착해 있다. 그대는 자신의 감각에 속고 있다. 그만큼 그대는 어리석다.
이제 그런 행위를 멈춰라. 수많은 세월 동안 해 오던 구태의연한 행위들을 벗어나는 뭔가를 시작하라. 그대가 항상 내일로 미루어 오던 그 일을 말이다.
동양의 경전들은 너무나 아름답다. 이해하지 못한 말은 그들은 결코 하지 않는다. 그대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반대한다든지, 혹은 동의한다든지 하는 것은 가장 정직하지 못한 것이며, 큰 죄를 짓는 것이다.
동양에서는 자신의 존재를 궁극적으로 꽃피운 사람들조차도 그것을 표현할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하면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인위적인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그들은 침묵으로 남기를 결심했다. 사람들에게 잘못된 생각을 심어 주기보다는 차라리 침묵을 택했던 것이다. 오직 몇몇 사람들만이 그것을 말로 표현했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정말로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절대적인 확신이 있을 때에만 그러했다.
인도에서는 매일 발행되는 신문 기삿거리에 별 관심이 없다. 그들은 오직 영원한 것에만 관심을 둔다. 그것은 모든 시대, 모든 상황에서 진리로 남을 것이다. 이 지구가 존재하는 한 그 말들의 진실성은 영원히 도전받지 않을 것이다.
서양에서 조간 신문은 저녁이 되면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그것은 휴지보다도 더 가치가 없는 것이다. 아침 뉴스는 오후 뉴스가 나오면 쓸모 없게 되고, 저녁 뉴스가 나오면 오후 뉴스는 또 그 가치가 없어진다. 저녁 뉴스는 밤 뉴스가 나오면서 역시 그 가치를 잃어버린다. 밤 뉴스 역시 다음날 아침 뉴스가 나오면 아무런 쓸모도 없게 된다.
그러나 동양의 경전들은 그것이 처음 나올 때와 마찬가지로 세월이 가도 언제나 신선하다. 그러나 그것은 경전에 담겨 있는 것들을 경험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경전은 재미없는 산문에 불과한 것이다. 그대가 그것을 한번 경험한 뒤부터 산문은 시로 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거기에 사용된 말들은 침묵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그 말들은 그대가 존재의 영원한 침묵의 춤을 느낄 수 있도록 고안된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서양에는 그러한 책이 없다. 나는 서양의 철학서들과 신학서들을 다 읽어보았지만―그것은 정말 지루한 여행이었다―동양의 경전에 비견될 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서양의 책들은 모두 마음에 해당되는 것들만 적어 놓았다. 하지만 동양의 경전은 질적으로 다르다. 그것들은 마음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들은 그대 내면의 존재와 그 지복의 경험들에 관해 이야기해 놓았다. 그것은 하나의 환희이며, 광대한 존재계를 감싸는 우주적인 기쁨이다. 오직 인간들만이 그것을 놓치고 있다. 그것은 그의 지식 때문이다.
나무들은 그것을 놓치지 않는다. 그것들은 순수하기 때문이다. 바다와 산들 역시 그것을 놓치지 않는다. 가장 멀리 있는 별들도 그 기쁨을 누린다. 그것들은 절대적으로 순수하다. 그것들은 지식의 덫에 걸려들지 않기 때문이다.


 

이 어록에서 달마는 이렇게 시작한다.

"지혜를 가로막는 것이 바로 무지이다."

그대가 소위 지혜라고 부르는 것은 모두 빌려온 것들이다. 그것들은 전혀 지혜가 아니다. 그대는 현명해지는 대신에 그대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을 잔뜩 긁어 모으고 있을 뿐이다. 그것들은 그대의 존재를 성숙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그대 자신의 존재와 삶에 절대적으로 이질적인 것들이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해변에서 조개껍질을 모으고 그것이 무슨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대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것은 그대 자신을 속일 가능성이 있다.
내가 대학을 다닐 때, 나의 학교 교수 중에 런던 대학에서 이상스러운 논문을 써서 학위를 받은 사람이 있었다. 런던 대학의 학위는 매우 권위있는 학위로 알려져 있다. 그 논문의 주제는 의식의 성장에 대한 방법론이었다. 나는 그때 그의 학생이었고, 책이 발간되자마자 교수는 나에게 그 책을 주었다. 그 후 그는 나에게 물어 왔다.
"이 책에 대한 자네의 견해를 듣고 싶네."
내가 대답했다.
"아직 그 책을 읽지 않았지만 나는 당신이 어떤 사람이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자 그는 호기심을 갖고 또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인가?"
내가 말했다.
"나는 그저 당신이 의식의 성장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쓴 모든 것은 다른 책에서 빌려온 것입니다. 당신은 자신을 속이고 있습니다. 당신은 또한 그것을 심사한 런던 대학의 교수들도 속였습니다. 이제 당신은 그 책을 출판했고 그것을 읽는 수많은 사람들이 속게 될 것입니다. 의식에 대한 책을 나에게 선물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당신의 의식을 내게 좀 보여주십시오."
그는 내 말을 듣고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내가 하는 말이 옳았음을 알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술고래였다. 술이 없으면 하루밤도 잠을 잘 수가 없는 상태였다.
나는 계속 말했다.
"무의식에 관해 덧붙인 부분은 삭제해 버리세요. 술은 더 많은 무의식을 만들어내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당신은 의식의 문제에 대해서 쓰려고 무던히도 신경을 쏟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매우 학식이 높은 사람이었다. 그는 수개 국어를 할 수 있었고, 도서관에 앉아서 많은 자료들을 모아 그 책을 멋들어지게 썼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 책을 읽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성직자의 작품과 똑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금이라도 지성을 가진 사람이면, 그 정도의 자료를 가지고 얼마든지 그런 책을 쓸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 내부에서 의식이 성장한 것을 조금이라도 내게 보여 줄 때 나는 그 책을 읽을 것입니다."
나는 그 책을 그에게 되돌려 주었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 책을 심사한 사람 중에서 자네 같은 사람이 없었던 것이 정말로 다행이었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박사학위를 받지 못했을 걸세."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과 나 사이에서는 결코 당신은 학위를 받을 수 없습니다. 세상을 속일 수는 있지만 당신 자신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지식을 모으고 그것을 한데 섞어서 그것이 지혜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지식은 결코 지혜가 아니다. 지혜는 그대 의식의 성숙을 통해서 나온다. 반면에 지식은 그대가 수집한 경전과 학자들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그 지식은 하나의 체계를 만들어낸다. 거기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으며 그대는 어떤 초월도 경험하지 못한다.
그래서 경전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혜를 가로막는 것이 바로 무지이다."

그대가 지혜라고 생각한 것을 내다 버리라. 그러면 그대의 무지 또한 떨어져 나갈 것이다. 만약 그대가 자신의 지식에 집착한다면, 그래서 그것을 지혜라고 생각한다면, 그대는 영원히 무지한 채로 남게 될 것이다.

마음이 존재하지 않을 때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 둘 다 진리이다.

마음이 침묵하는 순간, 그 작용을 멈추는 순간 모든 것이 진리이다. 모든 것의 진실을 왜곡시키는 것이 바로 마음이다. 지식은 마음에서 나오고 지혜는 무심에서 나온다. 동양의 신비주의자들을 제외하고는 이 세상의 어떤 위대한 철학자도 그것을 구분하지 못했다.
사전에는 지혜와 지식을 동의어로 취급한다. 그러나 그것을 실제로 경험한 사람은 사전을 믿지 않는다. 지식과 지혜는 동의어가 아닐 뿐만 아니라 완전히 반대말이다. 그것은 분명하게 구분되는 것이다. 만약 그대의 마음이 지식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대는 무지한 채로, 현명하지 못한 채로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만약 그대의 마음이 떨어져 나간다면 그대는 그것을 초월하게 된다. 그리고 지혜의 세계, 깨어 있음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그대가 깨어 있는 한 모든 것이 진리이다. 그대가 진리 속에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진리인 것이다.
그대가 마음에 머물러 있다면 그대는 거짓으로 변한다. 그대가 거짓이기 때문에 그대의 마음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것이 거짓이며 가상이다. 마음은 인간의 가장 큰 적이다.

마음이 존재할 때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 둘 다 거짓이다.
그대가 깨달아 알게 될 때 실체가 그대를 따르게 된다.

이 말에는 깊은 의미가 숨어 있다. 그대는 그것을 단지 듣기만 하지말고 느끼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대가 깨달아 알게 될 때는 실체가 그대로 따르게 된다.

언제 그대가 이해하게 되는가? 마음이 사라지고 그대 자신이 실체와 직접 만나는 때이다. 명상하는 사람도, 마음도 모두 사라질 때 실체는 그대를 따르게 된다. 그대는 실체보다 더욱 높이 솟아 있다. 그대는 궁극적인 실체 위에 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실체는 상대적인 실체이다.

그대가 깨닫지 못할 때는 그대가 실체를 따르게 된다.

그대가 이해하지 못할 때, 그대가 마음속에 머무를 때, 그대는 항상 주위에서 실체처럼 보이는 거짓의 희생물이 된다. 돈이 그대를 속이고, 권력이 그대를 속이며, 권위가 그대를 속인다. 그대가 중요하게 여기는 모든 것들이 그대를 속인다.
그대는 많은 오해 속에 살고 있다. 만약 그대가 있는 그대로를 보게 될 때 비로소 그대는 스스로 거짓을 얼마나 정교하게 만들어내는지에 대해 놀라게 된다. 마음을 통해 지나온 것은 어떤 것이라도 굴절된다. 마치 곧은 막대기를 물 속에 집어넣을 때 휘어져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그대가 물의 굴절 때문에 막대기가 휘어져 보인다는 사실을 알 때, 그대는 더 이상 그 사실에 속지 않는다. 휘어진 것은 막대기가 아니라 물이기 때문이다. 그 물이 곧은 막대기를 휘어지게 보이도록 만든다. 그대가 물 속에 그것을 집어넣는 순간 막대기는 곧음을 잃어버린다. 마음의 상태는 항상 이와 같다. 마음은 어떤 것을 거짓으로 만드는 능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는 마음에 해당되는 것에 관해서만 교육을 받아 왔다. 이 세상은 거짓과 불행과 고통이 있는 곳이라고, 이 세상은 싸움이 끝나지 않으며 서로를 죽이고 결국에는 모두 자멸하게 되는 곳이라고 교육받아 왔다. 그리고 이제 그런 이야기는 더 이상 놀라운 것이 아니다. 마음은 모든 것을 중독시켰다.
달마의 가르침 전부가 바로 그 마음을 초월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 모든 것은 수정처럼 맑아진다. 그때 그대는 모든 의문이 사라질 것이다. 그때 그대는 모든 의문이 사라질 것이다. 그대는 그대의 명료함에 따라서 행동할 것이며, 그대의 투명한 비전에 따라서 사물을 볼 것이다. 그대의 동작 하나하나는 아름다움을 가질 것이고, 그 아름다움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것은 하나의 은총이며 온누리에 쏟아지는 축복의 비와 같다.

실체가 그대를 따를 때는 실재적이지 않은 것도 실재적으로 되지만……

지금 당장이라도 그 상황은 매우 기묘한 것이다. 실재적이지 않던 모든 것이 실재적으로 된다. 그대의 영혼이 실재적인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는가? 그것은 분명 그대에게 실재가 아니었다. 그것에 대해서 말만 들었을 뿐 그것을 경험하지 못했다.
그러나 허구적인 것은 그대에게 실재가 되어 왔다. 사원에 있는 석상이 그대에게는 실재였다. 반면에 그대 자신의 의식은 비실재적인 것이다. 오히려 대리석상이 그대에게 더 실재적인 것이었다. 그런 비실재 앞에 그대는 절을 하고도 그대가 하고 있는 행동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것은 그대 자신을 모독하는 행위이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부처를 욕하는 것이다.
그대는 한 사람의 부처이다. 그대는 어떤 대상도 숭배해서는 안 된다. 그대보다 더 높은 존재는 아무도 없다. 물론 그대보다 더 낮은 존재도 없다. 그대는 어떤 누구도 숭배해서는 안 되며, 누구로부터 숭배를 받아서도 안 된다. 모든 존재는 똑같이 신성하다.

그대가 실체를 따를 때는 실재적인 것도 허구로 변한다. 그대가 실체를 따르면 모든 것이 거짓이 된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큰 도시에 어떤 사람이 으리으리한 궁전과 같은 집을 갖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 집을 구경하러 올 정도로, 그것은 마치 기적과 같은 건축물이었다. 그런데 어는 날 밤 거기에 화재가 일어났다. 마침 그 집의 주인은 친구 집에 가고 없을 때였는데 어떤 사람이 그에게 그 소식을 전해 주면서 말했다.
"당신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지금 당신의 궁전이 불타고 있습니다."
그는 그 말을 듣고 즉시 달려갔다. 그는 충격을 받아 다른 아무 생각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그의 가장 귀중한 보물이 그가 보는 앞에서 불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아무런 행동도 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자 불은 꺼졌다.
그때 그의 막내아들이 달려와서는 말했다.
"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어제 그 집을 팔았습니다. 어떤 부자가 그 궁전을 팔라고 하도 졸라대서 팔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못지 않은 집을 마련했습니다."
갑자기 그의 눈물이 그쳤다. 그리고는 그 사람은 웃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었다. 그 집은 불타 버렸지만 이제 그것은 더 이상 그의 집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 집이 불이 나더라도 무슨 상관인가? 그의 집은 그의 에고였다. 그리고 그때 막내아들이 또다시 말했다.
"아버지 여기 서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비록 우리가 그 집을 팔 것에 동의했지만 완전히 거래가 다 끝난 것은 아닙니다. 그 부자는 우리에게 돈을 지불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그가 불을 질렀다는 모든 혐의를 갖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듣자 그는 눈물이 또 쏟아지기 시작했다. 상황은 똑같았고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다. 오직 생각만 바뀐 것이다. 그의 집은 이제 그의 것이었고 그래서 다시 커다란 불행에 빠진 것이다. 그 집이 그의 소유가 아니었을 때는 모든 불행이 사라졌지만 말이다.
그때 그 부자가 마차를 타고 직접 그곳에 찾아와서 말했다.
"당신은 걱정할 필요가 없소. 나는 내 말을 지키는 사람이오. 내가 그 집을 사기로 했다면 이미 그 집을 산 것이오. 계약금을 걸진 않았지만 우리가 구두로 계약을 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오. 이제 나의 집이 불탄 것이오. 그러니 당신은 걱정할 필요가 없소."
그러자 갑자기 그는 눈물 대신에 웃음이 나왔다.


 

실체가 그대를 따를 때만이 모든 것이 실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실체를 찾을 때 그의 마음을 사용하지 않는다. 또한 그의 마음을 찾기 위해서 실체를 사용하지 않으며 그의 마음을 찾기 위해서 마음을 사용하거나 실체를 찾기 위해서 실체를 사용하지 않는다.

마음과 실체, 마음과 세상, 그것은 정말로 고약한 악순환이다. 마음은 그대의 생각이 투사된 세상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투사된 세상이 다시 그대의 마음을 만들어낸다. 이런 식으로 그 고약한 관계는 서로를 지지해 주며 계속 된다. 그대의 마음은 그대의 투사를 지지해 주며, 그대의 투사는 그대의 마음을 지지해 준다. 그리고 그대는 계속해서 환상 속에 산다.

그러므로 성인은 실체를 찾을 때 그의 마음을 사용하지 않는다. 또한 그의 마음을 찾기 위해서 실체를 사용하지 않으며 그의 마음은 실체를 나타내지 못하며 실체는 그의 마음속에 일어나지 않는다. 실체와 그의 마음은 모두 고요하며 그는 항상 삼매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마디(samadhi)에 대한 훌륭한 설명이다. 마음이 존재하는 한 실체도 존재한다. 그대가 이 악순환을 벗어날 때 모든 것이 심오한 침묵 속에 빠진다.
사마디라고 하는 말은 정확하게 이해되어져야 한다. 그것은 절대적인 평정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것은 완전한 균형 속에 있는 것이다. 그 말은 산스크리트어에서 나온 것이다. 산스크리트어는 세상에서 가장 심오한 단어들을 갖고 있는 언어이다. 그 단어들은 사전적인 설명이 아닌 경험으로만 그 본질적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그것에 비해 다른 언어들은 단어는 사전적인 의미만을 갖고 있다.
산스크리트어는 깨달은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유일한 언어이다. 그것은 일부러 창조되어진 언이이다. 그 말들은 보통 사람들의 언어가 아니다. 인도 역사상 한번도 나라 전체가 산스크리트어를 공용어로 상용한 적이 없었다. 많은 언어들이 태어나서 사람들에 의해 사용되다가 사라지곤 했다. 라틴어나 히브리어, 팔리어와 프라크리트어 등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사어에 속한다. 그 언어들도 한때는 살아 있는 말이었다. 그러다가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사용하지 않게 되자 죽어 버렸다.
그러나 산스크리트어는 사람들에게 결코 공용된 적이 없었다.
이것은 매우 이상한 현상이다 그것은 깨달은 사람들만의 언어였으며 그래서 그 단어들은 항상 두 가지 뜻을 지녔다. 하나는 사전적인 의미였고, 다른 하나는 진리를 찾는 구도자들에 대한 실존적인 의미를 지녔다.
산스크리트어에는 비야디(vyadi)와 사마디(samadhi)라는 두 가지 단어가 있다. 비야디는 영혼이 병들었다는 뜻이고, 사마디는 영혼이 건강하고 전체적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은 실존적인 의미이다. 사마디를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다 영적으로 병들어 있는 것이다. 그의 육체는 건강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영적으로 병들어 있다. 사람이 그의 육체가 병들어 있어도 사마디에 이를 가능성이 있다. 심지어 그대가 병들어 죽는 삶의 마지막 순간조차도 사마디를 이를 수도 있다. 그때 그대의 영혼은 완전한 건강을 찾게 된다. 전체성을 얻었기 때문이다. 단 한 순간이라도 그대가 사마디에 이르게 되면 그대는 존재의 가장 위대한 비밀을 알게 되는 것이다.
사마디와 같은 말은 다른 어떤 언어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일본어에 그와 비슷한 단어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사토리'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비슷한 말이지 동의어는 아니다. 불행하게도 일본인들은 사토리란 단어에 대해서 더 이상의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토리는 사마디의 일별을 의미한다. 그것은 매우 순간적인 것이다. 사마디를 언뜻 한번 보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대는 수백 킬로미터 밖에서 히말라야의 봉우리들을 얼핏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봉우리에 앉아서 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사마디를 일별하는 사토리도 무척 아름다운 것이지만 사마디와는 비교될 수 없는 것이다
사마디는 절대적인 명료함 속에서 나타나는 그대 자신의 본성이다. 그것은 절대적인 순수함이며 절대적인 깨어 있음이다.
사마디는 그대의 진정한 안식처이다.
사마디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집없이 떠도는 사람과 같다. 그들은 뿌리가 없으며 삶 전체가 하나의 비극이다. 그러나 사마디는 그대로 하여금 존재계에 뿌리를 내리게 해준다. 그것은 그대의 근원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준다. 그것은 그대의 잠재력이 궁극적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마디에 이르는 길은 매우 간단하다. 그것은 마음을 떨쳐 버리는 것이다. 마음을 넘어가라. 그리하면 그대는 사마디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오직 마음이 유일한 장애물이 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그 마음을 강화시키도록 교육을 받아 왔다. 전 세계에 있는 우리의 모든 교육 체계가 바로 그 마음을 키우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적을 키우는 것이며, 우리의 적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그것을 더욱 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좀더 지성적인 세계에서라면 명상은 모든 학교에서 필수과목이 될 것이다. 모든 대학에서 그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과목이 되어야 한다. 사마디의 맛을 보지 않는 한, 그 학생에게 대학 졸업장을 주어서는 안 된다. 그에게 어떤 자격증도 주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만약 우리가 모든 교육 체계에서 명상을 기본 과목으로 채택할 수 있다면, 그때 사람들은 정치가도 될 수 있고 사업가도 될 수 있다. 생산 공장에 가서 일할 수도 있고, 음악가나 화가, 무용가나 배우가 될 수도 있다. 그들은 모든 부분에서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을 갖게 될 것이다. 그것은 명상에 관한 경험이다. 그것은 인류를 하나로 만드는 기본적인 공통 요소가 될 것이다.
사람이 명상을 하더라도 그 재능은 모두 다르게 나타난다. 그가 무슨 직업을 갖더라도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직업에 성스러운 자질을 부여할 수 있다. 그가 구두를 수선하거나 도로를 청소하는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하는 일에 아름다움을, 은총을 가져올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사마디 없이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전 세계를 환희심에 가득 찬 사람들로 채울 수 있다. 단지 한가지 간단한 사실만 받아들여진다면 말이다. 그것은 바로 그대가 의사나 기술자나 과학자가 되더라도, 그대가 무엇이 되더라도 명상은 모든 직업과 모든 종류의 교육에 기본적인 토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전쟁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그대는 핵무기 때문에 공포에 떨 필요가 없다. 인구는 자연적으로 감소하기 시작할 것이다. 사람들은 명상을 통해 각성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 세계가 인구 과잉이 될 것이라고 예상된다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아이들을 낳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그에게 그런 말을 해줄 필요가 없다. 왜 그가 자신의 자녀를 재난이 다가올 세상에 태어나게 하겠는가? 누가 자신의 자녀가 3차 대전을 겪게 되기를 바라겠는가? 누가 자기 자식들이 거리에서 굶어 죽게 되기를 바라겠는가?
명상은 사람들이 저지른 과오와 그 병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치료책이다. 명상(Meditation)과 약(Medicine)은 같은 어근에서 나온 말이다. 약은 육체를 위한 것이고 명상은 영혼을 위한 것이다. 병을 치료할 때에 그 둘을 모두 갖추어야 완전히 건강해질 수 있다.

경전에 이르기를 "아무것도 제 본성을 가진 것이 없다."라고 했다.

이 말은 고타마 붓다와 달마 같은 그의 제자들이 이룩한 가장 위대한 공헌이다. 아무것도 제 본성 혹은 자성(自性)을 가진 것이 없다. 이 말은 그대의 의식이 순수한 허공이란 뜻이다. 거기에는 어떤 집착도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완전히 텅 비어 있으면서 또한 가득 차 있다 빛으로, 기쁨으로, 향기로 가득 차 있으면서 또한 완전히 비어 있다.
사람들을 서로 구분짓는 것은 자성이 아니다. 그대가 사마디 속에 있는 순간, 나무들 역시 사마디 속에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산들도 사마디 속에 있으며, 별 또한 사마디 속에 있다. 그대는 존재계 전체가 사마디 속에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오직 그대만이 지금까지 엉뚱한 곳을 헤매고 다녔다. 그리고 이제 그대는 집으로 돌아와 우주의 전체성 속으로 녹아들었다.

"아무것도 제 본성을 가진 것은 없다." 행동하라. 질문하지 말라.

달마는 철학자가 아니다. 그는 어떤 종류의 철학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는 단순히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말한다. 행동하라고, 질문하지 말라고, 왜냐하면 그대는 어떤 것도 질문을 통해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질문에 대한 답은 또 다른 질문을 더 많이 만들어낼 뿐이다. 그리고 그대는 계속해서 묻는다. 그대는 삶을 반복한다. 그러나 어떤 해답도 찾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행동하라.

그대가 잘못할 때 그대는 이미 잘못되었다.

그대가 묻는 질문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질문할 때, 그대의 마음은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대가 아무것도 묻지 않을 때, 그대에게서 사마디는 그리 멀지 않다. 질문은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그대가 그 질문에 해답을 찾게 되는 순간, 그대의 마음은 더욱더 강해지고 굳어진다. 그래서 달마는 말한다.
'아무것도 묻지 말라. 그대가 해답을 알고자 한다면 그저 행동하라.'
그대가 그저 행동하고 마음을 초월할 때 그대는 진정한 해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해답이란 바로 자신이다.


 

그대가 미혹되는 순간 여섯 가지 감각과 그 경계는 고통과 죽음을 맛보게 된다.

그는 예리한 눈을 가졌고 이 짧은 말속에 엄청난 뜻이 담겨 있다. 그는 그대가 미혹되었을 때, 그대가 마음의 작용에 떨어졌을 때, 다섯 가지 요소가 이 세계와 그대의 여섯 가지 감각을 만들어낸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이 말은 매우 이상한 말이다. 금세기에 와서야 겨우 과학이 인간의 여섯 번째 감각을 발견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경전에서 다섯 가지 감각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유독 달마만이 여섯 번째 감각을 말했다.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그 감각은 얼마 전에야 비로소 발견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대의 귀속에 있다. 귀는 항상 다섯 가지 감각 중의 하나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우리는 귀 속에 한 가지 감각이 더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것은 바로 평형감각이다. 만약 그대가 귀를 다친다면, 그대는 더 이상 몸의 균형을 잡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마치 그대는 술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게 될 것이다. 술취한 사람이 비틀거리는 것은 알코올이 그의 평형감각을 마비시켰기 때문이다. 모든 약물이 이 여섯 번째 감각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그대가 약물중독이 되면 그대는 몸의 균형을 잃게 된다.
한 술취한 사람이 어는 날 밤에 집으로 왔다. 그는 잠긴 문을 열려고 애를 썼지만 손이 떨려서 문을 열 수가 없었다. 도저히 열쇠 구멍에 열쇠를 꽂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소리쳤다.
"맙소사! 이게 왜 이렇게 안 되지? 지진이 났나? 모든 것이 흔들리고 있잖아!"
한 경찰관이 그곳을 지나다가 그 술취한 사람을 보고는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는 착한 사람이었지만 회사 일 때문에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경찰관은 그에게 와서 말했다.
"제가 도와드릴까요?"
그가 대답했다.
"아이구, 친절도 하셔라. 당신이 이 집을 붙잡고 있는 순간에 내가 열쇠 구멍 속에 열쇠를 꽂으면 될 거요. 그러니 집을 좀 붙잡고 있으시오. 굉장한 지진이 일어나고 있소."
여섯 번째 감각이 귀 속에 감추어져 있었다는 사실은 매우 이상한 일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사실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금세기에 와서야 외과 의사들은 몸의 평형감각이 귀속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나 달마는 그대가 미혹될 때, 그대가 마음에 있을 때, 그대의 육체를 이루고 있는 여섯 가지 감각은 그대에게 고통과 죽음을 만들어낼 뿐이라고 말한다.

그대가 각성하는 순간 여섯 가지 감각과 그 경계는 열반과 불멸을 맛본다.

달마는 그대가 마음을 초월할 때, 그대의 여섯 가지 감각은 열반과 불멸을 맛본다고 말한다. 모든 것이 다 똑같다. 이 세상이 그대의 오감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대가 한번 마음을 초월하게 되면, 그때 그것들은 열반과 불멸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달마는 육체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는 이 세상을 반대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대의 잠에 대해서 반대하지도 않는다. 그는 그대가 세상을 포기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는 그대가 육체를 고문하도록 원치 않는다. 이 몸과 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대가 각성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모든 해답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대는 지금 깊은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그리고 침묵으로 들어가라. 그 침묵은 그대의 각성을 계속 유지시켜 줄 것이다. 그대의 존재 전체가 깨어 있는 의식으로 빛날 것이다.
그때 이 육체는, 이 감각은, 이 세상은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뀐다. 그것이 바로 열반이며 불멸이다.

도를 구하는 자는 자신을 초월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마음이 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마음을 발견할 때 그는 거기에 아무것도 없음을 알게 된다. 그가 도를 발견할 때 역시 거기에 아무것도 없음을 알게된다. 그대가 도를 찾는 데 마음을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대는 벌써 미혹된 것이며 거기에 불성이라고 하는 것이 존재하게 된다. 그대가 깨어 있을 때 거기에 불성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깨어 있음이 곧 불성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매우 아름다운 말이다. 그대는 물론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 그대가 미혹되었을 때 불성은 존재하지 않다가, 그대가 각성했을 때 불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달마는 그 반대로 말했다. 그리고 그의 말은 옳았다. 그대가 미혹되었을 때 그대는 모든 종류의 환상을 갖고 이 세상을 바라본다. 그대 내부에는 욕망이 있다. 그대가 그것을 인식할 때도 있고 그것에 대해 완전히 잊어버릴 때도 있다. 그 욕망은 부처가 되고 싶은 마음이다. 각성하고 싶은 마음, 깨닫고 싶은 마음 말이다.
가장 깊은 마음속에서조차 그대의 어두운 무의식 한구석에서 깨달음에 대한 열망이 일어나고 있다. 그 누구도 탐욕이나 분노나 어리석음만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들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한다면 달마가 이렇게 말한 것이 맞다.
"그대가 미혹되었을 때 불성이 존재한다. 그대가 깨어 있다면 불성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깨어 있음이 바로 불성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깨어 있을 때, 그대는 이미 부처이며 따라서 불성에 대한 추구는 사라진다. 그대가 부처일 때, 그대는 부처가 되겠다는 생각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깨달음은 그것 자체를 인식할 수 없다. 순수함이 그것 자체를 인식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불성은 그것과 멀리 떨어져 있을 때만 인식되는 것이다. 집에 도착한 사람에게는 불성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부처는 자신이 부처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지식은 다른 존재에 대해서 아는 것이다. 그러나 거울은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비출 수 있지만 자신은 비출 수 없다. 거울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삶과 죽음을 미워하지도 말고 사랑하지도 말라. 그대의 모든 생각이 미혹되지 않도록 하라. 삶 속에서 그대는 열반이 시작되는 것을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죽음 속에서 어떤 재생도 없음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서양에서는 그 누구도 환생에 대해서 말한 사람이 없었다. 플라톤이나 칸트, 포이어바흐, 러셀, 사르트르 같은 위대한 철학자들도 그것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나는 이 사실에 매우 놀랐다. 그들은 위대한 천재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생에 대해 말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은 생각은 오직 한 생애에만 매여 있었고 그것은 너무나 큰 비극이었다.
존재계는 비극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 풍부함으로 넘쳐흐른다. 모든 죽음은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오직 몇몇 희귀한 사람만 빼놓고 말이다. 그리고 그 희귀한 사람들은 바로 깨달은 자들이다. 깨달은 자의 죽음은 궁극적인 죽음이다. 그는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다. 그는 더 이상 육체에 속박되지 않는다. 그는 다시는 마음에 의해 고통을 받지 않는다. 그의 의식은 얼음 한 조각이 바닷물에 녹아들 듯이 완전히 녹아들어 전체와 하나가 된다. 그는 그야말로 마지막을 맞이한 것이다. 그는 더 이상 특정한 모습으로, 특정한 부분으로 나누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는 바로 우주 자체가 될 것이다.
사람이 깨달음을 얻을 때마다 온 우주는 더 한층 높은 의식 단계에 이르게 된다. 왜냐하면 그의 의식이 존재계 전체에 퍼지기 때문이다. 깨달은 사람이 많아질수록 존재계는 더욱 풍부해진다. 한 사람의 의문이 해결되는 순간 그것은 온 우주에 해답이 된다. 존재계는 갈수록 풍부해지고 아름다워지며 즐거움이 넘쳐나게 된다.

형체에 미혹되지 않고 형체를 보며, 소리에 미혹되지 않고 소리를 듣는 것이 바로 해탈의 상태이다. 형체에 집착하지 않는 눈이 바로 선으로 들어가는 문이며, 소리에 집착하지 않는 귀 역시 선으로 들어가는 문이 된다. 간단히 말해서 모든 현상의 본질을 이해하는 자는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자유롭다.
미혹됨이 없을 때 마음은 불국토가 된다. 미혹되는 순간 마음은 지옥으로 변한다.

위대한 선사 한 사람이 생각난다. 일본의 황제는 그를 만나 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러나 그 선사가 있는 승원으로 가는 길은 매우 위험했다. 거친 들판과 숲과 험한 산을 넘어가야 했다. 하지만 결국 황제는 그 선사를 만나러 갈 것을 결심했다. 그는 자신이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고, 죽음이 오기 전에 그는 죽음이 파괴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알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는 드디어 선사가 사는 승원에 도착해서 선사가 나무 밑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선사에게 가서 절을 한 후에 말했다.
"한 가지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천당과 지옥이 존재합니까? 나는 죽음이 가까웠고 내 관심사는 그것밖에 없습니다. 내가 어디에 갈 것인지, 천당인지 지옥이지 말입니다."
그러자 그 선사는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우리의 황제가 이렇게 바보인지 몰랐다."
그러자 황제는 바보라는 소리에 그만 화가 나서 칼을 빼어 들었다. 그리고는 선사의 목을 내리치려는 순간 선사가 웃으면서 말했다.
"이것이 지옥의 문이다."
그 말에 황제는 행동을 멈추고 칼을 거두었다. 그리고 선사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자 선사가 또 말했다.
"그대는 이미 천당에 들어갔다. 이제 가라. 분노와 폭력은 지옥의 문이다. 그리고 지옥은 그대 마음속에 있다. 그러나 이해와 자비와 침묵은 천당의 문이다. 그것들은 너의 마음을 초월해서 있다. 나는 그대에게 그 둘 다를 경험하게 했다. 내가 그대를 바보라고 부른 것을 용서하라. 나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그런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 나는 그대가 스스로 답을 얻을 수 있는 상황을 만들었을 뿐이다. 이제 잊어버리라."
그러자 그 황제는 고마움으로 선사의 발 앞에 엎드렸다. 그는 살아오는 동안 그토록 확실한 대답을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그는 가설 속에 살아야만 했다. 그러나 그가 마지막에 만난 사람은 엄청난 사람이었다. 그 선사는 왕을 바보라고 부름으로 해서 순간적으로 그런 상황을 만들어냈다. 그는 그에게 천당과 지옥의 문을 둘 다 보여 주었다. 그대의 마음이 지옥이다. 그대의 마음을 초월하는 것이 극락이다.
마음을 초월하라.
이것이 모든 깨달은 사람들의 가르침의 본질이다.

알겠는가?
 

출처 : 세존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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