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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12 11:50

[달마의 중생론 衆生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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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마음은 그대를 얽어 매는 굴레이다[달마의 중생론 衆生論]
 

조셉 아르파이아·롭상 랍가이 저, 서보경 역
 

 
 

달마어록 중생론 衆生論

마음이 없이는 부처도 없다는 말의 뜻은 부처가 마음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누구든지 부처를 보기 원한다면 부처를 보기 전에 먼저 그 마음을 보라. 한번 그대가 부처를 보았다면 그대의 마음에 대해서 잊어버린다.
만약 그대가 마음에 대해서 잊어버리지 않으면 그 마음은 그대를 혼란에 빠뜨릴 것이다. 중생심과 불성은 물과 얼음의 관계이다. 세 가지 독에 중독되면 그것은 중생심이 되고 세 가지 독에서 벗어나서 순수해질 때 그것은 불성이 된다.
겨울이 되면 물은 얼음이 되고 여름이 되면 얼음은 물이 된다. 얼음을 없애고 나면 더 이상 거기에 물이 남아 있지 않다. 중생심을 제거하면 거기에 불성은 없다. 얼음의 본성이 바로 물의 본성이다.
중생은 부처를 해탈시키고 부처는 중생을 해탈시킨다. 그것은 서로 나누어질 수 없는 것이다. 고통이 깨어 있음을 만들어내기에 중생은 부처를 낳는다. 그리고 깨어 있음은 고통을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에 부처는 중생을 해탈시킨다. 고통이 없다면 깨어 있음을 만들어낼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깨어 있음이 없다면 고통을 부정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대가 미혹되었을 때 부처는 중생을 해탈시킨다. 그대가 깨어 있을 때 중생은 부처를 해탈시킨다. 부처는 스스로 부처가 될 수 없다. 그들은 중생에 의해서 해탈된다. 그래서 모든 부처들은 미혹을 아버지로 삼고 탐욕을 어머니로 삼는다. 미혹과 탐욕은 중생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대가 미혹되었을 때 그대는 이쪽 언덕에 있다. 그대가 깨어 있을 때 그대는 저쪽 언덕에 있다. 그러나 한번 그대가 자신의 마음이 텅 빈 것을 알고 그대가 어떤 형체도 없음을 볼 때 그대는 미혹과 깨어 있음을 초월할 때 저쪽 언덕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여래에게는 이쪽 언덕도 없고 저쪽 언덕도 없다. 그는 강물의 중간에도 없다. 아라한은 이 강물의 흐름 중간에 있다. 중생은 이쪽 언덕에 있다. 그리고 저쪽 언덕에는 불성이 있다.

 

마음은 그대를 얽어매는 굴레이다.

달마는 어떤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통찰력을 갖고 있다.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 부처의 제자들은 많이 있다. 그러나 아무도 달마와 같은 통찰력을 보여 주지 않는다. 그들은 단순히 침묵해 있거나 말을 한다. 그러나 그 침묵이나 말들은 달마의 의식에까지 높이 오르거나 깊이 도달하지 못했다.
그것은 아마 자신이 하는 말에 두려움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두려움을 모른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를 상관하지 않는다. 그가 말을 할 때면 어떤 누구도 고려하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것과 같았다.
9년 동안 그는 벽 앞에 앉아 있었다. 사람들이 오면 그의 등뒤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질문을 했지만 달마는 오직 벽하고만 말했다. 그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에게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침묵 속으로만 몰입했다.
어젯밤 나는 크리슈나무르티(J. Krishnamurti)의 마지막 책을 받았다. 그는 어떤 누구를 향해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오직 자신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그 말들은 녹음되었지만 청중은 아무도 없었다. 아마 이 책은 그의 다른 책들보다 진리에 더 가까울 것이다. 청중이 하나의 한계를 만들어내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나의 경험에서 나온 말이다. 내가 나의 사람들에게 말할 때는 거기에 한계가 없다. 그때 나는 어떤 것을 말해야 한다거나 말하지 않아야 한다는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그때 나는 마치 나 자신에게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나를 알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말을 할 때는 커다란 한계가 생겨난다. 그때 나는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그들의 얼굴, 그들의 눈, 그들의 동작이 나로 하여금 그들에게 상처가 될 만한 말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며칠 전 인도 타임스의 기자들 70여 명이 나를 찾아왔다. 그런데 내가 기자 회견을 하기 위해 강당으로 들어갔을 때, 나는 매우 이상한 분위기를 맛보았다.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매우 냉담했고, 길들이지 않은 야생동물들 같은 인상을 내뿜고 있었다. 내가 합장을 하며 인사를 했을 때 그들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인도에서는 길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도 서로 합장을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가 누군지도 몰라도 말이다.
합장은 영적인 의미를 지닌 인사법이다.
악수를 하는 것에는 아무런 영적 의미도 없다. 그것은 세속적인 의미밖에 없다. 그대는 오른손으로 악수를 한다. 그것은 그대의 손안에 무기가 없다는 뜻이며 서양에서 생겨난 인사법이다. 그것은 인사가 아니라 하나의 탐색전이다. 그 의미는 매우 정치적이다.
그러나 합장을 하는 것에는 영적인 뜻이 담겨 있다. 그것은 먼저 상대편의 신성에 절한다는 뜻이다. 그대가 낯선 사람이나 친구거나 적이든 간에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전히 그대는 신의 사원이며 살아 있는 신이란 뜻이다. 두 손을 합장하는 것은 살아 있는 신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비물질적이다. 그대가 친구이건 적이건 간에 말이다.
또한 합장은 두 가지 마음을 품지 않는다는 뜻이다. 나는 한마음이 되었다는 뜻이다. 두 손바닥을 합치는 것은 좌뇌반구와 우뇌반구가 만난다는 뜻이다. 나는 온전한 하나를 이루어 그대에게 절한다는 뜻이다.
내가 인도 타임스의 기자들과 만났을 때, 나는 무척 놀랐다. 그들은 모두 대학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모두 지성인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나의 인사에 답할 줄을 몰랐다. 그들은 석상처럼 앉아 있었다.
그런 사람들과 말을 한다는 것은 벽과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 힘들다. 그들에게 보내는 나의 인사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 그들은 인간의 자격이 없는 것이다. 그런 무례함은 동양에서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나의 기자 회견을 하겠다고 계속 고집을 부렸다. 나는 그들과 잠시도 같이 있기가 싫었다. 그것은 그들이 계속 어리석은 질문만 던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서 내가 대답을 하기 시작하자 그들은 내 이야기를 왜곡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그들 인도 타임스의 실무진 모두가 이곳에 왔기 때문에 인터뷰에 응해 주었다.
사실 내가 그들의 뜻에 동의한 것은, 그들 중에 나의 사람이 한 명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은 사미르 자인이다. 그는 예전에 이곳에서 명상도 했고 또한 산야신이기도 하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나의 산야신이 되는 것을 절대적으로 반대했지만, 그는 아버지에게 결별을 고하면서까지 산야신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오직 그만을 바라보면서 인터뷰에 응했다. 그리고 나는 내 말을 왜곡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그들은 내 말을 왜곡하지 못하고 신문에 실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질문과 내 대답을 함께 실을 만한 배짱이 없었다. 왜냐하면 정치와 언론에 대한 나의 생각을 묻는 질문에, 나는 썩은 정치와 그 정권에 아부하는 썩은 언론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기 때문이다.
달마는 마치 자신에게 말을 하듯이 이야기했다. 그때 그는 어떤 한계도 없이 자신의 가슴을 완전히 열어젖뜨릴 수 있었다. 그는 그의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이나, 앞으로 나의 말을 기록한 책을 읽을 사람들에 대해서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아마도 이 점 때문에 그의 말은 인간의 본성 깊은 곳까지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대는 이전에는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내용들을 그의 어록에서 대할 수 있을 것이다. 달마는 너무도 명확하게 말했기 때문에 그대는 그 말에 어떤 반박도 할 수 없다.
이 어록은 적어도 천 년 이상 존재해 왔지만 어떤 불교 학자도 그것들에 대해서 주석을 붙이지 못했다. 그것은 이 어록이 사원의 탑 안에 깊숙이 보관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근에 들어서야 서양의 학자들에 의해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그들은 이렇게 엄청난 의미들을 지닌 불교 서적이 불교도들에 의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고, 오히려 감추어져 왔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불교도들의 공포를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수천 권의 책들을 영어나 독일어,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언어로 번역했지만 달마의 어록은 완전히 무시했다.
참으로 이상한 세상이다. 이 세상에서는 가장 진지하고 진실한 것은 가장 위험스런 것이 되어 왔다.
며칠 전 이곳 뿌나에서 스와미 스바루파난드(Swami Svarupanand)는 신문에 이렇게 발표했다.
"오쇼는 우리와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험한 인간이다."
나는 내 집 밖을 한 걸음도 나가지 않는 사람이다. 나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다. 나는 어떤 정치적 권력에도 관심이 없다. 나는 어떤 핵무기도 갖고 있지 않다. 도대체 그는 어떤 근거로 내가 위험한 사람이라고 말했는가? 그 위험이란 어디에 있는가?
그 위험은 내가 진리에 관해서 다른 어떤 사람과도 타협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내가 위험한 사람이 아니다.
진리가 위험한 것이다.
사람들은 거짓말을 통해서 자신을 위로한다. 그 거짓말은 사람들이 그들의 무덤에 갈 때까지 계속 희망을 준다. 그 거짓말은 그들의 삶이 무의미하다는 고통과 그들의 삶이 어리석다는 사실에 대한 허무함을 잊어버리게 하는 아편처럼 작용한다. 그리고 모든 종교가 이렇게 하고 있다. 누군가가 진리를 말하면 그는 그 즉시로 위험한 인물이 된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는 위험한 사람이 안 될 것이다. 그는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는 서른 세 살의 젊은이였다. 교육도 받지 못했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는 진리를 말했다. 이스라엘의 랍비들은 도저히 그런 그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유대교의 모든 거짓을 폭로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젊은이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소크라테스 역시 아무도 해치지 않았다. 하지만 진리를 말한 것이 그의 죄였다. 그는 독배를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달마 역시 독살되었다. 그를 독살시킨 사람들은 그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았다. 그는 완전히 다른 체질의 사람이었다. 그는 깊은 혼수상태에 빠졌고, 한밤중에 무덤 속에 신발 한 짝만 남겨 놓고 사라졌다. 다른 신발 한 짝은 그의 지팡이에 걸려 있었다.
3년 뒤 사람들이 그가 완전히 죽었다고 믿었을 때, 한 정부관리가 그를 보았다. 그는 국경 근처에서 히말라야로 막 들어가던 중이었다. 관리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달마가 죽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그는 달마에게 물었다. 그러자 달마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깊은 혼수상태 속에서 밤에 될 때까지 있다가 깨어나 무덤을 빠져 나왔다. 나는 무덤에 신발 한 짝을 남겨 놓았다. 그것은 내가 무덤 속에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그리고 나머지 한 짝은 내 지팡이에 매달았다. 그것은 내가 달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이다. 그런 행동은 나를 나타내는 증표이다."
그 관리는 즉시 달마가 죽었다는 산으로 뛰어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말했다. 그 제자들은 관리의 말읕 듣고 그에게 무덤을 보여 주었다. 관리는 말했다.
"나는 무덤 속을 들여다보고 싶소. 그분은 짚신의 다른 한 짝이 무덤 속에 남아 있다고 말했소. 그러니 무덤 속을 보고 그분이 진짜 달마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나를 속였는지를 알고 싶소."
그 무덤을 파헤쳐졌고 거기에는 짚신 한 짝만 남아 있었다.
달마를 독살할 필요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 그는 단지 그대의 잠을 깨우기 위해 모든 노력을 하건만, 그대의 반응은 그를 죽이는 행위로 나타나는 것이다. 누가 제정신이 아닌가? 소크라테스가 미쳤는가? 예수가 제정신이 아닌가? 만수르(Mansoor)가, 사르마드(Sarmad)가 미쳤는가? 달마가 정말 정신이 나간 사람인가? 그렇지 않다면 그들을 죽인 사람들은 무엇인가?
여기에 진리를 이해하고 모든 거짓말을 떨쳐 버리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말이 나와 있다.

마음이 없이는 부처도 없다는 말의 뜻은 부처가 마음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그러나 부처는 마음이 아니다. 마음은 부처의 굴레이다. 그는 마음을 넘어서서 무심의 경지로 나아간 사람이다. 그런 자만이 부처가 된다. 하지만 그도 처음에는 마음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대들 모두도 마음을 갖고 있다. 그래서 그대는 이미 반은 여행을 마친 셈이다.
나머지 반은 그대의 마음을 벗어날 때 완성된다. 그때 그대의 불성이 선언된다. 그대는 그것을 소리 쳐서 선언할 필요가 없다. 그대는 그것을 속삭일 필요도 없다. 그것은 스스로 선언할 것이다. 그대의 말 속에, 그대의 침묵 속에, 그대의 깊은 눈동자 속에, 그대를 감싸안은 향기 속에서 말이다. 그리고 그대는 선선한 미풍처럼 될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가 사용한 여래란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그 한 가지는 내가 이미 설명했듯이 그것은 존재계와 그것의 여여(如如)함을 신뢰하는 사람을 말한다. 선이나 악이 일어나도, 축복이나 불행이 일어나도 그는 당황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이 존재의 여여함이라고 말한다. 그는 더 이상 고통으로 마음이 흔들리거나 기쁨으로 들뜨지 않는다. 모든 것은 자연적인 현상이다. 그대는 그 현상에 휩쓸리지 말고 홀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여래의 한 가지 의미이다.
여래의 또 한 가지 의미는 이 경전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여래란 미풍과 같은 사람을 뜻한다. 그것은 '이리하여 흘러오고 저리하여 흘러간다.'라는 뜻이다. 그는 그대의 초대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는 어느 날 문득 왔다가 그대가 붙잡아도 어느 날 문득 떠나간다. 그리고 그대에게 고요함과 정적의 경험을 남겨 놓고 사라진다.
이 정적은, 이 시원함과 산뜻함은 모든 존재계에서 그 어떤 것보다 큰 영향을 미친다. 부처가 이 땅에 오면 모든 종교가들이 위험에 빠진다. 그리고 모든 정치가들의 내면에 전율을 일으킨다. 거짓에 의지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은 죽을까봐 겁을 낸다. 진리는 그런 힘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사람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 단지 거짓으로 이루어진 이 세계를 진동하게 만든다. 진리의 사람이 한 명만 있어도 그런 일이 일어나기에 충분하다.


 

유대인들의 설화가 한 편 생각난다. 구약에 나오는 두 도시 소돔과 고모라를 보면서 신은 매우 화가 났다. 유대교의 신은 화를 잘 내었다.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매우 비정상적인 성관계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은 그들을 멸망시킬 준비를 했다. 그리고 구약에서는 실제로 신이 그 도시를 파괴했다. 마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처럼 말이다.
그러나 유대교 내에는 진정한 신비주의의 한 작은 흐름이 있다. 그것은 유대교가 이 세상에 공헌한 유일한 아름다운 것이다. 그것은 하시디즘(Hasidism)이다. 그들은 유대교의 정통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래서 그들은 정통 유대교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그들은 진리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신이 화를 낸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썼다. 그들은 구약의 내용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한 하시드신비주의자가 신이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겠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그는 신에게 말했다.
"당신께서 그들을 멸망시키기 전에 몇 가지 질문에 답을 해주셔야 합니다. 먼저 이 도시에 그 영혼이 순결하며 깨달음을 얻은 깨끗한 사람이 200명 있다면 그들과 함께 이 도시를 멸망시키시겠습니까?"
신은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스러웠다. 그는 깨달은 사람 200명을 함께 죽일 수 있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말했다.
"나는 그것을 몰랐다. 그 사실을 가르쳐 주어 매우 고맙다. 나는 그들을 멸망시키지 않겠다. 이 200명의 사람들이 20만 명의 목숨을 구했다."
그 하시드는 말했다.
"두 번째 질문은 만약 그들의 숫자가 200명이 아니라 20명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신은 이 20명을 죽이겠습니까? 질보다 양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신은 또다시 낭패스러웠다. 확실히 양보다 질이 더욱 중요했다. 깨달은 사람이라면 200명이나 20명이 뭐가 다르겠는가? 신이 말했다.
"그대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20명의 숫자라도 그대가 증명할 수 있다면 그 도시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 하시드는 웃으면서 말했다.
"저의 마지막 질문입니다. 만약 거기에 20명이 아니라 단 한 사람의 깨달은 자가 있다면, 그래서 그가 1년 중 6개월은 소돔에서 살고, 나머지 6개월은 고모라에서 산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래도 여전히 질이 양보다 귀중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신은 이 사람이 지겨워졌다. 그는 진짜 유대인이었다. 신은 그에게 최종적으로 말했다.
"좋다. 그렇다면 그 마지막 한 사람을 데려와 보라."
그 하시드가 말했다.
"제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유대교는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외면했다. 그들은 그것이 단지 꾸며낸 이야기라고 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신이 화를 내어 고모라와 소돔을 멸망시켰다는 이야기가 허구이다. 나에게는 하시드의 이야기가 더 진실하게 보인다.
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는 단 한 명의 진리의 사람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이 세상은 구원받고 싶어하지 않는다. 신은 그 한 사람을 죽일 필요가 없다. 이 세상이 그를 죽일 것이다. 사람들을 구원하려는 그를 죽일 것이다.

마음이 없이는 부처도 없다는 말의 뜻은 부처가 마음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그러나 부처는 마음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연꽃과 같다. 그것은 진흙에서 나온다. 하지만 진흙은 아니다. 진흙과 연꽃이 어떻게 다른지 생각해 보았는가? 연꽃은 진흙에서 나와서 물 위로 피어오른다. 그때 연꽃은 하나의 초월이다. 진흙이 없다면 거기에 연꽃도 없다.
연꽃이 없어도 진흙은 존재할 수 있다. 이 점을 이해해야 한다. 고귀한 것은 연약해서 부서지기 쉽다. 그러나 천한 것은 매우 딱딱하다. 바위는 장미꽃보다 훨씬 딱딱하다. 그대가 고차원으로 올라갈수록 그대는 더욱 부서지기 쉽다. 이런 사람들은 소크라테스나 예수나 달마 같은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독살될 수 있다. 그들은 연꽃과 같은 존재이다. 그러나 진흙 같은 마음은 그들을 보면 매우 화가 난다. 그들은 연꽃같은 사람을 보면 화를 낸다. 물론 그 사실은 충분히 이해할 만 하다. 연꽃은 그토록 아름다운 것이다. 이 세상의 연꽃의 아름다움과 비교할 만한 꽃은 없다. 그래서 부처는 자신의 낙원을 '연꽃 낙원'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아름다움에 있어서 하나의 궁극이다. 석가모니 부처가 특별히 '연꽃'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일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진흙은 연꽃없이 존재할 수 있어도 연꽃은 진흙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마음은 단 한 명의 부처도 없이 수백만 개가 존재할 수 있어도 부처는 이 모든 마음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마음은 진흙과 같은 구실을 한다. 그리고 부처는 진흙과 물을 초월해서 태양과 만난다. 그러므로 기억하라. 부처는 마음에서 나오지만 마음은 아니다.

누구든지 부처를 보기 원한다면 부처를 보기 전에 먼저 그 마음을 보라.

부처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육안에 보이는 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내면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꽃이다. 그대가 내면의 눈을 뜨지 않는 한 그대는 부처를 알아볼 수 없다.
사람이 부처를 보려면 먼저 무심의 경지가 되어야 한다.
부처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 너무나 아름다운 일이 벌어졌다. 그때 그가 제일 처음 생각한 것은 다시 왕궁으로 돌아갈까 하는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아직 죽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매우 연로했을 것이다. 만약 그가 아직도 살아 있다면 부처는 그에게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는 독자였고 그의 아버지에게 큰 고통을 주었던 것이다. 본래 부처는 노년기에 접어든 아버지를 모시면서 왕위를 이어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부처는 왕위를 잇기 전에 왕궁을 빠져 나왔다. 그래서 그의 첫 생각이 바로 왕궁으로 돌아가 그의 깨달음과 축복을 그의 아버지에게 나누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부처는 그의 아버지가 자신을 부처로 알아줄 수 없다는 생각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의 아버지는 아직 내면의 눈을 뜨지 못했던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오직 마음을 통해서만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를 대면했을 때, 그 노인은 진짜로 화를 냈다. 그대도 그 노인이 화를 내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가 말했다.
"너는 내가 늙었음에도 나를 속였다. 12년 동안 어디서 떠돌아다니다가 이제 나타났느냐? 그리고 그동안 무엇을 했느냐? 왕의 아들이 동냥 그릇이나 들고 다니는 신세가 되었으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처사란 말인가? 너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황제의 아들로 태어났다. 점성술사들이 네가 태어났을 때, 너는 장차 위대한 군주가 될 능력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 얼마나 바보 같은 삶을 선택했단 말인가?"
석가모니 부처는 묵묵히 서 있었다. 그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그는 우선 그의 아버지가 자신의 분노에서 벗어나기를 원했다. 그의 아버지가 소리치고 꾸짖고 비난하는 동안 석가모니 부처는 절대적인 침묵속에 빠져서 마냥 서 있었다. 그는 문이 완전히 닫혀진 것처럼 보였다.
드디어 부처가 입을 열었다.
"나의 침묵이 옳은 행동입니다. 나는 이전에 당신을 떠난 그가 아닙니다. 그는 오래 전에 죽었습니다. 물론 나는 같은 몸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전에 그가 진흙이라면, 지금의 나는 연꽃입니다. 그러니 그 연꽃에 대고 화풀이를 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지금 진흙 때문에 화를 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나로 하여금 당신의 눈물을 닦게 해주십시오."
그 늙은 왕의 눈은 눈물로 가득 찼다.
"눈물을 닦고 새롭게 나를 쳐다보십시오. 나는 왕궁을 떠났던 그 사람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내가 왕궁을 떠날 때는 중생으로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지만 이제 나는 불멸의 존재가 되었습니다. 내가 왕궁을 떠날 때는 보통 사람이었지만 이제 나는 부처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나를 한번 쳐다보십시오."
그 아버지는 그를 쳐다보았다. 확실히 거기엔 뭔가 큰 변화가 있었다. 그 순간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버지는 그를 그저 쳐다보기만 했는데 거기에 뭔가가 전달되었다. 드디어 아버지가 말했다.
"나를 용서해라. 내가 화가 나고 눈물이 나서 너를 자세히 보지 못했다. 이제 내게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너는 나를 입문시켜서 나도 진흙에서 연꽃으로 변하는 길을 걷도록 인도해 주는 것이다. 너는 확실히 연꽃이 되었구나. 나는 이렇게 아름답고 은총이 넘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부처는 아무 말 없이 그의 부친의 간청을 받아들였다. 아버지가 자기 아들에게 입문한 것이다.
그대가 깨닫는 순간 그대는 그것을 일부러 선언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저절로 알려진다 그러나 오직 민감한 감수성을 지닌 사람만이, 그의 가슴에 음악이 있고 시가 있는 사람만이 그대를 알아볼 수 있다.  은행 잔고에만 관심이 있고, 권력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완전히 장님이다. 그들은 부처가 자신 앞에 나타나도 그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한번 그대가 부처를 보았다면 그대는 마음에 대해서 잊어버린다.

한번 그대가 연꽃을 보면 그대는 진흙에 대해서 모두 잊어버릴 것이다.

만약 그대가 마음에 대해서 잊어버리지 않으면 그 마음은 그대를 혼란에 빠뜨릴 것이다.

그대의 아들에게, 혹은 그대의 친구에게 이런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면 그대는 아마 그 변화를 알아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를 알아보려면 그대는 가슴을 열고 이전에 갖고 있던 그에 대한 인상이 이제 틀렸음을 시인해야 한다.
그대가 그것을 알아보는 것은 그대 내면에 하나의 씨앗이 된다. 그때 그대는 더 이상 마음속에 머물러 있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이제 진흙 같은 세상에 만족하고 남아 있을 수가 없다. 그대는 또 하나의 연꽃이 되고 싶어한다. 그대는 하나의 도전을 받은 것이며, 그대도 내면에 연꽃이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대는 아직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것은 내면에 묻힌 채로 남아 있다.
모든 사람이 부처이다. 그러나 진흙 속에 묻힌 씨앗의 상태이다. 연꽃을 알아보는 것은 그대 미래를 알아보는 것이며, 그대의 가능성과 그대 자신의 위대함을 알아보는 것이다.

 

중생심과 불성은 물과 얼음의 관계이다.

중생과 부처는 그다지 큰 차이가 없다. 차이가 있다면 물과 얼음의 차이 정도이다.

세 가지 독에 중독되면 그것은 중생심이 되고 세 가지 독에서 벗어나서 순수해질 때 그것은 불성이 된다.

세 가지 독이란 달마도 말했듯이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다. 이 세 가지 독을 갖고 있는 한 그대는 한낱 중생으로 남는다. 그러나 한번 그대가 이 세 가지 독으로부터 헤어나면 그때 그대는 불멸의 존재가 된다.
그대는 영원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제 그대에게는 죽음이 없다.

겨울이 되면 물은 얼음이 되고 여름이 되면 얼음은 물이 된다.

얼음과 물과 수증기 사이에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 하나도 없다. 다른 것이 있다면 온도일 뿐이다. 모든 사람들은, 히틀러조차도 부처의 잠재성을 갖고 있다. 그대가 아무리 깊은 무의식 속에 있다고 할지라도 그대는 깨어날 수 있다.
깨어나는 것에 있어서도 질적으로 다른 차이는 아무것도 없다. 단지 온도가 다를 뿐이다. 잠자는 사람은 깨어 있는 사람보다 조금 덜 깨어 있고, 깨어있는 사람은 잠자는 사람보다 깨어 있는 정도가 조금 더할 뿐이다. 깨어 있는 정도가 조금 다를 뿐이지 사람의 본성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단지 그대의 내면에 있는 불성에 대한 깨어 있음의 심도가 깊지 않아서 그것을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그대는 깨어 있음을 따로 의식할 수 없다.
그대는 그대의 의식을 인식할 수 없다.
그대가 진짜로 알고 있을 때 그대는 아는 자로 따로 존재할 수 없다.
그때 그대는 그것과 하나가 된다. 불성은 그대가 중생으로 있을 때에 보여질 수 있다. 부처는 그것을 하나의 대상으로 볼 수 없다. 그대는 지금 진흙 속에 있다. 하나의 씨앗으로 말이다. 그대가 연꽃을 볼 때 그것은 매우 멀리 느껴진다. 그대와 연꽃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대 자신이 연꽃이 될 때 모든 거리감이 사라진다. 연꽃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알지 못한다. 자신의 향기도 맡지 못한다. 그것들은 모두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달마가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이런 말들은 매우 낯설게 보이며 황당무계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존재계는 논리를 초월해 있다. 그것은 합리적으로 그대에게 보이지 않는다. 그대가 마음으로 생각한다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그대가 진흙에서 연꽃으로 변해 가는 과정을 체험한다면 더 이상 달마의 말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대는 이런 이상스러운 말이 정확한 표현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상한 말이 또 시작된다.

중생은 부처를 해탈시키고 부처는 중생을 해탈시킨다.

나는 불교도들이 이 어록을 천 년 동안 숨겨 두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중생이 부처를 해탈시킨다는 이 생각은 너무나 급진적이며 과격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달마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모든 부처는 중생에서부터 나왔다. 중생의 고통과 의미 없는 삼을 계속하는 것에서부터 해탈에 대한 문제 의식을 느낀 것이다. 그래서 중생의 고통이 없이는 어떤 부처도 탄생할 수 없다.

중생은 부처를 해탈시키고……

그대가 한번 중생의 고통을 둘러본다면, 그대는 부처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반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말은 더 좋다.

부처는 중생을 해탈시킨다.

이것은 빚을 갚는 일이다. 그들이 부처가 되었을 때 그들은 중생들에게 담금질을 한다. 그 담금질은 중생들이 해탈의 길로 가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여기에서 하고 있는 모든 일이다. 먼저 중생은 나를 해탈시켰고 이제 내가 중생을 해탈시킨다.
그 말은 매우 이상하게 들렸다. 아마 불교 학자들도 그것을 설명할 방도를 못 찾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 말을 망각 속에 매장시키고 다시는 끄집어내지 않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중생이 부처를 해탈시킨다는 생각을 어떻게 다뤄야 할 것인가? 지식으로 배운 사람들은 도저히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은 서로 나누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둘이 아니라고 부른다. 이것은 불이(不二)라고 불린다. 이제 모든 것이 조화롭다.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을 지배할 수 없다. 그대가 부처보다 열등하지 않고 부처 역시 그대보다 우월하지 않다.
그대와 부처는 서로 빚을 진 관계이다.

고통이 깨어 있음을 만들어내기에 중생은 부처를 낳는다.

그대가 중생의 고통스런 삶을 본다면, 그리고 그대가 지성적이라면, 그 전철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가고 있고 같은 구덩이에 계속 빠지고 있다.

고통이 깨어 있음을 만들어내기에 중생은 부처를 낳는다. 그리고 깨어 있음은 고통을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에 부처는 중생을 해탈시킨다.

모든 부처가 중생으로부터 나왔다. 그들은 그대보다 더 깨어 있어 자신을 살펴보는 존재일 뿐이다. 그들은 모든 것을 둘러보았다. 모든 장면이 고통과 비극으로 점철되어 있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각은 깨어 있음을 만들어낸다. 깨어 있음만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기에 부처는 중생을 해탈시키는 길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이다.
부처가 깨어 있음의 최정상에 올라갔을 때 그는 그대가 깨어 있음을 통해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다.
삶이 불행한 것은 남자뿐만이 아니다. 여자들도 남자 못지 않게 불행한 삶을 산다. 모든 사람들이 상대방을 위한답시고 고통을 서로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은 정말 이상한 일이다. 사람들이 내가 왜 결혼을 하지 않는지에 대해서 물어올 때마다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결혼한 사람들 때문에 나는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들은 나에게 많은 것을 경고해 주었다."
이제 내가 하는 모든 일은 그대를 고통의 덫에서 빠져 나오게 하는 일이다. 그것은 그대가 남편이든지 아내이든지 그대를 깨어 있도록 각성시키는 일이다. 그대가 깨어 있을 때 그대의 불행은 사라질 것이다. 마치 빛이 어둠을 몰아내듯 깨어 있음은 불행을 몰아낸다.
사람들이 고통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무의식적이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자신의 주의를 충분히 살펴볼 수만 있다면, 그래서 그가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는 주위의 무의식적인 사람들에게 그 깨어있음을 나누어주고 싶어할 것이다.

고통이 없다면 깨어 있음을 만들어낼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깨어 있음이 없다면 고통을 부정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대가 미혹되었을 때 부처는 중생을 해탈시킨다. 그대가 깨어 있을 때 중생은 부처를 해탈시킨다. 부처는 스스로 부처가 될 수 없다.

이것이 달마의 위대함이다. 그는 아무리 어려운 말이라도 정확하게 표현했다. 그는 말하고 있다. "부처는 스스로 부처가 될 수 없다." 이 모든 불행한 세계 속에 둘러싸여 있지 않는 한 그들은 결코 부처가 될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고통 속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그들을 보면서 함정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마음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부처들은 미혹을 아버지로 삼고 탐욕을 어머니로 삼는다. 미혹과 탐욕은 중생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탐욕으로 가득 찬 사람을 보면서, 그리고 그 탐욕이 고통을 만들어내고, 그 고통으로 인해 미혹된 사람을 보면서 부모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달마뿐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을 생각하고 있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다. 여러 가지로 어우러져 만들어진 성격을 보면서, 그리고 그 성격에 의해 형성된 에고를 보면서, 또한 그 에고가 쌓은 지식을 보고서 그것이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자신인 척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내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에 기억에 남는 교수가 한 사람 있다. 그는 학위를 받은 이후 30년 동안 어떤 책도 읽지 않았다. 그가 말하는 것은 완전히 시대에 뒤떨어진 지식이었다. 그의 전공은 심리학이었는데, 심리학이란 그 주제가 매우 빨리 변화하는 학문이다. 그래서 그 당시 그가 배웠던 지식들은 모두 쓸모 없는 것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대학원 시절에 읽었던 책들을 여전히 인용하고 있었다.
그는 나를 만나면 항상 어려워했다. 왜냐하면 나는 심리학에 관해 최근에 나온 책들을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매우 딱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말은 결코 하지 않았다.
"나를 용서해라. 나는 그런 연구들에 관해서 알지 못한다."
그는 자존심을 굳게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항상 이렇게 말했다.
"물론 나는 그 논문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그런 논문들을 결코 읽지 않았고 따라서 인간의 마음과 의식에 관한 새로운 연구들에 대해서 배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부총장에게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제출했다.
"대학에 있는 모든 교수들은 의무적으로 매일 두 시간씩 도서관에서 책을 읽어야 합니다."
그 보고서를 읽은 부총장은 나에게 말했다.
"사실 어떤 대학도 그렇게 하고 있는 곳은 없다. 모든 교수들이 그것에 반대할 것이다. 왜 자네를 그런 말을 하는가?"
내가 말했다.
"이 대학의 모든 교수들은 20년이나 30년 전에 배운 것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은 이제 하나도 맞지 않습니다. 저는 도서관에 가서 조사를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말하는 이 교수는 그동안 도서관에서 한 권의 책도 빌려간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교수가 된 후로 아예 도서관에 가지도 않았습니다."
그 대학의 도서관은 매우 최신의 도서들을 구비하고 있었다. 그 대학을 설립한 사람은 대단한 학식을 갖고 있었으며, 새로운 지식에 관한 책들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부총장에게 또 말했다.
"이 교수님을 제 앞에서 불러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왜 그런 요구를 하는지 보여드리겠습니다. 만약 저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저는 학생들에게 가서 하루에 두 시간씩 도서관에 가지 않는 교수들에 대해서는 수업 거부를 하도록 선동하겠습니다."
그는 나의 성격을 아는 사람이었다. 내가 충분히 그렇게 할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알았다. 그러니 제발 그렇게는 하지 말라. 그 교수를 여기로 불러오라."
내가 말했다.
"제가 불러오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께서 그를 부르십시오. 저는 여기에 앉아 있을 뿐입니다."
그는 그 교수를 불러왔다. 그 교수가 오자 나는 출판된 적이 없는 책이름을 지어내어 그에게 물었다.
"교수님은 이 책들을 읽어 보셨나요?"
그러자 그가 말했다.
"맙소사. 자네는 어떻게 그런 책을 다 발견했지? 그것들은 내 방 책상에 있는데 나는 막 그것들을 읽었지. 그 내용들은 최근에 발표된 것들이야."
그래서 나는 부총장에게 말했다.
"이 두 권의 책은 모두 제가 상상해서 만들어 붙인 책 제목들입니다. 그런 책들은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이제 그 책들을 지금 여기로 가져오라고 말해보십시오. 그 책들이 그의 책상 위에 놓여져 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그는 갑자기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어디서 출판되지도 않은 책을 갖고 온단 말인가? 하지만 그는 그 책들이 자기 책상 위에 있다고 했고, 그 책이 매우 근사한 내용들이라고 방금 말했다.
내가 말했다.
"지금 이런 형편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고 그 학생들은 앞으로 교수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50년 동안 낡은 지식들을 계속 써먹을 것입니다. 한번도 새로운 지식들을 흡수하지 않고서 말입니다."
부총장은 말했다.
"자네 말을 인정하겠네."
그 후 그는 모든 교수들이 매일 도서관에 가서 최근의 논문이나 학술잡지, 그리고 신간 서적들에 대해서 공부하는 것을 의무 사항으로 만들었다.
교수들은 매우 화가 났다. 그들은 모두 나에게 화가 난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말했다.
"화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저는 매일 도서관에 가서 누가 오고 누가 안 오는지를 검사할 것입니다. 만약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저는 학생들에게 말해서 그 교수의 수업은 거부하도록 할 것입니다. 그러니 그때 가서 '모든 것이 자네 때문이다'라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도서관 사서는 놀랐다. 모든 교수들이 갑자기 도서관에 와서 책을 읽거나 빌려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대학을 떠나는 날, 나는 그 제도가 취소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7년 뒤, 나는 그 대학에 강의를 하러 다시 갔다. 그리고는 도서관에 들러 보았다. 도서관 사서는 여전히 같은 사람이었고, 도서관은 텅텅 비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물어 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는 나를 알아보고 말했다.
"교수들은 도서관에 더 이상 오지 않습니다. 당신이 대학을 떠나는 날 그 제도는 취소되었습니다. 그때는 모든 교수들이 당신이 무슨 문제를 일으킬까봐 도서관에 나왔습니다. 부총장까지 나올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오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미혹 속에 빠진다. 그들은 자신을 과장하고 과대평가한다. 그래서 달마는 미혹이 부처의 아버지이며 탐욕이 어머니라고 말했다.

미혹과 탐욕은 중생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대가 미혹되었을 때 그대는 이쪽 언덕에 있다. 그대가 깨어 있을 때 그대는 저쪽 언덕에 있다.

그대가 이쪽 언덕에 있다는 말은 하나의 상징일 뿐이다. 그대가 불행속에 있을 때 그것은 그대가 축복 속에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한 번 그대가 자신의 마음이 텅 빈 것을 알고 그대가 어떤 형체도 없음을 볼 때 그대는 미혹과 깨어 있음을 모두 초월한다.

이 어록의 모든 구절들이 학자들이 해석하기에는 무리이다. 오직 부처만이 이 문장들을 설명할 수 있다. 그는 그대가 자신의 마음이 텅 비게 될 때 드디어 아는 자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때 그대는 미혹과 깨어 있음을 모두 초월한다.
사실 나는 깨어 있음을 초월한다는 말을 어떤 곳에서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달마의 말은 절대적으로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의 논리는 정확하다. 그대가 병이 들지 않았다면 그대는 약을 갖고 다니지 않을 것이다. 그대가 더 건강해지면 병은 저절로 사라진다. 그대는 라이온스 클럽에 그대의 약을 기증할 것이다. 그대가 건강하다면 그 약으로 무엇을 하겠는가? 라이온스 클럽은 자신들이 위대한 자선단체임을 세계에 보여줄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 약은 그대에게 아무 소용이 없다. 그것을 버리든지 라이온스 클럽에 기증하든지 할 것이다. 차라리 라이온스 클럽에 기증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러면 그 클럽은 그 약을 빈민구제에 쓸 것이고 훌륭한 자선단체가 될 것이다.
불행과 깨어 있음도 같은 경우이다. 그대가 미혹에서 벗어나는 순간 깨어 있음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그것은 그대가 잠들어 있을 때만 필요한 것이다. 건강이 그대의 본성인 것처럼 깨어 있음 또한 그대의 본성이다. 그대가 깨어 있는 한 더 이상 그것을 의식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그대가 한번 미혹과 깨어 있음을 초월할 때 저쪽 언덕은 존재하지 않는다.

저쪽 언덕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저쪽 언덕, 즉 저쪽 언덕이란 말은 하나의 상징일 뿐이다. 이쪽 언덕은 이 세상이며 저쪽 언덕은 낙원이다 .이 세상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면 누가 낙원을 갈망하겠는가? 그대가 어디에 가든지 이미 그대는 낙원 속에 있다. 한 수피가 말했다.
"깨달은 사람은 어디에 있든 그곳이 바로 낙원이다."
낙원은 그대의 존재 안에 있는 것이다.

여래에게는 이쪽 언덕도 없고 저쪽 언덕도 없다. 그는 강물의 중간에도 없다. 아라한은 이 강물의 흐름 중간에 있다. 중생은 이쪽 언덕에 있다. 그리고 저쪽 언덕에는 불성이 있다.

그대가 저쪽 언덕에 이르는 순간, 저쪽 언덕이란 것은 사라져 버린다. 그대는 그대 자신의 빛이 된다.
하지만 아라한에 대해서는 그는 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아라한을 이쪽 언덕도 아니고 저쪽 언덕도 아닌 흐름의 중간에 두었다. 그러나 아라한 역시 저쪽 언덕에 속한 사람이다. 보살도 그러하고 부처도 그러하다. 그들이 저쪽 언덕에 도착하는 순간, 양쪽 언덕은 자연히 사라져 버린다. 갑자기 그들은 깨닫는다. 자신들이 전체와 하나임을, 그리고 축복의 소나기가 그들 머리 위에 쏟아지고 있음을 말이다.
만약 달마가 아라한에 대한 편견을 고치기만 했어도, 그리고 '마음'이라고 나온 말이 '무심'으로만 바뀌었어도 이 어록은 완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흠이 있다 해도 그는 위대하다. 그의 어록처럼 비유를 사용하지 않고도 말할 수 없는 것을 정확하게 표현한 경전도 찾아보기 드물다.
아라한들도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러한 점이 대승불교의 사람들에게는 못마땅한 점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들만의 개성을 갖고 있다. 아라한 역시 그의 고유한 개성이다 깨달음을 얻은 후에는 그들 역시 완전한 침묵 속에 잠기는 것이다.
그들은 좀더 자비로워야 했다. 그것이 달마에게는 못마땅한 점이었다. 그들은 다른 사람도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야 했다. 하지만 그들이 하는 말을 들어 보면 서로가 모두 옳다. 아라한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인생을 간섭하는 것이다. 마약 그가 깨닫지 않은 채로 남아 있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그의 권리이다. 우리는 그의 인생을 간섭하지 않는 것이 자비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보살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한다. 그것이 우리의 자비이다."
나는 이 두 가지 모두가 아름다운 논쟁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주장은 제각기 옳다. 존재계는 이처럼 다양하다. 그것은 많은 차원을, 여러 가지 방향을 갖고 있다.
궁극적인 이해에 이른 사람은 어떤 곳에서도 모순을 만들지 않는다. 그의 명확한 이해 속에서 모든 모순은 서로 합쳐져서 완전함을 이룬다.

알겠는가?
 

출처 : 세존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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