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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12 13:18

[달마의 무명론 無明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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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세우라[달마의 무명론 無明論]
 

                                        조셉 아르파이아·롭상 랍가이 저, 서보경 역
 
 

달마어록 무명론 無明論

"당신께서는 우리의 불성과 모든 덕성이 각성이라는 근원에서 나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무명은 어떤 근원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수많은 집착과 정욕과 악을 지닌 무지한 마음, 즉 무명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세 가지 독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이 세 가지 독에 중독된 마음은 셀 수 없이 많은 악을 갖고 있는데, 마치 나무가 하나의 등치에 수많은 잎과 가지를 갖고 있는 것과 같다 .그리하여 세 가지 독은 수백만 개의 악을 만들어내어 나무의 예와 거의 같다.
세 가지 독은 우리의 여섯 가지 감각과 그 각각의 식(識)에 물들어 있다. 그것들은 도둑이라고 불리는데 감각의 문을 빠져나와 마구 다니면서 한없이 욕심을 내고 탐닉하고 위선의 가면까지 쓴다.
그러나 만일 누군가가 그것의 근원을 잘라 버린다면 그 강물은 곧 말라 버릴 것이다. 만일 해탈을 추구하는 어떤 사람이 이 세 가지 독을 세 가지 진리로 바꾸고, 여섯 도둑을 육바라밀로 바꾼다면, 그는 자신을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삼계와 존재계의 육도는 무한히 광대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고작 마음을 지켜보는 것이라면 어떻게 이 끝없는 번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삼계의 업은 오직 마음에서 나온다. 만일 그대의 마음이 삼계속에 있지 않다면 그것은 삼계를 초월한 것이다.
"그러면 육도의 업은 어떻게 다릅니까?"
참된 수행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먼 선행만 쌓는 사람은 삼계에 태어난다. 눈먼 사람은 어리석게도 열 가지 선업을 쌓고도 행복을 추구하는 바람에 욕망의 세계에 신으로 태어날 것이다. 오계를 지키고도 어리석게 애증에 몰두하는 눈먼 사람 분노의 세계에 집착하는 사람은 거짓된 가르침을 믿으며 축복 받기를 원하는 바람에 미혹의 세계에 악마로 태어난다.
만일 그대가 자신의 마음을 주목해서 그것의 거짓과 악을 초월한다면 존재하는 데서 오는 고통은 자동적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한번 고통에서 자유로워지면 그대는 진짜로 자유롭다.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세우라

먼저 그대는 한 가지 사실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이 어록이 달마 자신이 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그의 추종자들이, 그의 제자들이 자신들의 사상이 대승불교의 최고봉임을 대변하기 위해서 쓴 것이다. 그래서 이제 그대는 그들의 지식 뒤에 숨어 있는 어리석음을 간파해야 한다.
이제 달마는 아무도 대답할 수 없는 궁극적인 물음에 직면했다. 그 물음은 대답해질 수 없기 때문에 궁극적인 것이다. 모든 철학, 모든 신학, 모든 신비주의가 결국 이 궁극적인 질문에 이르게 된다. 어떤 대답도 존재할 수 없는 물음에 말이다.
그러나 달마처럼 엄청난 용기와 지성과 깨어 있음을 가진 사람은 얼마든지 '이 질문에는 대답이 없다."라고 말할 용기가 있다. 그것은 수백만 명의 철학자들과 사상가들과 신비주의자들이 시도했지만 항상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달마의 제자들은 마치 그 대답이 존재하며 자기들의 스승이 그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스승이 '모른다'고 말한 태도를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중국으로 건너온 최초의 깨달은 사람의 제자임을 자처했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불교의 지식들을 동원해서 자신들의 체면을 세우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의 대답은 그 질문의 중심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불교 경전에 기록되어 있는 그대로였다. 그들은 깨어 있음 속에서 이 질문에 즉시 대응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그저 웃으며 거기에는 답이 없음을 인정할 달마의 행동을 그대로 옮겼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간단히 말할 수 있다. "나는 모른다."라고 말이다. 그리고 "나는 모른다."라고 말할 수 있은 것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용기이다. 나는 신학적인 가설이나 철학적인 비유 등, 어떤 방법으로도 그것을 은폐시키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는 어떤 대답도 없다는 사실을 숨기고서 억지로 대답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환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물론 이 말들은 달마가 직접 한 말이 아니다. 여기에서 말한 것은 무엇이든지 후세에 추종자들이 갖다 붙인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상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경전까지 인용하면서 말이다. 아마 그들은 자신들의 논리는 세웠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것이 나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먼저 나는 한 구도자의 질문을 읽을 수 있다. 그의 질문은 그들의 대답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다. 그의 질문에는 적어도 진지함과 진실성이 있다. 그러나 그들의 대답은 그저 그 질문에는 답이 없다는 사실을 숨기려는 것이었다. 모든 종교의 본질을 신비주의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만약 모든 것이 다 대답되어질 수 있다면 어떤 신비도 거기에 없다.
존재계는 신비롭다. 결국 그대는 더 이상 대답할 수 없는 궁극적인 물음에 도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멀지 않다. 곧 닥쳐올 것이다. 그대는 모든 피상적인 것들만 대답할 수 있다. 그러나 그대가 깊이 들어갈수록 궁극적인 질문은 더욱 가까워질 것이다. 궁극적인 질문이 다가오는 순간, 나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서 "나는 모른다."라고 말한 사람을 한 명도 만나보지 못했다.

"당신께서는 우리의 불성과 모든 덕성이 각성이라는 근원에서 나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무명은 어떤 근원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무명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신을 믿는 종교들은 "누가 존재계를 만들었습니까?"란 질문에 이를 때까지 계속 대답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만들어진 대답이다. 신이 그것을 창조했다. 그러면 이제 궁극적인 질문이 나온다. "신은 누가 만들었는가?" 왜냐하면 모든 것은 창조자를 필요로 하고 그때는 신도 그것이 필요하다. 만약 신이 어떤 창조자도 필요 없다면 그때는 왜 신을 들먹이는가? 그대는 그저 존재계가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다. 만약 그대가 다른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면, 그때는 존재계를 궁극으로서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적어도 우리는 그것의 부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신은 단지 하나의 가설이다. 존재계는 실체이다. 그러나 모든 종교는 실체에서 가설로 움직인다. 그리고 그때 그들은 아무도 대답할 수 없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아무도 그것에 대답할 수 없다. 어떤 대답도 무한한 고리 속으로 빠져들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대는 '1번'이라는 신이 '2번'이라는 신에 의해 만들어졌다면, '2번'이라는 신은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지 의문스러울 것이다. '2번' 이라는 신은 '3번'이라는 신에 의해 만들어졌다면, '3번'이라는 신은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겠는가? 이런 식으로 의문은 계속될 것이다.
그래서 신은 궁극의 문제를 푸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가설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신은 진부한 가설일 뿐이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구실일 뿐이다. 의문이 똑같이 남아 있는 한 그것은 진실한 대답이 되지 않는다. 진정한 대답은 의문이 사라지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대답의 진위를 가리는 기준이다.
불교에서는 신이 없다. 신의 자리에 궁극적인 깨달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불성이라고도 불린다. 단지 이름만 다를 뿐이다. 이제 제자는 또 다시 질문한다.
"우리는 불성이란 것이 깨어 있음을 근원으로 해서 나오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무명은 어디서부터 시작됩니까? 왜 무명의 근원은 깨어 있음이 아닙니까?"
이것은 똑같은 질문이다. 단지 용어만 바뀌었을 뿐이다. 그것에 대해 어떤 식으로 대답하든 그것은 틀린 것이라고 나는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단지 무명 속에서 태어났으며, 우리 속에서 무명을 추방한다면 각성이 찾아온다는 것을 우리는 하나의 신비로써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불행 속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고 초월할 수 있는 내면의 잠재력이 있다. 우리는 죽음의 한계 속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죽음을 초월해서 불멸의 영역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대가 죽음이 어디에서 왔느냐고, 무명이 어디에서 왔으며, 불행이 어디에서 왔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궁극적인 질문이 될 것이다. 거기에는 어떤 대답도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단지 그런 경우가 일어났을 뿐이다. 차라리 부처가 표현한 '여여(如如)'라는 말을 쓰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물음에 철학적인 대답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일하게 옳은 대답이 있다면 그것은 "나는 모른다"일 것이다. 그리고 달마의 어록은 인류에게 엄청난 공헌을 했다. 하지만 그 어록이 한 가지 놓친 것이 있다. 그것은 궁극의 질문에 대해서 매우 유치한 대답을 했다는 사실이다. 달마와 같은 사람이 그런 대답에 질문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아무도 그 해답을 모른다. 아무도 태초 전부터 존재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잠시만이라도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보라. 그대는 우주가 시작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만약 그대가 존재했다면 그것은 시작이 아니다. 그대는 이미 그곳에 있었고, 시작은 그대가 존재하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우주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있었던 사람이 없는 한 그 누구도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목격자가 없다.
무명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오직 말할 수 있은 것은 존재계가 무명에서부터 나온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용기 있는 몇몇 사람이 천천히 깨어 있음 속으로, 삶의 어둠을 넘어서 영원한 빛 속으로 들어갔다.
다른 경전을 보면 석가모니 부처는 그런 사실을 확실히 밝혀 놓았다. 비록 그가 그것이 신비라고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도 결코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전에서는 부처는 매우 가까이 접근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무명은 시작이 없다. 그것은 끝만 있을 뿐이다. 무명이 끝나는 순간에 앎이 시작된다. 그리고 앎은 끝이 없다."
이것이 그가 완성해 놓은 순환의 방식이다. 나 역시 그 말에 절대적으로 동의한다. 그대 역시 그것을 깊이 공감할 때까지 나는 계속 그 말을 반복할 것이다. 무명은 시작이 없다. 그것은 끝만 있다. 그리고 무명이 끝날 때 앎이 시작된다. 그것은 끝없이 계속된다.
이와 함께, 부처는 무명의 출처와 의식의 끝에 대해서 더 이상 묻지 않는 것이 좋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이 두 가지는 영원한 신비로 남을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존재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 질문이 나에게 던져진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모른다"
그것이 가장 진지한 대답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신비라는 것을 의미하는 대답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든 대답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해답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대도 알 수 있다. 그들은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수많은 집착과 정욕과 악을 지닌 무지한 마음, 즉 무명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세 가지 독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대답이 될 수 있는가? 그들은 무명이 어떤 특정한 것, 즉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세 가지 독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 세 가지 독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무명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대답하겠는가?
그 질문은 "무명의 근원이 무엇이냐?"하는 것이다. 그대가 그것을 세 가지 독이라고 대답하는 것은 대답을 뒤로 미루는 행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면 또 다시 의문이 일어날 것이다. 세 가지 독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이제 그대는 악순환에 빠진다. 그때 그대는 세 가지 독이 무명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무명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그러나 수세기 동안 이런 대답이 사람들을 멍청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달마와 같은 사람의 개성에 압도당했기 때문이다. 아니면 아마도 그들은 달마가 그런 질문에 연막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그 질문을 정확히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사람들의 눈에 먼지를 집어넣었다. 그것은 대답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비단 달마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모든 깨달은 사람들, 석가모니 부처, 마하비라, 노자, 공자, 예수와 같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궁극적인 질문에 접할 때마다 그들의 제자들은 난센스를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은 매우 예민하고 지성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궁극적인 질문은 어떤 지성에 의해서도 대답될 수 없다. 오직 순수한 사람만이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 어떤 존경이나 지혜나 깨달음과도 상관없는, 자신의 진지함으로 모든 위험에 부딪힐 수 있은 사람만이 대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유일한 대답은 "나는 모른다."이다.
그러나 달마가 나는 모른다고 대답했어도, 그의 추종자들은 그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스승이 무슨 질문에도 대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달마의 이름을 빌려서 자신들의 생각을 적어 놓았다.


 

한편 자신들의 지혜로 위험과 부딪힐 용기가 없는 사람들은 "나는 모른다."라고 대답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만이 진실한 대답이다. 그 말은 그대의 질문이 궁극에 직면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이제 신비가 시작된다. 그것은 풀 수 없는 것이다. 지식으로 간추릴 수 없는 문제에 봉착했다. 그것은 노력으로도, 지성으로도, 수행으로도, 훈련으로도, 제사 의식으로도, 어떤 방법으로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신비는 생명력이 있다. 그러나 그 신비는 풀릴 수가 없다. 그것은 항상 미지의 것으로 남는다. 그것은 항상 문자 그대로 신비인 것이다.
20세기의 위대한 철학가의 한 사람인 무어(G. E. Moore)는 《윤리학의 원천(Principia Ethica)》이란 책을 썼다. 아마도 그는 역사상 단지 '선(善)'을 정의하는 것에 대해서 가장 깊이 생각한 사람일 것이다. 선을 정의하지 않고서는 윤리도, 도덕도 세울 수 없는 것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가가 분명할 때 선과 악을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매우 근원적인 질문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궁극적인 질문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으며 그래서 그는 매우 곤란한 지경에 빠졌다. 그는 금세기에서 가장 지적인 사람 중의 하나이다. 그는 선에 대해서 모든 방면으로 생각해 보았고, 그것을 250페이지에 달하는 책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책의 주제는 '선(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선을 정의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사람들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다 안다. 무엇이 아름답고 무엇이 추한지도 안다. 그러나 그대가 그것을 정의하려 한다면 그대는 곤경에 처할 것이다.
무어도 역시 모든 사람들이 무엇이 선인지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을 설명할 수 있은 길이 분명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결국 250페이지에 달하는 책은 예리한 판단과 논리적인 분석에도 불구하고, 선이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것은 그저 주변을 빙빙 돌다가 아무 데도 이르지 못하고 만 것이다. 선은 정의할 수 없는 것이었다.
크로체(Croce)는 '미(美)'에 대해 같은 작업을 했다. 그는 천 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저술했다. 무어가 했던 '선'에 대해서 보다 더 깊이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 문장은 "미는 정의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끝맺고 말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반대이다. 사람들은 무엇이 아름답고 무엇이 추한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을 찾아내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그것을 하나의 문장으로 정의하지는 못한다. 가장 지성적인 마음조차 그것에 실패했다.
아름다움은 정의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실패를 인정하는 것이다. 무어는 결국 좌절해서 이렇게 말했다.
"무엇이 선인지를 정의하지 못했다고 나를 비난하지 말라. 더 간단한 질문조차도 정의할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노란색은 무엇인가?' 같은 것도 말이다."
그리고 무어는 계속 물었다.
"당신은 노란색이 무엇인지 정의할 수 있는가?"
그대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노란색이 어떤 색인지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아무런 의문도 없다. 그러나 그는 묻고 있다.
"이것이 노란색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 정의가 무엇인가? 노란색을 정하는 기준이 무엇인가? 그것은 왜 빨간색이 아닌가? 왜 노란색인가? 당신은 확실한 정의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왜 어떤 것은 노란색이고, 어떤 것은 빨간색이며, 어떤 것은 파란색인지, 도대체 어떤 근거로 그렇게 구분할 수 있는지 말이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말한다.
"만약 아무도 노란색을 정의할 수 없다면, 그때는 우리의 모든 지식은 단지 피상적인 것이다."
아마 그대는 어떤 것에 대해서 깊은 의문은 가져본 적인 없을 것이다. 그대는 바위 밑바닥까지 들추어보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는 모든 것이 정의할 수 없는 성질의 것임을 그대의 이해력으로는 알지 못한다. 모든 것은 신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름다움만의 문제가 아니다. 선의 문제이기도 하고, 무지의 문제이며, 각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것은 모든 문제이다. 존재계 전체가 정의할 수 없는 것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은 우리의 절대적인 무지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대는 에고를 버리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달마의 제자들 역시도 다른 모든 사람들이 한 것처럼 똑같이 했다. 그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수세기 동안 철학자들이 이 간단한 문제에 몰두해 왔다.
그대는 2더하기 2는 4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그대로 더 이상 깊은 의문을 갖지 않았다. 그대는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고 그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 준다.
러셀은 금세기 가장 위대한 수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수학의 원리(Principia Mathematica)》란 책을 저술했는데, 그것은 2더하기 2가 4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의문을 적어 놓은 부분이 무려 250페이지에 달하는 책이었다. 그대는 아마 그런 것은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2더하기 2는 간단히 4이고, 그 다음은 모조리 잊어버리면 된다. 그런데 250페이지에 달하는 치밀하고 논리적인 사고가 전개되고 있고, 그것은 결국 세상에서 가장 읽기 힘든 책이 되었다.
나처럼 몇몇 '또라이'들만이 그 책을 읽었다. 나는 많은 도서관에서 여러 번 그 책을 보았는데 대부분 한번도 누군가가 빌려간 적이 없었다. 천여 페이지 중에서 4분의 1이, 2더하기 2가 왜 4인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 결론은 단지 믿을 수밖에 없다고 나왔다. 그것은 옳다고 확신할 수 없다. 2더하기 2는 4를 만든다. 그것은 실용주의자들의 생각이다. 그것은 건설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러셀은 거기에 안주해 있을 수 없었다. 또 다른 수학자인 괴델(Godel)도 그것에 도전했다. 괴델은 2더하기 2는 4가 될 가능성이 없다고 말했다. 거기에는 전혀 그런 가능성이 없다. 그리고 괴델은 러셀만큼 천재성을 지니고 있다. 결코 러셀 못지 않다. 그의 논리는 매우 명확했다. 그리고 러셀은 그것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괴델은 그대가 의자 두 개에 의자 두 개를 합치면, 의자는 네 개가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2 그 자체는 단지 추상적인 개념일 뿐이다. 의자 두 개는 구체적인 물질이다. 그러나 2는 단지 하나의 개념일 뿐이다. 그것은 신이나 악마 같은 가설이다. 그대는 어디에서 2를 본 적이 있는가? 2가 서로 만나서 껴안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그리고 괴델의 비판은 존재계에는 그 어떤 것도 똑같은 것이 두 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항상 어딘가에는 다른 점이 있다. 그대는 똑같은 두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자세히 보면 나뭇잎 하나도 똑같은 것은 없다. 그것이 서로 같지 않은데 어떻게 둘씩 더하면 넷이 될 수 있겠는가? 그것들은 반드시 4가 아니라 3이고 5가 될 수도 있다.
나는 괴델이 옳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물론 나의 이해는 전적으로 다른 차원에서 나온 것이다. 나에게는 러셀보다 괴델이 훨씬 호소력이 있어 보인다. 그의 말은 존재계를 신비스럽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대는 2더하기 2는 4라고 간단히 대답할 수 없다. 모든 것이 실용적이다. 그러나 실체에 대해서만큼은 미지의 것으로 남는다.
그래서 그대는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달마의 대답으로 나와 있은 것은 그의 대답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제자들의 대답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실용적일 수는 있다. 그대가 다른 어떤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질문에 해답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달마의 잘못이 아니다. 그 제자들의 잘못인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해답이 없다. 그들의 잘못은 달마의 본래 뜻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나는 그를 무척 사랑하고 존경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의 어록이 진실을 이야기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나는 그들을 용서할 수가 없다. 그들이 "나는 모른다."라는 달마의 말을 그대로 옮겼더라면, 그들의 스승은 다른 수천 명의 부처와 보살과 아라한 중에서 우뚝 솟은 봉우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절대적으로 독특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수많은 집착과 정욕과 악을 지닌 무지한 마음, 즉 무명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세 가지 독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이 세 가지 독에 중독된 마음은 셀 수 없이 많은 악을 갖고 있는데, 마치 나무가 하나의 둥치에 수많은 잎과 가지를 갖고 있은 것과 같다. 그리하여 세 가지 독은 수백만 개의 악을 만들어내어 나무의 예와 거의 같다.
세 가지 독은 우리의 여섯 가지 감각과 그 각각의 식(識)에 물들어 있다. 그것들은 도둑이라고 불리는데 감각의 문을 빠져나와 마구 다니면서 한없이 욕심을 내고 악을 탐닉하고 위선의 가면까지 쓴다.
그러나 만일 누군가가 그것의 근원을 잘라 버린다면 그 강물은 곧 말라 버릴 것이다. 만일 해탈을 추구하는 어떤 사람이 이 세 가지 독을 세 가지 진리로 바꾸고, 여섯 도둑을 육바라밀로 바꾼다면, 그는 자신을 그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

이 말들은 모두 옳다. 그러나 이 대답들이 그대에게는 올바른 해답이 될 수 있겠는가? 물론 그것은 진실이다. 만약 그대가 깨어 있음을 통해서 자신의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변화시킬 수 있다면, 그것들은 감로수로 변한다. 그대에게 병이었던 것이 이제 건강으로 변한 것과 같다. 그대에게 속박이었던 것이 이제 그대의 자유로 변한 것과 같다. 그것들은 자신의 존재가 어둠이라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는 각성을 가져다 준 것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벌써 그 점에 대해서 충분한 토론을 했다. 그러나 그 질문에 해답은 될 수 없다. "무지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이냐?"에 대한 질문만큼은 말이다.
그대가 뿌리는 잘라 버리면 자연히 그 나무는 말라 죽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대의 속박, 그대의 눈멀음, 그대의 어둠의 뿌리는 바로 그대의 마음이다. 그리고 마음의 뿌리는 그대 자신과 동일시되어 왔다.
그대의 마음이 화가 났을 때, 그대는 "나는 화났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그 뿌리이다. 만약 그대가 화가 났을 때, 그것을 진짜로 인식하고 있다면, "나는 화났다."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내 마음에 분노가 지나가고 있음을 보고 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그대는 지켜보는 자가 된다. 그 뿌리는 잘라졌다.
전 세계를 여행하고 다니는 한 인도인 산야신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라마티르타(Ramateertha)였다. 그는 말할 때 '나'라는 주어를 결코 사용하지 않는 이상한 버릇이 있었다. '나'라는 말을 써야 할 때는 자기 이름을 써서 항상 삼인칭으로 말했다. 예를 들면 그가 목마를 때 "나는 목마르다."라고 말하지 않고, "라마가 목마르다."라고 말했다.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은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전 세계를 계속 돌아다녔고 수년 동안을 미국에서 살았다. 사람들은 "라마가 머리가 아프다."라고 말할 때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면 그들은 "라마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물었다.
낯선 땅에서 낯선 사람들은 계속 말했다.
"이것은 이상하게 말하는 방법이다 왜 당신은 "내가 목마르다."라고 말하지 않는가? 왜 불필요하게 복잡함을 만들어내는가?"
하지만 그는 자신 속에서 뿌리를 잘라내는 수행을 하고 있었다. 나는 목마르다. 나는 머리가 아프다. 나는 졸립다. 나는……. 이렇게 말하지 않음으로써 그는 '나'라는 것을 피하려고 했고, 단지 한 사람의 지켜보는 자로 남으려고 했다. 라마가 목마르다. 라마가 배고프다. 라마가 두통으로 괴로워한다. 그는 라마에게 일어나는 일을 보고하는 식으로 말을 해서 단지 한 사람의 지켜보는 자로 남고 싶었다.
지켜보는 자가 되는 것은 뿌리는 자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해방될 것이다. 그것은 완전히 옳다. 그러나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은 아니다.
나는 달마가 불필요한 말을 만들어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 제자들이 자신이 던진 질문에 대해서 잊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용서할 수도 없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른 상황이었다면 모두 옳은 것이다. 그들은 틀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무슨 옳은 말을 하든지 이 상황에서는 그 질문에 해답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다음 질문에 계속 다른 말을 만들어내야 했다.

"그러나 삼계와 존재계의 육도는 무한히 광대합니다."

무지의 근원과 그것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것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고작 마음을 지켜보는 것이라면 어떻게 이 끝없는 번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 구도자는 또 다른 질문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은 해답을 주지 못했다. 거기에는 해답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다른 질문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나 삼계와 존재계의 육도는 무한히 광대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고작 마음을 지켜보는 것이라면 어떻게 이 끝없는 번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완전히 달마의 본래 의도와는 다른 식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자신들을 속이고 있다. 그래서 궁극적인 질문을 한 구도자는 대답이 가능한 질문을 하고 있다.
나는 매우 부유한 여인을 환자로 삼은 한 의사가 생각난다. 그녀는 단지 감기에 걸렸을 뿐인데 쉽사리 낫지 않았다. 그녀는 매일 병원에 와서 감기가 낫지 않는다고 불평했고, 그 소리에 의사는 매우 지쳤다. 사실 감기는 치료약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의사는 매우 피곤했다. 매일 그 부잣집 여자가 그녀의 리무진을 병원 앞에 세워 놓는 소리를 의사는 들었다. 그러면 의사는 "맙소사, 그녀가 또 왔군. 이 감기가 나를 죽이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결국 그는 너무 지쳐서 이렇게 말해 버렸다.
"들어 보세요. 한 가지 치료 방법이 있는데 당신에게 말하기가 좀처럼 어렵군요."
그 여자가 말했다.
"괜찮아요. 말씀해 보세요. 나는 감기만 낫는다면 무슨 일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의사는 말했다.
"당신에게는 한 가지 방법이 있어요. 그것은 당신 집 뒤에 커다란 호수가 있지요. 아주 추운 날 한밤중에 거기로 가서 옷을 모두 벗고 그 호수 속에 뛰어드는 것이에요. 그리고는 호수에서 나와서 몸을 닦지 말고 젖은 채로 그대로 바람에 얼리는 것이에요."
그 여자는 무슨 종류의 치료 방법인지 숨을 멈추고 듣고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
"맙소사. 무슨 감기 치료가 그래요? 그러다간 폐렴까지 들겠어요."
의사가 말했다.
"맞습니다. 나는 폐렴은 잘 고칩니다. 그러나 감기는 나로서는 고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먼저 폐렴에 걸리십시오. 그러면 자연히 감기는 사라질 것이고 내가 그 폐렴을 고쳐 주겠소. 이것이 감기를 치료하는 유일한 방법이에요. 나는 마지막 방법을 찾아서 오는 환자에게는 이 방법을 말해 주지요. 그러니 당신은 걱정하지 말고 폐렴에 걸려 오시오. 나는 폐렴은 확실하게 고쳐줄 수가 있으니, 당신 감기는 나을 수 있다고 내가 보장하지요."
이것이 철학자들이 하고 있는 일이다. 그들에게 해답이 없는 궁극적인 질문을 할 때마다 그들은 폐렴 속으로 뛰어든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그들의 말에 혼란스러워진다. 그러면 사람들은 자신들의 질문이 해결되었다고 생각한다. 혹은 설교가 오래 지속되는 동안 처음의 질문을 잊어버린다.
뭔가 석연치 않은 구도자는 또 다른 질문을 던진다. 이제 아무런 문제가 없다. 제자들은 이렇게 질문하고 있다.

"그러나 삼계와 존재계의 육도는 무한히 광대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고작 마음을 지켜보는 것이라면 어떻게 이 끝없는 번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매우 간단하다. 오직 그대의 마음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 그것은 믿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좀더 복잡한 것을 원한다. 문제가 복잡하기 때문이다.
수백만 번의 생을 살아오면서, 과거에 그대는 셀 수 없이 많은 악을 저질렀을 것이다. 그대는 셀 수 없는 악몽을 꾸었을 것이다. 그대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해도 죄를 짓는 생각은 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 그대가 누구를 죽였거나 죽이고 싶어했거나 둘 다 그대의 마음은 사악한 방법으로 작용했다. 그것은 사악한 염파(念波)를 진동시킨 것이다. 그리고 마음은 수백만 번의 생을 거쳐오면서 그 진동들을 모두 담고 있다. 이제 과거의 그 많은 악한 행동들이 모두 축적되어 있다. 어떻게 그대는 마음을 지켜봄으로써만 그것들을 모두 떨쳐 버릴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질문은 궁극적인 질문이 아니다. 그것은 매우 간단한 질문이다. 그대는 생애 전체를 꿈꿀 수 있기 때문이다. 하룻밤에 그대는 일백 년 간의 세월을 꿈꿀 수 있다. 깨어 있을 때와 꿈꿀때의 시간의 체계는 완전히 다르다. 그대는 몇 초 만에 잠에 떨어질 수 있고, 그 동안에 긴 꿈을 꿀 수 있다. 그대가 깨어난 후에 시계를 보면 놀랄 것이다. 일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긴 세월의 꿈을 꿀 수 있는가? 꿈속에서는 몇 년이 흘러갔다.
꿈속에서 흐르는 시간은 완전히 다르다. 우리는 꿈속의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아직 모른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는 잠을 잘 동안 꾸는 꿈의 시간을 재는 시계를 발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단 몇 분도 될 수 있고, 몇 년도 될 수 있다. 그대는 달에 간 꿈도 꿀 수 있고, 가장 멀리 떨어진 별 위에 있는 꿈도 꿀 수 있다. 태양계 밖에 있는 가장 가까운 별까지 가는 데도 지금의 로켓으로는 4년이 걸린다. 빛의 속도로 달려도 4백만 년이 걸리는 별도 있다. 아니 4억 년, 40억 년이 걸리는 별도 있다. 그러나 그대는 하룻밤에 꿈속에서 그곳을 갔다 올 수 있다. 그대는 돌아와야 한다. 그대는 그곳에 남을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아침이면 그대는 자기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나는 꿈 이야기를 하는 두 친구의 일화를 들은 적이 있다. 그들은 서로 지난밤에 꾼 꿈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먼저 한 친구가 입을 열었다.
"자네, 들어보게, 나는 어젯밤 정말 아름다운 꿈을 꾸었네. 그런데 꿈속에서 나는 큰 물고기들을 보았어. 그런 것은 지금까지 한번도 보지 못한 큰 물고기들이었어. 나는 더 큰 물고기를 발견하려고 호수 속을 이리저리 헤엄쳐 다녔지."
두 번째 친구가 말했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야. 내게 어젯밤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는가?"
"무슨 일이 일어났지?"
"이야기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네. 아마 자네는 믿지 못할걸세. 나 자신도 지금 그것을 믿을 수가 없네. 나는 갑자기 내 침대 속에 소피아 로렌이 누워 있는 것을 보았네. 나는 이렇게 말했지. '맙소사, 어떻게 당신이 이리로 들어왔지?' 나는 고개를 돌려 다른 쪽을 보았어. 그런데 그쪽에는 마릴린 먼로가 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렇게 말했지. '내가 죽어서 천국에 왔나?'하고."
그때 이야기를 듣던 친구가 화를 내며 말했다.
"이 바보야, 왜 나를 부르지 않았어? 두 여자가 있었다면서. 자네는 하나로 충분하지 않은가? 선택권은 자네의 꿈이니까 자네가 먼저 고를 수 있어. 그 다음은 내 몫이지. 친구 좋다는 게 뭔가?"
그러자 두 번째 친구가 말했다.
"내가 자네를 부르러 가 보니 자네는 물고기를 잡느라고 정신이 없더군."
이 짧은 꿈속에서 그대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가능한 것, 불가능한 것, 그 모두를 말이다. 그리고 꿈속의 시간 체계는 다르다. 아침에 그대는 깨어났다는 것 때문에, 그 많은 꿈들이 어떻게 모두 사라질 수 있는지 궁금해한다.
깨달은 사람에게도 똑같은 상황이 일어났다. 수백만 번의 생이 꿈처럼 증발해 버린다. 그것은 이제 더 이상 싸울 일이 없다. 그때까지 그대는 선을 행한 만큼 악을 행했다. 그것은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이다. 완전한 균형이 이루어질 때까지 수백만 번의 생이 걸렸다.
게다가 그대는 지금도 과거에 해온 행동을 계속하려고 한다. 그대는 이 함정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거기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깨어나는 것이다.
다른 아무것도 필요 없다. 분노를 바꿀 필요도, 탐욕을 바꿀 필요도 없다. 그대는 단지 깨어 있기만 하면 된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모든 투사(投射) 행위가 증발할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꿈이 증발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말이다. 그것들은 꿈을 이루고 있는 재료들과 똑같은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대는 그저 마음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변형될 것이다. 그리고 그대의 불성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대의 궁극적인 아름다움과 기쁨을, 궁극적인 존재를, 가장 큰 환희를 말이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달마의 제자들은 묻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달마의 이름을 빌려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삼계의 업은 오직 마음에서 나온다. 만일 그대의 마음이 삼계 속에 있지 않다면 그것은 삼계를 초월한 것이다.

그대가 깨어 있는 순간 마음은 침묵하게 된다. 마음에서 나온 선과 악의 모든 행위들이 영화가 끝나면 흰 영사막만 남듯이 사라지고 만다.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절대적인 고요 속으로 들어간다.

참된 수행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먼 선행만 쌓는 사람은 삼계에 태어난다. 눈먼 사람은 어리석게도 열 가지 선업을 쌓고도 행복을 추구하는 바람에 욕망의 세계에 신으로 태어날 것이다. 오계를 지키고도 어리석게 애증에 몰두하는 눈먼 사람 분노의 세계에 집착하는 사람은 거짓된 가르침을 믿으며 축복 받기를 원하는 바람에 미혹의 세계에 악마로 태어난다.
만일 그대가 자신의 마음을 주목해서 그것의 거짓과 악을 초월한다면 존재하는 데서 오는 고통은 자동적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한번 고통에서 자유로워지면 그대는 진짜로 자유롭다.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말들은 교리적이다. 그러나 그들은, 탐욕 속에 사는 사람은 더욱 많은 즐거움을 원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천국의 삶을 투사할 수 있다. 그들은 천상의 신으로 태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마음에서 투사된 것이다. 그것은 단지 믿음일 뿐이다.
나는 언젠가 철학과 교수 한 사람과 같이 산 적이 있다. 어느 날 나는 그에게 투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이 투사라는 것을 믿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에게는 동생이 있었는데 나는 그 동생을 지켜보곤 했다. 우리는 같은 집에서 거의 3개월 동안 함께 살아왔기 때문이다. 당시 그 동생은 나에게 굉장히 의존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흥미를 갖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최면에 걸릴 수 있는 능력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인류의 삼분의 일 정도가 최면에 걸릴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것은 매우 이상한 비율이다. 오직 33퍼센트의 사람들만이 일종의 내면적인 탐구에 흥미를 갖고 있다. 그 33퍼센트의 사람들만이 열려 있는 것이다. 아마 최면술에 걸릴 수 있는 사람만이 내면으로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최면술도 다른 사람의 힘을 빌려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명상을 통해서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간다. 그 길은 똑같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교수에게 증명해 보이기로 했다. 그의 전공은 논리학이었다. 그는 어떤 것도 증명되지 않는 것은 믿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의 동생에게 최면을 걸기로 했다. 나는 그의 동생이 내 앞에 앉을 때부터 매우 놀랐다. 동생은 이미 깊이 빠져 들어갔고 이제 더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나는 적어도 아홉은 세어야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하나를 셀 때에 그는 이미 깊이 빠져들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너는 내일 정확히 열두시에 나를 찾아서 이곳에 올 것이다. 내일은 일요일이고 나는 집에 있을 것이다. 너의 형도 집에 있을 것이고 너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정확히 열두시에 나에게 오면, 너는 침대 위에 누워서 베개를 껴안고 거기에 키스를 해야 한다. 나는 베개에 십자가 표시를 해 놓을 것이다. 너는 그 표시에 정확하게 키스해야 한다."
나는 그 말이 그의 무의식에 가 박힐 때까지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그리고 나서 그를 깨웠고, 베개에 붉은 잉크로 십자가 표시를 했다.
다음날 그는 정확히 12시에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침대에 누워 있다가 갑자기 베개를 껴안고는 십자가 표시 위에다 키스를 했다. 그리고는 자기가 하는 행동을 깨닫고는 어쩔 줄 몰라했다. 그의 생각에는 베개를 껴안고 키스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의식적인 마음은 전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무의식에서 투사하는 대로 행동을 했다. 나와 그의 형은 그 자리에 있었다.
나는 그에게서 베개를 빼앗아 내 가방에 넣고 열쇠로 잠가 버렸다. 그러자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무슨 일인가? 왜 울지?"
그가 말했다.
"나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제발 내 베개를 돌려주세요. 이렇게 부탁합니다."
내가 말했다.
"뭐가 잘못 되었는가? 저녁을 먹고 잘 시간이 되면 베개를 돌려주겠다. 그러면 너는 네 베개를 베고 잠을 자면 된다."
그가 말했다.
"나는 지금 당장 베개가 필요합니다."
"그것을 어디에 쓰려고?"
"나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당장 베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나는 열쇠를 꺼내 그에게 주었다. 그는 당장 내 가방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베개를 꺼내었다. 그리고는 미친 듯이 십자가 표시가 있는 부분에 키스를 퍼부었다. 몇 년 만에 만난 연인처럼 말이다.
그의 형과 나는 동시에 물었다.
"무엇을 하고 있느냐?"
그가 말했다.
"나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뭔가 위안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이 십자가 표시를 보면 갑자기 키스를 하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키스를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습니다. 왜 그런지는 나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형이 나에게 말했다.
"이 증거를 받아들이겠소."
그대가 어떤 여자에게 반하면, 그대는 그 여자가 단지 베개에 표시된 십자가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단지 생물학적 반응인가? 그것은 무의식의 깊은 뿌리로부터 나온 투사이다. 그것은 어떤 누구로부터 암시되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본능 그 자체이다.
그대의 호르몬, 그대의 생화학, 그대의 생리학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들은 그대의 깨어 있음을 반대하는 갈등의 일종이다. 그것들은 그대를 쉬지 못하게 만든다. 그것들은 그대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가만두지 못하도록 만든다. 그것은 그대의 통제력을 넘어선 힘이다. 그리고 그대는 그 힘에 따라 꼭두각시처럼 움직인다. 세상의 모든 언어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반할 때 '사랑에 빠진다.'라는 표현을 쓴다. 그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실제로 그것은 무의식에 빠지는 것이며, 생물학적 최면에 빠지는 것이며, 원초적 본능에 빠지는 것이다. 그때 그것은 더 이상 인간의 의식이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도취이며 그 사랑의 행위는 금방 끝난다. 그대가 한 번 여자와 사랑을 나누고 나면 그것은 베개에 키스하는 것처럼 빨리 끝난다. 하지만 상대가 베개가 아니고 여자일 때는 문제가 심각해진다.
그대가 어떤 여자에게 반할 때 처음부터 키스할 수는 없다. 거기에는 절차가 따른다. 먼저 그대는 그녀와 함께 영화관이나 디스코테크에 가야 한다. 그 다음에는 레스토랑에 가서 식사를 해야 하고 술도 한잔 마셔야 한다. 그 다음에는 장미꽃을 선물하고 아이스크림도 사줘야 한다. 필요한 절차가 다 끝나야 그대는 그녀에게 키스할 수 있다. 그대가 키스를 하고 나면 그때부터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여자는 단순한 베개가 아니다. 이제 그녀는 그대에게 집착하기 시작한다. 이제 그대는 빠져나올 수 없다. 그대가 빠져나오고 싶지만 앞서서 밟은 절차가 감옥이 된다. 이제 그대는 내뱉은 말을 다시 거둬들일 수 없다.
인간의 의식을 탐구하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다음 사실에 찬성한다. 그대의 불행과 행복, 슬픔과 기쁨이 모두 그대의 투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말이다. 그것은 그대의 깊은 무의식에서 나오며, 다른 사람들은 단지 하나의 화면처럼 작용하고 있을 뿐이다. 한번 그것이 충족되면 그대의 욕구는 끝난다. 그리고 그녀를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다고 생각한 바로 그 여자가 또 다시 나타나면, 그대는 그녀를 죽이고 싶어진다.
이상한 일이다. 너무나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만큼 사랑은 증오로 쉽게 변한다. 그리고 사랑과 증오가 그대 자신의 투사에 지나지 않음을 아직도 모르고 있다. 하나가 만족되면 다른 하나가 거기에 모습을 드러낸다. 한번 그대가 고통에서 해방되면 그때는 진짜로 자유롭다. 달마가 하는 말은 모두 옳다. 그러나 아직 질문에 답하지는 않았다.
나는 아무도 그 질문에 답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삶은 하나의 신비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그대는 어떤 질문도 일어나지 않는 존재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어떤 대답도 그대를 따라오지 못한다. 그대는 그 경험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나의 말은 그대의 경험을 위한 것이지 그대의 지식을 위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이 어록에서 실망을 느낀다. 그들은 나에게 실망을 안겨 주었다. 그들이 만약 "나는 모른다."라고 말하는 달마의 대답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면, 그는 이 세상에서 알려진 신비주의자들 중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그대에게 말하고 싶다. 나는 모른다고 말이다. 그대가 궁극적인 질문을 만났을 때 다른 사람이나 그대 자신을 속이려고 하지 말라. 그 점을 항상 기억하라고 나는 강조하고 싶다. 단순히 그대의 순진무구함을 받아들이라. 그리고 겸손하게 말하라. 나는 모른다라고 말이다.
그것은 무지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깨어 있음의 문제이다. 삶은 하나의 신비이며 기적이다. 그대는 그것을 맛볼 수 있다. 하지만 정의할 수는 없다. 그것은 존재계의 위대함이다. 그것을 정의하는 데 모든 과학자들이 실패했다. 철학자들 역시 실패했다. 오직 신비주의자들만이 성공했다.
달마 역시 한 사람의 신비주의자이다. 만약 그가 나를 만난다면…… 우리는 언제 어디선가 다시 만날 가능성이 있다. 삶은 영원하며 존재계는 끝이 없다. 언젠가 어디에선가 나는 그를 붙잡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나를 알아볼 것이다. 나는 그가 지팡이에 매달고 다니던 바로 그 신발과 똑같은 신발을 신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신고 있는 이 샌들은 일본의 한 선사가 내게 선물한 것이다. 특히 선가(禪家)에서는 자신들의 고유한 물건들을 갖고 있다. 만약 그들이 시장에서 찻잔을 산다면, 그들은 그것을 부수어서 아교로 다시 붙일 것이다. 그래서 독특한 것으로 만든다. 이 세상에 그것과 똑같은 것은 절대로 없도록 말이다. 선가의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선이다. 그것은 똑같은 복사품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나를 즉시 알아볼 것이다. 나는 그에게 나의 샌들을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가 제자들 때문에 그토록 좋은 기회를 놓쳤다는 사실을 말해 줄 것이다. 그는 그 기회를 통해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신비주의자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지녔다. 그는 그것에 천재성을 지니고 있었다.

알겠는가?
 

출처 : 세존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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