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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12 13:20

[달마의 돈오론 頓悟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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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온몸으로 위험과 맞서라[달마의 돈오론 頓悟論]
 

                                      조셉 아르파이아·롭상 랍가이 저, 서보경 역
 
 

달마어록 돈오론 頓悟論

"그러나 부처는 '삼 아승지겁 동안의 셀 수 없는 어려움을 겪고 나서야 그대는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당신께서는 어떤 연유로 단지 마음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삼독심을 극복하고 해탈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까?"
부처의 말은 사실이다. 그러나 삼 아승지겁은 바로 삼독심에 물든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범어로 아승지겁이란 말은 그대가 셀 수 없이 많다는 뜻이다. 이 삼독에 물든 마음에서 셀 수 없이 악한 생각들이 나온다. 그리고 그 모든 생각들은 영겁의 세월 동안 계속된다. 부처가 삼 아승지겁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무수히 많은 생각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위대한 보살들은 삼학을 지키고 육바라밀을 행함으로써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제 당신께서는 제자들에게 단지 마음을 지켜보라고만 말씀하십니다. 수행의 법칙을 따르지 않고서 누가 과연 깨달음에 이르겠습니까?"
삼학은 삼독심을 없애기 위한 것이다. 그대가 삼독을 극복했을 때 그대는 삼학의 한량없는 덕을 지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셀 수 없이 많은 선한 생각을 그대의 마음을 통해서 일어나게 할 것이다. 육바라밀은 여섯 가지 감각을 청정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바라밀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대는 피안에 이르는 방편이라고 부를 수 있다. 여섯 가지 감각에 낀 때를 벗겨 냄으로 해서 육바라밀은 그대를 집착의 강을 건너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해줄 것이다.
"경전에 따르면 삼학에 대해서 '나는 모든 덕을 행하겠다고 맹세한다. 나는 모든 악을 끝내겠다고 맹세한다. 나는 모든 중생을 해탈로 인도할 것을 맹세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당신께서는 삼학이 단지 삼독심을 잘 다스리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경전의 뜻과 어긋나는 것이 아닙니까?"
부처의 경전은 진리이다. 그러나 오래 전 위대한 보살이 깨달음의 씨앗을 심고 그것을 키울 때, 그가 세 가지 맹세를 한 것은 이 삼독심을 없애기 위한 것이었다. 모든 덕을 행하겠다는 말은 탐욕의 독을 없애기 위한 것이며, 모든 악행을 그치겠다고 맹세한 것은 성냄의 독을 다스리기 위한 것이며, 모든 중생을 해탈로 인도할 것을 맹세한 것은 어리석음의 독을 다스리는 지혜를 닦기 위해서였다. 계(戒), 정(定), 혜(慧), 삼학을 지키는 것은 삼독심을 물리치고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것이었다. 사람은 이 세 가지 독을 극복함으로써 그의 모든 죄업을 다 청산하고 악행을 뿌리째 뽑아 버릴 수 있다. 그는 선을 행할 뿐만 아니라 이로써 덕을 쌓는 것이다. 그리고 덕을 쌓음으로써 악행을 끝내는 것은 곧 모든 수행을 완수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을 축복할 뿐만 아니라 모든 중생을 구할 수 있다. 이리하여 그는 중생을 해탈시킨다.


온몸으로 위험과 맞서라.

이 어록 역시 달마의 제자들이 자신들의 사상을 적어 놓은 것이다. 그 제자들은 분명히 교학만 성행했던 당시 중국 불교에서 명상 운동을 펼쳐나간 신선한 바람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불교를 선불교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일관성 있는 선불교의 사상을 세상에 발표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달마 어록'인 것이다.
달마의 제자들은 이제 해답 없는 질문과 진짜로 정면 대결을 하게 되었다. 이 경우도 앞 편의 어록과 같은 상황으로서 구도자는 궁극에 대해서 자꾸만 질문하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모든 지식을 뒤엎는 것이다. 그것은 평화이며 침묵이다. 그리고 거기에 해답은 없다.
그대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 사람들이 궁긍적인 질문을 해 오면 모른다고 말하기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신비를 풀 수 없다면 그대의 깨달음은 그대에게 무엇을 해주었는가? 그대는 어떤 종류의 지혜를 얻었는가?
이 점은 그대에게 명확해져야 한다. 달마의 제자들은 이 점을 구도자에게 명확하게 밝히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은 본질상 말할 수 없는 질문에 대해서 대답하려고 애를 썼다.
이 문제는 깨달은 스승을 갖고 있는 모든 종교운동들이 직면하게 되는 문제이다. 사소한 질문이 생겼을 때는 그들은 쉽고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갈수록 예리해져서 궁극적인 질문을 해 온다면 그들은 어려운 상황에 봉착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묻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들이 모른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억지 대답을 계속해 나간다. 그러나 그 대답은 진정한 해답이 아니다. 제자들은 다른 질문에 대해서는 무엇이든지 물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 그러나 궁극적인 질문만큼은 다르다.
그리고 그 상황은 나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나는 어떤 이데올로기에도 속해 있지 않다. 나는 누구를 위로하거나 변호해야 할 입장이 아니다. 나는 누가 괴로워하든지 상관하지 않는다. 나의 유일한 관심은 그대가 질문을 던질 때 있는 그대로 대답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사상을 따른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경험에 따른 것이다.
구도자는 묻고 있다.

"그러나 부처는 '삼 아승지겁 동안의 셀 수 없는 어려움을 겪고 나서야 그대는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당신께서는 어떤 연유로 단지 마음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삼독심을 극복하고 해탈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까?"

진리는 약긴 복잡하다. 만약 내게 이런 질문이 던져졌다면, 나는 먼저 내 위치부터 설명할 것이다. 그것이 그대가 차이점을 이해하는 데 더 쉬울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대답을 할 때 그가 어떤 종교나 학파에 속해 있는 것과 자신의 경험에 따라 대답하는 것과의 차이점을 말이다.
부처는 확실히 이렇게 말했다.

"삼 아승지겁 동안의 셀 수 없는 어려움을 겪고 나서야 그대는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볼 때 이 말은 부처 자신에게서 나온 말이 아니다. 그것은 대승불교가 경전에 집어넣은 생각이다. 이제 부처는 그것에 반박할 수 없다. 그가 말한 모든 것은 그가 죽고 난 뒤에 기록되었다. 초기부터 그의 설법을 들은 고참 제자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그들의 동의를 거친 후에 기록되었다. 제자들은 그들이 기억하는 모든 것을 한데 모았다.
거기에는 서로 모순이 되는 점도 있었다. 그리하여 그것은 32가지 학파로 나뉘게 되었다. 자신들에게 맞는 것만 서로 가려 모으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32개의 학파가 모두 자신들의 경전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마하야나(Mahayana)는 가장 큰 학파로서 대부분의 불교도들이 그것을 따랐다. 그것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피안으로 건너가지 않고, 사람들을 해탈시키기 위해서 이쪽 언덕에 남아 있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사실 그들은 한가지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부처가 모크샤의 문, 즉 궁극적인 해탈의 문에 이르렀을 때, 그 문이 열리면서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하늘에서 꽃비가 떨어졌다. 그렇게 위대한 깨달음을 얻는 일은 지극히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수천 년 동안 그 문은 닫혀져 있었던 것이다. 자연히 수백만 년이 흐르는 동안에 모크샤에 들어간 다른 부처들 사이에서는 하나의 축제가 벌어진 것이다. 그들은 모두 새로운 손님을 환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부처는 그 문으로 들어가기를 거절했다. 그는 문지기에게 이렇게 말하면서 발길을 돌렸다.
"문을 닫아 주시오. 나는 모든 사람들이 이 문으로 들어올 때까지 문밖에서 기다릴 것입니다. 그것이 수백만 년이 아니라 수억만 년이 걸릴지라도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 문제도 안 됩니다. 나는 평화로우며 절대적인 환희 속에 있습니다. 나는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어둠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잊어버리고, 자기만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좀 이기적인 것입니다."
그를 설득시키기 위해 모든 시도가 행해졌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전까지는 아무도 이런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말했다.
"아무도 자비스런 가슴을 가지고 모크샤에 들어간 적은 없었다. 나는 나의 형제들을 위한 자비심 때문에 모크샤 자체를 포기하겠다. 그것은 나에게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모크샤는 내가 이미 얻은 이상의 그 무엇도 내게 더 줄 수 없다. 나는 이 문 앞에 서서 마지막 한 사람이 들어갈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그 뒤에 내가 들어갈 것이다."
물론 이 이야기는 대승불교에서 지어낸 이야기이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자비심을 바탕으로 하는 대승불교의 사상은 자연히 혼자 힘으로는 깨달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매력을 끌게 되었다. 그리고 대승불교는 모든 깨달은 사람들이 대승을 통해서만이 사람들을 해탈로 인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깨달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해탈로 인도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조차도 수백만 년이라도 문 입구에 서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들어갈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형편이다. 그래서 대승불교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해탈을 돕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해야 했다. 그리고 절대적인 침묵과 평온 속에서, 한 사람도 윤회의 고리 속에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까지 기다리는 석가모니 부처에게 감사해야 했다.
한편 다른 종파들, 즉 소승불교인 히나야나(Hinayana)로 표현되는 종파들은 대중의 환영을 받지 못했다. 그것은 이름 자체가 '작은 수레'란 뜻이다. 이 작은 수레는 한 사람밖에 타고 가지 못한다. 고해의 바다를 항해하는 동안 그 배는 오직 한 사람만을 태울 수 있는 것이었다. 히나야나 파를 결성한 사람들은 아라한들이었다. 그들 역시 깨달음을 얻었지만 그들의 견해로는, 다른 사람을 해탈시키려고 돕는 것은 오히려 개인의 자유를 구속하는 행위가 되었다. 그것은 자비가 아니며 사랑도 아니다. 그들의 사랑은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자비는 사람들에게 일정한 틀의 생활 방식을 강요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것이 아무리 좋고 선한 것일지라도 자발적이지 않은 길은 오히려 시간 낭비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 개인이 이 세상에 남아 있든, 아니면 모크샤로 들어가든 그것은 그에게 절대적으로 선택권이 있다고 믿었다.
아라한들은 자비를 가장 세련되고 전체적인 관점에서 해석했다.
누가 옳은 것인지 가려내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들은 둘 다 옳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히나야나는 많은 추종자들을 끌어모을 수 없었다. 자기 기질에 맞는 사람들만이 히나야나를 찾았다. 그들은 깨달음을 얻고 나서도 아무도 돕지 않았다. 설법도 하지 않았고 단지 인연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기다림은 적극적인 기다림이 아니다. 그들은 그대가 구덩이 속에 빠진 것을 보고도 마냥 앉아만 있을 것이다. 그대가 스스로 구덩이를 파고 들어갈 수 있다면 거기에서 나올 수도 있다. 그리고 그대가 빠진 구덩이는 그대 스스로 판 것이다. 그대가 원치 않는 한 아무도 그대를 구덩이 속에 빠뜨릴 수 없다. 그대가 그것의 고통을 완전히 인식할 수 있다면 그대는 거기서 나올 수 있다. 길을 바꿀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그대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다.
석가모니 부처가 깨달음을 얻고도 수백만 년을 기다린다는 것은 대승불교의 해석이다. 아라한들의 상황은 완전히 다르다. 그들은 수백만 년의 세월도 지나간 노력도 모두 한 순간의 꿈을 꾸든 거기에 아무런 차이도 없다. 그대가 깨어나는 순간 모든 꿈은 수증기처럼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어떤 긴장도 남아 있지 않다.
그대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몰두하는 수행조차도 그대의 욕심이다.
그리고 욕심은 욕심을 없앨 수 없다. 그것은 야심이다. 야심은 에고를 물리칠 수 없다. 아마 그것은 가장 위대한 야심일 것이다. 깨달음을 얻겠다는 것, 자유를 쟁취하겠다는 것이 말이다.
욕망과 야심이 있는 한 그대는 속박되어 있다. 그대의 모든 훈련과 수행이 꿈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대의 몸이 약할지라도 꿈속에서는 세계 챔피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아침에 잠을 깨면 쥐 한 마리가 그대의 침대 속에서 나올 뿐이다. 세계 챔피언은 어디로 갔는가?
꿈속에서는 위대한 성자도, 도둑도 될 수 있다. 많은 사람을 죽이는 살인자도 될 수 있다. 그러나 아침이 되면 그것들은 한낱 꿈일 뿐이다. 모든 꿈은 사념이라는 똑같은 재료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것들은 한낱 소설일 뿐이며, 권선징악적인 소설이라도 그것은 소설일 뿐이다. 영적 수행을 하는 꿈이나, 사람들을 죽이는 꿈이나 모두 같은 차원이다. 그래서 대승을 믿지 않는 사람은 그대가 지금 여기에서 당장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달마의 본래 입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문제를 만들어내고 있다. 달마의 제자들은 부처가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은 대승불교가 잘못된 가르침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은 대승 경전에 나오는 가르침이 진리라고 말해야 했다.
그러나 달마 본래의 입장은 그대가 무의식 속에서 행하는 모든 일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대가 깨어날 때 그것은 일순간에 사라져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대는 언제라도 깨어날 수 있다. 그대는 한밤중에 깨어날 수 있다. 꿈은 그대가 깨어나는 것을 방해할 수 없다. 깨어나고 안 깨어나고는 오직 그대 자신에게 달린 것이다. 만약 깨어나겠다는 의지가 그대 속에 일어나면 그때는 깨달음이 자동적으로 찾아온다.
이것이 달마 본래의 입장이다. 그러나 그들은 대승불교에 속해 있었고 그것을 가르치러 중국에 갔다. 중국 불교 역시 대승불교에 속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제자들에게 대승불교에 속한 경전들로부터 많은 질문을 받았고 그들은 난처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제자들의 질문은 히나야나의 사상은 하나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것들은 중국에 전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스리랑카와 같은 남방 국가로 전파되었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대승불교의 사상이 석가모니 부처가 가르친 사상의 전부로 알았다. 32개의 학파 중에서 대승불교만이 커다란 줄기일 뿐, 나머지 31개는 그 세력이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한 가지 점에서는 두말 않고 동의했다. 그것은 석가모니 부처는 틀릴 수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들은 부처는 여전히 옳다고 말했고 그들의 말 역시 옳다고 주장했다. 비록 그들은 서로 모순되는 사상을 가졌지만 말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이렇게 묻고 있다.


"왜 당신은 지금 마음만 지켜보면 삼독심을 극복하고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까? 당신은 너무 간단하게 말씀하십니다.
부처는 스스로 '삼 아승지겁의 긴 세월 동안 셀 수 없이 어려운 수행을 겪어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삼 아승지겁, 그토록 긴 세월이 지난 후에야 부처는 비로소 깨달음을 성취했습니다. 그것은 즉각적인 깨달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랜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선을 행하고, 덕을 쌓고, 악을 피하고, 명상 수행을 하고, 다른 모든 난행, 고행을 다 겪은 후에야 가능했습니다. 석가모니께서 부처가 되는 데에는 수많은 생을 거쳐야 했습니다.
만약 그의 경우가 이러하다면 그는 아마도 지구상에 살았던 사람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인간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삼 아승지겁 아니라 삼십 아승지겁이 걸려도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마음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지금 이 순간에 우리도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도 깨달음을 얻은 사람입니다."
어떻게 이 두 가지 사상의 조류가 양립할 수 있을까? 만약 그대가 그 사상의 배경을 이해하지 않았다면, 그대는 달마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부처는 그의 나이 29세에 자신의 왕궁을 떠났다. 그는 당시에 위대하다고 알려진 스승들을 찾아 다녔다. 그리고 성실한 자세로 그 모든 위험들을 겪었다. 스승들이 무슨 말을 하든지 그는 완전히 그 말대로 수행했다. 오히려 그 스승들보다 더 철저하게 수행했다. 사실 그들은 자신들의 말처럼 완전하지 않았다.
그리고 부처는 말했다.
"나는 그것을 다 해보았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전처럼 무지한 상태이다. 그렇다, 나는 모든 명상의 기술들을 다 익혔다. 나는 요가로 몸을 완전히 비틀 수도 있었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고행도 다 해보았다. 하지만 나에게 깨달음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들을 통해서 나를 구원할 수 없었다."
그의 진지함은 의심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의 스승들조차도 그 앞에서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들은 이런 제자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모두 보통 사람들을 제자로 삼고 있었다. 그래서 그럭저럭 잘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석가모니 부처와 같은 제자는 힘이 들었다. 사실 그의 견해는 스승들 자신보다도 더 뛰어났다. 스승들이 문제삼지 않았던 것들도 그의 앞에서는 속속들이 다 들어났다. 그들은 더 이상 그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들이 무슨 대답을 하더라도 그 제자는 모두 반박할 수 있었다.
나를 가르친 교수 중에 한 사람은 나 때문에 8개월 동안 고생했다. 나는 그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그는 책에서 모든 종류의 논쟁들을 찾아내어 나에게 반박했다. 하지만 나 역시 쉬지 않고 생각을 해서 항상 그를 곤경에 빠뜨렸다. 다른 학생들은 그와 나의 토론을 구경하며 즐겼다. 왜냐하면 그가 나와 토론을 하기 시작하면 다른 모든 것은 잊어버리기 때문이었다. 과제물을 내주는 것조차 잊어버렸으니까. 그리고 한 학기가 다 끝나도록 첫 과를 끝낼 수가 없었다.
기말 시험이 다가오고 그는 나 때문에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는 결국 나에게 소리치기 시작했고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했다.
"들어 보세요. 교수님은 노인입니다. 그렇게 소리치면 심장에 좋지 않습니다. 저는 교수님이 심장마비를 일으키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러니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든지 조용하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만약 큰 소리치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면 저 역시 소리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도 조용하게 말할 수 있으니 교수님도 조용하게 말씀하십시오. 더군다나 저는 소리치는 것을 매우 좋아합니다. 그리고 교수님은 연세가 많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는 소리를 죽였고, 결국 총장을 찾아가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제 결정을 내리십시오. 내가 남든지 그가 남든지 말입니다. 나는 그 학생과 함께 이 대학에서 공부할 수 없소."
그러면 총장은 이렇게 묻는다.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는 거요? 그가 당신에게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소?"
그가 말했다.
"그는 내가 학생들에게 강의를 못하도록 합니다. 기말 시험은 자꾸만 다가오고 말입니다. 그만 빼고는 다른 학생들 모두 낙제를 하게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상한 정력을 갖고 있습니다. 나는 그와 논쟁하기 위해 굉장히 열심히 연구합니다. 밤새도록 논문을 읽고 새로운 토론 거리를 찾아냅니다. 그런데 다음날이면 그는 쉽사리 내 말을 반박합니다. 그는 나보다 더 열심히 연구하는 모양입니다. 그는 젊고 나는 매일 논쟁에 져서 매우 의기소침해집니다. 그러니 지금 맹세합니다. 그를 쫓아내지 않으면 내가 교수직을 그만두겠습니다."
총장은 나를 불렀다. 그는 나를 알고 있었다. 나는 전국에서 열리는 토론 대회에서 우승을 해서 많은 트로피를 그 학교에 안겨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학교를 전국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나에게 고마워했다. 총장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 매우 난처하다. 왜 그 노인을 못살게 구는가? 그는 이 학교에서 가장 연로한 교수다. 그는 철학박사 학위까지 딴 유명한 학자이다. 그를 놓칠 수 없다."
내가 말했다.
"당신은 그를 놓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게 한다면 그것은 불공정한 것입니다. 그는 논리학 교수입니다. 논리학 교수가 일개 학생과 논쟁할 수 없다면 누가 논쟁하겠습니까? 저는 다른 학생들은 관심이 다른 데 있습니다. 여자 친구나 영화 같은 것에 말입니다. 그러다가 학기말에만 잠깐 공부를 합니다. 그리고 지금 제가 논쟁하고 있은 것은 수업의 주제에 관한 것입니다. 매년 똑같은 질문들이 제기되고, 똑같은 해답만 나오고 있습니다. 4년 동안 출제된 문제지를 한 번 읽어보십시오. 20가지 문제 중에 다섯 가지 계속 돌아가면서 출제되고 있습니다. 교수들이 얼마나 게으른지 당신도 알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문제를 한 가지라도 만들어내는 것은 그들에게 너무나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5년 전의 문제지를 한 번 읽어보십시오. 틀림없이 똑같은 문제가 나올 것입니다.
이제는 아예 장사치들이 그 문제지들을 모아서 책으로 만들어내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들은 그 책으로 톡톡히 재미를 보고 있습니다. 4년 동안의 문제를 모두 모아서 발간한 그 책을, 교수고 학생이고 할 것없이 모두가 사 보고 있습니다. 교수는 정해진 문제를 내고, 학생들은 정해진 답을 옮겨 적습니다. 그러니 원전 같은 것은 아무도 보지 않습니다. 그런 귀찮은 일을 누가 하겠습니까? 그리고 그 문제집들은 은퇴한 교수들이 작성했습니다. 그러니 저는 이제 진짜 공부를 할 작정입니다. 저는 가만히 앉아 있으려고 대학에 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학위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저의 지성을 예리하게 만드는 것이 제 관심입니다."
총장이 말했다.
"자네의 말은 이해할 수 있겠네. 그러나 나는 자네를 퇴학시킬 수밖에 없네. 그것은 불공평한 일이고 죄책감을 느끼지만, 그 교수를 떠나게 할 수는 없네. 그가 없다면 철학과는 없어지고 만다네. 그는 가장 고참 교수이고 매우 엄격한 사람이지. 만약 자네가 쫓겨나지 않는다면, 그는 절대로 학교에 나오지 않을 걸세. 자네는 정말로 천재적인 기질이 있는 사람이네. 하지만 그는 보통 사람이야. 물론 철학 박사 학위와 문학박사 학위를 갖고 있지만 그는 천재는 아닐세. 나는 그것을 알지. 그리고 자네가 퇴학되었다는 사실을 게시판에 적어 놓으면 문제는 해결되지. 자네를 위해 다른 대학에 전화를 걸어 주겠네."
그래서 나는 말했다.
"저는 당신의 학교에 무슨 문제도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그 노교수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저는 그에게 무척 동정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8개월 동안 일어났던 일은 모든 대학으로 소문이 퍼질 것입니다. 어쩌면 이미 모든 총장들도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그가 잘 아는 대학의 총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그 총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를 용서해 주게. 자네는 지금 어떻게 할 수 없어서 우리에게 그 골칫거리를 떠맡기려고 하고 있다네."
그는 다른 몇 군데 대학에 전화를 걸어 보았다. 그곳은 교육 도시로 유명해서 모두 20여 개의 대학이 있었다. 하지만 그 대학의 총장들은 모두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다른 사람은 얼마든지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학생에 대한 소문을 이미 들었습니다. 당신의 대학은 가장 오래되고 가장 훌륭한 교수들만 모아 놓았습니다. 그런데도 문제가 생긴다면 우리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 학생 때문에 우리 대학이 피해를 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나는 한 대학에 다음과 같은 조건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절대로 수업에 참석해서는 안 되고, 학기가 끝나면 시험도 치지 않고 졸업장만 받는 것으로 말이다. 그 대가로 나는 일정액의 장학금을 지급받게 되었다. 나는 그토록 애를 써준 총장에게 고마워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아주 좋은 조건입니다. 저는 그렇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 후 2년 동안 나는 한번도 수업에 출석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2년 간은 내게 매우 중요한 기간이었다. 나는 도서관 근처에 숙소를 마련하고, 문을 열 때를 기다렸다가 사서가 내 등을 밀어낼 때까지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다.
달마의 제자들에게도 이와 똑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들은 대승불교에 속해 있었다. 중국은 마하야나 외에 다른 종파는 없었고, 아직 선종은 하나의 종파로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가 만일 손뼉치는 소리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해 보라. 그들은 아마 믿지 않을 것이다. 부처 자신도 삼 아승지겁 동안에 갖은 수행을 다 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마하야나의 가르침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달마는 자신의 경험에 따라서 어떤 고행이나 덕을 쌓는 일 없이도 깨달을 수 있음을 알았다. 그는 마음을 지켜봄으로써 깨달음을 얻었던 것이다.
그러나 석가모니 부처의 말은 틀릴 수 없다고 믿고 있었던 중국 사람들 속에서 부처의 말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석가모니 부처도 자신의 왕궁을 떠나서 6년 간 모든 수행을 다 해본 대로 다 했지만 깨달음을 얻을 수 없었다. 오히려 스승들은 그에게 "우리들은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만난 한 위대한 스승이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그대의 때를 기다리라. 어떤 스승도 그대를 도와줄 수가 없다. 그대는 이제 자신의 힘으로 깨달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제 스승을 찾아다니는 것은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 단지 그대의 마음을 지켜보라. 나는 그대에게 다른 가르침을 줄 수가 없다."
6년 동안 계속되는 수행과 갖은 고행으로 그는 지칠 대로 지쳤다. 그는 더 이상 마지막 스승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 날은 마침 보름달이 뜬 밤이었다. 그는 비하르(Bihar) 지방 근처에 있는 니란쟈라 강가의 한 나무 아래 자리를 잡았다. 거기서 그는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한편 그 마을 사람들은 나무신을 숭배했다. 그리고 특히 보리수나무가 나무 중에 으뜸이라고 믿었다. 마침 그날은 보름달이 떴고 한 여인이 우유죽을 끓여서 나무신에게 바치려고 갖고 가다가 보리수나무 아래 이상한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그를 보자 틀림없이 나무신이라고 생각했다 그 마을에 살지 않는 낯선 사람이 보름달이 뜬 밤에 나무 아래 앉아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녀는 그 우유죽을 석가모니 부처에게 바쳤다. 그녀의 이름은 수자타(Sujata)였다. 그 일로 인해 그녀의 이름은 불교 역사에 길이 남게 된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는 그 우유죽을 마셨다. 사실 그는 6년 동안 갖은 고행을 하느라고 매우 지친 상태였고, 마지막에 시작한 단식 때문에 거의 아사 직전의 상태였다. 그런 데다가 마지막 스승이 이제 모든 수행을 그만 두고 마음을 지켜보라고 했기 때문에 그는 고행을 그만두었던 것이다. 처음에 그는 왕의 자리를 포기했다. 그리고 이제 모든 수행마저 포기한 상태였다. 그는 우유죽을 마시고 나서 처음으로 모모가 마음의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지난 6년 동안 그는 잠을 자면서 까지도 긴장을 풀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모든 야망은 사라졌다. 거기에 어떤 계획도 없었다. 그는 그저 자신을 지켜보면서 때가 오기만을 막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아무것도 찾을 것이 없었고, 아무 데도 갈 곳이 없었다.
이런 느긋한 상태에 이르자 그는 잠 속에서도 자신을 지켜볼 수가 있었다. 아주 작은 각성의 불꽃이 거기에서 빛나고 있었다. 비록 몸과 마음은 잠이 든 상태였지만 거기에는 깨어 있음이 존재했다.


새벽녘에 눈을 뜨자 별이 비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새벽 별마저 막 먼동이 떠오르는 중이어서 제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별빛과 함께 그의 에고도 사라져갔다. 그때 갑자기 깨달음이 찾아왔다. 갑자기 자신의 본래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달마의 제자들은 곤란한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대승불교를 믿는 중국의 불교도들은 부처의 갑작스런 깨달음도 6년 간 수행을 했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었다. 만약 부처가 5년 만에 수행을 그만두었더라면 깨달음은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깨달았다고 하는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부처가 깨달을 수 있는 지성을 가졌다면 왕궁을 나오는 그 날로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 6년의 세월은 깨달음을 얻는 데 아무런 원인도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실 깨달음에는 어떤 원인도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수백만 년의 세월도, 그리고 어려운 고행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깨달음은 항상 갑작스러운 것이다.
만약 그것이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그대의 마음이 점차로 사라지기 때문이지 깨달음의 본성이 점차적인 것은 아니다. 그대는 온몸으로 그 상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대는 조금씩 위험을 받아들인다. 그대는 조금씩 자신을 잃어가고 있다. 오늘 조금, 내일 조금, 조금씩, 조금씩 말이다. 그대의 마음이 완전히 사라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그러면 그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천천히 그것을 할 것이다. 내일 조금, 모레 조금, 무엇이 그리 급한가?"
그래서 깨달음을 이해하는 데는 두 개의 파로 나누어진다. 점차적인 깨달음을 믿는 파는 자신의 마음을 즉시 떨쳐 버릴 용기가 없는 많은 사람들에게 훨씬 호소력이 크다. 그리고 갑작스런 깨달음을 믿는 파들은 사자의 심장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은 온몸으로 모든 위험과 맞설 수 있다.
나는 한 일본 배우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미국에 가서 많은 돈을 벌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었다. 돈은 벌 만큼 충분히 벌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고향으로 돌아오기 전에 먼저 세계 여행을 하고 싶었다. 그는 일본으로 돌아가면 다시는 외국으로 나가지 않을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곳은 다 가 보고 싶었다. 그는 자신의 안내인에게 어디부터 가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그의 안내인은 파리부터 가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들은 파리로 갔다. 파리에 도착하자 그의 안내인은 먼저 그에게 말했다.
"카지노를 보지 않고서는 파리를 구경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좋다. 카지노에 가 보자. 나는 파리의 모든 것을 다 보고 싶다."
그래서 파리에서 가장 유명한 카지노로 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미국에서 번 모든 돈을 도박판에 걸었다. 그러자 그곳 지배인이 달려와서 말했다.
"이렇게 많은 돈을 걸 작정이십니까?"
그가 말했다.
"그렇소. 왜 안 됩니까?"
그러자 지배인은 카지노 주인에게 달려가서 이 사실을 말했다.
"이상한 녀석입니다. 만약 그가 이긴다면 우리 카지노는 몽땅 날아가게 생겼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도박꾼을 봐 왔지만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돈을 거는 사람은 처음 봅니다."
하지만 카지노는 영업 성격상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카지노의 절대적인 규칙이었다. 결국 그 일본인 배우는 도박에 졌고 모든 돈을 날렸다. 그가 젊음을 바쳐서 번 돈을 말이다. 그는 빈털터리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호텔로 들어가서 잠을 잤다. 그가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 신문을 보자 한 일본인이 호텔 옥상에서 투신자살한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카지노에서 수백만 달러를 잃은 한 일본인이 비관 자살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 기사를 읽은 다른 일본인들이 호텔로 달려왔다. 그래서 호텔 지배인은 이렇게 말했다.
"죽은 사람도 이 호텔에 묵은 일본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다른 호텔 옥상으로 올라갔는지 모릅니다. 그는 아마도 큰돈을 잃고 실의에 빠져서 자살했나 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찾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이 호텔에서 자고 있습니다. 아침에 그가 방안에 있는 것을 호텔 직원이 확인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방으로 달려왔다. 그런데 그 일본인 배우는 멀쩡하게 누워서 미친 듯이 웃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카지노 주인도 있었다. 카지노 주인이 물었다.
"왜 웃고 있습니까?"
그 일본인 배우가 말했다.
"나는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는데 신문에서는 내가 투신자살을 했다고 나와 있소. 그러니 내가 웃지 않겠소? 아마 다른 일본인일 것이오."
카지노에서 수백만 달러를 잃은 일본인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신문 기자가 죽은 사람과 그를 쉽게 착각한 것이었다.
카지노 주인이 말했다.
"당신은 이상한 사람이군요. 당신이 평생 번 돈을 잃고도 그렇게 태평스럽게 잠을 잘 수 있다니."
그러자 그가 말했다.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나는 그 순간 박진감을 즐겼다. 나는 돈을 모두 걸었을 때 당신이 떨고 있는 것을 즐겼다. 돈은 다시 벌면 된다.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건 훔친 돈이 아니다. 내가 직접 번 돈이다."
그러자 카지노 주인이 다시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모든 도박사들이 게임을 하는 방식대로 조금씩 돈을 걸어야 했소. 그러면 밤새도록 도박을 즐길 수 있었을 것이오. 왜 그런 모험을 했소?"
나는 그 일본인 배우가 그의 자서전에다 이렇게 말해 놓은 것을 읽었다.
"나는 갑작스런 깨달음, 즉 돈오(頓悟)를 믿는 선종에 속해 있었다. 나는 점차적인 깨달음을 믿지 않는다. 만약 당신이 어떤 일을 해야 한다면, 그 일에 온몸으로 그리고 강렬하게 맞부닥뜨리라. 주저하는 가운데 모든 일을 함으로써 당신 자신을 바보로 만들지 말라."
달마는 실제로 돈오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프라기야타라라는 여자 스승에게 입문했다. 그녀는 대승불교도였고 달마를 중국에 보내 그곳에서 대승불교를 꽃피우도록 했다. 불교는 6백 년 동안 들불처럼 중국 땅을 번져 나갔다. 불교는 예수가 태어나던 당시 중국 땅에 전해졌다. 그것은 석가모니 부처가 죽은 뒤로 5백 년이 지난 때였다. 그 후 6백 년 동안 중국에서 3만 개의 사찰과 2백만 명의 승려들이 생겨났다.
공자는 중국 사람들을 영적으로 굶주리게 했다. 공자의 마음에는 영혼이 없다. 종교가 없다. 공자 때문에 중국은 공산주의로 쉽게 돌아설 수 있었다. 공자의 마음은 마르크스와 매우 가깝다. 그들은 매우 닮았다. 둘 다 신이 없다고 믿었다. 영혼도 없으며, 모든 종교는 쓸데없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인간의 의식이 단지 다섯 가지 요소들이 함께 모인 것이며, 죽어서 그 요소들이 흩어지면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모든 중국인은 영혼의 가르침에 목말라했다. 그리고 그 갈증을 불교가 채워 주었다. 그래서 중국이 불교를 받아들이는 데는 아무런 갈등이나 싸움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프라기야타라는 달마를 그들에게 보냈다. 그때까지 한 사람의 깨달은 자도 중국에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학자들은 많이 갔다. 그들의 숫자는 천여 명이나 된다. 그들은 불경을 중국어로 번역했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학자일 뿐이었다. 프라기야타라는 이제 중국은 깨달은 사람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달마에게 "그대는 가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달마는 중국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그는 갑작스런 깨달음에 대한 믿음이 퍼져 있었다.
이것이 함정이었다. 그의 제자들은 계속 질문을 받고 있다. 부처의 말은 당신의 말과 반대입니다…….

그런데 지금 당신께서는 어떤 연유로 단지 마음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삼독심을 극복하고 해탈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까?

그대는 그것을 간단하게 저지할 수 있다. 사람은 지금 당장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부처가 삼 아승지겁 동안에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고군분투한 사실은 어떻게 되는가?
부처는 삼이 아니라, 삼십 아승지겁 동안 수행을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꿈이었다. 그 꿈이 깨어지는 것은 항상 한순간에 일어난다. 한순간 바로 전에는 그대가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직후에 그대는 잠에서 깨어난다. 그대가 깨어날 때 모든 꿈은 사라진다
이것이 바로 올바른 대답이다. 그러나 그것은 대승불교의 사상과 맞지 않는다. 그래서 달마의 제자들은 교리적인 대답으로 연막을 피워 다른 질문을 다시 야기시켰다.

부처의 말은 사실이다. 그러나 삼 아승지겁은 바로 삼독심에 물든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진실이 아니다. 부처는 실제로 수많은 생을 말하고 있은 것이다. 그는 불성을 얻기 위해서 분투해 왔고 결국 마지막 생에서 그것을 성취했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은 매우 융통성 있는 대답을 하려고 한다.

범어로 아승지겁이란 말은 그대가 셀 수 없이 많다는 뜻이다. 이 삼독에 물든 마음에서 셀 수 없는 악한 생각들이 나온다. 그리고 그 모든 생각들은 영겁의 세월 동안 계속된다.

사실 이 말은 난센스이다. 아니 난센스보다 더 나쁜 것이다. 그것은 어리석은 말이다. 그대도 그것을 안다. 생각은 한 시간조차도 계속되지 않는다. 어떤 생각이라도 그대가 한 시간만 계속 집중할 수 있다면 그대는 아마 놀랄 것이다. 그것은 저절로 마음에서 빠져 나가버린다.
마음은 혼잡한 도시의 교통 사정과 같다. 그대는 그 속에 서서 견딜 수 없다. 그대의 생각은 어떤 것보다도 빨리 달릴 수 있다. 일겁의 시간은 매우 긴 세월이다. 그리고 한 생각은 몇 초도 계속되지 않는다. 그대의 마음은 강물처럼 잠시도 쉬지 않고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Heracleitos)가 말했다.
"그대는 같은 강물 속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 강물은 끊임없이 흘러가기 때문이다. 그대가 두 번째 발을 담글 때에는 이미 같은 강물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이름만 같은 강일 뿐이다."
나는 헤라클레이토스보다 한 수 더 떠서 말한다. 그대는 같은 강물에 한번도 같은 발을 담글 수 없다. 그대의 발이 들어가는 순간과 완전히 잠기는 순간에도 강물은 계속 흐르기 때문이다. 발바닥을 적신 강물과 발등을 적신 강물은 다르다. 그대가 발을 더 깊이 담그더라도 매 초마다 그것은 달라질 것이다.
인간의 마음속에도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흐름이다. 수천 가지의 생각들이 흘러가고 있다. 하지만 달마는 부처의 말에 어떤 의미를 붙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부처가 삼 아승지겁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무수히 많은 생각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니다, 부처는 실제로 시간의 길이를 말한 것이다. 달마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종지(宗旨)인 갑작스런 깨달음에 비슷하게 맞추기 위해서 부처의 말을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내가 그들의 입장이었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는 틀렸다. 그가 말한 삼 아승지겁의 세월은 깨달음을 얻기 전에 한 말이었다. 그것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의 말이 아니다. 그가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면 그것은 확실히 깨달음을 얻기 전에 한 말이다."
부처가 깨달음을 얻기 전에도 다섯 명의 제자들이 그를 따라다녔다. 그들은 모두 브라만들로서 고행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석가모니 부처가 수자타로부터 우유죽을 얻어 먹는 것을 보고 그를 떠났다.
수자타란 이름은 '좋은 곳에 태어나라.'라는 뜻이다. 그것은 높은 신분의 사람으로 태어나라는 뜻이다. 귀족계급이나 브라만들은 절대 그런 이름을 쓰지 않는다. 그것은 수드라 계급의 이름이다. 수자타는 틀림없이 수드라였을 것이다. 그녀는 불촉천민(不觸賤民)의 여자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마음이 작용하는 방식이다. 그녀가 높은 계급에 속할 수 없다면 이름이라도 그렇게 붙이자는 뜻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가장 낮은 신분을 의미하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는 수드라 여자의 음식을 받으면서도 "그대는 어떤 계급에 속해 있는가?"라고 묻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음식을 맛있게 먹는 것을 본 다섯 제자들은 즉시 그를 떠났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타락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속아왔다. 그는 고행자가 아니었다."
부처는 그 다섯 제자들에게 무슨 말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깨달은 자가 아니었다. 경전을 만들 때 부처가 한 말은 모두 기억해야 하지만, 깨달음을 얻기 전에 한 말은 집어넣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오직 깨달음을 얻은 뒤에야 그 말은 중요성을 지닌다.
달마는 그것을 매우 쉽게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은 그리 용기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아니 그들은 다른 생각이 더 강했다. 물론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두려워한 사람들은 결코 아니다. 그들이 두려워했던 것은 그의 스승이 중국에 뿌려 놓은 씨앗이 죽어 버릴까 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다른 구도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무리 속에 들어오도록 노력했던 것이다.

"그러나 위대한 보살들은 삼학을 지키고 육바라밀을 행함으로써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제 당신께서는 제자들에게 단지 마음을 지켜보라고만 말씀하십니다. 수행의 법칙을 따르지 않고서 누가 과연 깨달음에 이르겠습니까?"

그들은 구도자들을 함정으로 몰아넣었다. 이 질문이 구도자의 마지막 질문이다. 그들은 앞에서 달마가 말한 것처럼 어떤 훈련도 필요 없고 어떤 경전도 필요 없다고 말하고 있다. 오직 필요한 것은 마음을 아는 것이다. 나는 달마와 그 제자들의 말에 절대적으로 찬성한다. 깨달음을 가져다주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무의식적인 사람은 자신을 훈련시킬 수 있다. 그는 머리를 깎을 수도 있고 수염을 자를 수도 있다. 그는 옷 세 벌과 그릇 하나만을 소유하고 하루에 한 끼만 먹고도 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깨달음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거지들 모두가 깨달았을 것이다.
나는 자신의 위장을 바싹 쪼그라들게 만든 사람들을 본 적이 있다. 그들은 배고픔을 느끼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 이 나라에는 그런 사람들이 얼마든지 많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부처가 되었는가? 깨달음은 가난이나 단식이나 훈련이나 종교적 제의 같은 것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깨달음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오직 깨어 있음 뿐이다. 그대의 행동, 그대의 생각, 그대의 감정에 대해서 더 많이 깨어 있어 그것들을 지켜보는 길밖에 없다.
달마는 그 사실을 정확하게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제자들은 조직에 속해 있었다. 대승불교라는 조직에 말이다. 그대가 어떤 신념 체계나 사상에 속해 있다면, 그대는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이 그대를 스승으로 여기고 존경한다면 반드시 어떤 문제가 일어나게 된다. 그러면 그대는 자신만의 독특함을 잃게 된다. 그대는 석가모니 부처의 말을 지지해야 한다. 그것이 자신의 이해와 상반된 것일지라도 말이다. 달마의 제자들은 말한다.

삼학은 삼독심을 없애기 위한 것이다. 그대가 삼독을 극복했을 때 그대는 삼학의 한량없는 덕을 지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셀 수 없이 많은 선한 생각을 그대의 마음을 통해서 일어나게 할 것이다. 육바라밀은 여섯 가지 감각을 청정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바라밀이라고 부르는 것을 그대는 피안에 이르는 방편이라고 부를 수 있다. 여섯 가지 감각에 낀 때를 벗겨 냄으로 해서 육바라밀은 그대를 집착이 강을 건너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해줄 것이다.

이 대답은 질문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말이다. 그들은 단지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했다.
"이 말이 부처의 말과 반대되더라도 나는 상관하지 않겠다. 나는 오직 나의 진리를 말할 뿐이다. 그것이 다른 누구의 진리에 반대하더라도 그것은 그의 문제이지 내 문제는 아니다."
진리는 그대 속에서 일어날 때만 아름다운 것이다. 그대가 다른 사람의 방법으로 자신을 진리에다 맞추려 한다면 그대는 진리를 왜곡시키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가장 큰 죄악이다.
그 질문은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대답은 해답이 아니다. 그들의 대답은 다른 질문에 맞는 것이다. 그들은 "셀 수 없는 긴 세월 동안의 수행에도 불구하고 부처는 꿈속에 살았다."라고 말했어야 한다.
그러나 아마 그들은 서로 약속한 것이 있어서 그렇게 말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이 서로 약속을 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그들은 진리를 잃게 된다.
진리는 약속할 수 없는 경험이다.

"경전에 따르면 삼학에 대해서 '나는 모든 덕을 행하겠다고 맹세한다. 나는 모든 악을 끝내겠다고 맹세한다. 나는 모든 중생을 해탈로 인도할 것을 맹세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당신께서는 삼학이 단지 삼독심을 잘 다스리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경전의 뜻과 어긋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달마의 제자들은 어긋나는 것이라고 말하지 못했다. 사실 석가모니 부처가 이 세 가지 맹세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모든 악을 그치고, 모든 선을 행하고, 모든 중생을 제도하는 것, 그러나 이것은 그가 깨달음을 얻기 전에 한 맹세이다. 그래서 그것은 아무런 효력도 없다.
부처는 깨달음을 얻고 나서 이 세 가지 맹세가 꿈속에서 한 것임을 알았다. 그대가 꿈속에서 결정한 것은 깨어났을 때 아무런 효력이 없다. 그대는 그 결정을 간단히 무시해 버린다.
이 세 가지 맹세는 확실히 부처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당신이 맹세하고 나서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라고 묻지 않았다. 하지만 그 질문을 달마의 제자들이 받았다. 그들은 그것이 꿈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따라서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고 명백하게 말하지 못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깨어 있는 의식에서 나온 말이다. 그리고 부처는 깨어 있을 때 아무런 맹세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부처는 경전의 진리이다.

그들은 달마와 달라서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이야기를 바로 하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강하고 확신 있는 말투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들은 부드럽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래 전 위대한 보살이 깨달음의 씨앗을 심고 그것을 키울 때, 그가 세 가지 맹세를 한 것은 이 삼독심을 없애기 위한 것이었다. 모든 덕을 행하겠다는 말은 탐욕의 독을 없애기 위한 것이며, 모든 악행을 그치겠다고 맹세한 것은 성냄의 독을 다스리기 위한 것이다. 모든 중생을 해탈로 인도할 것을 맹세한 것은 어리석음의 독을 다스리는 지혜를 닦기 위해서였다. 계(戒), 정(定), 혜(慧), 삼학을 지키는 것은 삼독심을 물리치고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것이었다. 사람은 이 세 가지 독을 극복함으로써 그들은 모든 죄업을 다 청산하고 악행을 뿌리째 뽑아 버릴 수 있다. 그들은 선을 행할 뿐만 아니라 이로써 덕을 쌓는 것이다. 그리고 덕을 쌓음으로써 악행을 끝내는 것은 곧 모든 수행을 완수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을 축복할 뿐만 아니라 모든 중생을 구할 수 있다. 이리하여 그는 중생을 해탈시킨다.

어쨌든 그들은 어물쩍 넘어가려고 하고 있다. 이 대답은 자발적인 대응에서 나온 해답이 아니다. 물론 그것은 명석하고도 지적인 대답이다. 그것은 그의 제자들을 만족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만족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어떤 제자도 두지 않는다. 나는 어떤 신념 체계에도 속하지 않는다. 나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사랑한다. 그리고 결코 그들을 비교하지 않는다. 그들은 모두 독특하다. 자라투스트라는 자라투스트라이고, 마하비라는 마하비라이다. 부처는 부처이다. 예수는 예수이고, 모세는 모세이다. 그들은 모두 독특해서 한 가지 기준으로 그들을 한꺼번에 평가할 수 없다.
달마 역시 이들과 같은 차원에 속한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은 그들의 명상 운동을 중국 땅에 널리 퍼뜨리자는 약속 때문에 자신들을 스스로 부처의 제자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아직까지 선종은 불교 속에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제자가 어떻게 스승의 말이 옳다 그르다 말할 수 있겠는가?
스승을 갖지 않는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은 그대에게도 매우 드문 기회가 될 것이다. 그것이 자라투스트라에게서 나왔든, 노자에게서 나왔든, 부처에게서 나왔든, 예수에게서 나왔든, 상관이 없다. 그것이 진리라면 나의 가슴을 울린다. 그리고 나는 그것에 절대적인 지지를 보낸다. 나는 나의 가슴을 안다. 만약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면 내 가슴은 울리지 않는다. 나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즉시 알아차린다.
달마의 제자들은 그들에게 명상을 배우러 온 구도자들을 위로하고 평온하게 만들려고 한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진리에 관심이 없다. 그것은 부처의 가르침을 널리 전하기 위한 것에 더 관심을 쏟고 있다. 거기에서 그들은 자신들만의 독특함을 잃어버렸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스승인 달마만큼 독특한 하나의 존재로서 남았을 것이다.
불교도들은 달마의 무리들이 중국에서 부처의 가르침을 꽃피운 것에 대해서 매우 기뻐했다. 그들은 튼튼한 기초를 박았다. 그것은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 일본, 대만까지도 퍼져 나갔다.
그들은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들은 달마를 부처와 똑같은 봉우리에서 끄집어 내려야만 했다. 그들은 사람들이 질문해 올 때 달마의 생각대로 "이 말들은 부처가 깨닫기 전에 한 말이다. 그래서 그것은 아무 가치도 없다. 나에게는 부처가 깨달음을 얻고 난 뒤에 한 말만 진짜 황금이다."라고 말하지 못했다.
나는 달마의 제자들이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상처를 입히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후세에 깨달은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의 선례를 남겼다. 그대는 모든 것에 동의할 필요는 없다. 그대는 진리가 어떤 방향에서 들어오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진리를 모르는 성직자들에게서 나온 말이라면, 그들이 아무리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도 그것에 반대해야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임무를 완수했다. 그러나 달마의 독특한 아름다움은 잃어버렸다. 나에게는 중국 사람 모두가 불교도가 되는 것보다 달마 한 사람이 더 귀중하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깊이 잠들어 있는 것보다, 단 한 사람이라도 수정처럼 맑게 빛나는 히말라야의 봉우리가 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알겠는가?
 


출처 : 세존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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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기타 [달마의 안심론 安心論] 短長中庸 2009.08.12 6741
19 기타 [달마의 수행론 修行論] 短長中庸 2009.08.12 5020
18 기타 [달마의 육바라밀론 六波羅蜜論] 短長中庸 2009.08.12 5500
» 기타 [달마의 돈오론 頓悟論] 短長中庸 2009.08.12 4417
16 기타 [달마의 무명론 無明論] 短長中庸 2009.08.12 4265
15 기타 [달마의 혁파론 革破論] 短長中庸 2009.08.12 4337
14 기타 [달마의 삼신론 三身論] 短長中庸 2009.08.12 4379
13 기타 [달마의 중생론 衆生論] 短長中庸 2009.08.12 3826
12 기타 [달마의 불종자론 佛種子論] 短長中庸 2009.08.12 4571
11 기타 [달마의 실체론 實體論] 短長中庸 2009.08.12 3894
10 기타 [달마의 중도론 中道論] 短長中庸 2009.08.12 4968
9 기타 [달마의 불승론 佛乘論] 短長中庸 2009.08.12 4752
8 기타 [달마의 관심론 觀心論] 短長中庸 2009.08.12 5146
7 기타 [달마의 각성론 覺醒論] 短長中庸 2009.08.12 4101
6 기타 [달마의 선도론 禪道論] 短長中庸 2009.08.12 4896
5 기타 [달마의 진여론 眞如論] 短長中庸 2009.08.12 3296
4 기타 [달마의 진신론 眞身論] 短長中庸 2009.08.12 3303
3 기타 [달마의 본성론 本性論] 短長中庸 2009.08.12 3432
2 기타 [달마의 혈맥론 血脈論] 短長中庸 2009.08.12 6001
1 기타 [달마의 이입사행론 二入四行論] 短長中庸 2009.08.12 6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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