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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12 13:59

[달마의 수행론 修行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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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가슴 깊숙한 곳에서 신비를 맛보라[달마의 수행론 修行論]
 

                                      조셉 아르파이아·롭상 랍가이 저, 서보경 역
 
 

달마어록 수행론 修行論

경전을 통틀어서 부처는 중생들에게 말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좋은 일을 함으로써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말이다. 그 좋은 일이란 절을 짓고, 불상을 조성하며, 향을 사르고, 꽃을 뿌리며, 꺼지지 않는 등잔에 불을 밝히고, 하루에 여섯 번씩 참선을 하고, 탑을 돌며 단식을 하고, 예배를 드리는 일이다. 그러나 마음을 지켜보는 것에 이 모든 수행이 다 들어 있다. 그때 이 모든 일들은 하나의 부수적인 일이 된다.
부처의 경전에는 셀 수 없는 비유들이 들어 있다. 그것은 중생이 마음의 표면만 겉돌 뿐 깊숙한 것을 이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부처는 구체적인 비유를 들어서 그 오묘함을 나타내었다. 내면의 수행 대신 외부적인 일에만 집중하면서 축복을 받기 원하는 사람들은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려는 것이다.
그대들이 절이라고 부르는 것을 우리는 상가라마, 즉 청정한 곳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삼독심에 물들기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그의 감각의 문을 청정하게 지켜야 한다. 그의 몸과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히며 안과 밖으로 깨끗하게 하는 것이 절을 짓는 것이다.
불상을 조성하는 것 역시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이 모든 종류의 수행을 닦는 것에 해당된다.
그리고 향을 사르는 것은 물질적인 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다르마의 향이다. 그리하면 무명과 악한 행위가 그 향내와 함께 멀리 사라질 것이다.
부처가 세상에 있을 때, 그는 제자들에게 그런 귀한 향에 깨어 있음의 불을 붙이리라고 말했다. 그것은 십방(十方)의 모든 부처를 공양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오늘날 여래의 진실한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백단향이나 유향으로 만든 물질적인 향에 불을 붙이고, 오지도 않을 미래의 축복을 빌고 있다.
미덕의 꽃을 뿌리는 것 역시 같은 진리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다르마를 말하는 것에 해당되며 다른 사람들의 축복을 빌어주는 것이며 진아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다.
만약 그대가 여래는 자기를 위해 사람들로 하여금 꽃을 꺾어 식물에 해를 끼치도록 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 생각한 것이다. 여래의 가르침을 잘 지켜나가는 사람은 천상과 이 땅에서 어떤 생명의 모습도 해치지 않는다. 만약 그대가 실수로 어떤 생명을 해쳤다면 그대는 그 대가를 받게 된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계를 어기고 앞날의 복을 받기 위해서 생명을 해치는 자는 더욱 큰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어떻게 축복을 슬픔으로 바꾸려고 하는가?
꺼지지 않는 등불은 완전한 깨어 있음을 나타낸다.
오래 전에 연등불(練燈佛)이라고 하는 부처가 있었다. 그 이름의 뜻은 그의 양미간에 있는 터럭에서 나온 빛이 무수한 세계를 비출 수 있다고 하는 뜻이다. 그러니 기름 등잔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하루에 여섯 번 참선하는 것은 여섯 가지 감각을 다스리라는 뜻이다.
탑 주위를 도는 것은 곧 탑이 그대의 몸과 마음이다. 그대의 깨어 있음이 멈추지 않고 몸과 마음의 주위를 돌 때 그것을 곧 탑돌이라고 부른다.
단식을 하는 것도 같은 진리를 담고 있다. 단식을 하는 것은 그대의 몸과 마음이 흩어지거나 방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한번 그대가 미혹의 음식 먹기를 멈춘 뒤에 그대가 그것을 다시 만진다면 그것은 단식을 깨뜨리는 것이다. 한번 그대가 그것을 깨뜨리고 나면 그대는 그것으로부터 어떤 축복도 받지 못한다.
이 세상은 진실을 보지 못하는 미혹된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몸과 마음을 모든 형태의 악에 물들게 한다. 그들은 정욕에 마음껏 탐닉하고도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이 일상의 음식 먹기를 그만두고는 그것을 단식이라고 부른다.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
예배도 마찬가지이다. 그대는 방편을 이해하고 인연을 맞추어야 한다. 방편에는 행동하는 것과 행동하지 않는 무위를 모두 갖추고 있다. 예배란 존경과 겸양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대의 진아에 대해 존경하는 것이고 미혹됨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다. 만약 그대가 악한 욕망을 몰아내고 착한 생각에 머무르면 아무것도 나타내지 않더라도 그것은 바로 예배가 된다.
외부 세계로 감정을 표출하는 것 대신에 내면으로 향한 수행에 실패한 사람은 자신을 쓸모없는 인간으로 만드는 무지와 증오와 악에서 결코 헤어나지 못한다. 그들은 위엄 있는 태도와 성현 앞에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음으로써 남을 속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생사의 바퀴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여러 가지 장점을 갖추고 있더라도 말이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신비를 맛보라.

이 어록 역시 달마의 제자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스승의 이름을 빌려 쓴 것이다. 나는 그들이 비겁하다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 정말 가슴이 아프다. 그들은 결국 '무명이 어디에서 나오느냐?'라는 질문을 받는 시점에 다시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서 더 나아갈 길을 잊어버렸다. 그리고 그런 일은 종종 일어난다. 만약 그대가 한번이라도 거짓말을 한다면, 그대는 천 번도 더 거짓말을 해야 한다. 나의 거짓말은 다른 거짓말을 또 만들어내어야 한다. 하나의 거짓말을 그럴싸하게 꾸며대기 위해서는 두 개의 거짓말이 필요하다. 그리고 세 개, 네 개…… 이런 식으로 끝없이 이어진다.
달마의 제자들이 스승이 단순히 '나는 모른다'라고 한 대답을 그대로 적지 않았기에 그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제 그들은 함정에 빠졌다. 그래서 무슨 질문이 그들에게 던져지더라도 그들은 대답을 해내어야 할 입장이다. 그들이 알든 모르든 말이다. 그런 것들은 머리로 알 수 있은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궁극적인 질문을 받을 때 그대는 침묵을 지켜야 한다. 그것은 대답되어질 수 없는 것이다. 부처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의 그 어떤 사람이라도 말이다.
궁극은 항상 신비로 남을 것이다. 그대는 어줍잖은 대답을 해서 그것의 신비를 파괴할 수는 없다. 그대가 궁극과 대면하는 순간, 그대는 단지 순진한 아이가 되어야 한다. 그것의 신비를 즐기라. 그대 가슴 깊은 곳에서 그 신비를 음미하라. 그대 존재의 침묵에까지 그것이 와 닿게 하라. 그것이 그대를 꿰뚫어서 그대를 변형시킬 수 있도록 하라. 그 질문은 어떤 해답을 기대하거나 무엇에 관한 한정된 질문이 아니다.
나는 달마처럼 용기 있는 사람이 그런 궁극적인 질문에 '용서해 달라. 나는 모른다.'라고 말하지 않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다. 만약 그의 어록이 여기서 끝났더라면, 그는 아마도 모든 신비주의자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추앙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그의 제자들은 자기 동족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모든 진리는 중국에서 나와야 한다고 믿는 중국 사람들을 그들은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궁극적인 질문이란 깨달은 사람조차 대답할 수 없다.'는 말을 그들에게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계속 소설을 지어내게 된 것이다. 그들은 부처가 틀렸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석가모니 부처가 말한 것과 전혀 맞지 않는 이상한 대답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것은 자신들의 스승인 달마의 생각과도 전혀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가 이전에 베푼 모든 가르침은 마음을 인식하고, 그 마음을 초월하라는 것이었다. 그것만이 완전한 가르침이다. 더 이상 어떤 것도 덧붙여서는 안 된다.
이제 그들은 억지로 그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거기서 멈출 수가 없었다. 그것은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 질문이 궁극적이라는 이유만으로 구도자들은 질문을 무시해야 했다. 그들은 깨달은 사람은 모든 것을 안다는 중국 사람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모든 방법을 다 찾아보았다.
그러나 실체는 그것이 아니었다. 그대가 깨달음이 깊어질수록 아는 것은 줄어든다. 깨달음의 궁극적인 봉우리에 서게 되면 그대는 자신의 내면만을 알 뿐, 그 외 모든 것에 대해서 모르게 된다. 그러나 그 봉우리에서 그대 자신의 내면은 바로 우주 전체가 되는 것이다.
나는 그대에게 말할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여전히 옳다는 것을 말이다. 그들은 달마를 통해서 진리가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약속했다. 그들은 혁명을 일으키지 않도록, 사람들에게 평화를 가져다 주기로 말이다. 그들은 후계자를 뽑아서 선불교의 맥을 이어나가려는 스승의 뜻을 저버릴 수 없었다. 차라리 이 어록을 편찬할 당시에 달마가 살아 있었더라면 상황은 훨씬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달마가 이 세상을 떠난 지 몇 백 년도 더 지난 뒤였다. 그래서 그들은 입으로 전해지는 달마의 말로써 새로운 불교인 선종에 귀의한 중국 사람들을 방황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달마가 죽지 않고 그들과 함께 있었다면 상황은 완전히 바뀌어졌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들은 스승에게서 배운 대로 거침없이 말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대가 다른 사람을 신경 쓰는 순간, 그대는 봉우리에서 떨어지게 된다.
내 경우에 한해서만큼은 나는 절대적으로 진리의 편에 설 것이다. 나의 말이 세상 전체를 방황하게 만들더라도, 나는 어떤 누구를 위로하는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경험한 진리의 체험과 틀리는 말을 나는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나에게 종종 "왜 세상 전체가 당신을 반대합니까?"라고 묻는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이 나에게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세상을 반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진리만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오직 나의 경험에 의거해서 이야기할 것이다. 나는 어떤 식으로도 미리 약속한 바가 없다.
그러나 달마의 제자들은 스승의 유언이 남아 있었다. 달마는 그의 제자인 혜가를 통해 깨달음의 빛을 말없이 이어 가라고 말했다. 그리고 혜가는 승찬을 통해서, 또 승찬은 도신을 통해서, 그 가르침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들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교조인 달마의 사상을 책으로 만들어야 했다. 깨달음을 전하는 데 말조차도 허용하지 않았던 달마의 종지(宗旨)는 어떤 정신적 운동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본래의 뜻이 흐려지기 마련이다.
이것이 오늘 이야기할 어록의 첫 부분이다.

경전을 통틀어서 부처는 중생들에게 말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좋은 일을 함으로써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말이다. 그 좋은 일이란 절을 짓고, 불상을 조성하며, 향을 사르고, 꽃을 뿌리며, 꺼지지 않는 등잔에 불을 밝히고, 하루에 여섯 번씩 참선을 하고, 탑을 돌며 단식을 하고, 예배를 드리는 일이다.

사실 이 모든 가르침들은 바로 대승불교의 경전에서 나온 말들이다. 그러나 부처는 이런 것에 대해서 말한 적이 없다. 만약 그가 이렇게 말했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부처는 자신의 죽으면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나의 불상을 만들지 말라."
그리고 앞에서 달마가 '부처는 다른 부처를 예배할 수 없다.'라고 말한 것을 그대는 이미 알고 있다. 그대는 내면에 석가모니 부처와 똑같은 자질을 갖고 있다. 단지 그대가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다. 누구라도 그것을 자신의 내면에 발견했다면 그 역시 부처이다.
달마는 연등불(練燈佛)의 이름을 앞에서 언급했다. 그는 석가모니 부처보다 훨씬 이전의 사람이었다. 연등불이 살고 있었던 시대에 석가모니 부처는 보통 사람이었다. 단지 호기심 때문에 그는 연등불을 보러 갔다. 하지만 그는 연등불을 만나는 순간 어떤 보이지 않는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현존은 석가모니 부처에게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그것은 어둠을 완전히 몰아내는 하나의 빛이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석가모니 부처에 의해서 연등불로 불리워진 것이다. 연등(燃燈)이란 말은 남의 손에 의해서 켜진 불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현존만으로 항상 있는 등불을 의미한다.
석가모니 부처는 연등불 시대에 깨달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호기심 많은 한 청년이었다. 사람들이 연등불을 만나기 위해 모여들었고, 그도 호기심 때문에 그곳에 갔다. 그의 호기심은 순수한 것이었다. 그는 깨달음을 얻으려거나 어떤 지식을 얻으려고 간 것도 아니었다. 거기에는 어떤 야심도 없었다. 단순히 사람들이 많이 모여드는 사실에 호기심이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가서 연등불을 만나고 그의 빛을 받은 사람들은 완전히 변화되어 돌아왔다. 그들의 행동과 삶의 방식이 변화되었다. 그들이 탐욕과 야망은 사라지고 분노도 사라졌다. 그들은 완전히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 그래서 이 청년은 매우 의아해했다.
스승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단지 그대를 촛불 가까이로 끌어오는 것뿐이다. 그 촛불에 가까이 다가온 그대는 자신의 촛불에도 그 불이 옮겨 붙고 만다. 그리고 한번 옮겨 붙은 촛불은 결코 꺼지지 않는다. 그 촛불은 엄청나게 고귀한 보물이 된다. 그 촛불이 아직 불이 붙지 않았다면 그것은 죽은 것이다. 그러나 불꽃이 옮겨 붙으면 생명이 시작된다. 그 생명은 모든 어둠을 몰아낼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이다. 그리고 최초로 그 불꽃을 옮겨준 촛불과 똑같이 다른 촛불에게도 그 불꽃을 옮겨 붙일 수 있다.
연등불은 그런 사람이었다. 사실 모든 위대한 스승도 이와 같다. 그 주위에 일어나는 일은 그가 직접 행동으로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그대를 가까이 끌어들이는 것뿐이다. 그리하여 그의 신비를 그대에게도 나누어준다. 그대는 알지 못하는 순간에 그의 자력에 이끌리게 된다. 그리고 어느 지점에 이르면 그대의 촛불에 불꽃이 옮겨 붙는다. 그러면 옛 것은 죽고 새 것이 태어난다.
이 경전은 절대적으로 틀린 말이다. 그것은 석가모니 부처의 말이 아니다. 깨달은 사람은 '좋은 일을 함으로써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와 같은 말을 할 수가 없다. 그대는 깨달음이 향을 사르는 것과 어떤 연관이 있음을 볼 수 있는가? 그대가 산더미같이 쌓인 향을 모두 태우더라도 그대가 깨달을 수 있다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대는 단지 향을 태울 수 있을 뿐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절을 짓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대는 승려가 아니다. 하지만 그대는 다른 바보들이 승려가 되도록 절을 짓고 있다. 그것이 어떻게 그대에게 깨달음을 가져다 줄 수 있겠는가? 석가모니 부처가 깨달음을 얻기 전에 도대체 몇 개의 절을 지었는가? 그가 얼마나 많은 향을 사르고, 얼마나 많은 꽃을 뿌렸는가? 또한 얼마나 많은 등불을 켰는가?
아니다! 이 문장은 석가모니 부처의 말이 절대 아니다. 그것은 대승불교가 지어낸 신조일 뿐이다. 거기에는 역사적인 이유가 있다. 부처는 매우 적선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오직 옳다고 생각한 것만 이야기했다. 그 결과 어떤 것이든지 그는 개의치 않았다. 예를 들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판디트들과 학자들과 브라만들은 바보일 뿐이다. 그들은 하나의 기생충이다. 수백 년 동안 그들은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고 살아왔다."
그는 《베다》를 쓰레기라고 불렀다. 그런데 《베다》는 힌두교에서 숭배되는 경전이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쓰레기라고 부를 정도로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어떤 힌두교의 화신도 믿지 않았다.
예를 들면, 파라수라마(Parasurama)는 힌두교에서 신의 화신 중의 하나였다. 그는 위대한 현자로 떠받들어지는 사람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에게 의심을 받는 사람이었다. 모든 남편들이 자기들의 아내를 의심하는 것처럼, 모든 아내 역시 자기들의 남편을 의심한다. 그래서 그 역시 자신의 아버지에 의해서 의심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인 파라수라마를 불렀다. 그리고는 자기 어머니의 머리를 잘라서 갖고 오라고 말했다. 파라수라마는 그 이유를 묻지 않고 갔다. 그는 자기 어머니의 머리를 잘라 아버지에게 갖다 드렸다.
그때 아버지가 그에게 말했다.
"나는 그녀를 지켜봐 왔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어떤 무사와 사랑에 빠진 것이 명백한 사실이다."
파라수라마와 그의 가족은 브라만 계급이었다. 파라수라마는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는 한 사람의 무사도 살려서 이 성을 내보내지 않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매우 과장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본성을 잘 보여 준다. 그는 전 세계의 무사들을 다 죽이는 것처럼 나타난다. 그리고 이제 어디서 새로운 무사가 나오겠는가? 힌두교 사회는 매우 이상스런 것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아무도 그런 것을 생각해보지 않는다. 그들의 자신들의 위대한 문화를 갖고 있다고 계속 주장한다. 하지만 그것의 뿌리는 결코 살펴보지 않는다. 그들의 문화는 단지 이름뿐이다.
그리하여 석가모니 부처는 파라수라마를 신의 화신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를 화신으로 받아들인다면 악마의 화신밖에는 되지 않을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는 라마(Rama)도 신의 화신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라마도 한 젊은 수드라를 죽였기 때문이다. 그의 귓속에 뜨거운 납액을 부어서 말이다. 그 젊은이는 브라만들이 《베다》를 암송하고 있는 것을 나무 뒤에서 숨어들었다. 본래 수드라는 어떤 경전도 읽을 수 없게 되어 있었고, 또한 들을 수조차 없었다. 도대체 이 나라가 만들어 낸 문화라는 것이 이런 것이란 말인가? 전 인구의 4분의 1이 경전을 듣지 못하도록 금지되어 있는 나라가 어디에 또 있겠는가?
이 젊은이는 호기심 때문에 나무 뒤에 숨어서 듣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산스크리트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언어는 보통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언어이다. 오직 브라만들만의 언어였다. 그리고 그대는 그것이 죄악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 때문에 귓속에 납용액을 부어서 그 젊은이를 죽일 만큼 큰 죄악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는 단지 귀로 《베다》를 들었다는 것뿐이다.
부처는 라마를 신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리고 크리슈나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만육천 명의 여자들을 끌어 모았다. 어떤 여자는 자식과 가족과 이별해야 했고, 어떤 여자는 사랑하는 남편과 이별해야 했으며, 어떤 여자는 처녀였다. 만육천 명의 여자들이 그의 병사들에 의해서 끌려왔다. 그리고는 소 떼처럼 취급당했다. 나는 그가 그 모든 여자들의 이름을 기억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매우 강력하고 힘있는 왕이었다. 부처는 그런 난센스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런 썩어빠진 인간을 신의 화신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에게 불가능했다.


 

부처는 매우 직선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말했다.
"모든 신상, 모든 사원, 모든 베다들은 교활한 성직자들이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서 만든 것들이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다음과 같은 좋은 일을 함으로써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말이다. 그 좋은 일이란 절을 짓고, 불상을 조성하며, 향을 사르고, 꽃을 뿌리며, 꺼지지 않는 등잔에 불을 밝히고, 하루에 여섯 번씩 참선을 하고, 탑을 돌며 단식을 하고, 예배를 드리는 일이다.

부처는 신을 숭배하는 것에 반대했다. 그리고 자신의 불상을 만드는 것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그는 죽기 직전에 이렇게 말했다.
"다시금 그대에게 말한다. 나의 불상을 만들지 말라. 내 이름으로 어떤 사원도 짓지 말라. 나를 숭배하는 일을 시작하지 말라. 어떤 숭배도 그대를 깨달음으로 인도해 주지 못한다. 나는 그대에게 명상의 길을 보여 주었다. 명상하라. 명상 속에서 혹시 내가 나타나면, 그대는 즉시 내 머리를 잘라 버리라."
과연 누가 이와 같은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앞의 내용과 같은 경전이 그에게서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달마는 간단히 말할 수 있다.
"이 말들은 부처의 말이 아니다."
하지만 그의 제자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 점이 내가 못마땅해 하는 점이다.
그의 제자들은 중국의 불교도들이 많은 절을 짓고, 수도원을 건설하고, 많은 불상을 조성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보통 중국의 절에는 한 사원 안에 일천 개나 되는 불상을 조성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어떤 곳은 산 전체가 거대한 사원으로 만들어졌다. 그것은 세계에서 가장 큰 사원이었다. 거기에는 일만 개의 불상이 안치되어 있다. 그리고 불교도들은 모든 중국 사람들을 개종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런 사람들에게 달마의 제자들은 틀렸다고 말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당신의 불교 승려들은 자기 나라 사람들에게 승려를 잘 봉양하고, 부처를 예배하며, 절에다 시주를 많이 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왔다.
제자들은 한 순간 주저했을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들도 역시 종교의 조직 속에 갇혀 버리고 말았다. 조직화된 종교는 항상 어리석은 행위를 주장한다. 그런 것은 그대에게 어떤 변화도 가져다 주지 못한다. 하지만 그런 행위들은 그대가 종교의 조직에 속아넘어가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달마의 제자들은 그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구도자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마음을 지켜보는 것에 이 모든 수행이 다 들어 있다. 그때 이 모든 일들은 하나의 부수적인 일이 된다.

만약 마음을 지켜보는 한 가지 방법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면, 그때는 이 모든 것들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이런 행위들은 모두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이며, 마음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준다. 그러나 그대가 해야 할 모든 것은 바로 마음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때 마음은 그대로부터 어떤 에너지도 공급받을 수가 없어서 말라죽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어떤 마음도 갖고 있지 않다면, 단 한순간이라도 순수한 무심이 된다면 그대는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선불교를 찾아온 구도자들은 이렇게 질문할 권리가 있다.
"달마께서는 스스로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마음을 지켜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절차들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만약 달마의 제자들이 '이 말들은 부처에게서 나온 것들이 아니다.'라고 말했다면 그것은 자신들이 속한 대승불교의 가르침에 반대하는 것이 된다. 선불교 역시 대승불교에 속한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나는 어떤 종파, 어떤 신조, 어떤 종교에도 속하지 말라고 그대에게 말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그대는 진리를 만날 수 없다. 그대는 계속 듣기 좋은 위로의 말만 찾아다닐 것이다.
그리고 달마와 같은 사람에게서 배운 사람들이 진리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다면,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말의 결과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스승은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간 최초의 깨달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수천 명이나 되는 그들의 선조들이 6백 년 동안 중국에서 일구어 놓은 대승불교의 토양을 완전히 파괴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향을 사르고, 등불을 켜고, 꽃을 바치고, 절을 짓고, 불상에 예배하는 것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만 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중국의 불교도들은 진짜로 깨달은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달마의 제자들은 특정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인도의 한 외국인 국민학교에서 일어난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 학교는 기독교 학교였다. 그 근방에는 다른 학교가 없었다. 그리고 그 날 한 여선생은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을 걸어가신 가장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리고는 그녀가 아이들에게 물었다.
"자, 누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입니까?"
한 미국 소년이 말했다.
"에이브러햄 링컨요."
그러자 그녀가 말했다.
"아니에요. 나쁘진 않지만 맞는 답은 아니에요."
한 영국 소녀가 일어나서 이렇게 말했다.
"윈스턴 처칠요."
그녀는 한 시간 동안이나 강조해온 것이 헛수고였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말했다.
"아니에요. 나쁘진 않지만 맞는 답은 아니에요."
그러자 한 소년이 손을 들고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선생이 말했다.
"전에는 절대로 손을 드는 법이 없더니, 처음으로 네가 손을 들었구나."
그리고는 그녀는 그 소년의 대답이 틀림없이 틀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소년은 이렇게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요."
그녀는 너무나 놀랐다. 처음 두 대답에 대해서도 놀랐지만 이번에 놀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소년은 유대인이었던 것이다.
수업이 끝나고 나서 그녀는 소년을 붙들고 말했다.
"하이메, 너는 유대인이 아니니?"
그가 말했다.
"맞아요. 나는 유대인이에요."
"그런데 너는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을 걸어가신 가장 위대한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니?"
그 질문에 대답하는 학생에게는 큰 상품이 걸려 있었다. 하이메는 그 상품을 받아 갖고 가면서 말했다.
"사업은 사업이에요.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모세라고 알고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피그미일 뿐이에요. 하지만 사업은 사업이죠."
하지만 그대는 어린 소년을 용서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매우 논리적이다. 그는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내 가슴속에는 모세야말로 이 세상을 걸어가신 가장 위대한 사람이다. 그렇지만 내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해서 상을 타는 것은 훨씬 좋은 일이다. 뭣하러 모세라고 말해서 상을 놓치겠는가?"
그러나 깨달은 사람은 조직화된 종교와 진리 사이에서 확실한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이 종교를 위한다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제자들이 대답한 말은 그저 상을 타려는 하이메와 다를 바가 없다. 그것은 그 경전이 부처의 말이라고 증명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부처에 의해 말해진 것이 아님을 절대적으로 주장한다. 그것은 그의 삶, 그의 가르침, 그이 길과 전혀 반대되는 내용이다. 달마의 제자들은 이렇게 적어 놓았다.

부처의 경전에는 셀 수 없는 비유들이 들어 있다.

이제 그대는 속임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그들은 그것이 틀렸다거나 맞다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은 스승의 말과 대승불교의 교리 속에서 중도를 찾았고 '부처는 많은 비유를 이야기했다.'고 적어 놓았다.

그것은 중생이 마음의 표면만 겉돌 뿐……

그들은 자신들의 어록을 읽는 사람들이 중생이 아니라 높은 경지의 소유자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부처는 아마 그 어떤 깨달은 사람보다 가장 지성적인 마음의 소유자들을 제자로 삼고 있었다. 하지만 달마의 제자들은 불교도로 개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구도자들에게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부처는 구체적인 비유를 들어서 그 오묘함을 나타내었다.

이 말은 속임수이다.

내면의 수행 대신 외부적인 일에만 집중하면서 축복을 받기 원하는 사람들은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진리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와중에서도 사람들의 마음에 진리를 심어 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위의 말은 진실이다.

그대들이 절이라고 부르는 것을 우리는 상가라마, 즉 청정한 곳이라고 부른다.

상가라마는 정확히 말하자면 수도원이다. 그것은 비유가 아니다. 그리고 2,000년 동안 중국에서 수천 개의 수도원이 있었다. 그리고 지난 40년 동안 공산당이 중국을 지배하면서 모든 수도원을 파괴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쯤 수백만 명의 승려들이 계속 중국에 살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나오고 있다.
중국의 독재자 마오쩌둥은 수천 개의 수도원을 병원과 학교로 바꾸었다. 그리고 승려들은 집단 농장에 가서 일을 해야 했다. 마오쩌둥은 승려들의 탁발 행위를 법으로 금지시켰다. 불교는 승려들이 탁발을 통해서 생계를 꾸려나가도록 했다.
이제 마오쩌둥은 죽었지만 여전히 불교는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더 이상 승려들은 탁발하며 돌아다닐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공장이나 농장으로 가서 일을 해야 먹고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삼독심에 물들기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그의 감각의 문을 청정하게 지켜야 한다. 그의 몸과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히며 안과 밖으로 깨끗하게 하는 것이 절을 짓는 것이다.

만약 달마가 진리를 바로 설명할 수 있다면 왜 석가모니 부처는 비유로 말할 수밖에 없었겠는가? 석가모니 부처도 그 정도는 말할 수 있다. 사실 그와 같은 달변가는 이 세상에 일찌감치 없었다. 달마가 말했다면 석가모니 부처도 이 모든 것이 비유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것은 비유가 아니었다. 이제 달마의 제자들은 그것이 비유라고 말했기 때문에, 그 비유를 풀어서 설명해야 하는 책임을 지게 되었다.


 

불상을 조성하는 것 역시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이 모든 종류의 수행을 닦는 것에 해당된다.

나는 이것이 비유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 비유란 어떤 사실을 바로 말할 수 없을 때 그것을 이해하기 쉽도록 예를 들어 설명하는 것이다. 하지만 불상을 조성하는 것과 깨달음을 위해서 수행하는 것은 어떤 관계도 없다. 부처는 자신의 입으로 불상을 세우지 말도록 금지시키지 않았는가?

그리고 향을 사르는 것은 물질적인 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다르마의 향이다. 그리하면 무명과 악한 행위가 그 향내와 함께 멀리 사라질 것이다.

그런 향이 있다면 그것은 정말 멋진 향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런 향을 보지 못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미 사람들의 삶은 매우 단순해졌을 것이다. 명상이나 수행을 한답시고 다른 사람을 귀찮게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 영적 향만 구해다가 태우면 모든 무명과 악한 행위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냄새에 대한 알레르기가 있기 때문에 아마 깨달음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깨닫지 못하는 것은 문제가 안 된다. 이미 전 세계가 깨달음을 얻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언제든지 깨달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달마의 제자들은 그들이 구도자들을 얼마나 오래 속일 수 있을지 몰랐다. 그러나 그들은 천 년 동안 사람들을 속였다. 이 어록이 그토록 오래 존재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대승불교도들의 손에 의해 지켜져 왔을 것이다. 그들은 이것을 사람들에게 발표하지 않았다. 그것은 달마의 인상을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부처가 세상에 있을 때, 그는 제자들에게 그런 귀한 향에 깨어 있음의 불을 붙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십방(十方)의 모든 부처를 공양하는 것이라고 했다.

향을 사른다고 해서 그저 깨어 있음을 얻을 수 있은 것인가? 과연 그렇다면 그대는 향만 사름으로 해서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그래서 이제 그대의 모든 관심은 다르마 향을 찾는 것에 집중될 것이다.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 영적인 향을 찾아서 말이다.
아마 그대는 그것을 뿌나(Poona)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곳 사람들은 뿌나를 매우 영적인 도시라고 생각하니 말이다. 너무 영적이어서 살아 있은 사람은 하나도 없고 오직 귀신들만 우글거리는 도시란 말인가?

그러나 사람들은 오늘날 여래의 진실한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오직 그들의 스승인 달마만이 여래의 진실한 뜻을 이해했다. 그리고 아마 여래 자신도 자신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주위를 빙빙 맴돌고만 있다. 그들은 간단히 이렇게 말할 수 없었다.
"이 말은 부처의 말이 아니다. 이 말은 절대적으로 난센스이다."
그래서 이 말들은 올바르게 고쳐져야 한다.

미덕의 꽃을 뿌리는 것 역시 같은 진리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다르마를 말하는 것에 해당되며 다른 사람들의 축복을 빌어주는 것이며 진아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다.

꽃을 뿌리는 것이 무슨 진리란 말인가? 그리고 미덕의 꽃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만약 그대가 이 바보 같은 설명을 받아들인다면 어떤 식으로 뿌려야 하겠는가?
한 정신병원에서 마당에 정원을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는 병자들을 매일 한 시간씩 그 정원에 나가서 앉아 있도록 했다. 어느 날 두 명의 정신병자가 정원에 앉아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주먹을 쥐고 있던 한 명이 다른 정신병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만약 내 주먹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알아맞힌다면 너에게 일 루피를 주겠다."
그러자 그 말은 들은 두 번째 정신병자가 말했다.
"정말로? 너는 약속을 지키겠지?"
그러자 처음 말을 꺼낸 정신병자가 주머니에서 일 루피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
"물론 정말이고 말고. 자 이제 내 손안에 무엇이 들어 있지?"
그러자 두 번째 정신병자가 한참을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 속에 코끼리가 들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자 첫 번째 정신병자가 말했다.
"너는 나를 속였다. 조금 전에 내 손안에 든 것을 훔쳐보았지? 그러고도 너는 시치미를 떼고 못 본 척했어." 그도 역시 자기 손안에 코끼리가 들어 있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대는 어떤 식으로 다른 사람들의 축복을 빌어주며 진아(眞我)를 영광스럽게 하는 미덕의 꽃을 뿌리겠는가?

만약 그대가 여래는 자기를 위해 사람들로 하여금 꽃을 꺾어 식물에 해를 끼치도록 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 생각한 것이다.

이 말은 옳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런 식으로 자신들의 생각과 스승의 말을 뒤섞어 놓았다. 그리고 그것은 본래의 의미를 모두 상실했다. 석가모니 부처도 그대가 꽃을 꺾는 것을 확실히 싫어했을 것이다. 그것은 생명을 죽이는 행위이다. 장미꽃은 장미 넝쿨에 붙어 있을 때만 살아 있는 것이다.
그대가 그것을 꺾는 순간 그것은 죽은 것이 된다. 나는 종종 정원으로 산책을 나간다 그것 외에는 나는 내 방을 나가는 일이 없다. 나는 그곳에 있는 정원을 살펴본다. 그 정원은 완전히 작은 밀림을 이루고 있다. 나는 사람들에게 정원의 나무들에게는 어떤 가위도 대지 못하도록 말했다. 나무는 자기 마음대로 자랄 수 있도록 해야한다. 적어도 나의 정원만은 말이다. 어떤 나무도 죽이지 말라. 그리고 살아 있는 꽃을 꺾지 말라.
그래서 나는 부처가 꽃을 꺾지 말라고 이야기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꽃을 뿌리라는 말은 대승불교가 생기면서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집어넣은 것이다. 그러나 왜 그들은 그런 말을 대승불교 속에 집어넣었을까?
여기에서 그대는 매우 근원적인 것을 이해해야 한다. 석가모니 부처는 2.500년 전에 이 땅에서 살았다. 그는 거의 모든 나라를 떠돌아다녔다. 그는 매우 카리스마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존재계의 비밀을 경험한 사람이며. 그것과 하나가 된 사람이다. 그의 충격은 대단한 것이었다. 아마 이전의 다른 어떤 사람도 그처럼 충격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죽는 순간 브라만들, 사제들이 자기 동굴에서 뛰쳐나왔다. 그들은 석가모니 부처의 얼굴을 대면할 수 없어서 그때까지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의 얼굴을 대면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의 제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죽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린 것이다. 부처는 그들의 모든 직업을 다 부수어 놓았다. 그리하여 사원에는 어떤 종소리도 울리지 않았고. 사람들은 더 이상 브라만들은 예배 의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리고 브라만들은 세상에서 가장 영리한 성직자들이다.
인도에서는 사람들이 나면서부터 즉시로 브라만들의 통제 속에 들어간다. 먼저 태어나면서부터 일정한 의식을 치러야 한다. 그리고 그 의식에서 아기의 이름이 지어진다. 이런 과정에서 성직자들은 완전하게 사람들을 속여간다. 그들의 생각은 노예가 된다. 그것은 지금까지 몇 천년 동안 인도에서 계속되어 왔다. 만약 그대가 한 마을에서 다른 도시로 이사를 가고자 한다면 먼저 마을에 사는 브라만에게 가서 별점을 쳐야 한다. 남쪽인지 북쪽인지 아니면 동쪽인지 서쪽인지를 결정짓는다. 그리고 이사 시기는 언제가 가장 적당한가도 자문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결혼을 하려면 또한 브라만들이 주제하는 결혼식을 올려야 한다. 그 결혼식이 끝나고 자녀들이 태어나면 거기에 또 브라만들이 기다리고 있다. 나이가 들어서 늙어 죽을 때까지 열 번의 커다란 의식이 기다리고 있다. 그야말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사람들은 브라만의 손안에 들어 있다.
사람이 죽은 뒤에도 그 의식은 계속 진행된다. 가난한 사람들은 그 제사 의식이 너무나 비싸서 집을 팔아야 할 정도이다. 죽은 부모들을 제사지내기 위해서 말이다. 그래서 브라만들은 엄청난 부자들이다.
뿐만이 아니다. 죽은 조상들까지도 제사를 지내야 한다. 그 선은 아주 길게 연결되어 있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그 줄에 매여 있다. 제사를 지내는 기간은 길게는 한 달까지 이어진다. 조상의 숫자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 족보에 올라가 있는 사람은 모두 제사를 지내 주어야 한다. 사람들은 그 이름조차 다 알지 못한다.
그리고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죽었다. 과학자들이 계산해 본 결과 그대가 앉아 있는 땅은 적어도 80명의 무덤이 있었던 자리이다. 그러나 겁내지 말라. 그들은 이미 죽었다.
부처는 이런 관습에 대항해서 엄청난 혁명을 일으켰다. 그는 모든 성직자 계급의 기득권을 파괴했다. 그러나 그가 죽는 순간 그 성직자들은 다시 돌아왔다.
사람들 역시 그들을 그리워했다. 그것은 매우 간단한 현상이다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를 축복해 줄 성직자가 없었다. 누가 죽어도 죽은자의 명복을 빌어줄 성직자가 없었다. 사람들은 이런 제사 의식들을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석가모니 부처가 죽고 나자 천천히 브라만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불교도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기 시작했다.
지난 50년 전까지만 해도 인도에는 거의 한 사람의 불교도도 없었다. 그러나 금세기 50년 동안 한 사람의 위대한 정치가가 있었는데, 그에 의해 우연히 불교가 다시 이 땅에 생겨나게 되었다.
그의 이름은 바바사헤드 암베드카르(Babasahed Ambedkar)였는데, 그의 계급은 수드라였다. 하지만 그의 지성적인 용모가 한 부자의 눈에 띄어 그는 영국에 유학을 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법률 전문가가 되었다. 그는 인도의 헌법을 만드는 데 참여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속한 수드라 계급의 신분 상승을 위해서 계속 싸웠다.
수드라 계급의 숫자는 인도 사회의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수드라에게도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옳은 일이었다.
나는 왜 그들이 일만 년 동안 자신들을 학대해 온 힌두교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는지 알 수가 없다. 힌두교는 그들에게 온갖 천한 일을 시켜왔고 거의 아무런 대가도 지불하지 않았다. 그들은 도시 속에서 사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들은 항상 도시 밖에서 살아야 했다. 그들은 어떤 곳을 지나갈 때면 이렇게 외쳐야 했다.
"나는 수드라입니다. 나는 지금 여기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내 소리를 듣는 사람들은 빨리 피하십시오."
만약 그들의 그림자가 그대에게 닿으면, 그대는 부정한 몸이 된다. 그러나 수드라들은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마하트마 간디도 수드라는 힌두교를 떠나서는 안 된다고 계속 고집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정치적 이유도 다분히 들어있었다. 힌두교의 4분의 1을 이루고 있는 수드라들이 떠나면 인도에서 힌두교는 다른 종교, 즉 이슬람교나 자이나교나 기독교처럼 소수파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드라마저 힘을 합하지 않으면 힌두교는 권력을 잃게 된다.
나는 마하트마 간디가 종교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그는 암베드카르와 같은 정치가에 속한다. 간디는 암베드카르가 내세운 주장을 철회하도록 단식을 계속했다. 수드라들에게 어떤 투표권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간디는 영리했다. 그는 수드라들을 하리잔(harijan)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교활한 사람들은 항상 말장난을 한다. 그대가 수드라를 하리잔으로 부르더라도 아무런 차이가 없다. 하리잔은 '신의 아이들'이란 뜻이다.
나는 마하트마 간디의 아들인 람다스(Ramdas)와 긴 논쟁을 했다. 내가 그에게 말했다.
"그대는 이 교활한 수작을 보지 못하는가? 신의 아이들은 일만 년 동안 고통을 받아왔고, 신의 아이들이 아닌 사람들에게 속아 왔다. 그들은 수드라들을 학대하고 그들의 여자들을 강탈했으며 사람들이 있는 마을을 불태웠다. 만약 이들이 신의 아이들이라면, 이들은 신의 아이들이 되지 않는 것이 훨씬 좋을 것이다. 그것은 난처한 일이다."
간디는 단지 아름다운 이름으로 바꾸었을 뿐이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는 암베드카르가 자신의 주장을 철회할 때까지 단식을 계속했고 거의 죽을 뻔했다.
내가 암베드카르였다면 마하트마 간디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살고 죽는 것은 당신의 문제다. 단식을 하고 싶다면 그것은 당신의 사업이다. 당신은 마음대로 할 자유가 있으니 죽을 때까지, 아니면 죽음을 초월할 때까지 단식을 계속하라."
그러나 암베드카르는 사람들로부터 압력을 받았다. 사람들은 간디가 죽게 되면 그것은 암베드카르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 같으면 간디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것은 매우 폭력적인 방법이다. 당신은 항상 비폭력을 말해 왔지만 이것이 정말 비폭력인가?"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났다. 내가 라이푸르(Raipur)에 있는 산스크리트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을 때였다. 아름다운 젊은 아가씨가 한 무뢰한에게 결혼을 강요당했다. 그는 매우 위험스런 사내였다. 여러 번 감옥에 갖다 왔고, 무슨 일이든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녀의 아버지와 거의 비슷한 나이였다. 그러나 그가 그녀에게 반한 후에는 간디의 방법을 썼다. 간디는 단식을 통해서 모든 것을 이루었다.
간디는 21일째 단식을 계속하자 그의 건강은 급속히 나빠졌다. 의사는 암베드카르에게 와서 말했다.
"무슨 조치를 취하라. 그렇지 않으면 이 노인은 곧 죽을 것이다."
인도의 모든 민족 지도자들이 암베드카르에게 압력을 넣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마하트마 간디에게 가서 용서를 구하라. 그리고 그에게 오렌지 쥬스를 바쳐서 그의 단식을 멈추게 하라. 당신의 운동을 포기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인도에서 가장 위대한 성자를 죽게 한 사람이 될 것이다."


암베드카르는 할 수 없이 그 일을 해야 했다.
나 같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 비난을 받아들일 것이다. 나는 기꺼이 역사의 저주를 받을 것이다. 그대가 죽고 나면 역사가 그대에게 대해서 뭐라고 썼는지 어떻게 알 것인가? 그들이 그대에게 뭐라고 쓰든지 상관하지 말라.
나는 간디의 방법이 비폭력이 아니라고 항상 주장했다. 그것은 아주 미묘한 방식으로 가장된 절대적인 폭력이다. 내가 그대를 죽이겠다고 위협한다면 그것은 폭력이다. 그리고 그대가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나 자신을 죽이겠다고 위협하는 것도 역시 폭력이다. 간디는 절대적으로 틀린 말을 하였고, 그는 위협으로 그것을 통과시켰다.
그래서 암베드카르는 다른 방법을 찾았다. 그는 수드라들을 불교로 개종시키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지난 50년 동안 인도에 불교도가 수십만 명이나 불어난 이유이다. 그러나 그들은 종교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치적 수단이었다.
라이푸르의 무뢰한은 그 여자의 집에 가서 침대에 누워 버렸다. 그리고는 그녀가 자신과 결혼해 주지 않는다면 죽을 때까지 단식을 하겠다고 위협했다. 이 소문은 도시 전체에 퍼졌다. 사진기자들이 거기 와서 사진을 찍어 갔고 매일 구경꾼들로 붐볐다. 그녀의 아버지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왜 그의 죽음을 내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 그는 정말로 추한 인간이다. 그는 나와 같은 또래이다. 나는 결코 그에게 딸을 줄 수 없다."
나는 그 여자와 아버지를 모두 알고 있었다. 그녀는 우리 대학의 학생이었고, 그녀의 아버지와 함께 종종 나에게 찾아왔다. 이번에도 그는 나를 찾아와서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말했다.
"그것은 매우 간단하다. 당신은 늙은 창녀 한 사람을 구하라."
그가 물었다.
"어떻게 하려고요."
그래서 내가 말했다.
"자, 이것을 우리가 노리는 바이다. 늙고 병든 창녀를 한 사람 매수해서 그대의 집 다른 방 침대에다 눕혀 두고 이렇게 시켜라. '그 남자가 나와 결혼해 줄 때까지 나는 단식을 계속할 것이다.'라고 말이다. 이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그 무뢰한은 그 날 밤 몰래 도망해 버렸다. 그리고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인도의 성자 간디의 방법이다.
부처가 죽고 나서 불교는 인도에서 급격하게 쇠퇴했다. 그가 깨달음을 얻은 붓다가야(Bodhgaya)에서조차도 불교 사원은 힌두교 사원이 되었다. 그들은 부처를 믿지 않았다. 그들은 부처의 사상을 반대했다. 하지만 그들은 사원은 허물지 않았다. 불교 사원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원이다. 많은 돈이 그 사원으로 들어왔다. 브라만들은 불상 대신에 힌두교 신상을 갖다 놓고 가만히 앉아서 엄청난 부를 모았다. 2,000년 동안 그 사원들은 브라만들의 소유가 되었다. 이제 어떤 법으로도 그들을 몰아낼 수 없다.
그래서 불교도들은 중국과 티벳으로 갔다. 그들은 한 가지 교훈을 얻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본래 내려오던 전통을 반대하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이다. 카리스마와 같은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게임에서 이긴 것처럼 보이지만, 그가 죽고 나면 그때는 인도에서 일어난 일이 중국이나 티벳에서도 똑같이 일어날 것이다. 스리랑카와 일본에서도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약속했다. 그것이 바로 진리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생각들이 경전으로 들어간 이유이다. 티벳에서 불교 경전은 매우 다른 성격을 띠었다. 그들은 티벳인들에게 많은 위로와 용기를 심어 주었다. 중국의 대승불교 경전은 좀 다르다. 스리랑카 역시 다르다. 그것은 역사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그들은 의식적으로 부처의 사상과 맞지 않는 말들을 경전에 집어넣었다. 그것은 생존의 문제였던 것이다.
나에 관한 한, 그리고 달마에 관한 한 진리는 절대적인 가치를 갖는다. 그것은 생존의 문제를 초월한다. 살아남기 위해 진리를 왜곡한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불교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고 해도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부처의 사상은 순수하게 보존되어져야 한다.
한 구도자가 진리를 찾기 원할 때마다 그는 불필요한 수행과 예배 의식 때문에 길을 잃지 말아야 한다. 달마는 그것에 대해서 명백하게 말했어야 한다. 나는 그것의 위험을 안다. 나는 그들이 이 어록을 기록한 후에 죄책감을 느꼈으리라고 확신한다. 그들은 스승의 뜻에 반대되는 말들을 기록한 것에 대해서 후회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들을 용서할 수 없다. 나는 진리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용서할 수 없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계를 어기고 앞날의 복을 받기 위해서 생명을 해치는 자는 더욱 큰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어떻게 축복을 슬픔으로 바꾸려고 하는가?
꺼지지 않는 등불은 완전한 깨어 있음을 나타낸다.

오직 이 비유만은 본래부터 비유로 말해진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완전한 깨어 있음으로 해석될 수 있다. 꺼지지 않는 등불만큼은 말이다. 하지만 다른 말들은 비유로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대승불교가 살아남기 위해 일부러 만들어 첨가한 것들이라는 점을 밝혔어야 했다.

오래 전에 연등불(練燈佛)이라고 하는 부처가 있었다. 그 이름의 뜻은 그의 양미간에 있는 한 터럭에서 나온 빛이 무수한 세계를 비출 수 있다고 하는 뜻이다. 그러니 기름 등잔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루에 여섯 번 참선하는 것은 여섯 가지 감각을 다스리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런 말들은 달마의 생각과 반대되는 것들이다. 삶 속에서는 무엇이든지 억제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마음을 통해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행은 필요 없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삶은 저절로 흘러가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달마의 기본적이 가르침이다.
사람은 자발적으로 되어야 한다. 사람은 순간 순간을 살아야 한다. 과거나 미래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고 현재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달마는 매우 아름다운 어록을 말했다. 하지마 그의 제자들은 끝에 가서 스승의 작업을 완전히 망쳐 놓았다.

탑 주위를 도는 것은 곧 탑이 그대의 몸과 마음이다. 그대의 깨어 있음이 멈추지 않고 몸과 마음의 주위를 돌 때 그것을 곧 탑돌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단지 방법에 대해서 말하려고 했다. 비록 지금 말하고 있는 것 전부가 어리석은 것이지만. 탑은 불교도들에게 실제로 존재해 온 것이다. 그것은 '스투파(stupa)'라는 범어를 중국어로 음역한 것인데,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이 죽으면 그 시체를 화장해서 유골을 안치하는 곳이다. 그리고 순례자들은 그 스투파 주위를 돌면서 기도를 했다. 그러니 그대의 몸과 마음이 스투파는 아니다. 스투파는 그대가 죽었을 때, 그대를 위한 무덤이다.
하지만 그대의 몸과 마음은 지금 살아 있다. 어떻게 그대의 의식이 몸과 마음 주위로 돌아다니겠는가? 그들은 이 말이 사람들에게 의문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지금 자신들의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을 찾아온 구도자들은 구체적인 것을 요구했고, 만약 그것이 비유라면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석가모니 부처의 말을 부정하지 않은 것이 된다.

단식을 하는 것도 같은 진리를 담고 있다.

조금만 지성을 갖춘 사람이라면 이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단식을 하는 것은 그대의 몸과 마음이 흩어지거나 방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나는 단식이 이런 역할을 하리라고는 믿지 않는다. 단식은 그저 단식일 뿐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한번 그대가 미혹의 음식 먹기를 멈춘 뒤에 그대가 그것을 다시 만진다면 그것은 단식을 깨뜨리는 것이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두 잊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그들의 내면에서 나온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두뇌 체조일 뿐이다. 그들은 바로 앞에서 몸과 마음을 스투파라고 정의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단식을 마음을 다스리는 조절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것은 이런 생각에서 나온 말이다.
"그대는 한번이라도 미혹된 음식 먹기를 그친 적이 있는가?"
그것은 형이상학적인 정의가 아니다. 음식은 탑 속에 들어가서 소화될 수 없다. 어떤 음식이 미혹된 음식인가? 부처 역시 그대가 먹는 것과 똑같은 빵을 먹고, 그대가 마시는 물과 똑같은 물을 마셨다.
음식을 먹지 않고 단지 그것을 손으로 만지기만 하더라도 미혹된다고 말한다. 미혹된 것을 만지는 것을 만지는 데 무슨 해가 있는가? 미혹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는 그것을 만질 수가 없다.

한번 그대가 그것을 깨뜨리고 나면 그대는 그것으로부터 어떤 축복도 받지 못한다.

그는 앞서 말한 형이상학적 비유를 모두 잊어버렸다. 이제 그는 '그대가 미혹된 음식을 만진다면 그대는 단식을 깨뜨리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세상은 진실을 보지 못하는 미혹된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몸과 마음을 모든 형태의 악에 물들게 한다. 그들은 정욕에 마음껏 탐닉하고도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이 일상의 음식 먹기를 그만두고는 그것을 단식이라고 부른다.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
예배도 마찬가지이다. 그대는 방편을 이해하고 인연을 맞추어야 한다. 방편에는 행동하는 것과 행동하지 않는 무위를 모두 갖추고 있다.

그들은 지금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한다. 전혀 관계없는 말들을 끌어와서 말이다.

예배란 존경과 겸양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대의 진아에 대해 존경하는 것이고 미혹됨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그대의 진아를 존경하는 것이며 미혹됨을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자신의 진아를 안다면 그때는 미혹을 어디에서 찾아낼 것인가? 진아와 미혹은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 그대가 깨어 있을 때는 꿈은 더 이상 거기에 없다. 꿈을 꿀 때는 그대는 깨어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진아를 아는 사람은 미혹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은 대중 속으로 들어가 틀린 말을 끄집어내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속으로 점점 깊이 들어간다.

만약 그대가 악한 욕망을 몰아내고 착한 생각에 머무르면 아무것도 나타내지 않더라도 그것은 바로 예배가 된다.

이 어록의 앞부분에서 그는 선과 악을 모두 초월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제 예배는 선한 것이 되었다.

외부 세계로 감정을 표출하는 것 대신에 내면으로 향한 수행에 실패한 사람은 자신을 쓸모 없는 인간으로 만드는 무지와 증오와 악에서 결코 헤어나지 못한다. 그들은 위엄 있는 태도와 성현 앞에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음으로써 남을 속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생사의 바퀴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여러 가지 장점을 갖추고 있더라도 말이다.

정말 이상한 어록이다. 그들은 진짜로 깊이 빠졌다. '무명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그들은 예리한 검으로 모든 잘못된 생각들을 잘라내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스승처럼 단호하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들은 군중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일어나는 모든 질문에 그럴싸한 대답을 해야 했다. 그러나 그 대답들은 본래의 질문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만약 이 말이 달마의 제자들 같은 사람들에게서 나온 말이 아니라면…… 그대는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그대가 어떤 종교, 어떤 교리, 어떤 경전에도 속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대의 모든 행동, 모든 말이 진리가 되기 위해서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말이다. 그대의 말과 생각은 그 어떤 것을 위해서라도 분열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다면 그대는 서약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서약 때문에 사람들은 그대가 제정신이 아니거나 망령이 든 것으로 느낄 것이다.
달마는 그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솟아난 깨달음을 잃지 않았다. 깨달음은 잃어버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규약 때문에 그 길을 어지럽혀 놓았다. 스승의 깨달음은 더없이 맑고 밝은 것이었다. 그러나 제자들은 조직화된 종교 사업이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그것을 망쳐 놓았다.
인간은 조직화된 종교가 사라지지 않는 한 결코 종교적으로 될 수 없다. 만약 모든 개인이 존재계를 향한다면 거기에는 어떤 서약이나 맹세도 필요 없게 된다.
내 말을 귀담아 들으라. 종교는 혁명이다. 종교적인 인간은 진정한 혁명가이다. 그는 모든 정통과 전통, 모든 조직과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반항한다. 그가 유일하게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진리뿐이다. 그리고 오직 그런 사람만이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무명 속에서, 꿈속에서, 깊은 잠 속에서 방황할 것이다 .그리고 고통받을 것이다.

알겠는가?


출처 : 세존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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