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2009.08.12 14:04

[달마의 안심론 安心論]

조회 수 6741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20. 눈 깜짝할 사이보다 더 빠르게 보라[달마의 안심론 安心論]
 

                                     조셉 아르파이아·롭상 랍가이 저, 서보경 역
 

 
 

달마어록 안심론 安心論

"그러나 욕장경(浴場經)에는 '승려들을 목욕시키는 공덕은 무한한 축복을 받으리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말은 외부적인 덕행이 깨닫는 데 보탬이 된다는 예가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마음을 지켜보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승려들의 목욕이란 말은 육체를 씻는다는 뜻이 아니다. 부처가 욕장경을 설법할 때 그는 제자들이 다르마를 갈고 닦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매일 진리의 참뜻을 찾는 행위를 목욕에 비유해서 말한 것이다.
욕장이란 육체를 말한다. 그대는 지혜의 불을 때고 올바른 견해의 물을 데워서 그대 속에 있는 참된 불성을 깨끗이 닦아라. 그리고 일곱 가지 수행들을 잘 지킴으로 해서 그대는 덕을 쌓을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의 승려들은 밝은 통찰력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부처의 참뜻을 이해했다. 그들은 부처의 가르침을 따랐고 그들의 덕을 완성했으며 불성의 열매를 맛보았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그 경지를 헤아리지 못한다.
우리의 참된 불성은 모양이 없다. 그리고 집착의 때에도 모양이 없다. 그러니 어떻게 사람들은 평범한 물로 보이지 않는 몸을 씻을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다. 언제 그것을 깨달을 수 있겠는가? 그 몸을 씻기 위해서는 그대가 그것을 지켜보아야 한다. 한번 욕망으로부터 더러움과 오물이 일어나면 그것들이 그대의 안과 밖을 모두 덮어버릴 때까지 계속 생겨난다. 그러나 만일 그대가 이 몸을 깨끗이 씻고자 한다면 그대의 육체를 닳아 없어질 때까지 문질러도 안 된다. 그러니 그대는 욕장경에서 부처가 한 말이 어떤 외부적인 것을 닦음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경전에는 사람이 전심으로 부처를 부르면 그가 죽은 뒤에 서방정토에 태어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문이 불성으로 들어가는 문일진대 왜 마음을 지켜봄으로써 해탈을 구하고자 합니까?"
부처는 깨어 있음을 말했다. 몸과 마음이 깨어 있을 때 거기에서 어떤 악도 일어날 수가 없다. 부처를 부르는 것이란 그대의 마음을 부르며, 그 마음으로 하여금 수행의 법칙을 따르고 그것을 계속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부처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는 그대는 다르마를 이해해야 한다. 그대의 마음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대의 입은 공허한 이름만 부르는 것이다. 그대가 아집과 삼독심으로 고통을 받는 한 그대의 더럽혀진 마음은 그대로 하여금 부처를 볼 수 없게 할 것이다. 만약 그대가 모양에 집착한다면 그 의미를 찾더라도 그대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과거의 성현들은 말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살피는 수행을 했다.
이 마음은 모든 덕의 근원이다. 또한 이 마음은 모든 힘의 으뜸이다. 열반의 영원한 축복이 마음이 쉬는데서 나온다. 삼계에 태어나는 윤회도 이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마음은 모든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다. 또한 마음은 피안에 닿아 있는 여울이다. 문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자는 그것에 어떻게 이를까를 걱정하지 않는다. 여울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자는 건너가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요사이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매우 피상적이다. 그들은 모양을 갖춘 것을 장점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재산을 함부로 탕진하며 수륙의 생물들을 살생한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사물에 즉시 집착한다. 만일 그대가 모양 없음에 대해서 그들에게 말한다면 그들은 귀머거리가 되어 넋을 잃고 앉아 있다. 현세의 작은 행복을 탐하느라 그들은 곧 커다란 고통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한다. 그들은 헛된 수행을 하고 있다. 진리를 외면하고 거짓을 좋아한다. 그들은 미래의 축복만 이야기한다.
만약 그대가 마음속에 있는 내면의 빛에 그저 집중해서 그 빛을 지켜볼 수만 있다면, 그대는 세 가지 독과 여섯 도둑을 한번에 몰아낼 수 있다. 그러면 수고로움 없이 그대는 무수한 덕을 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진리에 이르는 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 세속적인 것을 통해서 숭고함을 지켜보는 것은 눈 깜짝 할 사이보다 더 짧다. 깨달음은 바로 지금 일어난다. 왜 백발을 걱정하고 있는가? 그러나 진리의 문은 감추어져 있고 드러나지 않는다. 나는 오직 마음을 지켜봄으로써 그 문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보다 더 빠르게 보라

이 어록이 달마 선어록의 마지막 부분임을 부처에게 감사 드린다 .나는 그들이 달마를 목욕탕으로 집어 넣는 줄 알고 매우 걱정했다. 이제 이것은 산봉우리에서 그대의 집까지 돌아오는 대단한 여행이었다. 달마는 그대를 데리고 즐겁게 돌아다녔다.
나는 보리달마란 말과 함께 시작했다. 보리달마란 달마의 인도식 이름이다. 그 뜻은 '자기 본성의 깨달음'이란 뜻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는 부두다르마(Buddhudharma)란 이름과 함께 여행을 끝마쳐야 한다. 부두다르마란 '자기 본성에 대해 무지함'이란 뜻이다.
그의 제자들은 달마에 대한 인상을 혼란 속으로 던져 넣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엄청난 통찰력을 가져다 주었다. 그것을 지켜봄으로써 우리는 같은 실수를 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기록한 어록의 앞부분은, 인간의 가장 깊은 잠재력에 대한 달마의 예리한 통찰력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이 적어 놓은 어록의 마지막 장은 절대적으로 엉터리이다. 아마 그들은 대승불교의 교리에 너무 집착한 것 같다. 그들은 새롭게 입문한 불교도들을 혼란스럽게 하지 않으려고 무척 조심한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은 무척 고심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알 수 있다. 나는 그들의 고충을 이해한다. 그들의 고충은 혁명가인 스승이 한 말과 다른 글을 기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겪는 것이며, 그것은 어떤 교리나 경전을 받아들인 사람에게 항상 일어나는 문제이다. 그들은 끊임없는 갈등 속에 있다. 그들은 내면의 목소리와 전통에서 나오는 말 모두를 듣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반대를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극소수뿐이다. 만약 달마의 본뜻이 과감하게 기록되어졌다면, 아마도 불교도들은 그에게 어떤 경의도 표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잃어버릴 것이 아무것도 없다. 내게 있어서 그는 어떤 누구보다도 더 위대하다. 자신이 경험한 진리를 계산하지 않고 과감하게 말하는 것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다.
그대는 욕장경이란 말을 들을 때 웃음이 나올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는 인도에서 힌두교에 대항하는 두 개의 혁명적인 종교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불교와 자이나교이다. 자이나교 승려들은 결코 목욕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빨도 닦지 않는다. 그들은 목욕을 해봐야 곧 다시 더러워질 것이며,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불교는 자이나교와 여러 가지 면에서 비슷한 점이 많았다. 그들은 본질에 있어서 여러 가지 문제에 동의한다. 그러나 부처는 마하비라보다 좀더 예민한 것 같다. 그는 자기 승려들이 매일 목욕을 해서 항상 청결을 유지하도록 했다. 그리고 몸은 신성한 사원으로서 존중되어져야 하며 학대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부처는 항상 많은 승려들과 함께 살았다. 그는 자기의 승려들에게 옷과 먹을 것을 주었고 아플 때는 약도 주었다. 그리고 특히 목욕탕 시설도 해 주었다. 물론 그런 것은 점점 사회에 짐이 되었다.
몇 년 전 태국에서는 전 인구의 4분의 1이 승려가 된 적이 있었다. 할수 없이 태국 정부는 승려가 되려면 먼저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선언했다. 정부의 허가 없이는 승려가 될 수 없었다.
이것은 인류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하지만 가난한 나라로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제도이다. 네 명 가운데 한 명은 일도 하지 않고 어떤 생산적인 행위도 하지 않는다. 나머지 세 명은 큰 부담을 느낀다.
국민의 과반수 이상이 굶주린 상황에서 그것은 추한 일이다. 국민의 반수 이상이 하루에 한 끼밖에 먹지 못했다. 그들은 나무 뿌리를 삶아 먹으면서도 그 나무가 살아 주기를 원해야 할 형편이었다. 나무가 죽지 않아야 꽃과 열매를 계속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는 사소한 일상 생활까지 일일이 말을 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마음대로 행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는 자신의 제자들이 안과 밖으로 깨끗하며 항상 깨어 있기를 원했다. 그의 관심과 자비심은 너무 커서 불교 승려들에게 3만 3천 가지에 달하는 생활 지침을 말할 정도였다. 그것은 다 기억하기도 힘들다.
그러나 부처는 매일 세세한 것까지 신경을 썼다.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는 법과 음식을 구걸하는 법, 한 집에서만 음식을 전부 받지 말고 다섯 집에서 골고루 조금씩만 받을 것 등을 말이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의 부담은 적어진다. 그리고 한 마을에서 사흘 이상 머물지 말아야 했다. 더 이상 머무르면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승려들은 하루에 한 끼만 먹어야 했다. 가난으로 수백만 명이 하루에 한끼만 먹는데, 구걸하는 주제에 어떻게 세 끼를 모두 먹겠는가?
옷도 세 가지 이상 지녀서는 안 되었다. 이 세세한 것들이 그대가 보기에는 매우 사소한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가난한 사회에서 한 사람이 일을 그만두고 출가를 하면 그것은 사회에 큰 짐이 된다.
그래서 부처는 승려에게 목욕탕을 빌려 주는 것은 큰 덕행이라고 말해야 했다. 사람들이 그것을 부담으로 느끼지 않고 기쁨으로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대가 한 사람의 승려에게 음식을 제공할 때, 그는 그대에게 어떤 빚도 지는 것이 아니다. 부처는 그렇게 말했다. 오히려 그대가 그를 보살필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가 그대의 음식을 받는 순간 그대는 좋은 일을 했다. 그대의 몫을 그에게 나눠주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대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사람을 존경하기 때문이다.
부처는 이 세상을 포기하고 출가하는 아기를 낳은 여인은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의 아이가 출가하도록 가르친 아버지 역시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자신의 궁극적인 잠재성을 계발하기 위해 세상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들을 도와 주라. 만약 그대가 자신의 잠재성을 계발할 수 없다면, 적어도 그대는 다른 사람이 그것을 계발할 수 있도록 도와 주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경전이 사소하든 안 하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질문을 받았을 때 약간 당황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이 하나의 형이상학적인 비유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의 해설은 허구이다. 그 경전은 실제적인 삶을 말한 것이었다.

"그러나 욕장경(浴場經)에는 '승려들을 목욕시키는 공덕은 무한한 축복을 받으리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말은 외부적인 덕행이 깨닫는 데 보탬이 된다는 예가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마음을 지켜보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구도자들은 달마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묻고 있다.
"달마는 마음을 지켜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당신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는 매우 사소한 것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말과 이런 사소한 것들이 어떻게 어울릴 수 있습니까?"
이런 질문에는 매우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다.
"달마는 본질적인 것만을 말하고 있지만, 부처는 본질적인 것과 사소한 것들을 모두 말하고 있다. 그는 승려가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에 관심이 많다. 승려는 자신의 마음을 지켜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본질적인 수행이다. 그러나 또한 그 승려는 밥도 먹어야 하고, 비가 오면 비를 피할 집도 있어야 하며, 옷도 입어야 한다."
부처는 매우 이해심이 많았다. 한 사람만 승려가 되는 것은 아니다. 수백만 명이 승려가 되었을 때 그들은 삶을 살아가는 일정한 규칙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사회 전체가 혼란에 빠질 것이다.
승려는 자신이 무엇을 먹고 싶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무엇이든지 주는 대로만 먹어야 한다. 그는 이것저것 가려서는 안 된다. 그리고 내일 또 올 것이라고 말도 해서는 안 된다. 만약 그렇게 말한다면 사람들은 그를 위해 값비싼 음식을 준비하게 된다. 그것은 불필요한 짐이다. 그리고 승려는 기생충이 된다.
이 모든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 부처는 사소한 것까지 말해야 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마 당시에도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자신의 집에 목욕탕이 있었던 것 같다. 지금도 대도시를 제외한 인도의 모든 마을에서는 90퍼센트가 넘는 사람들이 목욕탕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강이나 호수에 가서 목욕을 한다. 그것이 그들의 목욕탕이며 화장실이다.
침실에 목욕탕이 딸린 집을 인도에서는 대단히 사치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인도에서는 몇몇 사람만이 그런 생활을 할 수 있다. 이 나라는 매우 가난하다. 부자가 살았던 시절에도 어지간히 부자가 아니고서는 집에 목욕탕을 설치할 수 없었다.
백 년 전 미국 최고 법정에서 재판이 열렸다. 그것은 어떤 사람이 자신의 침실에 목욕탕을 설치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청교도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추악한 행위라고 생각된 것이다. 그 사람은 유럽에서 그것을 배웠고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욕조를 가지고 갔다. 그는 대단한 선물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굉장한 선물이었다.
그런데 일은 예상과는 달리 심각하게 전개되었다. 청교도주의자들은 그런 행위는 인간의 마음을 타락시키는 것이라고 말했고, 급기야 그를 최고 법정의 재판에 회부시켰다. 법정에서는 그에게 당장 침실의 욕조를 제거하라고 판결을 내었다. 그는 욕조는 집 뒤, 한쪽 구석 지저분한 곳에 설치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부처가 살아 있을 때에도 부자들은 집안에 목욕탕을 만들었다. 하라파(Harappa)나 모헨조다로(Mohenjodaro) 같은 유적에서 보면 집안에 목욕탕이 있었고, 그것은 믿기 힘든 사실이었다. 그것은 거의 7,000년 전의 일이다. 그리고 자연의 재난인지 문명의 재해인지는 몰라도 엄청난 재난이 그 아름다운 도시를 파괴했다. 그것도 일곱 번씩이나 말이다. 당시 사람들은 그것이 무슨 종류의 재난인지 알 수가 없었다. 도시는 완전히 진흙으로 뒤덮여졌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다시 그 위에 도시를 재건했지만 또다시 진흙에 묻혀 버렸다. 그러기를 일곱 번씩 반복하다가 결국 모두 멸망해 버리고 말았다.
발굴단은 그 유적을 조사했다. 처음에 얇은 진흙층을 걷어내자 도시가 나왔다. 그런데 누군가가 계속 깊이 파 보았다. 그러자 그 진흙층 밑에서 또 다른 도시가 나왔다. 그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일곱 번을 파 들어가서야 더 이상 도시가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그 도시의 길은 샌프란시스코나 뉴욕만큼 넓은 도시였다. 거대한 교통 수단이 없고서야 그만큼 넓은 도로가 필요 없었을 것이다.
바라나시(Varanasi)는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옛 바라나시의 거리는 소형차도 지나다닐 수 없을 만큼 길이 좁다. 따라서 하라파나 모헨조다로는 위대한 문명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내가 기억하기로 그 두 도시는 침실에 목욕탕이 갖추어져 있었고, 그 크기도 작은 수영장만 했다. 그리고 집집마다 온수와 냉수가 흘러가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그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것들은 지금과 같은 문명 사회였음이 틀림없다. 아마 더 발전된 것이리라. 왜냐하면 19세기 말에 미국에서는 집 안에 목욕 시설을 마련한 사람이 범죄 행위로 지적될 정도였으니 말이다.
어쨌든 부처가 한 말은 비유가 아니다. 그래서 구도자들은 이렇게 물을 권리를 절대적으로 갖고 있다.
"이것은 외부적인 덕행이 장점을 갖고 있음을 보여 주는 증거가 아닙니까? 단지 목욕탕을 빌려 주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은 축복을 받는다고 부처는 말했습니다. 그 사람은 다른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승려에게 목욕탕을 빌려 준 것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달마의 제자들은 이렇게 적어 놓았다.
"그럴 필요도 없고, 가능성도 없다. 외부적인 덕행을 통해서는 깨닫는데 아무런 장점도 얻을 수가 없다. 오직 마음을 지켜보는 방법밖에 없다."
그들은 이처럼 간단하게 말할 수 있었다.
"이것만이 사람들이 깨달을 수 있는 길이 된다. 그렇지 않다면 왜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목욕탕을 빌려 주어야 하는가?"
사실 모르는 사람에게 자신의 목욕탕을 사용하는 것은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공중 목욕탕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개인용 목욕탕을 갖고 싶어한다. 부자들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들은 더러운 옷을 걸친 승려들이 자신의 목욕탕을 쓰는 것을 분명히 싫어했을 것이다. 승려들은 신발도 신지 않은 더러운 발로 욕조와 바닥을 온통 더럽힐 것이다. 부자들은 이런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당시의 부자들은 목욕물도 보통의 물을 사용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장미 향내가 나는 물이었다. 한쪽에서는 굶어 죽고 있고, 한쪽에서는 욕조에서 사치스러운 목욕을 하고 있다. 수천 송이의 장미꽃이 그들의 목욕물을 위해서 꺾어졌다. 이 사람들의 눈에는 거지나 승려나 방랑자나 모두 똑같이 보인다. 단지 승려들에게 목욕탕을 빌려 주면 이 세상에서 한량없는 축복을 받는다고 들었기 때문에 억지로 그들은 목욕탕을 제공할 것이다. 부처는 사업적인 의미에서 그렇게 말했고 그의 말은 완전히 들어맞았다. 그러나 달마를 추종하는 제자들은 이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들은 이렇게 기록했다.

승려들의 목욕이란 말은 육체를 씻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대는 어떻게 보이지 않는 것을 씻을 수 있단 말인가? 보이지 않는 것은 만져질 수도 없다. 오직 만져지는 것만이 씻을 수 있다. 그대의 몸은 물로 씻을 수 있지만, 영혼은 씻을 수 없다. 그대의 옷은 세탁할 수 있지만, 존재는 세탁할 수 없다.
부처는 마하비라에 비하면 매우 관용적인 사람이다. 마하비라는 정말로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그는 완전히 무사와 같은 성격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석가모니 부처가 연꽃으로 비유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연꽃은 다른 어떤 것보다 아름답고 연약하며 우아하다. 그는 자신의 승려들에게 음식과 약을 구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목욕도 시켜 주었다. 그것은 매우 실용적인 사상이었다.

부처가 욕장경을 설법할 때 그는 제자들이 다르마를 갈고 닦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매일 진리의 참뜻을 찾는 행위를 목욕에 비유해서 말한 것이다.

이 말은 난센스에 불과하다. 그들은 처음에 부처는 어떤 난센스도 가르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말은 그들의 처음 말과 완전히 모순된다. 그들은 점점 곤란한 지경에 빠져들었다.

욕장이란 육체를 말한다. 그대는 지혜의 불을 때고 올바른 견해의 물을 데워서 그대 속에 있는 참된 불성을 깨끗이 닦아라.

부처가 욕장경 같은 경전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부처도 말하자면 불성경(佛性經) 같은 경전을 말할 수 있다. 부처가 달마보다 덜 지성적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대는 부처가 자신의 생각을 달마보다 덜 정확하게 말한다고 생각하는가? 부처는 승려들의 실제 생활에 대해 가르치기 위해서 욕장경을 설법했다.

그리고 일곱 가지 수행들을 잘 지킴으로 해서 그대는 덕을 쌓을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의 승려들은 밝은 통찰력을 갖고 있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왜 부처는 그 뛰어난 제자들에게 욕장경이라고 말했겠는가? 그 경전은 불성경이나 다른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해졌어야 한다. 왜 목욕탕경이라는 이름을 갖다 붙였겠는가? 그렇다면 왜 부처는 진리를 바로 말하지 않고 목욕탕경과 같은 이상한 비유를 통해서밖에 말할 수 없었단 말인가?

그들은 부처의 참뜻을 이해했다.

그렇다면 부처는 뭣하러 비유를 통해서 말했겠는가?

그들은 부처의 가르침을 따랐고 그들의 덕을 완성했으며 불성의 열매를 맛보았다.

부처의 제자들이 불성을 경험했다면 뭣하러 굳이 비유를 사용해서 말할 필요가 있는가? 부처도 직접적으로 말할 수 있다. 비유는 오직 어린 아이들에게만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달마의 제자들은 부처가 사업적인 말을 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의 제자들은 부처가 그런 사소한 말을 했을 것이라고는 믿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그 경지를 헤아리지 못한다.

욕장경은 달마 당시에 쓰여진 경전이 아니다. 그 경전은 적어도 달마가 태어나기 천백 년 전에 부처가 한 말이다. 욕탕경이 하나의 비유라면 부처는 달마의 제자들을 겨냥해서 이 말을 했단 말인가? 그대가 반드시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옛날 사람들이 현대인보다 더 지혜로운가 하는 생각에 대한 것이다. 그들이 현대인보다 더 예민하고 더 지성적이었는가?
바빌론의 한 석판에 이런 글귀가 씌어져 있다.
"옛날 사람들은 매우 지혜롭다."
그 석판은 지금부터 6천 년 전의 것이었다. 부처나 마하비라도 당시에 옛날 사람들이 훨씬 지혜롭다는 말을 여러 번 되풀이했다. 그리고 나는 그때가 언제인지 모른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경전인 《베다》에도 이 말은 나와 있다. 네 가지 《베다》중에 첫 번째인 《리그 베다(Rig Veda)》는 9만 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리그 베다》조차도 같은 말이 나와 있다. '고대의 사람들은 매우 지적이고 통찰력이 뛰어났다.'라고 말이다. 나는 그 옛날이 언제를 가리키는지 모른다. 그것은 단지 현재의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들은 앞으로 계속될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의식은 진화하는 것인가 퇴보하는 것인가? 이 말들에 따르면 퇴보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그대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볼 수 있다. 원시적인 사람들일수록 원시적인 수행을 하고 있다. 카니발이 바로 그것이다. 아프리카 오지에 남아 있는 몇 개의 카니발은 아직도 원시적인 모습을 갖고 있다. 그들은 고대인에 가깝다.
그대가 고대인들을 보려면 아프리카로 가 보라. 초기의 몇몇 기독교 선교사들이 그 카니발에 참석한 사람들을 개종시키기 위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신은 당신들을 사랑합니다. 예수는 당신들을 구원할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선교사가 하는 설교를 매우 즐겼다. 그리고 어깻짓으로 선교사의 말을 받아들인다고 표현했다. 그리고는 선교사들을 솥에 집어 넣고는 불을 때기 시작했다. 선교사들이 말했다.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죠?"
그들이 말했다.
"몇 분 있으면 곧 알게 될 거요."
물이 끓기 시작하자 선교사들은 이 사람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기독교의 복음을 맛보게 해주려고 여기에 왔는데 지금 당신들은 나를 죽이고 있습니다."
그들이 말했다.
"걱정하지 말라. 우리는 국을 끓이고 있다. 그러면 처음으로 우리는 기독교의 맛을 볼 것이다. 그래서 당신들을 끓이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를 맛보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고 나 역시 생각한다. 이들은 가장 원시적인 사람들이다. 그들은 금세기 초까지 3천 명의 숫자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이 사는 지역으로 들어가는 길을 발견한 사람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서로 잡아먹을 수밖에 없었다. 금세기 초에 그들은 3천 명이었지만 이제 3백 명밖에 되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들을 서로 잡아먹었다. 2천 7백 명을 말이다. 매일 식량은 필요했고 어쩔 수가 없었다. 간혹 외부에서 사람들이 들어오면 그 날은 축제가 벌어졌다. 그들은 중국 사람도 맛보았고, 일본 사람도 맛보았으며, 독일인과 인도인도 맛보았다.
그대는 그들이 얼마나 무지하며 야만스러운지 이제 알 수 있다. 옛날 사람일수록 지적이라는 말은 완전히 틀린 말이다. 그것은 어떤 역사적 근거도, 논리적 근거도 없는 말이다. 그대야말로 지금까지 인류 역사상 가장 지혜롭고 지적인 의식을 갖고 있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그대는 아직 계발되지 않은 엄청난 부분의 잠재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 원시인들은 그대보다 훨씬 계발이 덜 되었다. 그대는 적어도 약간의 의식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거의 무의식적이다. 훨씬 동물에 더 가깝다.

우리의 참된 불성은 모양이 없다. 그리고 집착의 때에도 모양이 없다. 그러니 어떻게 사람들은 평범한 물로 보이지 않는 몸을 씻을 수 있겠는가?

그들은 어리석은 말을 계속하고 있다. 앞장에서 그들은 '부처는 보통 우유를 마실 수 없다.'고 말했다. 이제 그들은 사람들이 보통 물도 사용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마치 어디엔가 특별한 물이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몸을 씻을 수 있겠는가?

보이지 않는 것은 씻을 필요가 없다. 오직 보이는 것만이 더러워질 수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은, 허공은 더러워지지 않는다. 마음을 초월한 침묵은 결코 때가 묻지 않는다. 만약 억지로 우겨서 그것이 더러워졌다손 치더라도 우리는 보이지 않는 비누를 찾아야 한다. 보이지 않는 샴푸가 들어 있은 병은 빈 병처럼 보일 것이다.
뉴욕의 한 가게에서 어떤 상품을 팔고 있었다. 뉴욕의 모든 여자들은 대단히 흥분했고 모두들 그것을 사고 싶어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머리 핀이었다. 그것을 사려고 상점 앞에서 여자들은 줄을 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보이지 않는 머리 핀을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여자는 한 사람도 없다고 생각한다. 한 여자가 그 상품을 사서 상자를 열어 보았다. 그 안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머리핀을 어떻게 볼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녀는 점원에게 다가가 물었다.
"나는 아무것도 볼 수 없어요."
점원이 말했다.
"보이지 않는 머리핀을 어떻게 볼 수 있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렇군요. 내 딸애와 친구들에게도 선물하러 내일 또 오겠어요. 이건 분명히 참신한 상품이에요. 내일 와도 물건은 있겠지요? 왜냐하면 가게 앞에는 여자들이 수백 명 줄을 서 있어요. 나도 한 시간이나 줄을 서서 산 걸요."
달마의 제자들은 절대적으로 비논리적인 말을 하고 있다. 그것은 도저히 상식적으로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럴 수 없다. 언제 그것을 깨달을 수 있겠는가? 그 몸을 씻기 위해서는 그대가 그것을 지켜보아야 한다. 한번 욕망으로부터 더러움과 오물이 일어나면 그것들이 그대의 안과 밖을 모두 덮어버릴 때까지 계속 생겨난다. 그러나 만일 그대가 이 몸을 깨끗이 씻고자 한다면 그대의 육체를 닳아 없어질 때까지 문질러도 안 된다.

그들은 지금 그대가 보이는 이 육체를 씻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만약 그대가 그것을 깨끗하게 하려면 몸이 다 닳아서 없어질 때까지 문질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그대는 깨끗해질 것이다. 그것은 그대가 몸을 씻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그것은 쓸데없는 짓이다. 그것은 자살행위이다.
그러나 그대는 몸이 사라지는 점에 이를 때까지 그것을 문지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대는 단지 때와 먼지만 벗겨내면 된다. 그때까지만 몸을 문지르면 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대 곁에 가도 악취가 안 날 정도만 씻으면 되는 것이다. 몸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문지를 필요는 없다. 그것은 깨끗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달마의 제자들은 지금 그대에게 부처가 욕장경에서 한 말은 육체가 아니라 영혼에 대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달마가 '영혼은 항상 깨끗한 것이어서 더러워질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 것을 자신들이 앞에서 기록했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불성은 항상 순수하다.'라고, '불성은 결코 더럽혀질 수 없다.'라고 그들은 앞에서 이미 기록했다. '그대는 이미 깨달았으며 단지 잠을 자고 있을 뿐이다.'라고 기록했다. 그것은 '씻는 문제가 아니라 단지 그대의 마음을 지켜보는 문제이다.'라고 기록했다. '마음을 지켜보면 점점 그대는 깨어나게 된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완전히 깨어나는 순간 그것이 곧 깨달음이다.'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그들은 자신들이 기록한 내용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그들은 엉뚱한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그것은 무명이 어디에서 나오는가에 대한 질문이 시작되고 나서부터였다. 사람은 어디서 멈추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함정에 빠질 것이다. 이제 그들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고 어디서 어떻게 멈추어야 하는지 모르고 있다.

그러니 그대는 욕장경에서 부처가 한 말이 어떤 외부적인 것을 닦음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외부적인 것만 닦는 것이 필요하다. 내면적인 것을 닦을 필요도 없고 닦을 수도 없다. 내면은 더럽혀지지도 않는다.
그들에게 입문하려고 찾아온 구도자들은 또 물었다.

"경전에는 사람이 진심으로 부처를 부르면 그가 죽은 뒤에 서방정토에 태어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문이 불성으로 들어가는 문일진대 왜 마음을 지켜봄으로써 해탈을 구하고자 합니까?"

달마가 마음을 지켜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강조했기 때문에 구도자들은 그러면 왜 부처는 다른 것들에 대해서 말했는지 계속 의문이 일어난다. 그리고 달마의 제자들은 그의 스승에 대해서 틀렸다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사실 부처가 틀린 말을 한 것이 아니다. 틀린 것은 대승불교에 집착한 사람들이 자신의 견해를 경전에 옮겨 놓고는 그것이 부처가 한 말이라고 한 점이다. 하지만 달마의 중국계 제자들은 그렇게 말할 용기가 없었다.
"그런 것은 나의 일이 아니다. 나의 이해와 깨달음은 단지 마음을 지켜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아마 부처의 이 말들은 그의 제자들이 써 넣은 것이니라. 하지만 나는 내 경험만을 말할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들이 달마를 이처럼 간단하게 표현했다면 그런 어려움에 떨어지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구도자들의 질문은 계속되고 있고 그들은 무의미한 대답을 하고 있다.

부처는 깨어 있음을 말했다. 몸과 마음이 깨어 있을 때 거기에서 어떤 악도 일어날 수가 없다. 부처를 부르는 것이란 그대의 마음을 부르며……

그들은 달마의 이 말을 앞에서 여러 번 반복해서 기록했다. 만약 부처를 부르는 것이 마음을 부르는 것과 같은 말이라면 왜 부처는 '마음을 부르는 것'이라고 바로 말하지 않았는가? 부처는 복잡하게 말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철학자가 아니다. 그는 깨달은 사람이다. 그는 가장 간단하고 가장 명확한 방법으로만 말한다. 그는 사람들의 마음에 혼란을 불러일으킬 비유 같은 것은 사용하지 않는다. 그의 모든 노력은 그대의 마음을 평정시켜서 쉽게 그것을 넘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 무심으로 하여금 수행의 법칙을 따르고 그것을 계속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달마는 그대가 깨달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수행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앞에서 누차 말했다. 거기에는 어떤 법칙도 필요 없다. 오직 그대의 생각이 일어나는 과정, 즉 그대의 마음을 지켜보는 것만이 그대를 도와줄 수 있다.

부처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는 그대는 다르마를 이해해야 한다. 그대의 마음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대의 입은 공허한 이름만 부르는 것이다. 그대가 아집과 삼독심으로 고통을 받는 한 그대의 더럽혀진 마음은 그대로 하여금 부처를 볼 수 없게 할 것이다. 만약 그대가 모양에 집착한다면 그 의미를 찾더라도 그대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과거의 성현들은 말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살피는 수행을 했다.

이 말들은 절대적으로 부적합한 말들이다. 말은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다. 생각을 제쳐 두고 무슨 내면을 살펴본단 말인가? 그대의 생각을 표현한 것이 말이 아닌가? 말과 생각은 다른 것이 아니다. 먼저 그대는 내면을 살핀다. 그리고 생각한다. 그 다음에 말로 그것을 끄집어낸다. 그대는 '라마'라는 단어를 말하지 않고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고 나서 그대는 그것을 '라마'라고 말할 수 있다. 거기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차이가 있다면 생각은 먼저 그대 자신에게 말한 것이다.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생각이며 남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말이다. 그래서 생각은 하나의 독백이다. 모든 사람들이 항상 그것을 하고 있다. 그것은 성현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죄인들도 그것을 할 수밖에 없다.
그대가 하루 종일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생각이다. 생각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다. 앉고 눕고 걷고 움직이는 가운데 그대는 수천 가지 생각을 계속한다. 과거의 성현들은 생각만 살펴보고 말은 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사실 말이 안 된다. 만약 성현들이 말하지 않았다면 그대가 볼 수 있는 경전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베다》는? 《우파니샤드》는 어디서 나왔는가? 부처의 《법구경》은 어디서 나왔는가? 그리고 그들의 스승인 달마의 말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그들은 지금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대로 한다면 그대가 볼 수 있는 모든 경전들은 성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중생들로부터 나온 것이다. 성현은 자신을 아는 사람이며 자신의 내면적 경험에만 맞추어서 말했다. 만약 그가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를 찾지 못하면 그는 묵묵히 있을 뿐이다. 그는 언어를 초월하는 영역에 있다. 그래서 말하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어렵다. 만약 생각이 가능하다면 말도 역시 가능하다.
단지 지켜보라. 생각은 그대 안에서 말하고 있다. 그대는 말들을 사용하고 있다. 만약 그대가 입으로 말하지 않고 단어들을 사용할 수 있다면, 왜 말로 그 단어들을 표현할 수 없겠는가? 말할 수 없는 것은 생각도 되어질 수 없는 것이다. 말과 생각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이 마음은 모든 덕의 근원이다.

이제 나는 이 말이 순수한 난센스 그 자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스승인 달마도 앞에서 말했다. 이 마음은 넘어서야 하는 것이며, 이 마음은 그대의 속박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이 마음은 완전히 비워져야 한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서 그대는 무심을 얻어야 한다고 말했다.
무심은 모든 덕의 근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은 아니다. 만약 마음이 모든 덕의 근원이라면 무심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무심의 목적이 무엇인가? 모든 덕은 모든 덕 속에 있다. 그때는 오직 죄만 남는다. 그러면 무심은 모든 죄의 근원이란 말인가? 명상은 그대 속에서 죄를 만들기 위한 것인가? 제자들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다. 한번 그대가 흔들리기 시작하면, 한번 꾸며대기 시작하면 다시는 균형을 잡을 수가 없다.

이 마음은 모든 덕의 근원이다. 또한 이 마음은 모든 힘의 으뜸이다.

그러면 불성과 그 힘은 어떻게 되는가?

열반의 영원한 축복이 마음이 쉬는 데서 나온다.

여기서 그들의 말은 조금 스승의 가르침에 가까워졌다. 그러나 정확하지는 않다.
마음이 쉴 때 그것은 고요해진다.
열반은 마음이 죽을 때 일어난다. 그것은 단지 쉬어서 될 문제가 아니다. 마음이 쉬는 것은 어느 순간 다시 활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은 완전히 죽어야 한다. 그래야 그대는 절대적인 평화를 얻을 수 있다. 골칫덩어리가 완전히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골칫덩어리가 쉬고 있을 때는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더 많은 에너지를 충전해서 다시 활동을 시작할 것이다. 그러면 더 큰 문제가 생겨난다. 그러면 그 사람은 지치게 된다. 사실 모든 사람이 지쳐 있다.
계속 칭얼대는 아이를 가진 한 친구가 있었다. 나는 그와 한 집에서 산 적이 있다. 그 친구 부부는 완전히 지쳐 버렸다. 하지만 그 아이는 외동아들이었고, 그들은 그 아이를 너무 사랑했다. 그 집에서 나만 유독 아이 때문에 지치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루는 그들이 나에게 물어 보았다.
"왜 그 아이는 당신을 귀찮게 하지 못합니까?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내가 말했다.
"내가 그 아이를 귀찮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그 아이를 부르면, 그 아이는 절대 내 곁에 오지 않는다."
그들은 호기심을 가지면서 내게 물었다.
"어떻게 그 아이를 귀찮게 했나요? 그 아이는 잠시도 가만 있지 못하고, 계속 칭얼거리고, 물건을 깨뜨리고, 소파에서 탁자로 마구 뛰어다닙니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는 아이입니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그가 어떻게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는지 보여 주겠다."
그리고는 그 아이에게 나는 다가갔다. 그러자 아이는 내게 말했다.
"나는 가만히 앉아 있을 거야."
그 아이의 아버지가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당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다가가기만 했는데도 아이는 가만히 앉아 있겠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그 집에 사는 동안에 우리는 그 집을 반으로 나누어 내가 반을 사용하고, 그 가족이 나머지 반을 사용했다. 그리고 한번씩 그 아이가 내가 사용하는 쪽으로 오려고 하면 나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내가 사는 곳으로 오려면 너는 뭔가를 갖고 와야 한다."
그러면 그 아이는 다시 물었다.
"무엇을요?"
그때 나는 말했다.
"돈이 아니다. 네가 나에게 오려면 먼저 이 집을 일곱 바퀴 돌고 나서 올 수 있다. 그리고 정확히 일곱 바퀴를 돌아야 한다. 속여서는 안 된다."
그 집은 매우 큰 집이었다. 그래서 집을 일곱 바퀴를 돌면 어른도 지쳐 쓰러질 지경이었다. 그 아이는 일곱 바퀴를 모두 돌고 난 뒤에 나에게 오면 지쳐서 소파에 쓰러져 버린다. 그러면 나는 가서 "기분이 어때?"하고 묻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래도 아직 살아 있어요."
그러면 나는 내 일을 다시 시작하고 그는 소파에 누워서 쉰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는 말했다.
"그것 참 이상하군요. 우리는 아이가 당신이 자기를 괴롭혔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어요."
내가 말했다.
"나는 그 아이를 다루는 방식을 알아냈다. 그가 나를 만나러 오고 싶을 때마다 먼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것은 집 주위를 일곱 바퀴 도는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나서 나에게 오면 내게 아무것도 조르지 않는다. 아이는 지쳐서 쉬어야 한다. 그러다가 잠이 들고 나는 내 일을 한다."
마음이 쉬는 것은 믿을 수가 없다 마음은 그것이 더 이상 살아날 수 없는 점까지 완전히 이르러야 한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까지 말이다.


 

삼계에 태어나는 윤회도 이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마음은 모든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다. 또한 마음은 피안에 닿아 있는 여울이다.

이 말은 맞지 않다. 마음이 피안에 이르는 여울이라면 명상은 무엇하는 데 쓰는가? 모든 힘이 마음에 속해 있다. 그리고 말들이 마음에서 나온다. 그리고 영원한 축복이 마음이 쉬는 데서 나온다. 게다가 마음은 피안에 이르는 여울이기도 하다. 그러면 명상은 어디에 쓰여지는 것인가?
사실 마음은 피안에 닿는 여울이 아니다. 피안에 닿는 여울은 명상이다. 그리고 명상은 항상 무심을 의미한다. 마음이 완전히 소멸되었을 때 마음을 움직이는 에너지가 그대의 명상을 움직인다.

요사이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매우 피상적이다. 그들은 모양을 갖춘 것을 장점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재산을 함부로 탕진하며 수륙의 생물들을 살생한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사물에 즉시 집착한다. 만일 그대가 모양 없음에 대해서 그들에게 말한다면 그들은 귀머거리가 되어 넋을 잃고 앉아 있다. 현세의 작은 행복을 탐하느라 그들은 곧 커다란 고통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한다. 그들은 헛된 수행을 하고 있다. 진리를 외면하고 거짓을 좋아한다. 그들은 미래의 축복만 이야기한다.
만약 그대가 마음속에 있는 내면의 빛에 그저 집중해서 그 빛을 지켜볼 수만 있다면 그대는 세 가지 독과 여섯 도둑을 한번에 몰아낼 수 있다.

영어에는 드얀(dhyan)을 번역할 수 있는 단어가 없다고 앞에서 말했다. 그 비슷한 단어들이 세 개가 있긴 하지만 모두 조금씩 그 뜻이 다르다. 첫째로 집중(concentration)이란 말이 있다. 그것은 가장 단계가 낮은 말이다. 그것은 그대의 마음이 한 가지 생각이나 사물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과학에서 유용하게 쓰인다. 사실 집중이 없다면 과학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과학은 집중의 산물이다.
두 번째로 묵상(contemplation)이 있다. 그것은 집중보다 좀더 높은 단계이다. 묵상은 한 가지 생각이 아니라 한 가지 주제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생각의 흐름들은 같은 주제로 제한된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빛에 대해서 묵상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는 빛의 속도와 일곱 가지 색깔과 빛의 모든 생리에 대해서 생각을 계속한다. 그리고 빛에 대해서 이해하게 된다. 철학이 바로 이런 차원에서 나왔다. 과학이 집중에서 나왔다면 철학은 묵상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로 명상(meditation)이 있다. 그것은 가장 높은 단계이다. 그러나 드얀, 중국의 찬과 일본의 젠, 그리고 한국의 선과는 맞먹을 수가 없다.
드얀, 즉 선은 무심을 의미한다. 집중은 마음을 집중한다. 묵상도 마음이 묵상한다. 그리고 명상도 마음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선에 있어서는 마음이 사라진다. 선은 마음을 넘어선 침묵이다. 이 어록을 영어로 번역한 사람은 드얀을 집중의 뜻으로 번역했다.
언어에 매여 있는 사람은 그 점이 가장 어렵다. 하나의 말이 다른 언어로 번역될 때 본래의 뜻은 많이 감해진다. 그것이 깨달음에 관한 것일 때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문제는 깨달음을 얻은 사람에게는 어떤 사람의 번역서에 관해서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는 것에 있다. 그들은 자신의 책을 쓰는 것에도 관심이 없다. 그들은 침묵을 즐기며 엑스터시에 빠져 있다. 그들이 그것을 표현하고자 할 때에는 말을 사용할 뿐 글을 쓰지 않는다. 대화 속에서 생겨나는 말에는 생명력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의 가슴에서부터 나온다. 그것은 빛과 존재의 향기를 담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글로 표현되면 거기에서 생명력이 사라진다. 그래서 깨달은 사람은 어떤 글도 쓰지 않는 것이다.

만약 그대가 마음속에 있는 내면의 빛에 그저 집중해서 그 빛을 지켜볼 수만 있다면 그대는 세 가지 독과 여섯 도둑을 한번에 몰아낼 수 있다.

여기에서 집중이란 단어를 명상이란 단어로 바꾸는 것이 더 좋다. 그래야 본래의 의미에 더 가까워진다. 만약 그대가 무심의 상태에 이를 수 있다면 그때는 모든 것이 빛이 된다. 모든 것이 기쁨으로 변한다.

그러면 수고로움 없이 그대는 무수한 덕을 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진리에 이르는 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 세속적인 것을 통해서 숭고함을 지켜보는 것은 눈 깜짝할 사이보다 더 짧다. 깨달음은 바로 지금 일어난다. 왜 백발을 걱정하고 있는가? 그러나 진리의 문은 감추어져 있고 드러나지 않는다. 나는 오직 마음을 지켜봄으로써 그 문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결국 이 어록은 마지막에 가서야 그들의 스승인 달마의 본래 경지로 되돌아오고 있다. 이 문장에서 달마의 진수를 다시 볼 수 있다.

세속적인 것을 통해서 숭고함을 지켜보는 것은 눈 깜짝할 사이보다 더 짧다. 깨달음은 바로 지금 일어난다. 왜 백발을 걱정하고 있는가?

왜 내일을 걱정하며 늙음을 걱정하는가?

그러나 진리의 문은 감추어져 있고 드러나지 않는다.

이것이 처음 '무명이 어디에서 나옵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바른 답이다. 이 어록은 빙빙 돌아서 결국 궁극의 지점으로 돌아왔다. 이것이 바로 제자들을 가진 스승의 고충이다. 아니 특정한 종파에 속한 제자들의 한계이다. 그들은 스승의 말에 자신들의 생각을 개입시킨다. 그리고는 스승의 가르침이라고 말하며 그 책을 경전으로 만든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스승은 죽고 없다. 스승은 그 책이 완벽한 자신의 말이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다. 그는 이미 세상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에 신선하고 생명력이 있었던 가르침들이 후대에 가서 껍데기만 남는 종교가 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선불교는 그래도 훨씬 나은 편이다. 그것은 아직도 생명력을 담고 있는 지구상에서 유일한 종교이다. 그래서 그것은 미래의 종교가 될 것이다. 앞으로 과학과 철학과 종교가 완전히 한 점에서 만나게 되는 날에 지구상에 도래하면 그때 선(禪)은 유일한 종교가 될 것이다.

나는 오직 마음을 지켜봄으로써 그 문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만약 이 대답이 그때 바로 기록되었다면 달마의 어록은 완전히 순수한 황금처럼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나의 말을 통해서 그대는 진실을 알게 되었다. 어록의 어떤 부분이 가짜이고 어떤 부분이 진짜 달마의 생각이라는 점이 분명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대가 명상을 할 때 많은 도움을 주게 될 것이다. 그대는 명상 속에서 어떤 철학이나 형이상학적 비유에 연연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어떤 훈련 체계에 불필요한 수고를 쏟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나는 이 어록이 이처럼 양면을 모두 갖고 있는 것에 대해서 오히려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이제 그대는 양면을 모두 지켜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대가 깨어 있는데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깨달은 사람의 경전도 실수가 섞여 있음을 말이다. 그대는 깨달은 뒤에도 잘못할 수 있다. 깨달은 뒤에 단체를 만든다면 잘못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잘못이란 최선의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최선의 것이 아니면 참을 수가 없다. 그것이 나의 문제이다. 어떤 잡티도 섞이지 않은 오직 순수한 황금만을 나는 받아들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어떤 제자도 두지 않는다.
이번에 달마의 어록에 관해서 이야기한 것은 매우 좋은 일이었다. 나는 그대에게 깨달음의 경지에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계속 말해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그대는 많은 책을 읽었을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명확하게 지켜보라. 달마 어록조차도 정확하게 잘잘못을 가려내는 사람이 있었는지를 말이다. 그대가 달마의 어록을 가려낼 정도의 지성을 갖추고 있다면, 가톨릭의 교황이, 힌두교의 샹카라차랴가 문제가 아니다. 그대는 이 세상의 어떤 누구라도 그의 경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늙은 유태인이 죽어가고 있었다. 임종을 맞이해서 그는 계속 어떤 말을 중얼거렸다. 그래서 가족들은 그가 무슨 말은 하는지 듣기 위해서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신에게 기도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신이시여, 우리는 4천 년 동안 당신에게 선택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이제는 다른 민족을 당신의 선민으로 선택할 수 없겠습니까? 당신이 우리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토록 많은 고통을 받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죽어가는 한 늙은이의 말을 들어주소서. 이제 다른 사람들을 당신의 자녀로서 선택해서 우리의 무거운 짐을 벗게 해주소서. 우리는 충분히 고통을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완전히 끝장이 났습니다."
이제 그대의 교황을 보라. 그대의 샹카라차랴와 호메이니를 보라. 그대의 자이나 승려들과 불교 승려들을 보라. 그대는 이 사람들이 깨달은 존재가 아님을 알 때 놀랄 것이다. 이들의 말은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그들은 교육받은 대로 진리도 아닌 죽은 말들을 앵무새처럼 옮기고 있다. 그리고 그대는 계속 그 난센스 같은 말들에 세뇌되어 왔다.
이런 일은 수세기 동안 계속되어 왔다. 이제 그런 일은 멈춰져야 한다. 모든 사람이 명상을 함으로써 누가 궁극의 과녁에 도달했는지, 그리고 누가 단지 흉내만 내는지를 정확하게 가려낼 수 있는 지성을 얻어야 한다.
이 어록은 그대로 하여금 그런 훈련을 받을 수 있는 충분한 과정이 되었다. 깨어 있으라. 속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계속 사기를 당할 것이다. 어떤 사람이 근사한 말을 하더라도 그대는 우선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그의 모든 면을 지켜보라. 그의 말이 진정 그의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남에게서 들은 말을 그냥 읊조리는 것인지를 살펴보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의 마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드디어 진정한 스승을 발견했다."
그대의 마음에 대해서 깨어 있으라.
그대의 마음이야말로 가장 큰 적이다.

알겠는가?


출처 : 세존사이트  


TAG •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 기타 [달마의 안심론 安心論] 短長中庸 2009.08.12 6741
19 기타 [달마의 수행론 修行論] 短長中庸 2009.08.12 5020
18 기타 [달마의 육바라밀론 六波羅蜜論] 短長中庸 2009.08.12 5500
17 기타 [달마의 돈오론 頓悟論] 短長中庸 2009.08.12 4417
16 기타 [달마의 무명론 無明論] 短長中庸 2009.08.12 4265
15 기타 [달마의 혁파론 革破論] 短長中庸 2009.08.12 4337
14 기타 [달마의 삼신론 三身論] 短長中庸 2009.08.12 4379
13 기타 [달마의 중생론 衆生論] 短長中庸 2009.08.12 3826
12 기타 [달마의 불종자론 佛種子論] 短長中庸 2009.08.12 4571
11 기타 [달마의 실체론 實體論] 短長中庸 2009.08.12 3894
10 기타 [달마의 중도론 中道論] 短長中庸 2009.08.12 4968
9 기타 [달마의 불승론 佛乘論] 短長中庸 2009.08.12 4752
8 기타 [달마의 관심론 觀心論] 短長中庸 2009.08.12 5146
7 기타 [달마의 각성론 覺醒論] 短長中庸 2009.08.12 4101
6 기타 [달마의 선도론 禪道論] 短長中庸 2009.08.12 4896
5 기타 [달마의 진여론 眞如論] 短長中庸 2009.08.12 3296
4 기타 [달마의 진신론 眞身論] 短長中庸 2009.08.12 3303
3 기타 [달마의 본성론 本性論] 短長中庸 2009.08.12 3432
2 기타 [달마의 혈맥론 血脈論] 短長中庸 2009.08.12 6001
1 기타 [달마의 이입사행론 二入四行論] 短長中庸 2009.08.12 6110
Board Pagination Prev 1 Next
/ 1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