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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12 10:56

[달마의 혈맥론 血脈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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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대 자신 속으로 순례를 떠나라[달마의 혈맥론 血脈論]
 

                                        조셉 아르파이아·롭상 랍가이 저, 서보경 역
 
 

달마어록 혈맥론 血脈論

삼계에 나타나는 모든 것들은 결국 마음으로 돌아온다. 그러므로 과거와 미래의 모든 부처들이 말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진리를 전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진리를 말로 정의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무엇을 마음에 전했다는 것입니까?"
그대는 묻는다. 그것이 바로 그대의 마음이다. 나는 대답한다. 이것이 나의 마음이다. 만일 내게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그대 역시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물을 수 있겠는가? 그대가 묻는 것이 바로 그대의 마음이다. 시작도 없는 아득한 세월을 통해서 그대로 하여금 뭔가를 행하게 하고, 그대로 하여금 존재하게 한 그것이 바로 그대의 진짜 마음이다. 그것이 그대의 진짜 부처이다. 이 마음이 바로 부처다. 이 마음을 벗어나서는 그대는 다른 어떤 부처도 찾을 수 없다. 이 마음을 벗어나서 깨달음이나 열반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연의 조건에서 벗어난 그대 본성의 실체가 바로 마음에 의해서 전달되는 것이다. 그대의 마음이 바로 열반이다. 그대가 마음을 벗어나 부처나 깨달음을 찾는다면 그런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부처나 깨달음을 찾으려고 애쓰는 것은 허공을 움켜쥐려고 하는 것과 같다. 허공은 이름만 있을 뿐 어떤 모양도 없다. 그것은 그대가 잡거나 가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 마음을 벗어나서 그대는 결코 부처를 볼 수 없다. 부처는 그대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왜 이 마음을 벗어나서 부처를 보려고 하는가?
과거와 미래의 부처들이 바로 이 마음에 대해서 말했다. 이 마음이 부처라고, 그리고 부처가 마음이라고 말이다. 마음을 벗어나서는 부처가 없고 부처를 벗어나서 마음도 없다. 만일 그대가 마음을 벗어난 곳에 부처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면 부처는 어디에 있는가? 그러나 그대는 마음을 벗어난 곳에 부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식으로 그대가 자신을 속이는 한 결코 그대의 진짜 마음을 알 수 없다. 그대가 생명도 없는 모양에 얽매이는 한 그대는 자유를 누릴 수가 없다. 만약 그대가 내 말을 믿지 않는다면 그대 자신을 계속 속여라. 그것은 부처의 잘못이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이 바로 부처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것을 안다면 그들은 더 이상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지 않을 것이다.
부처는 부처를 구원하지 않는다. 만약 그대가 그대의 마음을 사용해서 부처를 찾는다면 그대는 부처를 볼 수 없다. 그대가 마음 외에 다른 곳에서 부처를 찾는다면 그대는 자신의 마음이 부처라는 사실을 알 수 없다. 부처를 섬기는 데 부처를 이용하지 말라. 그리고 부처를 불러내는 데 마음을 사용하지 말라. 부처는 경전을 암송하지도 않는다. 부처는 어떤 가르침도 추종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하지도 않는다. 부처는 어떤 것도 마음에 담고 있거나 배척하지 않는다. 부처는 선도 행하지 않고 악도 행하지 않는다.
부처를 만나기 위해서는 그대는 자신의 본성을 보아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의 본성을 보는 사람이 바로 부처이다. 만약 그대가 자신의 본성을 보지 않고 부처를 생각하고 경전을 외우며 예물을 바치고 마음에 금언을 새긴다고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 물론 부처를 섬기는 것은 좋은 업을 쌓는 것이며 경전을 외우는 것도 좋은 기억을 갖는 것이다. 마음에 금언을 새기는 것도 좋은 곳에 태어나게 해주며 예물을 드리는 것도 장래에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부처는 없다.

 

그대 자신 속으로 순례를 떠나라

깨달음, 혹은 불성을 실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또한 그것은 쉬운 일이기도 하다. 그대가 그것을 찾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무한히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그대가 그저 앉아서 고요히 자신 속으로 들어간다면 그것은 어느새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때 그대는 부처가 된다. 그때 그대는 깨달은 자가 된다. 그대가 깨달은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대의 존재가 바로 깨달음 자체이다. 그것은 가장 간단하고 자연스런 본성이다.
깨달음은 그대의 본성이다.
그런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어둠 속에서 살면서 빛을 보지도 못한 사람에게 그것을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리만큼 어려운 것이다. 그것은 장님에게 빛을 설명하려는 것과 같다. 그래서 깨달은 스승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내 경험을 설명하려는 나의 노력은 장님에게 안경을 파는 것과 똑같다."
그래서 깨달음을 얻은 많은 스승들이 그저 침묵 속에서 살다 갔다. 그들은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깨달음을, 그 향기와 그 기쁨과 그 아름다움을, 말을 통해서 도저히 전해 줄 수 없음을 알면서 말이다. 그 경험을 말로 전달하는 순간 그것의 본질은 죽어 버린다. 그리고 껍데기만 남아서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비심 때문에 몇몇 깨달은 사람은 그대에게 깨달음을 전해주기 위해 무진장 애를 썼다. 삶이란 그대가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그대가 상상할 수 있는 무한 그 이상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어떤 깨달은 사람도 글자를 남기지 않았다. 그것은, 말은 온기를 갖고 있지만 글은 완전히 식어 버린 것이라는 간단한 이유 때문이다. 말속에는 스승의 현존이 들어 있지만, 문자 속에는 스승이 존재하지 않는다. 스승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단순한 말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에게 간접적이라도 전달되는 뭔가가 들어 있다. 스승의 현존이, 스승의 축복이, 스승의 은총이 거기에 들어 있다. 스승의 눈동자와 그대를 부르는 그의 가슴의 고동이, 그대 자신 속으로 떠나는 여행에의 권유가 거기에 있다. 하지만 문자 속에는 이 모든 것들이 빠져 있다.
그러므로 모든 깨달은 사람들이 한 글자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의 가르침에 대한 기록을 남긴다. 깨달은 사람에 대한 모든 문학 작품이 사실은 제자들의 기록일 뿐이다. 그 제자가 이해하지 못한 것을 그냥 적어 놓기 때문에 문제가 복잡해지는 것이다. 제자는 스승을 사랑한다. 스승에게 깊이 빠져 있다. 하지만 그는 스승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스승의 마술에 걸려 있지만 그 비밀을 결코 알지 못한다. 그가 자신의 비밀을 알지 못하는 한 스승의 비밀을 알 수가 없다. 그것은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자는 스승이 떠나고 난 후에도 스승의 말을 기억하고 있다. 그 말들은 너무나 소중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순금 같은 것이다. 그래서 제자는 적어도 후세의 사람들을 위해 뭔가가 남겨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의 이해력은 매우 부족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이해한 것들을 글로 남긴다. 그때 스승이 말한 것은 많은 부분이 누락된다. 그리고 제자가 스승의 말을 들을 때 이미 많은 것들이 빠져나간다. 제자는 자신의 언어로 글을 쓰고, 그것은 또 다른 언어로 번역된다. 이제 그것은 원래 목소리의 메아리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
예를 들면 달마는 중국어로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모국어가 아니었다. 그는 인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다. 존재의 핵심에 대한 경험은 모국어로도 표현하기 쉽지 않다. 그대 가슴의 고동을, 그대 존재의 축복을 말로 표현하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달마는 중국어로 말을 했다. 중국어는 그리 간단한 언어가 아니다. 외국의 학자가 그 언어를 완숙하게 배우려면 삼십 년은 걸린다. 그 언어에는 알파벳도 없다. 그것의 글자는 상형문자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배우기 힘든 문자인 것이다.
하지만 달마는 그 어려운 중국어를 3년 만에 익혔다. 그리고 그가 경험하고 느낀 것들을 중국어로 말했다. 이제 그 말들은 또 그대들에게 영어로 말해지고 있다. 그래서 그대들은 내가 이 경전을 인용할 때마다 달마의 본래 뜻을 반대로 알아들을 소지가 다분하다. 예를 들면 'Mind'란 단어에 대해서 살펴보자.
영어에서 마음을 나타내는 말인 'Mind'는 생각의 흐름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을 표현하는 말은 'Mind' 하나밖에 없다. 그리고 영어에는 생각의 흐름을 초월하는 것에 대한 적절한 단어가 없다. 그것을 표현하려면 'No Mind'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석가모니 부처나 달마의 가르침 전체가 이 'Mind'를 넘어서는 것에 관해 말하고 있다. 그리고 산스크리트어나 팔리(Pali)어에는 그것에 대한 표현이 있다. 그것은 바로 '시타(chitta)'이다. 그것은 생각의 흐름을 초월하는 의식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리고 영어의 'Mind'에 해당하는 말은 '마누스(Manus)'라는 말이 따로 있다.
깨어 있는 사람은 명상에 대해서 학자처럼 공부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어떤 것을 경험한 사람이다. 그대가 불교의 경전에서 'Mind'란 말을 발견하면 그것은 'No Mind'로 이해해야 한다. 영어에서는 사실 'No Mind(無心)'란 단어가 없다. 그래서 거기에서 오해가 싹틀 소지가 있다. 그대가 이 어록을 볼 때 'Mind'란 단어가 나오면 'No Mind'란 뜻으로 이해해 주기 바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대는 완전히 잘못된 인식을 갖게 될 것이다.
자, 그럼 어록으로 돌아가자. 달마의 선어록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삼계에 나타나는 모든 것들은 결국 마음으로 돌아온다.

여기에서 번역자는 마음(Mind)이라고 번역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번역이다. 마음은 초월해야 할 그 무엇이다. 그 마음이 병이다. 명상은 그 마음을 초월하려는 행위이다. 그래서 나는 마음(Mind) 대신에 '무심(No Mind)'으로 그것을 이해한다. 그것이 올바른 번역이다. 그래서 경전을 번역하는 역경가는 언어를 이해하는 사람이 아니라, 명상을 이해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삼계에 나타나는 모든 것들은 결국 마음으로 돌아온다.

삼계가 무엇인가? 그 삼계는 마음과 정신이다. 그것이 불교에서는 각각 욕계, 색계, 무색계와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그 삼계에 해당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앞에서도 말했듯이 투리야(turiay)이다. 영어에는 이런 단어가 없다. 그것은 무심(No Mind)으로 번역해야 한다. 거기에는 어떤 사념의 파도도 없는 침묵의 세계이다. 시간도 사라지고 공간도 사라진 세계, 오직 순수한 의식만이 존재하는 세계이다. 그 의식은 일반적으로 대상에 의존하는 의식이 아니다. 그것은 홀로 빛나며 홀로 존재하는 깨어 있음이다. 그리고 삼라만상이 여기로 돌아온다.
그래서 명상을 이해하는 번역가들은 '시타'라는 말을 무심으로 번역한다.

그러므로 과거와 미래의 모든 부처들이 말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진리를 전했다.

이 말은 사실 터무니없는 말이다. 하지만 학자들은 이 말에 대단한 진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 말의 본래 뜻을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이 말을 올바르게 표현한다면 이렇게 고쳐야 한다.
"과거와 미래의 모든 부처들은 무심에서 무심으로, 침묵에서 침묵으로, 현재에서 현재로 진리를 전했다. 침묵에서 침묵으로 전해지는 진리는 당연히 어떤 정의나 설명도 덧붙일 수 없다."
정의나 설명은 마음의 차원이다. 그대가 마음을 초월하는 순간, 그대는 모든 정의나 설명을 초월한다. 그때 제자는 이렇게 물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진리를 말로 정의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무엇을 마음에 전했다는 것입니까?

이 질문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모른다. 믿을 수 없을 정도이다. 이렇게 묻는 사람의 마음은 벌써 혼란 속에 빠져 있다. 그래서 스승은 이렇게 대답한다.

그대는 묻는다. 그것이 바로 그대의 마음이다. 나는 대답한다. 이것이 나의 마음이다.

그것은 질문자에게는 납득이 가는 대답이다. 하지만 깨달은 사람에게는 틀린 대답이다. 깨달은 사람은 자신의 존재를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설사 그가 말을 사용할지라도 그것은 듣는 이를 침묵으로 이끌기 위한 하나의 방편일 뿐이다.
진정한 전달은 단절 속에서 일어난다. 아무것도 말할 수 없고 아무것도 들을 수 없는 그 순간에 한 존재에서 다른 존재로 전이되는 소립자의 도약이 있다. 그것은 하나의 마술이며 연금술이다.

만일 내게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그대 역시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물을 수 있겠는가? 그대가 묻는 것이 바로 그대의 마음이다. 시작도 없는 아득한 세월을 통해서 그대로 하여금 뭔가를 행하게 하고, 그대로 하여금 존재하게 한 그것이 바로 그대의 진짜 마음이다. 그것이 그대의 진짜 부처이다.

이제 제자는 완전히 혼란 속에 빠졌다. 물론 누구든지 그런 상황 속에서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명상이 하나의 초월이며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임을 알지 못하는 한 그 누구도 그 말의 참뜻을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자리이기에 마음이 작용하는 한 그 자리에 이를 수 없다.
그 자리가 그대의 진짜 모습이다. 그대의 깨달음이며 불성이다. 그대가 어떤 행동을 하든지 그것이 침묵 속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것은 부처의 행동이다. 참된 침묵이란 말없음이 아니다. 참된 침묵은 그대의 마음을 초월한 자리이다. 거기에는 옳고 그름의 분별이, 선과 악의 경계선이 사라진다. 거기에서 나온 것은 바로 그대의 본질이다. 그것은 자연스러움이지 그대의 노력이 아니다. 미리 계획된 행동이나 생각의 산물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그대의 본성이 자발적으로 흘러나온 것이다.


 

이 마음이 바로 부처다.

마음이라고 번역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 마음은 모두 무심으로 번역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이 어록을 인용할 때마다 이제부터 그것을 무심으로 고쳐 부르겠다.

이 무심을 벗어나서는 그대는 다른 어떤 부처도 찾을 수 없다. 이 무심을 벗어나서 깨달음이나 열반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연의 조건에서 벗어난 그대 본성의 실체가 바로 무심에 의해서 전달되는 것이다. 그대의 무심이 바로 열반이다.

내가 마음을 무심으로 바꿀 때 달마 역시 전적으로 찬성할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 역시 동의할 것이다. 한번 깨달음을 일별한 사람이면 누구든지 동의할 것이다.

부처나 깨달음을 찾으려고 애쓰는 것은 허공을 움켜쥐려고 하는 것과 같다. 허공은 이름만 있을 뿐 어떤 모양도 없다. 그것은 그대가 잡거나 가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 무심을 벗어나서 그대는 결코 부처를 볼 수 없다. 부처는 그대의 무심에서 나온 것이다.

사실 무심과 부처는 같은 말이다. 그러나 그 가엾은 제자는 그것을 모두 마음이라고 표현해 놓았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틀린 말이다.

왜 이 마음을 벗어나서 부처를 보려고 하는가?
과거와 미래의 부처들이 바로 이 무심에 대해서 말했다. 이 무심이 부처라고, 그리고 부처가 무심이라고 말이다. 무심을 벗어나서는 부처가 없고 부처를 벗어나서 무심도 없다. 만일 그대가 무심을 벗어난 곳에 부처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면 부처는 어디에 있는가?

같은 실수가 이 어록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 어록은 달마의 선어록이라고 하는 것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 어록이 달마의 선어록이라고 받아들여진 지는 거의 14세기경이다. 그 이유는 달마의 가르침을 몸으로 체험한 사람이라면 아무도 그것을 글로 옮기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머지 보통 사람들은 그저 경전을 읽을 뿐이었다. 그들은 경전을 통해서 지식만 쌓으려고 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속 깊은 곳은 무지로 가려져 있다. 그들은 빛에 대해서 토론하기 시작했지만, 모두 장님인 채로 토론을 계속할 뿐이었다. 그래서 달마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무심을 벗어난 곳에 부처가 있다고 생각한다.

무심이 아니라 마음을 벗어난 곳에 부처가 있다. 그것은 생각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이 바보 같은 제자는 마음을 벗어난 곳에는 부처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무심과 부처가 동의어가 아니라, 마음과 부처를 동의어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명상을 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그대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마음을 갖고 있다. 그러니 모든 사람이 이미 부처이며 더 이상 명상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그대는 또 다른 마음을 찾고 있지 않은가?
그대는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 모든 사념의 파도로부터, 감정과 분위기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런 것들이 그대의 마음을 이루고 있다. 그런 것들을 초월해서 하나의 지켜봄이 있다. 한 사람의 '지켜보는 자'가 있다.
그 '지켜보는 자'가 바로 부처다.
나는 이 불쌍한 제자를 딱하게 생각한다. 비록 그는 인류에 대해서 많은 봉사를 했지만 말이다. 그는 달마의 말을 기록으로 남겼다. 달마의 선어록을 편찬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어록의 진정한 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달마와 같은 경지에 있는 사람이면 그의 어록을 바로 잡을 수 있다. 그것은 아무 문제도 없다. 하지만 그 제자는 자신의 생각대로 달마의 선어록을 만들었다.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어쨌든 그는 달마의 말을 또 인용하고 있다.

그런 식으로 그대가 자신을 속이는 한 결코 그대의 진짜 무심을 알 수 없다. 그대가 생명도 없는 모양에 얽매이는 한 그대는 자유를 누릴 수가 없다.

무엇이 그대의 자유를 구속하는가? 그대의 마음이 바로 그대의 감옥이다. 물론 보통의 감옥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종류가 다를 뿐이지 마음은 모두 감옥이다. 힌두교는 하나의 감옥이다. 이슬람교 역시 종류만 달랐지 그대의 자유를 구속하는 입장에서는 똑같은 감옥이다. 기독교도 감옥이고 그 밖의 모든 종교도 그대를 자유롭게 하지 않는 한 건물만 달랐지 감옥임에는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감옥에서 저 감옥으로 옮겨 다닌다. '혹시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하는 기대를 갖고서 말이다. 기독교인이 힌두교도로 변할 수 있다. 힌두교도가 불교도로 될 수도 있다. 불교도 역시 이슬람교도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감옥의 건물만 바꿀 뿐이다. 그것은 그대에게 입력되어진 프로그램이 바뀌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입력된 프로그램 자체를 지워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프로그램도 다시는 입력시키지 않아야 한다. 바로 이러한 행위가 명상이다. 지금 나는 명상을 과학적 용어로 바꾸어 표현했을 뿐이다. 그대의 마음에서 입력된 프로그램을 완전히 지워버릴 수 있다면, 그대 마음의 석판에 새겨진 모든 지식들을 깨끗이 지워버릴 수 있다면, 그대 마음의 석판에 새겨진 모든 지식들을 깨끗이 지워버린다면, 그때 무심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그 순간 그대 속에서 부처가 탄생하게 된다.

만약 그대가 내 말을 믿지 않는다면 그대 자신을 계속 속여라. 그것은 부처의 잘못이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무심이 바로 부처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것을 안다면 그들은 더 이상 무심 밖에서 부처를 찾지 않을 것이다.

각성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 이른 사람들이 말하는 가장 큰 망상은 바로 그대 자신 밖에서 진리를 찾고 구하는 것이다. 그대는 자신의 밖에서 존재의 의미와 죽음이 없는 영원한 삶을 찾고 있다. 마음은 항상 밖을 내다보려고 한다. 이 세상 속에서 활동하는 것이 마음의 기능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과학 안에서, 사업 안에서, 경제 안에서, 그대 바깥의 모든 것 속에서 완전히 잘 꾸려 나간다. 그런 것들 속에서 마음은 완전히 올바른 수단이다.
그러나 그대 내면은 마음이 미치지 않는 곳이다. 그대가 내면에 이르기 위해서는 마음을 떠나야 한다. 그대는 마음을 떠나 될 수 있는 한 그것으로부터 멀어져야 한다. 그대가 마음의 관찰자가 될 때, 마음을 그대 외부의 어떤 사물로서 지켜볼 그때가 바로 그대가 고향집에 돌아온 순간이다.

부처는 부처를 구원하지 않는다.

이 말은 달마가 한 말임에 틀림없다. 이 말 속에는 엄청난 의미가 담겨 있다. 그 내용이 너무 엄청나서 가엾은 제자들의 이해 능력이 미칠 수 없었다. 달마의 어록을 쓴 후세의 제자도 그것을 단지 받아 적었을 뿐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달마는 이 말을 여러 번 반복했을 것이다. 이 말은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 가운데 하나이다. 그것은 아무도 그대를 구원할 수 없다는 말이다.
예수는 자신이 구세주라고 말했다. 그대가 예수와 달마를 비교한다면 그대는 놀랄 것이다. 예수는 말했다.
"나는 목자이고 너희는 양이다. 너희가 길을 잃으면 나는 너희를 찾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말이 대단한 자비심으로 들릴 것이다. 예수는 굉장한 사랑과 동정심을 갖고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스스로 십자가에 못박게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왜 인류가 구원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묻지 않는다. 그 불쌍한 친구는 헛되이 죽은 것이다. 그리고 예수를 불쌍하게 만든 사람들은 바로 기독교인들이다.
기독교인들의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항상 당황스럽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버렸다는 말을 계속하면서도 조금도 당황해하지 않는다. 나는 한 설교가에게 다정스레 이야기하곤 했다. 그의 이름은 스탠리 존이었는데 기독교 선교사로서 매우 철학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내가 사는 고장에 그가 올 때마다 나는 항상 그의 말을 들으러 갔다. 하루는 그가 계속해서 "예수는 우리의 구세주입니다."라고 외쳤다. 그리고 그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을 때 비로소 나는 말했다.
"그것은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나는 기독교인도 아니다. 그리고 사실 교회에 어떤 방해도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당신은 무의미한 말을 계속하고 있다. 당신은 예수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버렸다고 말하지만, 나는 구원받은 사람을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다. 예수는 자신조차도 구원할 수 없었다."
인도 밖에서 생겨난 종교, 특히 기독교나 유대교나 이슬람교에서는 모두 구세주에 대한 사상을 갖고 있다. 인도에서는 네 가지 종교가 생겨났다. 그것은 힌두교, 시크교, 자이나교, 불교이다. 자이나교와 불교는 누구를 구원한다는 생각이 없다. 나 역시 그들의 생각에 동의한다. "내가 너를 구원하겠다."는 생각은 내가 너보다 더 뛰어나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나는 특별하며, 신의 독생자이며, 신의 사자이며, 너는 그저 보통 사람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달마는 '부처는 부처를 구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그는 그대가 그 사실을 알든 모르든 그대 역시 부처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다른 사람이 그대를 구원할 수 있겠는가? 부처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대를 깨어나게 하는 것이 전부다. 그것은 구원하는 것과는 천지 차이이다. 만약 그대가 어떤 누구를 깨울 때, 그대는 자신이 그 사람보다 더 거룩하고 특별하다고 생각하는가? 혹은 그대가 인류를 위해서 대단한 봉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잠들어 있는 가엾은 한 친구를 깨우면서 말이다.


 

부처는 부처를 구원하지 않는다.

이 말은 모든 존재가 평등하다는 뜻을 갖고 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각자가 한 사람의 부처이다. 어떤 이들은 자신들이 잠들어 있어 그 사실을 알지 못할 뿐이다. 또 어떤 이들은 잠에서 깨어나 자기가 누구인지 안다. 거기에는 본질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다. 거기에는 누가 누구를 구원하고 말고 할 것도 없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잠을 계속 잘 뜻이 있다면 그는 잠잘 권리가 있다. 그대는 그를 강제로 깨울 수 없다. 아무도 그의 자유를 간섭할 수 없는 것이다.
언젠가 나는 알라하바드에서 갠지스강 강기슭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알라하바드의 신학대학생과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다. 그 신학 대학이 있는 곳은 갠지스강이 내려다보이는 매우 아름다운 장소였으며 그 근처에는 철교가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한 사람이 철교에서 강으로 뛰어내렸다. 주위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가 멱을 감으려는 줄로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는 살려 달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나는 생각했다. '무슨 일인가? 만약 그가 도움을 청하고자 할 지경이었다면 왜 뛰어들었을까?' 어쨌든 먼저 그를 물에서 끌어내고 봐야 할 일이었다. 만약 내가 그 문제를 앉아서 생각하고 있다가는 시간이 지나서 그는 죽을 것이다. 그래서 나도 강에 뛰어들었다. 그는 매우 무거웠다. 아무튼 힘들게 그를 구하려고 하는데, 더 이상한 상황이 벌어졌다. 그는 말로는 계속 "살려 주세요. 나는 물에 빠졌어요."라고 외치면서도 내가 그를 구하려고 하자 오히려 나에게 저항을 했다. 그는 내 도움을 원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당신은 미친 것 같은데…… 도대체 도움을 받고 싶은 거야? 말고 싶은 거야?"
그러자 그가 말했다.
"제발 도와주세요."
그래서 나는 그를 물에서 끄집어냈다. 하지만 그가 물 밖으로 나왔을 때, 그는 나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아니, 상황을 보면 모르겠어요? 나는 지금 자살하려는 중이란 말이에요."
내가 말했다.
"조금 전에 나보고 살려 달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자살하려 했다면 왜 그런 말을 했지?"
그가 대답했다.
"그것은 당연한 이치죠. 나는 자살하려고 했지만 갑자기 내 무의식에서 살고 싶은 욕망이 생겨났기 때문이죠. 그래서 나도 모르게 살려 달라고 말한 것이죠." 그래서 나는 그를 물 속으로 떠밀면서 말했다.
"좋아, 이번에는 당신의 뜻에 반대하지 않겠다."
그러자 그는 또다시 소리치기 시작했다.
"당신 정말 미쳤군요. 지금 나를 죽이려고 합니까?"
내가 말했다.
"나는 당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단지 당신을 구하기 전의 상태로 되돌리려는 것뿐이다. 이제 나는 여기서 가만히 보고만 있겠다."
어떤 사람이 달려와서 그를 구해내었다. 이번에는 그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그는 물 밖으로 나와서 계속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무슨 문제가 있는가? 어디로 갈 텐가?"
그가 말했다.
"아니다. 나는 그대에게 자살하라고 말한 적이 없다. 자살하려 했던 사람은 바로 그대이다. 잊어버렸는가?"
그가 말했다.
"당신은 매우 이상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살을 하려고 하면 사람들은 그를 말립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를 도와주고 있습니다."
내가 말했다.
"나는 어떤 식으로든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 만약 그대가 물 밖으로 나오기를 원한다면 나는 그대를 물 밖으로 건져낼 것이다. 혹시 그대가 물 속으로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나는 그대가 물 속에 잘 들어갈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나는 그대가 어떤 식으로 살든지 간섭하고 싶지 않다."
그가 말했다.
"나는 죽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것 또한 좋은 일이다. 그대는 가도 좋다. 하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 여기에 다시 올지도 모르니까."
그가 말했다.
"나는 다시 되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말했다.
"그것은 그대에게 달렸다. 만약 자살에 대한 생각이 일어나거든 오늘 같은 날이 자살하는 데는 매우 좋은 기회임을 나는 그대에게 상기시켜주려 할 뿐이다. 오늘 같은 기회를 놓치지 말라. 보통 이 강둑에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오늘처럼 사람이 없는 가운데, 나처럼 어떤 식으로도 그대를 도와주려는 사람만 있는 기회란 쉽게 오지 않을 테니까."
그가 말했다.
"당신이 여기 있는 한 나는 절대로 오지 않을 것이오."
내가 말했다.
"그것도 그대에게 달려 있다. 내가 없다면 아마 여기서 자살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
달마는 말하고 있다. 부처는 부처를 구원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부처는 그저 사람들의 자신의 본성을 깨우치도록만 도울 뿐이다. 그것은 구원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은 이미 부처이다. 아무것도 덧붙일 것이 없다. 이것이 불교와 자이나교가 인류의 정신에 끼친 가장 큰 공헌이다.

만약 그대가 그대의 무심을 사용해서 부처를 찾는다면 그대는 부처를 볼 수 없다. 그대가 무심 외에 다른 곳에서 부처를 찾는다면 그대는 자신의 무심이 부처라는 사실을 알 수 없다.

어록에는 마음이라고 씌어 있지만 나는 무심으로 읽겠다.

부처를 섬기는 데 부처를 이용하지 말라.

이 말은 절대적으로 달마에게 나온 말이다. 부처가 다른 부처를 섬기는 것은 정말 우스꽝스런 일이다. 그래서 불교는 숭배하는 것을 반대한다. 그래서 석가모니 부처의 마지막 말은 이러했다.
"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 나의 사원도 짓지 말라. 나는 전생애를 통틀어 그대가 바로 부처이며, 다른 부처를 섬기지 말라고 가르쳐 왔다."
만약 돌로 만들어진 부처의 형상이 살아 있는 부처에 의해 숭배 받는다면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부처를 불러내는 데 마음을 사용하지 말라. 부처는 경전을 암송하지도 않는다. 부처는 어떤 가르침도 추종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하지도 않는다. 부처는 어떤 것도 마음에 담고 있거나 배척하지 않는다. 부처는 선도 행하지 않고 악도 행하지 않는다.

이 말 역시 달마에게서 나온 말이다. 그의 제자는 이런 위대한 가르침을 말할 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달마는 모든 부처들이 자신의 깨어있음 외에 어떤 다른 수행법도 따르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빛말고는 어떤 경전도 따르지 않는다. 어떤 것을 따르거나 반대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행동할 뿐 선이나 악을 정해놓고 그것을 지키려고 하지 않는다.
부처는 청교도나 도덕론자가 아니다. 그들은 순수한 의식에서 나오는 대로 행동할 뿐이다. 그들의 행동은 어떤 사상이나 개념이나 경전을 따라 나온 것이 아니다. 그들은 어떤 경전도 외우고 있지 않다. 그들은 '거룩한 경전' 같은 것에 관심이 없다. 그들은 자신의 깨어 있음 속에서 길을 알고, 그들의 궁극적인 운명에 대해 충분히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처를 만나기 위해서는 그대는 자신의 본성을 보아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의 본성을 보는 사람이 바로 부처이다. 만약 그대가 자신의 본성을 보지 않고 부처를 생각하고 경전을 외우며 예물을 바치고 마음에 금언을 새긴다고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

이 말들은 깨어 있는 사람에게서 나온 말들이다. 그러나 이 말을 듣는 제자들에게는 뭔가 흡족하지 않다. 그들은 여기서 뭔가 이해되지 않는 어려움을 느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경전을 외우고 예물을 바치며 좋은 말을 금언으로 명심하는 것이 아무런 소용도 없는 일이라니……. 그들은 틀림없이 당혹감을 느꼈을 것이다. 이 말들은 분명 비종교적인 생각이기 때문이다. 어떤 평범한 종교도 이런 생각들을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래서 그 제자는 즉시 자신의 생각을 집어넣었다.

물론 부처를 섬기는 것은 좋은 업을 쌓는 것이며 경전을 외우는 것도 좋은 기억을 갖는 것이다. 마음에 금언을 새기는 것도 좋은 곳에 태어나게 해주며 예물을 드리는 것도 장래에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부처는 없다.

이 말들은 그저 제자가 덧붙인 것에 불과하다. 그는 '아무 소용없다'는 말에 당혹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 제자는 달마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기록해야 했다. 그리고 그는 자기 마음대로 그것을 바꿀 수 있다. 사실 그는 전체적인 느낌을 바꾸어 버렸다.
물론 그 제자는 달마의 말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전달하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달마가 한 말은 오직 깨달음의 경험이 있는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었기에 그 제자는 틀림없이 땀 깨나 흘렸을 것이다. 그 말들은 보통 사람의 마음을 가진 자가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 그것들은 모든 종교와 예언자들과 소위 신들의 사자라고 하는 사람과 성스러운 경전의 생각에 모두 위배되는 것들이었다.
그는 당혹감을 느꼈고 그래서 자신의 생각을 뒤에다 덧붙였다. 이제 명상의 참 맛을 보지 못한 사람이 이 어록을 읽게 되면 그는 혼란에 빠질 것이다. 마지막에 덧붙여진 이 말들만 이해하고 그는 잘못된 길로 들어설 것이다. 달마로부터 나온 수정같이 맑은 물이 오염되었다. 그 제자는 그런 맑은 물에 도저히 접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을 덧붙여서 그 물을 흐려 놓았다.
석가모니 부처의 계열에는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달마가 가장 유명하다. 하지만 그는 선불교의 창시자는 아니다. 선불교의 창시자는 마하가섭(摩訶迦葉)이다. 그러나 달마 앞에서는 마하가섭마저 빛을 바랠 정도이다. 달마는 그의 과격함과 타협할 줄 모르는 성격 대문에 석가모니 부처 이후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어떤 사람의 마음도 위로해 줄 뜻이 없었다. 그는 단지 진리만을 말했다. 그의 말이 그대를 상하게 하든 그대의 상처를 감사 주든 그것은 그대에게 달렸다. 그는 그대를 위로할 말은 한마디도 덧붙이지 않는다. 모든 위로의 말은 아편의 일종인 것이다.
달마는 절대적으로 강직한 사람이다. 그의 초상화가 사람을 험악하게 노려보는 듯한 표정으로 그려지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왕자 출신이다. 그의 실물 사진이 있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가 만일 부드러운 위로의 말을 했던 사람이라면, 그는 그렇게 그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진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놓았다. 어떤 부드러운 표현도 덧붙이지 않은 채 말이다. 그 때문에 그대가 상처를 받는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다. 그대가 깨어나기 위해서는 상처를 받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대에게는 더 이상 위로가 필요 없다. 위로의 말은 그대로 하여금 더 깊은 잠 속에 빠져들게 할 뿐이다.
달마는 독특한 사람이다 .왜 그의 제자들이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는지를 나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그의 말을 듣는 사람들이 모두 같은 경험을 했을 것이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누가 자신의 말을 이해하는 사람인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모아서 질문을 던졌다. 그 숫자는 단지 네 명의 제자들뿐이었다. 그 중에서도 그는 한 사람밖에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그는 엄격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마 세상에 알려진 스승 중에서 가장 엄격하고 강직한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그는 가장 자비로운 사람이었다. 그의 엄격함은 바로 그의 자비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알겠는가?
 

출처 : 세존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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