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이문론 十二門論]
4. 상을 관찰하는 문(觀相門) ③
만약 등불이 자기를 비추고 다른 것도 비출 수 있다면 어둠도 이와 같아서 자기를 어둡게 하고 다른 것도 어둡게 하리라.
또 만약 등불이 자기를 비출 수 있고 또한 다른 것도 비출 수 있다고 말한다면, 어둠은 등불과 상반되므로 자기도 덮고 다른 것도 덮을 것이다. 만약 “어둠은 등불과 상반되기에 자기를 덮을 수 없고 다른 것도 덮을 수 없다. 그러나 등불은 어둠과 상반되기에 자기를 비추고 다른 것도 비출 수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그대의 비유는 잘못된 것이다. 발생이 자기를 발생하게 할 수 있고 또한 다른 것도 발생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이제 다시 설명하겠다.
만약 이 발생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자기를 발생하게 하겠는가? 만약 이미 발생한 것이 자기를 발생하게 한다면, 이미 발생했는데 발생을 어디에 쓰겠는가?
이 발생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을 때에 이미 발생한 것이 발생하든가,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발생할 것이다. 만약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발생한다고 한다면,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인데 어떻게 자기를 발생할 수 있겠는가? 만약 이미 발생한 것이 발생한다고 말한다면, 이미 발생한 것은 곧 발생인데 어떻게 다시 발생을 필요로 하겠는가? 이미 발생한 것에는 다시 발생이 존재하지 않고 이미 만들어진 것[作已]에는 다시 만듦[作]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발생은 자기를 발생하게 하지 않는다. 발생이 자기를 발생하게 하지 않는데 어떻게 다른 것을 발생하게 하겠는가? 그대가 “자기를 발생하게 하고 또한 다른 것도 발생하게 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머묾과 소멸도 이와 같다. 그러므로 발생과 머묾과 소멸이 유위의 상이라 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발생과 머묾과 소멸이 유위의 상이라는 것이 성립하지 않기에 유위법은 공하다. 유위법이 공하기에 무위법도 공하다. 왜 그러한가? 유위법이 소멸한 것을 무위열반(無爲涅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열반도 공하다. 또 발생이 없고 머묾이 없고 소멸이 없는 것을 무위의 상(相)이라고 한다. 발생과 머묾과 소멸이 존재하지 않으니 법(法)이 존재하지 않는다. 법이 존재하지 않으니 상(相)을 만들지 않을 것이다. 만약 “상이 없는 것이 열반의 상이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만약 상이 없는 것이 열반의 상이라면 어떤 상(相)으로 이 상이 없는 것을 인지하는가? 만약 상이 있는 것으로써 상이 없는 것을 인지한다면 어떻게 상이 없는 것이라 하겠는가? 만약 상이 없는 것으로써 상이 없는 것을 인지한다면 상이 없는 것은 무(無)일 것이다. 무는 인지할 수 없다. 만약 “가령 여러 벌의 옷은 다 상이 있는 것이지만 오직 한 벌의 옷만이 상이 없는 것이다”고 말한다면, 바로 상이 없는 것을 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은 상이 없는 옷을 취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상이 없는 옷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발생과 머묾과 소멸은 유위의 상이다. 발생과 머묾과 소멸이 없는 곳이 무위의 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상이 없는 것이 열반이라 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발생과 머묾과 소멸의 여러 인(因)과 연(緣)들이 모두 공하다. 유위의 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얻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것에 의존해서 무위를 얻겠는가? 그대는 어떤 유위의 확정된 상을 얻기에 상이 없는 곳이 무위라는 것을 알겠는가? 그러므로 그대가 여러 상의 옷들 중에서 상이 없는 옷이 상이 없는 열반에 비유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또 옷의 비유는 후의 제5장에서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그러므로 유위법은 모두 공하다. 유위법이 공하기에 무위법도 공하다. 유위법과 무위법이 공하기에 나[我]도 공하다. 셋이 공하기 때문에 모든 법이 다 공하다.
출처 : 나를 찾는 불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