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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록44강

 


  벌써 봄이 오는듯한 그런 느낌입니다. 날씨가 아주 따뜻해서 겨울 지내기가 아주 좋군요. 오늘 임제록은 50쪽 14-14 선지식이 사람을 만났을 때, 찾아오는 공부인을 선지식이 만났을 때, 어떤 관계들이 있는가? 이것은 또 상당히 중요한 내용이죠. 상업을 하는 사람도 손님이 왔을 때 어떻게 손님을 대해야 물건을 팔수 있겠는가? 그런 문제도 되고. 또 학인이 질문을 한다고 해서 덮어놓고 학인에게 딸려가는 그런 것도 학인을 돕는 일이 아니라, 선지식의 어떤 가풍 따라서 그 학인을 제접하는 그런 방법이 또 있을 수 있는 그런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는 법거량을 하는 한 예죠. 주객이 서로 만났을 때 어떤 상황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뒤에 감변(勘辨)편에 가면  그런 사례들이 상당히 많이 나오는데 여기 시중(示衆)에도 간혹 이런 것들이 한번 씩 심심찮게 보입니다.

 
14-14 주객이 서로 만나다


道流야 如諸方有學人來하야 主客相見了하고

도류   여제방유학인래      주객상견료


便有一句子語하야 辨前頭善知識이라

편유일구자어      변전두선지식


被學人拈出箇機權語路하야 向善知識口角頭?過하야

피학인염출개기권어로      향선지식구각두찬과


看?識不識이어든 ?若識得是境이면

간이식불식        이약식득시경


把得하야 便抛向坑子裏하나니라

파득      편포향갱자리


學人이 便卽尋常然後에 便索善知識語하나니

학인   편즉심상연후    편색선지식어


依前奪之하면 學人云, 上智哉라

의전탈지     학인운   상지재


是大善知識이여하리니 卽云,

시대선지식             즉운


?大不識好惡로다하고 如善知識이

이대불식호오           여선지식


把出箇境塊子하야 向學人面前弄하면

파출개경괴자      향학인면전농


前人辨得하야 下下作主하야 不受境惑이라

전인변득      하하작주      불수경혹


善知識이 便卽現半身에 學人便喝한대

선지식    편즉현반신    학인편할


善知識이 又入一切差別語路中擺撲하면

선지식   우입일체차별어로중파박


學人云, 不識好惡로다 老禿奴여하야

학인운  불식호오      노독노


善知識이 歎曰, 眞正道流로다하니라

선지식   탄왈  진정도류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예컨대 여러 곳에서 학인이 찾아왔을 때 주인과 객이 인사를 나눈 뒤 학인이 대뜸 한마디를 던져 앞에 있는 선지식을 알아보려고 한다. 이를테면 학인으로부터 한 가지[箇] 시험하는 말[機權語路]을 끄집어내어 선지식을 향해서 입씨름하는 말[口角頭]을 던져서, '보십시오! 스님께서는 이걸 아십니까?' 라는 질문을 당하게 도니다. 그 때 선지식이 만약 시험하는 말이라는 것[是境]을 알면 그 말을 잡아서 곧바로 학인을 궁지로 몰아넣는다{구덩이에 던져번린다}. 그 때 학인은 곧 태도를 고치고 평상의 자세로 돌아간 뒤 곧 선지식의 말{가르침}을 찾는다. 그러면 선지식은 여전히 그를 부정해 버린다. 학인이 말하기를 '참으로 지혜로우십니다. 큰 선지식이십니다.' 라고 한다. 그 선지식은 곧 '이 녀석은 도대체 좋고 나쁜 것도 모르는 구나' 라고 한다.

  또 선지식이 하나의 시험하는 말[境塊子]을 학인 앞에 내놓고 희롱하면 그 학인이 알아차리고 하나하나 주제를 지어서 경계에 미혹함을 받지 않는다. 다시 선지식이 곧 진심을 조금[半身] 드러내 보이면 학인은 곧바로 "할!" 하고 고함을 친다.

  선지식이 다시 여러 가지 차별된 말로 시험해 보는데, 학인이 '좋고 나쁜 것도 모르는구나. 이 늙고 머리 깎은 중아.' 하면 선지식은 찬탄하기를, '진정으로 도를 배우는 벗이로다.' 라고 한다."

 

道流야 如諸方有學人來하야 主客相見了하고

도류   여제방유학인래      주객상견료


여러 지방에서 학인들이 선지식을 찾아온다하는 말입니다.

주객이 서로 보고 나서

 
便有一句子語하야 辨前頭善知識이라

편유일구자어      변전두선지식


  곧 한마디 말을 던지는 거죠. 선지식 앞에 와서 선지식에게 시험을 하는 그런 예다 이거죠. 그 전에 우리가 선방에 있을 때 보면 조실스님이 법상에 올라가서 법문을 하면, 공부하는 수행자가 나와서 절을 하고, 법에 대해서 묻고 하는 그런 예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 여기도 그런 것인데, 그 선지식도 선지식의 법력에 따라서 대처하는 방법이 다르고 또 나와서 묻는 그 학인도 과연 실력이 있는지? 없는지? 그런 문제도 역시 거기에 포함이 되어서 이루어지는 일들인데 대개 학인들이 여기에는 보면 제대로 되지못한 어떤 선지식의 경우에 학인이 와서 말을 한마디 턱 던진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불법입니까?" 라고 한마디를 던져 물으면서 선지식을 가려본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대답을 하는가? 거기에 따라서 그 선지식이 올바른 선지식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거죠. 요즈음 신도들도 공부를 많이 해 가지고 간혹 그런 예들이 있어요. 보면은...

그건 어느 시대고 공부하는 입장에 있어서는 사람을 시험 한다는 것이 조금 좋지 아니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간혹 사람을 알아보는 그런 입장에서 그러한 예들이 있습니다.

 
被學人拈出箇機權語路하야 向善知識口角頭?過하야

피학인염출개기권어로      향선지식구각두찬과


 "기권어로(機權語路)" 예를 들어서 아까 제가 이야기 했듯이 "어떤 것이 불법입니까?" 라고 이렇게 한번 내놓는다 이거지. 기권어로(機權語路)라는 것이 그런 말을 한마디 내 놓아가지고, 선지식 앞을 향해서 그 말을 던져서 입씨름을 한다는 거죠. 말을 던져서 입씨름을 한다. 이러한 표현이 벌써 임제스님이 보기에는 온전치 못한 관계들이다. 선지식이고 학인이고 간에 온전치 못한 관계들이다 이거죠. 말을 던져서 입씨름을 한다. "구각두찬과(口角頭?過)" 라고 하는 것은 입씨름을 하는데

  
看?識不識이어든 ?若識得是境이면

간이식불식        이약식득시경


  그대가 "간이식불식(看?識不識)" 그대가 알고, 알지 못하는 것을 보는 그러한 것을 입게 된다는 거야. 그러니까 이걸 한마디 턱 던져가지고 "어떤 것이 불법입니까?" 이렇게 던지면 거기에 대해서 이러구 저러구 말이 오고 가고 하는 것을 통해서 그 선지식이 뭘 알고 있는가? 불법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가? 이런 것을 당하게 되는데 "이약식득시경(?若識得是境)" 그대들이 만약 학인이 시험하는 그 말, 그게 경계죠. "어떤 것이 불법입니까?" 하고 턱 던지면 그것이 하나의 경계가 돼요. 이것을 알게 되면은

 
把得하야 便抛向坑子裏하나니라

파득      편포향갱자리


  그 말을 딱 잡아 가지고서 나를 던져 버리는 거야. "편포향갱자리(便抛向坑子裏)" 이것은 구덩이 속으로 나를 던져 버린다. 이를테면 "어떤 것이 해탈입니까?" 이렇게 물었다고 합시다. "어떤 것이 해탈입니까?" 라고 물었을 때 "누가 너를 묶었느냐?" 이렇게 대답하는 거예요. "누가 너를 묶었느냐?" 대답이지만 묻는 형식으로... 벗어난 것을 묻고, 해탈을 묻는데 해탈! 아, 그것은 뭐 삶과 죽음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고, 공부를 해 가지고 어떠 어떠한 경지에 이르렀을 때 벗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해탈이다. 이런 식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갱자리(坑子裏)" 구덩이 속으로 던져버린다 라고 하는 말은 "누가 너를 묶었느냐?" 누가 너를 묶었기에 해탈을 묻느냐 이 말이야. 아무도 묶은 사람이 없거든요. 묶었다면 자기가 자신에게 묶여 있는 것이지. 그 외 다른 게 아니거든. 그러니까 묶은 사람도 없는데 해탈을 물으니까 누가 너를 묶었느냐? 이렇게 떡 하는 거야. 그러면 눈 밝은 사람 같으면 거기에 대해서 아무 문제가 없지만은 눈 어두운 학인이기 때문에 옴짝달싹 못하는 거죠. 그렇게 될 것 같으면

 
學人이 便卽尋常然後에 便索善知識語하나니

학인   편즉심상연후    편색선지식어


보통으로 돌아가 버린다 이거야. 심상(尋常), 평상심으로 돌아간 연후에 선지식 말을 곧 찾는다. 선지식의 말이 아! 그게 무슨 뜻인가? 하고 이렇게 찾는다 이거지. 그렇게 되면

 
依前奪之하면 學人云, 上智哉라 是大善知識이여하리니

의전탈지     학인운,  상지재    시대선지식


  학인이 말하기를 상지재(上智哉), "아이구 훌륭하십니다! 대 선지식이 십니다." 이렇게 학인은 "누가 그렇게 너를 묶었느냐?" 하는 선지식의 이 말을 못 알아듣고 소화를 못하니까. 선지식이 그걸 싹 부정 해버리는 그런 말을 하게 되면 학인은 "아이고! 훌륭한 선지식입니다. 저는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표현 한다는 거죠. "상지재上智哉라 시대선지식是大善知識이여." 이렇게 하면, 그때 곧 선지식이 말하기를

 
卽云, ?大不識好惡로다하고 如善知識이

즉운  이대불식호오          여선지식


  너는 좋고 나쁜 것을 전혀 모르는 구나. 너는 진짜 누가 선지식이고, 누가 선지식이 아닌지도 모르고 덮어놓고 "아이고! 훌륭한 선지식입니다." 라고 말하는 구나. 그렇게 하는 거죠. 그리고 저 선지식이

 
把出箇境塊子하야 向學人面前弄하면

파출개경괴자      향학인면전농


  이 한 덩어리, 개경괴자(箇境塊子) 라고 하는 것은 흙덩어리 하나입니다. 흙덩어리 하나를 잡아가지고서 학인 앞에 던져 가지고서 희롱을 한다. 놀린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것이 열반이냐?" 그렇게 묻는 거죠. "어떤 것이 열반이냐?" 이런 식으로 놀리는 거죠. 왜? 흙덩어리라고 표현을 했는고 하니 이 말 속에는 기본적으로


"사자는 교인(獅子咬人)하고 한로축괴(韓盧逐塊)라" 해서 흙덩이를 가지고 사자를 향해서 던지면 사자는 그 돌덩이나 흙덩어리를 쫓아가지 않고 던진 사람을 와서 물어요. 그런데 이 삽살개, 보통 시골에서 키우는 그런 개는 흙덩이나 돌덩어리를 쫓아가는 거야. 던지는 사람을 와서 물지 않고 흙덩이나 돌덩이를 먹을 것인냥으로 자기를 향해 던지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걸 주루룩 쫓아간다구요. 냄새를 킁킁 맞고 그런 걸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학인과 선지식과의 관계에 대해서 사람을 제도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그런 형식을 씁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선지식이 학인을 대할 때 또 어쩔 수 없이 나올 수 있는 그런 방법이라. 그러니까 조금 눈을 뜬 학인 같으면 그 말의 저의를 알아 차려야 되는 거죠. 말의 저의를!


보통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보면 그냥 순수하게 사람을 상대할 때에는 그런 게 없죠. 저의가 없고 그냥 액면 그대로 주고받고. 거기에는 속으로 더 생각할 것도 없고 머리 돌릴 일도 없어. 요즈음 표현으로 하면 “머리 돌린다” 그러죠. 머리 돌릴 일도 없고, 저 말의 속뜻이 뭔가? 저 사람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저런 말을 하는가? 이러한 생각을 할 필요가 없죠. 사실은. 그런데 조금이라도 상업적인 것이 거기에 게재가 되거나, 이해관계가 게재가 되어 사람을 떠 보기 위하여 말을 턱 이렇게 던져본다든지 아니면 자기가 노리고 있는 의미보다 반대적인 말을 한다 이거야.


반대되는 말을 하면 거기에 대해서 저 사람이 어떻게 반응하는가? 예를 들어서 선거철 같은데도 보면 흔히 있을 수 있는 거죠. 甲이라는 사람과 乙 이라는 사람! 두 사람이 나왔는데 甲을 지지하는 사람이 乙을 칭찬해 보는 거라. “아! 乙이라는 그 후보자가 상당히 실력도 있고, 경험도 많고 좋다.” 라고 그렇게 말을 던져보는 거지. 그러면서 듣는 사람이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보는 거지.


그리고는 저 사람이 乙을 반대하는 하는 말을 할 것 같으면 내 사람이 될 수 있겠다고 파악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고 그 말을 따라가서 다시 말해서 똥개가 흙덩이를 따라가 가지고서 그대로 거기에 빠져가지고 “아, 그 乙 이라는 사람이 아주 훌륭하고 좋다! 당신도 乙이라는 사람을 지지 하느냐고? 나는 이번에 乙이라는 사람을 지지 한다”고 이렇게 덥석 흙덩이를 물어버린다 말이야.


개처럼 흙덩이를 물어버리고 이 말을 던졌던 사람은 “너 속은 어떻구나.” 하고 그만 알아차리는 거야. 그리고는 자기가 생각했던 계획을 거기서 거두어들인다든지 하는 그런 관계입니다. 이를테면 학인과 선지식과의 관계에서도 법을 논(論)하는 데에도 그와 비슷한 관계가 이루어진다는 거죠.


상거래를 한다든지 정치적인 거래라든지 이런 데는 그러한 것이 아주 난무합니다. 아주 난무해요. 삼국지 같은 것 읽어봐도 그런 일들이 너무 많아요. 이 정치적인 문제는 그런 것이 아주 많습니다. 그런 것이 능한 사람은 “지모(智謀)가 있다.” 또는 “계교(計巧)가 있다.” 꽤가 있다 그러지만 그건 사실은 몹쓸 지모(智謀)입니다.


순수하게 대해야 되는데 그걸 한 자락 깔고, 두 자락 깔고, 세 자락 깔고, 얼굴을 몇 꺼풀 덮어쓰고는 자기의 진정한 얼굴을 안 내어 놓는 그런 관계들을 볼 수 있는데 그런 것은 세속적인 입장이고 여기서는 선지식이 학인을 다루는 방법에 있어서의 이런 일들이 있다는 겁니다. “향학인면전농(向學人面前弄)하면” 학인 면전을 향해서 놀린다. 이거야. 흙덩이를 던져가지고.

 
前人辨得하야 下下作主하야 不受境惑이라

전인변득     하하작주       불수경혹


  그러면 학인이 그 의도를 알아차려서 하나하나, 낱낱이 내리는 말마다 주제를 짓는다. 하나하나 전부 주제를 지어가지고서 그 선지식이 던지는 말에 미혹을 당하지 않는다 이거야. 흙덩이를 딱 던지면 흙덩이를 물지 않고 던지는 사람을 문다. 미혹을 당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乙을 지지하는 사람도, 甲을 지지하는 사람이 와서 뭐라고 딱 한 마디하면 거기에 대해서 자기 속은 한 자락 깔고 이야기를 해야 된다는 거지.

 

와서 이야기하는 사람의 그 의중을 알아볼 그런 계획을 하고서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 그만 덥석! 말하자면 자기표현이나 자기 속을 보여 버리면 그만 당하는 거죠. 이 정치에서는 그런 것들이 너무 많아요. 특히 옛날 정치에 나라가 아주 혼란스러울 때는 더욱 그런 것이 많습니다. 여기서는 상대의 학인이 어리석지 않아서 낱낱이 그 경계의 혹을 받아드리지 않는다. 흙덩어리를 물지 않고 사람을 물줄 안다 이거야.

 
善知識이 便卽現半身에 學人便喝한대

선지식   편즉현반신    학인편할


  그러면 선지식이 아! 괜찮은 학인이다. 이렇게 해서 자기의 어떤 속을 어느 정도 표현하고 드러낸다. 학인이 곧 ‘할!’을 해. 이럴 때 ‘할’이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쓸어버리고 부정해 버리는 그런 ‘할’입니다. ‘할’(喝)한대,

 
善知識이 又入一切差別語路中擺撲하면

선지식   우입일체차별어로중파박


  선지식이 이렇게 할 것 같으면 “일체차별(一切差別)” 체(切)자가 일체切자가 돼요. 모든 차별의 어로 중에 들어가서 두드리고 건드려 본다. “차별어로(差別語路)” 라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 교리상의 이야기죠. 그런 걸 가지고 하나하나 불교를 이야기를 하게 될 것 같으면 삼신(三身)은 어떻다. 예를 들어 법신. 보신. 화신은 어떻다.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낱낱이 분석해서 설명하는 것 그런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學人云, 不識好惡로다 老禿奴여하야

학인운  불식호오      노독노


  학인이 말하기를 선지식이 좋고 나쁜 것도 알지 못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선지식이구나. “노독노(老禿奴)” 늙은 중이로구나. 늙고 머리 깎은 종(奴)! 글자로는 이런 뜻이거든요. 늙고 머리 깎은 종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늙은 중이로구나. 이렇게 해가지고서 이야기가 끝나면

 
善知識이 歎曰, 眞正道流로다하니라

선지식   탄왈  진정도류


  선지식이 찬탄해 말하기를 “진정도류(眞正道流)로다” 그대야 말로 아주 진정한 도 닦는 벗이다. 이렇게 주고받는 예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임제스님이 이러한 예를 말하는 것은 말하자면 온전치 못한 선지식들이 법담을 주고받는 그런 것들을 부정하는 그런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되지도 않게 선지식도 온전치 못하고 학인도 제대로 모르면서 서로 떠보고 저울질하는 그런 예들이 그 당시로서는 아주 파다하게 많았으니까 그러니까 그런 관계들을 어떤 의미에서 보면 경계하는 뜻에서 약간은 비꼬아서 하는 그러한 의도가 담겨져 있습니다.

 

14-15 귀신과 도깨비들


如諸方善知識은 不辯邪正하야

여제방선지식   불변사정


學人이 來問菩提涅槃三身境智하면

학인   래문보리열반삼신경지


?老師가 便與他解說타가

할노사   편여타해설타


被他學人罵著하고 便把棒打他言無禮度하나니

피타학인매착      편파봉타타언무례도


“제방의 여러 선지식들은 삿된 것과 바른 것을 구분하지 못한다. 그래서 학인이 찾아와서 보리와 열반과 삼신(三身)과 경계와 지혜 등을 묻는다. 눈이 먼 노사는 그에게 해설을 해 주다가 학인으로부터 힐난을 받게 되면 곧바로 몽둥이를 후려치면서 ‘이 예의와 법도도 모르는 놈아!’ 라고 한다.

 

如諸方善知識은 不辯邪正하야

여제방선지식   불변사정


  다른 지방의 선지식들이라고 하는 것이 모두 사(邪)와 정(正)을 가리지 못하고 다시 말해서 불법을 이야기 하는 사람은 이 시대에도 얼마나 많습니까? 예나 지금이나 불교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너무 많죠. 그런데 어느 것이 정법(正法)이고 어느 것이 사법(邪法)인지 또 정법이라고 엇비슷하게 말은 해도 그게 삿된 법은 아니지만 그래도 살아있는 어떤 생명력이 있는 그런 법은 아니다 이거야.


여기서 임제스님이 하는 이야기는 무슨 사사한 그런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사법(邪法)이라는 뜻이 아니라 생명력이 있는 법이 아니라 하는 그런 뜻이죠. 어떤 선지식들은 사(邪)와 정(正)을 가리지 못해서, 여기서는 어떤 선지식 정도가 아니고 임제스님의 표현은 제방 선지식! 제방의 모든 선지식들은 사와 정을 가리지 못해가지고서

 
學人이 來問菩提涅槃三身境智하면

학인   래문보리열반삼신경지


  학인이 와서 보리. 열반. 삼신(법신. 보신. 화신). 경지(경계. 지혜) 이런 것을 물을 것 같으면 어떤 것이 보리냐? 어떤 것이 열반이냐? 어떤 것이 법신. 보신. 화신이냐? 어떤 것이 경계냐? 어떤 것이 주관적인 지혜냐? 이런 것들에 대해서 물을 것 같으면

 
?老師가 便與他解說타가

할노사   편여타해설


  눈먼 노사가 그 사람에게 곧 해설을 해 주는 거죠. 아! “지경(智境)은 어떻다. 삼신은 바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또 삼신은 법신. 보신. 화신이다.” 이런 식으로 교리적인 지식을 가지고 해설을 해 준다 이거야. 그러다가

 

被他學人罵著하고

피타학인매착


  “그것 듣자고 내가 스님에게 그걸 물었느냐? 정말 살아있는 법문 한 마디 듣자고 물은 것이지 그런 교리적인 설명, 그것 듣자고 물은 게 아니다.” 그래서 학인이 꾸짖는 거야. 무슨 놈의 선지식이 무슨 경을 외우고 있는 거야. 뭐하는 거야 지금! 이런 식으로 꾸짖는 것입니다.

 
便把棒打他言無禮度하나니

편파봉타타언무례도


  그 선지식은 찔끔해가지고 몽둥이를 잡고 그 학인을 때리면서 “이 놈이 젊은 놈이 예도 없다.” 그 사람에게 예도가 없다. 라고 버릇없는 놈이라고 이렇게 하게 되는 거죠. 그런 예들이 또 많습니다. 보면... 선방에서 더러 법문이 오고 갈 때 보면. 법문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데는 선후(先後)도 없고, 노소도 없고 사실은 그래요.


오로지 법 그 자체만 가지고 이야기가 되는 것이지. 거기에 선배다. 후배다. 늙었다. 젊었다. 승이다. 속이다. 비구다. 사미다 이런 분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사실은... 그런데 이야기를 하다가 딸린다든지 또 자기 본색이 드러났다든지 그러면 결국은 젊은 놈이 예의가 없다. 후배가 예의가 없다. 이런 식으로 인간적인 쪽으로 내려와 버리는 거야.


예를 들어서 우리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이야기 하는데, 이런 이야기들은 전부 방편설이거든요. 이렇게 해석하고, 저렇게 해석하고 뭐 삼신이 어떻고, 지혜와 경계가 어떻고 하는 그런 방편설은 예컨데 전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이거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도 사실은 근사하거든요. 부처님의 설법도 이 임제스님의 임제록도 전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야. 어디까지나 이것은 설법이고 말이고 문자이기 때문에 이것도 진짜 살아있는 법은 아니라 구요.


진짜 살아있는 법은 우리가 이 말을 통해서 우리 스스로 체득하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느끼는 것이고, 체득하지 못하면 느끼기라도 해야 되고, 또 느끼지 못하면 그 나름대로 감동이라도 해야 되고, 제일 바람직한 것은 눈을 확 떠서 큰 깨달음이 나에게 오는 거야. 이게 살아있는 진짜법입니다.


이 임제록이 어록중의 왕이고 그래서 아주 대단한 소리를 했죠. 보면 얼마나 혹독한 표현을 합니까? “경전, 어록은 전부 똥 닦는 휴지다.” 이런 식으로까지 이야기를 하고 “오대산에 무슨 문수보살이 있다는 말이냐? 오대산에 문수보살을 찾아가는 너! 그대야말로 진짜 살아있는 문수다.”  이런 식으로 상식적인 불교를 완전히 뒤엎어버리는 그런 이야기를 한다구요.


그런 이야기를 듣고는 아! 이런 이야기야말로 참 기상천외하고 아주 태풍과도 같고, 지진과도 같은 이런 엄청난 이야기다. 깜짝 놀라잖아요. 우리의 상식적인 불교에서 볼 때. 그렇더라도 그 말도 역시 방편이야. 그 말도 진짜는 아니라 구요. 그러한 그 엄청난 말이 진리 같지만 그건 진리가 아니야. 그 말이 갖고 있는 살아있는 어떤 생명! 거기서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느끼고, 내가 어떻게 거기에 계합하느냐 하는 것. 이것이 진짜법이라 구요.


이게 생명이 있는 법이고, 말은 어디까지나 말이고 아무리 엄청난 말을 해 놔도 그것은 종이고, 먹이고, 문자고, 이름이고, 말일 뿐이라. 그러니까 그런 방편은 어디까지나 방편이기 때문에 진짜는 아니다 이거야. 그러면 진짜 달 이야기! 깨달음의 경지! 그런 방편이 다 사라져버리고, 방편은 전혀 해당되지 않는 본래 부처라고 하는 그 자리! 다시 말해서 깨달음의 그 경지라고 하는 입장에 있어서는 거기에는 남녀노소, 승속을 가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속인이 그럴 수가 있느냐? 무슨 후배가 그렇게 무례할 수가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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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無比스님 임제록 강의 (여여선당) 녹취록 임제록 42강 短長中庸 2009.12.15 4595
49 無比스님 임제록 강의 (여여선당) 녹취록 임제록 41강 短長中庸 2009.12.15 4601
48 無比스님 임제록 강의 (여여선당) 녹취록 임제록 40강 短長中庸 2009.12.15 4909
47 無比스님 임제록 강의 (여여선당) 녹취록 임제록 39강 短長中庸 2009.12.15 4840
46 無比스님 임제록 강의 (여여선당) 녹취록 임제록 38강 短長中庸 2009.12.15 4472
45 無比스님 임제록 강의 (여여선당 - 20주년 기념법회...신심명) 녹취록 제37강 短長中庸 2009.12.15 5235
44 無比스님 임제록 강의 (여여선당 - 20주년 기념법회...신심명) 녹취록 제36강 短長中庸 2009.12.15 4806
43 無比스님 임제록 강의 (여여선당 - 20주년 기념법회...신심명) 녹취록 제35강 短長中庸 2009.12.15 5449
42 無比스님 임제록 강의 (여여선당 - 20주년 기념법회...신심명 원문) 短長中庸 2009.12.15 4874
41 無比스님 임제록 강의 (여여선당) 녹취록 임제록 34강 短長中庸 2009.12.15 3254
40 無比스님 임제록 강의 (여여선당) 녹취록 임제록 33강 短長中庸 2009.12.15 3215
39 無比스님 임제록 강의 (여여선당) 녹취록 임제록 32강 短長中庸 2009.12.15 3409
38 無比스님 임제록 강의 (여여선당) 녹취록 임제록 31강 短長中庸 2009.12.15 3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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