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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록46강

 


逢著便殺하라 逢佛殺佛하며 逢祖殺祖하며

봉착편살      봉불살불      봉조살조


逢羅漢殺羅漢하며 逢父母殺父母하며

봉나한살나한      봉부모살부모


逢親眷殺親眷하야사 始得解說하야

봉친권살친권        시득해설


不與物拘하고 透脫自在니라

불여물구      투탈자재

 

마주치는 대로 곧 바로 죽여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아라한을 만나면 아라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속을 만나면 친속을 죽여라. 그래야 비로소 해탈하여 사물에 구애되지 않고 투철히 벗어나서 자유 자재하게 된다.”

 

위에서는 부처님이라고 하는 그 공과, 종교라고 하는 공이 말하자면 사실은 속고 들어가는 거야. 아! 부처님인데, 불교인데 하는 그런 권위에 속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逢著便殺하라

봉착편살

 

  밖을 향하든, 안을 향하든 만나는 대로 죽여라. 부정하라 이 말입니다. 죽여라는 말이 일부러 찾아가서 무슨 살인을 하라는 뜻이 아니라 거기에 속지 말라. “막수인혹(莫受人惑)” 다른 사람에게 미혹을 받지 말라. 다른 사람에게 속지 말라. 넘어가지 말라. 끄달리지 말라. 집착하지 말라. 그 말입니다. “봉착편살(逢著便殺)” 이라고 하는 것은 만나자마자 곧 죽여라.

 

 

逢佛殺佛하며 逢祖殺祖하며

봉불살불      봉조살조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며,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逢羅漢殺羅漢하며 逢父母殺父母하며

봉나한살나한     봉부모살부모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逢親眷殺親眷하야사 始得解說하야

봉친권살친권        시득해설


  친척과 권속을 만나면 친속. 권속을 다 죽여서 그들로부터 비로소 해탈을 얻어. 거기서부터 벗어나! 그러니까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부터 끄달리지 않는 것. 그런 어떤 권위! 그 높은 권위에도 우리가 끄달리지 않는 것. 그래서 거기로부터 해탈해서

 

不與物拘하고 透脫自在니라

불여물구      투탈자재


  삶으로부터 구애받지 않는 것. 물(物)이라고 하는 것은 그 모든 것입니다. 부처님이니, 조사니, 나한이니, 부슨 보살이니, 부모니, 친척. 권속이니 하는 이 모든 것으로부터 구속받지 아니하는 것. “투탈자재(透脫自在)” 툭 터져가지고... 뚫을 투(透), 벗을 탈(脫)자입니다. 그물을 뚫고 새가 자유롭게 날아가 버린다든지. 물고기가 그물을 뚫고 그물 밖으로 벗어나 버리는 것이 투탈(透脫)입니다. 우리는 어떤 상식이나 살아오면서 관련되어지는 세상의 풍속, 기준 이러한 기준의 그물에 전부 얽매여 사는데 그렇다고 해서 제멋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구속으로부터 벗어난 “무위진인(無位眞人)”으로 살라하는 그런 뜻입니다. “투탈자재(透脫自在)할지니라.”

 
이것 참! 엄청난 법문이거든요. 여기에 표현한 것이 요즈음 걸핏하면 건방지게 잘 활용을 하는데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하는 이게 상당히 큰 소리죠. 보통 큰 소리가 아닙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도저히 이러한 것을 찾아봐도 볼 수가 없죠. “하나님을 만나거든 하나님을 죽여라.” 이런 말이 어디 있겠어요? 다른 종교에서는 도저히 그런 말은 상상도 못하는 거지. 이 불교의 특징이라는 것이 부처님을 따르고 부처님으로부터 진리를 배우는데 정말 진리를 배우는 것이 목적이지. 부처님께 매달리는 게 목적이 아니다 이겁니다.


부처님도 방편입니다. 내가 깨달음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도구입니다. 하나의 도구고 하나의 방편이다. 라고 그렇게 생각하라는 거야. 그렇지 않고 거기에 목을 매면 그게 내가 종이 되는 거지. 진짜 우리가 부처님 종이 되는 거야. 그러한 상황에서 벗어나고 끄달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강하게 표현을 해야 좀 알아듣는 거야. 이렇게 강하게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부처를 죽일 정도 되면 부처님께 속지 않지. 내가 죽일 사람에게 뭘 하려고 속겠어요? 더 이상 부처님이 어떤 달콤한 말을 해도 그 말에 속지 않는 거죠. 그 말보다 더 위대한 “내 ”가 있어. 부처님보다 훨씬 위대한 “내” 가 있다고...


밖에 있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휘황찬란한 부처님이라 해도 그건 별것 아니야. 정말 살아있는 내가 있기 때문에 내가 더 위대하고 이 우주를 그대로 내가 창조한 그런 위대한 내가 있는데 더 이상 끄달릴 필요가 없는 거지. 그래서 이런 표현을 씁니다. 그렇지만 이런 표현은 아무도 못 쓰는 것입니다. 어떤 조사 스님들도 이런 표현을 못 써요. 임제스님이나 쓸 수 있는 말입니다.


如諸方學道流는 未有不依物出來底라

여제방학도류   미유불의물출래저


山僧向此間은 從頭打하야

산승향차간   종두타


手上出來手上打하고 口裏出來口裏打하고

수상출래수상타      구리출래구리타


眼裏出來眼裏打하나니 未有一箇獨脫出來底요

안리출래안리타         미유일개독탈출래저


皆是上他古人閑機境이니라

개시상타고인한기경


“제방에서 도를 배우는 벗들은 말이나 형상에 의지하지 않고 내 앞에 나온 자는 하나도 없었다. 산승은 여기에서 처음부터 그들을 쳐버린다. 손에서 나오면 손으로 치고, 입에서 나오면 입으로 치며, 눈에서 나오면 눈으로 쳐버린다. 다만 홀로 벗어나서 나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모두가 옛날 사람들의 부질없는 지식이나 언어나 행위들[閑機境]을 숭상하고 받드는 것이었다.”

 

如諸方學道流는 未有不依物出來底라

여제방학도류   미유불의물출래저


  제방의 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미유불의물출래저(未有不依物出來底)” 미유(未有), 있지 않다. 없다 이거야. 사물에 의지하지 않고, 나오는 사람들은 없다. 어떤 경계든지 의지하지 않고 전부 우리가 의지하고 사는데 전부 있다. 없다. 너다. 나다. 전부 있는 것 아니면 없는 것이고, 너 아니면 나고, 내 것 아니면 네 것이고, 전부 어떤 그런 상대적인 관계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데 그것을 벗어나서 사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山僧向此間은 從頭打하야

산승향차간   종두타


산승은 이곳을 향해서 처음부터 쳐부순다. 이 말이 종두타(從頭打)! 처음부터 다 부정하는데

 

手上出來手上打하고 口裏出來口裏打하고

수상출래수상타      구리출래구리타


  손으로 써서 나오면 손으로써 부정해 버리고 쳐버린다. 수상타(手上打)하고, 말, 입으로써 뭔가 설명해서 나오면 말로 쳐버린다. 구리타(口裏打)야.

 

眼裏出來眼裏打하나니 未有一箇獨脫出來底요

안리출래안리타         미유일개독탈출래저


  눈으로써, 눈에서 나오면 안리타(眼裏打)! 눈으로써 쳐버리나니. 그런데 한개도 투탈(透脫)하고 출래(出來)하는 사람이 있지 못함이오. 전부 사람이 산다는 것이 그러니까, 이 임제스님은 “나는” 이 말입니다. 산승은, 여기에서 처음부터 아예 다 쳐부순다. 손으로 왔다든지, 입으로 왔다든지, 눈으로 왔다든지 간에, 전부 나는 부정하고 끄달리지 아니하고 아까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인다.” 하는 그 이야기 흐름이 예요.  이야기가 그대로 지금까지 흘러오는데, 거기에 끄달리지 않고 오로지 유아독존(唯我獨尊)으로!


유아독존으로 이렇게 나는 존재한다. 절대 현재로써 이렇게 현재 독존으로 존재한다. 어디에도 끄달리지 않고 사람들은 누구 하나도 “미유일개(未有一箇)” 누구 하나도 모든 그러한 상황으로부터 홀로 벗어나온 사람이 없더라. 홀로 벗어나온 사람은 없더라. 그리고는

 

皆是上他古人閑機境이니라

개시상타고인한기경


  모두를 보니까 고인들이 부질없는 기경, 쓸데없는 계기 또는 말씀, 그들이 남겨놓은 가르침. 이런 것만 전부 흉내 내고 있다. 상좌가 떠받들고 의지하고 있다. 이 말입니다. 우리부터라도 그렇죠. 지금 우리 자신으로 있지 않고 임제스님의 어록이 좋다 해가지고 여기에 푹 빠져있고, 여기에 목을 매고 그냥 임제! 임제! 하면 최고인냥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 모두가 고인들의 부질없는 기경을 떠받들고 있는 것이다. 숭상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가 사실은 이걸 알고 공부해야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임제록이 좋아서 임제록에 빠져 있더라도 이건 역시 “나는 아니다.” 임제록을 즐기는 것이지 나는 아니다. 임제록을 딱 덮어도 나는 나로 있어야 되거든요. 또 나는 나대로 있는 것이고 임제록하고 관계없이. 이게 살아있는 “無位眞人” 인데 그것 하나 밝히자고 하는 것이지 무슨 임제록이 그렇게 장한 것입니까? 그렇게 알고 봐야 된다는 거예요. 그렇게 알고 경전을 보고, 어록을 보고, 하나의 방편으로 그러니까


부처님의 금강경에서 그런 말 참 좋은 말이거든요. “내 설법을 뗏목의 비유로 받아드려라.” 뗏목의 비유로 받아 드려라. 그 뗏목은 강을 건너갈 때 정말 꼭 필요한 도구죠. 그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너다가 뗏목 구경하고 강으로 오르락 내리락 그렇게 놀다가 그만 어디로 가야할지 잊어버리고는 제자리로 돌아오는 그런 상황이라. 우리가 사는 것이. 그 뗏목을 탔으면 건너가야 되고 건너갔으면 미련 없이...


건너 주었다 해서 뗏목을 짊어지고 간다든지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뗏목을 깡그리 잊어버리고 가야 되는 거죠. 그게 뗏목의 뜻이라. 부처님의 가르침이 훌륭하고 이 세상에 둘도 없는 그런 것이고 또 임제 어록이 어록중의 왕이라서 참으로 둘도 없는 그런 가르침이라고 치더라도 그래도 뗏목으로 알아야지. 이 임제록이라는 뗏목을 통해서 내가 저 언덕에 건너가야지. “참 나를 보는 것” “정말 살아 있는 나를 인식하고 나로써 사는 것” 이것이 우리의 목적이고 그것이 임제록을 공부하고 불교를 공부하고 경을 보는 목적이 거기에 있으니까 그 목적을 잊어버리면 안 되는 거죠. 목적을 놓치지 말라하는 이 뜻입니다.


“임제스님을 보십시오! 얼마나 멋집니까?” 홀로 벗어나 있는 사람은 없고, 대개 사람들을 보니까, 모두가 옛사람들의 부질없는 기경, “한기경(閑機境)” 이 기(機)자도 나무 木변을 써야 됩니다. 부질없는 기경이라고 하는 것이 옛날 사람들이 경험한 이야기, 설법, 기록, 부처님의 경전이나 조사들의 어록이나 조사들이 남겨놓은 “할” 이나 “방” 이나 또 깨달은 어떤 계기들 “어떤 것이 불법입니까?” 하면 몽둥이로 후려쳤다든지. “어떤 것이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하면 “정전백수(庭前栢樹)다.” 라고 하든지. “개가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라고 하면 “없다”라고 한다든지. 또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라고 했을 때 “마른 똥막대기다.” 이런 이야기들이 너무 많잖아요. 신기 하거든요.


그게 아주 신기한 소리야. 듣도 보도 못한 소리지. 그러면 그것 물고 늘어지는 거야. 그것만 숭상하고 있는 거지. 평생을 부질없는 고인(古人)의 한기경(閑機境)이라는 것이 바로 그거야. 옛사람들이 남겨놓은 부질없는 기경, 다 그것은 먹고 남은 떡 따위고 말하자면 재탕, 삼탕 다 해버린 아무 맛도 없고 영양가도 없는 삶아서 내다버린 찌꺼기라구요. 따지고 보면.


그렇게 속아서 거기에 매달려 있을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부 그것만 숭상하고 있다. 개시상(皆是上), 상(上)자가 그것을 흉내 내고 의지하고 떠받들고 있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떠받들고 있더라도 그런 줄 알고 떠받들어야 된다. 이 말이야. 그런 줄 알고.


임제록뿐만 아니라 어떤 경전 어록도 역시 마찬가지인 거죠. 그러니까 임제스님은 곧잘 이런 아주 뛰어난 표현을 하면서도 또 거기에 끄달리지 말라. 거기에서 벗어나라. 하는 이런 말씀을 아주 잘합니다. 금강경에서도 그런 표현이 있죠. 여기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하는 이 말은 누구도 거기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전부 부질없는 옛 기경을 흉내 내고 그것을 떠받들고 있다.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금강경에서 익힌 익숙한 말을 여기다가 이끌어서 대비를 한다면 이런 말이 됩니다. “내 설법이 설법이 아니라, 그 이름이 설법이다.” 그랬잖아요. 부처님의 주옥같은 설법이, 설법이 아니다 이거야. 그 이름이 설법이야. 말을 하자니 설법이야. 그렇게 했는데도 거기에 우리는 머리를 처박고 있는 거죠.


“아뇩다라 삼먁삼보리가 아뇩다라 삼먁삼보리가 아니라 이 이름이 삼먁삼보리다.” 또 “ 중생이 중생이 아니라 그 이름이 중생이다.” 그 중생에다 우리는 머리를 처박고 있는 게 이게 또 큰 병이야. 부처라고 하는데 머리를 처박고 있는 것도 큰 병이지만, 중생이라고 하는데 머리를 처박고 있는 게 큰 병이 예요.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하는 그 중생상이라. 자기의 열등의식이죠. 중생이라고 하는 열등. 아! 부처님은 어떻고, 성인은 어떻고, 조사는 어떻고, 이렇게 해서 그들을 높여놓고 내 자신은 중생이라고 하는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거죠. 설사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성인 앞에는, 특히 과거의 성인 앞에는 그만 꼬리를 내리는 거죠. 그게 열등감이죠. 그럴 일이 아니라는 거예요. 정말 부처님이나 조사스님들의 말씀을 제대로 들여다보면 결코 그럴 일이 아니라 “너 자신에게도 과거의 훌륭한 불조(佛祖)와 하나도 못하지 않는 그런 부처가 고스란히 있다.” 이랬거든.

 
그러니까 그런 입장에서 보면, 부처님도 금강경에서의 그 훌륭한 설법도 설법이 아니라 이 이름이 설법이다. 중생이 중생이 아니라 이 이름이 중생이다. 중생이라고 하는 그런 열등의식에서 머리 처박고 살지 말라. 하는 것입니다. 당당하게 살아라 이거지. 부처하고 하나도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왜 중생상에 떨어져 있느냐? 그러니까 이런 것은 조사스님은 자기 것이 되어가지고 자기소리로 나온 것이죠. 그 말은.


“부처님의 설법이 설법이 아니고 이 이름이 설법이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똑 같은 뜻이잖아요.  뜻이 어디 다른 겁니까? 똑 같잖아! 그 표현이 다른 것이지. 부처님이라고 하는 그 권위, 부처님의 설법이라고 하는 그 권위, 우리는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그 가르침을 따르는 대중들을 삼보라고 해서 그냥 하늘처럼 떠받들잖아요.


떠받들면서도 그러한 사실을 알고 또 떠받들어야 돼요. 그게 중도라. 그렇게 알고는 그만 그 다음부터는 안중에 아무도 없다면 그것은 또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중도적으로 안 것이 아닙니다. 정말 중도의 이치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 이름이 설법이다.” 라고 알아도 정말 애지중지하고, 돈을 들여서 정말 책을 잘 꾸미고, 비단보로 싸고, 책을 잘 관리하고 정말 세상에서 둘도 없는 보물로 위할 줄도 알고 또


“이 이름이 부처님의 설법이다. 경전이 아니라 이 이름이 경전이다.” 이렇게 그 양면을 동시에 알고 있어야 그게 제대로 아는 것이다 이거야. 그러니까 여기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일 줄도 알지마는 또 부처를 위할 때, 아니 부처가 아니고 불상까지도! 불상까지도 아주 정성스럽게 위할 줄 아는 그런 마음. 종이에 부처 佛자 하나만 씌어 있어도 그것 어떻게 함부로 휴지통에 넣지 못하는 그런 마음이 필요하다 이겁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또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일 줄 아는 마음! 이것이 서로 상반되고 이율배반적인 그런 논리 같지만 그게 사실은 중도고 그것이 제대로 소견이 된 사람이다. 이거죠.


제대로 소견이 든 사람은 그 양면을 동시에 수용할 줄 아는 사람이다. 이 뜻입니다. 그렇게 알아야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이래 놓고 이런 입장만 우리가 이해하면 그건 큰 오류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위험성이 사실은 있어요. 또 그렇다고 길게 설명하면 또 그렇고. 그러니까 위험에 빠지지 않을 만치 우리가 올바르게 이해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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