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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록47강

 


  “이 임제록은 인간의 무한한 자유를 잘 나타내고 있는 가르침이다.”

이렇게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습관이 되어버리면 우리가 구속을 받고 살아도 구속을 받고 사는지. 아니면 자유를 누리고 사는지. 이런 것을 잘 모르는 수가 많습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의 상황에서 너무 많은 구속을 받고, 그래서 부자유(不自由)하게 사는데 본래 우리의 존재는 너무나도 걸릴 것이 없는 “대 자유인이다.” 라고 하는 것. 이것은 물론 불교가 주장하는바 이지만 특히 임제스님은 이러한 면에서 더욱더 중점을 두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째서 자유로울 수가 있느냐?” 개개인이 부처로써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우리의 입장이고, 그래서 우리가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는 완전무결한 인격체에 대한 이해를 하게 되면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이 모습 이대로, 이 처지 이대로 아주 “대 자유인이다.”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더 이상 무엇을 구하거나 장엄을 하고, 꾸민다 하는 것은 마치 머리에다가 머리를 올리는 거와 같은 그런 괴상망측한 짓에 불과하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것을 우리가 곰곰이 잘 생각을 해보면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하는 이 능력! 이 작용! 이것이야말로 완전무결한 부처님이고, 더 이상 덮을 것이 없는 그런 존재고. 거기서 더 이상 부족한 게 있겠는가? “흠소십마(欠少什?)오?” 라는 가르침이 여기에도 나오게 됩니다.

 


우리가 여기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하고 느끼고, 그것이 자기 살림살이가 되어서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중요한 것이며 또 여기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해야 합니다. 이것만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고 느끼고 그것을 활용한다면, 사회적인 어떠한 기준에서 자기의 처지가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참으로 훌륭하고 뛰어난 그런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조작을 하거나 일부러 만든 것이 아니라, 본래 이렇게 되어 있는 상황을 우리가 이해하는 것이죠.

 


본래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지. 우리가 억지로 만든다든지 무슨 돈을 들여서 꾸민다든지 하는 그런 것이 절대 아닙니다. 본래 우리의 본성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많은 가르침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이고, 가장 요긴한 것이고 또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것이 99%를 차지하는 것이죠. 그 나머지의 가르침은 아무리 양이 많고 또 우리의 마음에 든다손 치더라도 그런 사실은 조작이고 치장이고 악세사리에 불과한 것이죠. 그래서 사실은 있으나마나한 그런 것이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임제스님은 한결같이 불법의 진정한 알맹이만을 가지고 일러주는 것입니다. 너저분한 지엽적인 그런 이야기는 사실 잘 없습니다. 여기에 맛을 들인 사람은 더 이상의 맛이 있을 수 없는 그러한 최상의 진리입니다. 무슨 인과이야기라든지 전설, 그 외 아주 도덕적인 이야기, 교리적인 이야기, 이런 걸 가지고 기도를 하고 있으면, 그야말로 진심진미의 올곧은 임제스님의 법문에는 맛을 못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임제스님의 상향법문! 상향법문 여기에 우리가 끝에는 이해가 되고 여기에 맛을 느껴야 되고 이것이 “불교인들의 살림살이가 되어야 한다.” 는 그러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14-18 그대는 무엇이 부족한가

 

山僧은 無一法與人이요 祗是治病解縛이니 ?諸方道流는

산승   무일법여인      지시치병해박       이제방도류

 
試不依物出來하라 我要共?商量이라 十年五歲토록

시불의물출래      아요공이상량      십년오세

 

?無一人하고 皆是依艸附葉竹木精靈과 野狐精魅니

병무일인      개시의초부엽죽목정령   야호정매

 

向一切糞塊上亂咬로다

향일체분괴상란교

 

“산승은 남에게 줄 법이 하나도 없다. 다만 병에 따라 치료를 해주고 묶여 있는 것을 풀어줄 뿐이다. 그대들 제방의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시험 삼아 사물에 전혀 의존하지 말고 나와 보아라. 나는 그대들과 법에 대해서 문답을 하고 싶구나. 15년이 지나도록 누구 한 사람 없었다. 모두가 풀이나 나무 잎사귀나 대나무나 나무에 붙어사는 귀신들이다. 또 여우나 도깨비 같은 것들이다. 모두 똥 덩어리에 달라붙어 어지럽게 씹어 먹는 것들이다.”

 

 

山僧은 無一法與人이요

산승   무일법여인

 

  산승은 어떠한 것도 누구에게도 일러주는 것이 아니다. 한 법도 누구를 위해서 주는 게 없다. “여(與)” 는 준다는 것입니다. “무일법여인(無一法與人)” 주는 게 없다.

 

 

 

祗是治病解縛이니 ?諸方道流는

지시치병해박      이제방도류

 


  다만 병을 다스리고 속박되어 있는 것을 풀어주는 것이다. 그것도 스스로 하는 것이고, 어떠한 이치도 내가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 아니다. 다만  병들어 있는 것을 다스리고 속박을 풀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제방에서 도를 닦는 여러 사람들은

 

 

試不依物出來하라

시불의물출래


  시험 삼아 어떤 사물 또는 경계, 환경 또 우리들이 설정해 놓은 틀, 기준, 이런 것을 물(物)이라고 말하는데 어떤 사물에도 의지하지 않고 한번 내 놔봐라. “자기 자신을 한번 표현해 보아라.” 출래(出來), 내 놔봐라. 우리는 전부 어디에다가 근거를 하고 불교공부를 좀 했다하면 자기가 알고 있는 그걸 가지고 자기표현을 하고 불교표현을 한다구요. 그건 전부 여기서 말하는

 


“개시의초부엽죽목정령(皆是依艸附葉竹木精靈)” 말하자면 무슨 나무에 붙어 있고, 돌에 붙어 있고, 바위에 붙어 있는 그런 혼령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진정 아무것도 관계없이 홀로 존재하는 “자기 자신” “본래 자기” 그것으로서 자기표현이 되어야 되고 그것이야말로 진짜 자기인데, 대개 사람들은 전부 자기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경험한 모든 경험들, 익힌 지식들, 보고, 듣고 한 모든 정보들, 그런 정보를 가지고 자기표현을 한다 이거지. 그래서 이런 말을 한 것이 “시불의물출래(試不依物出來)” 시험 삼아 사물에 의지하지 말고 나와 봐라.

 

  

我要共?商量이라

아요공이상량

 
  나는 그대들과 함께 “상량(商量)하고자 한다.” 상량은 장사할 때 계산하는 것을 상량이라고 하는데 문답하고 의논하려고 한다. 이거야. “나는 그대들하고 한번 의논해 보고 싶다.” 그 문제에 대해서...

인간으로 태어나서 부모로부터 들은 것. 학교에 가서 배운 것. 이웃에서 보고 들은 경험들. 자기가 쌓은 것. 이런 것들이 쌓이고 쌓여서 우리 자신을 이루고 있고 전부 거기에 근거해서 살아가고 있다. 그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한번 이야기 해 보자 이거야.          

 

  

十年五歲토록 ?無一人하고

십년오세      병무일인

 
  15년 동안 한 사람도 경험과 지식, 남으로부터 얻어 들은 것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자기 자신을 표현한 사람은 없었다. “병무일인(?無一人)이라” 한 사람도 그런 사람은 없었다.

 
皆是依艸附葉竹木精靈과

개시의초부엽죽목정령

 
  그러니까 전부가, 의초(依艸)라는 것은 풀에 붙어있는 정령(精靈)이 있어요. 귀신이 풀에 붙어 있는 것. 또 부엽(附葉)이라고 해서 나뭇잎에 붙어 있는 것도 있고 또 대나무에 있기도 하고, 나무에 있기도 하고, 어떤 것은 바위에 붙어 있기도 하고, 그러한 자연현상에 붙어 있는 귀신들과

 

野狐精魅니

야호정매

 
  여우 귀신, 요괴, 정매(精魅)라고 하는 것은 요괴나 귀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전부 이런데 의지하고 있다. 말하자면 올곧은 “자기 자신” “본래자기” 한 생각도 일어나기 이전의 본래의 자기주인공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전부 살아오면서 익힌 지식이나 경험, 보고들은 것. 사회적인 기준이나 틀, 이런 것을 의지해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向一切糞塊上亂咬로다

향일체분괴상란교


  여기서는 주로 다른 것을 생각할 것은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나, 불교에 대해서 생각해 볼 때 거의가 부처님과 조사스님들의 어록이나 경전, 그동안 절을 드나들면서 들은 것. 이러한 것을 가지고 불교라고 이해하고 또 나를 이해하는 것도 본래 아는 지식이 없으니까, 결국 깨달은 사람들의 가르침을 통해서 나에 대한 인식을 하죠. 그래서 여기에서 “나” 라는 문제가 붙는 것입니다. 나에 대해서 우리가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이 나로써 살아가기는 하지만 “나” 에 대해서 생각하고, 의논 하고, 들어볼 겨를이 없는 것입니다. 그냥 사는 거지. 무턱대고...

 


그런데 불교라는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가 “나” 라고 하는 문제도 생각해보고, 논의도 해보고 연구하고 분석하는 그런 기회가 저절로 있게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불교” 라고 하는 것과 “나” 라고 하는 것을 너무 바깥 가르침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사람의 가르침에 의존하고 있는 것을 마치 무엇과 같은고 하니 “향일체분괴상란교(向一切糞塊上亂咬)” 똥 덩어리!

 


무슨 교학이나 망상, 사상, 주위주장, 이런 것들은 전부 똥 덩어리를 향해서 어지럽게 씹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남이 쌓아놓은 똥 덩어리를 씹고 있는 거와 같다. 왜냐하면 남이 전부 해 놓은 것이니까. 아주 혹독한 표현이죠. 말하자면 아주 지나친 표현인데 우리가 사실은 지금 엄격하게 이야기하자면 임제록을 가지고 지금 이렇게 집착해서 연구하고 공부하고 있는 것도 결국 임제스님이 쌓아놓은 똥 덩어리 씹고 있는 거나 다를 바 없다 구요.

 


경전도 마찬가지요. 어록도 마찬가지요. 임제록도 마찬가지 다 거기서 벗어난 것은 없다. 이거지.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이니까 실법을 알면 이제 그런 과오는 범하지 않는 것입니다. 실법을 안 사람들은 뭘 하더라도, 어디 가서 무당짓거리를 하더라도 그 사람은 이미 실법으로써 진리의 인간으로 생활을 하는 것이지만, 아무리 높은 경전을 공부한다하더라도 거기에 끄달리고 집착하면 이것은 이미 남이 쌓아놓은 똥 덩어리를 씹는 거와 하나도 다를 바 없다는 그런 뜻입니다.

 


방편에 끄달려가면 남이 쌓아놓은 똥 덩어리를 씹는 것이고, 방편을 뛰어넘어서 정말로 알려주고자 하는 실법을 우리가 이해하고, 실다운 법에 눈을 뜬다면 그것은 아무리 임제록을 천권, 만권 쌓아놓고 보더라도 그것은 똥 덩어리를 씹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벗어난 것이다. 천권, 만권 쌓아놓고 경을 보더라도 거기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실다운 법을 이해한다면, 그 사람은 해당이 되지 않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데, 달을 본 사람은 아무리 많은 조사어록을 쌓아놓고 거기에 묻혀서 살더라도 상관이 없고, 한 권의 책이나 한마디의 말이라 하더라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집착해서 달은 못보고 손가락을 따라 다닌다면 이것은 쌓아놓은 똥 덩어리를 씹는 거와 같다. 이 말입니다.

 


달이라고 하는 것은 실다운 법. 실다운 진리. 실다운 이치를 말하는 것이고, 손가락이라고 하는 것은 방편을 말하는 것입니다. 참선이 되었든, 염불이 되었든, 기도가 되었든, 경을 보는 것이 되었든, 어록을 보는 것이 되었든, 무엇이 되었든 간에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이고, 그 방편을 통해서 우리가 마음! 진짜 마음을 봐버리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거죠. 그러기 전에는 마음! 마음! 하는 그 좋은 가르침도 전부 남이 쌓아놓은 찌꺼기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뜻입니다.

 


이렇게 혹독한 표현을 한 이유는 그런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라.”는 뜻입니다. 벗어나라! 남이 쌓아놓은 똥 덩어리를 씹는다는 것이 상상이나 할 일입니까? 그래서 이런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혹독하고 지나친 표현을 한 것은 집착을 하면 똥 덩어리와 같은 그런 일이니까 그로부터 벗어나라. 그래서 항상 조사스님들은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지, 손가락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고, 반지를 끼고 있다면 금반지냐, 다이아반지냐 해서 손가락은 잊어버리고 그만 손가락에 낀 반지에 집착을 해버린다 구요. 조사스님들의 말씀이나 경문에 아주 아름답고 멋진 문장이 있으면, 거기에 그만 푹 빠져 버린다구요. 본래 뜻은 그런 게 아닙니다. 거기서 가르쳐준 실다운 이치, 실다운 진리를 우리가 체득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니까 그러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라 해서 이런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漢이여 枉消他十方信施하고 道我是出家兒라하야

할한      왕소타시방신시      도아시출가아

 

如是見解로다 向?道하노니 無佛無法하며

작여시견해      향이도         무불무법

 
無修無證하나니 祗與?傍家에 擬求什?物고

무수무증         지여마방가   의구십마물

 
?漢아 頭上安頭라 是?欠少什?오

할한   두상안두    시이흠소십마

 
“야 이 눈 먼 놈들아, 저 시방의 신도들이 신심으로 시주한 물건을 마구 쓰면서 ‘나는 출가한 사람이다’라고 하여 이와 같은 견해를 짓고 있구나. 나는 그대들에게 분명히 말하고자 한다. 부처도 없고, 법도 없고, 닦을 것도 없고 깨칠 것도 없는데, 어쩌면 그렇게 옆집으로만 다니면서 무슨 물건을 구하는가? 야 이 눈멀고 어리석은 놈들아! 머리 위에 또 머리를 얹는구나. 너희들에게 무엇이 부족하단 말인가?”

 

?漢이여 枉消他十方信施하고 道我是出家兒라하야

할한      왕소타시방신시      도아시출가아

 
  야! 이 눈먼 놈들아, 시방에서 모두 갖다 준 신도들의 시주 물을 다 녹이고, 왕소(枉消)는 다 녹인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나는 출가인 이다’ 그래서 신도들이 갖다 준 그 시주 물을 받아 먹으련다하여 큰소리를 친다는 것이죠. 경을 보거나 조사어록을 본다고 하여, 말에만 쫓아가고 실법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고, 눈이 어둡다면 전부 이런 처지가 되고 만다 이거야. ‘나는 출가한 사람이니까 당연히 받아먹어야 된다.’ 라고 이렇게 하는데  

 

作如是見解로다 向?道하노니 無佛無法하며 無修無證하나니

작여시견해      향이도         무불무법       무수무증


  이와 같은 견해, 이러한 소견을 짓고 있다. 될 법이나 한 소리냐 이거야. 내가 그대들을 향해서 말하겠다. 부처니 법이니 뭘 닦아 증득하느니 삼아승지겁을 닦느니 뭘 하느니 해서 얼마나 부산을 떨고 있느냐 이거지. 그런 것에 집착하고 있는 사람들은 전부 다 깡그리 무시하는 거야. 그래야 집착을 좀 뗄 수 있으니까.

 


부처도 없고 법도 없어. 닦는 것도 없고 증득하는 것도 없어. 몇 시간을 참선했다고 그 참선한 걸 가지고 대개 무슨 벼슬이나 한 것처럼 자랑이나 해 쌌고, 정말 기가 막히는 그런 사례들이 비일비재하니까 그런데 대한 집착을... 도대체 그게 뭘 어쨌다는 거야? 참선을 10년을 했고, 20년을 했으면 어쨌다는 거야. 그래.

 


거기에 집착을 해가지고 그러면 그건 병이라는 거지. 그래서 부처도 없고, 법도 없고, 닦음도 없고, 증득함도 없다. “오직 무위진인(無位眞人)이 있을 뿐이다.” 이렇게 말하고 듣는 사람이 있을 뿐이야. 그 외 다른 것 아무것도 없어요. “이 세상에는 오직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석가도 사람이고, 달마도 사람이고, 원효. 의상도 사람이고 오직 사람이야! 또 그렇게 특별한 사람도 아니야. 우리하고 똑같이 보고. 듣고 말하는 이 능력! 이 능력을 극대화시키고 이 능력에 대한 그런 위대성을 한껏 깨달아 아는 사람이지 다른 게 아니야. 보고 듣고 하는 이 능력! 이 능력에 대한 깊은 이해!  깊은 깨달음! 이것이 있을 뿐이야. 우리도 똑 같이 있는데 거기에 대한 깊은 이해가 우리가 없다는 것. 그 차이죠. 차이가 있다면 그 차이!

 


사람의 능력에 대한 깊은 이해! 이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다른 것을 갖다 붙이는 것이 아니 예요. 수행한다. 참선한다. 기도한다 해서 뭘 해가지고 새롭게 갖다 붙이는 게 없어요. 누가 그렇게 새롭게 갖다 붙인 사람이 있습니까? 석가. 달마가 머리 하나 더 만들어서 머리 위에 얹은 일도 없고, 팔이 하나 더 생긴 일도 없고, 눈이 하나 더 생긴 일도 없고. 그렇게 되면 그건 요괴지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죠.

 


그러니까 참으로 이런 가르침은요. 조사스님들의 어록에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정곡을 찔러가지고 아주 직설로 이렇게 가르친 이들은 잘 없습니다. 그러니까 너도 나도 임제!  임제!  전부 임제스님 뒤에다 줄을 대고 임제스님 몇 대손! 임제스님 몇 대손! 비석에다 전부 나는 임제스님 몇 대손이다. 그것으로써 자기의 어떤 경력을 삼고 자신의 자랑으로 삼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숱한 어록과 경전! 거기에 전부 끄달린 사람들은 “의초부엽죽목정령(依艸附葉竹木精靈)이다” 남이 쌓아 놓은 똥 덩어리를 씹고 있는 그런 일이다. 이런 식으로 표현을 한다 구요.

 

祗與?傍家에 擬求什?物고

지여마방가   의구십마물

 
  다만 옆집으로, 방가(傍家)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버리고 자기 자신 이외의 것을 “의구십마물(擬求什?物)” 구하려고 하는데 도대체 무슨 물건을 구하려고 하느냐? 보고 듣고 하는 이 능력! 이것 버리고 도대체 어디에서 무엇을 구하려고 하느냐 이거야. 이것이 무량대복이고, 이것이 무한한 행복이고, 여기에 무한한 평화가 있고, 온갖 신통묘용이 바로 이 자리에 있는 이 능력인데 이 능력 말고 그 외 뭘 구하려고 하느냐? 구해지지도 않고...

 

?漢아 頭上安頭라 是?欠少什?오

할한   두상안두    시이흠소십마

 
  야, 이 눈 먼 놈들아. 자기의 보고  듣고  웃고  울고  미워하고. 좋아하고. 슬퍼하고 기뻐하는 이 훌륭한 능력! “무위진인(無位眞人)!”  이것을 두고 또 딴 것을 찾는다고 하는 것은 두상안두(頭上安頭), 참 유명한 말입니다. “두상안두 시이흠소십마(頭上安頭 是?欠少什?)오” 머리위에 머리를 얹는 일이다. 그건 도깨비나 있을 수 있는 일이죠. “머리위에 머리를 얹는 일이다”

 
눈을 뜨고 사물을 보고, 말하고 듣고,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알고, 피곤하면 잠잘 줄 아는 이 능력! 여기에서 “흠소십마(欠少什?)” 그대들이 부족한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아주 참 임제스님의 이런 법문이 수차 있지마는 이것이 바로 임제 법문의 진면목이고, 그것이 곧 우리들의 진면목, 참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을  알고 듣고 봐서 이해가 안 되고, 느껴지지 아니하면 좌선을 해야 돼요. 좌선하면서 다른 것 생각할 것이 없어요. 바로 이 대목을 생각하면 되는 거라. 이 대목!


보고 듣고 하는 그 사람! 그 사람에 대한 깊은 사유! 이게 좌선이 예요. 옛날에는 전부 그렇게 좌선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가지고 그냥 묵묵히 앉아 있는데 그만 사람들이 그것을 무슨 공부냥 해서 삼으니까, 묵묵히 앉아서 “관심일법(觀心一法)”이라 해서 “ 마음을 관찰하는 한 가지 법” 마음의 능력 아닙니까? 보고 듣고 하는 게 전부 한 마디로 표현하면 마음의 능력인데 이 마음, 능력의 실체를 관찰하는 이것이 모든 수행을 다 포함하고 있다고 그래요.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總攝諸行)” 이라 해가지고 달마스님이 동토에 와 가지고 주장하신 그 선법이라는 것이 바로 그겁니다. 이렇게 보고 듣고 하는 이 능력을 관(觀)하는 거야. 명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대한 확신을 얻으면 그걸로 끝이 예요. 그러다가 그 공부가 쭈욱 이렇게 내려왔어요. 임제스님 때도 대개 그 공부야! 굳이 공부한다면 그거예요. 여기서 내 그것 들먹거리잖아요.

 
보고 듣고 말하는 그것. “참 나”  “無位眞人”  “참 사람”  이걸 이야기 하는데 여기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그것을 가지고 문제 삼고 앉아 있는 거야. 앉거나 걸어 다니거나, 일상생활을 하든지 간에

 
“어묵동정(語?動靜)” 일체시위 가운데서 그것에 관심을 집중하고서 그 생각만 하는 거죠. 또 거기에 대해서 확실한 것이 손에 잡히는 게 없으면 저절로 생각이 가게 되어 있는 거죠. 당나라를 거쳐서 송나라가 될 때까지 계속 그런 공부였어요. 송나라 때 와가지고 서장의 주인공이신 대혜스님이 가만히 보니까 그 공부는 참 좋은 공부 방법이기는 한데 하근기들에게는 얼른 납득이 되는 공부가 되는 게 아니라. 그래서 그냥 앉아 있는 것으로서 제일로 공부를 쳤다고요.


무조건 앉아 있어라. 무조건 몸뚱이를 가지고 앉아 있는 것이 최상의 공부인냥 그렇게 잘못 이해하는 사람이 그 무렵에는 너무 많았어요. 대혜스님께서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조사스님들이 말씀하신 그것을 네가 이해를 못하겠거든 그것을 생각하라.” 참구하라 그랬어요. 그게 화두를 참구하는 거야. 예를 들어서 황벽스님께 불법을 물었을 때 세 번을 때렸잖아요. 왜 때렸는가? 왜 때렸는가 하고 이렇게 참구하라. 이렇게 가르치기 시작했어요.

 
그것이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법이 출발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송나라에 와서 대혜스님이 본격적으로 그런 공부를 시켰어요. 그러니까 이런 차원 높은 공부를 하니까, 사실은 차원 높고 말 것도 없는 거예요. 우리가 보고 듣고 하는 바로 그 당사자! 다시 말해서 그 당사자 마음 자리가 바로 “나” 고 그것이 바로 부처고, 그것이 바로 조사라고, 이렇게 일러주었는데 얼른 그것이 마음에 와 닿지 않으니까, 그 문제를 가지고 좌선을 하다보니까 다른 길로 들어서고.

 
근기가 수승한 사람은 그렇지 않는데, 하근기들은 그냥 앉아 있는 것 만으로 공부의 전체인냥 그러한 폐단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대혜 스님이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학인에게 지도하기를 “개가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했을 때, 조주 스님이 "없다" 라고 했죠. 부처님은 일체 유정. 무정이 다 불성이 있다고 했고.

 
조주 스님은 그 당시로 보면 부처님과 다를 바 없는 그런 위대한 선지식인데 그 분은 없다고 했으니까 그게 도대체 어떤 의미냐? 알겠느냐? 라고 물었어요. 조주 스님이 “개가 불성이 없다고 했다면 그 의미도 알겠느냐?” 하니까 학인이 모르겠다고 해요. 부처님은 모든 존재가 다 불성이 있다고 했는데, 부처님이나 다를 바 없는 이 시대의 부처님인 조주스님은 없다고 하니까 청천벽력 같은 소리죠.

 
그러면 부처님 말씀을 믿어야 옳으냐? 조주 스님의 말씀을 믿어야 옳으냐? 조주 스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을 때는 틀림없이 거기에 무슨 깊은 의미가 있다. 그러니 그걸 생각해 보아라. 그랬어요. 그걸 생각해 보아라.” 개가 불성이 없다고 하는 것을 無! 없다고 하는 것을 한번 생각해 봐라. 이렇게 가르친 거예요. 그것을 화두를 든다 하는 것입니다.


왜 없다고 했는가? 왜 無! 라고 했는가? 이렇게 화두를 참구하는 거야. 그런 식으로 말씀하신 것이 많습니다. 그것은 사실 조주 스님께서 일부러 그런 숙제를 낸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입장에서 우리가 그것을 얼른 이해를 못하니까 문제가 되고, 화두가 되는 것이지 여기에 대한이해를 해 버리면 화두가 안 돼요. 이해 못한 사람에게 문제야! 예를 들어서 “달마스님이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물었는데 “뜰 앞의 잣나무” 라 그랬다 구요. 뜰 앞의 잣나무라! 그게 무슨 뜻이냐? 스님은 정말 정확하게 가르쳐 줬어요. 정확하게...

 
달마스님이 동쪽으로 오신 뜻이 “뜰 앞의 잣나무”라고 한 것이 틀린 대답이거나 엉뚱한 대답도 아니고, 아주 그냥 순수한 대답,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다 하는 대답하고 똑같은 대답이야. 그것을 이해를 못하니까 화두가 되는 것이고 그래서 참구하는 것. “정전백수(庭前柏樹)”자를 참구하는 참선 객도 많거든요. 그런 것이 1,700가지다 해가지고 1,700화두!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화두(話頭) 선(禪)이라고 하는 것이 이렇게 생긴 것입니다.


그러한 화두를 가지고 본격적으로 참구하는 일, 그러니까 송나라 이전에는 어떻게 공부했느냐? 바로 임제스님이 말씀해주신 이런 식으로 공부를 한거예요. 지금 우리가 보고 듣고 하는 여기에서 부족한 것이 도대체 무엇이 있느냐? 여기서 더 이상 무엇을 찾아서 내 것으로 하려는 것은 “두상안두((頭上安頭)”다. “머리에다 머리를 올리는 것이다” 이렇게 보고 듣고 하는 이 완전무결한 것이 부처고 조사다 이겁니다.

 
보고 듣고 하는 이것! 그래서 딱 손에 잡히면 그걸로 끝인 거예요. 손에 안 잡히면 관(觀)하고 있는 것이고. 그것을 “관심일법(觀心一法)”이라고 합니다. “마음을 관(觀)하는 한 가지 도리” 한 가지 공부다. 굳이 마음을 관찰한다. 라고 이렇게 설명을 해서 그렇지 여기서는 전부 그것을 드러낸 것이거든요. 특별히 앉아서 어떻게 하라 하는 그런 공부 방법이 하나도 없잖아요. 임제록은 그게 하나도 없습니다.

 
참선하는 것을 염두 해 두고 임제록을 공부하는 사람은 도대체 어디에다 의지를 해야 할지 걷잡을 수가 없는 거지. 그런데 자세히 보면 전부 다 드러나 있는 것입니다. 자세히 보면 전부 다 드러나 있기 때문에 굳이 따로 참선을 한다. 어쩐다 하는 것이 사실은 필요치 않게 되어있어요. 얼른 납득이 안 되니까 이러구 저러구 수행방법을 찾고 또 만들고 그래 쌌는 거지.

 
우리나라의 전통, 고려이후는 간화선을 가지고 쭉 공부를 해 왔는데, 근래에는 또 비파사나니 무슨 제3수행이라 해가지고 여러 가지 수행방법이 많이 동용이 되고 있고, 또 그러다보니까 전통 간화선법하고 제3수행법하고 어느 것이 좋은 것이냐, 또 어느 것이 옳은 것이냐, 해서 지금 왈가왈부하고 또 이야기가 아주 분분하거든요. 그래서 수직관 같은 것이나 비파사나, 다시 말해서 숨 쉬는 것을 예의주시하는 것.

 
이 수행법은 조금 쉽기는 한데 깨달음하고는 거리가 좀 있는 거라. 그래서 전통 간화선이 훨씬 수승하다. 안 되도 이것을 하는 것이 훨씬 수승하다 하는 이런 주장도 있고, 이야기는 많은데 간화선법이 어렵다느니 비파사나가 좋으냐를 따지기 보다는, 저는 이 임제스님이 가르친 이 방법이 좋다고 봅니다.

 
조선시대에도 보면 전부 임제스님 밑에다 줄을 대고, 임제스님의 몇 대손이라고 하는 이유가 임제스님의 가르침이 제일이기 때문에 그래서 임제스님의 몇 대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임제스님의 가르침이 옳지 않다거나 제일 좋은 것이 아니라면 그렇게 임제스님의 몇 대손이다. 라고 자랑을 안 했을 거예요. 이런데서 보면 바로 보여 줬어요. 돌아가고 무슨 방편으로 가라하는 것이 없습니다. 바로 보여줬지. 그러니까 이런데 눈을 잘 뜨면...


그러면 “어떻게 산다는 말이냐?” 우리의 마음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고 그것이 손에 잡히는 물건처럼 얼른 내 것처럼 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확철대오 한 것 같지도 않고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수증(修證) 무불부법(無佛無法) 무수무증 (無修無證)” 닦고 증득하는 이 따위는 다 필요치 않는 것이다. 괜히 옆집을 헤매는 일이지 증득으로 자기 집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다 이랬거든요. 남의 집 찾아 가는 것이지 자기 집 찾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랬어요.

 
“지여마방가 의구십마물(祗與?傍家 擬求什?物)고” 남의 집 찾아가서 남의 집에서 무슨 물건을 구하려고 찾아가니? 이런 식이거든요. 자기 집 찾아가는 것은 아니다 이거지. 이렇게까지 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진면목에, 우리가 계합이 될 때까지 자꾸 보고, 사유하고 또 이 이치를 가지고 좌선을 해야지 거기에 괜히 의심도 나지 않는 것을 가지고 왜? 없다고 했는가? 그렇게 해봐야 그 의심이 제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의심이 딱 되면 더 없이 좋은 공부지만 의심이 그렇게 쉽게 되는 것도 아니고 전부 가짜 의심이라.


화두를 들고 공부하는 것은 의심을 만들어 내는 것인데, 진짜 의심이 생기기 전에는 전부 지어낸 것이고 한결같지가 않는 거라. 의심을 만들면 잠깐 있고, 의심을 만들지 않으면 그만 없어져 버려요. 내가 아끼던 물건을 금방 사용하고 방을 틀림없이 나가지도 않았는데 그 물건을 어디에다 두었는지 찾지 못할 때는 정말 기가 막히는 상황이거든.

 
아무리 찾아봐도 없고, 금방 사용했던 것이고, 그랬을 때 아무 생각 없이 내가 어디에 두었는가? 하고 그 의심뿐이라. 그러한 자연스런 화두(의심)가 일사분란하게 되면 아주 좋은 공부입니다. 그렇게만 되면 일주일 안에 깨닫는다. 그랬어요. 그렇게만 되면 잠도 안 오고, 밥을 먹어도 먹는 줄을 모르고, 우리가 그런 식으로 그 순간에 순수하게 의심하는 정신으로 일주일만 지속되면 틀림없이 깨닫는다. 그랬어요. 오래 걸리면  90일, 한 철이면 끝난다. 그러한 “진의(眞疑)” 참다운 의심이 쉽게 생기지 않습니다. 그게 문제죠.


그게 안 되어 가지고 ‘송화두(誦話頭), 응화두(應話頭)’ 심지어 그런 말도 나와요. 송화두(誦話頭)는 그것을 외우는 것입니다. 개가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 개가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 이렇게 자꾸 반복하고 외워가지고 그것을 의심으로 만들어 보는 거라. 의심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의심해 보는 거지. 억지 의심이지. 거짓의심이라고 그래요. “가의(假疑)!”

 
그래가지고는 공부가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런 표현도 있습니다. 80먹은 늙은이가 물이 아주 거칠게 흘러내리는데 그 흐르는 방향을 향해서 조그마한 조각배로 노를 저어 오르는 거와 같다. 10미터 떠내려가면 겨우 1미터 올라가고, 1미터 겨우 올라가면 10미터 더내려가고, 공부하는 것이 꼭 그와 같다. 라고 해서 참 표현 잘했어요. 공부가 정상적으로 안 된다는 거지. 1미터를 겨우 애써서 노 저어 올라가면 10미터 떠내려 가버리고, 계속 떠내려가기만 하고...

 
공부라는 것이 참다운 의심이 아니면 그와 같다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공부할게 아니라고! 자연스럽게 되어도 공부가 제대로 이루어질까 말까인데, 임제스님의 방법은 관(觀)하라! 하는 이런 말은 없어요. 그것을 관(觀)하고 좌선(坐禪)을 하라! 어디 한번도 그런 말은 없습니다. “보고 듣는 이것이 제일이다!” 라고 구절구절 이런 말씀은 하면서도 그것을 관하라! 하는 말은 없습니다. “제일이다!”  그러면 알아들어야지.

 
만약에 못 알아들으면 그걸 관해야 돼요. 이건 제가 주해(註解)를 다는 격이죠. 임제스님은 그런 말씀 안했습니다. 임제스님은 보고 듣는 그 주인공을 관해라. 이것이 여기의 화두 중에서 같은 것을 들춘다면 “시삼마(是森麻)” 이 뭣꼬? 하는 것이 바로 그런데서 출발한 것인데, 굳이 한다면 이런 화두가 되겠죠. 화두라고 생각한다면 “보고 듣는 그놈이 무엇인가?” 이렇게 되겠죠. 임제스님은 그런 소리 안 해요. 그런 식으로 알려고 하면 십만팔천리 떠내려 가버리는 거야.

 
여기서 가르쳐준 대로 지금 보고 듣고 하는 여기에서 “흠소십마(欠少什?)오” “무엇이 부족하냐?” 바로 그 놈이다 이거지. 그놈이 부처고 그놈이 조사고 그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다. 그렇게 가르칩니다. 그걸 모르겠거든 앉아서 좌선을 하는데 시십마(是什麻)로 하라는 이런 식으로 안합니다. 구체적인 그런 지시가 없기 때문에 임제록을 공부하면서 “그러면 수행은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렇게 또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답이 제대로 나와 있지가 않죠.

 
여기서는 딱 그냥! “네가 보고 듣고 하는 이 능력 외에 더 무엇이 있느냐?” “흠소십마(欠少什?)오” 뭐가 더 부족하냐? 부족한 것 아무것도 없다. 바로 그것이다! 이거야.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자라” 이건 뭔 말인고 하니 “네가 처한 상황에서 인연 따라서 살아라.” 네가 처한 상황에서 인연 따라서 살아라! 이 말이 예요.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라하는 그 말, 도인들에게 물으면 의례히 그렇게 나오죠.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먹는다. 그것이 일상생활에서 피할 수 없는 말이거든. “타피부도처” 라고 그러는데 불가피한 일상사! 불가피한 일상사를 인연 따라서 우리가 지어가면서 사는 것이고, 억지 부리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인연 따라서 살면 되는 것이고, 그러한 것을 더욱더 확실히 하기 위해서는 경전이나 어록을 읽으면 더욱 보완이 되는 거죠. 특히 임제스님의 어록 같은 것을 자꾸 읽으면 아주 보완이 잘 됩니다.

 
자기의 인연과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인연을 따라서 사는 그것이고, 달리 다른 게 없습니다. 여기서 “무수무증 (無修無證)”이라고 했잖아요. “닦는 것도 없고 수행도 없습니다.” 특별한 수행이 없다 구요. 증득하는 것도 없어. 내가 가지고 있는데 더 이상 뭘 가져? 뭘 깨달아? 내가 가지고 있는 건데 ...

 
이런 정도로 우리가 정말 제대로 깊이 알면 불교가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고 참으로 간단합니다. 임제스님이 대우스님께 갔을 때 “황벽스님의 불법이 무다자(無多子)라” “황벽스님의 불법이 참으로 간단하구나!” 이렇게 표현을 했잖아요. 불법이라는 것은 사실은 간단한 것입니다. 너절하게 길게 설명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고, 바로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더 없이 간단하다는 것이죠.

 

14-19 삼계는 삼독심이다

 
道流야 是?目前用底가 與祖佛不別이어늘 祗?不信하고

도류   시이목전용저    여조불불별         지마불신


便向外求로다 莫錯하라 向外無法이요 內亦不可得이니라

편향외구      막착       향외무법       내역불가득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그대들 눈앞에서 작용하는 이놈이 바로 할아버지 부처님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왜 믿지 않고 밖에서 찾는가? 착각하지 말라. 밖에도 법이 없으며 안에도 또한 얻을 것이 없다.

 

道流야 是?目前用底가 與祖佛不別이어늘

도류    시이목전용저   여조불불별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목전용저(目前用底)” 눈앞에서 보고 듣고 사용하고 작용하는 그놈!  목전용저(目前用底)! 이것 참 중요합니다.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잠자는, 또 들을 일 있으면 듣고, 보는 일 있으면 보는, 이것이 용저(用底)입니다. 사용하는 것! 좋은 말을 들을 줄 알고, 나만이 할 줄 아는 그것. 나만이 해야겠다. 라고 생각해서 딱 하는 그놈! 바로 그 당사자! 목전용저(目前用底)가 그거라. 이것이 “조불불별(祖佛不別)”이라고 했잖아요. 조사와 부처와 하나도 다를 바 없어.

 
부처도 할아버지 부처님! 이렇게 표현했어요. 정확하게 표현하면 부처님을 할아버지라고 했어요. 조불(祖佛)이라고 했어요. 조불(祖佛)! 할아버지 부처님하고 하나도 다르지 않다. 부처님을 우리 할아버지쯤으로 보는 거야. 할아버지는 할아버지지 사실 그 이상은....석가모니 부처님이 우리 할아버지 정도야.

 
임제스님의 특별한 표현인데 이런 표현은 제가 보기에는 임제록밖에 없어요. 우리말로 하면 할아버지 부처님! 아버지 하나님이 아니고, 할아버지 부처님! 아주 가깝게 할아버지 부처님이다. 딱 그렇게 했어요. 어릴 때 할아버지를 봤던 그런 느낌의 사람이 바로 부처님이다 이거야. 우리가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지금 눈앞에서 보고 듣는 목전용저하고 하나도 다르지 않다. 내가 지금 목전용저(目前用底) 그대로 할아버지 부처님이다 이거야.

     
祗?不信하고 便向外求로다

지마불신      편향외구

 
 “지마불신(祗?不信)” 다만 믿지를 아니해. 그걸 안 믿어. 그리고 얼른 믿어지지가 안 해. 그게 참 문제죠. 그래서 여기 이런 말이 자주 있는데 다만 믿지를 아니하고서 밖을 향해서 구한다. 어디가면 영험이 있는가? 또 어디가 기도발이 잘 받는다 하고서 쫓아다니는 거지. “편향외구(便向外求)” 밖을 향해서 구하는 거지. 자기 부처도 안 믿고, 그 위대한 목전용저(目前用底)는 잃어버리고는 밖을 향해서 구하고 있다.

 


밖을 향해서 구하는 것도, 빨리 정신을 차리고 눈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려야지. 이것이 업이 되어버리면요 누가 어떤 이야기를 해도 또 임제스님이 아니라 임제스님 할아버지가 와서 이야기해도 머리가 안 돌아 가요. 업이 되어 버리면! 사람의 업이 그렇게 무서운 거예요. 그러니까 사실은 우리가 업을 잘 입힐 필요가 있는 이유가 그런데 있습니다. 누가 무슨 소리를 해도 아니라고. 아니라고.... 아! 부처님은 갓바위에 있고, 어디 절에 가면 있고, 또 어디에 있고, 자꾸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하는 거죠. 

 

莫錯하라 向外無法이요 內亦不可得이니라

막착      향외무법       내역불가득

 
  그르치지 말라! 밖을 향해 봐야 아무법도 없음이요. 그렇다고 안을 찾아보면 안에 또한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공한 것이다. 우리가 활발발하게 보고 듣고 쓰고 하는 목전용저가 있지마는 “내역불가득(內亦不可得)” 손에 잡히는 것은 아니다. 공하면서 활발발하게 작용을 하는 이것이 우리 진짜마음이고 무위진인이거든요. 실컷 쓰면서도 손에 잡히는 것은 아니고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염려할 것은 하나도 없어요. 안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해서 어디로 도망가지 않고 그 자리에 있어. 그러니까 절대 염려할 것도 없어. 맘 탁 놓고 그냥 쓰면 돼.

“목전용저(目前用底)” “요용변용(要用便用)” 쓰게 되면 곧 쓰라! 쓸 일이 있으면 곧 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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