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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眞心所在 진심소재 (30)

 

 

所以로 魏府元華嚴이 云 하사대 佛法이 在日用處하며

소이   위부원화엄           불법   재일용처

在行住坐臥處와 喫茶喫飯處와 語言相問處와 所作所爲호대

재행주좌와처   끽다끽반처   언어상문처   소작소위

擧心動念하면  又却不是也라 하시니

거심동념      우각불시야

故知體則偏一切處하야  悉能起用이로대

고지체득변일체처      실능기용

但因緣有無不定故로 妙用이 不定耳언정 非無妙用也니

단인연유무부정고   묘용   부정이     비무묘용야

修心之人이  欲入無爲海하야  度諸生死인댄

수심지인    욕입무위해      도제생사

莫迷眞心體用斯在也니라

막미진심체용사재야

 

10. 眞心出死(진심출사)

 

或이 曰 嘗聞見性之人은 出離生死라 하시니

   왈 상문견성지인   출리생사

然이나  往昔諸祖는  是見性人이로대

      왕석제조    시견성인

皆有生有死 하시고  今現見世間修道之人도

개유생유사         금현견세간수도지인

有生有死事하니  如何云出生死耶잇가

유생유사사      여하운출생사야

 

 

일어나서 이불 개고, 세수하고. 나가서 등산하고. 밥짓고. 설거지하고 밥 먹고 출근하고 이것이 일용 아닙니까?  우리 일상생활이 그것이잖아요. 잠잘 때 되면은 잠자고 화장실 갈 때 되면은 화장실 가고. 또 목 마르면 물 마시고 피곤하면 자고. 이것이 일상사라고요. 일용처! 佛法(불법)이 在日用處(재일용처)라고 그랬습니다.

 

 서두에 이 진심직설 말씀할 때 가끔 말씀 드리지만, 어떤 경전도 아니고 조사스님 들이 평생 공부. 자기 개인의 수행과 또 경전을 많이 보신 그런 어떤 결론! 그것으로 서 추리고 추려서 아주 핵심적인 말씀만 이렇게 담아놓은 그런 가르침이고,

 

그래서 이것은 불교에서도 아주 수준 높은 그런 가르침이다 라고 하는 그런 말씀을 전제로서 몇 번 드렸는데, 그렇습니다. 여기서는 더 이상 이제 수준 높은 가르침이 있다고 말할 수가 없지요.

 

佛法(불법)이 在日用處(재일용처)! 일용처에 있다. 이것은 선가(禪家)고 또는 교가(敎家)고 경전이고 조사어록(祖師語錄)이고 어디 참선에고 염불 에고 또는 경학(經學)에고 불교 안에서는 모든 분야를 다 통 털어서 이야기 하더라도 가장 수준 높은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가장 쉬운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일용 처에 다 있으니까요. 일상생활 속에 있다고 했으니까 얼마나 쉬워요? 여기에 와서 경전공부에 있다 하면은 어렵잖아요.

 

시간 내서 와야 되고. 시간을 맞춰야 되고 그것 뭐 알지도 못하는 한문 그것 들여 다 봐야 되고 그렇게 되면은 이게 곯지 아픈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고요. 그 이상 더 쉬운 일이 어디 있어요?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는 것이 그러고 보면은 불법이 예요. 그것을 안 하고 사는 사람이 이세상에 없으니까요.

 

나는 안 하겠다고 누워 잔다 이거예요. 그런데 누워 자는 것도 이것인데 어떻게 해요. 누워 자는데 그것을 안 한다고 해서 일어나서 등산을 간다. 등산 가는 것 역시 그거예요. 불법이 예요. 자는 것이 불법이고 등산가는 것이 불법이 예요. 불법이 제일용 처라고 그랬잖아요. 참 이것이 기가 막히는 말입니다.

 

 얼른 가슴에 와 닿느냐 안 닿느냐 이것은 우리가 자꾸 공부를 하고, 수행을 쌓아가고 경험을 함으로써 얼마만치 가슴에 깊이 와 닿느냐 하는 것은, 그것은 다음의 일이고, 이 이상 더 분명하고 명백하고 끝까지 갈대로 다 간  그런 이야기는 없습니다.

 

 뭘 어떻게 해라. 합장은 어떻게 하고 . 절에 다니는 예법은 뭐고 해 가지고. 천수경을 외우고 나서 그 다음에 무엇을 하고.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그 다음에 무슨 축원을 한다. 이런 수준하고 전혀 다른 거예요. 

 

 그러니까 어렵게 가르치면은 쉽다고 하고. 또 쉽게 가르치면은 어렵다고 하는 것이 또 불교예요. 불교가 참 묘해요. 이렇게 쉽게 가르치는데 어렵다고 하거든요. 그것은 무슨 소린지 나는 모르겠다고. 불법은 일상생활 속에 있다. 진심은 바로 일상 생활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놓으면은 평소에 자기 상식이 있어 가지고 그게 어렵게 느껴지는 거예요.

 

자기 상식이 있어 가지고 자기 나름대로 ‘아, 불법은 이런 것인데.’하고 자기 나름대로 머리 속에 그리는 것이 있다고요. 그래서 와 닿지 가 않습니다. 그러니까  선입견을 확 버리고 허심탄회하게 있는 그대로 들어야 돼요.

 

 그래서 옛날에 어떤  노스님하고 아주 어린 사미동자하고 있었는데, 사미동자가 재기를 차다가 심심해 가지고 노스님 머리를 툭 때리면서 말이지, 아라한과를 증득해라고 내가 4과를 다 증 득하게 해주겠다고 노스님 머리를 버릇없이 재기를 가지고 탁 때리면서 스님은 수다원과를 증득 했습니다 하니까.

 

 그 천진한 노스님은 그 어린아이가 그렇게 해줄 때 아무런 다른 생각 없이. 다른 그런 선입견도 없이. 사량 분별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니까. 재기로 머리를 네 대를 맞고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4과를 다 증득 했어요. 진짜 도인이 되었거든요. 그래서 마음이 순수하면 그렇게 된다고요. 추호의 의심도 없는 거예요. 추호도 의심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니까 그렇게 된다고요. 그래서 여기도 마찬가지예요.

 

佛法이 在日用處라

불법   재일용처

 

일상생활 속에 불법이 있다.

순수하게 아무 티도 없이 받아들이면

그대로 마음이 확 열려버려요.

 

그런데 우리는 온갖 지식이 많아 가지고, 전부 아는 것이 많고 지식이 많고 경험이 많고 그래 가지고서는 각자 불법을 다 가지고 있어요. 그냥 한 보따리씩 가지고 있어요. 버리라 해도 버리지도 않고 전부 한 보따리씩 다 가지고 있으니까. 이렇게 주옥 같이 값진 최고의 가르침이 안 들어 가거든요.  사실은 그게 문제예요. 

 

 그래서 우리는 불교를 제대로 공부를 하자면은 지식을 자꾸 쌓는 게 아니라. 기왕 쌓은 지식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비우는데 있어요. 송지우선이라. 덜고 또 더는 것이 우리 불법이고. 또 세속은 뭐냐? 또 쌓고 또 쌓는 것이 세속이 예요.

 

재산도 쌓고. 명예도 쌓고. 돈도 쌓고 뭐도 쌓고 필요치도 않는 것도 말이지, 세일한다면 그냥 잔뜩 사다 놓아요. 일년이가도 한번도 입지 않을 옷을 잔뜩 사놓고 그래도 또 사고. 또 사고  그래서 나중에는 그때 사 깨닫고 남에게 나누어 주려니 까 그것도 어디 쉽나요? 나누어 주는 것도 쉽지않죠. 이것이 우리 인생살이거든요.

 

그렇게 자꾸 쌓아가는 것이 인생살이라면은 이 불법 살이 는 뭐냐? 자꾸 드러내는 것이 불법 살이 예요. 지식이고 뭐 아는 것이고 재산이고 일체 명예고 자꾸 비우는 거예요. 그러니까  비우지 않으니까 이런 것이 안 들어간다고요. 창고가 꽉 찼으니까 들어갈 틈이 없어요. 머리가 꽉 찼으니 이런 말이 가슴까지 가 닿나요. 머리 속에만 뱅뱅 도는 거예요. 머리 속에만 뱅뱅 돌다가 가슴까지 내려 가려니 까 다른 것이 가슴에 꽉 차있으니까 안 들어가는 거예요. 불법의 제일용 처! 

 

내가 자주 말씀 드리죠.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잔다. 정말 내가 불교 속에서 정말 크게 감동 받은 것이 그 말 이예요. 불법의 제일용 처라고 하는 이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 말에 대해서는 말을 많이 해요.

 

다른 것은 복잡하고 어렵고 그렇잖아요. 이것은 아주 단순해요. 이것은 그저 잠잘 줄 알고 밥 먹을 줄 아는 사람에게 다 해당되는 소리라고요. 그러니까 육조스님 같은 이들이 정말 단순하게 살던 사람이니까  경전의 말씀 한마디 들으니까 그대로 마음이 환하게 밝아졌죠. 그리고 그 다음에

 

(재)  있다. 어디에 있는고?

 

行住坐臥處와

행주좌와처

 

(행), 걸어 다니고. 머물러있고.

그 다음에 앉아있고. 누워있고  그런 곳에도 있고

 

喫茶喫飯處와

끽다끽반처

 

차를 마시는데도 있고, 밥 먹는데도 있어요.

 

語言相問處와

언어상문처

 

  언어 상문 처라는 것이 지금 내가 말하고 여러분들은 듣고. 서로 대화 나누고 말하는 그것에 역시 다 있다 이거예요.   

 

所作所爲호대

소작소위

 

所作(소작)!

 

짓는바, 하는바. 짓는데. 하는데 이것은 뭐냐?  빨래하면 빨래하고. 밥하면 밥하고. 청소하면 청소하고 온갖 일체 동작. 하는 일. 차를 타든지 걸어가든지 . 운전을 하든지. 싸우든지 온갖 그런 일속에 역시 다 있다. 재(在)자가 거기까지 다 먹히죠.

 

在行住坐臥處  在喫茶喫飯處

재행주좌와처  재끽다끽반처

 

 在語言相問處  在所作所爲處

재언어상문처  재소작소위처

 

거기에 다 있다. 거기에 다 있는데 단,

조건이랄 것도 없지마는, 한 가지 덧붙인다면은

 

擧心動念하면 又却不是也라 하시니

거심동념     우각불시

 

擧心動念(거심동념)!

 

마음을 두고 생각을 움직일 것 같으면은, 거심이 나 동념이 나 같아요. “아 불법이 여기 있다는데.”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이 거심 동념이 예요. 거심 하고 동념 한다 이 말입니다.  그냥 그대로 하면 될 텐데. 그냥 밥지으면 밥 지으면 되고. 청소하면 청소 하면 될 텐데. "아이고 청소하는데 이것이 불법이고 이게 바로 마음이 여기 있다는데.” 자꾸 그래 가지고 군더더기를 갖다 붙인다. 그러면 또 십만 팔 천리로 또 어긋나요. 옳지 않다.

 

又却不是也라 하시니

우각불시

 

또한 도리어 옳지 않다.

그냥 의심 없이 해요. 그냥 밥 열심히 먹고 잠 푹 자고. 그러니까 잠 잘 때 잠 잘자고. 밥 먹을 때 아무 생각 없이 밥 잘 먹고. 빨래할 때 빨래 잘 하고. 괜히 빨래할 때 염불하지 말고 빨래 잘 하면 그대로 불법입니다. 밥 먹을 때 그대로 밥 푹푹 잘 먹어요. 그대로 불법이 예요. 

 

 보통 우리가 밥 먹고 빨래하고 일할 때 화두 들고, 염불을 하라 그러죠. 그것은 일 학년들한테 가르치는 불법입니다. 여기는 최고수준에 이르는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불법이라고요.

 

 그래서 무엇이든지 누구하고 싸우면 열심히 싸워요. 막 싸워 그냥. 아이고, 싸우는데도 화두 들어야 된다는데, 싸우는데도 염불해야 된다는데. 그것은 아주 차원이 낮은 불법이 예요. 그것도 불법은 불법이지만은 여기서 보조스님이 가르치는 최상의 불법은 아니죠.

 

최상의 불법은 그냥 싸워요. 그래서 잘못했다 싶거든 그냥 툭 털어놓고 사과해버려요. 자기가 옳다 싶거든 막 싸워버리고. 잘못되었으면 그냥 그 자리에서 바로 사과해버려요.  뭐 아이고 자존심 그런 것은 생각하지 말고 그냥 다 털어내 놓고 사과를 해버려요.

 

그래서 전기생 전기사(全機生 全機死) 이런 말이 있어요. 대개 어려운 말인데 전기(全機)라고 하는 말은 온전한 기틀이라는 말인데, 내 삶의 전체! 온 통째로!. 또는 철저히!  완전히 살아! 또 죽을 때는 완전히 죽어. 전기사!

 

그러니까 밥 먹을 때 철저히 밥 먹고. 잠잘 때 철저히 잘자고. 청소하면 철저히 청소 잘하고. 옳다 싶어서 싸울 때는 철저히 잘 싸우고. 잘못했다 싶으면 사과할 때는 괜히 주저주저 하지말고 시원스럽게 철저히 사과 잘하고 그것이 전기생 전기사예요. 온전히 살고 온전히 죽으라 이 말입니다.  죽어도 죽은 것 같이 안 죽고 말이지. 살아도 산것 같지 않게 살면 그것은 죽은 것도 아니고 산것도 아니 예요.

 

佛法이 在日用處에 있고

불법   재일용처

 

行住坐臥處에 있고 喫茶喫飯處에 있고

행주좌와처        끽다끽반처

 

語言相問處에 있고 所作所爲處 하는데 있다.

언어상문처        소작소위처

 

그러니까 괜히 그 자리에 망(妄)! 다른 생각(망상)을 끼어넣지 말라 이거죠. 擧心動念(거심동념)이라는 말이 마음을 두고 생각을 움직인다 라고 하는 그 말은, 괜히 다른 생각을 거기에다 끼어 넣는 거예요. 전기가 못되고. 온전하지가 못하고 틈이나 가지고 다른 생각이 끼어 드는 것. 그러면

 

又却不是也(우각불시)라.

 

그러면 오히려 옳지 못하다.

여기 위부 원화엄이라고 하는 이분이 참 대단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기 스님들이 공부하는 교과서 간화선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서장에도 보면은 이 구절 그대로 인용을 했어요. 이 구절이 너무 아주 기가 막히는 말씀이 되 나서, 곳곳에 조사 스님들이 많이 활용을 합니다. 참 표현을 잘했거든요.

 

 그러니까  알아도 똑 떨어지게, 모든 사람들 마음에 시원하게 표현한 그런 말씀은요, 정말 아주 두고두고 빛이 납니다. 소설도 명작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마음을 시원하게 잘 표현했거든요.

 

어쩌면 그렇게 내 마음을 본 듯이, 몇 사람이 본 듯이 그렇게 표현을 했나 싶은, 그런 어떤 글들은 두고두고 명작으로서 읽히듯이, 또 이런 간단한 구절이라도 너무 도에 대해서. 또 우리의 마음에 대해서. 불법에 대해서 아주 완벽한 표현이기 때문에 많은 조사 스님들이 인용을 많이 합니다. 옳지않다 라고 하시니

 

故知(고지)  고로 알라.

 

體則偏一切處하야

체득변일체처

 

체는 우리 신체. 우리 진심의 체. 본체죠.

마음의 본체는

 

偏一切處(변일체처)

 

모든 곳에 두루 해서, 일처 체에 두루 해서

 

悉能起用이로대

실능기용

 

다 능히 그 작용을 일으킨다.

모든 곳에 있으면서 그 작용을 일으킨다. 작용을 일으키는데 조금씩 차이가 나요. 그 작용. 신체는 똑 같아요. 마음의 본체는 누구나  똑같은데 마음을 쓰는 것(用) 그것이 조금씩 차이가 나요. 거기에 사람의 차별이 나타나요. 행복할 줄 알고. 행복할 줄도 모르는 그런 것도 또 거기서 차이가 나요. 똑같은 인생을 살고. 똑같은 마음이라고 하는 재료를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는데, 재료는 똑 같아요.

 

음식 만드는데도 똑같은 재료를 가지고 솜씨 따라서. 자기 경험 따라서. 자기 지식 따라서 음식이 전혀 달라지듯이 우리 마음이라고 하는 재료를 우리가 똑같이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운용하는데 사용하는데 따라서 인생이 전부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거예요. 

 

 우리들이 전부 어떻게 보면은 비슷하지마는 또 내부적으로는 속들을 파고들면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 또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어떤 행복감 이런 것들이 전부 천차만별이잖아요. 다 달라요. 같은 사람 하나도 없다고요.

 

 그것은 왜 그러냐? 재료는 하나인데 그것을 운용(작용)하는데 쓰기를, 말하자 면은 솜씨 놀리기가 다르기 때문에 그렇게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재료를 잘못 썼다고 절대 탓할 게 없어요. 부처님 탓할 수도 없고. 부모를 탓할 수도 없고 재료는 똑 같습니다. 이것은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도 아니 예요. 부처에게 물려받은 것도 아니죠. 본래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거라고요. 그런 재료를 가지고

 

悉能起用(실능기용)!

 

다 능히 그 작용, 씀씀이를 일으키는데,

 

  (단),  단서예요. 다만,

 

因緣有無不定故로 妙用이 不定耳언정

단연유무부정고   묘용   부정이

 

이것이 참 기가 막히는 말입니다. 인연이 있고 없는 것이 부정(不定), 일정하지가 아니하다. 일정하지 않는 까닭으로 묘한 작용이 마음을 가지고 인생을 영위해 가는 것이 묘용이 아니겠어요? 그것이 일정하지가 않다.

 

 사람 사람 따라서 다 인생살이가 조금씩 조금씩 다 다르듯이 바로 뭐냐? 인연이 있고 없는 것! 또 많고 적은 것!인연이 없는 것이 뭐냐? 내가 짓는 거예요. 내가 하는 것이 인연 이예요. 내가 얼마만치 그것을 작용을 했느냐? 이 마음이라고 하는 재료를 가지고 얼마만치 어떻게 사용했느냐 그것이 인연이거든요.

 

그것이 있느냐 없느냐? 또 있어도 얼마나 있느냐? 어떤 방향으로 있느냐? 여기에 따라가지고서 전부 그 작용이 달라져요. 그 인연의 무(無)와 유(有)와 부정한 까닭에. 일정하지 아니한 까닭에  妙用(묘용)도 일정하지 아니할 따름이다. 귀 耳(이)자는 따름이다. 그 뿐이다 이거예요. 다른 이유가 없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살이가 각각 달라요. 다른 이유가 뭐냐? 우리가 마음을 쓴 그 인연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의 밖으로 나타나는 묘용이라고 하는 우리 인생의 표현! 그것도 일정하지 않을 뿐이다. 참 설명을 아주 잘해 놓았죠. 이것은 기가 막히는 설명입니다.

 

또 일정 안 하는 게 좋아요. 일정하면 재미도 없어요. 또 일정하지도 않지마는. 일정 할래야 할 수도 없고, 또 일정 안 하는 것이 좋고. 여러 가지 차별되고 달라야 그게 볼만하고 또 세상의 모습이죠. 그것이 한결같이 천편일률적으로 찍어내듯이 찍어내면은 뭐 세상이 재미가 있겠습니까? 

 

집집마다 다 다르고. 마음씀씀이가 다 다르고. 얼굴이 다 다르고. 마음 쓰는 것이 다 다르고. 생김새가 다 다르고. 그 많은 사람들이 얼굴이 다 다르잖아요. 마음 쓰는 것도 다 다릅니다.

 

 예를 들어서 이 꽃이 좋다.  은혜사에 가면 이 꽃이 너무 많아요. 매일 아침 그냥 지나가며 수없이 보거든요. 그런데 여기다 갖다 놓으니 어떻게나 좋은지. 방에다 갖다 놓으니 아주 좋게 보이네요. 이것이 다 결국은 차별성! 차별에서 오는 것이고. 묘용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고. 그것은 무엇이냐? 인연을 그렇게 지었기 때문에 그렇게 나타난다.

 

 우리가 같은 꽃을 가지고도 들에 그냥 놓아두었을 때 하고, 특별히 갖다 놓으니까 촌스러운 것이 훨씬 더 순수해 보이고 소박해 보이고 더 좋은 거죠. 그러니까 쓰는 대로 간다고요. 쓰는 대로 나타나니까 재료는 똑 같은 재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이 각각 차이 나고 특별한 것이 그것이 바로 우리 작용이 그렇다.

 

 우리가 요즘 개성을 존중하는 시대 아닙니까?  그게 상당히 차별된 우리의 생활관 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그런 쪽으로 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마는, 그것도 제대로 이해를 못해 가지고 그냥 특별하게 억지로 우정 다르게 하려고, 다르게 안 해도 영 다른데 거기에 일부로 덧붙이니까 그게 또 꼴불견이 되는 거죠.

 

非無妙用也(비무묘용야)니

 

묘용이 없는 것이 아니니

 

修心之人(수심지인)이

 

마음을 닦는 사람들이. 불교공부를 한다. 불교를 믿는다. 나는 불교신자다. 부처님이 좋다. 전부 좋다라고 하는 사람들은 修心之人(수심지인)에 해당 돼요. 불교인은 사람들은 전부 마음 닦는 사람으로 부처님은 그렇게 취급을 합니다. 불교에서는 그렇게 취급을 해요.

 

 왜냐하면 불교는 결국은 이 마음 닦는 일이고. 마음관리 하는 일이고. 마음을 잘 파악해 가지고 그것을 가지고 내 인생을 잘 이끌어가도록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 불교의 일이기 때문에, 그래서 마음 닦는 사람들이

 

欲入無爲海하야

욕입무위해

 

無爲海(무위해)!

 

함이 없는 바다에 들어가서 

 

度諸生死인댄

도제생사

 

생과 사를, 나의 삶과 죽음을

(도)자. 제도하고자 할진 댄,

 

無爲海(무위해)라고 하는 것은, 이 불교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해도 함이 있는 것은 그것은 제대로 된 불법이 아니고. 해도 하는 것이 없는 것이 가장 제대로 된 불법이다. 그래서 무위해라. 함이 없는 바다라. 무위해라고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불법이거든요.

 

무위해라고 하는 말은 바로 불법의 바다다 그렇게 알면 됩니다. 불법은 하는 게 있는 것이 아닌 것이 바로 불법이니까. 무위해에 들어가서 생사를 제도하고자 할진 댄, 어떻게 하라고?

 

莫迷眞心體用斯在也니라

막미진심체용사재야

 

중요한 것은 다시 말해서,

마음 닦는 사람이 결국은 생사를 해탈 하려고 한다.

그렇게 하려면은 어떻게 해라?

 

眞心體用이 斯在야

진심체용   사재

 

바로 내가 있는 이 당처에,

여기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몰라서는 안 된다.

 

莫迷(막미)! 몰라서는 안 된다.

 

眞心體用이 斯在!

진심체용   사재

 

 여기에 있다고 하는 것을 몰라서는 안 된다. 여기에 있음을 미(迷) 하지 말지니라. 새기려면은 궂이 그렇게 새기는데, 진심의 체와 용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을 알아야 된다.

 

 그러니까 이 제목이 진심소재! 진심이 있는 곳! 진심이 있는 곳을 이야기하는 그런 대목이니까. 바로 진심이 어디 있다고?  일체 처에 있다. 여기에 있다라고 하는 것은 틀린 대답은 아니지만 은 좋은 대답은 아니 예요. 좋은 대답은 여기에 법등스님이 말했죠. 법등스님이 말한 끝의 구절!

 

片雲은 生晩谷하고 孤鶴은 下遙天이라

편운   생만곡     고학   하요천

 

억지로라도 시를 써서 표현을 해보는 것도 괜찮지요. “차나 마시고 가거라.” 한다든지. 오늘 문수원에 가서 무엇을 배웠느냐 하면은 근사하게 대답한번 해보세요. 커피 한잔으로 대답할 수도 있고 대답할 방법은 소견만 트이고 마음만 열리면은요, 어떤 방법으로든지 할 수 있지만 절대 대답은 일정하지 않습니다.

 

한가지는 아니 예요. 천만가지 대답이 나올 수가 있습니다. 천만가지 대답이 나와도 다 맞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천만가지 대답을해도 다 틀릴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툭 트인 마음이 중요하지요. 그 다음에 넘겨서 10번을 조금 더 하겠습니다. 

 

眞心出死(진심출사)

 

진심출사라 그랬어요. 참 마음은 우리 생사문제! 죽음과는 어떤 관계가 있느냐? 그것도 중요하지요. 우리가 살아가는데 최고의 어떤 적이 죽음이 아니겠습니까? 죽음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거든요.

 

그래서 불교는 생사해탈! 또 부처님이 출가한 동기가 사문유관을 하면서 사람은 죽을 수 밖에 없는가. 이 죽음을 극복하는 길은 없을까? 그것을 고민하다가 결국은 그 해결을 위해서 출가를 했거든요.

 

싯달태자가 그 태자의 지위에서는 남부러울 것 없이 정말 세상에 그 호강이라고 하는 호강은 다하고 살았는데 병들고 죽고 하는 것을 생각하니까 그냥 앞이 캄캄하거든요. 밥맛도 없고 그만 만 정이 떨어지는 거예요.

 

그렇게 부왕이 호강 하도록 모든 조건을 좋도록 제시를 했는데도, 그런 호화로운 생활에 그냥 완전히 만정이 떨어지는 거예요. 나도 병들고. 또 늙고 그러다 보면 결국은 죽을 것이 뻔한데, 그런 사람이 즐비하게 길거리에 널렸는데. 나도 저런 꼴이 될 텐데 어찌 밥맛이 나고 잠이 오겠느냐 이거예요. 이 종교적으로 어떤 천재성을 타고난 사람은요, 그런 것을 보면 잠이 안 와요.

 

우리같이 미련하기 이를 데 없으니까 금방 넘어져 죽는 사람을 봐도 그냥 자고. 먹을 것도 꾸역꾸역 다 먹고. 온갖 할 짓 다하고. 가장 가까운 그런 친척 부모 이런 사람들이 죽었는데도 한 이틀만 가면 그냥  말짱하게 정신차려 가지고 본래 그대로 생활을 다해요.

 

그런데 싯달태자는 안 그랬어요. 조금이라도 자기하고 가깝지 않은 사람, 길거리에 가서 세상구경 하려고 이렇게 나가서 늙은 노인보고. 사람이 죽어서 장례식 치르는 것 보고 거기에 충격을 받은 거죠. 충격을 받고 그 후로 잠도 못자고 밥맛도 없고 그냥 자나깨나 고민이 그 뿐이 예요. 어떻게 하면은 사람이 저렇게 안 늙고. 안 죽을 수 있는가. 죽음을 극복하는 그런 길은 없을까? 자나깨나 그 고민이었다고요.

 

 우리는 일생을 살아가면서 집안식구 몇이나 갔다 치워놓고도 그냥 전혀 까딱도 안 해요. 발심은 고사하고 그냥 어떻게 하면은 남긴 재산을 더 많이 차지할까? 이 생각만 하지 죽음에 대해서는 고민하지는 않거든요. 어떻게 보면은 참 다행스럽기도 하고 그래요. 그만치 참 미련스럽기도 하고.  그것이 너 나 할 것 없이 우리들의 실정입니다.

 

 그래서 이 진심의 문제. 우리의 이 마음이 그렇게 위대하다 면은 그런 생사문제를 초월할 수 있는가. 벗어난 그런 생사해탈의 경지는 과연 이 마음이 가능한가. 이 문제를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이 보조 스님으로서는 꼭 짚고 넘어 가야죠. 당신으로서는 당신의 수행과 깨달음과 그리고 당신의 모든 공부를 총동원해서 그야말로 불교의 엑기스만 여기다 집결시켜 놓은 것이 바로 진심직설이라고 하는 이 책일 텐데, 생사문제를 여기서 거론하지 않는다면은, 불교책으로도 가치가 없죠.

 

眞心出死(진심출사)

 

진심이 死! 생사를 벗어나다 라고 하는

그런 내용이 되겠습니다.

 

(혹)이 曰(왈)

 

혹자가 묻기를,

 

嘗聞見性之人은

상문견성지인

 

嘗聞(상문)! 일찍이 들었다. 사실은 많이 들어왔죠. 여러분들도 많이 들었죠. 불교에는 걸핏하면 생사해탈 생사해탈 그러지 않습니까? 삶과 죽음을 벗어난다 라고 하는 그런 말을 많이 듣잖아요. 일찍이 그러니까 견성한 도인은

 

出離生死(출리생사)라 하시니

 

생과 사를 출리(出離)한다.

벗어난다 라고 그렇게 하니

 

然이나 往昔諸祖는

     왕석제조

 

그런 말을 많이 들어왔어요, 또 여러분들도 사실은 많이 들었고 보조 스님만 들은 것이 아니 예요. 누구든지 다 들었고 생사해탈이라는 말은 걸핏하면 들으니까. 그런데 왕석제조는, 옛날의 모든 조사들은

 

是見性人(시견성인)이로대

 

전부 견성한 사람들이다 이거예요. 훌륭한 도인들이 전부 견성 도인이라고 그렇게 소문이 자자하다 이거예요. 그런데

 

皆有生有死 하시고

개유생유사

 

다 생(生)도 있고 사(死)도 있다 이거죠.

 

다 그분들이 그렇게 태어났고. 또 그렇게 삶을 살았고. 그리고는 결국은 몇 월 몇 시에 어떤 모습으로 죽음에 임했더라 이겁니다. 다 돌아가시더라 이거예요. 무생무사(無生無死)예요. 생(生)도 있고 사(死)도 있으신데,

 

今現見世間修道之人도

금현견세간수도지인

 

지금의 현견(現見)이라고 하는 말은

본듯이 환하게 본다 이거예요. 분명히 본다 이거죠.

너무 밝게 보니

 

世間修道之人도

세간수도지인

 

세간에 도를 닦는 사람도

 

有生有死事 하니

유생유사사

 

(生)도 있고 사(死)도 있으니  

 

如何云出生死耶잇가

여하운출생사야

 

어떻게 생사를 벗어 낫다고 하겠느냐?

그러니까 옛날 사람들의 말은 견성한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고 했고. 또 옛날 조사 스님들 다 보니까 견성한 것은 틀림이 없는데, 그런데 그분들은 다 죽었다 이거죠.

 

 그리고 또 지금의 세상 사람들을 봐도. 세상에 도 닦는 사람들을 봐도 역시 다 죽는다 이거예요. 태어나는 것도 있고 죽는 것도 있으니 어떻게 그런 것을 보고 생사를 벗어난다 라고 할 수가 있느냐? 이것은 아주 정말 불교 안에서 아주 큰 질문이죠.

 

 위선, 다른 분은 놓아두고 석가모니 한 사람만 보라 이거예요. 석가모니 한 사람만 두고 보더라도 그분이 생사를 염려해 가지고 앞에 이야기처럼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근심스러워 가지고, 그것을 가지고 고민하다가 밥맛도 잃고 세상맛 다 잃고 출가를 했는데,

 

그래서 6년 수도 끝에 견성 오도해서 생사를 해탈했다고 했는데, 내가 보기에는 죽었다 이거예요. 팔십이 되어가지고 다른 사람 죽듯이 그대로 죽었다 이겁니다. 그래 가지고 화장했고. 화장해서 사리 나온 것 다 곳곳에 다 모셔놓고 그랬지 생사 해탈한 게 어디 있느냐 이거예요. 불교공부를 하다 보면 이 문제에 봉착을 한다고요.

 

그래서 우리가 알고있는 상식으로는 석가모니가 그렇고 달마 역시 마찬가지고, 모든 도인들이 다 그 과정을 부처님도 그렇게 왔다가 그렇게 갔고, 모든 조사 스님들도 그렇게 왔다가 다 그렇게 갔어요. 생(生)과 사(死). 생사를 다 그렇게 했는데 어떻게 해 가지고 

 

出生死(출생사)!

 

생사를 벗어난다고 말하는가.

불교에서 걸핏하면 생사해탈! 생사를 벗어난다고 말을 많이 하는데 어떻게 해서 그게 가능한가. 아주 이것은 참 큰 질문입니다. 정말 우리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몰라도 죽음에 대해서 크게 고민을 안하고 살아서 그렇지, 정말 싯달 태자 같이 그렇게 아주 종교적인 감각이 뛰어난 사람들은 죽음의 문제가 보통문제가 아니거든요.

 

 그리고 또 불교에는 너무나도 지금 우리의 상식으로 볼 때는 불교는 모순 속에 빠져있다 이겁니다. 왜냐하면 석가가 그렇게 죽었지 않느냐 이거예요. 물론 속인이기는 하지만 석가가 그렇게 죽었고 달마도 그렇게 죽었고, 온갖 역사적으로 뛰어난 도인들이 그들이 다 도통한 도인들인데 다 그렇게 내 소견으로 볼 때 일단 죽었지 않느냐 이겁니다.

 

그런데 불교는 죽지않는다면서. 생사해탈을 한다면서 어찌 죽었느냐? 그런데 왜 생사해탈을 걸핏하면 쓰느냐? 그것을 질문 했거든요. 우리가 불교공부를 하는 사람이라면은 당연하게 의문을 가져 볼만한 그런 대목입니다.

 

여기 이것이 이번 주 숙제예요. 경전을 뒤지든지 그 다음에 이 뒤에 공부를 하시든지, 아니면 가서 참선을 하든지 기도를 하든지 해 가지고 이것을 좀 해답을 얻어와야 돼요. 일주일이면 충분히 해결한다고 그랬어요. 조사 스님도 그렇게 말씀을 하셨다고요. 일주일이면 충분히 해결한다고 그랬어요. 빠른 사람은 삼일이면 해결한다 그랬어요. 그런데 석가모니는 6년이 걸렸어요.

 

여기에 대한 설명은 뒤에 나옵니다. 나오기 전에 한번쯤 골똘히 괜히 쓸데없는 생각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런 것 가지고 고민해보고 생각해 보는 것이, 정말 우리 마음 닦는 일에 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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