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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眞心出死  (32)

 

 

 

故로 敎中에 說하사대 菴婆女가 問文殊云호대

   교중          암파녀   문문수운

明知生是不生之法이언마는 爲삼?被生死之所流이닛고

명지생시불생지법         위삼마피생사지소류

     

文殊가 云하사대 其力이 未充故라

문수          기력   미충고

後有進山主가 問修山主云하사대

후유진산주   문수산주운

明知生是不生之法이언마는 爲삼마却被生死之所流이닛고

명지생시불생지법         위삼마각피생사지소류

     

修가 云하사대 筍畢竟成竹去나 如今에 作筏使인들 得마아 하시니

          순필경성죽거   여금   작벌사     득마아

所以로 知無生死가 不如體無生死며 體無生死가 不如契無生死며  

소이   지무생사   불여체무생사   체무생사   불여계무생사

契無生死가 不如用無生死니 今人은  尙不知無生死어든

계무생사   불여용무생사   금인    상부지무생사

 

況體無生死하며 契無生死하며 用無生死耶리요

황체무생사     계무생사     용무생사야

故로 認生死者는 不信無生死法이 不亦宜乎아

   인생사자   불신무생사법   불역의호

 

11.  眞心正助 진심정조

 

或이 曰 如前息妄하면 眞心이 現前이어니와

   왈 여전식망     진심   현전

且如妄未息時에는 但只歇妄做無心功夫야 更有別法可對治諸妄耶라

차여망미식시     단지헐망주무심공부   갱유별법가대치제망야 

 

曰正助가 不同也니 以無心息妄으로 爲正하고 以習衆善으로 爲助

왈정조   부동야   이무심식망     위정     이습중선     위조

譬如明鏡이 爲塵所覆어든 雖以手力으로 개이나

비여명경   위진소복     수이수력     개식

要須妙藥磨瑩하야사 光始現也니 塵垢는 煩惱也요

요수묘약마영       광시현야   진구   번뇌야

手力은 無心功也요 磨藥은 衆善也요 鏡光은 眞心也라

수력   무심공야   마약   중선야   경광   진심야    

 

起信論에 云하사대 復次信成就發心者는 發何等心고 略有三種하니

기신론          부차신성취발심자   발하등심   약유삼종

云何爲三고 一者는 直心이니 正念眞如法故요

운하위삼   일자   직심     정염진여법고   

二者는 深心이니 集一切善行故요

이자   심심     집일체선행고

三者는 大悲心이니 欲拔一切衆生苦故니라

삼자   대비심     욕발일체중생고고

 

問曰上說法界一相이라 佛體無二어시늘 何故로 不唯念眞如하고

문왈상설법계일상     불체무이       하고   불유념진여

復假求學諸善之行이닛고 答曰譬如大摩尼寶가 體性이

불가구학제선지행       답왈비여대마니보   체성    

明淨이나 而有鑛穢之垢하니 若人이 雖念寶性이나 不以方便으로  

명정     이유광예지구     약인   수념보성     불이방편

種種磨治하면 終無得淨인달하야 如是衆生의 眞如之法도

종종마치     종무득정         여시중생   진여지법

體性이 空淨이나 而有無量煩惱染垢하니 若人이 雖念眞如나

체성   공정     이유무량번뇌염구     약인   수념진여

不以方便으로 種種熏習하면 亦無得淨하리니 以垢無量하야

불이방편     종종훈습     역무득정       이구무량

변一切法故로 修一切善行하야 以爲對治니

변일체법고   수일체선행     이위대치

若人이 修行一切善法하면 自然歸順眞如法故라 하시니

약인   수행일체선법     자연귀순진여법고

 

據此所論컨댄 以休歇妄心으로 爲正하고 修諸善法으로

거차소론     이유헐망심     위정     수제선법

爲助니 若修善時엔 與無心相應하야 不取着因果니

위조   약수선시   여무심상응     불취착인과

若取因果하면 便落凡夫人天報中하야 難證眞如하야 不脫生死요

약취인과     편락범부인천보중     난증진여     불탈생사    

若與無心相應하면 乃是證眞如之方便이며  

약여무심상응     내시증진여지방편

脫生死之要術이라 兼得廣大福德하리니

탈생사지요술     겸득광대복덕

 

金剛般若經에 云하사대 須菩提야 菩薩이 無住相布施하면

금강반야경          수보리   보살   무주상보시

其福德을 不可思量이라 하시니

기복덕   불가사량

 

今見世人이 有參學者가 재知有箇本來佛性하면

금견세인   유참학자   재지유개본래불성

乃便自恃天眞하고 不習衆善하나니 豈只於眞心에 不達이리요

내편자시천진     불습중선       기지어진심   불달

亦乃번成懈怠하야  惡道도 尙不能免이어든

역내번성해태      악도   상불능면

況脫生死아  此見이 大錯也니라

황탈생사    차견   대착야

 

 

 죽는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 예요. 만일 자기를 꼭 먼저 해결해야 할 것 같은 일이라면은 죽어서 다음에 또 해결해야 돼. 그 문제! 미결된 그 일을 또 만나게 돼요. 만나서 해결해야 되지 해결 안 하면은 못 견딥니다.

 

 만약에 진 빚이 있다면은 갚아야 되고, 만약에 어떤 받아야 할 어떤 고통이 있다면은 그 때 또 고통도 받아야 되고, 물어야 할 어떤 행적이 있다면은 가서 또 물어야 되는 거예요. 그게 우리가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이치를 알았을 때 인생을 잘 만들어 가야 돼요. 이런 이치를 알 때 잘 만들어 가야지 모를 때 가면은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공부가 제대로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 우리가 생사가 없다는 말은 참 많이 해 오지만은 생사가 없다고 하는 것을 벗어나기는 참 어렵죠. 그래서 

 

故로 敎中에 說 하사대

   교중  설  

 

 敎(교)! 여러 가지 경전 속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설하기를

 

菴婆女가 問文殊 云호대

암파녀   문문수 운

 

  암파녀라고 하는 어떤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물었어요.

어느 경전에 나타났는지 그것은 이제 이야기가 없고요.그런데

 

爲삼?被生死之所流이닛고

위삼마피생사지소류

 

爲甚삼?(위삼마)

 

뭐 때문에 생사에 흘러가느냐 이 말이죠 생사가 없다는 것은 설명을 들어 불교인들은 어지간히 안다고요. 불교 공부를 좀 하면은 그것은 생사가 본래 없는데, 마음이 그렇게 쉽게 없어지는 것이 아니듯이, 그렇다면은 그 마음이 나라면은 마음에는 그런 생사가 없는 것은 어지간히 안다고요.

 

그런데 우리는 생사에 둥둥 떠내려 가고 있잖아요. 죽고 태어나고 죽고 태어나고 하는 그런 흐름, 또 그런 상식에 젖어있다 이거 예요. 왜 그러느냐 이거죠. 그것을 암파녀라고 하는 여자가 물으니까

 

文殊(문수)가 云(운) 하사대

 

문수가 대답하기를

 

其力이 未充故라 하시고

기력   미충고

 

 그 힘이 충분하지 못한 까닭이다. 그 힘이 충분할 것 같으면은 떠내려 가지 않죠. 물이 아무리 세차게 흘러도 헤엄치는데 힘이 셀 것 같으면은 안 떠내려 가지요. 안 떠내려가고 언덕에 올라오지요.

 

그런데 힘이 충실하지 못하면은 할 수 없이 강물에 떠내려 갈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생사의 강물에 떠내려가는 것은 힘이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後有進山主 問修山主 云 하사대

후유진산주 문수산주 운

 

이것도 옛날에 있었던 이야기고

아까 문수보살하고 암파녀 이야기는 끝나고

또 뒤에 진산주라고 하는 사람과

수산주라 고 하는 사람에게 묻기를,

 

明知生是不生之法이언마는

명지생시불생지법

 

물음은 아까 물음하고 똑 같아요.

 

! 이 생이 아니라고 하는 불법을 밝게 알건마는

 

爲삼?却被生死之所流이닛고

위삼마각피생사지소류

 

  위심마! 그대로 똑 같지요?

  어째서 생사의 흐르는 바를 믿습니까?

  암파녀의 질문하고 똑 같아요. 그러니까

 

(수)가 云(운) 하사대

 

  수산주가 말하기를

 

筍畢竟成竹去나 如今에  

순필경성죽거   여금  

 

이것은 아주 비유가 구체적 이예요.

  죽순이 필경에 어떻게? 대가 되지요.

 

成竹(성죽)!

 

대를 이루어 가지마는

  그렇지만 지금은 어때요? 지금은 바로

 

作筏使인들 得마아라 하시니

작벌사     득마아

 

 지금의 그것을 베어 가지고 뗏목을 만들어 사용을 한들 되겠느냐 이 말입니다. 득마아 하는 것은 되겠느냐 이거예요. 죽순은 자라 가지고 결국은 뗏목은 만들 수 있어요. 그렇지만 지금 그런 이치를 안다고 해서 그 죽순을 지금 베어 가지고서 뗏목을 만들 수 있겠어요? 죽순은 안되잖아요. 잘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런데 조금만 기다리면 그 죽순이 커 가지고 나중에 뗏목을 만들 수 있거든요. 나중에 뗏목을 만들 수 있는 것이라고 해서 지금 또 죽순을 베서 뗏목을 만들려고 하면은 그것은 안되고, 그런데 또 일편 생각해 보면은 또 그 죽순이 결국은 뗏목을 만들어서 사용하는 것으로 된다 이 말입니다. 이것이 아주 우리가 꼭 기억해둬야 될 “생사가 없다.” 이 문제에 대한 네 가지 이야기가 나옵니다.

 

所以로  知無生死가

소이    지무생사

 

생사가 없다는 것을 아는 것, 우리가 그것은 설명을 들어서 알죠. “아 불교에는 생사가 없다고 한다. 왜 생사가 없는고? 우리 마음은 불생불멸이니까. 우리 마음자리는 결국은 부모로부터 받은 것도 아니고, 이 몸이 죽는다고 이 마음마저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불생불멸이고 그렇다면은 생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생사가 없다는 것을 우리 불자들은 들어서 대충 안다 이거예요. 그런데

 

知無生死(지무생사)가

 

생사가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不如(불여)!

 

이것만 같지 못하다. 뭐가?

 

知無生死 體無生死

지무생사 체무생사

 

  줄 그어 놓으세요. 이것은 밑줄이 예요.

 

體無生死(체무생사)

 

(체)자는 무슨 말인고 하니, 알지(知)자 보다가 한걸음 더 나아간 것입니다. 체발했다 그래요. 체 받았다. 우리가 글씨 쓸 때 뭐라고 하죠? 스승이 이렇게 글씨를 써 주면은 체 받는다 그래요. 그러면 그것을 보고 쓸 때는 그런대로 흉내를 내요.

 

그래서 공부를 어느 정도 하면은요 생사가 없는 것 같애. 그게 알지(知)자 보다 한단계 나아간 거죠. 훨씬 낫지요. 글씨를 자기 혼자 쓸 때 붙잡고 쓰면 된다고 하지만 자기 혼자서 쓸 때, 붓글씨는 붓글씨지마는 그것은 모양이 없지요. 그런데 스승의 글씨를 딱 두고 그것을 체 받아서 쓰면은 그런대로 모양이 근사하다고요. 그것이 체무생사 예요. 그 다음에

 

  體無生死(체무생사)가

 

  생사가 없는 도리를 체 달하는 것이

 

不如契無生死며

불여계무생사

 

생사가 없다는데 계합 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이 契(계)자는 계합 할 계자, 딱 들어 맞았다.

그것은 한단계 높아졌지요. 

 

契無生死(계무생사)

이것은 말하자 면은 어떤 스승이 있는데다가 그 글씨 쓰는데다 비유를 한다 면은 혼자 써도 체를 보고 썼는데 똑 같애. 우리가 스승의 글씨체를 보고 쓴다고 해서 똑 같지는 않죠. 엇비슷하지. 엇비슷한 것이 체무생사! 똑 같은 것. 한 점 하나 1m도 오차가 없이 쓰는 것이 계무생사 예요.

 

 그런데 체를 던져버리고 쓰면은 어때? 그것은 안 된다고요. 오차가 생기고 영 한참 체가 없이 쓰면요 지 멋대로 되는 거예요. 그래서 책본 을  보고 쓸 때는 괜찮더니 어떻게 책본 을 안보고 쓰니까 영 형편없다고 그래서 글씨를 좀 쓰는 사람들은 와서 글씨를 좀 이렇게 써보라고 하면은 자신감을 가지고 쓴다고요.

 

그것은 왜 자신감이 있느냐? 체, 책본 을 보고 쓸 때는 금방 쓰거든요, 그러니 안보고 써도 그렇게 나올 줄 알고 붓을 잡고 떡 썼는데 아니 예요. 그대로 안 나오거든, 그래 가지고 막 부끄러워 하고 하는 것을 내가 봤어요. 책본 을 보고 쓸 때는 그런대로 썼는데, 안보고 쓰니까 안 된다 이거죠. 그래서 안보고도 마음대로 쓰는 것을 뭐라? 

 

不如用無生死니

불여용무생사

 

  생사가 없는 도리를 사용한다 이거죠.

 

契無生死가 不如用無生死라.

계무생사   불여용무생사

 

知無生死 體無生死 契無生死 用無生死

지무생사 체무생사 계무생사 용무생사

 

이것이 사대 무생사라 해 가지고 유명한 말입니다.

그것은 밑줄 확실하게 그어놓아요.

그래서 생사가 없는 것을 계합하고

생사가 없는데 계합 해 가지고도 부족하다 이거죠.

 

用無生死(용무생사)

 

 생사가 없는 것을 마음대로 활용할 줄 알아야 돼.

죽고 싶으면 죽고 죽기 싫으면 안 죽고.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거꾸로 서서 죽기도 하고, 물에서 목욕하고 그 자리에 물속에서 그냥 죽기도 하고. 앉아서 죽기도 하고 서서 죽기도 하고 자유자재로, 그런 사람들은 용무생사야. 생사가 없는 도리를 마음대로 활용을 해요. 마음대로 쓰니까 사용한다는 거죠. 자기가 써야 자기 것이 되죠..

 

 글씨로 이것을 이야기 하자 면은 책본 보고 쓸 때 잘 써 가지고 그것이 무슨 뭐 자기 글씨라고 할 수 있어요? 책본 던져 버리고도 자기 마음대로 그 책본 글씨처럼 똑같이 그냥 마음대로 써야 돼요. 책본에 없는 글씨도 그 사람 체같이  똑같이 써낼 줄 알아야 그게 용무 생사죠. 그 정도는 득력이라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정도는 자기 글씨가 된 거죠. 그 때는 자기 글씨가 된 것이고 자기 것이 돼 버린 거죠. 그래서 용무생사 라는 것이 그런 뜻입니다. 생사가 없는 것을 쓴다. 이쯤 돼야 되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불교에서 도인들이 생사가 없다. 생사해탈하지만은 생사해탈을 여기서 보여줘야 돼요. 그게 용무생사인데 생사가 없는 것을 쓴다 하는 그런 단계지요. 역사적으로 참 그런 예는 보면은 그렇게 흔치가 않지요. 다른 데서 만나기 어려운 이 네 가지 낱말!

 

知無生死(지무생사)

 

이것은 여러분들이 다 알아요. 들어서 알고. 어디서 법문 들어서 알고. 책 봐서 알고 “아 생사가 없다. 우리 마음이 뭐 생사가 있을 택이 있나.” 그런데 그게 어느 정도 체가 익어야 되고,  체가 익고 나면은 계합이 돼야 돼요. 마음에 딱 계합이.들어 맞아버려야 돼요. 그리고는 내가 마음대로 써야 되고 활용을 해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게 不如用無生死(불여용무생사)니.

 

  今人(금인)은  지금 사람들은

 

尙不知無生死어든

상불지무생사

 

오히려 생사가 없는 것도 알지를 못하거든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알지요?

다른데 사람들은 생사가 없는 것도 알지를 못하거든

 

況體無生死(황체무생사)하며

 

하물며 생사가 없는 것을 체달 할 것이며

 

契無生死(계무생사)하며

 

생사가 없는 것에 계합 할 것이며

 

用無生死耶(용무생사)리요

 

생사가 없는 것을 쓸 수 있겠는가. 쓰리요,

생사가 없는 것에 체달하며 생사가 없는 것에 계합하며 생사가 없는 것을 쓸 수 있겠는가. 

 

(고)로  말하기를

 

認生死者는 不信無生死法이 不亦宜乎아

인생사자   불생무생사법   불역의호  

 

認生死者(인생사자)는

 

생사를 오인하는 사람

생사가 있다고 잘못 아는 사람들은

 

不信無生死法이 不亦宜乎아

불생무생사법   불역의호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는가.

 

그 생사를 잘못 아는 사람은 생사가 없다는 것은 빨간 거짓말이다 이거죠. 그리고 절대로 안 믿으려고 하는 것. 그것도 어쩔 수 없다는 거예요.

 

不亦宜乎(불역의호)아

 

또한 마땅하지 않겠는가.

생사가 없다는 것이 당연하지. 왜냐?

 

생사가 없다는 것을 잘 모르니까. 불교 공부를 안 했으니까. 법문도 안 듣고 불교 경전도 한 권 안 봤으니까 생사가 없는 것을 알 수가 없죠.

 

그래서 알기라도 해야 돼요. 일단 첫 단계로서 생사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그게 체득이 된다고요. 체득이 되면은 계합이 되고 계합이 되면은 나중에 활용이 돼요. 그 네 단계로 우리가 생사가 없는 것을 공부해 가는 그런 내용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 이제 진심출사라! 생사에서 벗어난다 라고 하는 그런 문제! 아주 간략하지마는 불교의 최종목표가 생사해탈인데, 생사의 해탈(解脫)을 어떻게 해서 가능한가? 그리고 우리는 왜 그게 믿어지지 않고 또 그것이 늘 활용이 되지 않는가? 그런 문제들을 짧은 글 속에서 다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11번은 진심정조라 그랬어요. 여기 아주 좋은 내용이 나옵니다. 진심에 대해서 正과 助(정과 조)!

 

우리가 정(正), 조(助). 주. 부 그러죠. 주식 부식 하듯이. 예를 들어서 무슨 어떤 건물에 화제 담당 정. 조 해 가지고 조는 누구고, 말하자 면은 아주 직접 책임자! 그 다음에 보조 요원! 이런 식으로 우리가 생각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진심을 우리가 이해하는데도 정과 조가 있어요. 주와 부가 있는데 그런 점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或이 曰  如前息妄하면 眞心이 現前이어니와

     여전식망     진심   현전

 

앞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망(妄)!

잘못된 것을 쉬어버릴 것 같으면은

(妄)! 망상 망념 잘못된 것을 쉬어버릴 것 같으면은

 

眞心(진심)이  참 마음이

 

現前(현전)  앞에 턱 나오거니와

 

且如妄未息時에는

차여망미식시

 

또한 망상이 아직 쉬지 못했을 때는

 

但只歇妄做無心功夫가

단지헐망주무심공부

 

  단지 망상을 쉬는 무심공부를 지어야 되느냐?

  그러니까 참선만 해서 옳으냐 이말입니다.

  무심공부만 지어야 되느냐? 아니면

 

更有別法可對治諸妄耶이닛가

갱유별법가대치제망야

 

 다시 다른 어떤 특별한 별법이 있어 가지고, 온갖 망상들을 대치 할 수가 있느냐?  이거 아주 좋은 질문을 했지요. 덮어놓고 그냥 무심공부만 하느냐? 아니면 다른 무슨 공부방법이 혹시 없느냐? 그것을 질문을 했어요. 그러니까

 

(왈)  대답하여 가로대

 

正助가 不同也니

정조   부동야

 

정식으로 하는 것 하고 그 다음에

  보조적으로 하는 것 하고 그것이 같지가 않다.

  그러면 정(正)은 무엇이고 조(助)는 무엇이냐?

 

以無心息妄으로 爲正하고

  이무심식망     위정

 

 망상을 쉬는 것으로서 정을 삼고, 그것이 바른 공부다 이거죠. 처음부터 무심공부를 쭉 해 왔지만 그야말로 망을 쉬는 공부다. 기도든지 참선을 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아주 골똘하게 깊이 들어 가는 거예요.

 

 기도를 해도 누구 뭐 어떻게 학교 보내달라고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마음을 깨치기 위해서 하는 공부! 그런 기도! 그런 참선! 사경 이것이야말로 진짜 올바른 공부거든요.

 

기도를 하든지 방법은 상관없습니다. 방법은 상관없고 목표는 거기다 두고 마음 공부에다 목표를 두고 한다면은 그것은 정말 바람직한 기도지요. 그렇게 되면은 그것은 식망 무심공부예요. 마음을 쉬는, 무심공부를 짓는 것이고 그게 아주 바른 길이고 나머지는 

 

以習衆善으로 爲助라

이습중선     위조

 

그러면 보조적으로 할 것은 뭐냐?

衆善(중선)을 익히는 것으로 조를 삼는다.

 

여러 가지 선(善)! 온갖 선을 실천하는 것. 좋은 일 많이 하는 것, 그것으로 서 보조적인 그런 공부를 삼는다.

그래 놓고 비유를 듭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비유를 잘 알아 들으니까요. 공부하는데 정이 뭐고 조가 뭐라는 것을 여기서 밝히는데,

 

譬如明鏡이 爲塵所覆어든

비여명경   위진소복

 

비유컨대 거울입니다.

명경이 먼지 위에 덮인 바가 되어서

 

저것은 유리로 된 거울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동으로 된 거울입니다. 옛날에 거울하면은 무조건 동, 구리로 만든 거울이니까 그래서 구리는 자주 닦아야 되거든요.

먼지에 덮인 바가 되었는데

 

雖以手力(수이수력)으로

 

비록 수력으로서, 손의 힘으로서

 

(개식)이나

 

문질러서 닦지요.

손의 힘으로서 문질러서 거울을 닦는데

 

그냥 문질러서 닦는 게 아니 예요. 어떻게 닦지요?

옛날에 구리 밥그릇이라든지 뭐 향로 촛대를 닦는다든지 재기를 닦는다 할 때 어떻게 그냥 손으로 막 닦으면 돼요? 빛이나요? 어떻게 돼요? 약을 써야 된단 말이 예요. 약이 없으면 아무리 닦아도 안 닦여 져요. 기왓장이라도 갈아 가지고 가루를 가지고 닦든지 그보다 더 좋은 약을 가지고 닦든지 그래서

 

要須妙藥磨瑩하야사

요수묘약명경

 

요컨대 모름지기 妙藥(묘약)으로서

구리가 잘 닦이는 약이 있어요.

묘약으로서 문질러 빛을 내어서

 

光始現也(광시현야)니

 

  구리의 빛이(동경의 빛이) 비로소 나타난다.

  그 이야기를 잘 생각을 하고, 그러면 무엇이냐?

 

塵垢(진구)는  때라고 하는 것은

 

煩惱也(번뇌야)요

 

먼지니 때라니 하는 것은 우리 마음속의 번뇌다.

 

手力(수력)은

 

손 힘으로 닦는다는 그것은 무엇이냐?

 

無心功也(무심공야)요

 

무심공부다 이거죠.

그것은 기도가 됐던지 참선이 됐던지 간에

골똘하게 마음 공부하는 것이 그것이 수력이고

그 다음에 뭐죠?  

 

磨藥(마약)은

 

말하자 면은 마약 하는 약이 있잖아요.

묘약으로서 갈고 닦는데 그것은 뭔고 하니

 

衆善也(중선야)요

 

여러 가지 착한 일이다 이거죠. 어디 봉사도 하고. 보시도 하고. 또 어디 좋은 일도 하고 여러 사람에게 보탬이 되는 그런 좋은 일을 자꾸 하는 것. 그게 약이다 이거죠. 그리고

 

鏡光은 眞心也라

경광   진심야

 

 결국은 그런 것을 좋아하면서 뭐가 나타난다? 거울에 빛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결국은 진심이 나타난다. 그러면은 우리가 수행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 뻔하잖아요. 기도나 참선으로 우리 마음을 자꾸 갈고 닦고 그러면서 또 한쪽으로는 온갖 여러 가지 선한 행을 한다. 복도 짓기도 하고 여러 가지 남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고 여러 가지 선한 행을 하는 것. 그 두 가지를 해야 돼요. 무엇이 정(正)이고 무엇이 조(助)인지 그것은 또 알아야 돼요.

 

마음 닦는 것이 불교에서는 천하에 없어도 이것은 바른 공부, 가장 주된 공부고, 그 나머지 복 짓고 하는 것은 보조적인 공부예요. 그것을 알아야 돼요. 그런데 보통 우리 신도님들은 그냥 뒤바꾸어서 생각하고 있어요. 복 짓는 공부는 열심히 하고 마음공부는 별로 안 해요. 어쩌다 해볼라 치면은 잘 안되고. 스님들은 그 반대네 또.

 

복 짓는 일은 게을리 하고 선방에 앉아서 마음 닦으면서 조는 그것만 열심히 해요. 그것으로 다 되는 게 아니 예요. 그런 것은 승 속을 분별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 예요. 누구에게나 똑같이 해당되는 이야기 때문에,

 

그래서 승속을 막론하고 한 머리 일면 참선 하고, 한 머리 복 짓고 복 지으면서 참선하고. 싸우면서 이해하고. 이해하면서 싸우고 싸운다는 말은 참 안 좋은 일이지마는 예컨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 지으면서 마음공부하고 마음공부 하면서 복 짓고. 중선이라 라는 말을 복 짓는다 라고 그런 표현을 했는데 뭐 복 짓는 것만 선한 일이 아니지요. 선한 일은 무엇이든지 복이 되니까 그래서 선한 일을 복 짓는 일이다. 편의상 표현을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가지만 하지 마세요. 꼭 겸해서 하라는 말이죠. 마음 닦는 공부! 그 다음에 좋은 일. 衆善(중선) ! 여러 가지 선!

 

  七佛通戒偈(칠불통계)라고 하는 것은

 

불교 이야기를 할 때 그 이야기를 꼭 하게 되고.

또 그것은 아함경 법구경에서 나오는 이야기인데

 

제악막작 중선봉행 자정기의 시제불교

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

 

여기 이 이야기 하고 똑 같애요.

제악막작 중선봉행하면 어지간한 사람은 다 알잖아요.

 

제악막작(諸惡莫作)

 

  모든 악은 짓지 마라. 그리고

 

  중선봉행(衆善奉行) 하라

 

  여러 가지 선을 받들어 행하라.

좋은 일, 여기 나오는 그대로지요.

그리고 그 다음에

 

  자정기의(自淨其意)

 

  스스로 그 마음을(생각을) 청정히 가지라.

 

  시제불교(是諸佛敎)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니라.

 

그러면 자정기의는 여기서 말하는 중심 되는 정(正)이 되고 정 공부가 되고, 제악막작 중선봉행은 조(助)가 되는 거죠. 그러니까 불교는 이 네 글의 속에 다 있다 이거 예요. 그런데 중선봉행만 자꾸 하고 자정귀의를 소홀히 해도 잘못이고. 자정귀의만 자꾸 하고 중선봉행은 또 안 하면은 그것도 잘못이죠.

 

그래서 정과 조가 조화를 이루어야 새의 두 날개와 수레의 두 바퀴와 같다. 그래서 조화를 이루어야 제대로 된 공부고 제대로 된 불자다. 그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복 짓는 것이 빛이 나려면은 마음공부를 해야 되고 마음공부가 빛이 나려면은 복 짓는 일을 많이 해야 돼요. 좋은 일을 많이 해야 된다고요.

 

그래서 혹시 주변에 불교에 신심은 있는데 어디 치우쳐 있거든 꼭 들여 주세요. 가르쳐 줘야 돼요. 간단 하잖아요. 불교를 뭐라고 하느냐? “제악막작 중선봉행하고 자정기의 하는 것이 불교라 하더라.”

 

중선봉행만 가지고 자꾸 불교라고 하면은 그것은 곤란하지요. 자정기의는 빼버리면 곤란하지요. 중선봉행만 가지고 자꾸 불교라고 하면은 그것은 안 돼요. 자정기의가 주라고요. 내 마음을 청정히 갖는다는 것은 뭐죠? 결국은 마음공부예요. 내 생각을 청정히 갖는 것이 주라고요. 중선봉행은 조입니다.

 

말하자 면은 자정기의가 주식이고 중선봉행이 부식이라고요. 꼭 저 가운데 하나만 택해야 된다면은 주식을 택해야지 안 그래요? 불교공부는 냉정해요. 확실하게 이야기를 해야 돼요. 우리가 실천을 하느냐? 못 하느냐? 하는 것은 그 다음 문제고. 그래서 무엇이 정이다 무엇이 조다 라는 것을 이렇게 하고,

 

그 다음에 이것은 보조 스님 자신만의 의견이냐? 아니다 이거죠. 기신론이라고 하는 이것도 스님들이 공부하는 교과서로 들어 있어요. 아주 유명한 마명보살이 지은 것입니다. 이것은 마명보살이라는 이가 그야말로 참 부처님의 가르침을 아주 압축하고 압축해서 짧은 명문 하나에다가 다 담았어요. 그 가운데 있는 말이에요.

 

發何等心고 復次信成就發心者는

발하등심   부차신성취발심자

 

불교에 심심(深心)이 성취되는 그런 발심, 다시 말해서 그것은 심심이 있다 이 말이죠. 불교에 발심 해서 심심이 있는 신도다 이거예요. 그러면 무슨 마음을 가지고 신도라 하느냐? 그 사람에게 어떤 마음이 있기에 신도라고 하느냐? 꼭 우리가 이것을 여기서 기억해 둬야 되지요. 세 가지가 있다.

 

略有三種(약유삼종)하니

 

세 가지를 갖추어야 진짜 신도고 진짜 불자예요. 불자가 갖추어야 할 세 가지 마음이다 이렇게 정리를 하면 딱 좋습니다. 불교에 심심이 있는 사람을 불자라고 하고. 그런 불자라면은 이런 세 가지 마음을 곡 갖추어야 된다.

 

略有三種(약유삼종)하니

 

간략하게 세 가지가 있으니

 

云何爲三(운하위삼)고

 

어떤 것이 세 가지라고 하느냐?

 

一者는 直心이니

일자   직심

 

일자는 직심입니다. 곧은 마음!

 

여기서 곧은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정직한 마음이 아니 예요. 예를 들어서 보통 도덕적으로 말하는 정직한 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여기서 곧은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뭐냐?

 

正念眞如法故요

정념진여법고

 

진여의 법을 바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음공부예요. 쉽게 말해서 지금까지 정(正)으로 이야기 했던 무심공부. 마음 닦는 공부! 참선 공부! 기도 공부가 正念眞如法(정념진여법)이라. 진여의 도리를 바로 생각하는 것.

 

 진여는 바로 우리 진심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진여의 도리는 우리 진심입니다. 진여나 진심이나 똑 같은 말이에요. 진여법을 생각하는 것이 그 첫째라고 했잖아요. 첫째니까 아까 자정기의(自淨其意)가 정념진여법이고, 여기서 보조 스님이 말씀하신 무심공부가 자정기의고. 정념진여법이고 그렇습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二者는 深心이니

이자   심심

 

깊은 마음인데, 뭐라고요?  

 

集一切善行故요

집일체선행고

 

집 일체 선행이라고 그랬지 않습니까?

일체 선행을 모은 연고이다.  그런고로 중선봉행(衆善奉行)이 되는 거죠. 중선봉행의 행은  보조스님께서도 온갖 선을 행하라. 중선을 행해야 된다. 그 다음에 여기는 또 한 가지 조건을 이야기를 했는데

 

三者는 大悲心이니

삼자   대비심

 

셋째는 대비심이니

 

欲拔一切衆生苦故니라

욕발일체중생고고

 

일체 중생들의 고통을 빼주고자 하는 그런 마음이 있어야 된다. 자비심이 있어야 된다. 그래서 보조 스님께서는 자비심까지는 이야기를 안 했지요. 그것은 지금 급한 것이 아니거든요. 급한 게 아니고 또 이 자비심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 착한 일들을 하는 것이 사실은 거기에 포함될 수가 있습니다.

 

외로운 사람. 힘든 사람 이런 사람들에게 보탬이 되고 어떤 힘이 되어주고 그것이 결국은 그 사람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고, 혹은  중생을 생각하는 것이다 보니까 그것이 결국은 대비심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데,

 

기신론에서 아주 조직적으로 그것을 분류해서 세 가지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보나, 여기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이 이야기를 보나, 여기 보조스님의 가르침으로 보나 이것은 틀림없는 거예요.

 

 일체 불교를 선명하게! 불교가 어떻게 하는 것이냐?  불교 공부는 어떻게 하느냐?  무엇이 공부냐? 이런 것을 아주 확연하게 어떻게 변명의 여지가 없이 이렇게 확실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말하면 직심은 진여법을 정으로 바로 생각하는 것은 마음공부 무심공부, 또 자장기의 라면은 그 다음 심심 깊은 마음은 온갖 좋은 일을 합니다. 제일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것. 그 다음에 세 번째 대비심은 중생들의 고통을 어떻게 하더라고 덜어 주려고 하는 것, 이 세 가지 마음

 

問曰上說法界一相이라

문왈상설법계일상

 

물어 가로대 위에서 법계는 하나의 모양이다 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했더라.

 

佛體無二(불체무이)어시늘

 

  부처님의 몸은 둘이 없어요. 그런데

 

何故(하고)로  ?

 

不唯念眞如(불여념진여)하고

 

오직 진여만을, 진여는 진심과 같다고 그랬지요.

진여만을 생각하지 않고 다시

 

復假求學諸善之行이닛고

불가구학제선지행

 

諸善(제선)!

 

여러 가지 선을 구해서 배우는 그런 것을 왜 해야 됩니까? 마음만 닦으면 되지 착한 일은 왜 해야 되느냐? 쉽게 표현하면 그 말입니다. 마음만 닦으면 그 속에 다 들어 있다면서 왜 착한 일을 하라고 하느냐?  그것을 어떤 사람이 물었어요.

 

答曰(답왈)  답하여 가로대

 

참 보조스님 친절해요.

저 앞에 거울 닦는 이야기도 있었고 여기 또 역시

비슷한 이야기로서 답하여 가로대,

 

譬如大摩尼寶가

비여대마니보

 

큰 마니 구슬이 있어요. 마니주라고 해서 불교에서는 아주 제일 좋은 구슬을 여의주라고 하고 그렇습니다. 마니주라고 하는 보배가 있는데

 

體性이 明淨이나

체성   명정

 

본래의 가지고 있는 성질은 아주 깨끗해요,

밝으나 그런데,

 

而有鑛穢之垢하니

이유광예지구

 

 광예라고 하는 것은 마니보를 광산에서 캐어 왔으니까

 광산에서 캐어낼 때 묻어오는 게 있어요.

 광산에서 캐어 낼 때 묻어 있는 때가 있으니

 

若人이 雖念寶性이나

약인   수념보성

 

만약에 어떤 사람이 비록 보배의 성질을 생각하나

 

不以方便으로  種種磨治하면

불이방편      종종마치

 

방편으로 가지가지로서 갈고

그것을 다스리지 아니할 것 같으면은

 

終無得淨 인달하야

종무득정

 

마침내 마니보배의 깨끗함을 얻지 못해.

 

예를 들어서 금을 캤다 이거예요. 금을 캤는데 광산에서 캔 그대로 쓸 수가 있나요?  못쓰잖아요. 금은 금인데 못쓴다고요.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된다? 금을 가지고 녹여 가지고 금은 금대로 구리는 구리대로 철은 철대로 이렇게 분별해 가지고 순금만을 만들어 그때 사 쓸 수 있어요.

 

그와 마찬가지로 마니 보배도 마찬가집니다. 다이아몬드도 마찬가지예요. 마니 보배라는 것은 다이아몬드를 가르친다 이렇게 생각해도 좋습니다.

 

경전에서 마니 보배라고 하는 것은 다이라몬드 보다 훨씬 뛰어난 그런 보배입니다마는, 다이아몬드도 틀림없이 다이아몬드지마는 그것은 전부 갈아야 되지요. 자꾸 갈고 닦고 그래 해 가지고 그 좋은 부분만을 만들어 내야 그것이 비로소 훌륭한 다이아몬드가 되지요.

 

그래서 그것을 방편으로서 가지가지로 갈고 다스리지 아니할 것 같으면은 마침내 그 깨끗한 것을 얻을 수가 없는 거와 같이 如是衆生(여시중생)이  이와 같이

 

眞如之法(진여지법)도

 

진여! 진심! 우리 참 마음의 도리도 

 

體性이 空淨이나

체성   공정

 

그 본성은 텅 비고 깨끗한 것이나

 

而有無量煩惱染垢하니

이유무량번뇌염구

 

한량없는 번뇌에 물들고 더러움의 때가 있으니

온갖 탐진 치 삼 독 팔만 사천번뇌가 뒤 덮여 있고

그냥 아로새겨져 있다 이거죠. 그게 있으니

 

若人이 雖念眞如나

약인   수념진여

 

  만약에 어떤 사람이 비록 진여를 생각하나

 

不以方便으로

불이방편

 

참 마음 마음 마음 이 한 마음!

자꾸 한 마음만 가지고 생각하고 방편으로서

 

種種熏習하면

종종훈습

 

가지가지로 훈습하지 아니할 것 같으면은, 가지가지로 훈습한다는 말은 착한 일도 하고 보살행도 하고 중생들의 고통도 덜어주고 하는 그런 일을 하지 아니할 것 같으면은 어떻게?

 

亦無得淨하리니

역무득정

 

또한 그 청정한 것을 얻을 수가 없음이리니

 

以垢無量하야

이구무량

 

때가 한량이 없어서

 

변一切法故로

변일체처고

 

일체법에 두루한 까닭에

 

修一切善行하야

수일체선행

 

 여러 가지 착한 행을 닦아 가지고서

 

以爲對治(이위대치)니

 

대치를 해야 된다. 그것을 잘 다스려야 돼요.

그래서 착한 일을 계속할 것 같으면은 결국은

그 일을 통해서 참 마음이 자꾸 드러난다 이거에요.

 

 앞에 거울 닦는데 약과 같은 것이다. 묘약! 놋그릇을 닦는데 약을 써야 닦이지 안 그러면은 무조건 힘만 들인다고 닦이는 게 아니거든요. 그런데 약이 아주 좋은 약이 있어. 약은 좋은 약이 있는데 그것을 찍어서 손으로 힘을 안 쓰면 어떻게 돼요? 안 닦이잖아요. 참 비유가 기가 막히죠.

 

좋은 약이 있고 손에 힘이 있어야 되고, 그래서 손에 힘을 들여가지고 약을 찍어 가지고 닦는 일과 같다 이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마음 마음, 한 마음 한 마음 하지마는 한 마음 밝히는 공부도 해야 되고, 또 거기에 걸 맞는 선한 행!  중선봉행도 해야 된다. 자정기의와 중선봉행! 자정기의를 정말 마음에 잘 새겨야 할 그런 일입니다.

 

若人(약인)이  만약에 어떤 사람이

 

修行一切善法하면

수행일체선법

 

일체 선법을 수행을 할 것 같으면은

 

自然歸順眞如法故라 하시니

자연귀순진여법고

 

자연히 귀순한다. 어디에? 진여 법에 귀순한다.

우리 참 마음에, 진심에,

진여의 도리에 귀순하는 까닭이니라고 하시니,

 

據此所論(거차소론)컨댄

 

이 소론, 여기에서 논한 바로 의거하건댄

 

以休歇妄心으로 爲正하고

이유헐망심     위정

 

망 심 쉬는 것으로서,

망령된 마음 쉬는 것으로서 정을 삼고

 

修諸善法으로 爲助니

수제선법     위조

 

모든 선한 법 닦는 것으로서

착한 일 많이 하는 것으로서 조를 삼으니

 

若修善時(약수선시)엔

 

만약에 선을, 착한 일을 많이 할 때에는

선을 닦을 때에는,

 

與無心相應하야

여무심상응

 

  무심으로 더불어 내 마음 하고 딱 상응해 가지고서

 

不取着因果(불취착인과)니

 

이게 중요한 거죠. 인과를 취착 하지 말라.

인과에 취하고 집착하지 말라 이거죠.

 

이것이 참 어렵지요. 착한 일할 때 그냥 해요. 내 마음만 생각하고 그냥 하지. 착한 일을 하면 어떤 과보가 돌아온다. 그보다 몇 배 더 돌아 온다. 이런 것을 자꾸 생각하면은 그것은 제대로 된 공부가 아니라는 거죠. 인과에 집착 말지니, 

 

若取因果(약취인과)하면

 

 만약에 인과를 여기서 취할 것 같으면은 “아 내가 이렇게 보시를 많이 했는데, 그 과보로 내가 큰 공덕이 돌아 올 텐데.”  만약에 이런 것을 자꾸 생각할 것 같으면은 뭐라고?

 

便落凡夫人天報中하야

편락범부인천보증

 

꼭 범부나 인천의 과보 가운데 떨어진다.

그런 생각을 한다고 해서요, 과보가 안 오는 것은 아니 예요. 다 오기는 옵니다. 다 오기는 오는데 그 과보가 시원찮다 이거죠.

 

 예를 들어서 어디 가서 희사를 하고 생색을 자꾸 내면은 어떻게? 결국 시원찮아요. 실컷 희사해 놓고도 대접이 시원찮다고. 그런데 희사를 해 놓고도 아무런 그런 무슨 자기가 생색을 안 내고 자기가 그런 것을 했다는 상을 안 낼 것 같으면은 갈 때마다 대접이 융성해요. 그래서 무주상보시가 그래서 좋은 거예요.

 

상을 안 내면요, 그 사람을 두고 두고 칭송하고. 그런데 상을 내면은 그 때 한 번 뿐이죠. 그 다음부터는 그냥 오면 올 까봐 겁내고 고개 돌리고 그래요. “아이 저 사람 또 생색 내려고 온다고” 그래서 피해버린다고요. 참 묘하잖아요.

 

그러니까 인과를 취하면은 공덕은 있기는 있는데 그렇게 돌아가고 만다 이거죠. 그리고 여기에 범부나 인천의 과보 가운데 떨어진다 라고 하는 말이 아주 과보가 시시하다 이 말이죠. 떨어지느니,

 

難證眞如하야 不脫生死요

난증진여     불탈생사

 

진여를 깨닫기가 어려워서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고

 

若與無心相應하면

약여무심상응

 

만약에 다시 무심으로 더불어 상응 할 것 같으면은

 

乃是證眞如之方便이며

내시증진여지방편

 

진여를 깨닫는(증득하는) 방편이며

 

脫生死之要術이라

탈생사지요술

 

생사를 벗어나는(초탈하는)

아주 요긴한 기술이다 이거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좋은 일할 때요, 참 어렵기는 해요. 정말 어려운 주문이다. 과보생각 안하고. 공덕생각 안하고 좋은 일 하라. 그래 되면 좋을 것인데 그렇게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은 아무래도 좀 조심 하지요. 안 듣기보다는 훨씬 나은 거죠.

 

“아 이것은 과보를 바라면 안 된다는데 생색을 내면은 복을 안 준다는데, 내 복이 영 감소해 가지고 시원찮다는데” 이것을 알아야 돼요. 그것은 사실은 세상 이치로도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兼得廣大福德 하리니

겸득광대복덕

 

겸해야 광대한 복 덕을 얻게 되리니

 

내가 아까 그랬잖아요. 생색 안내면은 갈 때마다 칙사 대접이죠. 생색 내면은 그냥 그 때 한번 뿐이고

겸해야 광대한 복덕을 얻게 되리니

 

金剛般若經에 云하사대

금강반야경  

 

금강경에 이런 말이 있잖아요.

 

 須菩提야 菩薩이 無住相布施하면 其福德을 不可思量이라.

 수보리   보살   무주상보시     기복덕   불가사량

 

내가 이야기한 그대로네요.

 

無住相布施하면 其福德을 不可思量이라.

무주상보시     기복덕   불가사량

 

무주상 보시하면 두고두고 칭송 받아. 다른 사람한테 자랑하면 저 사람 큰 대들보를 하고도 한번도 생색 안내고 한번도 뽐내지도 않고 그러면 갈 때마다 자랑하고 갈 때마다 칙사대접이라고요. 그런데 서까래 겨우 하나 해 놓고 갈 때마다 “내가 서까래 했는데 서까래 했는데” 하면은 그 다음부터는 쳐다보기도 싫어해요.

 

 그런데 서까래 시주하는 그날은 어쩔 수 없어요. 그날은 대접을 받지만 그것으로 끝이라고요. 그 다음날 보게 되면 고개 돌리고 못 본 척 해버려요. 그것은 우리의 태도에 달렸다고요.

 

그보다 더 작은 것을 했어도 무심히 하고, 아무 생색 없이 무주상 보시하면 자기 복덕이 불가 사량이라고 했잖아요. 참 하이 튼 이런 것을 보면은 부처님 가르침이 기가 막혀요. 이렇게 좋은 말씀을 어디 가서 듣겠어요. 그 복덕을 가히 헤아릴 수가 없다 라고 하시니,

 

今見世人(금견세인)이

 

지금 보니 세상 사람들이

 

有參學者(유참학자)가

 

參學(참학)!

 

이 참선 하는 사람들이

참학 하면 보통 마음만 닦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저知有箇本來佛性하면

저지유개본래성불

 

저知(저지)!

 

겨우 안다 이거죠.

뭘 아는고 하니, 본래 불성만 알아요.

본래 내 마음이 부처인데 그것만 안다 이거죠.

그것만 알고

 

乃便自恃天眞하고

내편자시천진

 

스스로 천진한 것, 천진적이고 참다운 것, 그 한 마음

그것만 딱 알고 믿어 가지고 그리고

 

不習衆善 하나니

불습중선

 

여러 가지 선을 익히지 않나니

 

이런 소리 꼭 누구보고 하는 것 같아요.

이렇게 병들은 사람 많아요. 불교에 굉장히 익숙한 프로들이 주로 그래요. 아마츄어는 차라리 안 그런데 주로 프로들이 이런 병에 떨어져 있다고요. 선을 닦지 않나니,

 

豈只於眞心에 不達이리요

기지어진심   불달

 

어찌 다만 진심에 통달하지 못 하리오.

 

亦乃번成懈怠하야

역내번성해태

 

그런 사람은 또 진심을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마음을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고 도리어 해태를 이루어.

“아이고 본래 부처라는 데 에이 누워서 놀자.”놀면 노는 부처고 누워있으면 누워 있는 부처고 에라 모르겠다.”하고

 

번成懈怠(번성해태)!

 

해태만 이룬다 이거죠. 불교에는 그게 아니지요.

마음 닦고 열심히 복 짓고 좋은 일 하고, 해태 해서

 

惡道도 尙不能免이어든

악도   상불능면

 

악도에 떨어지는 것을 능히 면치 못하리라.

 

況脫生死(황탈생사)아 

 

어찌 하물며 생사를 초탈할 수 있겠는가.

 

此見이 大錯也니라

차견   대착야

 

이러한 소견은 큰 착각이다.

 

大錯(대착)!

 

큰 착각이다 이거죠. 이렇게 소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주 잘못된 소견이다 이거에요. 그러니까 오늘 아주 좋은 이야기

 

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

제악막작 중선봉행 자정기의 시제불교

 

 정(正)과 조(助), 조와 부, 마음 닦고 불교 수행 하는데도 주된 것과 부수적인 것. 보조적인 것 이것도 꼭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놋그릇 닦는데 손에 힘만 가지고 냅다 문지른다고 그것이 닦여 지나요? 약을 가지고 닦아야 잘 닦여진다. 기억 하기 쉬운 거예요. 그것만 기억 하면 오늘 진심의 정과 조의 문제에 대해서 잘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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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無比 스님 진심직설 법문 제29강(眞心所在) 短長中庸 2010.01.01 4316
28 無比 스님 진심직설 법문 제28강(眞心四儀) 短長中庸 2010.01.01 4744
27 無比 스님 진심직설 법문 제27강(眞心四儀) 短長中庸 2010.01.01 4285
26 無比 스님 진심직설 법문 제26강(眞心息妄) 短長中庸 2010.01.01 5110
25 無比 스님 진심직설 법문 제25강(眞心息妄) 短長中庸 2010.01.01 3080
24 無比 스님 진심직설 법문 제24강(眞心息妄) 短長中庸 2010.01.01 3566
23 無比 스님 진심직설 법문 제23강(眞心息妄) 短長中庸 2010.01.01 4164
22 無比 스님 진심직설 법문 제22강(眞心息妄) 短長中庸 2010.01.01 3346
21 無比 스님 진심직설 법문 제21강(眞心息妄) 短長中庸 2010.01.01 3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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