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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眞心驗功 진심험공  (35)

 

 

或이 曰 眞心이 現前에 如何知是眞心의 成熟無碍也이닛고

혹   왈 진심   현전   여하지시진심   성숙무애야

 

曰 學道之人이 已得眞心現前時에 但習氣를 未除하야

왈 학도지인   이득진심현전시   단습기   미제

若遇熟境하면 有時失念하나니 如牧牛에 雖調到교예隨順處라도

약우숙경     유시실념       여목우   수조도교예수순처

猶不敢放了鞭繩하고 直待心調步誾하야 ??入苗稼中하야도

유불감방료편승     직대심조보은     간진입묘가중

不傷苗稼하야사 方敢撒手也라 到此地步하야는

불상묘가       방감살수야   도차지보

便不用牧童鞭繩이라도 自然無傷苗稼니

편불용목동편승       자연무상묘가

 

如道人이 得眞心後에 先且用功保養하야 有大力用하야사

여도인   득진심후   선차용공보양     유대력용

方可利生이니 若驗此眞心時에 先將平生所愛底境하야

방가이생     약험차진심시   선장평생소애저경

時時想在面前호대 如依前起憎愛心하면 則道心이 未熟이요

시시상재면전     여의전기증애심     칙도심   미심

若不生憎愛心하면 是道心이 熟也라

약불생증애심     시도심   심야

 

雖然如此成熟이나 猶未是自然不起憎愛니 又再驗心호대

수연여차성숙     유미시자연불기증애   우재험심

若遇憎愛境時에 特然起憎愛心하야 令取憎愛境界하야도

약우증애경시   특연기증애심     령취증애경계

若心不起하면 是心無碍호미

약심불기     시심무애

 

 

 

 진심직설 50쪽에 13번부터 할 차례입니다.

 

 眞心驗功(진심험공)이라. 

 

진심에 대한 어떤 그런 공을 시험해 본다. 또 경험해 본다. 그런 뜻이죠. 험(驗)자는 우리가 공부에 대한 어떤 결과를 알아보고, 또 그 척도를 한번 이렇게 나름대로 재보고. 스스로 이렇게 시험해 보는 그런 뜻으로서 험공이라 그렇게 했습니다.

 

 보조 스님께서는 당신 나름대로 우리가 수행하는데 있어서 가장 요체가 되는 진심을 중심으로 해서, 진심의 소재를 파악하고, 진심의 본체가 어떤 것이고. 또 진심의 작용은 어떤 것이고 이런 것들을 쭉 이야기를 했고,

 

또 저 앞서는 진심만 공부하면 되느냐? 아니면 보조적인 그런 공부가 필요 하느냐? 안 하느냐? 뭐 이런 문제까지도 이야기를 했고, 또 지난 시간에는 진심이 내포하고 있는 그 공덕! 이것은 또 얼마나 되는가? 이런 것들을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은 그 진심의 어떤 공을 시험해보고, 알아보는 그런 내용입니다. 

 

或(혹)이 曰(왈)

 

혹자가 물어 말하기를

 

眞心(진심)이 現前(현전)함에

 

진심이 예를 들어서 지금까지 설명한 대로 그것이 우리가 비록 이론이기는 하지마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진심의 현해가 나타났다고 할 경우 거기에 대한 어떤 공릉! 또는 그 공덕! 이런 것은 어떻게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가. 어떻게 경험할 수 있겠는가. 그런 뜻이죠. 진심이 현전함에

 

如何知是眞心의 成熟無碍也이닛고 그랬어요.

여하지시진심   성숙무애야

 

어떻게 아는가.

무엇을 어떻게 아는고 하면은

 

眞心의 成熟無碍!

진심   성숙무애

 

진심이 성숙해서 걸림이 없는 그런 경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과일이면 과일이 익어 가지고 우리가 따먹는데, 그 과일의 맛은 어떻다. 또 우리 몸에 들어와서 어떤 역할을 한다. 그런 것이 있을 것이고. 곡식은 곡식대로. 또 사람은 성장하면 성장한대로 모든 것이 어떤 그 결과를 생각하고 하니까,

 

원인이 있으면 그 원인이 어떤 결과를 낳았을 때, 어떤 현상으로 나타나는가. 이런 것을 생각을 안 해볼 수가 없는 거죠. 불교공부라면은 더 말할 게 없습니다. 정말 불교 공부일수록 그 결과를 염두에 두지 안을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成熟無碍(성숙무애)!

 

아주 익숙해 가지고 진심의 어떤 완숙한 상태, 그것은 우리 삶과 죽음의 문제에 걸림이 없고, 번뇌나 어떤 속박으로부터 걸림이 없는 그런 것이라고 대강 요약을 하고 그래서 성숙무애를 어떻게 알 수 있느냐 그랬어요. 그러니까

 

曰(왈)  대답하기를

 

學道之人(학도지인)이

 

도를 공부하는 사람, 도를 배우는 사람, 여기서 도를 배우는 사람 해 가지고, 도를 우리가 어떤 선입감으로 거창하게 생각하고 힘겹게 그렇게 생각할 것이 아니고, 우리가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이라 해도 좋겠고. 뭔가 좀 더 나은 어떤 인생을 살아보려고 하는, 보다 더 다른 차원의 삶을 좀 생각하는 그런 삶의 길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

 

已得眞心現前時에

이득진심현전시

 

이 진심이 현전함을 얻었을 때, 진심이 떡 나타났다 이거죠. 진심이 나타났다고 해서 어떤 사물이 눈앞에 나타나듯이 그렇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뭔가 감이 잡혔다. 이렇게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진심이라고 하는 것이 내 마음에 자리를 하고 그것이 어떻게 내 심증이 가는 그런 상태라고 우리가 이해를 해도 좋겠죠.

 

진심이 현전 했을 때에

 

但習氣를 未除하야

단습기   미제

 

다만 습기를 제하지 못 해 가지고서

 

若遇熟境하면 有時失念 한다 그랬어요.

약우숙경     유시실념

 

習氣(습기)를 未除(미제)라

 

이게 묘한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도를 통했다.” “견성을 했다.” 또  보조 스님 말씀대로 “진심이 현전 했다.”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도의 원리대로! 법의 원리대로! 마음의 원리대로! 그대로 다 되는 것은 아니에요. 왜 다 안 되는가.

 

習氣(습기)를 未除(미제)라

 

우리가 익힌 버르장머리, 아주 불교에서 흔히 쓰는 말대로라면은 익힌 버르장머리가 아직도 고쳐지지 않았다 이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될 줄 뻔히 알아요. 그리고 마음의 도리에는 그런 도리가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 까지도 알지마는, 그런데 우리가 익혀온 습관 때문에 그게 제대로 안 되는 거죠.

 

그래서 업을 잘 닦아야 되고. 익히기도 잘 익혀야 되고 업을 잘 지어야 된다. 그리고 가능하면은 선업(善業)을 짓고 또 정업(正業)을 짓고 그렇게 해야 된다는 게 업의 입장에서는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또 업이라는 게 우리가 우리의 현재 입장에서는 사실은  무시 못하는 게 또 업이에요.

 

업 타령만 하고 업만 가지고 이야기 하면은 소승불교가 돼 버립니다마는, 그러나 또 영 무시할 수 없는 게 우리의 어떤 수행의 습인이라고 할까? 우리들의 습인이 그래요.

 

 그러기 때문에 습기! 익힌 것. 우리가 그 동안 쉬운 말로 탐진치(貪嗔痴) 삼독(三毒) 이라든지. 온갖 희로애락에서 또 보는 대로 듣는 대로 또 우리의 어떤 마음에서 일어나는 그대로, 거기에 어떤 브레이크 파열이라든지 제동 역할이라든지 아니면 그것을 바로잡는 어떤 성인의 가르침이라든지, 이런 것을 가지고 제대로 관리를 했으면은 괜찮겠지마는, 그런 관리가 제대로 안 되었다 보니까 우리의 익힌 습관들이 제대로 제해지지 않는다 하는 것입니다.

 

다만 습기를 제하지 못해서 

 

若遇熟境(약우숙경)하면은

 

익숙한 경계를 만약 만날 것 같으면은

 

有時失念(유시실념)이라.

 

어떤 때는 생각을 잃어버린다 이 거죠. (??)을 잃은 게 아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잃어버리게 되고 진심의 이치에는 사실 그런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진심을 잃어버린다 이거에요. 그게 실념입니다.

 

솔직하게 우리가 불교공부를 한다. 불교를 믿는다 그렇게 하지마는, 생활 속에서 사실은 불교적으로 실천이 안 되지 않습니까? 여기에 진심과 도리 이런 것, 고차원적인 용어 이런 것은 덮어두고 라도, 불교인이라고 하는 그런 차원에서도 불교인이라고 하는 것도 잃어버리고, 불교에서 가르쳐 준 것도 잃어버리고, 또 어떤 경우는 알고도 행하는 수도 있지마는 대개 잃어버리고 행하는 수가 많아요.

 

자기가 익숙한 게 뭡니까? 그야말로 습기이니까. 인간으로서 살아온 어떤 관습이다 보니까 그 동안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사실 별 영험이 없어요.

그 동안 불교 수 십년 믿어도 어떤 경우에 가면은 불교가 아무 영험도 없다고요. 그것이 습기를 제거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사실은 여기에 갈등이 있는 거에요. 우리 불자들이 제일 갈등 하는 점이 이점이라고요. 당연히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이 옳은 것을 당연히 알고 있는데 그런데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 거에요.

 

그렇게 하려니 까 왠지 내가 손해 보는 것 같고. 손해를 봐도 내가 크게 손해를 보는 것 같고. 세상이 또 그렇게 살도록 용납을 안 해주고. 세상이 그렇지 않은데 나 혼자 그렇게 하면 바보 취급이나 받지 누가 뭐 잘했다고 칭찬 할 것도 아니고. 칭찬한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이런 문제에서 사실은 갈등이 생긴다고요. 

 

사실은 불교를 따르자니 어떤 세속적인 관습이 울고, 세속적인 관습을 따르자니 불교가 우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불자들이 사실은 갈등을 느끼는 것이 아닙니까? 또 그렇게 갈등을 느끼는 것 까지는 또 괜찮아요. 그 정도는 그래도 상당히 공부가 된 상태고 불교가 그 사람의 어떤 삶에 상당이 그것이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볼 수가 있는 거죠. 그런데 여기에는 아예 잃어버려요.

 

有時失念(유시실념)이야.

 

아예 부처님이 어떻게 가르쳤다. 그저 살아야 된다. 절에서는 도라고 한다. 불교는 이렇게 하면 된다. 안 된다 하는 이것마저 잃어버리는 경우가 사실은 허다합니다. 잃어버리고 우리의 업대로 사는 경우가 허다하죠. 그래서 이것을 비유를 이렇게 잘 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어떤 불교적인 어떤 도덕성! 이런 문제가 사실 아니 예요. 현재 이야기는 어떤 불교적인 관점에서 도덕성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마는, 여기 보조 스님은 그런 차원이 아니고, 그야말로 진심의 차원, 도의 차원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如(여)  예컨대

 

목우(牧牛)!

 

소를 먹인다 이거에요. 소를 풀을 뜯긴다든지. 소 먹인다. 우리가 목우라 그러지 않습니까? 보조 스님은 목우자 그래요. 소 먹이는 사람. 목우라는 말이 참 좋은 말이에요. 그래서 십우도(十牛圖)! 목우도(牧牛圖)! 그렇게 쓰거든요. 또

 

십우도(十牛圖)라고도 하고.

 

열 가지의 그림으로서 마음이 어떤 수행을 통해서 변화해 가는 과정을 소를 먹이는데다 비유를 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여기 그런 말이에요.

 

如牧牛(여목우)에

 

예컨대 소를 먹이는데 있어서,

 

雖調到교예隨順處라도

수조도교예수순처

 

雖調(수조)! 

 

비록 소를 이렇게 잘 조복을 해 가지고서

 

교예隨順處 에 잘 이르렀다 하더라도

교예수순처

 

이끌어가면은 잘 따라온다 이거죠.

잘 따라오는데 이르렀다 하더라도

 

이것도 집에서 먹이는 소는 끄는 대로 잘 따라오지 천만에 이것은 어느 정도 사람 말을 듣는 소가 그렇지 처음에는 그게 아니 예요. 예를 들어서 목우도를 보면은 소를 잃어버렸다 이거예요. 그런데 그 소 찾는 사람이 끈을 하나 가지고 소를 찾아 나서다가 처음에는 발자국을 발견하고. 나중에는 소 꼬리를 발견하고. 그래서 나중에는 소를 코를 끼어 가지고 소를 끈다고요. 그런데 말을 참 잘 안 듣습니다.

 

 그래 가지고 온 힘을 다 해 가지고 소하고 생 싸움을 다 하는 거에요. 그러다가 결국은 소가 이제 지쳐 가지고 사람 말을 듣는 거에요. 그게 이제 이 상태입니다.  교예라고 하는 말은 소를 다른 대로 못 가게, 마음 대로 날뛰지 못하게 끌어 가지고 따라오는데, 수순 하는데 까지 이르렀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어떻게?  채찍과 소를 붙들어 맨 그 끈을 놓아버리면 안 돼요. 그러니까 여기서

 

猶不敢(유불감)하고

 

오히려 감히

 

鞭繩放了(편승방료)하고

 

편승(鞭繩)은 놓아버리지 못한다.

편(鞭)은 채찍, 승(繩)은 소 끈, 소를 묶은 끈이죠.

 

그래서 소의 그 끈을 잡고 있어야 소가 함부로 못 가는 거죠. 끈을 딱 잡고 가야 어린아이가 가면서 이리 가자 하면 이리 가고, 저리 가자 하면 저리 가는 거에요. 채찍을 가지고 가면서 때리기도 하고 채찍과 소를 묶은 그 끈을 감히 놓아버리지 못한다 이거죠. 말을 듣기야 듣죠. 그렇다고 소 끈을 놓아버리면은 소는 지 마음대로 남의 곡식 밭에 들어가서 곡식을 해치기도 하고 그러죠. 그래서

 

直待心調步誾하야

직대심조보은

 

채찍과 끈을 놓지 못하고 바로

 

心調(심조)!

 

마음이 조순 해지고 , 아주 잘 다스려지고

 

步誾(보은)!

 

걸음걸이가, 소의 걸음걸이가 아주 안온해. 놓아두어도 절대 남의 밭에나 논에 들어가지 않고 믿을만한 걸음걸이로 걸어간다 이거죠. 자기 마음대로 날뛰지를 않고.

 

步誾(보은)이라는 말은

 

아주 걸음걸이가 안온하고, 편안하게 그냥 뚜벅뚜벅 자유스럽게 잘 걸어가는 것. 소를 먹여보면 이런 것을 잘 알 수가 있는데. 마음대로 나부대는 소는 그렇지가 못하거든요. 그런데 잘 다스려진 소는 걸음이 아주 편안합니다. 마음이 조순 해지고 잘 다스려지고 걸음걸이가 아주 편안해져서

 

??入苗稼中하야도

간진입묘가중

 

간진! 좇을 간(?), 좇을 진(?)입니다.

 

入苗稼中(입묘가중)하야도

 

좇아서 묘가 중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苗稼(묘가)라고 하는 말은 곡식 밭입니다.

곡식 밭에 설사 소가 들어간다 하더라도

 

不傷苗稼(불상묘가)하야사

 

그 곡식을! 묘가라는 말은 곡식이라는 말입니다.

곡식이 상하지 아니해야

 

方敢撒手也(방감살수야)라

 

바야흐로 감히 소를 놓을 수 있다 이거죠.

지 멋대로 놓아두어도 소가 곡식을 먹지않고 곡식 한 오라기도 밟지도 않고 이쯤 되어야 그 때는 소 끈을 놓아도 된다고요. 십우도(十牛圖)를 상상해보면 알 수가 있지요. 십우도가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소 끈을 놓거든요. 지 멋대로 돌아다녀요. 그러면 어떻게? 동자는 언덕에 이렇게 앉아서 노는 거에요. 소만 바라보고 놀고 소는 지 마음대로 풀을 뜯는 거죠. 그래도 소가 절대로 곡식을 해치지 않는 그런 상태. 지금 우리가 그쯤 되야 돼요. 그쯤 되면 이런데 올 필요도 없어요.

 

부처님이 뭐라고 할 필요도 없고. 뭐 선지식이 뭐라고 할 것도 없고. 경전에서 뭐라고 했든 안 했든 아무 관계없이 경전에서 우리보고 뭐라고 안 해도 내버려둬도, 자기 마음대로 살아도 가만히 어울리지 않고 살아가는 거에요. 그것이 참 어려운 거죠.

 

 마음대로 내버려 둬도 하나도 일어나지 않는 거에요. 어떤 상황에 닥쳐도 자기 것이 아니면 욕심을 안내고. 아예 일어나지 않아야 돼요. 우리는 일어나도 아, 저것은 함부로 가졌다가는 큰 일 나게 되니까 그게 겁이 나서 사실은 못 갖죠.

 

 뒤탈만 없으면 누구든지 가지려고 하고 누구든지 먹으려고 하죠. 뒤탈 나는 것이 번연히 알면서도 달라고 하는데 뭐. 나중에 형무소 갈 때 가더라도 대통령 되고 보자 이거 아닙니까.  형무소 갈 때 가더라도 되고 보자고 지금 야단 아닙니까? 자식이 형무소를 가든지 자기가 가든지 가 가지고 무기징역을 받든지 그것은 다음 일이고 무조건 되고 보자 이거죠. 앞으로 대통령은 형무소 안 가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그거 소용없어요.

 

그런데 여기 이야기는 마음대로 하라고 내 버려둬도 법도에 척척 들어맞는 그런 전혀 어떤 과오를 범하지 아니할 그런 어떤 삶이 되야 된다 하는 그런 이야기인데, 여기는 소 먹이는 이야기를 가지고 지금 하고 있습니다. 그럴 것 같으면은 소 먹이는 그 끈을 놓아버려도 된다. 

 

到此地步(도차지보)하야는

 

 이러한 경지! 지보(地步)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경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지와 걸음걸이로서, 어떠한 경지의 걸음걸이! 소가 걸어가는 것 말이에요. 소가 아무데나 걸어가면 안 되지요. 그러니까 누가 시키지 아니해도 지가 알아서 걸어가는 그런 경지에 이르러야

 

便不用牧童鞭繩이라도

편불용목동편승

 

  문득 목동이 채찍질하고 소 끈을 끌고 하는 것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自然無傷苗稼니

자연무상묘가

 

자연히 묘가를, 곡식을 상하지 아니한다.

 

그쯤 돼야 제대로 된 거죠. 우리 사는데도 이쯤 되어야 살기 좋은 세상이 되는 거예요. 누가 안 본다고. 뒤탈 안 난다고 뭐 그런 것 염려해 가지고 무엇을 저지른 게 아니고, 잘하고 안하고 아무 관계없이. 들통이 나든 안 나든 그것도 아무 관계없이 마음껏 저지를 수 있는 그런 조건 하에서도  절대 저지르지 않는, 아무리 저지르려 해도 저질러 지지않는 그런 상황이 돼 버려야 참으로 살기 좋은 세상이 된다고요. 여기까지는 소 먹이는데 비유를 한 것이고

 

如道人(여도인)이

 

예컨대 도 닦는 사람이

 

得眞心後(득진심후)에

 

진심을 얻은 후에

마음이라고 하는 것을 제대로 깨달았든지 손에 잡았던지 간에, 진심을 얻은 후에 마음의 도리를 자기 것으로 했다 이 말이겠죠. 진심의 도리를 얻은 후에,

 

先且用功保養(선차용공보양)하야

 

먼저 또한 공부를 써서 보양한다 이거죠.

진심을 얻고 나서도 보양한다. 이런 것들이 이제 말하자 면은 이런 이야기가 이런 진심직설의 이야기는, 대개 뭐 흔히 불교계에서 이야기가 되어오던 돈오돈수! 돈오점수! 이 이야기를 가지고 여기에다 배대를 하자 면은, 여기는 돈오점수의 입장입니다.

 

왜냐? 진심을 얻고 나서도 보양한다 라고 하는 말이, 보양한다! 그것을 간수를 잘 해야 된다. 흔히 보림이라고도 하는데 간수를 잘 해야 된다. 관리를 잘해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이제 그것은 말하자 면은 진심을 깨닫고 나서, 견성을 하고 나서도 점수를 잘 해야 된다 이런 이야기로도 대신할 수가 있어요.

 

그것을 제대로 안 하면은, 도로 중생으로 어떤 습기가 일어나 가지고서 중생으로 되돌아 가버리는 그런 수가 생기니까, 그래서 여기서 이야기가 진심을 얻은 후에도 먼저 또한 공부를 써 가지고 서 보양을 해야 된다. 잘 보호하고 키워서

 

有大力用(유대력용) 하야 사

 

큰 힘과 작용이 있어야 사

 

方可利生(방가이생)이니

 

바야흐로 가히 중생을 이롭게 할 수 있다 그랬어요.

그야말로 그대로 돈오점수(頓悟漸修) 입니다. 그리고

習氣(습기)를 未除(미제)라는 이런 말도 그대로 깨닫고 나서  깨달음에 의해서 점점 닦아야 되는 거예요. 상당히 우리 보통 사람의 근기에는 頓悟漸修(돈오점수) 소리가 딱 맞는 소리예요.

 

頓悟頓修(돈오돈수)라고 하는 것은 아주 별근기(別根機)! 특출한 근기에만 해당되는 것이고 돈오점수가 보통 사람의 근기에 딱 맞아요. 능엄경에도 보면은 乘悟竝銷(승오병소)라. 깨달음에 의지해서 점점 닦는다. 또 점점 제유한다. 습기를 점점 제거한다.

 

理卽頓悟라 乘悟竝銷어니와 事非頓除라 因次第盡이니라

이즉돈오   승오병소       사비돈제   인차제진

 

“이치로는 한꺼번에 깨달아서 그 깨달음에 의하여 아울러(함께) 녹으나, 사상(事狀)으로는 한꺼번에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차례를 인하여 다하느니라.”

 

 

이치로서는 한꺼번에 다 제해지지마는, 이치는 틀림없어요. 마음의 도리는 본래 없는 것이고 번뇌망상이 본래 없는 것이고 그게 다 통하지마는, 그러나 事非頓除(사비돈제)예요.  사적으로 우리가 실천하려면은, 실천은 그게 안 된다고요.

 

앞에서 이야기한 익혀온 버릇들! 싫어하는 것은  싫고. 좋아하는 것은 좋고 미운 것은 밉고 보통 사람들은 깨달았다고 하루 아침에 제해지는 게 아니라고요. 그것은 물론 철저하지 못해서 그렇겠지만. 대개의 사람들이 철저하지 못하거든요. 그래서 한번에 완벽한 경지에 이르러 버리면은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돈오돈수고, 대개가 그렇지 못하다 보니까 이제 그런 이치를 깨닫고도 그것을 간수를 잘하고 직시를 잘하고  키우기를 잘해야 되는데 그것을 이제 보양! 또는 보림!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그래서 경에서도 보면은 이치로서는 몰록 제해져요. 그러나 事非頓除(사비돈제)라! 사적으로 또는 행동. 실천면에 있어서는 한꺼번에 제해지는 것이 아니 예요. 뭐 역사적으로 도인들도 그런 경우가 많거든요. 물론 도인의 경지를 우리가 함부로 왈가왈부 할 수는 없지마는 깨닫기는 아주 제대로 깨달았는데, 그분의 삶을 보면은, 살아가는 어떤 행적을 보면은 그게 석연치 않은 그런 행동이 많거든요.

 

그래도 그 사람의 행적을 함부로 말 할 수는 없지마는 정확하게 깨달았다면은 석가모니 같이 깨닫고 나서 그런 삶이 계속 이루어져야 그래야 제대로 된 깨달음이거든요. 만약에 그런 삶이 아니라면은 그러면 제대로 된 깨달음이라고 할 수 없는 거죠. 아직은 습기가 있다 이겁니다. 참 습기라고 하는 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대력용(大力用)이 있어야, 큰 힘과 작용이 있어야 바야흐로 가히 중생을 제도한다.” 이것을 보조 스님 같은 이들은 절요에서 어떻게 이야기 하는고 하니, 우리가 깨닫는 것! 예를 들어서 말하는 진심을 얻는 것이. 진심이 무엇인지 마음이 무엇인지 그것을 아는 것이 마치 무엇과 같은 고 하니 “어린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는 거와 같다.”

 

그래서 어린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면은 뭐 노인의 어떤 수 십년 산, 어른의 인격하고 그 값은 같습니다. 인격은 똑 같아요. 똑같고 가치도 똑같고 법적보호도 똑같이 받습니다. 어린아이라고 해서 무슨 법적보호를 덜 받는 것이 아니고. 노인이라고 해서 더 받는 것도 아니고 똑같다고요.

 

그리고 또 비록 갓난 아기지마는 갖추고 있는 것은 똑같습니다. 하나도 뭐 부족한 것은 없지요. 그러나 단 힘이 없어. 사람으로서 능력발휘가 제대로가 안 되는. 그 차이죠. 손도 있고 발도 있고 입도 있고 눈도 있고 코도 있고 다 가지고 있어요. 다 가지고 있지 만은 능력발휘가 안 된다 이거죠. 그러면 능력이 발휘는 어떻게? 사람으로 제대로 태어나가기만 하면 무조건 능력발휘는 시간 문제죠.

 

고아원에 갔다 놓아도 몇 년이 지나면 어른이 되고. 부모 보호 밑에서 커도  몇 년이 지나면 어른이 되고 어디다 갔다 놓아도 다 커서 나중에 성인이 되는 거예요. 그 힘만 남았다 이거예요. 그게 돈오점수라고 하는 거예요.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은 돈오라고 하면은, 차츰차츰 성장해 가지고 나중에 성인으로서 일도 하고 무슨 어떤 능력발휘를 제대로 할 수 있는 단계 까지 성장하는 그 과정을 점수라고 그래요. 돈오점수(頓悟漸修)!

 

한꺼번에 깨닫는다. 돈오라고 하는 것은 한꺼번에 깨닫고, 닦는 것은 점점. 차츰차츰 어떤 시간을 경과 하면서 닦는다. 그러니까 태어나기는 아주 순식간에 태어나지마는 어떤 사람으로서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이겁니다.

 

최소한도 십 년 이상의 세월이 흘러야 일도 할 수가 있고. 어떤 공부도 할 수도가 있고. 어떤 걸음걸이도 잘할 수가 있고. 의사소통도 자유롭게 잘할 수가 있고. 제대로 된 사람이 되려면 상당한 세월이 걸리죠.

 

그래서 우리가 지금은 만 이십 세가 되어야 성인이라 그러죠? 그게 사람이 제대로 되었다는 거죠. 이룰 成자 사람 人자. 사람이 제대로 되었다 이 말입니다. 이게 진짜 사람이 된 거죠. 그래서 어린 아이도 사람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사람을 성인(成人)! 이십 세가 되어야 된다. 이십 년이라는 세월이 걸리는 거예요. 그것을 점수라고 해요.

 

그래서 우리가 마음의 도리는 어떤 것인지 딱 알았어요. 알았지마는 마음의 도리가 되나요? 여러분들 안 되잖아요. 그 동안 공부한 마음의 도리가 안 된다고요. 그러면 그게 되기까지는 그 마음이라고 하는 그 원리 원칙에 맞춰 가지고서 세월을 경과 하면서 수행을 해야 돼요. 그게 여기서 말하는 보양이고.

 

그래서 대력용(大力用)! 큰 힘과 작용이 있어야 바야흐로 가히 중생을 이롭게 할 수가 있다. 그랬습니다. 그리고 또 보조 스님은 또 어떤 비유를 드는고 하니, 얼음 덩어리가 있어요. 얼음이 물이라는 것을 누구나 다 알아요. 그런데 그것을 물처럼 쓸 수는 없잖아요. 얼음덩어리 갔다 놓고 그것이 물인 줄은 알지 만은 물처럼 당장에 못써요.

 

그것을 물처럼 쓰려면 녹여야 된다고요. 녹이려면은 시간이 걸리는데 이것을 점수라고 그래요. 녹여서 시간을 필요로 하면서 녹여 가지고 물로 사용할 수 있기 까지를 점수라 그래요. 점점 닦는다. 그러나 물인지는 안다 이거죠. 얼음덩어리 그 자체도 물의 성질은 하나도 변함이 없어요. 그것은 뭐냐? 그것을 돈오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도란,

 

得眞心後(득진심후)에

 

진심을 얻은 후에

먼저 또한 공부를 써 가면서 보양해 가지고서

 

有大力用(유대력용)!

 

큰 힘(大力)과 작용이 있어야 중생을 이롭게 한다. 그러니까 부처가 완전한 어떤 도인! 또 완전한 부처님이 되기까지 힘이 생기고 그랬을 때 제대로 중생을 이롭게 하는 그런 일이 가능하다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불교의 힘을 얻는 공부를 하든지 안 하든지 그것은 두고 라도, 불자로서는 이런 공부에 어떤 절차 또는 우리가 공부해 나가면은 어떤 과정을 어떻게 거쳐나가는 것이다. 마음을 깨닫는 것, 견성을 하는 것, 이것이 어떤 절차로 이렇게 이루어져간다 하는 것은 우리가 꼭 알고 있어야 하는 거죠.

 

若驗此眞心時에

약험차진심시

 

만약에 이 진심을 시험할 때에

 

先將平生所愛底境하야

선장평생소애저경

 

그러면 내 진심을 어느 정도 내가 얻었는가?

어느 정도 깨닫고 있는가?

내 공부가 얼마나 되었는가?이것을 시험해 본다 이거죠.

그런데 어떻게 하는가. 먼저

 

平生所愛底境

평생소애저경

 

평생동안 애착하는 바에 경계를!

자기가 좋아하는,

아주 애착하는 그런 경계를 잘 가져 가지고서

 

여러분들 애착하는 것 많죠? 사람들에게 애착하는 거 하면 얼른 머리 속에 한 여 남 가지 쑥 지나갈 거예요. 이것 저것 자식도 좋고 남편도 좋고 아내도 좋고 부모도 좋고, 뭐 이번에 새로 산 우리 집도 좋고 또 이번에 승진하는데 그 지위도 좋고 뭐 이번에 또 가게도 하나 열었는데 그 가게라고 하는 그것도 좋고, 여러 가지 애착하는 게 아마 열 손가락은,  수 십 가락은 꼽을 수가 있을 거예요. 그런 평소에 애착하는 바의 경계를 가져 가지고 서

 

時時想在面前이라

시시상재면전

 

 때때로 내 앞에다 떡 이렇게 생각해서 들어오는 거죠.

생각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그것을 이렇게 이끌어 앞에다 갔다 세우라는 말이 아니고. 당장에 사랑스러운 자식을 앞에 갔다 놓으라는 게 아니고 생각으로 이렇게 앞에 있다고 하자 이 말입니다. 내 사랑스러운 자식이 앞에 있다고 하자, 아니면 장롱 속에 숨겨놓은 아주 수 백. 수 천 만원짜리 무슨 폐물이 되었던지 간에 하나 상상하면 되는 거죠. 하되,

 

如依前起憎愛心하면

여의전기증애심

 

  예컨대

 

依前(의전)!

 

그전에 내가 아주 애지중지해서 그것을 좋아할 때의

그런 상태 그대로

 

憎愛心(증애심)!

 

미워하는 것 같으면 미워하는 대로, 미워하는 사람을 생각해도 좋아요. 또 애착하는 분 같으면 애착하는 대로 그런 마음이 그대로 만약에 일어난다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則道心이 未熟이요

칙도심   미심

 

  도가 아직도 미숙하지 못하다

덜 익었다 이 말이죠.

 

 한 번 시험해 보세요. 지금 당장에 시험해 보세요.

그런데 이런 공부를 한참 할 때는요, ‘아이고 뭐 나는 욕심나는 것 하나도 없어, 세상에 그게 다 허망한 거야. 뭐 그렇게 애착할 게 있습니까? 언젠가 내 손을 떠날 것, 지금 당장에 떠나도 상관없어.’ 이런 생각이 든다고요. 그러나 정작 그런 일을 닥쳐 놓으면 앞이 캄캄한 거예요. 이런 훈련을 우리가 잘 받아 놓아야 돼요.

 

내가 가끔 이야기 하지마는요, 저기 송도쪽에 어느 절에 있을 때 거기에 어떤 신도님 집안 내력을 내가 잘 알아요. 그 동네에서 아주 상당히 괜찮게 사는 사람이었는데, 그 주변에 하이 튼 건물이고 땅이고 거의 자기 것이었는데 그것이 다 넘어가고, 어떻게 하다 보니까 넘어가게 되니까 사정없이 그냥 일년 사이에 다 넘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자기의 인생과 가치를 그것을 다 싣고 그것을 정리하고 경영을 하고 운영하고 관리를 했는데, 아무리 붙잡아도 넘어가고 아무리 붙잡아도 넘어가고 그래서 결국은 그게 다 손을 떠나니까 사람마저 가버려요. 도저히 회복이 안 되는 거죠. 그래서 재산 다 나가고 사람도 가버리고. 왜 그러냐?  자기의 인생의 모든 가치를 거기다 다 쏟고 있었으니까 그런 거예요. 큰 문제라고요.

 

지난번에 또 우리 부산에 그런 큰 충격을 주는 그런 일이 있어 가지고 지난번에도 그런 좀 비슷한 이야기를 했지마는, 이런 훈련을 우리가 자꾸 받아 놓아야 돼요. 이런 이야기를 우리가 꼭 들어야 된다고요. 그래서 평소에 아무 일이 없고 좋을 때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불교는 이고득락(離苦得樂) 이예요.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를 잘 슬기롭게 대처하자는 것이지. 그래서 편안한 동네에는 불교가  안 팔려요. 설제팔난(說除八難) 중에 하나 예요. 불교가 잘 먹히지 않는 북울단월(北蔚單越)이라고도 하고 북구로주 세계라고 하는 아주 호화로운 세계가 있는데, 거기는 불교가 먹히지 않는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거기에 안 태어나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태어나면 불교를 이해할 기회가 없다 이거죠. 거기는 병도 없고 물질의 어떤 어려움도 없고 경전에도 보면요.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좋은 입장 가지고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고 부처님은 안 좋은 어떤 삶, 아주 불행 고통 아픔 이런 사람들을 그 아픔과 고통을 제도하자고, 건져주자고 하는 것이 불교이기 때문에, 문제가 없을 때 지금 편안하다고 ‘아이 그것 뭐 닥치면 나도 얼마든지 뭐 그까지 것  홀가분하게 체념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마는 천만에 그것은 참 어려운 거라고요. 그러니까 지금 유비무환이라고 준비해 둘 것이 뭐냐? 이런 이야기를 자꾸 들어 두는 겁니다. 지금 편안할 때 이런 이야기를 들어 두면은 언젠가는 쓰일 때가 있다고요.

 

‘아, 결국에는 이렇게 이렇게 가르쳤다. 인생의 진정한 가치는 거기에 있는 게 아니다. 거기에 내 어떤  삶의 무게를 다 싫을 게 아니다.’ 라고 하는 그런 생각을 평소에 해야 됩니다.

 

그래서 여기에 아주 보조 스님이 참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지 않습니까 평소에 애착하는 생각을 갔다 놓자. 놓아 두라 이거죠. 그래 놓고 그 전에 그것을 좋아할 때처럼 그렇게 좋아하는 마음이 만약에 있으면, 만약에 미운 사람이라면은 역시 그 생각하면은 속에서 울화가 울컥 치밀 것 같으면 그럴 때는 어떻게?

 

則道心이 未熟이요

칙도심   미심

 

 

아직 도 닦는 마음이 아주 덜 익숙하다 이거 예요.

이것이 사실은 자꾸 익숙해져야 돼요  이 진심직설 이것은 참 좋은 교과서예요. 도심이 미숙이요,

 

若不生憎愛心하면

약불생증애심

 

만약에 미워하는 어떤 문제를 갔다 앞에 놓았는데도

그 전에 미워했지 지금은 하나도 안 밉다. 또는 그 전에는 아주 애착스러웠는데 지금은 하나도 애착스러운 것이 없다. 어떤 애착 가는 일도 사람도 물건도 명예도 지위도 재산도 할 것 없이 하나도 애착 가는 데가 만약에 그런 마음이 안 날 것 같으면은,

 

是道心이 熟也라

시도심   심야

 

이 사람은 도에 대한 마음이 아주 무르익었어요.

그렇게 되면은 완전히 무르익어서 따먹을 때가 다 된 거예요. 이제는 맛이 나는 그런 과일이 된 거죠. 참 이쯤 되면은 아주 정말 이 사람은요, 이 정도 되면은 무슨 세상 살 맛이 나느냐? 또 이런 생각으로 아전인수격으로 자기 수준에 맞추어 가지고 그런 생각을 한다고요. 그런 말을 많이 해요.

 

“아이고 그 애착심이 없으면 무슨 맛으로 인생을 사느냐?” 좋은 것 까지는 괜찮은데 안 좋은 문제가 생겼을 때는 천만에, “아 세상 사는데 담담해 가지고 무슨 세상 사는 맛이 나느냐” 하지마는 그게 아니죠. 단맛은 좋은데 쓴맛은 어떻게 하느냐 이거죠. 쓴맛은 어떻게 감당할 거냐 그게 문제죠. 쓸 때가 문제지. 괴롭고 아플 때가 문제죠.

 

그러면 괴롭고 아플 때 아프지 않으려면 단맛도 크게 달지 않아야 돼요. 그래서 항상 먹어도 싫지 않은 음료수가 뭐지요? 시원한 생수! 청원생수 그것은 맛도 별로 없는데 그래도 항상 먹어도 그 맛이거든요. 그런데 예를 들어서 뭐 파는 가공한 음료수는 먹을 때 뿐이지 않습니까? 설탕 물도 먹을 때 뿐이지 먹고 나면 갈증도 더 나고 뒷 입은 더 쓰거든요. 

 

그러니까 이런 것들을 우리가 직접적으로 꼬집어서 참 이렇게 이야기 한 것을 들을 수 있는 것도요, 옛날에 이런 스님들이 이렇게 자기의 어떤 경험을 통해서 이런 말을 해 놓아서 참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죠.

 

雖然如此成熟이나

수연여차성숙

 

비록 이와 같이 성숙했으나, 사랑하고 미워하는 그런 어떤 문제에 대해서 그런 마음이 하나도 안 일어나는 그런 상태가 되었다 하나

 

猶未是自然不起憎愛니라

유미시자연불기증애

 

 이것도 오히려 자연히 증(憎)과 애(愛)가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이죠. 자연히! 안 일어나야 되는데, 제대로 안 일어나야 되는데, 이게 조작을 해서 안 일어난다든지. 그런 마음을 안 일으키면 된다는데 , 아직은 그렇게 하면은 멀었다는데 이렇게 해 가지고 안 일어나는 것도 잘 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부족하다 이거죠.

 

자연히, 저절로 안 일어나야 된다 이거죠. 그래야 되는 데 우리가 마음의 조작을 써서 안 일어나는 것, 그것도 참 상당한 것이지마는 그것은 아직 부족한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又再驗心(우재험심)호대

 

또 제차 마음을 시험하대

 

若遇憎愛境時에

약우증애경시

 

만약에 증애의 경계를 만났을 때

사랑할 것. 미워할 것. 좋은 것. 싫은 것 이런 어떤 감정을 흔드는 그런 경계를 우리가 만날 경우가 많잖아요. 허다하죠. 그런 것을 만났을 때

 

特然起憎愛心하야

특연기증애심

 

이것은 이제 우정 일부로, 特然(특연)이라고 하는 것은 특별히 증애심을 일으켜 가지고 남을 미워하는 것 같으면 미워하는 마음. 사랑하면은 사랑하는 마음 이런 것을 일으켜 가지고서

 

令取憎愛境界하야도

령취증애경계

 

증애의 경계를 취하려고 하여도

 

若心不起(약심불기)하면

 

마음이 만약에 일어나지 아니할 것 같으면은

 

是心無碍(시심무애)호미

 

이것은 마음이 걸림이 없는 것이

마음에 아무 걸림이 없거든요.

 

예를 들어서 수 억 나가는 다이아몬드를 옛날에는 참 좋아했다 이거예요. 그런데 그것을 예를 들어서 하나 떡 같다 놓았다 이거죠. 그런데 아무런 애착이 가지를 않아요. 그런 증애심을 , 내가 애착을 하려고 해도 애착심이 안 일어난다 이거죠.

 

若心不起(약심불기)!

 

그 사람은 하나 걸림이 없죠.

 

是心無碍(시심무애)야

 

그렇게 되면  이 사람의 마음은 걸림이 없어요.

그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그게 무애입니다.

그렇게 살면 참 자유롭고 삶이 커져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대아(大我)를 쓰는데 큰 나! 우리는 조그마한, 아주 조그마한 나로 서 삶을 살아가는 거죠.

 

보다 더 큰 나로 서 삶을 살면은 그런 길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렇게 되면은 어떤 소소한 경계에 거기에 마음이 구애되지 않고, 꺼달리지 않고 거기에 흔들리지 않는 그런 마음 가짐. 마음의 훈련! 이것이 참 필요합니다.

 

내가 가끔 비유를 들지마는 이제 초등학교에 고학년이 되는 어느 날 말이지 서랍을 이렇게 열어보면은 딱지하고 구슬이 이렇게 있다 이거 예요. 그런데 고학년이 됐을 때  그것을 누가 볼까 봐 무섭게 얼른 싸 가지고 휴지통에 갔다 버린다 이거 예요.

 

 철이 들면은 딱지나 구슬이 남이 볼까 봐 무서워 가지고, 얼른 갔다가 쓰레기통이나 휴지통에 갔다 버리는 그런 마음을 이미 가졌는데, 어떻게? 어릴 때는 어땠어요? 그것 하나 따기 위해서 얼마나 아둥바둥 노력을 하고. 그냥 싸우기도 하고. 심지어 싸워 가지고 코피까지 터지고 그 하나 따면 애지 중지하고 자랑하고, 그 때는 거기에 모든 인생을 걸었다 이겁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 철이 좀 어느 정도 나고 보니까

창피하기 이를 데 없는 거죠. 부끄럽기 이를 데 없는 거예요. 어찌해서 아직 딱지와 구슬이 내 책상 안에 있느냐면서. 이것을 누가 볼까 봐 겁난다 이거죠.

 

그런데 창피한데도 불구하고 어릴 때, 철이 없을 때는 그것이 그렇게 애착스러웠다. 그러니 얼마나 성장을 했습니까? 바로 그겁니다. 불교 공부를 통해서 그런 작은 나에서 보다 큰 나로 서 살자고 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어떤 재산! 재산을 모으는 것이 내 삶의 가치다 라고 이렇게 생각을 하다가 불교를 떡 만났다 이거예요. 불교를 만나고 보니까 재산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멋지게 사는 길이 있다. 멋지게 사는 길이 있다 라고 생각을 하니까 그래서 결국은 그것이 하찮게 보이는 거예요.

 

‘아 , 사는데 크게 불편한 것만 없으면 되는구나. 이 육신 그저 유지해 가는데 별 불편만 없으면은 그러면 되는 것을 가지고, 그렇게 내가 거기에 아둥바둥 하고 거기에 전부 내 인생 무게를 걸고 삶의 가치를 두고 살았으니 참 어리석기 그지 없다.’ 이런 생각이 들 거에요.

 

 그러니까 커 가지고 그 딱지가 있는 것을 부끄러운 생각이 들듯이 그렇게 될 거예요. 그게 큰 사람이고 큰 삶입니다. 그게 아주 참 무엇보다도 우리가 살아가는데 아주 절실한 문제입니다.

 

 무엇을 가지려고 하는데 아둥바둥 할 것이 아니라, 안 가져도 편안할 수 있는 그런 차원! 그런 차원의 삶이 참 중요한 거죠. 안 가져도 편안할 수 있으면 그러면 되는 거예요. 우리는 무엇이든지 가지려고 하는데 왜 가지려고 하느냐?  편안 하려고 가지려고 해요. 더 좋아지려고 가지려 하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목적이 그것이면 좋으면 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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