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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眞心驗功  진심험공 (36)

 

 

是心無碍호미 如露地白牛하야 不傷苗稼也니라

시심무애     여로지백우     불상묘가야

 

古有呵佛罵祖者는 是與此心相應이어늘 今見재入宗門에

고유가불매조자   시여차심상응       금견재입종문

 

未知道之遠近하고 便學呵佛罵祖者는 太早計也니라

미지도지원근     편학가불매조자   태조계야

 

14. 眞心無知 진심무지

 

或이 曰 眞心與妄心이 對境時에 如何辨別眞妄耶이닛가

혹   왈 진심여망심   대경시   여하변별진망야

 

曰妄心은 對境하야 有知而知하야 於順違境에起貪嗔心하고

왈망심   대경     유지이지     어순위경  기탐진심

 

又於中容境에 起痴心也니 旣於境上에 起貪嗔痴三毒인댄

우어중용경   기치심야   기어경상   기탐진치삼독

 

足見是妄心也라

족견시망심야

 

祖師가 云하사대 違順相爭이 是爲心病이라 하시니

조사   운       위순상쟁   시위심병

 

故知對於可不可者가 是妄心也요 若眞心者인댄 無知而知하

고지대어가불가자   시망심야   약진심자     무지이지

 

平懷圓照故로 異於草木하고 不生憎愛故로 異於妄心하니

평회원조고   이어초목     불생증애고   이어망심

 

卽對境虛明아야 不憎不愛하야 無知而知者가 眞心이라

즉대경허명     부증불애     무지이지자   진심

 

故로 肇論에 云하사대 夫聖心者는 微妙無相이라

고   조론   운       부성심자   미묘무상

 

不可爲有요 用之彌動이라 不可爲無며 乃至非有故로

불가위유   용지미동     불가위무   내지비유고

 

知而無知요 非無故로 無知而知라 하시니

지이무지   비무고   무지이지

 

是以로 無知卽知를 無以言異於聖人心也니라.

시이   무지즉지   무이언이어성인심야

 

 

 

우리가 차츰차츰 성장할수록 어떤 세계가 넓어지고, 마음이 커지고 그래서 대아(大我)! 보다 더 큰 삶을 살 수가 있는 그런 길이 열리는 거죠. 그래서

 

是心無碍라

시심무애

 

 마음이 걸림이 없다 라고 하는 것은, 그런 소소한 일들에 걸리지 않고 좀 시원하게 큰 삶을 살 수 있는 마음의 상태를 심무애라 그렇게 합니다.

 

 마음에 어떤 소소한 그런 증애심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으면은, 정말로 그 사람은 걸림이 없는 참 그야말로 자유를 누리는 삶이예요. 정말  자유 자재한 그런 삶이죠, 그 외에는 여기 걸리고 저기 걸리고 여기 구속 받고 저기 구속 받아 가지고, 그야말로 스스로 구속 받아서 걸림을 당하고 있는 거죠. 예컨대 그것을

 

如露地白牛하야  不傷苗稼也니라

여로지백우      불상묘가야

 

露地(로지)라고 하는 것은 

 

  마음대로 풀어놓은 그런 넓은 땅을 말하는 것이 예요.

여기에

 

白牛(백우)가

 

흰 소가! 왜 흰 소냐?

처음에는 검은색이었었는데 그 검은 소가 자꾸 차츰차츰 좋은 풀을 뜯어 먹다 보니까, 나중에는 흰 소가 되었다. 다시 말해서 탐진치(貪嗔痴) 삼독(三毒)으로 가득 찼던 우리의 마음이 어떤 수행을 통해서 마음이 텅 비어졌다. 이것을 白牛(백우)!  흰 소라 그래요.

 

 그래서 십우(十牛)를 보면은 처음에는 시뻘건, 검붉은 그런 소였었는데 차츰차츰 머리에서부터 하얗게 변해가지요. 하얗게 변해가서 나중에는 꼬리까지 하얀 소가 돼 버려요. 그것을 가지고 露地白牛(로지백우)라 그럽니다. 이것은 법화경에서 나오는 이야기이기도 한데 여기는 소 먹이는 이야기니까. 그래서 그런 소가 되면은 완전히 수행이 다 찬 그런 상태의 소가 되면은

 

苗稼(묘가)를 상하지 않는다.

 

곡식을 절대 상하지 않는다.

불교 공부를 어지간히 하고 또 옛날의 조사 스님들,  도인 스님들의 어떤 깨달은 경지를 자꾸 이렇게 우리가 접하다 보면은, 자기도 모르게 그런 경지에 이른 것같이 그렇게 돼요. 그래서 그런 것을 도를 통한 사람들이 부처를 꾸짖기도 하고 조사를 꾸짖기도 하는 것을 많이 접하게 되거든요.

 

뭐 예를 들어서 운문 스님 같은 이들은 부처님을 아주 심한 표현으로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태어나자 그렇게 했다 그러니까, “내가 그 때 만약 옆에 있었더라면은 한방에 쳐서 죽여 가지고 개의 밥을 줬을 것이다.”아주 이런 소리를 사정없이 한다고요. 그것이 이제

 

古有呵佛罵祖者야

고유가불매조자

 

 그런 표현만 아니라 별별 표현이 다 있어요. 그래도 그런 이들은 그런 소리를 할 만한 수행이 되어 있어요. 그만치 도가 물리는 사람들이라고요. 그런데 만약에 우리가 그런 말을 듣고 마음대로 그런 소리를 한다 그런 경우예요.

 

是與此心相應이어늘

시여차심상응

 

  옛날에 呵佛罵祖(가불매조) 하는 사람은(운문 스님 같은 그런 이들은), 이 마음으로 더불어 상응 했다. 딱 들어 맞았다. 진심으로 하여금 딱 들어맞았다 이 말이죠. 그러면 진심을 제대로 깨달은 사람이라 이 말입니다. 운문 스님 같이 마음을 제대로 깨달아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今見재入宗門에

금견재입종문

 

지금 보니까 막 종문에 들어와,

이 선방에 들어 오자마자

 

종문이라는 말은 선방이라고 생각하면은 제일 적절하고 쉬운 표현이 됩니다. 또는 불교공부 한 서푼어치 하자마자 어떻게?

 

未知道之遠近하고

미지도지원근

 

자기의 도가 멀고 가까운 것은 알지 못하고

 

便學呵佛罵祖者는 太早計也니라

편학가불매조자   태조계야

 

 

便學呵佛罵祖

편학가불매조

 

부처를 꾸짖고 조사를 꾸짖는 것만 배우는 거예요.

앞에서 운문 스님이 한 그런 소리만 어디서 주어 들어 가지고, 그런 소리를 겁 없이 쉽게 입으로 막 지껄인다 이거죠. 그런 사람은

 

太早計也라

태조계야

 

너무 이른 생각이다. 너무 이른 계산이다.

자기 수양도 되지도 않고 자기 도가 그쯤 되지도 못했는데 말만 들어가지고 그냥 막 하면은, 그것은 너무 지나친 소리다.

 

太早(태조)다.

 

너무 이른 소리다. 참 멋진 말이죠.

부처를 꾸짖고 조사를 꾸짖는 그런 내용들이요, 조사 스님들의 선문에 보면은 아주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들의 경지에서 가능한 거죠.

 

그 전에 어떤 아주 국가에 재상을 지낸 사람이 어느 마을을 이렇게 지나가다가 주막집에서 쉬면서

“아이 이 동네에는 사람이 없구먼.”그랬대요. 그런데 거기도 정승을 지낸 사람도 있고 상당한 인물이 난 동네라고요. 그러니까 그 마을에 아주 이렇다 하는 사람이 있다가

 “아니 저 사람이 말이지 뭔데 이 동네를 그렇게 무시하고 이 동네 사람을 사람이 없다고, 사람이 나지를 않았다고 이런 소리를 하느냐?”그러니까

“아 그 사람은 누구 누구라고, 그 사람! 그 사람 눈으로야 사람이 없지.” 그런 말을 했다는 겁니다.

“그 사람 눈으로야 이 동네에 사람이 없지.”

 

우리는 이 동네 누구도 나고 누구도 나고 말이지, 뭐 누구 조상은 어떻고. 누구 조상은 뭘 하고. 과거에는 뭘 하고. 훌륭한 그런 인물들이 났다고 우리는 그러지마는, 그 사람은 지금 여기 우리 동네에서 그 동안 난 사람들보다 훨씬 더 높은 사람이니까, 그 사람 눈으로는 없지요.

 

그러나  아무나 말이지 지나 가면서 “아, 이 동네 사람 없지.” 하면, 그렇게 하면 큰 일 나는 소리다 이거죠. 그랬다가는 뼈도 못 추린다 이겁니다. 함부로 그런 소리 배워 가지고 그 동네 지나 가면서 말이지. 이 동네 사람 없다고 그랬다가는 뼈도 못 추리니까, 그런 소리하지 말라 이거예요. 그 사람 입장으로서는 이 동네 사람 없다고 해도 충분히 된다 이거죠. 마찬가지로 여기

 


呵佛罵祖者

가불매조자

 

부처를 꾸짖고 조사를 꾸짖는 그런 사람들이 아까 운문 스님 같은 분들이야 그래도 되죠.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지마는 아무나 그런 소리 막 해 가지고는 지나친 소리다.

 

이제 그런 어떤 분위기들이 우리 불교 집안이란 참 묘해 가지고, 쭉 이렇게 선가에 내려오면서 그런 풍토가 면면히 이어져서 지금도 있습니다. 옛날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고 그게 어찌 보면은 만용 같지마는 그것은 그것대로 또 긍정적으로 볼 수가 있어요.

 

지금 선지식들에게 우리 어릴 때만 해도 수좌들이 법 거량 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결제 때 선지식이 나와서 법문하면은요, 뭐라고 나와 가지고는 절하고 묻기도 하고 사정없이 틀렸다고 그냥 “할”도 하고 그런 것을 봤는데, 요즈음은 그런 것이 또 없어졌어요.

 

나와서 선지식을 떠 본다든지 무시한다든지 하는 것이 일조에 만용이지마는, 그런 만용 마저 도 없다는 그것이 참 문제죠. 그러니까 여기에는 어떤 지나친 발전 된 이야깁니다마는, 그렇게 하는 풍토가 있어 왔기 때문에 보조 스님이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우리 마음을 깨닫고 마음의 어떤 공부를 시험해 보는 그런 입장에 있어서, 무엇을 가지고 시험 한다고 그랬죠? 내가 애착스러운것. 미워하는 것. 그것을  마음에 딱 한번 되새겨보라 이겁니다.

 

앞에 딱 갔다 놓았다 생각하고, 거기에 내가 여전히 미워하는 마음! 또는 애착하는 마음이 그대로 잘 일어나는가. 일어나지 않는가. 이런 것을 가지고 시험해 본다. 그래서 예컨대 소를 먹이는 그런 일과 똑 같은 것이다. 이렇게 정리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 다음 넘겨서 眞心無知(진심무지)라 그랬어요. 이것도 조금 어려운 이야기가 되겠는데

 

眞心無知(진심무지)!

 

진심은 앎이 없다.

앎이 없다 해서 목석처럼 앎이 없는 것이 아니고, 목석처럼 무지한 것이 아니고 앎이 없이 알고, 또 알되 그런 작용이 없다. 쉬운 표현으로 하면은 거울과 같은 그런 상태다. 거울은 환하게 비춰요. 그래서 사물이 오면은 그대로 밝게 비춘다고요. 그렇지만 거울에는 증애심이 없어요. 뭐 춘향이가 와서 비친다고  예쁘다고 더 잘 비춰주고 무슨 방자가 와서 비춘다고 나가라고 하고 거울은 그런 생각이 없어요. 누가와도 잘 비춰줘. 춘향이가 오든 방자가 오든 다 잘 비추어 준다고요. 

 

 그것이 진심을 깨달은 사람, 다시 말해서 도인의 어떤 마음상태! 그것을 무지(無知)라 그래요. 그런 무지! 목석 같은 무지가 아니고 무지하면서 지혜! 앎이 있으면서 아는 것. 그러면 우리는 뭐냐? 무지(無知)의 지(知)라. 앎이 있는 그런 앎이다. 그 차이예요. 도인이 아는 것 하고 우리가 아는 것 하고 마음의 어떤 갈등이라든지 분별이라든지 거기에 또 증애심 이라든지 이런 것이 차이가 나는 거죠. 그래서 그 문제를 여기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或이 曰 眞心與妄心이 對境時에

혹   왈 진심여망심   대경시

 

  진심을 깨달은 사람, 그리고 망심!

  우리는 망심을 가지고 있죠. 망령된 마음이

 

對境時에

대경시

 

  경계에 대했을 때

 

如何辨別眞妄耶이닛가

여하변별진망야

 

  어떻게 진심인지 망심인지를

 

辨別(변별)!

 

나눌 수 있느냐. 분별할 수 있느냐?

라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曰(왈) 대답하기를

 

妄心은 對境하야

망심   대경

 

 망령된 마음은 경계를 대해 가지고서

 

有知而知하야

유지이지

 

여기 망심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 수준이라고 생각하면 좋습니다. 우리는 전부 망심 만 가지고 보니까요. 망심은 어떤 경계를 대해서 일어나는 그런  연류심! 또는 분별심! 이거예요. 그것이 우리의 망심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도인들은 그런 분별심이 없느냐? 아니 예요. 분별심이 다 있어요. 분별심이 다 있는데 그것을 예를 들어서 날씨가 덥다 하면은 우리는 덥다 라고 하는 그것에만 떨어지고 말죠. 도인들은 더운 것도 내 마음(진심) 진심입니다. 더운 것 그대로 도라고 이렇게 이해하면 돼요.

 

 그런데 더운 것에 결국은 팔리지 않는 거예요. 그러면 시원한데 팔리느냐? 시원한 것에도 팔리지 않는 거죠. 시원한 것도 내 마음! 더운 것도 내 마음! 시원한 것도 도고 더운 것도 도라고요. 시원한 것도 진리! 더운 것도 진리! 전부 일체가 진리로 보기 때문에, 그래서 똑같은 어떤 현상을 보고마음을 일으키되, 그 질이 다른 거죠. 그 차이입니다. 그러면은 전부다 진리나 도라면은 그러면 취사선택이 필요 없다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는 전부 도가 안되고 진리가 안되니까 보는 쪽쪽 취사선택이죠. 전부 보아 가지고 이것은 예쁘다. 이것은 안 예쁘다. 예쁜 것은 가지고 안 예쁜 것은 버리고 이렇게 하는 거예요. 중생들은 보는 쪽쪽 그냥 분별심을 일으키고 취사선택하기 바쁜데 도인들은 그게 아니죠. 도인들은 보는 쪽쪽 전부 진리고 전부가 도이니까 취사선택할 게 없어요. 도인들은 좋다 나쁘다 가리고 차별할 게 없다고요. 그 차이입니다. 그게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여기 진심과 망심! 말이 좀 어렵긴 해도, 쉽게 풀면 내용이 그런 거예요. 진심을 얻은 입장! 또 망심의 세계에서 사는 우리들의 입장! 그래서 망심은 어떤 경계(대상)를 대해가지고서 

 

有知而知라

유지이지

 

 아는 것이 있으면서 알아 가지고서

 

於順違境에

어순위경

 

순경계 위경계 그랬어요.

順(순)은 내 마음에 드는 경계!

위(違)경계는 내 마음에 안 드는 경계!

  그런 두 가지 상반되는 경계를 만났을 때

 

  起貪嗔心하고

  가탐진심

 

  탐심과 진심을 일으키고

순경계는 탐심을 일으키죠. 내 마음에 드니까 그것을 가지려고 하고 좋아하죠. 그 다음에 위경계! 어기는 경계는

진심이 나죠. 에이 보기 싫어. 꼴 보기 싫다고. 저기 갔다 버리라고 한다든지, 뭐 마음이 안 맞는 자리 같으면은 얼른 일어나서 가버린다든지 화가 나서 가버린다든지 우리는 그렇잖아요. 탐심과 진심을 일으키고

 

  又於中容境에

  우어중용경

 

  중용경이라고 하는 것은 중간 경계!

  말하자 면은 순경계, 위경계!

마음에 드는 경계 안 드는 그 중간 경계에 있어서도

 

  起痴心也니

  기치심야

 

어리석은 마음을 일으킨다.

 

旣於境上(기어경상)에

 

경계! 대상이죠. 대상위에서

 

起貪嗔痴三毒인댄

기탐진치삼독

 

탐과 진과 치의 세 가지의 독

세 가지의 독을 일으키는

 

足見是妄心也라

족견시망심야

 

족히 볼 수 있다. 족히 알 수 있다.

충분히 알 수 있다 뭘? 그것은 망령된 마음이라는 것을

망심이라고 하는 것을 족히 알 수가 있다.

 

 그러니까 내가 앞에 서두에 말씀 했듯이 사물을 보고 좋다 나쁘다 분별해 가지고, 분별하면은 또 행동에 옮기는 거예요. 싫으면 당장에 싫은 내색하고 떠나려고 하고 버리려고 하고 상대를 안 하려고 하고, 그런 행동으로 옮기니까 ‘아 그러면 벌써 네가 그렇게 되면은 망심이야.  진심을 몰라. 마음의 도리도 아직 모르는 사람이야.’

 

그리고 또 만약에 진심을 깨달았다 면은 모든 도인들의 마음처럼 보는 대로 전부 도고. 진리고. 더우면 더운 대로 진리요! 추우면 추운 대로 진리요, 어두우면 어두운 대로 진리요, 밝으면 밝은 대로 진리요.

 

사실 내가 늘 이야기 하지마는 이 나무 줄기와 나무! 또 꽃! 이것은 엄연히 꽃을 보려고 나무줄기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천만에, 그 가치는 똑같은 거예요. 꽃이나 이 줄기나, 줄기 없이 꽃이 있습니까?  또 꽃 없는 줄기가 무슨 의미가 있어요?

 

그런데 줄기 입장에서는 ‘야, 내가 없으면 네가 말이지 아무리 아름답다 하더라도 네가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네가 아름다운 꽃을 이 줄기한테 공을 돌려야 되냐?.’ 이것이 이제 우리식의 분별 이예요.

 

 그런데 꽃은 ‘네가 아무리 튼튼해도 나를 꽃 피우기 위해서 이 줄기가 있는 것이지. 무슨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이런 식으로 서로 가치의 어떤 차이를 둬 가지고 그렇게 주장하는데 이것은 우리 생각이라고요. 그런데 알고 보면 어떻습니까? 이 줄기나 꽃이나 똑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는 거예요. 똑 같은 가치를, 줄기가 없으면 꽃이 없고 꽃이 없으면 줄기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아! 줄기도 진리요, 꽃도 진리다.”

 

그리고 우리가 쌀을 이렇게 보면은 쌀은 껍질에 이렇게 싸여 있지않습니까? 그것은 껍질을 벗겨내고 우리 입장에서는 쌀만 취하지마는 사실은 그 벼의 입장에서는요, 그 껍질이나 그 안에 있는 쌀이나 똑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껍질이 없으면 그 안에 알맹이(쌀)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껍질은 껍질대로 진리고, 알맹이는 알맹이대로 진리죠. 그러면은 어느 것이 좋다. 어느 것이 나쁘다. 이런 분별 심이 없는 거죠. 도인의 마음은 그런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삼 독심이 일어나느냐? 안 일어나느냐?  똑같이 가치를 인정한다 면은 삼독심이 일어날 까닭이 없는 거죠. 참 이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대목이죠. 삼독심이 들어 가지고 진심과 망심을 분별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祖師가 云하사대 違順相爭이 是爲心病이라.

조사   운       위순상쟁   시위심병

 

이것은 신심명에 있는 글이죠.

 

違順(위순)!

 

違(위)는 내 마음을 거슬리는 일,

順(순)은 내 마음에 딱 들어 맞는 일.

그것이 항상 내 마음에서 서로 싸우지 않습니까?

그것이


  상쟁(相爭)이라.

 

서로 다툰다 이거예요.

우리 마음에 사실 그게 갈등이고 마음 병이죠.

 좋다 나쁘다. 나쁘다. 좋다. 나쁘다 좋다 항상 이것이  중생들의 마음 병이지 다른 게 아닙니다. 손해보면 나쁘고 이익보면 좋고 전부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가면 이익이 있을까? 아이고 더운데 가지말자. 안가고 집에 있는 게 이익하지.” 전부 따지고 보면 이렇다고요. 위순 상쟁이라고요.

 

마음에 드느니 안 드느니. 저것이 더 나을까 이것이 더 나을까? 이것이 좋은가 저것이 나쁜가? 전부 그래요. 심 병입니다. 마음 병이 바로 그것이죠. 그래서 심병이 자꾸 깊어지면 어떻게? 심병이 깊어지면은 신병(身病)이 돼요. 몸이 또 병이 들어요. 몸이 병이 들면은 결국 가버리죠. 몸이 병 드는 그런 과정도 안 거치고, 그냥 뛰어 내리는 사람도 있어요. 그것은 아주 극속도로 심 병이 그냥 끓어서 그런 거예요.

 

아주 며칠 사이에 심 병이 그냥 악화 되 버리면은 신병까지 갈 겨를도 없어요. 내가 앞에서 송도쪽에 어떤 신도 집 집안 이야기는 심 병이 들어 가지고 신병이 한 일년까지 가 가지고, 신병을 앓다가 그 다음에 다 가더라 고요.

 

그래서 여러분들 심 병 앓고는 으레 히 전부 신경성 무슨 병으로 병원에 가서 아무리 진찰 해봐야 현대 과학으로는 그게 안 나타나고 병명도 안 나오고 초기니까 그런데 그것이 오래되면 신(身)에 나타납니다. 몸 상태에 나타나요. 그런데 결국 그것마저 못 고치면은 결국 할 수 없이 가야 되는 거예요. 

 

 이것은 뻔하다고요. 부처님 이 경전 몇 가지 배우면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어떻게 어떤 문제가 생기고 무슨 문제는 무엇 때문에 생기고 환하다고요. 전부 違順相爭(위순상쟁)입니다. 

 

위와 순! 마음에 든다 안 든다. 좋다 나쁘다. 내한테 이익이다 손해다 이것을 저울질 하다가 그래 결국은 우리 인생살이는 끝나는 거예요.  내~ 그냥 저울질 하다가 마는 거죠. 그래도 다행이 큰 심 병이 안 들면은 다행이고 그 사람은 잘 산 거죠.

 

만약에 심 병(心病)이 들어가지고 신병(身病)까지 옮겨가고 그래서 결국은 그 병으로 해서 앞에 이야기처럼 사업이 망하니까 사람까지 가 버리는 상태로 만약에 되 버린다면은 이것은 참 큰 문제 예요. 한 번뿐인 인생을 그렇게 살아서 되겠어요? 살아있는 동안은 얼마든지 또 새로운 세계가 있다고요. 눈을 높이 뜨면은 세상이 달라집니다.

 

높이 나는 새는 멀리 봐요. 조금만 눈을 높이 뜨면 또  더 멀리 보인다고요. 여러분들 어릴 때요, 어릴 때 자기가 어떤 삶의 가치와 재미라고 생각했던. 뭐 이것이 아니면 못 살 것 같은, 그 때 그때마다 그런 생각으로 삽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어릴 때 그렇게 이것이 아니면은 사는 재미가 없어서 못살 것 같았던 것이, 지금 가지고 있나요? 한 사람도 가지고 있지 않아요. 나이가 들면은 하나도 안 가지고 있고. 한 살 때는 한 살 때의 삶의 재미가 있고. 두 살 때는 두 살 때 삶의 재미가 있어요. 세 살 때는 세 살 때 삶의 재미가 있고. 그래서 십 대. 이 십대. 삼 십대. 사십 대,

 

예를 들어서 우리가 나이를 든 노인들을 생각해 본다. 그래 젊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은 ‘야! 우리는 젊으니까 즐길 거리도 많고 참 몸도 건강하고 뭐 재미있는 것이 천지인데, 저 노인들은 그런 것이 하나도 없다.’ 이거예요.

 

뭐 노래 좋아하는 것도 영 다르고 즐기는 것도 다르고, 힘도 떨어져 가지고 영 몸도 말을 안 듣고 그래서 전혀 살만 한 의미가 없을 것 같은데 천만에, 나이든 사람은 나이든 데로 바빠요. 살 거리가 많고 재미있는 것이 많고 그 전에 전부 다 버리고, 그 전에 십 대 이십 대 때에 즐기던 것을 싹 다 버리고 하나도 안 가지고 있어도, 오 십대 육 십대 아주 재미있고 즐겁게 잘 살아요.

 

여러분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왜 그러냐? 그만치 거기에 새로운 삶의 안목이 있어요. 그런 안목이 있으니까 얼마든지 즐겁게 잘 산다고요. 뭐 한참 자기가 이렇게 즐길 때는요, “아, 세상 사람들이 이 재미를 모르고 어떻게 세상을 무슨 맛으로 사나?”이런다고요, 그것 참 어리석은 생각이지. 얼마나 재미있으면 그런 생각이 들까? 이 재미도 모르고 어떻게 세상을 그렇게 사나 하지만, 아닙니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의 세계대로 얼마나 살만한 재미도 있고 과시도 있고 그런 세계가 얼마든지 또 있다고요.

 

이 사람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불가사의 하고 무궁무진 하기 때문에, 또 새로운 눈! 보다 더 높은 눈! 또 다른 눈을 뜨면 얼마든지 좋은 세계가 있어요.

 

끝없는 세계가 펼쳐져 있는데 자기의 그 세계만 가지고 “아, 세상살이 이것도 모르고 무슨 재미로 사나?”도박하는 사람들이 특히 그래. “이것을 모르고 세상 무슨 맛으로 사나 이거?”아편 하는 사람, 특히 마약 사람들. 마약 안 맞고 어떻게 인생을 사느냐 그래요. 정말 그렇습니다. 마약을 모르고 인생을 산 보람이 뭐 있느냐 이거예요. 인생을 사는 보람이 없다고까지 생각을 한다고요.

 

그렇지마는 그 마약 안 하는 사람들은 그것 다 폐인으로 보잖아요. 천하에 몹쓸 사람! 인생을 막 가는 사람으로 그렇게 보거든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이것 없이 어떻게 인생을 사느냐 이거죠. 그러니까 안목의 차이입니다. 높이 나는 새는 멀리 본다 이겁니다. 꼭 기억하세요. 갈매기 조나 단 집에 가서 다시 읽어 보세요. 그래서 여기에 보면은 그런 차원으로까지 세세하게 설명은 안 했지마는, 담고 있는 의미는 그런 의미를 사실은 다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違順相爭이 是爲心病이다.

위순상쟁   시위심병

 

참 멋진 말이죠.

정말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말씀입니다.

 

위순상쟁(違順相爭)

 

위(違)는 내 마음에 안 드는 모든 문제들.

순(順)은 내 마음에 드는 모든 것들

 

이것으로 갈등하고 이것을 가지고 저울질 하고, 이것을 가지고 평생 우리가 치닷거리를 하는데, 그게 결국은 심 병이다 이거죠. 그러니까 괜히 그 차원 가지고 보다 더 다른 차원으로 우리가 자꾸 올라 가고 높이 눈을 뜨려고 해야지, 그 차원에서 그렇게 치닷거리를 할 것이 아니라는 거죠.

 

어릴 때는 구슬 하나 가지고 서로 코피를 흘리면서 그냥 주먹질을 하고 그러지마는 나중에는 그것이 부끄러워 가지고 말이지. 왜 내가 아직도 구슬을 책상 안에 넣어 놓고 있었던고, 이렇게 후회할 날이 금방 돌아온다고요. 그것이 안목의 차이지 다른 것이 아니거든요.

 

違順相爭이 是爲心病이라 하시니

위순상쟁   시위심병

 

故知(고지)

 

고로 알아, 그럼으로 알라.

 

對於可不可者가

대어가불가자

 

가(可)와 불가(不可)를 대하는 그것이 곧 망심이다. 

가냐? 불가냐?  이것이 좋으냐? 안 좋으냐? 누가 국가간의 이야기에 아주 위기를 모면했다는 그런 역사가 우리나라에 있죠.

 

可不可(가불가)!

 

옳기도 하고 옳지 않기도 하다.

가히 옳지 않다 이렇게 쓰고 그러는데 여기에는 그런 것 생각할 것 없이 가(可) 한 것과 불가(不可)한 것. 그것을 대하면 이것이 곧 망심이다. 그저 저울질! 만났다 하면 저울질! 그게 사람이 이렇게 만나면은 “아, 저 사람이 내있는데 손해를 끼칠까?” 아니면 “이익을 줄 사람 일까?”이것도 그냥 딱 떠오른다고요.

 

이런 머리가 컴퓨터보다 더 빨라요. 딱 보면은 계산이 나와버려요. 번개같이 계산이 딱 되어가지고 손해 보일 사람 같으면 딱 경계를 해 가지고 싸움닭처럼, 닭싸움 전문으로 하는 닭은요, 닭을 만나자 마자 벼슬을 척 세워 가지고 공격태세를 딱 갖추거든요. 우리 생활이 그래요. 낯선 사람을 보면은 공격할 태세, 방어할 태세 그 태세부터 딱 갖추지 않습니까?  그것이 가(可)와 불가(不可)를 이미 계산을 해 가지고 그런 것이거든요 가(可)와 불가(不可)에 대한 것, 그것은 전부 “是妄心也(시망심야)요.”  망심이다!

 

 도인은 그렇지 않겠지요. 아까 이야기 했듯이 거울과 같은 마음이다. 거울과 같은 마음이라서 누구든지 오면은 다 비추어 줍니다. 옳은 것도 비추어 주고 그른 것도 비추어 주고 껍질은 껍질대로 알맹이는 알맹이대로 다 같이 이렇게 평범하게 생각하는 그 자세, 위에 까지는 망심이 참 우리의 실정을, 우리의 입장을 잘 대변해 주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若眞心者(약진심자)인댄

 

만약에 진심이라고 한다면은

 

無知而知(무지이지)라.

 

저 앞에 뭐라고? 有知而知(유지이지)라.

여기는 無知而知(무지이지)라. 앎이 없이 안다.

 

平懷圓照故라 그랬어요.

평회원조고

 

앎이 없이 앎이 뭐냐?

평탄 한 생각으로 원만히 비친다.

거울을 떠올리면 제일 쉽습니다.

진심을 얻은 사람의 세계! 도를 통한 사람의 마음!

 

無知而知 平懷圓照

무지이지 평회원조

 

평탄한 마음으로 원만히 비친다.

평탄한 마음이 뭡니까? 뭐 손해 끼친다. 이익을 줄 것이다 이런 것이 없는 거예요. 그런 저울질이 없고 그냥 그대로, 오면 그대로 평탄하게 대해 주는 상태. 어떤 것이든지 그것이 좋다 나쁘다 하는 분별심 일으키지 않고 그대로 대해주는 것. 그것이 平懷圓照(평회원조) 입니다. 원만히 비추는 고로 

 

異於 草木(이어 초목) 하고

 

그렇다고 목석 같으냐? 목석하고는 또 달라요. 목석은 아무 감정이 없지 만은, 사람의 마음은 그대로 아는 것은 다 알아 분별을 다 합니다. 그래서 초목하고는 다르고

 

不生憎愛故로

불생증애고

 

憎愛(증애)

 

미워하고 애착하는 마음이 나지 아니한 까닭으로

 

異於妄心하니

이어망심

 

망심하고는 다르다.

망령된 마음! 중생들의 보통 마음하고는 전혀 다르다.

이것을 알아야 된다 이거죠. 다르니,

 

卽對境虛明하대

즉대경허명

 

곧 경계를 대하되

 

虛明(허명)해서

 

빌 虛자 밝을 明자, 어떤 사물. 어떤 사건

그것을 대하되 허명 해. 텅 비고 밝아서 

 

不憎不愛하야

부증불애

 

미워 하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애착하지도 아니해서

 

無知而知者가 眞心이라

무지이지자   진심

 

앎이 없이 아는 것이 그것이 진심이라.

참 좋은 말이죠. 無知而知(무지이지)라. 그래서 도인들은 그러면 애착하는 그런 자식이 죽었을 때, 그럼 덤덤하단 말이냐? 그러면 장자??처럼 자기 부인이 죽었는데 노래 부르고 춤추는 것이 옳으냐? 아니면 아무 감정도 없는 것이 옳으냐? 그렇게 따지면 참 곤란한 일이 예요. 그렇게 되면 그것도 불교가 아니거든요. 그래서 간단한 말로 표현하면은

 

樂而不淫 哀而不傷은

낙이불음 애이불상

 

좋은 경계와 안 좋은 경계!

그런 문제를 가지고 간단하게 표현하면은

 

樂而不淫 하는 것은

낙이불음

 

좋은 일이 있으면 즐긴다 이거죠.

즐기는데 저기 음 히 빠지지 않는다.

 

不淫(불음)!

 

허우적대지 않는다 이거죠. 어디 빠지지 않는다.

빠질 음자입니다. 어디 빠져버린다. 우리가 보통 빠진다 그러죠. “뭐 적당이 즐기고 말지 그렇게 빠져 가지고 못 헤어난다.” 이런 표현을 쓰는데 바로 그겁니다. 부처님도 도인도 다 좋아하는 것은 좋아할 줄 알아요. 그러나 거기에 중생들처럼 빠져 가지고 헤어나지 못하는 그런 상태는 아니 예요. 그 다음에

 

哀而不傷(애이불상)

 

사랑하는 자식이 죽거나 부모가 죽거나 친구가 죽거나 그래서 아니면 어떤 손해를 입히거나 입거나 그랬을 때 슬퍼하기는 하되 상하지는 않는다. 우리 중생들은 슬퍼하다 상하기까지 하는 거예요.

 

앞에서 그랬지요. 재산이 가니까 사람까지 가더라. 그것이 哀而傷(애이상)이죠. 슬퍼 하다가  슬퍼 하다가 속상해 하다가 속상해 하다가 이 목숨까지 가 버리는 거예요. 슬퍼하다가 심병(心病)이 들어가지고 결국은 신병(身病)이 되면은 그냥 가는 거죠. 그런데 그렇게 까지는 하면 안되죠.

 

樂而不淫 哀而不傷

낙이불음 애이불상

 

참 멋진 말이 예요. 저것이 이제 여기서 진심을 얻은 사람, 도인의 경지 부처의 경지에서 현실을 살아갈 때 어떤 마음 자세입니다. 마음 자세가 그렇다는 거예요. 목석처럼 덤덤하면 그것은 인간이 아니 예요. 그것은 도인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죠.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좋아 하되 빠지지 않고 슬퍼할 일이 있으면 슬퍼하되 상하지 않는 것. 남이 밀기도 전에 뛰어내린다든지. 재산이 가니까 사람마저 가버린다든지 인생을 잃고 사정없이 설쳐 가지고 결국은 일을 더 망쳐 놓는다든지 그것은 전부 상한 상태에 있는 거예요. 자기가 상해버리는 거예요.

 

상할 傷자. 哀而不傷(애이불상)! 슬퍼할 때 슬플 불자 아닙니까. 슬퍼하되 상하지는 않는다. 간 사람은 갔고 살아있는 사람은 정신 차리고 뭐 정신 차리고 털고 일어나서 또 뭔가 자기의 삶을 살아야 될게 아니 예요. 예를 들어서 아주 가까운 사람이 죽었다고 할 경우, 그것도 슬픈 일이니까요. “애이불상” 참 멋진 말이지요. 그것이

 

無知而知라

무지이지

 

앎이 없이 아는 것이 그거죠. 그것이 진심이라

 

故로 肇論에 云하사대

고   조론   운

 

고로 조론에서 말 하기를

 

조론은 승조 법사가 구마라습 제자 중에서 아주 유명한 제자가 있었는데, 이 사람이 서른 두 살인가 그렇게 요절을 한 이 분이 휘대의 천재입니다.  그 분이 지은 저술이 있는데 그것이 조론 이예요. 거기에 이르대

 

夫聖心者는

부성심자

 

대저 성인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앞에서 말했던

 

樂而不淫 哀而不傷

낙이불음 애이불상

 

이것이 성인의 마음 이예요.

성인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微妙無相이라

미묘무상

 

미묘해서 형상이 없다.

 

不可爲有요

불가위요

 

가히 있다고 할 수도 없고

형상이 없으니까, 성인의 마음은 어떻게 보면은 속이 깊은 사람도 그 사람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고 할 수 있지마는, 성인의 마음은 그런 것 하고는 달리 상이 없어요. 상이 없어 가지고 그래서 가히 있다고도 못하고 그런데

 

用之彌動이라

용지미동

 

이것이 중요한 말이죠. 그것을 사용할 때만 더욱 더 크게 움직여요.  중생들 보다도 미혹한 사람들 보다도 더 큰 일을 한다 이거죠. 그것이

 

彌動(미동)이라.

 

더욱 크게 움직인다. 

 

不可爲無며

불가위무

 

가히 없다고 하지 못 함이니

없음이 되지 아니하며

 

乃至非有故로

내지비유고

 

있지 아니한 까닭에

 

知而無知요

지이무지 

 

알되 앎이 없고 또 

 

非無故로

비무고

 

없는 것이 아닌 까닭에

 

無知而知라

무지이지

 

없는 것이 아니라 하면은 있는 것이죠.

그러기 때문에 앎이 없이 안다.

저 표현이 아주 적절해요.

 

樂而不淫하고 哀而不傷이라

낙이불음     애이불상

 

앎이 없이 아는 거죠.

즐겨 하되 즐겨 함이 없이 즐겨 하고,

슬퍼 하되 슬퍼함이 없이 슬퍼하는 것.

 

우리는 슬프다 하면은 그냥 몇 날 며칠 밥도 못 먹고 그냥 꼭 따라서 죽을 것 같죠. 곧 따라서 죽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인은 그렇게 그냥 정신없이 그렇게 안 하거든요. 그래서 “知而知(무지이지)라”그래요. 앎이 있으면서 아는 것이다.

 

是以로 無知卽知를

시이  무지즉지

 

아는 것 없이 아는 것을

 

無以言異於聖人心也니라

무이언이어성인심야

 

성인의 마음과 다르다고 말하지 않느니라.

그래서

 

無知而知를 無知卽知를

무지이지   무지즉지

 

그대로 성인의 마음이라고 한다.

성인의 마음이 다르다고 말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그대로 성인의 마음이다 이 말이죠. 그것이 성인의 마음! 다시 말해서 여기서 말하는 것은 진심을 깨달은 사람의 마음! 진심을 얻은 사람의 마음! 도인의 마음! 그렇게 말 할 수가 있겠죠.

 

여기 까지는 우리가 참 욕심을 내어서 이 경지에 이르면은 더 말할 나위가 없겠지마는, 정말 이런 제대로 깨달은 사람의 마음은 이렇게 마음을 쓰는구나! 또 이런 마음의 상태로구나! 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눈 여겨 볼 필요가 있고, 또 이런 것을 자꾸 의식적으로라도 이렇게 가까이 하고 훈습! 앞에서 익히는 것 있지요.

 

但習氣를 未除하야.

단습기   미제

 

안 좋은 습기는 제해지지 않고,

좋은 습기는, 이런 도인의 마음 이런 것을 우리가 자꾸 익혀야 돼요. 익혀 가지고서 이것이 결국은 내 것화 돼 버리면은 그 때는 결국은 그런 삶을 살 수가 있는 거죠.

 

진심무지(眞心無知)

 

참 얼른 알아듣기 어려운 말 같지마는

알고 보면은 결국은

 

樂而不淫하고 哀而不傷

낙이불음     애이불상

 

앎이 없이 알고, 알되 또 앎이 없는 그런 상태라고 할 수가 있고, 그런 반면에 우리들 보통 중생들의 마음의 심리상태를 아주 잘 그려 놓았어요.

 

  “違順相爭(위순상쟁)이 是爲心病(시위심병)이라.”라고 하는 그런 표현은요,  그런 아주 어떤 경계에 흔들리는 그런 모습하고, 아주 진심에 대한 경지에 올랐을 때와 그렇지 못했을 때의 관계를 잘 나타낸, 그런 대목이 되겠습니다. 그 이야기가 좀 더 계속이 되는데,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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