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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眞心所往 진심소왕 (40)

 

 

如水가 以濕性爲體하고 波浪爲用이니

여수   이습성위체     파랑위용

 

濕性은 元無生滅故로 波中濕性인들 何生滅耶리요

습성   원무생멸고   파중습성     하생멸야

 

然이나 波離濕性코 別無故로 波亦無生滅이니라

연     파리습성   별무고   파역무생멸

 

所以로 古人이 云하사대 盡大地가 是沙門一隻正眼이며

소이   고인   운       진대지   시사문일척정안

 

是箇伽藍이며 是悟理人의 安身立命處라 하시니

시개가람     시오리인   안신입명처

 

旣達眞心인댄 四生六道가 一時消殞하고

기달진심     사생육도   일시소운

 

山河大地가 悉是眞心이라

산하대지   실시진심

 

不可離此眞心之外에 別有依託處也니 旣無三界妄因이라

불가리차진심지외   별유의탁처야   기무삼계망인

 

必無六趣妄果요 妄果旣無인댄 說甚依託이리요

필무육취망과   망과기무     설심의탁

 

別無彼此하니 旣無彼此인댄 則何可不可也리요

별무피차     기무피차     칙하가불가야

 

卽十方世界가 唯一眞心이라  

즉시방세계   유일진심

     

全身受用하야 無別依託이요

전신애용     무별의탁

 

又於示現門中에 隨意往生하야 而無障碍니  

우어시현문중   수의왕생     이무장애

 

故로 傳燈에 云하사대  

고   전등   운      

 

溫操尙書가 問圭峯曰悟理之人이 一期壽終에 何所依托이고

온조상서   문규봉왈오리지인   일기수종   하소의탁

 

圭峯이 曰一切衆生이 無不具有靈明覺性하야 與佛無殊하니

규봉   왈일체중생   무불구유령명각성     여불무수

 

若能悟此性이 卽是法身하면 本自無生이어니 何有依託리요

약능오차성   즉시법신     본자무생       하유의탁

 

靈明不昧하야 了了常知라 無所從來며 亦無所去니

령명불매     료료상지   무소종래   역무소거

 

但以空寂으로 爲自體언정 勿認色身하며

단이공적     위자체     물인색신

 

以靈知로 爲自心이언정 勿認妄念이니 妄念이 若起어든

이령지   위자심       물인망념     망념   약기 

    

都不隨之則臨命終時에 自然業不能繫요 雖有中陰이나

도불수지칙임명종시   자연업불능계   수유중음

 

所向自由하야 天上人間에 隨意寄託이라 하시니

소향자유     천상인간   수의기탁

 

此卽眞心의 身後所往者也니라

차즉진심   신후소왕자야

 

眞心直說   終

 

 

 

 그래서 아, 이번에는 그러면 불상이 변했으니까 다른 것으로 만들어 보자. 무슨 원숭이 모습을 한번 만들어 보자. 그래서 그 금을 가지고 원숭이 모습을 만들었다고 합시다. ‘야, 재미 있다. 원숭이 모습을 만들어 보니 괜찮은데,’ 불상을 보다가 원숭이 모습을 보니 그것도 그런 대로 재미있다 이거죠.

 

 또 원숭이를 보다가 지루하면은 코끼리 모양을 만들어 보자 해서 코끼리 모습도 만들 수도 있고, 금의 가치는 하나도 변하지 않고 있으니까, 그래서 이 사람은 불상을 만들었든 원숭이를 만들었든 무슨 코끼리를 만들었든 항상 금의 가치 입장에서 그것을 보기 때문에, 그 어떤 금으로서의 가치! 거기에서 오는 어떤 흐뭇함! 기쁨! 이것을 이 사람은 느끼는데,

 

 우리는 불상(佛像)! 상(相)에 매혹이 되어 버리면은, 상에 눈이 어두워 버리면은 불상이 파괴되면은, 그만 불상이 없어졌다 이렇게만 생각하고 그 이상은 생각 못합니다. 이것이 망심(妄心) 이예요. 그것은 생멸심(生滅心)이라. 생하고 멸하고 생하고 멸하는 거예요.

 

 앞에서 이야기 했던 예를 들어서 금의 입장에서 봐버리면은 무슨 모양을 만들었던지 간에, 그것은 묘용(妙用)! 묘한 작용이고 아주 아름다운 작용이죠. 한 가지 모양으로 있기보다 이 모양 저 모양 여러 가지를 만드니까 오히려 좋지요.

 

 그러면 이것을 법으로 이끌어다 보면은 비유고 법에다 이끌어다 보면은 우리가 마음을 이 마음도 쓰고 저 마음도 쓰는데, 쓰는 마음 따라서 그것으로 하나의 진심(참마음)의 묘한 작용으로 보면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진심의 한 작용으로 보지를 않고 그것을 그 형상만 보는 거죠. 좋아한다 하면 좋아한다고 하는 그것만 보고. 싫어 한다면 싫어한다는 그것만 보는 거예요. 우리는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마음의 그 본체는 이해를 못하니까. 그것 밖에 안 돼요.

 

 이것이 아주 어려운 대목이라면 퍽 어려운 대목인데, 그래서 저 앞에 깨달은 사람이 죽고 나서 어떻게 되느냐? 우리 입장에서 볼 때 깨달은 사람이 죽고 나서 라고 하는 이런 질문을 하는데, 깨달은 사람의 입장에서 죽고 나서 라는 질문 자체가 없어요. 온통 금입니다. 불상이 코끼리 상이 되었던지 말았던지 계속 금으로 그대로 있을 뿐입니다. 불상이 죽어 가지고 코끼리 상이 되었다 이것을 안 본다 이거죠. 금은 금 모습 그대로 있다 이거죠. 그러니까 그런 자체가 전혀 없어요.

 

 이미 깨달은 사람의 입장에서는요, 죽고 나서 무슨 몸을 받느냐? 어떤 조건에 태어나느냐? 어떤 업으로서, 도통하면은 그러면은 가난한 사람이 도통을 해서 아주 거부 장자 집에서 태어나느냐? 깨달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런 것이 없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죽고 나서 좋은데 태어나야 겠다라고 하는 그런 생각은 범부들의 생각입니다. 제대로 불교의 상식을 갖춘 사람은 그런 생각을 못해요. 그런 생각을 하면 그것은 아직 불자가 아니 예요. 여기 제대로 봤잖아요.  망심의 놀이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생사해탈의 경지는 전혀 모른다고요. 그렇게 되면은 생사해탈은 이론적으로도 관심이 없는 거예요.

 

 이론적으로라도 불교의 목표가 생사해탈이라는 거기에 관심이 있다면은, 죽고 나서 어디에 태어나느니 마느니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예요 태어날 것이 없는데, 태어나고 자시고 할 일이 아니라고요. 만약에 태어나고 자시고 할 일일 것 같으면은 그것이 생사해탈이라는 말이 있을 수가 없지요.

 

 그러니까 이 삶 전체를 금으로 보라 이거죠. 무슨 남자의 모습이다. 여자의 모습이다. 그렇게 보지말고, 전부가 진심! 마음의 한 작용이다. 마음의 한 작용으로서의 여자가 되었고. 마음의 한 작용으로서의 남자가 되었고. 여러분들 머리 깎아 버리고 먹물 옷 입어버리면 또, 마음의 한 작용으로서의 그대로 머리 깎은 한 중입니다. 머리 기르고 속인 옷 입으면 그대로 속인이고 그것이 마음의 한 작용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라고요.

 

 그 사람은 아직도 그대로 있잖아요. 그 사람은 그대로 있는 거예요. 그 사람은 그대로 있는데 왜 그렇게 변하느냐? 그것은 마음의 작용이니까 그렇게 있는 거예요. 그러면 예를 들어서 속인이 죽어서 승려가 되었고, 승려가 죽고 속인이 되고 그런 것이 아니라고요. 그냥 마음의 작용으로 승(僧)도 되고 속(俗)도 되고 속도 되고 승도 되고 남(男)도 되고 여(女)도 되고 여도 되고 남도 되고 얼마든지 우리의 삶을 변화무상하게 그렇게 창조해 나갈 수 있는 것이지. 그것이 제대로 된 삶인 거죠.

 

 그런데 그것은 생각을 안 하고 내가 죽어서 어디에 태어난다. 좋은데 태어나려고 죽으로 가는 사람도 있고 그렇다는 소리 들리더니 만 그것은 단연코 내가 말하는데 절대 불교 상식이 아닙니다. 불교는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것이 불교 목표예요.

 

 그러면 어디에 태어나느냐? 그것이 무슨 소리야 도대체 어디에 태어나느냐는 말이 불교 안에는 없어요. 이것은 다 우리 미혹한 사람들 입장에서 그렇다는 것이죠. 어떤 경전을 보라고요. 다 그렇게 이야기 해 놓았죠. 생사해탈! 그저 입만 벌렸다 하면 불교는 생사 해탈입니다.  生과 死! 태어나고 죽고 하는 것을 벗어나는 것이 불교는 목표고 그것이 관심사예요.

 

 좋은 날에 가서 죽어 가지고 좋은 날에 태어나겠다. 뭐 안 좋은 날에 있다가 좋은 날에 죽어서 태어나는지 어떤지 어떻게 알아요.  전생도 모르는데 그것은 몰라요. 누진통 안 하면은 그것은 몰라요. 백번 태어나봐라 자기가 어디서 죽어서 태어났는지 그것은 모른다고요. 그런 이치는 크게 잘못 된 소견이 예요. 그것은 전혀 불교 소견이 아니고 그냥 보통 사람이 살아가는 삶이 예요.

 

 전혀 불교를 모르는 사람으로서 그냥 윤회나 겨우 이해 하는 그런 정도의 상식이라고요. 그러니까 여기 금 비유를 다 들었고, 그 다음에 물 비유를 들겠습니다. 경문에 물 비유가 나왔어요.

 

 如水(여수)가  예컨대 물이

 

 以濕性爲體하고

 이습성위체

 

 습성으로 체(體)를 삼고

 

 波浪爲用이니

 파랑위용

 

 물길! 파랑으로서 작용을 삼는다 이거 예요.

물은 물결 치는 물이나, 얼어 있는 물이나. 접시에 떠놓은 물이나. 세숫대야에 떠놓은 물이나 전부 습성! 젖는 성품이 있잖아요. 그것이 물의 본체 예요.

 

 그런데 그 물결도 큰 바람이 불면은 큰 물결! 작은 바람이 불면은 작은 물결! 물결도 각양각색으로 동쪽에서 불면은 동쪽 물결! 서쪽에서 불면 서쪽 물결! 부는 대로 물결이 치지요. 그것은 묘한 작용이 예요. 물결로서 용(用)을 삼으니,

 

 濕性은 元無生滅故로

 습성   원무생멸고

 

 젖는 성품은 원래 생멸이 없어요.

젖는 성품이 물결이 있다고 해서 습성이 있고, 물결이 안 치고 조용하다고 해서 젖는 성품이 없나요? 그래서 젖는 성품은 영원한 거예요. 그래서

 

 波中濕性인들

 파중습성

 

 물결 치는 파도 중에 젖는 성품인들

 

 何生滅耶리요

 하생멸야

 

 무엇이 생멸이 있겠는가.

젖는 성품은 생멸(生滅)이 없어요. 생하고 멸하는, 그래서 생멸을 초월한다. 생멸이나 생사나 같은 말이죠. 생멸을 초월 한다 이거 예요. 그래서 생사해탈 이죠. 그것이 생사해탈이 고 그것이 불교의 목표고 이것은 불교의 관심사예요. 불교는 입문 하자마자 관심사가 그저 생사해탈이 예요. 생사가 해탈 된 그 경지가 어딘가. 무엇이 생사해탈 된 그런 경지인가? 바로 우리 진심의, 마음의 세계가 바로 생사해탈 된 경지다 라고 하는 그런 얘기죠.

 

 然이나 波離濕性코

 연     파리습성

 

 이것이 중요한 말입니다.

 파도는 습의 성품을 떠나고, 젖는 성품을 떠나고

 

 別無故(별무고)로라

 

 따로 없다 이거예요. 별무(別無)! 파도가 그렇지요. 젖는 성품은 물이잖아요. 물이 물결 치고 물결 치는 것이 물이죠. 출렁거려 놓으면 물결이되 고, 가만히 놓아두면 물이죠. 물은 물결이 치든지 가만히 있든지 젖는다 이겁니다.

 

 젖는 성품이라서. 빨간 물을 타 놓아봐요. 그것이 안 젖는가. 빨간 물을 들일 때는 빨간 물에 옷감을 적시잖아요. 까만 물을 들일 때는 까만 물에 적시는 거예요. 젖는다는 이 성질은 영원히 불생불멸이다 이겁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은 그러면 물로 치면 젖는 성품은 같은데, 그런 진심의 세계! 본 마음의 세계를 이해 하는 거예요. 본 마음의 세계를 내 것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 불교의 목표예요. 그렇게 되면은 물결이 아무리 치든지. 물결이 아무리 치든지 어디에 태어나든지 이 사람은 태어나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거예요. 그대로 진심이죠.

 

 그냥 그 사람은 태어났다 말았다 이미 없어요. 진심의 놀이일 뿐이고 한 작용이라고요. 진심의 작용이기 때문에 동(東)이다. 서(西)다. 남(南)이다. 북(北)이다. 라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없어요. 그러니까 물결은 습성을 여의고 따로 없습니다. 젖는 성품을 여의고 따로 없는 고로

 

 波亦無生滅이니라

 파역무생멸

 

 물결 또한 생멸이 없다.

 참 이것이 然(연)이나부터 중요한 말입니다.

 

 波離濕性코 別無故로라 波亦無生滅이니

 파이습성   별무고     파역무생멸

 

 물결도 또한 생멸이 없다.

물결이라는 것이 뭐예요? 우리의 일상사 삶입니다. 일상의 삶도 또한 생하고 멸하는 것이 없고 무엇이냐? 묘한 작용이죠. 무슨 원력을, 어디를 태어나기를 원(願)을 세운다. 원력(願力)을 갖는다. 중생제도 하기를 원력을 세워야지, 무슨 어디 태어나기를 원력을 세워요. 불자에게는 중생제도가 원력이지 어디 태어난다는 것은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예요. 태어나는 것은 없어요 이 사람에게는 그냥 묘한 작용이 있을 뿐이다 이거예요. 태어난다는 것은 생(生) 아닙니까? 생(生)이 있으면 멸(滅)이 있는 거죠. 작용하고 묘용하고 말하자 면은 생멸하고는 천양지차이로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앞에서 비유를 들었듯이 불상이 없어지고, 그 다음에 코끼리가 생겼다. 이것 밖에 못 보는 거예요. 그런데 금을 본 사람은 불상이 파괴가 되었던지, 파괴가 되어 가지고 이상하게 금 쪼가리가 흩어져 있든지 뭐 코끼리를 만들었던지. 코끼리를 또 녹여 가지고 한 덩어리의 금을 가지고 있던지, 그것은 아무 관계가 없는 거예요.

 

 그것을 달아봐요. 그 근수가 그대로 나가는지 안 나가는지 그것만 확인하면 그것 뿐 이예요. 금의 근수가 그대로만 다 있으면 그것뿐이고 그까짓 것 아무 상관없어요. 그것이 여기서 이야기 하고자 하는 주된 내용입니다.

 

 所以로 古人이 云하사대

 소이   고인   운

 

 옛사람이 말하기를

 

 盡大地가 是沙門一隻正眼이다

 진대지   시사문일척정안

 

 온 대지! 온 우주가

 

 是沙門一隻正眼이다

 시사문일척정안

 

 한 쪽 바른 눈이다 이거죠. 이렇게 돼야지. 어디 어느 장소가 좋고 어디가 어떻고  참 말도 아닌 소리죠.

 

 盡大地가 是沙門一隻正眼이다

 진대지   시사문일척정안

 

 온 우주가, 뭐 달나라에 가든지 무슨 화성에 가든지 어디에 가든지 전부가 그대로 사문의 바른 눈이다 이겁니다. 정안(正眼)! 전부가 사문이라는 말은 스님, 수행자라는 말입니다. 그냥 이것은 한 소리예요, 그 사람의 눈이다 이거죠. 그리고 또

 

 盡大地가 是箇伽藍이며

 진대지   시개가람

 

 온 우주가! 온 대지가! 전부 이 사람의 절이다 이거죠.

가람이라는 말은 도량(道場)! 절이라는 말이 아닙니까.

어디 가든지 이 사람의 절이고 지옥에 가도 이 사람의 절이고. 뭐 형무소에 가도 이 사람의 절이고. 극락가도 이 사람의 절이고. 산에 가도 이 사람의 절이고. 도시에 나와도 이 사람의 절이고. 길 거리에 있어도 이 사람의 세상이고 그렇게 돼야지, 뭐 어디 좋은 나라 따로 있고 안 좋은 나라 따로 있고 그렇게 되면은 곤란해요. 是箇伽藍(시개가람)이며,

 

 是悟理人(시오리인)의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사람이며

 

 是悟理人의 安身立命處라.

 시오리인   안신입명처

 

 세상 이치를 깨달은 사람의 안신입명처라.

몸을 편안히 하고 그 사람의 그 삶! 그 목숨이 제대로 제자리에 선 사람이다. 아주 참 시원하죠. 이렇게 돼야 되는 거예요. 이라 하시니, 이런 말을 옛사람이 했어요.

 

 旣達眞心인댄

 기달진심

 

 이미 진심을 통달했을진 댄

 

 四生六道(사생육도)가

 

 태(胎) 란(卵) 습(濕) 화(化)! 태로 나고 알로 나고 습기에서 나고 변화해서 나는 네 가지, 육도는 지옥 아귀 축생 천도 아수라, 어디에 가든지  그것이

 

 一時消殞(일시소운)하고

 

 일시에 그것이 다 사라져버린다고요.

사생 육도라는 것이 우리가 태어나는 모습들인데 그것이 다 사라져버려요. 그것이 이 사람 앞에는 없어요. 이 사람안목에는 지옥에 태어나도 지옥이 아니죠. 그것은 깨닫지 못한 우리 눈으로 지옥에 태어나는 것이지, 조금 눈 밝은 사람 입장에서는 그렇게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고요.

지옥 중생을 건지려면은 지옥에 가야지. 그렇게 간 지옥이 어떻게 그것이 지옥에 태어나는 것입니까? 그것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 예요. 관광 가는 것이죠.

 

 山河大地가 悉是眞心이라

 산하대지   실시진심

 

 산! 그리고 강! 그리고 이 우주 대지가 그대로

 

 悉是眞心(실시진심)이라.

 

 다 참 마음이라.

 

 不可離此眞心之外에

 불가이차진심지외

 

 이 마음을 떠난 밖에

 

 別有依託處也니

 별유의탁처야

 

 따로 의탁할 곳이 없다.

마음에 꼭 어디가 서 태어나고 싶거든 마음에 태어나야지, 어느 장소! 어느 나라에 태어난다고 하는 것은 말할 것이 아니다 이거죠. 이 진심을 떠난 밖에 따로 의탁할 곳이 있지 않음이니,

 

 旣無三界妄因이라

 기무삼계망인

 

 이미 이 사람에게는 망령된 인(因)이 없음이라.

 

 必無六趣妄果요

 필무육취망과

 

 반드시 육취! 여섯 갈래의 망령된 결과가 없으며

 

 妄果旣無인댄

 망과기무

 

 망령된 결과가 이미 없을진 댄

 

 說甚依託이리요

 설심의탁

 

 무슨 의탁을 말하리요.

어디에 의탁해서 태어난다. 좋은 집에 태어난다. 이런 사람은 무슨 김씨 집에 태어난다. 남자로 태어난다. 여자로 태어난다. 이런 의탁할 것이 없고 그것은 이야기 할 수가 없는 거예요. 해당이 안 되는 것이라 이겁니다.

 

 別無彼此하니

 별무피차

 

 따로 피(彼)니 차(此)니 할 것이 없음이라.

 

 旣無彼此인댄

 기무피차

 

 이미 피차가 없을진 댄

 

 則何可不可也리요

 칙하가불가야

 

 어찌 가(可)하고 불가(不可)함이 있으리요. 무엇이 可하고 不可하리요. 어디에 可하고 어디는 좋고 어디는 안 좋고, 뭐 저기 유럽은 좋고 이쪽에 한국은 안 좋고 이런 것이 있을 일이 있나 이거예요. 그런 것을 분별하면은 그것은 큰 문제지요. 피차가 없는데 어찌 可와 不可가 있으리 오.

 

 卽十方世界가 唯一眞心이라.

 즉시방세계   유일진심  

 

 시방세계가 오직 한 진심일 뿐이다 이거죠.

시방세계가 오직 한 진심! 결국은 불교는 마음 놀이이니까요. 진심이라,

 

 全身受用하야

 전신애용

 

 온 몸으로 마음을 수용해서,

 

 無別依託이요

 무별의탁

 

 따로 의탁할 것이 없으며, 온 몸으로 그대로 마음을 수용하고 어디에 간들 전부 마음이기 때문에 그대로 온통 다 수용해요. 어디에 뭐 의탁한다. 무슨 모습으로 내가 어떻게 한다. 그것이 있을 수가 없다 이거죠. 없으며,

 

 又於示現門中에 隨意往生하야 而無障碍니

 우어시현문중   수의왕생     이무장애

 

 又於示現門中에 隨意往生

 우어시현문중   수의왕생

 

 又於示現門中(시현문중)! 이것은 내가 예를 들어서 보살이 시현(示現), 그러니까 태어나고 싶은 그런 방편으로 시현하는 거예요. 관세음보살이 문득 중생이 기도하면 떡 모습을 나타낸다. 이런 경우를 시현이라 그래요. “아이, 관세음보살이 시현했다.” 우리가 그러잖아요. 무슨 “부처님이 시현했다.” 나타남을 보인다 이 말입니다. 나타남을 보이는 것! 그것은 이제 보살이 또는 부처님이 중생제도를 위해서 그렇게 시현하는 그런 모습입니다. 죽어서 누구 뱃속으로 태어나고 그런 것이 아니 예요. 그것은 시현이라고 하지를 않습니다.

 

 隨意往生(수의왕생)

 

 마음 대로 왕생한다 이거 예요.

수의(隨意)는 뜻을 따라서. 수의왕생! 마음 대로 왕생한다. 마음 대로 왕생을 해야 오려면은 얼른 오고 가려면은 얼른 가고 그렇죠. 그래서 보살들의 시현이 바로 그렇지 않습니까? 뭐 어디에 문수 보살이 나타났다. 어디에 무슨  관세음보살이 시현했다 하는 것이 바로 그런 식이예요.

 

 그러면은 거기에 있는 것 같지마는 또 어느새 없다고요. 그래서 가고 오고 가 자유자재 되어야 돼요. 그래야 시현이지 태어나 가지고 누구 집 아들이 되어 가지고 몇 십년 자라고 그것은 시현이 아니죠. 그러면 구속되어 버리는 거죠. 시현왕생하야,

 

 而無障碍(이무장애)니

 

 장애가 없음이니

 

 故로 傳燈에 云하사대

 고   전등   운

 

 전등록에 이런 말이 있다 이겁니다.

 

 溫操尙書(온조상서)가

 

 이것은 상서라고 하는 벼슬하는 사람인데

 온조 상서가

 

 問圭峯 曰(문규봉 왈)

 

 규봉이라고 하는 스님에게 물어 가로대

 

 悟理之人(오리지인)

 

 이치(진리)를 깨달은 사람이

 

 一期壽終(일기수종)에

 

 한 때에 수명이 마침에

 

 何所依托(하소의탁)이닛고

 

 어디에 의탁하는 바입니까? 그러니까 도를 통한 사람이 이 목숨을 마치면 어디에 의탁하느냐 하고 온조 상서라는 사람이 규봉 스님에게 물었어요. 그러니까

 

 圭峯(규봉)이 曰(왈)

 

 규봉이 말하기를 

 

 一切衆生이 無不具有靈明覺性하야

 일체중생   무불구유령명각성

 

 이것이 중요한 말입니다. 일체 중생들이

 

 靈明覺性(령명각성)

 

 신령스럽고 밝고 깨달은 그런 성품을 갖추지 아니함이 없어요. 모든 중생은 전부 령명한 각성을 다 갖추고 있어서

 

 與佛無殊(여불무수)라.

 

 부처로 더불어 다름이 없어요.

부처님과 똑같다 이거죠. 부처님도 그 령명 각성을 깨달아서 그것을 그대로 수용하니까 부처라 그러고, 우리는 그것을 목표로는 하고 있지마는 아직 수용하는 것은 제대로 못하고 있어요. 묘용에 있어서는 與佛無殊(여불무수)죠. 부처님과 더불어 다름이 없으니,

 

 若能悟此性(약능오차성)이

 

 若能悟(약능오)! 만약에 능히 이 성품!

 령명각성! 이 성품을 깨닫는 것이, 이

 

 卽是法身(즉시법신)하면

 

 곧 법신인줄을 깨달을 것 같으면은

 

 本自無生(본자무생)이어니

 

 본래 저절로 생함이  없다 이거예요. 그것만, 령명각성만 깨달을 것 같으면 거기에는 생멸이 없어요. 그러니

 

 何有依託(하유의탁)리요.

 

 무슨 의탁이 있겠는가.

생멸이 없는데 뭐 죽고 자시고 할 것이 없다 이거 예요.

죽어야 어디가 서 태어나지. 태어난다는 말은 의탁한다는 말입니다. 누구! 사람이면 사람에게 의탁한다. 김씨면  김씨에게 의탁한다. 이씨면 이씨에게 의탁한다. 이런 것이 있지. 생멸이 없는 입장에서는 그런 의탁이 없다.

 

 本自無生 이어니 何有依託이리요

 본자무생        하유의탁

 

 어찌 의탁함이 있으리 오.

 

 靈明不昧하야

 령명불매

 

 신령스럽고 밝아 어둡지 아니해서

 

 了了常知(료료상지)라.

 

 요요히 항상 안다. 아주 환하게 마음의 그런 경지 속에서 그냥 그대로 항상 알고 있음이라.

 

 無所從來며 亦無所去니

 무소종래   역무소거

 

  좇아 오는 바도 없고 내가 어디서부터 오지도 않았고 또한 어디 가는 바도 없어. 亦無所去(역무소거)야. 그냥 마음 세계 속에 있어요. 마음 세계 속에 있는데 무슨 가고 오고 가 있느냐 이거죠. 그런데 그 마음이라고 하는 그런 세계를 봐야 돼요. 그것을 못 보니까 그 어떤 한계가 있고 틀이 있고 선이 있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대통령쯤 되면은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옮기고 전라도에서 경상도로 옮기고 그것이 문제가 안돼요. 그 사람은 그냥 우리나라에 있어요. 아무리 왔다 갔다 해도 우리나라에 있으니까 아무 문제가 안 된다고요.

 

 그런데 이 사람 입장에는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갔다.” 거기에 매여 있는 거죠.  그러니까 마음의 세계는 우주 삼라만상 그 전체죠. 그러니까 가고 옴이 없는 거죠. 영원하고. 영원하기 때문에 언제 태어났다 몇 살을 살았다 이것이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그런 경지에 이르지 못해 놓으니까 몇 살이다. 어디에서 죽어서 어디에서 태어났다 늘 그것이 있는 거죠. 그러나 그것은 불교의 목표는 아닌 거죠. 그래서

 

 無所從來며 亦無所去니

 무소종래   역무소거

 

 어디로부터 옴도 없고, 또 어디로 가는 것도 없음이니

 

 但以空寂으로 爲自體언정

 단이공적     위자체

 

 마음이 다만 공적 한 것으로서

 텅 비고 고요한 것으로 자체를 삼을지언정

 

 勿認色身(물인색신)하며

 

 色身(색신)! 이 육신이 색신을 오인하지 말라.

색신이 죽어서 태어나는 것, 거기에 그렇게 빠져 있고 매여 있지 말라 그거예요. 오인하지 말 것이며,

 

 以靈知(이령지)로

 

 이 자신일지언정,  신령스럽게 아는 그것으로 서 

 

 爲自心(위자심)이언정

 

 내 마음을 삼을지언정

 

 勿認妄念(물인망념)이니

 

 망념 된 생각을 오인하지 말지니,

망념 된 생각이 물결 치듯이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거기에, 그것이 내 마음의 전체라고 내 사람의 전체라고 그렇게 오인하지 말라.

 

 妄念이 若起어든

 망념   약기

 

 혹 그런 사람에게 망념 된 생각도 없겠지마는

 우리는 아직 망념이 있으니까 망념이 만약에 일어나거든

 

 都不隨之則(도불수지칙)

 

 절대로 따라가지 말라 이거예요. 절대로,

 어디 하나도 망념에 따라가지 아니할 것 같으면

 

 臨命終時에 自然業不能繫요

 임명종시   자연업불능계

 

 그러면 어떻게? 자연히 업이 능히 그 사람을 속박하지 못해요. 계(繫)자는 얽어 맬 계자예요. 저절로 얽어 매지를 못해요.  그러니까 이 사람에게는 업에 휘둘리지 않으니까 이미 죽음도 없는 거죠. 이 사람에게는 죽어도 죽음이 아니고, 태어나도 태어남이 아니 예요.

 

 우리는 죽기도 전에 업에 휘둘리는 거죠. 하루에도 몇 번 업에 휘둘리는지 몰라요. 이 업에 휘둘리고 저 업에 휘둘리고 그것이 생사고 생멸이죠. 그런데 업에 휘둘리지 않고 내 의지 대로 살면은 그것은 생사가 아니죠. 생사도 아니고 생멸도 아닙니다. 그래서 이 말이 그 말입니다. 임명 종 시에

 

 自然業不能繫요

 자연업불능계

 

 자연히 업이 능히 그 사람을 얽어 매지를 못하며

 

 雖有中陰(수유중음)이나

 

 비록 중음이 있으나

 

 所向自由(소향자유)해서

 

 중음이라는 말은 중간 음이죠. 전음(前陰)과 후음(後陰)의 중간! 전음은 이승이라면 후음은 다음 몸을 받는 것, 그러면 이승이 끝나고 다음 몸을 받는 그 중간에 49일이면 49일! 그것을 중음이라고 그래요. 또는 그 때의 정신을 중음신! 이렇게 말도 하고, 그런 중음과 후음의 중간 음이다 이 말이죠.

 

 중간의 어음! 음이란 말은 어음이라는 말인데, 중음신은 형체는 없지만 사람 노릇을 해요. 그러니까 49재를 지내면은 그것을 다 공덕을 입고, 또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을 다 읽어요. 말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고 생각을 읽어요.

그런데 우리가 말할 때 마음을 담아서 말하면은 그것도 역시 똑같이 듣는 거죠. 말소리를 듣고 아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말을 하면서 거기 마음까지 담아서 하면은 그 사람은 마음만 읽는 거죠. 중음신은 그래요.

 

 그러니까 염불을 하면은 염불도 알아듣고, 말을 하면 말을 알아듣고. 중음 자리는 이 몸이 없기 때문에 이 몸을 가졌을 때보다 훨씬 자유로워 가지고 몇 배, 몇 십 배 영리하대요. 안 그렇겠어요? 우리는 이 몸이라고 하는 이 장애물에 얽매여 가지고 정신이 자유롭지 가 못해요. 아무리 집에 가고 싶어도 가지나요?

 

 이 몸뚱이가 집까지 가는 절차가 얼마나 복잡한데요. 신발 신어야지 어디 차에 실어줘야지. 차에 실어준다고 그것이 되나 또 시간 봐 가지고 시간되면 내려 줘야지 얼마나 절차가 복잡해요. 그런데 이 마음만 가지고 있으면 어떻게? 씩 가는 거예요. 미국이고 어디고 뭐 순식간에 가는 거예요.

 

 그래서 염 속도라는 것이 있잖아요. 염속도! 생각속도가 있는 거예요. 생각속도는 저기 화성을 가는데도 오래 안 걸려요. 간다 하면 삭 가는 거죠. 집에 가는 속도다 화성에 가는 속도나 똑같아서 일초도 안 걸려요. 그것이 우리의 정신세계 거든요. 그래서 중음신 때에 아주 염불 소리도 잘 알아 듣고. 법문 소리도 잘 알아 듣고. 천도를 하면 그렇게 잘 된다는 거예요.

 

 이 몸을 가지고 있을 때는 몸이라고 하는 거기에 꺼달려 가지고, 귀에 아무리 못이 박히도록 이야기를 해도 몸이 하자는 대로 또 해야 되기 때문에 잘 안 되는 거예요. 마음은 뻔하지마는 몸이라고 하는 그런 필요 조건들이 다 있으니까 솔직하게 어떻게 잘 안되잖아요. 그런데 정신만 있으면은 마음대로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는 그런 이야기는 아니고, 중음신이 라는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그런 저런 이야기가 있는데, 비록 죽고 나서 중음의 순간이 설사 있다 하더라도

 

 所向自由(소향자유)해서

 

 자기가 가고 싶은 대로 자유롭다 이거 예요.

자기가 가고 싶은 대로 간다 이거죠. 태어나고 싶은 대로 태어나고 그렇게 태어나면 좋을 텐데. 중음신이 또 여기서 죽어 가지고 중음신의 입장에서 어디 가고싶을 때 다 가고 태어나고 싶으면 그렇게 태어나야지, 미리 죽기도전에 가고 자시고 할 것이 없잖아요.

 

 그냥 중음신으로 가면은 쉽잖아요. 어디 미국이고 유럽이고 가고 싶으면 순식간에 삭 가고 달나라도 가고 화성도 가고, 우리가 살고 있는 태양계 말고 저기 멀리 사람이 사는 그런 아주 좋은 조건의 별들이 너무 너무 많거든요. 과학적으로 내가 증명을 못해서 그렇지 아주 그런 별들이 많아요.

 

 땅도 엄청나게 넓고 그런 넓은 별자리의 세계가 많은데 이 지구 몇 십 배 몇 백배 몇 천 배 심지어 몇 만 배까지 되는 그런 큰 위성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가면은 그냥 땅 싸움 안 하고 실컷 널 직하게 차지하고 그렇게 살 수가 있죠. (ㅎㅎㅎ~)

 

 그런 세상에도 가고 싶으면 식~ 가는 거예요. 몇 초 안에 가는 거죠. 몇 초가 뭐야 순식간에 갈 수가 있다고요. 중음으로 그렇게 가면은 차비도 안 들고 표 끊을 것도 없고 여건이고 비자고 아무 소용이 없어요. 마음으로 그냥 가 버리니까요.

 

 所向自由(소향자유)해서

 

 향하는 바가 자유해서

 

 天上人間(천상인간)에

 

 천상이든 인간 세상이든

 

 隨意寄託(수의기탁)이라 하시니

 

 隨意(수의)! 뜻을 따라서. 뜻대로 마음대로 이 말입니다. 마음대로 기탁한다. 거기에 의지해서 태어난다 이거예요. 기탁이라 하시니. 그렇게 말하고 있다 이거죠. 규봉 선사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시니,

 

 此卽眞心의 身後所往者也라

 차즉진심   신후소왕자야

 

 이 진심의 신후(身後)! 이 몸 뒤에, 사후 에죠. 이 몸 뒤에 가는 곳이다. 이 몸 뒤에 가는 곳이 그렇게 가야 제대로 가는 것이고, 사실은 가고 자시고 하는 것도 아닌데 굳이 간다 온다 라고 하는 표현을 굳이 쓰자면 은, 이렇게 말할 수가 있다 이 말입니다. 중음신이 되어 가지고서 아무데나 가고 싶은 대로.

 

 그래서 여기 옛날 이야기에 보면은 사람이 죽어 가지고 이 중음신이 자유롭지 가 못하니까, 이 진심의 어떤 세계에서 노닐지를 못하고 업만 따라서 자기가 익힌 업대로만 그렇게 좇아 가다 보니까, 그것이 좋지 아니한 그런 어떤 갈래로 자꾸 가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 말하자 면은 정신의 채찍으로 못 가게 하고 그래서 결국은 다른 인연을 맺어주는, 그런 이야기들도 불교 역사에는 아주 많지요.

 

 그런데 그것이 다 자유롭지 못한 것이고 업에 휘둘려서 가는 것이고, 사실은 자기가 가고 싶은 대로 자기 의지 대로 그렇게 가야 제대로 가는 거죠. 어지간히 수행을 하고 공부를 해 놓으면은 가고 오고 하는 것이 어쩌면 상당히 자유로울 수가 있는 거죠.

 

 그리고 삶이 그런 가고 오는 것을 이야기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가고 오고 하는 그런 외형적인 것을 여기는 문제 삼지를 않는 것이고 그것이 왜 문제가 안 되는가 하면은, 마음의 세계 속에 노닐면은 그것이 가든 말든 그것은 이미 그 사람에게는 가고 오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금의 세계에 눈을 뜨면은 불상이든 코끼리상이든 원숭이상이든,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항상 금의 세계! 금의 가치로 산다. 물이라고 한다면은 물이라고 하는 본성은 젖는 것이다. 그것만 이해가 되면은 얼음이 되면 잠깐 기다리면 녹는 거예요. 녹으면 물로 쓸 수 있는 것이고,

 

 또 빨간 물이든 파란 물이든 출렁거리는 물이든 가만히 고여 있는 물이든 간에 이물 또한 젖는 성품은 동일하다 이거죠. 우리가 여자가 됐던지 남자가 됐던지 가난하든지 부자든지 간에 전부 우리는 이 마음의 작용이다. 마음 놀이다. 그렇게 알면은 이것이 아주 제일 잘 이해 하는 것입니다. 

 

 여기 이야기가 전부 우리는 현제 이렇게 차별 된 사람의 각각 모습이 차별 되고 사람이 각각 차별하고 각각 생각이 차별하지만 이 차별 된 것을 서로 피차(彼此)! 다른 모습이라고 생각하지말고 전부 마음의 한 작용들이다. 마음의 작용으로서 이런 모습도 되고 저런 모습도 되는데 거기에 피차의 어떤 다른 모습에 현혹 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각각 달라야 되고 다를수록 좋은 것입니다. 같으면 재미가 없고 달라야 좋은 거예요.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뭐 여기 꽃도 각각 다른 모습으로 꽂아야지 두개가 똑같이 이렇게 꽂혀 있으면 그것은 다 아니 예요. 그것은 못 배운 솜씨라고요. 제대로 꽃을 꼽을 줄 아는 사람은 꽃 송이 송이마다 다 다른 방향! 다른 높이로 꽂아져야 제대로 꽂히는 거죠.

 

 세상에 다른 것이 옳고 또 달라야 되니까 같으려고 하지 말아요. 같으려고 해봐야 같아지지도 않고. 그러면 다른 것은 나보다 나은데 나는 못한데 그러면 어쩌란 말이냐? 나도 저 사람하고 같아지고 싶다. 그렇게 이해 하는 것이 아니고, 전부 마음의 한 작용이다. 그렇게 알면은 아무 문제가 없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생멸이 아니 예요. 생멸(生滅)이 아니고 묘용(妙用)이다.  마음의 아주 미묘한 작용이다. 그렇게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미묘한 작용으로서 그렇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지 차별로만 보지 말고, 차별로 보면은 그것은 잘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옛날 염불에도 그런 이야기가 있어요. 전단향나무! 세계에서 제일 좋은 향나무죠. 우리가 불상을 조성할 때 그 첫 머리에 나오는 염불이 예요. 불상을 조성해서 그것을 점안할 때, 전단나무를 가지고 부처님 모습을 만들었던 보살의 모습을 만들었던 혹은 나한의 모습을 만들었던 중생의 모습을 만들었던 어떻게? 향기를 맡아보면 전부 전단향 냄새가 나요.

 

 여자의 모습을 만들어 놓았다고 거기가 서 냄새를 맡으면 여자 냄새가 나는 것이 아니고, 부처님 모습을 만들어 놓았다고 거기 가서 맡아보면 부처 냄새가 나는 것이 아니 예요. 부처의 모습을 만들었든 여자의 모습을 만들었든 중생들 모습을 만들었든 나한 모습을 만들었든 보살 모습을 만들어 놓았든, 전부 동일하게 전단향내가 난다. 참 기가 막히는 말이잖아요.

 

 그러니까 모양에 현혹되지 마라 이거죠. 모양에 현혹되지 말고 동일한 진심! 동일한 진심의 세계에서 이렇게 물결이 출렁거리고 저렇게 물결이 출렁거리고 여기는 이런 부처의 모습! 저기는 저런 부처의 모습! 전부 마음이라고 하는 어떤 부처의 모습! 마음의 한 모습 모습으로서 이렇게 그냥 나타나 있다. 이렇게 우리가 생각을 해야 그것이 제대로 어떤 행복! 평화의 어떤 길을 모색하는 것이지,

 

 이것을 어떻게 하더라도 이 차별을 가지고 해결 하려고 하면은, 차별을 인정하고 들어가면 이것은 해결책이 없습니다. 앞에 서두에서도 말씀 드렸지마는 두 사람 관계도 마찬 가지예요. 한 집안 식구들 관계도 똑 같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들의 어떤 특색이고 이 사람은 이 사람대로의 특색이고 그것도 한 마음의 모습! 저것도 한 마음의 모습이고 그러니 전부 한 마음의 모습이다. 전부 인간이다. 그렇게 알아도 좋고 전부 인간이다 라고 하는 그런 어떤 가치 문제! 전부 마음이라고 하는 그런 가치 기준! 전부 부처라고 하는 그런 가치 기준을 가지고 보면은 아무 상관없는 거예요.

 

 전단나무를 가지고 보살 모양을 만들었던지 부처 모양을 만들었던지, 전단나무니까 다 전단향기가 난다 이거 예요. 참 마음을 가지고 여러분의 여러 가지 모습을 지금 만들어 놓았는데, 다 참 마음의 향기가 나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가 현상에, 차별된 어떤 모습에 거기에 너무 속고 거기에 휘둘리고 거기에 그만 빠지고, 지금 우리가 전부 거기에 속아 가지고 이것이 얼른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그것이 잘 안 되니까 기어이 뭐 칼을 대어 가지고 뜯어 고쳐서라도 탤런트 얼굴 모양이라도 좀 만들려고 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것은 외모에 너무 팔려서 사니까 그렇게 돼요.

 

 우리 불교 공부는 참 좋은 것이 잘 공부를 해보면요, 그런 어떤 밖으로 드러난 차별상에 팔리지 않도록 거기에 현혹되지 않고 사는 길이, 얼마든지 여기에 나와 있어요. 늙고 젊고도 역시 마찬가지고 잘나고 못나고도 역시 마찬가지예요. 솔직하게 잘나고 못나고 하는 평가도 본래 없는 거죠. 그 기준이란 없는 거예요.

 

 여기까지가 진심직설을 이야기 하면서, 이 진심직설을 마치면서 결론이 잘 나왔는데 우리의 차별된 모습을 차별로 보지말고, 진심의 한 묘한 작용으로 그렇게 보아라. 전단나무를 가지고 어떤 모습을 만들어 놓았던지 동일하게 전단향기가 난다.

 

 설사 생선을 조각해 놓았다고 하더라도 거기서는 생선 냄새가 나지 않고, 전단향기가 나는 사실을 알아야 된다 이겁니다. 전단나무를 가지고 생선을 조각해 놓았다고 생선의 냄새(비린내)가 전혀 나지 않는다고요. 그저 전단향기만 나는 거예요.

 

 그런데 왜 모습에 우리가 속을 것이 있느냐 이것이죠. 참 속아서 산 것이 안타깝죠. 그리고 참 속아 봤으니 망정이지 앞으로는 하이 튼 안 속아 야죠. 가능하면은 절대 모습에 속지 말고, 전부 이 부처의 마음! 우리의 진심 그 주체! 이것으로 서 우리가 살아가는 진리 이것만이 삶의 길이다 라고 하는 것을 꼭 이해하기를 바란다 하는 그런 뜻에서,

 

 여기 보조 스님께서 진심직설 끝부분에 진심을 깨달은 사람은 어디로 가느냐 라고 하는, 그런 질문을 던져 놓고 가는 것이 아니다 이거 예요. 가고 오고 한다면 그것은 깨달은 사람에게는 있을 수 없다 하는 그런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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