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님
2011.12.17 14:09

육조단경 강의 61 - 무비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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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1 강 - 機緣品- 15

 

 
   行思禪師는 姓이 劉氏니 吉州安城人也라 聞曹溪法席이 盛化하고 徑來參禮하고 遂問曰, 當何所務라야 不落階級이니이까 師曰, 汝曾作什?來오 曰, 聖諦도 亦不爲이니다 師曰, 落何階級고 曰, 聖諦도 尙不爲어늘 何階級之有리이까 師甚器之하야 令思首衆하시니라

 
  一日은 師謂曰, 汝當分化一方하야 無令斷絶케하라하시니 思己得法이라 遂回吉州靑原山하야 弘法紹化하니라

 
*****************************************

 
   육조스님의 제자. 한분 한분이 다 중요합니다마는, 그 밑에 제자들. 제자의 제자들. 그 맥을 이어가고 그 이은 맥들의 후손이 얼마나 번성 했는가? 이런 것을 가지고 따져볼 때, 이 行思(행사)스님을 최고로 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전해진 法脈(법맥)을 중심으로 할 때는, 그 한 장 넘겨서 있는 懷讓禪師(회양선사). 회양선사를 또 제일로 치기도 하고 그래요.


   南岳懷讓(남악회양)이라고 하고, 靑原行思(청원행사)라고 그러는데 “五家七宗(오가칠종)”할 때, 그 소위 오가 가운데 남악회양 쪽으로 두 파가 나눠지고, 그 다음에 청운행사 쪽으로 세 파가 나눠지고 그래요. 그래서 “兩大山脈(양대산맥)이다.” 육조스님 밑에 양대 산맥을 청원행사. 이 행사스님과 남악스님이다. 그렇게 합니다.

 
   그 외에 많은 제자들이 있었지만, 후손이 번성하지를 못 했어요. 후손이 번성해야 그것이 역사에 기록이 되거든요. 역사에 쭉 기록이 되고, “나는 누구의 맥을 이었다.” “누구의 맥을 이었다.” 이렇게 하는데, 소위 이 두 분이 육조스님의 아주 큰 양대 산맥으로 역사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청원행사.

 
   行思禪師(행사선사)는 姓(성)이 劉氏(류씨)다→ 행사선사는 성이 유씨다. 吉州安城人也(길주안성인야)라→ 길주 안성 사람이다. 聞曹溪法席(문조계법석)이 盛化(성화)하고→ 曹溪法席. 曹溪는 육조스님을 말 하는 것이지요. 조계산이니까요. 송광사도 조계산이지요? 여기가 중국의 조계산 하고 그 지형이 비슷하다고 그런 말을 합니다.

 
   “法席” 하면 육조스님이 법을 펴는 그 자리가 盛化라. 수백 명이 끓고 수천 명. 많을 때는 3000명까지 사람들이 그 총림에 들끓어요. 사람도 많지만 절도 크고요. 지금도 중국 절 가보면 대단히 커요. 어마어마하게 크다고요. 그렇게 많이 부서지고 했는데도... 보통 “큰절”하면 해인사 같은 것. 한 댓 개 얹어 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큰 절들이 있습니다.

 
   “盛化”라면 육조스님 밑에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고, 거기에 도를 통한 사람도 많고, 배움을 청하는 사람도 많고 번성하다 이것이지요. 그런 소리를 듣고는 이 행사스님이  徑來參禮(경래참례)라→ 곧 바로 그 소리 듣자마자  ‘나도 얼른 거기 가야지’ 하고는 얼른 와서 參禮를. 예배를 했지요. 그리고 遂問曰(수문왈)→ 물어 가로되

 
   當何所務(당하소무)하야 不落階級(불락계급)이니이까→ 나 이거 뭐 돌아가고 천천히 닦아서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는 것. 귀찮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아주 직행으로 그냥. 한 방에 끝내는 그런 도리가 없습니까? 그렇게 물은 겁니다. 當何所務하야 마땅히 무슨 일을 해야 계급에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이니 무슨 십팔주니 또는 십신 십주 십행 십회향 십지 등각 묘각이니 하는, 중생에서 부처 되어 가는데 웬 놈의 그런 단계가 그렇게 많으냐? 그거하고 관계없이 되는 소식이 없겠느냐? 사실 좀 어느 정도 알고 하는 소리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뒤에 돈점편에 나옵니다만, 돈오돈수 하고 연결이 되는 것이지요.

 
   부처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계급의 차제가 있는 것이 아니에요. 차제가 본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단계까지 되고, 그 다음에 어느 단계 되고, 이렇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계급이 없어요. 그래서 선사들의 법문을 보면, “無漸次佛(무점차불)이라.” 이 집안에 점 점 점 점. 순서대로 되어가는 그런 부처는 없다. 또 닦아서 증득한다. 닦고 닦아서 차츰차츰 되는 그런 부처도 없다. 막 바로 부처다. 처음부터 부처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처음부터 부처인줄 아는 것. 그저 그것만 문제일 뿐이다. 처음부터 본래로 부처라는 사실을 아느냐 모르느냐 하는 것. 그것뿐이지 그 외에는 단계니 계급이니 하는 것이 없다. 그래서 敎學(교학)에서는 뭐니 뭐니 해도 수많은 근기의 사람들을 건지려다 보니까, 下根機(하근기)들을 자꾸 끌어 들여야 되니까요. 그 사람들 수준에 맞는 소리를 할 수 밖에 없지요.

 
  지금이야 옛날 경전보다 방편이 더 많지요. 온갖 방편이 다 있지요. “뭐 하면 좋다.” “뭐 하면 좋다.” “뭐 하면 좋다.” “좋다.” 하니까 그것이 달콤해서 일단 절에 발을 들여놓고 불교에 입문을 하지요? 그래가지고 차츰차츰 다니다 보니까 내가 좋아서 갔던 것보다 더 좋은 것이 눈에 띄거든요? 내가 좋아서 갔는데 아, 이 보다 더 좋은 것이 눈에 띈다고요.

 
   “아이. 불교가 이것만이 아니구나!”해서 좀 더 안목을 높여가고. 높여가고. 높여가고. 이렇게 해서 제 자리에 들어서는 길이 필요하지요. 근기 따라서. 또 그 사람의 상황 따라서... 그런데 禪家(선가)에서는 보면 언제 그러고 있느냐 이겁니다. 당장에 아주 직설로. 불교의 핵심을 이야기를 해서 알아들으면 다행이고... 그러면 건지고요. 못 알아들으면 말고요. 이런 식이지요. 그것이 조사들의 성질에는 맞는 것입니다.

 
  시국이 하수상 한데 언제 그 사람이 절에 다시 올지, 불교를 접할지 안접할지 알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조사들은 혹 일생에 한 개나 아니면 반개나 건지면 건지고 아니면 말고, 이런 표현도 있고, 또 어떤 그림에 보면 위에는 어미 사자가 있고, 낭떠러지 저~ 밑에 새끼 사자가 기어 올라오는 그림을 볼 수 있는데요. 그것도 선가의 중생 제도하는 기본 틀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사자는 모르긴 해도 새끼를 낳아서, 낭떠러지에다 집어 던져서 살면 새끼로 거둬주고, 죽으면 버려버린다는 그런 식으로 선가에서는 가장 큰 법문. 최상의 법문. 더 나아갈 데 없는 법문을 딱. 해줘서, 다행히 거기에 알아 차리면 건지고, 못 알아차리면 알아차릴 때 까지 궁구 하든지 아니면 가든지 말든지, 내버려 두는 겁니다.

 
  임제스님은 황벽스님 찾아 갔을 때, “어떤 것이 진짜 부처님 법입니까?” “어떤 것이 불법입니까?” 불법에 대해서 이러고저러고 너무 말이 많은데 진짜 불법은 뭡니까? 如何是佛法(여하시불법) 的的大義(적적대의)? “어떤 것이 진짜 불법입니까?”하니까 다짜고짜 그냥 스무 방망이를 주장자로 사정없이 후려쳤지요. 그것이 최상의 법문이지요. 황벽스님으로서는 그 이상의 법문이 없는 거예요. 화엄경보다도 더 큰 법문 이예요.

 
   최소한도 황벽스님의 소신은 그러니까요. 자기 소신대로 일러준 것이지요. 그것을 제대로 알아들으면 다행히 하나 건지는 것이고, 못 알아들으면 다리가 부러지든지 머리가 깨지든지, 깨치지 못한 인간은 인간도 아니다. 이래 버리는 거예요. 선가에서는... 심한 표현은 그런 말이 있어요. “천천만만을 때려죽인들 무슨 죄가 있겠는가?”  불법 모르는 인간은 천 명이고 만 명이고 때려죽여도 죄도 없다 이겁니다.

 
  불법도 모르는 인간은 인간도 아니다 이것이지요. 그런 정도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이참, 무지막지 하지요 禪師(선사)들... 그러나 그 말 속에는 아주 참 무서운, 아주 준엄한 교훈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는 소리지, 그렇다고 그 스님들이 무지막지하게 누구 사람하나 팬 적 없어요. 한 번도 몽둥이 한 번 들어 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천천만만을 때려죽여도 아무 죄가 없다.”고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요.

 
   禪家(선가)에 아니, 불교 전체에 보면 참, 재미있는 내용도 많고 공부할 자료가 많아요. 왜 인고 하니, 어쨌든 취미가 유별나긴 하지요. 똑 같은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으로 살기를 포기하고, 그 소중한 한 몸 집어 던져가지고 道(도)가 뭔지, 그 도에다가 자기 일생을 걸거든요. 그런데 거기에 걸 수 있는 그 본래의 素養(소양)은 처음부터 달라요. 보통 우리 같은 사람이 아니에요. 처음부터 특출한 사람이 예요 인생이... 그런 뛰어난 사람이 또 그렇게 자기 인생을 일생동안 다 던져서 매진했다고 생각해 봐요. 삶이든 먹는 것이든 인간으로서의 삶은 완전 포기하고...

 
   여러분들 하루만 인간으로 살기를 포기하고, 한 번 하루만 살아 봐요. 하루만 살아 보시라고요. 하루만... 사람노릇 하루만 포기하고 뭐 한 번 해 봐요. 못 이러는가... 이럴 수 있어요. 수십 년을 포기하고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래 가지고 이뤄놓은 한 마디 한 마디입니다. 법문의 하나하나라고요. 그러니까 천천만만에 천 명이면 천명, 만 명이면 만 명 때려죽여도 아무 죄가 없다는 소리...

 
  참으로 값진 자기 일생 삶을 포기하고 닦고 닦은 결과. 피나는 혈투 끝에 얻어낸 그런 결과의 말씀입니다. 그냥 한 소리가 아닙니다 그것이... 그야말로 수십 년의 혈투라고요. 한 순간도 마음 놓지 않고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한 순간도...

 
   오죽하면 “死關(사관)”이라 합니까? 내가 여기서 죽어서 나오지 그냥 안 나온다 이겁니다. 道通(도통)해도 안 나온다 이겁니다. 죽어서 나온다. 그런 식으로 각오를 철저히 한 것입니다. 대단한 집안입니다 사실은... 그런 전통이다 보니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의 부정적인 면이 있지만, 또 전통을 면면히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다고요. 이루고 못 이루고는 고사하고 어쨌든 그 정신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불교가 전승이 되고 자꾸 퍼져가는 것이지요. 그런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인생을 다 던져서 수십 년의 혈투 끝에 얻어낸 깨달음이다 보니까, 지금 이 밝은 세상에 비로소 인정을 받잖아요. 과학이 이렇게 발달 했는데 불교의 가르침을 검증 해보면 하나도 틀린 것이 없고 어쩌면 너무 과학보다 앞서가는 이론이거든요. 이론적으로도 그렇다고요.

 
   오늘날 서양에서는 선불교가 아주 휩쓸고 있을 정도지요. 이 시대의 최고의 聖者(성자). 두 사람 꼽으라면 스님들 두 사람 딱 나와요. 달라이라마 하고. 틱 낫한. 월남 스님하고. 월남에서 쫓겨났지만 프랑스에 가서 아주 대성자 노릇을 하잖아요. 대단 하지요. 두 분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어요. 그 외에도 다른 이들도 있지만... 그 전통이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그런 전통을 이어받은 집안이다 보니까, 오늘날 밝은 세상이다 되니까 더 공인받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그런 겁니다 그것이...

 
   그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에요. 물론 개인 인격도 인격이지만, 단순한 개인 인격 가지고 그렇게 될 수도 없어요. 不落階級(불락계급)이라. 계급에 떨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수행이 아니라, 정말 혈투. 수십 년의 혈투를 했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사람이라고 하는 것. 또 부처라고 하는 것. 그 한 자리에 머물러 있고, 그 밖에 달리 다른 것이 아니지요.

 
   다른 어떤 그 계급이 있어서 한 단계 올라가고, 두 단계 올라가고, 나는 그런 거 못 하겠다 이겁니다. 또 보니까 그런 것 같지도 않고... 이 일이 그런 것이 아니다 이겁니다. “어느 정도 됐다.” 됐으면 됐고, 아니면 아니고 그렇지, 어느 단계 올라갔으니까 그 다음에 몇 단계 더 올라가고, 몇 단계 더 올라가고, 그거는 근기에 맞추어서 설하는 방편에 불과하다고 알면 됩니다. 그러니까 이런 말이 나오는 겁니다. 무슨 일을 해야, 일이라고 뭐겠어요? 어떤 수행을 해야 계급에 떨어지지 않고, 막 바로 부처가 되는 도리가 있겠나?

 
   師曰(사왈)→ 스님이 말하기를 汝曾作什?來(여증작십마래)오→ 그대는 일찍이 뭘 하고 살았느냐? 뭐 하다가 왔느냐? 이것이지요. 이 스님이 육조스님의 법석이 “盛化”하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徑來參禮(경래참례)라. 곧 바로 머뭇거림 없이, 일각도 머뭇거리지 아니하고 곧 바로 온 그런 성질이거든요. 그러니까 자기 공부가 상당히 되어 있는 이거든요. 그래서

 
   曰(왈)→ 대답이 聖諦(성제)도 亦不爲(역부위)이니다 → 聖諦. 성스러운 진리도 나는 어떻게 해 본 적이 없습니다. 亦不爲이니다. 聖諦는 교리적인 낱말로서는 아주 고급스런 낱말이거든요. 四聖諦(사성제)그러잖아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성스러운 진리도 나는 한 적이 없는데 뭘 했다는 말입니까? 그 좋은 것도 나는 한 적이 없는데 무엇을 했겠느냐? 이런 식으로 대답을 했습니다.

 
   師曰(사왈)→ 육조스님이 한 번 더 떠보는 거예요.

落何階級(낙하계급)고→ 어떤 계급에 떨어졌느냐? 그건 몇 단계로 올라와 있느냐? 네가 십신이냐 십주냐 십행이냐 십회향이냐 아니면 등각 보살이냐 묘각 보살이냐 십지보살이냐 일지보살이냐? 은근히 그 소리 한 번 해보는 거예요. 

 
   曰(왈) 聖諦(성제)도 尙不爲(상불위)어늘→ 성스러운 진리. 그 일도 오히려 하지 않았거늘,

何階級之有(하계급지유)리요→ 무슨 階級이 있겠소? 나에게 무슨 계급이 있겠습니까? 자기가 그 정도로 돼있기 때문에 묻는 말이 當何所務(당하소무)하야 不落階級(불락계급)이리까 어떤 일을 해야, 어떤 수행을 해야 계급에 떨어지지 아니하겠습니까? 이렇게 물은 겁니다. 내용이 아주 일관성이 있어요. 묻는 것과 대답하고 주고받는 내용이... 무슨 계급이 있겠는가? 성스러운 진리도 나는 한 적이 없고, 그것도 하찮게 여겨버리는 사람인데 무슨 계급이 있겠습니까?

 
   師甚器之(사심기지)하야→ 육조스님이 매우 아주 상당한 그릇으로 여겼다. “器之”하면 그릇으로 여기다. 그런 뜻입니다. 之자= 그릇으로 여기다. 매우 그릇으로 여겨서 令思首衆(영사수중)하다→ 思.= 行思(행사)로 하여금 대중들의 우두머리가 되게 하였다. 대중들을 지도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깨쳐서 와서는 인가만 받은 것이지요. 그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 이들이 많습니다. 영가스님도 뒤에 나오지만 깨치고 와서 인가만 받고 그러지요. 한 순간에 깨달은 이들도 물론 있습니다만, 이 행사스님이 뒤에 오종 같은 종에 삼종이나 자기 밑에 후손이 아주 크게 번성을 했습니다. 令思首衆(영사수중)하시니라

 
   一日(일일)은 師謂曰(사위왈)→ 하루는 육조스님이 일러 가로되, 汝當分化一方(여당분화일방)하야→ 그대는 마땅히 한 지방을 나누어서 교화하라. 한 지방을 네가 맡아서 교화하라. 이겁니다. 교화해서

無令斷絶(무령단절)케하라→ 끊어지지 않게 하라. 정말 안 끊어졌어요. 이분의 제자들이 계속 면면히 이어져서 끊어지지 아니했습니다.

 
   지금 특히 우리나라는 임제종 계통이고, 일본은 曹洞宗(조동종). 혹시 “영평사”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어요. 영평사 같은 아주 큰 선종의 대표 사찰이 조동종인데, 조동종이 바로 이 청원행사스님의 후손이고, 우리나라는 임제종 후손인데 그것은 바로 밑에 내려오면 남악회양 선사의 후손으로 이어져있습니다. 일본에도 임제종이 있어요. 남악회양 스님의 후손이 있지만, 거의 일본 “禪宗(선종)”하면 조동종 계통입니다. 청원행사스님의 후손들 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 지금까지 令無斷絶(영무단절)입니다.

 
   思己得法(사이득법)이라→ 行思가 이미 법을 얻었음이라, 遂回吉州靑原山(수회길주청원산)하야→ 길주에 있는 청원 산으로 돌아가서

弘法紹化(홍법소화)하니라→ “靑原行思(청원행사)”그러거든요. 본래 행사인데 청원산에 가서 교화를 했으니까 그 산 이름이 그냥 호 가됐어요. 대개 그렇습니다. 청원산이 호가 되었는데 길주 청원산으로 돌아가서 법을 크게 넓히고 교화를 이어갔다.

 
   앞에서(60강) 無上大涅槃(무상대열반) 圓明常寂照(원명상적조). 그것도 육조단경에서 제일 좋은 게송이고, 또 육조스님의 양대 산맥 중의 한 분인 청원행사스님. 이분은 이미 깨닫고 나서 와서 이야기를 했는데, 여기에서 우리가 마음에 새겨둬야 할 것은, 계급이 없다는 사실. 경전에서 계급을 많이 이야기한 것.

 
   “地位漸次(지위점차)” 라고도 하고, “보살계위” “수행계위”라고도 하는 그런 것 들은 근기에 맞추어서 말한 방편. 방편의 설이라고 이해를 해야 됩니다. “어느 정도” “어떤 단계” “어떤 단계”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고 본래. 인간의 본성을 가리켜서 “부처다.” 라고 보는 것이지요. 그런 내용들이 청원행사스님의 가르침. 대화 속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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