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님
2011.12.17 14:19

육조단경 강의 63 - 무비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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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63 강 - 機緣品- 17

 

 
   永嘉玄覺禪師는 溫州戴氏子라 少習經論하야 精天台止觀法門이라가 因看維摩經하야 發明心地러니 偶師弟子玄策이 相訪하야 與其劇談에 出言이 暗合諸祖어늘 策이 云, 仁者得法師誰오 曰, 我聽方等經論은 各有師承이나 後於維摩經에 悟佛心宗하고는 未有證明者로라 策이 云, 威音王佛以前은 卽得이어니와 威音王佛以後에 無師自悟는 盡是天然外道니라 曰, 願仁者- 爲我證據하라 策이 云, 我言은 輕이라 曹溪에 有六祖大師하야 四方이 雲集하니 ?是受法者라 若去則, 與偕行하리라

 
   覺이 遂同策來?하야 繞師三?하고 振錫而立한대 師曰, 夫沙門者는 具三千威儀와 八萬細行이어늘 大德은 自何方而來완대 生大我慢고 覺이 曰, 生死事大하고 無常이 迅速이니이다 師曰, 何不體取無生하고 了無速乎아 曰, 體卽無生이요 了本無速이니이다 師曰, 如是如是하다

 
   玄覺이 方具威儀禮拜하고 須?告辭어늘 師曰, 返太速乎인저 曰, 本自非動이어니 豈有速耶이까 師曰, 誰知非動고 曰, 仁者가 自生分別이니이다 師曰, 汝甚得無生之意로다 曰, 無生이 豈有意耶이까 師曰, 無意면 誰當分別고 曰, 分別이 亦非意니이다 師曰, 善哉라 少留一宿하라하시니 時謂一宿覺이러라 後에 著證道歌하야 盛行于世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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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가현각선사! 이 분은 제가 아주 좋아하고 또 존경하는 분 중의 한 분입니다. 왜 그런가 하니 永嘉(영가) 證道歌(증도가). 禪詩(선시)의 白眉(백미)라고 알려져 있는 그 “증도가”의 저자거든요. 이 분은 일찍이 어머니를 오랫동안 모시고 살기도 했고, 혼자 경문을 많이 봤어요.

 
   유마경을 보다가 깨달았어요. 경을 보다가 깨달았습니다. 꼭 앉아서 참선을 해야 깨닫는 것은 아니지요. 경을 보다가 깨달아서 육조스님을 만나서 印可(인가)를 받고, 한 선지식에게 가서 자기가 깨달은 바를 인가를 받는다고 하는 사실은, 천하에 그 보다 더 값지고 소중한 일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 분은 인가 받은 그 날 바로 떠나려고 하는 거예요.

 
   방에 들어가지도 않고 그냥 마당에서서 인가 받고 가려는 거예요. 성질도 참 상당히 급하고 또 그 만치 급한 일이 있었는지... 그 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어요? 인가 받고 육조스님이 계시던 조계산을 걸망을 지고, 내려오면서 그 환희에 넘치는 기분으로 悟道頌(오도송)을 읊었는데, 다른 사람은 오도송이 5언 절구. 7언 절구. 많아봐야 五言律(오언율). 七言律(칠언율) 정도인데 이 스님은 칠언율로 계산을 해도, 어마어마하게 많아요.

 
   그야말로 한 권의 작은 경이 될 정도로 아주 멋진 證道歌(증도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오도송이지요. 오도송을 써서 지금까지도 아주 선시의 백미라고 높이 추앙을 받고, 일본 사람들은 그것을 “대승결의 경”이라. 거기다가 “經(경)”이라고 이름을 붙여버려요. 조사스님들의 글을 “경”이라고 하는 것은 육조 혜능스님 뿐이에요.

 
   우리나라에서도 “영가증도가”를 아주 좋아하고 애송하지만, “경”이라고 까지는 아니하는데 일본 사람들은 그것을 “경”이라고 그래요. 워낙 知見(지견)이 높고 뛰어난  가르침이기 때문에, “그 경자를 잘못 붙였다.” 고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옛날에 은혜사 강원에 있으면서, 그때 교과가 4집인가? 배우면서, 교과 외에 이것을 여덟 구 씩. 영가 증도가를 여덟 구 씩 칠판에 써 주는 것을, 그때는 교재도 없고요. 여덟 구 씩 써 주면 그것을 받아 적어서, 하루에 외우고 그때 그렇게 했어요. 영가스님에 대해서는 緇門(치문)에 물론 나옵니다만, 치문에 나온 내용도 아주 좋은 명문을 소개를 했지요. 특히 그때 증도가를 공부하면서, 영가스님에 대해서 깊이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永嘉玄覺禪師(영가현각선사)는 溫州戴氏子(온주대씨자)→ 영가현각선사는 온주 대씨의 아들이다.

少習經論(소습경론)하야→ 젊어서, 어려서는 經과 論을 익혀서 精天台止觀法門(정천태지관법문)이라→ 天台止觀法門에 정독했다. 아주 깊이 공부했다는 것입니다.

 
   “天台止觀”하면 법화경을 중심으로 한 불교사상 이거든요. 법화경을 “天台智禪師(천태지선사).” 천태스님이 천태 산에서 법화경을 열심히 공부를 해가지고, “天台止觀(천태지관)” 또는 “摩詞止觀(마하지관)” 또 “法華文句(법화문구)” “法華玄義(법화현의)” 이렇게 해서 “法華三大部(법화삼대부)”이렇게 해요. 마하지관 · 법화문구 · 법화현의. 이렇게 해서 한 가지만 해도 20권씩 되는가? 그래요. 그런 아주 방대한 저서를 법화경 한 권을 통해서 그런 저서를 남겼습니다. 천태스님이...

 
  그 스님의 법화경을 중심으로 한 불교사상 정리를 “天台學(천태학)”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날 “천태학”이 하나의 학문으로 그 후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법화학”이라고는 아니해요. 아예 “천태학”이라 그러지요. 그런데 화엄경은 “화엄학”이라고 합니다. 그 중간학은 “중간학”그래요. 천태학은 정통계승은 중국에도 물론 있었겠지만, 일본에서 그것을 이어 받아서 일본의 천태학은 아주 알아줍니다. 천태사에 일본 사람들이 절을 보수를 하고, 탑을 세우고 굉장한 교류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천태종”이라는 것이 있는데 우리나라의 천태종은 脈(맥)이 없고, 기껏해야 역사가 100년도 안됩니다. 우리나라 천태종은요. 그러나 그 뜻은 법화경의 사상. 또는 법화경을 정리한 천태스님의 사상에다가 그 뜻을 두고 “천태종”이라고 이름을 붙여서, 처음에는 사실은 기도만 했지요. 기도만 하다가 가만히 보니까기도만할 일이 아니라, 어디 명함을 내 놓을 수 없어 놓으니까요.

 
   그 천태종의 宗旨(종지)라든지, 그 과거의 천태학에 대해서 어떤 것이 있었나? 이것을 학자들을 시켜서 정리를 한 거예요. 천태종의 종지. 천태종의 역사. 이런 것을 쭉 정리해서 근래에 법화경도 잘 번역해서 내고, “天台止觀(천태지관)”이라든지, 또 “法華文句(법화문구)”라든지 이런 것들도 학자들을 통해서 번역해 내고, 이론적인 정리를 상당히 많이 해나가고 있지요. 그래도 워낙 처음부터 그냥 “관세음보살 기도” 일변도로 그렇게 나가던 종파라서 크게 깊은 공부는 아직은 못 보겠더라고요. 이제 겨우 법화경 번역을 해낼 정도이고요.

 
   제가 서울에 관문사 주지. 삼광사 주지하던 사람인데요. 삼광사 주지할 때 자주 만나서, 서울에 무슨 행사 있을 때 또 그 사람을 잘 만나요. 그래서 제가 그 사람보고 그랬어요. 본부가 서울에 관문사거든요. 관문사의 큰 법당에서 한번 내가 법화경 강의를 했으면 좋겠다고 그랬더니, 모르겠어요. 저희들끼리 가서 연구를 하는지 어쩐지 하여튼 얼마전에 그런 말을 한번 해 놨어요. 그런 아량이 있을라나 모르지요.

 
   이 영가스님이 일찌기 “台止觀法門(천태지관법문)”에 대해서 깊이 공부를 했더라. 그러다가 주로 경전을 많이 涉獵(섭렵)을 하니까 因看維摩經(인간유마경)하야→ 유마경 보기를 인해서. 유마경을 보다가

發明心地(발명심지)라→ 마음이 환히 밝아졌다. 이 天台止觀(천태지관)하고 유마경하고는 전혀 별개예요 사실은...

 
   물론 경전이라는 입장에서는 다를바 없지만, 정말 불법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경전을 늘 보다 보니까, 경전을 통해서 마음이 밝아진.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이지요. 유마경에서 심지를 밝혔습니다.

 
   偶師弟子玄策(우사제자현책)이→ 우연히 육조스님의 제자. 현책이 相訪(상방)하야→ 거기에 방문을 해서, 현각 영가스님 계시는데 방문하게 돼가지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與其劇談(여기극담)에→ 그로 더불어 劇談. “劇談”이라는 말은 아주 깊은 도리를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어디 살았느냐? 대중이 몇이냐? 어떻게 지냈느냐? 이런 식의 시시한 소리 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지극한 도리.

 
   불교에 대한 지극한 도리를 이야기를 하는데. 이 “玄策”이라는 이는 이미 깨달은 분입니다.

出言(출언)이→ 말을 하는데,

暗合諸祖(암합제조)어늘→ 모든 조사스님들의 어떤 그 정신과 가만히 맞아 떨어져요. “暗合”이라. 가만히 맞아 떨어지거늘, 그 策(책)이→ 현책이 육조스님의 제자지요. 틀림없이 깨달은 분인데 그래서 물은 겁니다.

 
   云(운) 仁者(인자)는 得法師誰(득법사수)오→ 그대는 법을 얻은 스승이 누굽니까? 라고 물었어요. 

曰(왈)→ 영가스님이 말하기를

我聽方等經論(아청방등경론)은 各有師承(각유사승)이나→ 내가 듣건대 方等經論. 방등부 경론이지요. “方等經論”을 공부할 때는. 이 말입니다.

 
   “方等經”을 공부할 때는 스승이 있었지만,

後於維摩經(후어유마경)에→ 뒤에 維摩經을 볼 때는,

悟佛心宗(오불심종)하고는→ 부처님의 心宗. 마음의 종지를 깨닫고는,

未有證明者(미유증명자)로라→ 내 깨달음을 證明하는 사람이 아직 없습니다.

 
   策(책)이 云(운)→ 현책이 말하기를

威音王佛以前(위음왕불이전)은 卽得(즉득)이어니와→ 威音王= 최초의 부처님이라 그래요. 최초의 부처님이전에는 그것이 가능하다 이겁니다. 누가 인가를 아니해줘도 가능하지만, 威音王佛以後(위음왕불이후)에→ 威音王佛以後 에는 無師自悟(무사자오)는 盡是天然外道(진시천연외도)니라→ 아무리 자기가 높이 깨달았다 하더라도, 이것은 天然外道라고 한다. 無師自悟(무사자오)= 스승 없이 스스로 깨달았다. 깨달았는데 자기의 그 깨달음을 인정해 주면 그것이 스승이 되는 것이지요. 그것을 이런 식으로 표현합니다.

 
   스승 없이 스스로 깨닫는 것은 盡是天然外道(진시천연외도)라. 저절로 생긴 외도라. 이게 어디 종파가 있고 인도에 육사외도들처럼 그런 조직적인 외도는 아니고, “天然外道”라. 자연히 생긴 외도다. 사실은 외도는 아니지요.  깨달았으면 되지요. 그렇지만 인가를 받아야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을 “天然外道”라고 한다는 것이지요.

 
   이 현책스님하고 영가스님이 이 후에 둘이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현책스님은 깊은 산을 좋아해서 산에 살고, 영가스님은 시내에 살았나 봐요. 市內(시내)에 살았는데 현책스님이 영가스님에게 “시내에 사람들이 아귀다툼을 많이 하는데 뭐 그렇게 시내에 사느냐? 산에 와서 이렇게 사는 것이 어떠냐?”고 하는 아주 유명한 편지가 있습니다.

 
   “청송백서에 명월이 자생하고” 글이 아주 시적으로 잘 되어 있어요. 푸른 소나무 푸른 못에 밝은 달이 저절로 솟아오르고, 새가 과일을 물어오고 뭐 하는 자연의 운치를 노래한 편지를 하면서 언제 한 번쯤 오는 것이 어떠냐? 세상은 쟁쟁하여 경쟁이나 하나니, 세상은 서로들 다투고 다퉈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서로 경쟁한다. “심기미달”이라. 그런 것 보고 있으면 마음이 별로 편치가 않다. 그러므로 원컨대 내가 사는 이 산중에 한번 오기를 바란다. 이렇게 아주 간단해요.

 
   나중에 언제 그거 소개해야 되겠네요. 그런 편지를 한 장 보냈는데 이 영가스님은 아주 장문의 편지를 보내서 회답을 해요. 보내면서, 산이 뾰족뾰족한 것은 다투는 것이 아니냐? 어찌 세상 사람이 서로 人我(인아)를 다투는 것만 다투는 것이냐? 나무가 높고 낮은 것도 다투는 것이고, 바위가 높고 낮은 것도 어떻게 보면 다투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현책스님에게 반기를 드는 편지를 아주 명문이지요.

 
   그렇게 해서 보내는 글이 “치문”이라는 책에 “사미과” 오르기 전에 스님이 되고, 1년차 공부하는 그 “치문”이라는 책에 두 분의 편지가 나란히 실려 있습니다. 아주 유명한 편지, 아주 명문으로 알아줍니다. “天然外道(천연외도)”하니까

 
   曰, 願仁者(왈, 원인자)는→ 원컨대 그대는,

爲我證據(위아증거)하라→ 證據. 나를 위해서 나를 증명 해달라 그랬어요. 그러니까 策(책)이 云(운)→ 현책이 말하기를 我言(아언)은 輕(경)이라→ 내 말은 가볍다. 아무래도 나도 깨달은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 보다는,

 
   曹溪(조계)에 有六祖大師(유육조대사)하야→ 조계산에 육조스님이 있다. 조계에 육조대사가 있어서, 四方(四方)에서 雲集(운집)이라→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냥 구름처럼 몰려드니, ?是受法者(병시수법자)라→ 모두들 법을 그 분에게서 받는 사람들이다.

 
   若去則, 與偕行(약거즉, 여해행)하리라→ 만약에 가겠다고 하면, 갈 의사가 있으면 “내가 같이 가주겠다.” 이랬어요. “같이 가주겠다.” 그러니까 覺(각)이→ 현각이

遂同策來?(수동책래참)이라→ 드디어 현책하고 같이 와서 참배를 하게 되었다. 참배를 하는데, 안내를 받아 육조스님에게 왔지요?

 
   육조스님이 마침 마당에 있었던 모양이에요. 오자마자 육조스님이 마침 마당에 계시는데 절도 아니 하고,

繞師三?(요사삼잡)이라→ 육조스님을 빙글빙글 돌기를 세 바퀴를 떡 돌고, 振錫而立(진석이립)한대→ 주장자로 “쾅”하고 땅을 치고는, 떡 섰어요. 이것이 뭔가 그 자기 나름의 경지를 한번 보이는 것이지요.

 
   어떻게 나오는가 보려고요. 육조스님이 유명하다고 해서 내가 따라오기는 했지만, 저 노장이 진짜 제대로 안목이 있는지 깨달았기나 했는지, 한 번 내가 이렇게 擧量(거량)을 해봄으로 해서, 법을 한 번 드날려 봄으로 해서 저기서 나오는 것을 보면 안다. 이것이지요.

 
   師曰(사왈)→ 아주 점잖게. 육조스님답게 말이 아주 점잖아요. 夫沙門者(부사문자)는→ 대저 “沙門”이라는 것은 具三千威儀(구삼천위의)와 八萬細行(팔만세행)이어늘→ “三千威儀”와. 갖추어야할 위의가 3천 가지. 또 아주 미세하게 조목조목 따지면 八萬가지 細行을 갖추고 살아야 된다. 어떻게 어른 앞에 와서 이렇게 세 바퀴 돌고 떡 주장자를... 

 
   절을 3배를 크게 올려도 부족할 판인데 세 바퀴를  돌고, 그렇게 주장자를 쾅, 세우고는 절도 아니하고 인사도 없이 어른에게 그럴 수가 있느냐? 그것이 도대체 “沙門”으로서. 승려로서 할 수 있는 작태냐? 이렇게 따지는 겁니다. 그러면서 大德(대덕)은 自何方而來(자하방이래)완대→ 어느 지방에서 어디서 왔기에,

 
  生大我慢(생대아만)고→ 그런 큰 “我慢”을 내느냐? 어찌 그렇게 아만이 탱천 하냐? 하늘을 찌를 듯이 그러냐? 覺(각)이→ 현각이 曰(왈) 아주 유명한 대화입니다. 이 두 분의 대화도...

 
   生死事大(생사사대)하고 無常(무상)이 迅速(신속)이니이다→ 아이고 生死. 죽고 사는 일이 크고, 이 無常이 迅速해. 금방 이 시간에 죽을지, 다음 시간에 죽을지,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데, 무슨 뭐 沙門이 어떻고 三千威 八萬細行이 어떻고, 지금 그 따위 따지게 되었느냐? 이겁니다. 生死일이 크고, 無常이 이렇게 迅速한데, 그런 문제 가지고 지금 왈가왈부하게 됐느냐? 이것이지요. 그렇게 아주 또 한 번 쏘아 줬어요.

 
   師曰(사왈)→ 육조스님이

何不體取無生(하불체취무생)하고 了無速乎(요무속호)아→ 어찌해서 그대는 無生의 도리를 體取하지 못하고, “體取”라는 말. 이게 아주 妙(묘)가 있습니다. “體達(체달)한다.” “體驗(체험)한다.” “체험한다.”는 말밑에다 취할 取(취)자. 완전히 체험해서 왜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하느냐? 無生의 도리. 生死가 없는 이치를, 그것을 체험을 해서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하느냐?

 
   그리고 또 “迅速(신속)” 무슨 “완속” “빠르다.” “더디다.” 하는 그런 도리가 없는 “無速(무속)” 그런 도리가 없는 것을 왜 깨닫지 못하느냐? 영원의 자리에 서 있고, 生死가 없는 그런 도리를 보았다면, 무슨 生死事 크고, 無常(무상)이 迅速(신속)하다. 그 따위 소리가 어디에 해당되기나 한 소리냐? 육조스님이 아주 정색을 하고, 법의 깊은 도리를 이렇게 擧量(거량)을 하는 거예요. 이것 유명한 말이지요.

 
   何不體取無生(하불체취무생)하고 了無速乎(요무속호)아. 시간. 공간을 다 초월한 그 도리를 너는 모르느냐? 이거지요. 曰, 體卽無生(왈, 체즉무생)이요 了本無速(요본무속)이니이다→ 아! 좋은 말씀입니다 하면서, “體取(체취)” 했다면 곧 “無生”이고, 깨달았다면, 말하자면 無生을 體取한 즉 곧 무생이요. 了. 無速을 了達(요달) 했다면 본래 速 도, “빠르다.”하는 것도 없습니다.

 
   이것은 이제 완전히 꼬리를 내리고, 그 육조스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들어가는 것이지요. 이것은 “體”는 육조스님이 체달했다면 또 자기 자신도 “無生”이고, 또 내가 요달 했다면 육조스님도 역시 본래 “無速”이다. 了達한즉은 본래 無生이다. “이 도리를 스님도 나도 다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 뜻으로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 두 말속에는...

 
   師曰(사왈)→ 육조스님이

如是如是(여시여시)하다→ 이것은 印可(인가)할 때 쓰는 말입니다. 이와같고 이와같다. 그렇다. 그렇다. 자네 말대로 體卽無生(체즉무생)이고 了本無速(요본무속)이다. 이렇게 체달하면 無生이 없고, 요달 하면 본래 빠르고 더딤도 없다. 이렇게 해석할 수가 있겠지요. 그러니까 師曰 그렇고 그렇다.

 
   玄覺(현각)이 方具威儀禮拜(방구위의예배)하고→ 그때야 바야흐로 威儀를 갖추어가지고서 예배했다. 威儀를 갖추어서 예배한다는 말은 가사 장삼 다 입고, 바닥 같으면 절하는 포가 있어요. 포를 깔고 거기서 스님한테 예배를 올리는 형식을 갖추는 것입니다. 그냥 땅에다 대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요즘은 수건 깔고 절하지요? 절 많이 하는 사람들은 방석에 수건 깔고 하듯이...

 
   중국 사람들은 마치 담요 같은 것을 깔고 거기서 절합니다. 그렇게 위의를 갖추고 예배를 올리게 되지요. 그것은 스승과 제자가 됐다는 뜻입니다. 바야흐로 威儀를 갖추고서 예배했다는 말은 스승과 제자가 됐다. 그리고 깨달음의 소견을 인증 받게 됐다는 의미가 이 속에 다 포함되었습니다. 이 몇 마디의 대화 속에요. 인가 받았으니까 있을 것도 없고 곧, 須?告辭(수수고사)어늘→ 떠날 것을 고 하거늘, “큰 스님. 가겠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師曰(사왈)→ 육조스님이 返太速乎(반태속호)아→ 너무 빠르거든요. 너무 빠르지 않는가? 그 뜻입니다. 返太速乎아. 너무 빠르지 않는가? 이렇게 와서 인가를 받았으면 그래도 며칠이라도 있다가 가고, 아니면 내 옆에서 살든지, 그래야지 오자마자 말 몇 마디 나누고는 그만 간다고 하니... 거기서 다시 또 서로의 法力(법력)을 점검하는 기회가 되는 것이지요.

 
   曰, 本自非動(왈, 본자비동)이어니→ 본래 스스로 動한 것이 없으니, 우리 마음자리는 이렇게 빨리 왔다 빨리 가는 사실. 그 이면에는 본래 움직임이 없다 이겁니다. 本自非動. 본래 스스로 動함이 없어. 움직임이 없거니,

豈有速耶(기유속야)이까→ 어찌 빠른 것이 있겠습니까? 그 “너무 빨리 돌아간다.” 이건 아주 인간적으로 육조스님은 말 했지요. 거기서 법담 나누자고 한 것은 아니지요. 그냥 인간적으로, “좀 쉬었다 가라. 너무 빠르지 않느냐?” 한 것이지요.

 
   그런데 그걸 ‘옳다 잘 됐다.’ 해가지고 그냥 자기 소견을 내놓는 거예요. 本自非動(본자비동)이야. 본래 우리 마음자리는 움직임이 없다 이겁니다. 아무리 물이 출렁거려도 그, 물의 性分(성분). 水性(수성). 그 젖는 習性(습성). 젖는 性品(성품)은 그것이 흐르는 물이든지, 고여 있는 물이든지, 흙탕물이든지, 맑은 물이든지, “똑 같다.”이겁니다. 그것이 “非動”이지요. 움직임이 없다. 본래 이 물의 성품은 움직임이 없습니다.

 
   우리 마음은 아무리, 喜怒哀樂(희로애락). 愛(애). 欲(욕). 貪(탐). 嗔(진). 痴(치) 三毒(삼독)으로. 8만4천 煩惱(번뇌)를 저 물결처럼 출렁거려 일으켜도 우리 마음의 그 本色(본색)은 그대로. 본질은 하나도 변함이 없이 움직임이 없다. 변함이 없다. 이런 뜻이지요. 변함이 없이 그대로다. 그런데 그것을 “빠르다.” “더디다.” “빠르다.” “더디다.” 이런 것이 있을 수 있느냐? 豈有速耶(기유속야)이까. 그렇지요. 맞는 말 이지요. 사실은...

 
   師曰(사왈)→ 그래, “非動”이라 해서 誰知非動(수지비동)고→ 누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느냐? “非動”이라고 했지만,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그것은 이미 움직이는 것이지요 사실은... 움직이되 움직이지 않는 도리.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부단히 움직이는 도리. 이것을 같이 수용해서 제대로 이해를 해야 됩니다. 그것이 中道(중도)입니다. 動(동)과 非動(비동). 신심명에는 그런 말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동과 비동을...

 
   曰, 仁者(왈, 인자)가 自生分別(자생분별)이니이다→ 스님이 스스로 분별은 내는 것입니다. “스님이 스스로 분별은 내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이거는 맞는 말입니다. “누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느냐?” 또 “모르느냐?” 하는 이것은 이미 당사자가 분별 해내는 일이지, 나 하고는 관계없다 이겁니다. “나 하고는 관계없다.” 나는 본래 “非動”만. 움직이지 않는다는. 본래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 이것만 주장할 뿐이다 이겁니다. 그 외에 것은 스님이 분별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師曰(사왈) 汝甚得無生之意(여심득무생지의)로다→ 그대는 정말. 심히. 깊이. 매우 “無生”의 뜻을 얻었구나! 生死(생사)가 없는 뜻. 生滅(생멸)이 없는 뜻. 우리 마음이 부단히 생멸 하지요? 우리 마음이 한 시간에도 수천 번. 수만 번 생멸 하지마는 그러는 과정에 생멸이 없다는 겁니다. 물이 저렇게 출렁 거리지마는, 그 젖는 성품은 변함이 없듯이... 그렇게 “無生”의 도리를 얻었구나! 깨달았구나! 이렇게 또 한 번 재차 인가를 하는 거예요. 그렇게 인가를 했는데 또 세 번째,

 
   曰, 無生(왈, 무생)이 豈有意耶(기유의야)이까→ 생사가 없는 도리에 무슨 뜻이 있고 없고, “無生의 뜻을 얻었다.”고 하니까 그 말을 꼬투리 잡아가지고, “無生”에 무슨 뜻이 있고 없고 할 것이 있느냐? 이렇게 말해요.

師曰(사왈)→ 점잖게, 그렇지마는, 無意(무의)면→ 뜻이 없다면, 誰當分別(수당분별)고→ 누가 마땅히 분별하겠는가? 뜻이 있어야 분별하는 것이 아니냐?

 
   曰(왈)→ 대답하기를,

分別(분별)이 亦非意(역비의)니이다→ 분별을 하되, 역시 그것은 뜻이 아닙니다. 그거는 맞는 말입니다. 부단히 분별하지만, 그 분별의 이면에는 분별하지 아니하는 뜻이니 뭐니 하는 것이 아닌, 그것을 초월해 있는 그 도리를 여기서 보여준 거예요. 이 말 한 마디. 한 마디 이면에 그런 것이 다 있는 것이지요. 分別이 亦非意다. 분별하는 것이 또한 뜻이 아니다 이겁니다. 분별을 하되 분별하지 아니하는 도리. 이런 뜻입니다.

 
   師曰, 善哉(사왈, 선재)라→ 아! 참 훌륭하다. 이렇게 아주 속 빠르기도 하지마는 아주 머리가 뛰어나고, 깨달은 사람으로서도 그 사람이 어떤 학문을 익혀 왔느냐? 성격이 어떠냐? 평소에 그 사람이 살아온 내력이 어떠냐에 따라서 그 깨달음을 표현하는 것이 다 달라요. 도인이라고 말이 똑 같은 것도 아니고 성격이 똑 같은 것도 아닙니다. 그 깨달음은 같다손 치더라도, 타고난 성격이 다 다르기 때문에... 이 분은 아주 머리가 번쩍거리고, 또 젊고, 학문이 깊고, 재치가 있고, 이런 것들이 눈에 보이는 그런 대화입니다. 그러니

 
   善哉라. 아! 훌륭하다. 少留一宿(소류일숙)하라→ 그렇지만 이런 관계로 우리 만났으니, 하룻밤을 자고 가게. 하룻밤 자면서 말이 통하는 사람이니까 이런저런 이야기 좀 하고 가는 것이 어떠냐? 이렇게 이야기를 해서 할 수없이 하룻밤 자고 왔다는 이야기인데요. 그래서 사람들이 그 사람을 별명으로 “일숙각” 하룻밤 자면서 깨달음을 인증 받게 됐다.

 
   時謂一宿覺(시위일숙각)이러라→ 그때 사람들이 말하기를 “一宿覺”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一宿覺” “一宿覺” 永嘉玄覺(영가현각)스님의 별명이 되어버렸지요. “一宿覺”이라는 것이... 이렇게 빨리 해치워야 되는데 이 일을... 오래 끈 다고 꼭 되는 것도 아니고...

 
   後(후)에 著證道歌(저증도가)→ 증도가를 지어서

盛行于世(성행우세)하니라→ 세상에 아주 크게 盛行했다. 지금도 대단 하지요. 특히 성철스님 증도가 강의도 있고... 좀 안목이 있는 이라면 증도가를 다들 아주 좋아합니다. 꼭 공부할 필요가 있는 내용입니다. 하룻밤자고 인가를 받고. 얼마나 신이 나고 얼마나 홀가분하겠습니까? 천근만근의 짐을 내려놓은 듯한 기분으로, 조계산을 그냥 펄쩍펄쩍 뛰면서 기분 좋아서 내려오면서 저절로 토해놓은 노래가 바로 이 “證道歌(증도가) 다.”

 
   그 잘되는 글 솜씨에 집 까지 오면서 그 정도야 다 지을 수가 있지요. 지식 풍부하겠다. 소견 투철하겠다. 못 쓸 까닭이 없지요. 그런 증도가를 저술한 분입니다. 또 “영가집”이라고 하는, 자기가 지은 책이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유명한 책입니다. 우리나라에도 번역된 책인데 아주 논리정연하고 까다롭지요. 그런 저술도 있습니다.

 
   육조스님 제자 중에서 아주 뛰어난 분 중의 한 분입니다. 그러나 이 분은 성질도 그렇게 촉빠르고, 얼른 갔다 얼른오고, 시봉도 아니 하고, 인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스승으로 모셔서 신발 한번이라도 닦아 준적도 없고, 그러니까 그만 후손이 없어요. 스승한테 그렇게 잘 해야 자기도 후손이 있고 代(대)가 쭉 내려갈 텐데 모든 것이 그렇다고요.

 
   우리 원효스님하고 의상스님하고 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의상스님은 그 뿌리가 있잖아요. 우리나라에서도 공부 많이 했지만, 중국에 가서 그 유학하면서 그 어려운 과정에서 유학을 해가지고, 다시 우리나라에 와서도 제자들을 키우는데, 전국에 “華嚴十刹(화엄십찰)”이라 해서... 십찰도 훨씬 넘어요. 그런 많은 사찰에 전부 화엄사상을 펴는. 화엄경을 강설하는 그런 절로 그렇게 제자들을 전부 파견을 해가지고...

 
   부석사에서 가르쳐서 그 제자들을 하루빨리 전국에다 퍼뜨려요. 그때 의상스님은 왕의 보호를 받는 사람이었으니까요. 전국에다 화엄사상을 펴는 운동을 펼쳤다고요. 그래서 의상스님의 10대 제자가 유명하잖습니까? 그리고 그 후손도 상당히 오랫동안 내려왔습니다.

 
   원효스님은 유학 가다가 마음 깨달았다고 그냥 돌아와 버리지요. 스승도 없다고요. “無師自悟(무사자오)”라. 그리고 워낙 뛰어나고 특출한 분이예요. 영가스님 같이 이렇게 특출한 분입니다. 그러니까 당대에는 굉장했지요.  當代(당대)에는... 또 저술도 어마어마하게 많이 남기고요. 그랬는데 제자들이 없어요.

 
   원효스님은 그렇게 드러난, 역사적으로 기록된 제자가 없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자기 혼자는 아주 무성 했는데 뿌리가 없으면 또 그렇게 후손이 약하고, “根固枝葉(근고지엽)” 그런 말을 합니다. 뿌리가 견고해야 잎이 무성하다. 그런 것이 전부 자연의 이치거든요 알고 보면... 영가스님도 그렇고...

 
   그런데 여기 앞에(62강) 보세요. 남악회양스님 같은 이는 8년간 선방에 살았지, 깨닫고 나서 15년을 시봉을 한 겁니다. 그냥 그 주변에 산정도가 아니고, 아예 신발 닦아 드리고, 모든 시중 다 들면서... 자기가 깨닫기 위해서 한다면 또 몰라요. 깨닫고 나서. 깨닫고 나서 그렇게 일일이 시중을... 좌우에 늘 옆에서 한 시도 떠나지 않으면서 그렇게 모든 시중을 다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후손이 지금까지 내려오는 겁니다. 지금까지... 그러니까 부모들에게 어떻게 해야 된다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지요. 

 
   그렇지만 이 분의 “證道歌(증도가)”같은걸 보면 참 시원시원 하고 역대 조사스님들이 이 분의 “증도가”를 말씀하지 않은 분이 없고, 어느 뛰어난 저술에는 “증도가” 몇 구절을 말씀하지 않은 분이 없을 정도입니다. 특히 우리나라 보조 진율스님 같은 분은 저술 속에 “증도가” 여러 번 나오고...

 
   옛날에 사셨던 동산스님 법문을 들을 때는 잘 몰랐어요. 그런데 나중에 “증도가”를 그렇게 다 외우고 나서 들어 보니까 전부 증도가 법문이에요. 나중에 동산스님 법문집을 편집 하는데 전부 듣고 기록해 놓은걸 보니까 전부 증도가 법문이에요. 그래 “증도가”가 그만치 오랫동안 여러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선시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 것은 오래가요.

 
   또 사람 人脈(인맥)은 끊어져도 저술은 그렇게 오래가요. 원효스님 같은 이들도, 물론 의상스님 “법성계”가 오래가기는 하지만, 원효스님 같은 이들의 “발심장” “초발심자경문”이 있는데 夫諸佛諸佛(부제불제불)이......  천하의 명문이거든요. 그런 것 하며 또 “기신론 해동서” 원효스님의 강의본이지요. 기신론을 원효스님이 주석한 책 이라든지 “보살계본 주석” 이라든지 이런 것들은 또 오랫동안 전해지는 일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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