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님
2011.12.17 14:27

육조단경 강의 68 - 무비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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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8 강 頓漸品- 2

 
八 頓漸品

 
   時에 祖師는 居曹溪寶林하시고 神秀大師는 在荊南玉泉寺하시니 于時에 兩宗이 盛化하야 人皆稱南能北秀라하니 故로 有南北二宗頓漸之分하야 而學者- 莫知宗趣러니 師- 謂衆曰, 法本一宗이로되 人有南北이요 法卽一種이로되 見有遲疾이니 何名頓漸고 法無頓漸이언만 人有利鈍故로 名頓漸이니라 然이나 秀之徒衆이 往往譏南宗祖師하되 不識一字어니 有何所長이리요하면 秀- 曰, 他得無師之智하야 深悟上乘하니 吾不如也며 且吾師五祖- 親傳衣法하심이 豈徒然哉리요 吾恨不能遠去親近하고 虛受國恩하노니 汝等諸人은 母滯於此하고 可往曹溪?決이어다] ←66강

 
   乃命門人志誠曰, 汝- 聰明多智하니 可爲吾하야 到曹溪聽法하고 若有所聞이어든 盡心記取하야 還爲吾說하라 志誠이 ?命하고 至曹溪하야 隨衆?請하되 不言來處러니 時에 祖師告衆曰, 今有盜法之人이 潛在此會로다하시니 志誠이 卽出禮拜하고 具陣其事한대


   師曰, 汝從玉泉來라니 應是細作이로다 對曰, 不是니이다 師曰, 何得不是오 對曰未說卽是어니와 說了코는 不是니이다 師曰, 汝師若爲示衆고 對曰, 常指誨大衆하시되 住心觀靜하야 長坐不臥하라하시나이다 師曰, 住心觀靜은 是病이라 非禪이며 長坐拘身이 於理何益이리요 聽吾偈하라 曰


  生來坐不臥하고 死去臥不坐로다

  元是臭骨頭어니 何爲立功課리요

 
   志誠이 再拜曰弟子在秀大師處하야 學道九年이로되 不得契러니 今聞和尙一說하고 便契本心이라 弟子- 生死事大하니 和尙은 大慈로 更爲敎示하소서 師曰, 吾聞汝師- 敎示學人戒定慧法이라하니 未審커라 汝師의 說戒定慧行相이 如何오 與吾說看하라 誠이 曰, 秀大師- 諸惡莫作이 名爲戒요 衆善奉行이 名爲慧요 自淨其意가 名爲定이라하나이다 彼說은 如此어니와 未審호이다 和尙은 以何法으로 誨人하시나이까

 
   師- 曰, 吾若言 有法與人이라면 卽爲?汝니 鍛且隨方解縛을 假名三昧니라 汝師所說戒定慧는 實不可思議也나 吾所見戒定慧는 又別하니라 志誠이 曰, 戒定慧는 只合一體이어늘 如何更別이리이까

 
   師曰, 汝師戒定慧는 接大乘人하고 吾戒定慧는 接最上乘人이니 悟解不同일새 見有遲疾이니라 汝聽吾說하라 與彼同否아 吾所說法은 不離自性이니 離體說法은 名爲相說이라 自性을 常迷니 須知一切萬法이 皆從自性起用하면 是眞戒定慧法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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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 頓漸品

 
   돈점품. 이것을 앞부분에서 이야기 했지만, 이야기가 연결 되도록 하기 위해서 다시 쭉 해석 하면서 다시 시작 하겠습니다.

 
   66강[時(시)에 祖師(조사)는 居曹溪寶林(거조계보림)하시고→ 그때에 조사가 조계산 “보림사”라고 하는데서 사셨는데, 神秀大師(신수대사)는→ 신수대사 라는 이. 잘 알려진 분이지요? 오조 홍인 밑에 두 제자가 있었는데, 하나는 신수요. 하나는 혜능이라.

 
   在荊南玉泉寺(재형남옥천사)하시니→  형남 옥천사에 계셨는데, 于時(우시)에 兩宗(양종)이→ 그 때에 兩宗. 그러니까 남쪽에는 혜능. 북쪽에는 신수. 이렇게 돼가지고 兩宗이 盛化(성화)라→ 아주 크게 교화가 번성 하더라 이 말입니다.

 
   人皆稱南能北秀(인개칭남능북수)라→ 사람들이 다 말하기를 “南能北秀” 이런 것을 옛날에 우리 도서나, 자료 같은데서 강원에서 배울 때 아주 참, 신기하게 느껴졌어요. “南能北秀” 남쪽에는 혜능이요. 북쪽에는 신수라. ←이렇게 외우거든요.

 
   故(고)로 有南北二宗頓漸之分(유남북이종돈점지분)하야→ 사상적으로는 頓(돈)이다. 漸(점)이다. ←이렇게 봅니다. 頓은 당연히 육조 혜능이고, 漸은 점차적으로 “부처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수스님의 사상이지요.

 
   而學者(이학자) 莫知宗趣(막지종취)러니→ 그 宗趣가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를 알지를 못하더니, 師 謂衆曰(사 위중왈)→ 師가 대중들에게 말하기를 法本一宗(법본일종)러라→ 법은 본래 하나의 宗旨(종지)인데, 하나의 근본인데. 人有南北(인유남북)이요→ 사람이 남북이 갈려져 있고, 法卽一種(법즉일종)이라→ 법은 하나의 종자이다.

 
   見有遲疾(견유지질)이라→ 소견이. 보는 안목이 더디게 보는 사람이 있고 빠르게 보는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見의 문제입니다. 똑 같은 꽃을 보고도 그 사람의 감정 상태에 따라서 느낌이 다르고, 달을 봐도 그렇고,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 견해가 차이가 있는 것이지요.

 
   何名頓漸(하명돈점)고→ 무엇을 이름 해서 돈이다. 점이다 하느냐? 法無頓漸(법무돈점)이언만→ 법에는 돈이다. 점이다. 몰록 한꺼번에 된다. 아니면 점 점 된다고 하는  것이 법에는 본래 없는데, 진리에는 그런 것이 없는데, 人有利鈍故(인유이둔고)라→ 사람에게 영리한 사람이 있고. 둔한 사람이 있다 이겁니다. 그래서 名頓漸(명돈점)이니라→ 頓과 漸이 있다. 둔한 사람은 점차적으로 된다고 생각하고 점차적으로 해나가고, 영리한 사람은 한꺼번에 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믿고 들어가는 것이지요.

 
   然(연)이나 秀之徒衆(수지도중)이→ 신수스님의 제자들이 往往譏南宗祖師(왕왕기남종조사)하되→ 譏는 놀린다 이겁니다. 비방 한다는 겁니다. “南宗祖師”를 비방하되. 육조스님을, 不識一字(불식일자)하니→ 본래 무식한 사람이었으니까요. 글자 하나도 모르는 사람인데 有何所長(유하소장)이리요→ 뭐 지가 잘 난 것이 있겠어? 아니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지가 잘 나 봤자지. “有何所長”이라는 말이 그런 말입니다.

 
   무식하다고 깔보는 것이지요. 이번에 어디에 무식한 흑인 여자 장관이 되었더군요 처음으로... 어느 나라든가요? 정말 일자무식한 나라 아프리카 어디든가요? 그럴만한 나라던가 봐요. 어쨌든... 秀曰(수왈)→ 신수스님이 말하기를 他得無師之智(타득무사지지)하야→ 그래도 신수스님은 이 혜능스님을 알아본다는 것이지요. 그는 “無師之智” 스승 없이 얻은 지혜! 스승 없는 지혜! 이 “無師智”를 아주 높이 평가합니다.


   남으로부터 배운 그 “교육”이란 것이 지식을 주입시켜 서, 그거 하나 몇 개 알게 한다든지 하는 것은 사실 별것 아닌 것이지요. 스스로 자기 속에 갖추고 있는 것을 개발해 내는 교육. 이것이 불교교육 이란 것이 본래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無師之智”라는 것이 그런 뜻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그 이야기를 했는데요. 본래 스승 없는 지혜! 本智(본지). 본래 갖춘 지혜. 인간에게는 본래 무한한 능력이 있거든요.

 
   深悟上乘(심오상승)하니→ 깊이 上乘. 최상승. 아주 높은 법을 깨달았으니, 吾不如也(오불여야)라→ 나는 그 분만 같지 못하다. 이렇게 신수스님은 사실 육조스님에 대해서 상당히 겸손해 하는 태도라는 겁니다.

且吾師五祖(차오사오조)가 親傳衣法(친전의법)하시니→ 또 우리스승 오조 스님이 친히 옷과 법을 전하신 것이

豈徒然哉(기도연재)리요→ 어찌 그냥 이겠는가? 다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吾恨不能遠去親近(오한불능원거친근)하고→ 나는 사실 능히 멀리 가서 친근하지 못한 것을 “恨(한)스러워 한다.”는 것이지요. 한스러워 하고, 虛受國恩(허수국은)하노니→ 헛되이 나라의 은혜만 받는 것을 한스러워 하노니,

汝等諸人(여등제인)은→ 너희들 여러 사람들은 母滯於此(무체어차)하고→ 여기에 대해서. 이 문제에 대해서, 頓漸(돈점)의 문제에 대해서 좀 막히지 말고, (母=여기서는 없을 무 라고 읽음)

 
   可往曹溪?決(가왕조계참결)이로다→ 너희들은 조계산에 육조스님한테 가서 공부도 좀 해라 이 말입니다. 그런 뜻입니다. “나라의 은혜를 입었다.”고 하는 것은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4朝(조)의 國師(국사)가 된 것입니다. 왕이 네 번 바뀔 때까지 국사 노릇을 한 이가 이분 한 사람뿐입니다. 불교 역사에... 그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한 왕조에만 국사 한 것이 아니라 왕조가 네 번 바뀔 때까지 국사 노릇을 한 대단한 복을 누렸다고 그래요. 역사상 제일 큰 복을 누린 이가 이분이라고... 특별히 그런 이들이 있지요. 현수 법장스님 같은 이들은 28세이든가 늦게 스님이 되었는데요. 그 전에 다 깨닫고, 화엄경에 대해서는 아주 달통을 하고 저술이 상당하고 그랬어요. 그래서 그 분을 스님을 만들 때, 그 해는 아무도 안 만들었어요. 현수법장 한 사람만 만든 겁니다. 그런 큰 영광이 어디 있어요? 세상에...

 
   중국 천하에 1년에 수천 명이 됐는데 그 해는 아무도 못된다. 스님이 못된다. 이겁니다. 왜냐? 아주 뛰어난 현수법장 같은 이가 머리 깎고 출가해서 스님이 되는데, 그래 너희가 똑같이 될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그런 영광을 받은 그런 이들도 있고... 이 분은 오히려 더 하지요 사실은... 그런 이들은 또 그런 이들대로 그리 했지만, 이 분은 조정이 네 번 바뀔 때까지 계속 국사로 있었다니까 이것은 대단한 은혜를 입은 것이지요.]←66강.

 
   乃命門人志誠曰(내명문인지성왈)→ 신수스님이 자기 문인에게다가 명령을 내렸습니다. “志誠”이라는 사람에게다가... “너는 가서 공부 좀 배워가지고 오너라.” 이것이지요. 汝聰明多智(여총명다지)하니→ 너는 총명하고 지혜가 많으니, 可爲吾(가위오)하야→ 가히 나를 위해서 到曹溪聽法(도조계청법)하고→ 조계산에 가서 聽法하라. “법을 좀 배워 오너라.” 이것이지요.

 
   若有所聞(약유소문)이어든→ 만약에 들을만한 것이 있거든 盡心記取(진심기취)하야→ 이 마음을 다해서 전부다 기억해라. 전부다 기억하고, 기록도 하고 그렇게 해서 還爲吾說(환위오설)하라→ 돌아와서 나를 위해서 좀 설명해 달라. 志誠(지성)이 ?命(품명)하고 至曹溪(지조계)하야→ 志誠이 명령을 받고 조계산에 이르러서, 隨衆?請(수중참청)하되→ 대중이 수 천 명이 사니까요. 대중들을 따라서 거기서 참례를 했지요. 생활을 같이 하는 거예요. 그리고 不言來處(불언래처)러니→ 어디서 왔는지. 來處를 말하지 아니 했어요.

 
   時(시)에 祖師告衆曰(조사고중왈)→ 육조스님이 (그것을 알았다는 거예요.) 대중에게 말하기를 今有盜法之人(금유도법지인)이 潛在此會(잠재차회)로다→ “盜法之人” 법을 도둑질 하는 사람이 남몰래 이 會上(회상)에 와 있다. 여러 사람이 모였을 때 그 소리를 하니까 志誠(지성)이 卽出禮拜(즉출예배)하고→ 지성이 할 수없이 나와서 예배를 하고, 具陣其事(구진기사)라→ 자기가 여기 와서 공부하게 된 연유를 전부 다 이야기하게 되었다.

 
   師曰(사왈) 汝從玉泉來(여종옥천래)라니→ 네가 옥천사. (안 그래도 상당히 서로 견제하고, 또 제자들끼리는 비난도 하고 아주 경쟁도 하는 그런 관계인데... 남쪽에는 보림사. 북쪽에는 옥천사. 이렇게 해서 상당히 쌍벽을 이루면서 서로 경쟁하는 그런 사이거든요.) 네가 그 옥천사에서 왔다하니, 應是細作(응시세작)이로다→ 네가 간첩이 아니냐? 이겁니다.

 
   對曰(대왈) 不是(불시)니이다→ 아닙니다.

師曰(사왈) 何得不是(하득불시)오→ 어째서 아니냐? 이겁니다. 對曰未說卽是(대왈미설즉시)어니와→ 대답해 가로되, (이 사람은 총명한 사람이니까요.) 未說卽是(미설즉시)어니→ 제가 말 아니 했을 때는 그렇다고 치지만, 제가 그런 사실을 說了(설료)→ 다 이야기 했는데 간첩 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간첩이 아니라고 할 때 그 때 간첩이지, 제가 그런 사실을 스님한테 다 털어 놨는데 왜 나보고 다시 지금 와서 간첩이라고 합니까?

 
   不是(불시)→ 나는 아닙니다 이것이지요. 신분을 당당히 다 밝히고, 스님한테 정식으로 법을 공부한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육조스님도 그 말에는 꼼짝 못했어요. 그 이상 대답을 할 수가 없었어요. 이치가 맞거든요. 남을 해치는 것도 아니고, 와서 신분 숨기고 법문 좀 들었다가 자기 신분을 다시 밝혔으니까요.

 
   師曰(사왈) 汝師若爲示衆(여사약위시중)고→ 그러니까 이제 육조스님도 궁금하지요. 남쪽 북쪽 이렇게 큰 산봉우리가 두 개를 이루고 있는데, 서로 지금같이 녹음 해다가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찍어다가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니까... 그대의 스승은 어떻게 示衆. 대중들에게 법문을 해 보이느냐?

 
   對曰(대왈) 常指誨大衆(상지회대중)하시되→ 항상 대중들에게 가르치시되, 住心觀靜(주심관정)하야 長坐不臥(장좌불와)하라하시나이다→ “住心觀靜 長坐不臥”이것이 신수스님이 대중들에게 주로 가르치시는 지도 방법이지요. 마음을 머물고. 마음이 여기저기 자꾸 떠다니잖아요. 사물을 보면 보는 대로 그냥 생각이 이리저리 흘러가지요. 마음을 그렇게 흘러가게 하지 말고 한곳에다가 딱 멈춰두고, 그리고 고요한 것을 관해라.

 
   마음은 본래 고요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한곳에 가만히 있으면. 마음이 여기저기 쫓아다닐 때 시끄럽지 한곳에 가만히 있으면, 예를 들어서 촛불만 보고 있으면요. 조용해지겠지요. 그 촛불 10분 보고 있기 힘든 겁니다. 정말 어렵습니다. 저는 화두를 들고 뭐 하다가 별짓도 다 해봤는데, 촛불을 보다가 어떤 때는 점을 벽에다 찍어놓고 그것을 보고 있다가 화두가 하도 힘들어서 잘 안 되니까...

 
   10분 딴 생각 안 하고 바라보고 있기가 쉽지 않은 겁니다. 아주 어렵습니다. 한번 시험해 보세요. 촛불 보고 있는 것. 움직이면서 보고 그렇지, 그럴 것 같지요? 쉬울것 같지요? 몇 초면 되는데요. 1분도 넘어가기 어렵습니다. 그만치 우리 마음은 짧은 순간에 많은 활동을 합니다. 많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그래서 한곳에 멈춘다는 “住心”이라는 이것이 쉬운 것이 아니라고요. 아주 어려운 것입니다.

 
   住心觀靜(주심관정). 그래서 자꾸 좌선을 하고 그런 것이지요. 長坐不臥(장좌불와)는 그런 시간. 住心觀靜하는 시간을 오래 지속하기 위해서 長坐不臥하는 것이지요. 長坐不臥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여기서는 또 長坐不臥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 몸을 조복 받는다 그러거든요. 몸뚱이를 조복 받아서 오래 앉고 눕지 않고, 눕지 않는다는 것은 잠 안 자고 住心觀靜한다는 것인데요. 그렇게 주로 가르칩니다. 그랬어요.

 
   師曰(사왈) 住心觀靜(주심관정)은 是病(시병)이라→ 마음을 한곳에다 멈추고서 그 마음의 본 모습이라는 것을 예의주시하고 관찰하고 있는 것. 그것이 “住心觀靜”이라고 하는 “비파사나” “위빠사나”라고 하는 것이 우리나라에 지금 들어와서 상당히 많이 유행하고 있는데 그것이, 이 “住心觀靜”입니다. 자기 마음을 예의주시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住心觀靜”보다 한 차원 낮은 것이지요. 그것도 깊이 들어가면 나중에 “住心觀靜”이 되는데, 거기는 처음에 자기 호흡하는 것을 예의주시하는 것입니다. 나가는 호흡을 하면 나가는 것을 예의주시하고. 들이마실 때는 들이마시는 것을 예의주시하고. 그래 내가 뭘 움직이면 움직이는 것을 주시하고. 놓치지 않고 또 하나의 나를 내 세워서 나를 관찰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이 “住心觀靜”입니다.

 
   그것이 看話禪(간화선)하고는 차이가 많습니다. 그 “住心觀靜”은 병이다 그랬어요. 非禪(비선)이며→ 선이 아니다. 長坐拘身(장좌구신)이→ 장좌불와는 이거 한 시간도 앉아 있기 힘 드는데, 하루 종일 앉아서 눕지 않는다고 하는 것. 이것은 몸을 구속하는 것이지요. 길이 앉아서 몸을 구속하는 것이 於理(어리)에 何益(하익)이리요→ 진리에 있어서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이겁니다. 몸뚱이 구속하고 앉아 있는 것. 절구통은 10년. 20년 한곳에 잘도 앉아 있는데...

 
  잘 앉아 있는 사람보고 “절구통 수좌” 그러거든요. 효봉스님 별명이 “절구통 수좌”입니다. 잘 앉아 있다고... 사실은 그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게 하기로 하면 어려운 일인데요. 육조스님 법문에다가 비춰보면, 그것은 다 진리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다 이겁니다. 고생만 했지...

 
   聽吾偈(청오게)하라 曰(왈)→ 내 게송한번 들어봐라. 참 이것 멋진 말입니다. [生來坐不臥(생래좌불와)하고→ 태어나 앉아서 눕지도 않아 장좌불와 하는 사람들은...

 
   死去臥不坐(사거와부좌)로다→ 죽은 뒤에는 일어나 앉지를 못해... 죽은 놈이 어떻게 앉겠습니까? 이 무슨 꼴이냐 이겁니다. 살아 있을 때는 앉아서 눕지를 않고, 죽어서는 누워서 못 앉으니, 이런 참 한심한 일이 어디 있느냐 이것이지요.


   元是臭骨頭(원시취골두)라→ 원래 냄새나는 뼈다귀라 이 까짓게... 이 “몸뚱이”라는 것이 원래 냄새나는 뼈다귀예요.

 
   何爲立功課(하위입공과)리요→ 그걸 어떻게. 그 놈 몸뚱이 구속해서 “장좌불와” 하고서 무슨 功課를 세울 수 있겠느냐? 몸뚱이는 훈련 하는 대로 가고, 조금만 나태해 버리면 그냥 또 안 되고 그래요. 그러니 거기에 “몸뚱이” 구속하고 “몸뚱이”조복 받고 해가지고 뭐가 생기리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본래 불교에서 말하는 진리 하고는 거리가 멀다 이겁니다.

 
   아주 너무 좀 심한 표현 같지요? 살아서는 앉아서 눕지를 않고, 죽어서는 누워서 앉지를 못한다. 냄새나는 뼈다귀인데 거기에 무슨 功이 있겠는가?]

 
   志誠(지성)이 再拜曰(재배왈)→ 두 번 절하고 弟子在秀大師處(제자재수대사처)하야→ 제자가 신수대사처에 있어서 學道九年(학도구년)이로되 不得契(부득계)러니→ 계합하지 못했다. 도에 대해서 계합하지 못했다. 9년간 도를 배웠지만... 今聞和尙一說(금문화상일설)하고→ 지금 화상의 한 마디를 듣고는, 便契本心(변계본심)이라→ 곧 본심에 계합했다. 그러니까 몸뚱이에 대한 의식을 떨어 버리니까 남는 것은 본심뿐이지요. 그래서 본심에 계합했다.

 
   弟子 生死事大(제자 생사사대)하니→ 생사의 일이 크니, 和尙(화상)은 大慈(대자)로→ 대 자비로서 更爲敎示(갱위교시)하소서→ 다시 한 번 敎示해 주십시오. 이왕 이렇게 제가 눈을 떴으니까...

 
   師曰(사왈) 吾聞汝師(오문여사) 敎示學人戒定慧法(교시학인계정혜법)이라하니→ 내가 듣기로. 소문에 그대의 스승이 學人들에게.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계 정 혜에 대한 법을 敎示해 준다고 하니, 未審(미심)커라→ 아직 들어 본적이 없다. 아직은 거기에 대해서 소상하게 들어 본적이 없는데, 汝師(여사)의→ 그대의 스승이 說戒定慧行相(설계정혜행상)이→ 계 정 혜 행상을 설하신 것이 如何(여하)오→ 어떠냐?

 
   아주 육조스님 가만히 보니 “알고족” 이예요. 이렇게 그 쪽에서 왔다고 하니까 그냥 그 쪽에서 어떻게 공부 했느냐? 또 戒 定 慧는 뭐라고 설명하느냐? 이런 것을 다 알고 싶고, 또 거기에 비추어서 또 자기 자신의 학설이라고 할까? 주장도 표현하고 싶고 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與吾說看(여오설간)하라→ 나에게 한번 이야기해 보이라 이 말입니다.

 
   誠(성)이 曰 秀大師(수대사) 說諸惡莫作(설제악막작)이→ 모든 악을 짓지 말라고 하는 그 설명은, 名爲戒(명위계)요→ 戒라고 하고, 그 戒라는 것은 “뭣도 하지 말고” “뭣도 하지 말고” “뭣도 하지 말라”고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되어 있잖아요. 이것은 “七佛通戒(칠불통계)”라고 해서 불교에 입문 하자마자 배우는 것이지요. 諸惡莫作(제악막작) 衆善奉行(중선봉행) 自淨其意(자정기의) 是諸佛敎(시제불교). “불교란 바로 그거다.” 이렇게 되어 있지요.

 
   衆善奉行(중선봉행)이→ 좋은 일은 전부 받들어 행해라 그것이 지혜다 이겁니다. 名爲慧(명위혜)다 自淨其意(자정기의)가 名爲定(명위정)이다→ 그 마음을. 그 뜻을 비우라. 淨자는 비우라는 뜻입니다. 텅 비우라 이겁니다. 그래야 진짜 청정이니까요. “그 뜻을 비우라.”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諸惡莫作, 衆善奉行은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지요. 그러나 自淨其意. 이것은 도가 없는 사람은 말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마음을 비우라고 하니까요. 마음을 텅 비우라고 하니까요. 이것을 일반적으로 “착한 일 많이 하고 나쁜 일 하지마라.”라고만 말하는 사람과 불교의 가르침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이 점입니다. 이것이 自淨其意가 名爲定이다 이름을 禪定(선정)이라고 한다.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랬어요.

 
   彼說(피설)은 如此(여차)어니와→ 그 분의 설명은 이와 같지만, 未審(미심)호이다→ 아직 스님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들어 본적이 없습니다. 和尙(화상)은 以何法(이하법)으로→ 무슨 법으로서 誨人(회인)하시나이까→ 사람을 가르쳤습니까? 

 
   師曰(사왈)→ 육조스님이 말하기를 吾若言(오약언)→ 내가 만약 말하되 有法與人(유법여인)이라면→ 어떤 도리가 있다. 꼭 고정된 어떤 법이, 법칙이 있어서 사람에게 “이것이다.”라고 일러준다면 卽爲?汝(즉위광여)야→ 그것은 내가 너를 속이는 것이다. 계정혜가 어떻다. 뭐가 어떻다. 어떻다 해서 꼭 고정된 무엇을 한정시켜 놓는다면... “모든 법이 다 불법이다.” 그런 말이 있는데 이것만 꼭 집어서 “이것이 불법이다.” 한다면 그것은 속이는 것이지요. 사기 치는 것이지요.

 
   鍛且隨方解縛(단차수방해박)을 假名三昧(가명삼매)다→ “隨方解縛” 이거 좋은 말입니다. 이것을 잘 알아 놔야 됩니다. “隨方解縛” 이 方자는 방향. 아니면 그 사람의 근기. 아니면 그 사람의 어떤 병. 方자는 그런 뜻으로. 방향과 어떤 근기와. 그 사람의 병과 상대. 상대의 차별성. 이런 것을 따라서 그 속박을 풀어준다 이겁니다. “속박을 풀어준다.” “있다.”고 하는데 집착한 사람은 그 집착을 떨어줘야 되고. “없다.”고 하는데 집착한 사람은 없다고 하는 것을 떨어줘야 되고. 그러면 반대말을 또 해야 되는 것이지요.

 
   너무 기도에 빠져 있으면, 한 곳에 빠져 있으면 병이 되거든요. 집착하는 것은 병이니까요. 그 기도 아무 소용없다고, 아무 영험도 없는 기도 뭐하려고 하냐고 해서 그만 찬물을 쫙 끼얹어줘야 그것이 속박을 풀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 신심도 없이 기도도 안 하는 사람보고는, 불교는 기도가 최고지, 기도 빼버리고 무슨 불교냐고. 이렇게 해서 시작을 해가지고서 신심을 불어 넣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전부, 부처님이 그렇게 우리한테 펼쳐놓은 그물에 걸려들어 있다니까요. 그 어디에 걸려들어 있는지도 몰라요 우리는... 그것이 “隨方解縛(수방해박”입니다.

 
   병 따라서 속박을 풀어주는 겁니다. 그것이 “법”이지요. 고정된 뭐 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법이다.” 그렇게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 假名三昧(가명삼매)다→ 거짓으로 이름을 붙이자면 그런 것을 “三昧”라고 한다. 참 “隨方解縛”이라는 말이 아주... 부처님의 모든 교설이 사실은 전부 “隨方解縛”입니다. 인간이 잘못 사는 데는 뭔가 그 나름대로 마음의 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병을 제거 하는 데는 거기에 알맞은 방편이 있다 이겁니다. 그 방편을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에게나 그 방편 다 쓰면 또 안 맞지요. 그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니까요.

 
   汝師所說戒定慧(여사소설계정혜)는→ 그대의 스승이 말하는 계정혜는 實不可思議也(실불가사의야)니→ 참으로 불가사의 하다. 아주 칭찬해주는 겁니다. “대단하다.” 이 말입니다. 여기서는... “실로 아주 훌륭하다.” 이 말입니다. “不可思議”라는 말도 여기서는 훌륭하다고 해석 해야지, 계속 “불가사의다.” “사유하지 못한다.” 사유하지 못할 것 뭐 있어요? “훌륭하다.” 이겁니다. 칭찬해주는 말입니다.

 
   吾所見戒定慧(오소견계정혜)는→ 내가 본 바의 계정혜는 又別(우별)하니라→ 또 다르다. 너의 스승이 말하는 계정혜 하고는 또 다르다.

志誠(지성)이 曰 戒定慧(왈 계정혜)는 只合一體(지합일체)라→ 누가 말해도 계정혜는 하나일 뿐이지. 일체일 뿐인데 如何更別(여하갱별)이리이까→ 어떻게 다를 수 있겠느냐? 이 말입니다.

 
   師曰(사왈) 汝師戒定慧(여사계정혜)는 接大乘人(접대승인)하고→ 대승인을 제접하고, 대승인을 상대로 해서 가르치는 것이고, 吾戒定慧(오계정혜)는→ 나의 계정혜는 接最上乘人(접최상승인)이니→ 최 상승인을 가르치는 것이다. 大乘人. 最上乘人. 최 상승인 이라는 것을 한 차원 달리 표현한 것이지요. 앞에서 훌륭하다 했으니까요.

 
   悟解不同(오해부동)일새→ 깨달아 아는 것이 같지 않음일새. 그래서 見有遲疾(견유지질)이다→ 계정혜를 보는 소견도 다르다 이겁니다. 遲疾. 遲= 더디고. 疾= 빠르다. 더디고 빠르다. 라는 표현이지만, 높고 낮은 것이 있고, 좋고 나쁜 것이 있고,  거기에는 또 엄청난 차이가 있다.

 
   汝聽吾說(여청오설)하라→ 내 말한 것을 그대는 잘 들으라. 與彼同否(여피동부)아→ 저 사람. 네 스승하고 더불어 같은가 다른가? 吾所說法(오소설법)은 不離自性(불리자성)이니→ 내가 설법하는 것은 언제든지 自性을 떠나지 아니한다. 항상 자성에다 근거를 두고 법을 설 한다 이겁니다.

 
   靑梅祖師(청매조사)도 그런 말 했지요? 心不返照(심불반조)면 看經無益(간경무익)이라. 경전의 설명. 부처님의 말씀은 전부 마음에다 근거를 두고 마음이 설한 것입니다. 마음에다 근거를 두고 마음을 설하고, 마음에다 대고 설한 것입니다. 듣는 사람도 마음이고 설하는 사람도 마음이고, 또 그 소재도 마음입니다. 이야기하는 그 소재도 마음이라고요. 또 그 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설한 것입니다. 불교는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에다가 返照(반조)해보지 아니하면 경을 아무리 봐바야 이익이 없다고요. 남의 소리만 하는 것이지요.

 
   不離自性(불리자성)이라→ 自性에서 떠나지 않는다.

離體說法(이체설법)은→ 心體(심체)를 떠나서 설법하는 것은 名爲相說(명위상설)이라→ 現相(현상). 어떤 외형적인. 바깥세상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겁니다. 집은 어떻게 짓고, 그런 이야기에 불과하다 이것이지요.

自性(자성)을 常迷(상미)니→ 그리되면 우리 마음자리. 자성자리가 항상 미혹하게 되는 것이니,

 
   須知(수지)→ 모름지기 알아라. 一切萬法(일체만법)이 皆從自性(개종자성)하야 起用(기용)이라→ 일체만법이 전부 우리들의 마음자리. 우리 자성자리로 부터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겁니다. 불교에서는 저 산도 하늘도 구름도 강물도 해도 달도 전부 우리 자성자리로부터 존재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 자성이 빠진데서 무슨 해가 어디 있으며 달이 어디 있습니까? 이 지구가 수억 만 년 됐다고 하지만, 수억 만 년 이라는 역사도 내가 없으면. 내 자성이 존재하지 않으면 그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는 분명히 나 보다 먼저 있었잖아요? 객관적으로 보면... 그렇지만 내가 없다고 생각 했을 때, 아버지가 어디 있으며 할아버지가 어디 있습니까? 결국은 내 마음으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버지이고 할아버지라고요. 과거의 많은 세월도 현재 나로부터 생겨난 것입니다. 이것이 그냥 이상한 이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참 그것이 진짜 맞는 소리입니다.

 
   是眞戒定慧法(시진계정혜법)이니라→ 이것이야 말로 진짜 계정혜법이다. 전부 계니 정이니 혜니 하는 것이 우리 자성으로부터. 또는 마음으로부터 일어난 것이다. 흔히 계정혜를. 계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우리 삶의 주변 환경을 정리하는 것. 그것을 질서 있게 하고 정리하게 하는 것. 이것이 戒입니다.

 
   예를 들어서 오늘 이 시간에 공부하려고 오려고 하더라도, 이런저런 약속 다 미뤄놓고 또 할 일 어지간히 바쁜 것 다 처리해놓고, 아니면 다음으로 다음 시간에 아니면 내일로 미뤄놓고, 이것을 딱 딱 정리 해놓는 겁니다. 질서 있게 딱 딱 정리 해놓는 것. 그것이 戒라고요. 그러면 1시간쯤 다른 생각 아니 하고 공부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 안정이 되는 것이지요. 定이라고요. 일반적으로 설명을 하면 그래요.

 
   저는 계정혜를 그런 식으로 해석을 잘 해요. 그러면 공부가 되잖아요. 慧. 공부가 된다고요. 그렇게 해야 공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저것 처리하지 못한 일 잔뜩 벌려놓고 공부하는 시간에 내가 전화 하겠다. 아니면 전화 오겠다. 이런 식으로 돼 있어서는 이것이 戒가 제대로 안 지켜진 겁니다. 그러면 안정이 되겠습니까? 계속 전화오고 전화해야 되고... 전화 오면 ‘아 이거 누가 전화 왔구나.’ 딱 안다고요. 내가 그때 전화해 주기로 했는데 못 했으니까요.

 
   그런 정리를 안 해놓은 겁니다. 그런 정리를요. 우리 일상생활을 그렇게 봐야 됩니다. 그런 정리를 안 해놓으니까 안정이 될 까닭이 없지요. 안정이 안 되면 제가 실컷 강의해 봐도 공부가 될 리가 없는 것입니다. 마음은 계속 그 쪽에 가 있으니까요. 이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그 사람이 나빠서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렇다고요. 계정혜를 일반적으로 그렇게 해석을 해야 됩니다. 그것이 우리 생활에 제일 아주 도움이 되는 그런 戒定慧입니다. 불교를 아무리 복잡하게 설명해도 戒(계) · 定(정) · 慧(혜). 三學(삼학)뿐이니까요 불교는...

 
   육조스님이 아주 뛰어난 만고에 둘도 없는 명 해석을 해서, 여기서는 달리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만, “戒定慧”라는 것이 그래요. 아이들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부 잘 되게 하려면 처리할 일. 질서 정연하게 책이나 노트 같은 것도 반듯하게 놓고, 앉아서 하면, 안정이 되잖아요? 첫째... 戒가 질서 이런 것들이고,

 
  定은 안정이 오는 겁니다. 질서를 통해서 안정이 오는 것이고, 안정이 된 상태에서 공부하면 공부가 잘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혜다.” 모든 일이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일이... 집을 한 채 지으려고 해도 마찬가지고, 하루의 약속을 지키는 일도 역시 마찬가지고, 한 시간의 수업을 위해서도 마찬가지고, “계”라는 것은 정지 작업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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