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님
2011.12.17 14:28

육조단경 강의 69 - 무비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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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9 강 - 頓漸品- 3

 

 
   聽吾偈하라 曰

     心地無非 自性戒요 心地無痴 自性慧요

     心地無亂 自性定이요 不增不滅 自金剛이요

     身去身來本三昧니라

 
   誠이 聞偈誨謝하야 乃呈一偈하니

     五蘊幻身이여 幻何究竟이리요

    廻趣眞如라면 法還不淨이로다

 
   師-然之하시고 復語誠曰, 汝師戒定慧는 勸小根智人이요 吾戒定慧는 勸大根智이니 若悟自性하면 亦不立菩提涅槃이며 亦不立解脫知見이라 無一法可得이라야 方能建立萬法이니 若解此義하면 亦名佛身이며 亦名菩提涅槃이며 亦名解脫知見이라 見性之人은 立亦得이요 不立亦得이니 去來自由라 無滯無碍하야 應用隨作과 應語隨答에 普見化身하되 不離自性하야 卽得自在神通遊戱三昧니 是名見性이니라

 
   志誠이 再啓師曰, 如何是不立義니이까 師曰, 自性이 無非, 無痴, 無亂하야 念念般若觀照하야 常離法相하면 自由自在하야 縱橫無盡이어니 有何可立이리요 自性自悟하면 頓悟頓修라 亦無漸次니 所以로 不立一切法이니라 諸法이 寂滅커니 有何次第리요 志誠이 禮拜하고 願爲執侍하야 朝夕不懈러라

 
*********************************************************

 
   聽吾偈(청오게)하라 曰(왈)

이것. 아주 유명한 게입니다. 육조스님 말씀 중에서...

 
   [心地無非(심지무비) 自性戒(자성계)요→ 계라는 것이 뭐냐? 우리 마음에. 마음으로부터 아무런 잘못이 없는 것. 그것이 자성의 계다. 우리 마음의 계다 이겁니다. “마음으로부터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하는 말. 이것 잘못 알아들으면 큰일 납니다. “내 양심에 가책 되는 일이 없다.” 이 뜻이 아닙니다. 그 뜻 아닙니다.

 
   “양심에 가책 되는 일이 없다.” 그 뜻이 아니고, 마음자리에는 도저히 어떻게 잘못하려고 해도 잘못이 있을 수가 없는 자리가 이것이 心地無非입니다. 우리의 마음자리에는 어떤 살인을 수십 번 저질은 사람도 마음자리에. 진짜 이 心地 에는 영향이 끼쳐지지 않는 자리가 있다고요. 그것이 心地無非(심지무비) 自性戒(자성계)입니다. 완전무결한 것입니다 본래로...

 
  언제 이것저것 지키고 五戒(오계) 十戒(십계)지키고, 십중대계 48계지키고, 250계지키고, 어제는 잘 지켰는데 오늘은 안 지켜지고, 오늘은 안 지켰는데 내일은 잘 지켜지는 그것이 무슨 “戒”냐? 이겁니다. 그것은 “戒”도 아니라는 것이지요. 본래 우리의 마음자리에 아무런 잘못이 없다. 아무리 잘못을... 살인을 천번 만번 저지르고 도둑질을 천번 만번 해도 거기에는. 자성 자리에는 아무런 허물이 없는 이것이 “戒”다 이것입니다. 자성을 제대로 이해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성을 제대로... 결국은 이것이 “자성” 설명입니다.

 

  心地無痴(심지무치) 自性慧(자성혜)입니다. 혜가 두 번째 와 있네요. 心地無痴→ 마음에 어리석음이 없는 것. 마음에는 본래 어리석음이 없습니다. 세상에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의 본심에는 어리석음이 없는 것입니다. 밖으로 드러나 있는 보자기. 그 사람을 싸고 있는 생각의 보자기만 어리석고 거기에만 죄가 있지요. 그런데 그 안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 것이라고요.

 
   말하자면 連城之壁(연성지벽)과 같은. 겉에는 돌로 싸여 있지만 안에는 아주 깨끗하고 값비싼 옥으로 그냥 그대로 고스란히 잘 있듯이 우리의 본심은 그런 것이다. 그것을 “慧”라고 봐야지요. 계정혜를 통해서 우리의 본심에 대한 설명입니다. 心地無痴 自性慧다. 마음에 아무런 어리석음이 없는 것. 우리 본마음에 아무런 어리석음이 본래 없습니다. 본래 없는 그것이 “자성의 지혜다.”

 
   心地無亂(심지무란)이 自性定(자성정)이다.→ 우리 마음에 아무런 혼란이 없는 것. 動搖(동요)가 없는 것. 이것이 “自性의 定”이다. 그러니까 신수스님이 설명한 것과 육조스님이 일상생활에 하나의 지침으로 설명한 것 하고는 천지차이지요.

 
   不增不滅(부증부멸) 自金剛(자금강)이요→ 우리의 마음자리에는 “不增不滅” “不增不滅” 반야심경에도 있지요? 不增不滅한 것이 自金剛이다. 이것이 자신의 “金剛”과 같은 지혜다. 이겁니다. “우리의 본성이다.”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不增不滅”. 이런 식으로 계정혜를 설명한 것입니다.

 
   身去身來本三昧(신거신래본삼매)니라→ 아주 기가 막힌 말입니다. 이 말이 좋은 말입니다.

身去身來→ 몸이 가고 몸이 오는 이것이 “본 삼매다.”이겁니다. 그야말로 절구통처럼 요지부동으로 딱 앉아 있을 때만 삼매이고 움직이는 것은 삼매가 아니라는 것은 천만의 말씀. “身去身來”라고 하는 것은 몸이 간다온다도 해당되지만, 죽고 사는 것. 가는 것은 죽는 것이고, 오는 것은 生이니까, 태어나는 것이니까 生死(생사)가 그대로 삼매예요. “生死 그대로 삼매다.” 이겁니다.

 
   몸이 움직이는 것은 아무 허물이 없고 아무런 잘못이 없이 “그대로 삼매다.” 이겁니다. 가도 삼매고 와도 삼매고... 이런 것을 잘못 배워 놓으면 건방만 들어서는 아무리 떠들어도 본래 삼매다. 그래 가지고... 그런 경우들 더러 봅니다. 꼭 그렇게 알아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참 불교공부하다 재미 붙여 놓으면 이런 이야기가 참 재미있거든요. 그래서 농담으로 이런 것을 써 먹는 사람들이 더러 있지요.]


   誠(성)이 聞偈誨謝(문게회사)하야→ 게송의 가르침을 듣고는 아주 감사해서 乃呈一偈(내정일게)하니→ 또 이 지성스님도 게송 하나를 바치는 것이지요. 

 
   [五蘊幻身(오온환신)이여→ 이 五蘊으로 된 것. 色(색) 受(수) 想(상) 行(행) 識(식). 이것이 우리 오온 아니겠습니까? 色= 우리  몸뚱이. 물질이고. 受想行識= 우리 정신작용이지요. 네 가지 정신작용과 한 가지 몸뚱이. 이것으로 우리는 “나다.” 라고 하는 것 아닙니까? “五蘊”. 그것이 다 허망한 幻化(환화)와 같은 몸뚱이다.

 
   幻何究竟(환하구경)이리요→ 환화와 같이 이루어진 몸뚱이가 어찌 “究竟” 최고의 법이겠는가? 제일가는 법이겠는가? 거기에 長坐不臥(장좌불와)를 그 동안 고집해 왔던. 거기에 의지하고 공부해 왔던 사람이니까 거기다 집중을 해서 설명을 하는 것이지요. 꼭 이 말이 맞는 것은 아닙니다. 幻化空身(환화공신)이 卽法身(즉법신)인데요뭐. 이 허망한 몸뚱이 그대로 법신이라고요. 그런데 여기는 “환화공신은 구경이 아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요.

 
   廻趣眞如(회취진여)하면→ 돌이켜서 眞如에다가 나아갈 것 같으면, 法還不淨(법환부정)이로다→ 법이 오히려 이 몸을 돌이켜서 廻趣한다. 이 몸뚱이 가지고 眞如에다 나아간다고 하면. 장좌불와 한다든지 하는 그런, 몸을 구속하든지 조복 받는다든지 하는 그것이 廻趣眞如입니다.

 
   몸을 돌이켜서 眞如에 나아간다고 하면. 법이 또한 不淨하다 이겁니다. 그러면 그 몸하고 관계없는 진리가 몸뚱이처럼 될 것 아닙니까? 몸뚱이를 부정 했으니까 진리까지 不淨하게 되겠다 이겁니다. 이 게송도 아주 교묘합니다. 몸뚱이를 부정 하니까 진리까지... 몸뚱이로서 진리를 구했으니까 진리마저 몸뚱이 같이 격하 돼버리지 않느냐?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래 아주 괜찮은 게송이지요.] 그러니까

 
   師-然之(사-연지)하시고→ 육조스님이 그렇게 여기시고, 인정을 한 것이지요? 復語誠曰(부어성왈)→ 다시 지성에게 말하되 汝師戒定慧(여사계정혜)는→ 너의 스승의 계정혜는 勸小根智人(권소근지인)이요→ 작은 근기의 지혜를 가진 사람에게 권하는 것이고,

 
   吾戒定慧吾戒定慧(오계정혜)는→ 나의 계정혜는 勸大根智(권대근지)이니→ 대근기의 지혜를 가진 사람에게 권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거 뭐 “戒定慧”라 하더라도 꼭 일정한 그런 해석이 없다고요. 그야말로 “隨方解縛(수방해박)” “方”을 따라서 속박을 풀어주는 것.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이런 표현도 있듯이...

 
   若悟自性(약오자성)하면→ 만약 자성을 깨달으면

亦不立菩提涅槃(역불립보리열반)이며→ 자성만 깨달으면. 마음만 깨달아 버리면, “보리다.” “열반이다.” 그런 이야기를 세우지 않는다 이겁니다. 쓸데없는 소리다 이겁니다.

 
   亦不立解脫知見(역불립해탈지견)이다→ “解脫知見” 이런 것도 세우지 않는다.

無一法可得(무일법가득)이라야→ 한 법도 가히 내세울 것이 없어야 方能建立萬法(방능건립만법)이다→ 그래야 만법을 건립한다. 하나라도 “이거다.” 라고 하면 거기에 그냥 속박이 돼버리니까 다른 것은 다 놓치게 된다는 뜻이지요.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어야. 내 세울 것이 없어야 능히 바야흐로 만법을 건립함이니,

 
   若解此義(약해차의)하면→ 만약 이 도리를. 이 뜻을 이해한다면, 亦名佛身(역명불신)이며→ 그것을 “佛身”이라, “부처의 몸”이라 한다.

亦名菩提涅槃(역명보리열반)이며→ 그것을 “보리열반”이라 해도 좋다 이겁니다. 또

亦名解脫知見(역명해탈지견)이라 해도 좋다 이겁니다.

 
   見性之人(견성지인)은 立亦得(립역득)이요→ 자기 성품을 제대로 봐 버린 사람은 온갖 이야기들을 다 세워도 괜찮고, 不立亦得(불립역득)이다→ 세우지 않아도 괜찮다. 전부 “공이다.” “없다.” “무다.” 이렇게 해도 괜찮다. 전부 “있다.”고, 전부 “있다.”고 “있다.”고 해도 또한 괜찮다. 자성을 봐 버리고 제대로 다 통해 버린 사람에게는 무슨 말도 다 O K입니다. 다 걸릴 것이 없다 이겁니다. 그런데 그런 이치를 모른 사람은 말 하면, 말 하는 족족 말에 걸리는 것이지요.

 
   去來自由(거래자유)라→ 가고 오는데 자유로움이라.

無滯無碍(무체무애)라→ 체함도 없고 걸림도 없어서,

應用隨作(응용수작)과→ 작용에 맞추어서. 응해서 쓰고 맞추어서 쓰고, 따라서 짓는 것과 또

應語隨答(응어수답)에→ 응해서 말해주고 그 말에 따라서 답해주는 것에,

 
   普見化身(보견화신)하되→ 널리 화신을 보되 온갖 화신을 다 보는 것이지요. 아이들 가르칠 때는 아이들의 선생님이고, 집에 가서는 자기 역할 따라서 자기 위치 찾는 그것이 應用隨作(응용수작). 應語隨答(응어수답)입니다. 말에 맞추어서 답을 해주는 것이지요.

 
   不離自性(불리자성)해서→ 자성을 떠나지 아니해서

卽得自在神通遊戱三昧(즉득자재신통유희삼매)니→ 그것이 곧 자재롭고 神通한 遊戱三昧를 얻는 것이니, 자유자재. 어디에도 걸릴 것이 없는 三昧를 얻는 것이니,

是名見性(시명견성)이니라→ 이것을 “見性” 이라고 한다.

 
   志誠(지성)이 再啓師曰(재계사왈)→ 재차 육조스님에게 말하기를, 如何是不立義(여하시불립의)니이까→ 어떤 것이 세우지 아니하는 뜻입니까? 저 앞에 “세우지 아니해도 되고, 세워도 된다.” 이 “세운다.” “세우지 아니한다.” 하는 것은 불교의 온갖 이치. 교리. 명언들. 보리. 열반. 해탈. 이런 것들을 놔두고 인정 하는 것. 不立= 인정 하지 않는 것. 어떤 것이 세우지 아니하는 것입니까? 하니까

 
   師曰(사왈) 自性(자성)이 無非(무비) 無痴(무치) 無亂(무란)하야→ 본래 우리 마음자리는 잘못이 없어. 아무 잘못이 없어. 아무런 어리석음도 없어. 아무런 혼란도 없었어. 念念般若觀照(염념반야관조)해서→ 생각. 생각에 지혜로서 관조해. 般若로서 觀照해서.

常離法相(상리법상)하면→ 항상 法相을. 법의 모습을 떠나면. 어떤 존재의 모습을 “法相”이라고 그러지요. 이런 때는...

 
   法相을 떠나면, 自由自在(자유자재)해서 縱橫無盡(종횡무진)이어니→ 가고 오는데 아무런 걸림 없고 자유자재 하고 종횡무진해서 有何可立(유하가립)이리요→ 거기에 뭘 세울 것이 있겠는가? “열반을 증득했다.” 또는“보리를 깨달았다.” “해탈을 얻었다.” 이런 말이 필요 없고, 또 그런 말을 한들 거기에 걸릴 것이 뭐 있느냐? “세운다.” “세우지 않는다.” 하는 것은 그런 겁니다.

 
   대개 불교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의 병이 그것이 의식 속에 들어와서는, 그것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그래 그런 名題(명제)들이 먼저 있는 것으로 아는 겁니다. 사람과 사람의 마음의 작용이 있고, 온갖 명제들이 있는데 사람 마음의 작용들을 깨달은 사람들이 이해시키려고 거기에 대한 이런저런 이름을 붙여 놨는데, 그 이름 붙여 놓은 것을 한참 공부하다가 보면, 그만 그 이름이 먼저 있고 현상들이 나중에 있는 것처럼 생각될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부정한다는 것은, 아주 대단한 해탈이고 대단한 혁명이지요. 우리는 상당히 신심 있는 이들인데, “부처다.” “조사다.” “석가모니다.” “아미타불이다.” “관세음보살이다.” “지장보살이다.” 아이 그것 뭐 아무것도 아니야.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상당히 거부감 느낄 것 아닙니까? 우리들 의식 속에는. 불자들의 의식 속에는 그것이 꽉 차있습니다.

 
   꽉 차있어서 “관세음보살”하면 함부로 해선 안 되는 자리지요. 말 함부로 불손한 소리 써도 안 되고, 지장보살이나 관세음보살이나 문수나 보현이나 그런 이들한테 불손한 말이나 불경한 표현을 하면, 아주 큰일 나는 것처럼 우리가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만치 병들어 있다 이겁니다. 그만치 세뇌가 되어 있는 것이지요. 그럼 그것을 “세우지 아니한다.”는 뜻은 무슨 뜻이냐? 이 말입니다.

 
   “不立의 義”가 뭐냐? 이겁니다. 사실은 참 중요한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고 보면 석가모니 한분이 實在(실재)했던 분이고, 그 외에는 전부 석가모니의 입을 통해서 建立(건립)된. 세워진 불보살이고 聖人(성인)들이라 이겁니다. 그럼 무엇이 진짜로 있느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은 또 따로 이야기해야 됩니다.

 
   석가모니인들 진짜로 있나요? 그것을 따져 보면, 나[我]인들 제대로 있는 거냐? 이렇게 생각해 본다면 그것은 우리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런 차원은 또 다른 차원이지만, “실재 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문제는 우리들 자신이나 이 세상이나 이 지구나 참으로 “실재 하느냐?” 사실 따져 들어가면 자신 있게 “실재한다.”고 우리가 말할 수 없는 입장이 물론 있습니다마는, 

 
   또 어떤 한 입장에서는 그런 名題(명제)들에 우리가 걸려서 옴짝달싹 못하는 경우가 적지가 않은 것이지요. 그래서 여기서 “세우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들 입니다. “보리”니 “열반”이니 하는 것... “보리”니 “열반”이니 이것은 지어놓은 이름인데 이것이 무슨 틀림없이 “보리”라는 것이 따로 물건이 존재 하듯이 탁 있는 것 같고, “열반”이라는 것도 틀림없이 뭐가, 어떤 돌이나 “금정산” 처럼 우뚝하게, 금정산보다 더 확실하게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요.

 
   이런 말을 평소 이렇게 공부하고, 거기에 늘 經(경)과 교리에 파묻혀 있는 사람들은요. 오히려 “금정산”을 부정  하기가 쉽지 “보리”니 “열반”을 부정하기가 어려워요. 그만치 의식 속에 박혀 있다고요. 그런데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 듣겠습니까? 어림도 없어요. 안 들어요. 틀림없이 “있다.”고 느껴지는데요뭐... 그리고 그런 환상에 사로잡힙니다. 사람 마음이란 것이...

 
   틀림없이 들고 올라가는 것으로 그렇게 생각이 든다니까요. 또 그런 정신세계가 펼쳐집니다. 또 그렇게 생각하면 그렇게 된다고요. “일체유심조” 그것이 그 교리에도 맞는 것입니다. 그런 어떤 현상이 생겨요. 그러니까 별별 짓들이 다 벌어지는 것이지요.

 
   自性(자성)을 自悟(자오)하면→ 자성을 스스로 깨달으면 頓悟頓修(돈오돈수)라→ 이것이 하고 싶은 이야기지요. 頓悟頓修라. 한꺼번에 깨닫고 한꺼번에 닦는 것이다 이겁니다. 그럼 당장에 “아! 사람이 부처구나!” 거기에 무슨 닦고 깨닫고 말고 따로 존재할 것이 없는 것이지요. 세월이 걸릴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알면 그 뿐입니다. “닦는다.”고 하는 것도, 말이 있으니까 할 수 없이 “頓悟”라고 하는 것이지요. “頓悟頓修”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래 “頓悟頓修”입니다.

 
   亦無漸次(역무점차)다→ 점차가 없다 이겁니다.

이것이 우리 正統(정통) 불교의 사상입니다. 이것을 근래에 제일 많이 주장한 것이 성철스님이지요. 육조단경을 성철스님이 특별히 자꾸 내세우는 것이 바로 이런 구절 때문에 그런 것이지요. 自性自悟하면 頓悟頓修라, 亦無漸次다. 이 구절! 이 세 구절이 아주...

 
   자기 마음이 스스로. 자기 마음을 스스로 깨달아 버리면 그걸로 끝입니다. 더 이상 없는 것이지요. 자신에 대해서 깨달아 버리면... 거기다 장엄하고 뭘 꾸밀 일이 없다는 것이지요. 所以(소이)로 不立一切法(불립일체법)이니라→ 그래서 일체법을 세우지 않는다. “보리”니 “열반”이니 “해탈”이니 “해탈지견”이니 뭐니. 뭐니 온갖 “계 정 혜”니, 불교에 그런 용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불교공부 많이 하면 그것이 소견이 툭 터져 버리면 걸리지가 않는데, 소견이 툭 터지지 않는 사람들은 그 이름 하나하나에 다 걸린다고요. 걸려서 요지부동 입니다. 그렇게 해석하면 되느니 안 되느니 하고 본래 없는 것을 갖다가 이름을 만들어 놓은 것인데...

 
   不立一切法(불립일체법)이니라→ 일체법을 세우지 않는다. 諸法(제법)이 寂滅(적멸)커니→ 모든 법이 텅 비어서. 고요하고 텅 비어서 有何次第(유하차제)리요→ 무슨 차제가 있겠나?

 
   제가 “사람이 부처님”이고 “無次第佛(무차제불)”이라. 次第= 순서대로 닦아 올라가서 한 계단 한 계단 되는 그런 부처는 이 세상에 없다는 주장을 자꾸 하는데요. 이 육조스님의 사상하고 다 연계가 되어 있는 겁니다.

 
   諸法寂滅(제법적멸)커니 有何次第(유하차제)리요→ 무슨 차제가 있겠는가?

志誠(지성)이 禮拜(예배)하고→ 지성이 그 말을 듣고 예배를 올리고는, 願爲執侍(원위집시)→ 細作(세작)으로. 다시 말해서 간첩으로 와서는 법을 배워 거기에 가서 전해 주려고 왔다가 그만 侍奉(시봉)을 하기를 작정한 겁니다. “나 시봉시켜 주십시오.”하고요. 그래서 시봉이 된 것입니다.

 
  朝夕不懈(조석불해)라→ 밤낮으로 전혀 게으름 없이 열심히. 열심히 시봉을 잘 하더라 이겁니다. 지성이라는 사람은 기연품에 나왔었지요? 기연품에 나왔던 사람입니다. 육조스님 제자 중에 빼놓을 수 없는 훌륭한 인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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