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님
2011.12.17 14:31

육조단경 강의 71 - 무비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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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1 강 - 頓漸品- 5

 

 
   曰, 學人이 識量이 淺昧하오니 願和尙은 委曲開示하소서

 
   師曰, 汝知否아 佛性이 若常인댄 更說什?善惡諸法이며 乃至窮劫하야도 無有一人도 發菩提心者리니 故로 吾說無常이 正是佛說眞常之道也며 又一切諸法이 若無常者인댄 卽物物이 皆有自性하야 容受生死일새 眞常性이 有不?之處리니 故로 吾說常者- 正是佛說眞無常之義니라 佛이 比爲凡夫外道는 執於邪常하고 諸二乘人은 於常에 計無常하야 共成八倒로 於涅槃了義敎中에 破彼偏見하사 而顯說眞常, 眞樂, 眞我, 眞淨이어시늘 汝今依言背義하야 以斷滅無常과 及確定死常으로 而錯解佛之圓妙最後微言하니 縱覽千?인들 有何所益이리요

 
   行昌이 忽然大悟하야 說偈曰

     因守無常心하야 佛說有常性하시니

     不知方便者는 猶春池拾礫이로다

     我今不施功하고 佛性이 而現前하니

     非師相授與요 我亦無所得이로다


   師曰汝今撤也니 宜名志撤이니라 撤이 禮師而退하니라
*******************************************************

 
   曰→ 僧志徹(승지철)이 말하기를 學人(학인) 識量(식량)이 淺昧(천매)하오니→ 지식의 양이. “아는 것이 얕고 어둡다.” 이겁니다.

願和尙(원화상)은→ 원컨대 화상은 委曲開示(위곡개시)하소서→ 좀 열어서 보여주십시오. 설명을 좀 자세히 해주십시오. 이런 말입니다. 나는 근기가 아주 천박하고 아주 몽매하다 이겁니다.

 
   師曰(사왈) 汝知否(여지부)아→ 그대는 아는가? 佛性(불성)이 若常(약상)인댄→ 불성이 만약에 항상 할진댄 更說什?善惡諸法(갱설심마선악제법)이며→ 만약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불성이 항상 하다면 무엇 때문에 善惡諸法을 다시 말할 것이 있겠느냐? 그리고 불성은 누구든지 다 가지고 있는 것인데, 그것이 진짜로 항상 하다는 것이 네 살림이 안 되었다 이 말입니다. 본인 살림이 안 된 겁니다.

 
   항상 하냐 안 하냐하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항상 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말이고 정말 자기에게 항상한 것이 되어야 됩니다. 자기살림이 되어야 된다고요. 자기공부가 그렇게 되어야 그것이 진짜 항상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 말의 내용이 그 말입니다. 내용은... 불성이 만약에 너한테 있어서 항상 하다면 더 이상 善惡諸法을 이야기할 까닭이 뭐 있느냐 이겁니다. 항상한 불성뿐인데...

 
   乃至窮劫(내지궁겁)하야도→ 세월이 다 할 때까지 無有一人(무유일인)도 發菩提心者(발보리심자)리니→ 한사람도 보리심을 발할 것이 없을 것이다 이겁니다. 菩提心 발하고 말고 할 것이 없다 이겁니다. 왜냐? 항상한 불성이 그것뿐인데 따로 “보리심 발 했다.” “발심 했다.” 뭐 어쨌다. 그것이 초심이니 불심이니, 있을 까닭이 없지요. 처음부터 항상 한데요. 善惡諸法도 없고요. 안 그렇겠어요?

 
   그러니까 불성이 無常(무상)한 것이 아니냐? 이겁니다. 어디 저 속에서 “항상 하다” “안 하다” 하던지 그것은 자기살림 자기공부가 안 된 상태에서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아무리 “항상 하다”고 하든 말든... 그래서 이 말이 맞지요. 항상 하다면 善惡諸法을 다시 말할 까닭도 없고, 영원토록 한사람도 발심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이 말입니다.

 
   無有一人(무유일인)도 發菩提心(발보리심). 無有一人도 發心. 한사람도 발심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발심이라고 한 것은 이미 변화 아닙니까? 그것은 무상이잖아요. 발심한 것이 사실은 무상이잖아요. 발심 안 하고 있다가 발심 했으니까 변화거든요. 變化(변화)는 無常(무상)한 것이니까요. 그 발심이라는 것도 웃기는 이야기가 된다 이것이지요. 그것이 다 무상한 것이지요. 항상 하고는 거리가 먼...

 
   故(고)로 吾說無常(오설무상)이→ 내가 말하는 “無常”이 正是佛說眞常之道也(정시불설진상지도야)며→ “무상하다.”고 하는 것. “항상함이 없다.” 고 하는 이것이 바로 부처님이 말한 眞常의 道다. ←이것이 아주 참 기가 막힌 말입니다. 무상한 것이 맞는 말이다 이겁니다. 무상한 것이...

 
   佛性(불성)이 無常(무상)하다는 그것이 진짜 좋은 말이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발심할 수 있지요. 발심해서 도 닦고, 나중에 도통하고... 그것이 무상하니까 가능하지 만약에 무상하지 않다면 그것이 안 된다 이겁니다. 쇠말뚝처럼 영원히 변함없는 꼿꼿한 그 모습으로 그대로 있을 거다 이겁니다. 사람 마음이 “발심한다.” “선행을 한다.” 하는 것이 사실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 아니냐? 이겁니다. 설명이 아주 참 그럴 듯. 건사 하지요?

 
   처음에 그렇게 주장하는 말만 딱 들으면 아주 어리둥절하고 이상하지요. 그러나 이렇게 아주 지극히 합리적이고 또 가슴에 와 닿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무상하다.”는 것. 佛性(불성)이 無常(무상)하다는 이것이.  부처님이 말한 眞常(진상)의 道다. 참답고 영원한 그런 도다 이겁니다. 이것이 참으로 좋은 도다 이것입니다.

 
   又一切諸法(우일체제법)이 若無常者(약무상자)인댄→ 일체 모든 도리가 만약에 “무상하다.”고 할 진댄 卽物物(즉물물)이 皆有自性(개유자성)하야→ 물물이 다 자성이 있어서 容受生死(용수생사)일새→ 전부 생사를 수용할새. 眞常性(진상성)이→ 眞常. 참되고 항상한 성품이 有不?之處(유불변지처)리라→ 두루 하지 아니한 곳이 있으리라. “무상하다.”고 한다면 “眞常性”이 어디 없는데도 있을 것이다 이겁니다.

 
   “무상하다.”고 한다면 물물이 전부 자성이 있어서 생사를 수용하고, 또 그것이 일정하지 않아서, 그 “眞常性”이 두루 하지 아니한 그런 곳이 있을 것이다. 어디든지 삼라만상이 똑 같이 평등해야 되는데... 평등해야 되는데 어디는“眞常性”이 있고, 영원하고 항상한 참된 성품이 있고 어디는 없고, “무상하다.”면 그럴 것 아니냐 이것이지요.

 
   그런데 모든 삼라만상이 다 똑 같이 참되고 영원하지 않느냐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거야말로 “항상 하다.” “항상 하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설명을 얼른 알아듣기가 조금 까다로운데 이것이 아주 참 기가 막힌 설명입니다. 故(고)로→ 그러기 때문에 吾說常者(오설상자)→ 내가 말한 “항상 하다.”고 하는 것. 저 앞에는 무상을 이야기하고, “항상 하다.”고 하는,

 
   善惡諸法(선악제법)이 “恒常(항상)하다.”고 하는 것이 正是(정시)→ 바로 佛說眞無常之義(불설진무상지의)이다→ 부처님이 말한 참으로 無常(무상)한 그런 이치다. “항상 하다.”고 하는 것이 참으로 무상한 이치이다. 그렇게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이해가 좀 돌아가려면 조금 생각을 해봐야 됩니다.

 
    佛(불)이 比爲凡夫外道(비위범부외도)는→ (꼭 이유를 부연해서 설명을 잘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지난 날, 범부외도는, 執於邪常(집어사상)하고→ 범부외도는 집착해서 삿된. ‘잘못된 항상 함에 집착하고.’ 그 말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니, 凡夫外道(범부외도) (우리가 해당되는 것이지요.) 범부외도는 잘못된 항상 함에 집착하고, 邪常(사상)에 집착하고, 말인 즉은 우리 생명이. 우리 육신이 아이고 이거 “무상한 것” “무상한 것”하지만, 사실 내심으로는 ‘항상 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사실은 절대 언제 죽으리라고 믿고 있지를 않습니다. 절대 그 생각 안 합니다. 말인 즉은 하도 우리가 경험을 많이 하고 해서 그렇지, 우리 마음 저 어느 구석에선 절대 죽는 것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邪常(사상)입니다. 안 죽으리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邪常입니다. 범부들은 그렇다는 겁니다. 생사가 무상한데 범부들은 “항상 하다.”고 그러는 겁니다.

 
   명예도 무상한데 “항상 하다.”그러고, 돈도 무상한데 “항상 하다.”그러고, 절대 내주머니의 돈 안 나올 걸로 알고, 내 벼슬은 안 떨어질 줄로 알고, 그렇지만 절대 그게 아니거든요. 그렇게 보통 상식적으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정말 내심까지 철저히 그렇게 “무상하다”고 이해하고 있지 않고, 내심은 ‘안 죽는다.’ 고... ‘죽는다.’는 것은 절대 부정하고, ‘항상 하다.’는 생각. 그것이 邪常(사상). 삿된 “항상함”입니다. 그것을 집착하고...

 
   諸二乘人(제이승인)은→ 이승들은 좀 달라요. 이승들은 차원이 좀 다른데요. 於常(어상)에 計無常(계무상)이라→ 항상 한데 있어서 ‘무상하다.’고 計常(계상)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무엇인가 하니, 涅槃四德(열반사덕)이 常樂我淨(상락아정)아닙니까? 사실은 恒常(항상)한 것이거든요. 눈을 뜨고 보면 항상 한데 항상 하지 않다고 보는 겁니다. ‘무상하다.’고 보는 것이지요. 기본교리이고 기초교리이지요.

 
   기초교리가 무엇이지요? 無常(무상). 苦(고). 空(공)이 아닙니까? 소위 三法(삼법)이지요. 諸行無常(제행무상) 諸法無我(제법무아) 涅槃寂靜(열반적정) 一切皆苦(일체개고) 이것을 四法印(사법인)이라고도 하고 三法印(삼법인)이라고도 하는데요. 그 “제행무상”이 기본이라고요. 불교를 이해하는데 첫째 “제행무상”을 알아야 된다. 이러거든요. “제행무상을 알아야 된다.”

 
   처음에 기본적으로 알아야 될 것이 “제행무상을 알아야 된다.” 그래야... 二乘들은 “제행무상”은 잘 알아요. 무상은 잘 알고 정말 항상한 도리는 모르고 있다는 이겁니다. 그것이 또 이 사람들의 병입니다. 중생들은 무상한 것을 항상 할 것이라고 믿고 있고, 이 이승들은 항상한 것을 무상하다고 알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常樂我淨(상락아정)이라고 그러거든요.

 
   涅槃經(열반경)에 있는 말인데 이것이 열반경 이야기니까요. 사실은 涅槃四德(열반사덕)이라고 해서 부처님의 열반의 경지는 항상 하고 常樂(상락). 그리고 一切皆苦(일체개고)가 아니고, 樂입니다. 즐거움이지요. 또 諸行無常. 諸法無我. 제법무아가 아니고 眞我(진아)입니다. 眞常(진상). 眞樂(진락). 眞我 이래요. 열반에서는... 그것이 불교의 진짜 참 좋은 점이거든요. 眞常(진상). 참으로 항상 하고 참으로 즐겁고 참 나. 眞我가 있다 이겁니다. 眞我...

 
   “진아”하면 불교공부 좀 한 사람들은 그런대로 또 짐작은 하실 겁니다. 진아에 대한 이야기는 많지요? 불교에도... 그 다음에 眞淨(진정). 우리가 不淨(부정)하다고 보잖아요? 특히 “二乘”들이... 이승들은 공부 좀 한 사람들은 전부 이 세상을 부정하다고 보는데요. 淸淨(청정)한 것입니다. 眞淨(진정). 참으로 깨끗한 것이다. “진리의 세계는 참으로 깨끗한 것이다.”라고 되어 있는데 二乘들은 그것을 부정하다고 보는 것이지요. 그래서 “諸二乘”들은 항상 한데서 무상하다고 計常(계상)을 한다.

 
   그래서 共成八倒(공성팔도)라→ 같이 여덟 가지 顚倒(전도)를 이룬다. 이 말입니다. 여덟 가지 전도... 범부들은 무상한 것을 “항상 하다.”고 하고, 괴로운 것을 “즐겁다.”고 하고. 조금 안목 있는 사람들은 “인생은 괴롭다.”고 하는데 우리 어리석은 중생들은 “즐겁다.”고 하거든요. 苦(고)를 樂(낙)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顚倒(전도)지요.

 
   無我(무아)를 我라고 보고, “내가 영원할 거”라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무상한 것이 세 가지로 이야기가 되는데, 사실은 처음에 영원하다고 보고, 그 다음에 무상하다고 보고, 다시 또 영원하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중생이 영원하다고 보는 것 하고, 깨달음의 눈을 얻은 사람이 영원하다고 보는 것 하고는 다른 차원이지요.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참으로 영원하다고 보는 것은 뭔가 제대로 보고 영원하다고 하면 좋은데, 그렇게 제대로 보지 아니하고, 내 생명에 대한 어떤 애착심에서 영원하다고 보는 겁니다. 내 지위. 내 재산. 내 생명. 내 육신. 이것을 영원하다고 보는 겁니다. 영원해야 된다고 고집을 하고, 영원할 거라고 믿는 그것이 첫째 잘못이고, 그 다음에 영원한 것을  무상하다고 보는 그것이 두 번째 잘못이지요.

 
  우리가 흔히 잘 아는 법문으로【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하는, 불교의 이치를 이해하는데 그것이 하나의 열쇠가 되지요.【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누구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닌 사람이 어디 있나요? 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지요. 그런데 그 다음 단계가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라고 禪門(선문)에 그렇게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사실 그렇거든요.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해도 불교공부 어지간히 한 사람은 고개 끄덕거린다고요. 자기 마음에 계합은 안 되었어도. 자기 살림살이는 안 되었어도 하도 들어 가지고 아,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닌 도리를 압니다. 남자가 남자가 아니고, 여자가 여자가 아닌 도리를 들어서 이론적으로 조금 짐작 한다고요. 거기 까지가 二乘(이승)입니다.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라고 한 것이 “二乘”들의 견해이고,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한 것은 범부들의 견해입니다. 최하급. 그냥 우리들 보통 범부. 외도들의 견해입니다. 그냥 맛 뵈기 이지요. 보는 대로 판단하는 거예요. 그 다음에 보는 대로 판단하다가 나중에 한 단계 깊어져서 이승들의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라고 봤다가 거기서 다시 내려오면...

 
    고봉정상 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그 정상을 넘어서 다시 내려오면, 다시 평면이 된다고요. 그 때는 그냥 “산은 산이고” 아닙니다. “산은 다만 산이고”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본문에요. 그 때야 비로소 지식을 떠난 경지라고 볼 수 있지요. 그것이 제대로 눈을 뜬 상태라고 할 수가 있지요. 그것은 처음에 범부들이 맛 뵈기로 보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한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지요. 다른 걸 이해하는 것도 그런 차원이 있을 겁니다. 그것을 나누면 세 가지 차원인데요. 하필 세 가지 차원뿐이겠습니까? 온갖 차원이 있을 수 있겠지요.

 
   常樂我淨(상락아정)에 대해서 범부 외도들의 네 가지 잘못. 또 이승들의 네 가지 잘못. 이래서 “여덟 가지 顚倒(전도)다.”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共成八倒(공성팔도)라→ 함께 여덟 가지 顚倒(전도)를 이루는 고로 於涅槃了義敎中(어열반요의교중)에→ 열반경. 了義敎 가운데서 破彼偏見(파피편견)하사→ 偏見을. 치우친 소견을 깨뜨린다.

 
   “了義敎”라는 것도 이것이 반대로 아니不(불)자를 써서 “不了義敎”가 있습니다. 부처님이 열반하시면서 열반경에서, 유언삼아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法四依(법사의)라고 해서 依法不依人(의법불의인). 그 사람의 법을 의지하지, 사람에 의지 하지 말라 그랬어요. “사람에 의지 하지 말라.” 대개 부처님이 생존 때도 그런 경우가 많았어요. 사람에 의지 하려고 들어요. 부처님한테 의지 하는데, 세존한테 의지 하는데 세존이 그냥 있나요? 늙어서 죽게 마련인데...

 
   그리고 또 그 후로는 부처님 같은 분은 인격적으로도 훌륭하니까 그렇다손 치더라도, 그 후로는 인격적으로 부처님 같지 못한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아는 것은 부처님만치 다 안다고요. 그 사람이 아는 법은 부처님이나 다를 바 없는데, 인격은 못 따라 간다고요. 인격을 보고서 “아이고 저 사람 법도 시원치 않다.” 이러면 지만 손해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법을 의지하지 사람에게 의지 하지 말라.” 또 依意不依語(의의불의어). 뜻에 의지하지 말 쫓아가지 말라. 不依語. “말 쫓아가지 말라.” 참 아주 중요한 말이지요.

 
   依法不依人(의법불의인). “법에 의지하지, 사람에게 의지 하지 말라.” 이 말세에는 정말 그거 염두에 둬야 됩니다. 우리도 젊을 때 스승들 많이 쫓아다니면서 배우고 그랬는데, 그 사람이 생활 하는 것을 보고는 신심이 떨어진다고요 솔직하게... 그러면 안 되는 겁니다. 그 분이 가르쳐주는 법만 생각해야지 그 사람의 생활 그거 보면 안 된다고요. 절대 생활은 생활대로 제쳐놓고 내가 취할 것만 취해 오면 되는 겁니다.

 
   벌이 꿀만 취해오지 무슨 뭐 가시나 꽃잎까지 취해오나요? 그럴 필요가 없다고요. 그러니까 부처님이 유언으로 말씀하셨어요. “절대 사람에게 의지 하지 말라. 그 사람이 가르치는 법에 의지하라.” 오죽하면 열반경에 유언으로 말씀했겠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하도 말을 쫓아가니까 “뜻에 의지하지 절대 말에 의지 하지 말라.” 依意不依語(의의불의어).

 
   그 다음에 依智不依識(의지불의식)이런 말이 있어요. 지혜의 가르침에 의지하지, 사량 분별로. 사변으로 뭐라고 뭐라고 나열해놓은 거기에 의지하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대개 우리 세속적인 철학. 특히 서양철학은 전부 識(식)입니다. 알음알이. 의식의 발달이지요. 그 의식에서 나온 이론이지요. 지혜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요. 불경은 깨달음의 지혜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다른 것이지요. 그냥 사변으로 머리 굴려서 표현하고 써놓은 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절대 지혜의 가르침에 의지하지, 識(식). 머리 굴려서 사변으로 깊이 思惟(사유)해서, 사유에서 나오는 가르침. 그것은 온전치 못하다 이겁니다. 사유라는 것은. 이것이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水路現像(수로현상) 이라고 그래서, 물이 한번 표면으로 물이 흐르면 처음에 쭉 그 길로 자꾸 물이 흘러가다가 나중에는 계곡을 이뤄버리거든요?

 
   思考(사고)라는 것이 자기가 한번 생각하기 시작하면 계속 그 길로 타당하게 자꾸 그쪽으로 이론 정립을 해나간다고요. 그 나름대로 타당하도록 이론 정립을 해나가는 이것이 우리의 의식입니다. 그럴듯해요. 상당히 그럴듯합니다. 그 사람은 그 길로 깊이 파고들었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그것이 옳은 것이 아니라고요. 궁극적으로 옳은 것이 아니지요.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이니 뭐니 그것. 그거 읽느라고 얼마나 고생합니까? 배울 것이 없어요 그거...

 
   정말 이성으로서 그냥 계속 깊이 파고들고, 또 비판하는 내용들이거든요. 진리에서. 지혜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요. 순전히 사변에서 나온 것이지 지혜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요. 그래 부처님은 그런 사유. 일반적인 사람들의 사유에서 나온 이론에 흐르기 쉽기 때문에, 依智不依識(의지불의식)이라. “지혜에 의지하지, 사유를 근거로한 識(식)에 의지하지 말라.” 그랬어요.

 
   그 다음에 依了義經不依不了義經(의요의경불의불요의경)이라. 경이 두 가지가 있어요. 了義經(요의경)과 不了義經(불요의경)이 있는데 了義는 완전한 뜻. 또 不了義는 완전하지 못한 뜻. 그런 의미인데요. 열반경 같은 경우는 요의경입니다. 대승경전을 대개 요의경. 소승경전을 불요의경. 義法四依(의법사의)라고 해서 네 가지 의지 할 것과 의지해선 안 될 것. ←이것을 열반경에서 유언으로 말씀하셨어요. 그래 “열반 요의경”이라는 말이 그 말입니다.

 
   “涅槃了義敎中(열반요의교중)” 열반경은 대승경전이고, 상당히 알아주는 법화경하고 열반경하고, 같이 치거든요. 그래서 이것은 “요의교다.” 불요교가 아니다 이겁니다. 불요의경은 대개 아함경이나 방등부 같은 경전이. 특히 아함부 같은 경전이 불요의경인데, 무슨 인과 이야기라든지, 전설 이야기라든지, 옛날 부처님의 因行時(인행시) 이야기라든지, 그런 자질구레한 이야기가 많아요. 그래서 그거는 보통 이야기꺼리는 되고 교훈은 될지언정, 살아가는데 교훈은 될지언정 진리를 깨닫는 데는 그렇게 대승경전에 비교해서 크게 좋은 것이 아니다. 그 많은 가르침 중에 언제 그거 다보고 이거 다보고할 겨를이 어디 있느냐 이겁니다.

 
   그것은 아예 물리쳐 버리고 “요의경만 의지해라.” 그래서 이쪽의 대승 불교권 에서는 아함부 경전을 별로 치지를 않습니다. 아함부 경전을 별로 보지를 않습니다. 요즘에 또 조금 봅니다만, 봐봐야 또 별로 별것 없고요. 주로 대승경전을 보고요. 그러면서 또 이쪽에는 禪(선)으로, 선불교로 발달을 해버렸기 때문에 언제 아함부 경전을 보고 말고 할 겨를이 없지요. 대승경전 보고 그 다음에 선불교. 선어록 같은걸 보기가 바쁘니까요. 대개 그렇습니다.

 
   그래서 涅槃了義敎中(열반요의교중)에 제대로 偏見(편견)을. 치우친 소견을 깨뜨렸다. 이 육신은 “항상 하다.” 또 “항상 하지 않다.” 그것이 다 치우친 것이거든요. 中道(중도)적인 견해를 가지려면 그래 항상 하기도 하고, 항상 하지 않기도 하고, 항상 하지 않으면서 또 항상한 면이 동시에 공존하고 있다는 인식으로 나가야지, 그냥 무엇은 “항상 하다.” “마음은 항상 하다.” “육신은 무상하다.” 이렇게 딱 잘라서 말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처님도 이미 “질량 불변의 원칙”을 이야기 했습니다. “물질이 불변하다.”고 그랬어요. “육신이 항상 하다.”고 그랬어요. “육신이 항상 하다.”고... 형태는 변하지마는, 항상한 겁니다. 그래서 “幻化空身(환화공신)이 卽法身(즉법신)이다.” 바로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항상 하다.” “항상 하지 않다.” 고 잘라서 이쪽 동네는 항상 하고, 저쪽 동네는 항상 하지 않다고 이런 식으로만 이야기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편견이고, 중도적인 바른 소견이 못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顯說眞常(현설진상) 眞樂(진락) 眞我(진아) 眞淨(진정) 眞常→ 참으로 항상 하고. 眞樂→ 참으로 즐겁고. 眞我→ 참나. 眞淨(진정)→ 부정한 것이 아니라 觀身不淨(관신부정). 몸이 부정한 것으로 “觀(관)하라.” 그러거든요. “아니다.” 이겁니다. 참으로 깨끗한 것이다. “참으로 깨끗한 것이다.”라고, 그렇게 顯說(현설)→ 드러내서 설하셨거늘,

 
   汝今依言背義(여금의언배의)하야→ 그대는 지금 말을 의지해서 뜻을 등졌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앞에서 “依意不依語(의의불의어).”라고 그랬지요? 뜻에 의지하고 말에 의지 하지 말라. 言(언)과 語(어)가 나오네요. 言背義(언배의)가→ 不依語(불의어)가 돼버렸지요. 말에 의지 하고 뜻은 등져버린 그런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이것도 육조스님께서 열반경에서 法四依(법사의) “依意不依語(의의불의어).”라고 그 말을 염두에 두고 아마 이런 말씀을 하신것 같습니다. 말에 의지하고 뜻은 등져서

 
   以斷滅無常(이단멸무상)과→ 단멸무상과 그리고 及確定死常(급확정사상)→ 딱 없다고 “없어서 무상하다.” 죽으면 그걸로 끝이다. 그것이 斷滅 이거든요. 斷滅이면서 또 無常하다 이겁니다. 그리고 또 “確定死常”이라는 것은 ‘항상 하다.’고 생각하는 그것을 죽음이라고 하는 문제. 이것이 “확정 지어져 있는 것.” 그걸로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 그런 어떤 확정된 죽은 항상. 이것이 살아있는 “항상함” 이라야 되는데, “죽은 항상”이다. 그래서 “항상 하다.”고 딱 치우쳐 놓으면, 그것은 죽은 것이 되어 버린다 는 말입니다.

 
   이런 낱말은 경전이나 어록 같은데 잘 안 쓰는 낱말인데요. “死常(사상). 죽은 항상 이다.” 비슷한 표현을 육조스님은 간혹 쓰시는데요. “죽은 항상함”을 확정함으로서 而錯解佛之圓妙最後微言(이착해불지원묘최후미언)하니→ 錯解. 그릇 알았다. 잘못 이해했다. 무엇을? 부처님의 원만하고 미묘하고, 최후의 미묘한 말씀. “微言”이라는 것은 진리의 말씀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최후의 진리의 말씀을 錯解. 그릇 이해했으니,

 
   縱覽千?(종람천편)인들→ 비록 千?. 열반경을 천 번 읽은들, 有何所益(유하소익)이리요→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行昌(행창)이 忽然大悟(홀연대오)하야→ 홀연히 그 말에 깨닫고는 說偈曰(설게왈)→ 게송을 설해서 나타내는데...

 
  【因守無常心(인수무상심)하야→ 無常心. 무상한 마음을 지키는 것을 인해서, 佛說有常性(불설유상성)하시니→ 부처님이 有常性을 설하시니, 사람들이 외도들에게 외도= 二乘(이승)들. 外道凡夫(외도범부)가 아니고 이승들의 마음을 지키는 것을 인해서 有常性을 설했다 이겁니다.

 
   앞에서 제가 그랬지요? “무엇을 이해하느냐?”라고 하는 것. 무슨 “항상 하다.” “항상 하지 않다.”고 하는 그 對象(대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이해하는 내 마음이 항상 하냐? 항상 하지 않으냐? 하는 것에 중요한 열쇠가 있다는 말을 했는데,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들이 無常心 지킴을 인해서, 有常性을. 항상 하다는 성품을 설했지요. 그 病(병)을 없앤다고... 그러니까 有에 집착하는,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그 병을 제거하기 위해서 空(공)을 이야기 하고, 공에 또, 空病(공병)에 들어 있는 사람을 위해서는 유를 이야기 하고, 병을 제거하기 위해서 그런 방편을 쓰는 것이지요.

 
   不知方便者(부지방편자)는→ 그 방편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猶春池拾礫(유춘지습락)이로다→ 마치 봄 못에 돌을 주워서 황금이라고 오해하는 것과 같다. 방편을 알아야지요. “항상 하다.”라는 말도 방편이요. “무상하다.”라는 것도 방편입니다. 요컨대 자기 마음이 어디에 가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설하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상대의 병을 치료하기 위한 약방문이다. 이 말입니다. 그런 방편을 모르는 사람은 못에서 돌을 주워서 금이라고 얼토당토않게 이해하는 것과 같다.

 
   我今不施功(아금불시공)하고 佛性(불성)이 而現前(이현전)이니→ 이것이 이 돈견품에 이 이야기가 들어있는 그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我今不施功→ 나는 지금 功을 베풀지 아니하고, 佛性而現前했다. 그랬어요. “功을 베풀지 아니하고, 佛性而現. 이 “佛性而現前했다.”는 말은 성불했다는 뜻 아니겠어요? “성불했다.”

 
  성불하는데 功이 필요 없다고요. 공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참선한다고 성불하는 것이 아니라고요. 차곡차곡 쌓여서 성불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功을 베풀지 않고, 佛性而現前(불성이현전)했다. 성불했다.” 이것이 頓敎(돈교)입니다. 頓敎. 頓悟頓修(돈오돈수)입니다. 한꺼번에 깨닫고 수행도 한꺼번에 되는 것이지요.

 
  수행이랄 것도 없지요. 사실은 말을 하자니까 頓修(돈수)지요. 功을 베풀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공 베푸는 것 하고 부처 되는 것 하고는 아무 관계없습니다. 그래서 영가 증도가에도 求佛施功(구불시공) 早晩成(조만성)가. 부처를 구하기 위해서. 성불하기 위해서 功을 베풀어서 언제 되겠는가? 이겁니다. 부처되기 위해서 功을 베푸는 것은 안 된다 이겁니다. 부처하고 관계없는 것이지요. 有漏福(유루복)은 짓지요. 有漏福. 복은 지을 수 있을지언정 부처되는 것 하고는 아무 상관없다 이겁니다.

 
   “求佛施功(구불시공) 早晩成(조만성)가” 라는 말이 성불하기 위해서 功 베푸는 것. 선행을 한다. 육바라밀을 닦는다. 하는 이것은 성불하고는 아무 관계없는 것이다. 그거해서 부처되는 줄 알지 말라 이겁니다. 我今不施功(아금불시공)하고 내가 지금 功을 베풀지 아니하고, 佛性而現前(불성이현전)이라. 이것이 頓悟頓修(돈오돈수) 사상입니다.

 
   非師相授與(비사상수여)요→ 스승이 서로 授與하는 것이 아니요.

我亦無所得(아역무소득)이다→ 나도 또한 얻은바가 없다. 달리 새롭게 얻은 것이 아니다 이겁니다. 본래 있던 것이다. 본래 갖추고 있는 것이지 내가 언제 뭐 “스님이 나에게 줬소?” 줘야 얻지, 준바도 없고 얻은 바도 없다 이겁니다. 非師相授與(비사상수여) 스승이 나에게 서로 수여한 것도 아니고, 나 또한 所得이 없다. 얻은바가 없다. 본래 갖추고 있더라. 본래 부처더라.

 
   제가 “사람이 부처님이다.”하는 책을 쓴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알고 보면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법화경은 그것을 중심으로 계속 수기를 주는 것이고, 그 이야기를 계속 반복해서, 수십 번 반복해서 하는 내용이지요. 그것을 제가 확연히 드러내서 “사람이 부처님이다.” 그런 말을 제목을 붙여서 했는데요. 여기에 그런 말 아닙니까? 我今不施功(아금불시공)하고 佛性(불성)이 而現前(이현전)이라. 非師相授與(비사상수여)요. 스승이 서로 수여한 것도 아니고 나 또한 얻은바가 없다.】

 
   어떤 도반이 그 책을 읽고는, “고통 없는 부처는 없다.”고 한 그 말이 깨닫게 했다. 눈을 번쩍 뜨게 했다. 그러더라고요. “고통 없는 부처는 없다.” 아! 참! 정말 그렇구나 하고... 그동안 공부 하다가 비로소 거기에 뭔가 딱 계합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고통 없는 부처는 없다.” 고통 있는 그대로 부처입니다. 고통 있는 그대로... 이해가 되는지 안 되는지 그것이 문제지만, 저는 할 말 다 한 겁니다. 이해가 되든 말든 저는 할 말 다 한 겁니다. 제가 그동안 불교공부 하면서 지금까지 깨달은 바는 그래요. 그러니까 더 이상은 없어요. 제 살림은 그거니까요.

 
   師曰汝今撤也(사왈여금철야)니→ 그대는 지금 사무쳤다. “깨달았다.” 이말입니다. 撤(철)= 사무쳤다. 깨달았다. 알았다. 宜名志撤(의명지철)→ 뜻이 사무쳤으니까 志撤이라고 하자. 당연히 志撤이라고 이름 하자. 撤(철)이 禮師而退(예사이퇴)하니라→ 스님에게 예배를 하고 물러갔다 하는 아주 극적인 장면입니다. 살다가 이런 소식이 와야 그래도 사는 맛이 있는데...

 
   우리가 성불에 관심이 있느냐? 없느냐? 그것은 우선 各自(각자)의 문제로 놔두고요. “아이고 나는 뭐 부처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도 할 수 없어요. 그것은 각자 문제로 놔두고... 그래도 불교는 성불 이야기를 빼버리면 불교 이야기가 안 되니까 성불의 문제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제대로 알고 있어야 된다는 것이지요.

 
   대개 삼아승지겁 아니라, 모든 세월을 닦아서 부처가 된다는 이야기들 많습니다. 그런 이야기가 좋으면 그대로 하세요. 그러나 이쯤하면 그래도 각자 근기 따라서... 그거는 근기에 맞추는 이야기입니다. 근기에 따라서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요. 이거는 근기에 따라서 할 수밖에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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