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님
2011.12.17 14:32

육조단경 강의 72 - 무비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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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2 강 - 頓漸品- 6

 

 
   有一童子호되 名은 神會니 襄陽高氏의 子라 年이 十三에 自玉泉來하야 ?禮어늘 師曰, 知識이 遠來艱辛하니 還將得本來否아 若有本則合識主리니 試說看하라 會- 曰以無住로 爲本이요 見卽爲主니이다

 
   師- 曰, 這沙彌- 爭合取次語오 會乃問曰, 和尙이 坐禪에 還見이니이까 不見이니이까 師以柱杖으로 打三下云, 吾打汝하니 痛가 不痛가 對曰亦痛亦不痛이니이다 師曰, 吾 亦見亦不見이로라 神會問, 如何是 亦見亦不見이니이꼬 師曰, 吾之所見은 常見自心過愆하고 不見他人의 是非好惡일새 是以로 亦見亦不見이어니와 汝言亦痛亦不痛은 如何오 汝若不痛인댄 同其木石이오 若痛인댄 則同凡夫라 卽起?恨이니 汝向前에 見不見은 是二邊이요 痛不痛은 是生滅이라 汝自性을 旦不見하고 敢爾戱論가 神會- 禮拜悔謝한대

 
  師又曰, 汝若心迷不見인댄 問善知識覓路요 汝若心悟인댄 卽自見性하야 依法修行이어늘 汝自迷하야 不見自心하고 却來하야 問吾의 見與不見하니 吾見은 自知어니 豈代汝迷며 汝若自見인댄 亦不代吾迷어늘 何不自知自見하고 乃問吾의 見與不見가

 
   神會- 再禮百餘拜하야 求謝過愆하고 服勤給侍하야 不離左右러라 一日은 師告衆曰, 吾有一物호되 無頭無尾하며 無名無字하며 無背無面하니 諸人은 還識否아 神會出曰, 是佛之本源이요 神會之佛性이니다

師曰, 汝向道無名無字어늘 汝便喚作 本源佛性가 汝向去하야 有把?盖頭라도 也只箇成知解宗徒하리라 祖師滅後에 會-入京洛하야 大弘曹溪頓敎하고 著顯宗記하야 盛行于世하니라

 
   師-見 諸宗이 問難하야 咸起惡心하야 多集座下하시고 愍而謂曰, 學道之人은 一切善念惡念을 應當盡除라 無名可名을 名於自性이니 無二之性이 是名實性이라 實性上에 建立一切敎門이니 言下에 便須自見이니라 諸人이 聞說하고 總皆作禮하야 請事爲師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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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속의 정월 보름은 다른 의미가 있지만, 절에서는 동안거 해제일이지요. 시월 보름에 結制(결제)를 해서 정월 보름에 解制(해제)를 하는데요. 禪房(선방)에서는 한 삼 일전에 放禪(방선)을 하지요. 아침저녁으로는 물론 선을 하고 낮에는 방선을 하고, 그 동안 사용했던 침구나 방석이나 그 외에 도량. 방들 구석구석에 대청소를 싹 몇 일간합니다.

 
   그렇게 해서 해제하고 또 새로운 스님들이 오면, 새로 온 스님들이 깨끗하게 사용하실 수 있도록 방석도 깨끗이 빨아서 정리해 놓고, 이불도 깨끗이 빨아서 정리해 놓고, 한 이삼일 동안 열나흘 날 까지 다 마치지요. 그리고는 보름날은 가벼운 마음으로 해제법문 듣고, 점심 먹고 걸망지고 산을 내려오는데 걸망이 아무리 무거워도 제일 가볍게 느껴질 때가 해제하고 내려올 때입니다.

 
   제가 겨울해제를 여러 번 했지만, 오대산 상원사. 어느 해에 동안거를 하고 해제했을 때, 해제를 해도 어떻게 나가고 싶지 않더라고요. 눈이 상당히 많이 쌓여가지고... 눈이 상당히 많이 쌓여가지고 해제하고도 안 나갔는데, 안 나간 사람들이 5명. 한 30명쯤 살다가 5명이 안 나가니까 소임이 전부 바뀌어요. 

 
   소임자가 전부 바뀌어서 공양주. 채공. 부전. 이런 것을 전부 겸해서 하게 되지요. 방 청소. 화장실 청소. 물 져다 나르는 것. 밥 짓는 것. 국 끓이는 것. 이것이 사람이 다 있을 때는 국 끓이는 갱두 따로 있고, 밥하는 공양주 따로 있고, 반찬 하는 채공 따로 있고, 또 상 나르는 관상 따로 있고, 전부 소임자의 이름이 다 있어요.

 
   화장실 청소하는 제공들 ←(잘 모르겠음.) 따로 있고, 또 큰방 청소하는 부전이니 지전이니 하는 소임도 따로 있고, 아침에 예불하고 도량석 하는 노전도 따로 있고, 전부 일마다 소임 이름이 다 있어서 그렇게 했는데 나가고 나면 일은 똑 같은데, 사람은 적고 해서 누군가 선방을 지키는 사람이 몇 명이나 대 여섯 명은 늘 있어야 되니까 또 있기 마련이고요. 누가 있어도... 겸해서 그렇게 했어요.

 
   제가 그 전에 그 이야기 자주 했는데요. 지금도 어느 산에 계시는 도반이. 그 스님이 결제 때는 채공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우리도 다 돌아가면서 채공도 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바뀌어 가면서 했는데요. 어느 날 그 스님이 채공으로 떡 들어갔는데요. 그 때 반찬이라는 것이 상원사의 김치, 짜기로 유명해요. 소금보다 더 짠 김치가 상원사의 김치다. 할 정도로...

 
   대중은 많고 반찬이라고 해 봐야 거기서 나는 채소. 무우 배추뿐이지요. 그것으로 수십 명이 되는 사람들이 여러 달을 먹어야 되니까 그럴 수밖에 없어요. 거기에 그 유명한 하남스님이 계셨잖아요. 근년에는 진짜 坐脫(좌탈). 앉아서 열반하신 스님이 하남스님이거든요. 근래에... 옛날 스님으로서는 많았겠지만...

 
   근래에 육이오 전후해서 열반하신 스님인데 그 스님이 정말 앉아서 열반하셨고, 군인들이 사진도 찍어서 세상에 많이 알려지고 그랬어요. “이제 나오라”고, “공비들이 거기 은거 한다.”고... 그 때 오대산 간첩사건도 상원사에서 있었고 했는데, 옛날부터 하여튼 그런 곳입니다. 그래서 육이오 때 공비들이 많이 은거 한다. 고 “스님, 나오시라”고, “나오시라”고, 피난 가시라고 그러니까 삼일만 기다려 달라고 그랬어요. 삼일만 기다려 달라고...

 
   군인이 그 주변에 늘 지키고 있었는데 삼일 기다리는 거야 아, 기다려 드리겠다고, 그런데 3일후에 가니까 앉아서 열반 하신 겁니다. 군인이 그걸 보고는 그만 감동  해서 “우리가 지키자. 이 절을 불을 지를 수 없다.” 해서 불 안 질렀다는 그런 이야기도 전해 내려오는데,

 
   그 스님이 참기름을, 벼가 달리는 그 부분 아주 야물지요? 그걸 기름병에다 딱 적셔 가지고 국에다 타서 한 삼 사십 명 대중들에게 그렇게 해서 참기름 맛을 보였다는 겁니다. 이건 절에서나 들을 수 있는 이야기지요. 볏짚 가늘은 부분을 기름병에다 참기름을 적셔서 국그릇에 흔들어 주고, 다시 적셔서 국그릇에 흔들어 주고 차라리 한꺼번에 넣었으면 더 적게 들텐데 아끼느라고 그렇게 하니까 덜 들었는지 어쩐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런 정도로 생활 했어요. 그래야 생활이 되는 그런 곳입니다.

 
   그런데 겨울 동안에는 늘 무김치. 그것이 제일 인기 있고 좋아요. 무가 잘돼요. 추운 곳이니까 무가 맛이 있어요. 그런데 무김치. 그거 썰어봐야 써는 방법이 뻔한데 그런데 도반 그 스님이 채공간을 맡더니 매 끼마다 무김치가 달리 나오는 거예요. 같은 무김치인데 써는 방법이 다른 겁니다. 써는 방법이...

 
   깍두기 같이 썰었다가 길게 썰었다가, 물을 채웠다가 물을 뺏다가, 하여튼 일주일 소임 보니까 스물 한번 먹잖아요. 삼칠21 하루세끼. 스물 한번을 한 번도 같게 써는 법이 없어요. 어떨 때는 그냥 내놓는 겁니다. 어떻게 먹으라고? 알아서 먹으라 이겁니다. 그래 숟가락으로 비져 먹는 거예요. 젓가락으로 비져 먹기도 하고... 그런 식으로 무 반찬 한 가지를 가지고도 그렇게 변화를 주니까 맛이 다르다고요. 그래 참 ‘아, 이것이 고정관념에서부터 벗어나는 것. 해탈이 바로 이런 걸로부터 출발하는구나.’ 하고 그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어서 그 이야기를 간혹 한 번씩 합니다.

 
   해제 날 거의 가 버리고 너 댓 명 남았는데요. 겨울에 제가 수두를 했어요. 수두는 대중들이 사용할 물을 운반할 책임이 수두입니다. 얼기 전에 물 관리를 잘 했어요 하여튼... 물홈 대 관리를 잘 했는데, 그래도 아무리 잘 해도 그 홈 대로 내려오는 물이니까요. 눈이 오고 영하 10도씩 되니까 얼어버린 겁니다. 결국은 얼더라고요. 어쨌든 매일 눈 만 오면 한 밤중에 가서는 눈을 쓸거든요.

 
   홈 대의 눈을 쓸어야 물이 내려오지 안 그러면 눈이 쌓여서 물이 넘치면 얼어버리거든요. 그래서 눈만 온다 하면 만사 제쳐놓고 가서 쓰는 겁니다. 그렇게 관리 했는데도 얼어버렸어요. 그러니까 물을, 결제하고 한 달쯤 지나고 반 결제쯤 됐을 무렵부터는 얼어버려서 물을 하루에 30짐을 졌어요. 물지게로 30짐. 수두가 두 사람이었어요. 저 하고 또 다른 스님 둘인데 물을 하루에 30짐을 져다가 대중들이 세수 등 허드렛물 다 쓰고, 공양간 에서 밥하고 뭐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요. 30명 대중이 쓸 물을 두 사람이 물지게로 운반했어요. 그래도 하나도 힘든 줄 모르게 그렇게 살았어요. 그 눈길을...

 
   그런데 해제하고 가 버리고 달은 청청 밝고 눈은 환하게 내려서 月(월)이고 雪(설)이고 온 천지가 희지요. 달도 희고 눈도 희고 온 천지가 다 흰데, 山深夜深客心(산심야심객심)이라. 서산스님의 詩(시)가 그런 것이 있거든요. 산도 깊고 밤도 깊고 나그네의 근심도 깊더라. 하는 그런 말이 있는데 정말 그런 풍경이지요. 묘향산 같은 데야 오죽 하겠습니까? 겨울도 한 겨울에... 서산스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지만. 오대산도 그런 정도입니다.


   그 해제 날 달은 휘영청 밝은데, 눈은 하얗고 그 많던 대중들이 다 가 버리고, 한 댓 명 그냥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있고, 촛불 켜고 살 때니까요. 달은 휘영청 밝은데 내일 쓸 물을 져다 날라야 되는데, 한 사람은 가 버렸으니까 저 혼자 지는 거예요. 다섯 명 쓸 거니까 별로 많이 안 져도 되기는 되지만, 그래도 한 여남은 번 져다 놔야 된다고요.

 
   그때 눈은 환하게 내렸는데 달은 아주 휘영청 밝고 대중은 없고, 혼자 물지게를 지고 눈길을 여남은 번 오르내리면서 밤에 져다 나르는데 아~ 참 그 때 기분은 정말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대요. 그 도 닦는 사람도 그 때는 눈물이 나더라고요 이상하게... 그 날. 해제 날 저녁에 많이 울었습니다. 다 가 버리고 혼자. 그 스님하고 늘 같이 졌는데 저 혼자 지게 되니까 그런 것도 있고...

 
   그런 날이 바로 정월 보름. 전통적인 생활풍습이라고 할까 절 생활이 그런 것들도 있다는 것. 또 그 상원사의 배경으로 선방생활이 잘 그려져 있는 “선방일기”라는 것이 있지요? 유명한... 옛날 신동아에 논픽션으로 당선 돼서 상도 타고 했던 건데요. 옛날에 그거 많이 읽혔거든요. 그러니까 근래에 책이 또 나왔지요.

 
   그것이 본래 한 20년인가 30년 전에 공모해서 당선된 글입니다 그것이... 그러다가 근래에 한 3, 4년엔가 또 많이 읽히고 그랬는데요. 그거 보면 상원사의 생활이 나타나있기도 하고 그렇지요. 정월 보름 아침이 해제라서 그런 생각이 나서, 이런 기회에 절 풍습. 이런 것들도 한번 드리는 말씀입니다.

 
   有一童(유일동자)호되→ 한동자가 있었는데 名(명)은 神會(신회)니→ 이름은 신회다. 襄陽高氏(양양고씨)의 子(자)라→ 고씨의 아들인데 年(년)이 十三(십삼)에→ 나이가 13세. 自玉泉來(자옥천래)하야→ 옥천 이라는 곳. 옥천사라고도 합니다. 옥천사라는 곳에서부터 여기 육조스님 밑에 왔다 이겁니다. 13세에...

 
   요즘 40넘어서 중 될 사람이 하도 많아서, 지금 40으로 제한해 놓으니까 아우성입니다. 인생 완전히 실패 해서 마흔 넘어서 들어오면 절에서는 어떻게 하라고... 성공한 사람들도 물론 간혹 있지만 대개 40넘어서 들어온 사람들은 세상에서 인생 실패한 사람들이거든요. 실패한 사람이 꼭 절에 가라는 법도 없는데, 요즘 제한을 해 놓으니 아우성입니다.

 
   여기 보세요. 보통 13세입니다. 조주스님 같은 도인은 아홉 살에 출가를 했거든요. 아홉 살에... 절에서는 동진출가를 제일 높이 사 줍니다. 童進出家(동진출가)... 세상 때가 안 묻었을 때요. 전생에 묻은 때야 어쩔 수 없지만, 최소한도 금생에라도 때가 덜 묻었을 때 들어온 것을 제일 높이 사거든요. 어려서 들어와서 익혀도 이것이 될까한 일인데...

 
   세상 때 잔뜩 묻혀가지고 되겠나? 그런 생각보다는 이 기존의 스님들이, 40이상 된 사람들을. 40도 많아요. 40도 많은데 40이상 된 사람들을 어떻게 할 길이 없어요. 자기보다 나이 많고, 세상 경험 많고, 완전히 스님들보다, 스님 머리 꼭대기에 앉아 있는데, 어떻게 다룰 수가 없어요. 가르칠 수도 없고 다룰 수도 없고... 그래서 40으로 제한해놓은 겁니다. 50으로 해놓으니까 40대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서... 그래서 우리가 도저히 가르칠 능력이 없어요. 담당할 길이 없어요. 그래서 너무 낮추기는 그렇고 40정도로 낮추자 해서 근래에 낮춰놨는데, 곳곳에서 40 넘은 사람들이 야단입니다. 한 번만 봐 달라고. 한 번만 봐 달라고...

 
   13세에 옥천으로부터 와서, ?禮(참례)어늘→ 참례하거늘, 師曰(사왈) 知識(지식)이 遠來艱辛(원래간신)하니→ 원래 선지식이라고 말하니까, 열세 살 먹었든 세살 먹었든  육조스님은 모든 사람들을 “선지식”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선지식이 고생스럽게 멀리서 와서 고생을 하니,

 
   還將得本(환장득본) 來否(래부)아→ 또한 근본을 가지고 온 것이 있느냐? 이겁니다. 뭔가 네가 무슨 꺼내 보일만한 어떤 정신이 있느냐? 아니면 사상이 있느냐? 아니면 네 의지가 뜻이. 뭔가 있느냐? 근본이 있느냐? 이것이지요. “本”은 그런 겁니다. 근본을 가져 온 것이 있느냐?

 
   若有本則(약유본즉)→ 만약에 그런 근본. 근거. 뿌리. 이런 의미지요. 그것이 있다면 合識主(합식주)리니→ 합당히 주인을 알 것이다. 여기서 “주인”이라고 하는 말은 주인공. 너 자신을 알 것이다. 참으로 네가 뭔가 근본정신이 제대로 똑바로 박혀서 온 사람이라면 분명히 너의. 너 자신. 너 주인공을 알 것이다.

試說看(시설간)하라→ 그러니 한번 이야기 해봐라. 워낙 어린 사람이 왔으니까 이렇게 물은 겁니다. 그런데 아주 똑똑한 사람이었어요.

 
   會曰(회왈)→ 회가 말하기를 以無住(이무주)로 爲本(위본)이요→ 머물음이 없는 것으로서 근본을 삼는다. 머물음이 없는 것으로서 근본을 삼는 것이 나의 근본이다 이겁니다. 어디에 머물러 있던지, 무슨 眞如(진여)다. 佛性(불성)이다. 涅槃(열반)이다. 그런 불교적인 사상이나 정신을 가지고, 거기에 내가 머무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도 집착해서 머물지 않는 그것으로서 근본을 삼는다. 그런 뜻이지요.

 
   以無住(이무주)로 爲本(위본). 또 “주인”하는데,

見卽爲主(견즉위주)니이다→ 내가 이렇게 스님 친견하면 곧 그것이 뭐가 하는 것이겠습니까? 거기에 뭔가 없다면 서로 보고 인사하고 친견하는 일이 있을 수 없지 않느냐? 이 말이지요. 벌써 서로 본다고 하면, 서로 이렇게 인사를 한다고 하면 거기에 이미 주인이 있는 것이 된다.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아주 똑똑한 대답이지요.

 
   師曰(사왈) 這沙彌(저사미) 爭合取次語(쟁합취차어)오→ 이 사미가(비구계 받기 전에는 사미라고 그러지요.) 사미가 어찌 다음 말까지 다 해버리냐? 근본을 물었는데 주인까지 이야기를 하니까요. 주인 이야기는 않했거든요. 육조스님은 네가 근본을 가져 온 것이 있느냐? 그랬어요. 근본 이야기 하고 주인 이야기까지 다 해버리니, 어찌 다음 말까지 다 해버리냐? 다음 말은 내가 하도록 놔둬야지 왜 네가 다 하냐? 이런 뜻이 됩니다.

 
   會乃問曰(회내문왈)→ 신회가 이에 묻기를 和尙(화상)이 坐禪(좌선)에 還見(환견)이니이까→ 좌선할 때, 저 앞에 “見卽爲主(견즉위주)” 그랬지요? 바로 앞에서 그랬지요? 우리 서로 보면 “主”가 된다. 그러니까 좌선할 때 무얼 봅니까? “還見” 무엇을 봅니까? 아니면 不見(불견)이니이까→ 아무 것도 안 봅니까? 이런 질문이 좀 이상하지요. 좌선할 때 뭘 봅니까? 아니면 보지 않습니까? 하니까

 
   師以柱杖(사이주장)으로→ 육조스님이 주장자로서

打三下云(타삼하운)→ 딱. 딱 쳤다는 뜻입니다. “三下”라는 말은요. 云, 吾打汝(오타여)하니→ 내가 너를 때렸다. (주장자를 가지고 방바닥을 때렸는데) 내가 너를 때렸다. 때렸으니 네가 痛(통)가 不痛(불통)가→ 아프냐? 아프지 않느냐? 그렇게 질문하면 참 곤란 하지요? 대답할 길이 없지요. 다른데를 주장자로 때리는 시늉만 하고, 아프냐? 아프지 않느냐? 이렇게 물었어요.

 
   對曰(대왈)→ 대답하기를 亦痛亦不痛(역통역불통)이니이다→ 아프기도 하고 아프지 않기도 합니다. 이 신회라고 하는 제자는 육조스님 제자 중에서 머리가 제일 아주 복잡하고, 제일 영리하고, 또 사량 분별 이라고 할까? 思考(사고)가 다른 사람보다 더 복잡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이 복잡한 사람에게서 이렇게 복잡한 대답이 나오는 것이지요.

 亦痛亦不痛이니이다→ 아프기도 하고 또한 아프지 않기도 하다.

 
   師曰(사왈)→ 거기에 맞추어서 육조스님이 말려 들어가는지 어쩐지, 吾 亦見亦不見(오 역견역불견)이로라→ 나도 또한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한다. 좌선할 때, 보는 것 있기도 하고 안 보기도 한다. 보기도 하고 안 보기도 한다.

 
   神會問(신회문)→ 신회가 묻기를 如何是(여하시)→ 어떤 것이 亦見亦不見(역견역불견)이니이꼬→ 또한 보기도 하고 또한 보지 않기도 하는 것입니까? 뭘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하는 것입니까? 하니까

 
   師曰(사왈) 吾之所見(오지소견)은→ 내가 보는 것은,

常見自心過愆(상견자심과건)하고→ 항상 내 마음의 허물을 본다. 본다는 것은 내 마음의 허물을 본다. 그리고

不見他人(불견타인)의 是非好惡(시비호악)일새→ 다른 사람의 是. 非. 好. 惡. 다른 사람의 옳고 그르고 좋고 나쁜 것은 보지 않는다.

 
   是以(시이)로→ 그러기 때문에 亦見亦不見이어니와→ 본다고 하는 것은 내 허물 보는 것이고, 보지 않는 다고 하는 것은 남의 허물은 보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육조스님다운 점잖은 해석을 했습니다.

 
   汝言亦痛亦不痛(여언역통역불통)은→ 네가 말한 아프기도 하고 또한 아프지 않기도 하다는 말은, 如何(여하)오→ 뭐냐? 汝若不痛(여약불통)인댄→ 네가 만약 아프지 않을진댄, 내가 이렇게 때리는 소리를 냈는데, 네가 만약에 그걸 맞고 아프지 않다면, 同其木石(동기목석)이오→ 목석과 똑 같고,

 
   若痛(약통)인댄→ 만약 아프다면, 則同凡夫(즉동범부)라→ 이것은 “凡夫”다. 이겁니다. 그거 맞고 아프다고 하는 것이 범부다. 범부는 누구에게 맞으면 卽起?恨(즉기에한)이니→ 분노를 일으키고 어떤 원한을 가질 것이다. 이런 말입니다. 분노와 원한을 일으킬 것이니,

 
   汝向前(여향전)에 見不見(견불견)은→ 네가 앞을 향해서 이렇게 사물을, 그러니까 좌선할 때 뭘 보느냐? 사물을 보느냐? 안 보느냐? 신회는 그걸 물었거든요. 그런데 육조스님은 내 허물은 보고 남의 허물은 보지 않는다. 이렇게 점잖게 표현을 해버렸으니까요. 네가 앞에서 보고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은, 是二邊(시이변)이요→ 이것은 “二邊” 그러니까 中道(중도)가 아니고 치우친 것이다 이겁니다. “선이다.” “악이다.” “본다.” “안 본다.” 그런 치우친 소견이고,

 
   痛不痛(통불통)은→ 아프다. 아프지 않다는 것은, 是生滅(시생멸)이라→ 아프다. 하는 것은 벌써 마음이 하나 생긴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아프지 않은 것은 생긴 것이 아닙니다. 없어진 것이지요. 是生滅(시생멸)이라→ 생멸의 도리다. 汝自性(여자성)을 旦不見(단불견)하고→ 그대는  그대의 자성을 또한 보지를 아니 하고, 敢爾戱論(감이희론)가→ “敢爾戱論” 무슨 말장난. 이론으로 말재주를 부리느냐? 그렇게 말했습니다. 좀 꾸짖은 이야기지요?

 
   神會 禮拜悔謝(신회 예배회사)한대→ 신회가 절을 하고서 잘못했고 사과를 하니까, 師又曰(사우왈)→ 육조스님이 다시 말하기를, 汝若心迷不見(여약심미불견)인댄→ 그대가 만약에 마음이 미혹해서 뭘 못 본다고 한다면, 問善知識(문선지식)하야→ 보는 것이 없다면 그러니까 선지식에게 물어서 覓路(멱로)요→ 길을 찾아야 된다. 이겁니다.

 
   마음이 미혹해서 아무 것도 못 본다. 어떤 진리에 대해서. 또는 道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고 한다면 선지식에게 물어서 길을 찾아야 되고,

汝若心悟(여약심오)인댄→ 그대가 만약에 마음이 깨달아서, 卽自見性(즉자견성)하야→ 곧 스스로 性品(성품)을 본다면, 앞에서 “不見(불견)” 못 본다는 것은 성품을 못 본다는 것이지요. 자기의 성품을 못 본다고 할 진댄. 依法修行(의법수행)해서→ 법에 의지해 수행해야 하거늘,

 
   汝自迷(여자미)하야→ 그대는 스스로 미혹 해가지고서 아무 것도 모른다 이겁니다. 不見自心(불견자심)하고→ 자기의 마음을 보지를 못하고, 却來(각래)하야→ 도리어 여기 내한테 와서, 問吾(문오)의 見與不見(견여부견)하니→ 내가 좌선할 때 뭘 봅니까? 안 봅니까? 하는 것을 물으니

 
   吾見(오견)은 自知(자지)어니→ 내가 보느냐 안 보느냐 하는 문제는 내 스스로 알거니와, 豈代汝迷(기대여미)며→ 어찌 그대가 나의 “迷”를. 너의 미혹한 것을 내 迷身(미신)을 대신할 수 있겠느냐 이 말입니다. 내가 보든지 안 보든지는 그거는 네 하고는 관계없는 것이다 이겁니다. 너의 미혹을 대신할 수 없다 이겁니다.

 
   汝若自見(여약자견)인댄→ 그대가 만약 스스로 볼진댄 亦不代吾迷(역불대오미)어늘→ 또한 나의 미혹을, 내가 설사 못 깨달았다고 할지라도 나의 미혹을, 대신하지 못하거늘, 何不自知自見(하불자지자견)고→ 어찌 스스로 알고 스스로 보지를 않느냐? 보고 못 보는 것은 자신의 문제인데, 그걸 가지고 그리할 일이 아니다 이겁니다. 스스로 알고 스스로 보기를 원할 뿐이지, 다른 것은 필요 없는 이야기 아닌가?

 
   乃問吾(내문오)의 見與不見(견여불견)가→ 이에 나의 見與不見을 왜 묻는가? 내가 보고 못 보는 것을 왜 묻느냐? 그것은 말장난. “戱論(희론)”이다 이겁니다. 神會(신회)가 再禮百餘拜(재례백여배)하야→ 재차 예배를 하고서, 100여배 절을 하고는 求謝過愆(구사과건)이라→ 허물. 자기가 잘못한 것. 사죄하기를 고하고,

 
   服勤給侍(복근급시)하야→ 그로부터 부지런히 시봉을 해서 不離左右(불리좌우)러라→ 좌우에서 떠나지 않더라. 그래도 머리가 총명하고 뭔가... 선지식 앞에 가서 사량분별로 아는 체 했었지만, 그래도 도를 향한 마음이 누구  보다도 많았기 때문에 자기의 허물을 뉘우치고는 시봉을 오래했다는 이야기입니다.

 


   一日(일일)은 師告衆曰(사고중왈)→ 대중들에게, 여러 대중들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법문 이지요.

吾有一物(오유일물)호되 無頭無尾(무두무미)라→ (유명한 말이지요.) 나에게 한 물건이 있는데 無頭無尾라.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다. 無名無字(무명무자)하며→ 名도 없고 字도 없다. 無背無面(무배무면)하니→ 등도 없고 얼굴도 없다. 諸人(제인)은→ 이것이 무엇인지 여러 사람들은 還識否(환식부)아→ 알겠습니까? 하고 물었어요.

 
   이 “有一物” 하는 이 말은 많이 씁니다. 우리 고려말에 함허스님도 [有一物於此(유일물어차)하니 絶名相(절명상)호대 貫古今(관고금)하고 處一塵(처일진)호대 圍六合(위육합)이라]해서 금강경 오가해 서문에도 이 말을 썼고요. 또 서산스님도 有一物於此(유일물어차)하니 해서, 無頭無尾(무두무미)하고, 無名無字(무명무자)로다. 여기 있는 말 그대로 인용해서 쓰고, 禪家(선가)에서는 “여기에 한 물건이 있다.” 보통 “여기에 한 물건이 있다.” 이렇게 하는데 여기는 吾有一物(오유일물). “나에게 한 물건이 있다.”고 표현을 했습니다. 여러 사람들은 그것을 알겠는가? 이렇게 하니까

 
   神會出曰(신회출왈)→ 신회. 여기의 주인공. 신회가 말이 떨어지자마자 척 나와서는 한다는 말이. 是諸佛之本源(시제불지본원)이요→ 모든 깨달은 사람의 근본이다. 本源이다. 모든 부처님의 근본 자리이고, 근원이고, 神會之佛性(신회지불성)이니다→ 나. 신회 이 사람의 佛性(불성)입니다.

 
   그것이 여기에 말씀하신 無頭無尾, 無名無字하며 無背無面한, 한 물건의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아주 그 뭐 똑똑한 것을 어떻게 “인준불검” 이라는 말이 있지요? 뛰어난 것을 어떻게 참을래야 참을길. 감출래야 감출길이 없다는 말이 있는데요. 이분도 그런 분 같아요. 忍俊不檢(인준불검) 이라. 자기의 뛰어난 총명을 어떻게 감출길이 없는 겁니다.


   좀 그렇게 생각이 들더라도 진득하게 가만히 있지 툭 튀어나와서, 是諸佛之本源(시제불지본원)이요, 神會之佛性(신회지불성)이다. 상식적인 線(선)에서 보면, 아주 근사한 대답이지요. 맞는 대답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근사한 대답 같아요. 모든 부처님의 근본 자리이고, 신회의 불성이고, 또 모든 사람의 불성이다. ←이렇게 대답을 했는데,

 
   師曰(사왈) 汝向道(여향도)→ 너에게 내가 말하기를 無名無字(무명무자)어늘→ 이름도 없고 자도 없다. 그렇게 했는데 汝便喚作(여변환작)→ 제불지본원이니, 신회의 불성이니, 이런 이름을 그것도 이름을 말이지, 건사하게 본원이니, 불성이니 그렇게 붙이는가? 나는 이름도 없고 자도 없다고, 名도 없고 字도 없다고 분명히 그렇게 했는데, 本源佛性(본원불성)가→ 본원이니, 불성이니 하는 그런 말을 갖다 붙이느냐?

 
   汝向去(여향거)하야→ 네가 그런 머리 가지고는. 그런 생각 가지고는 이론은 밝은지 몰라도 앞으로 有把?盖頭(유파묘개두)라도→ 설사 잔디를 머리에 일지라도, 이런 말은 “잔디를 가지고 머리에 덮어쓴다.”고 하는 말은 머리를 깎지도 않고, 씻지도 않고 해서, “머리에 재가 몇이나 앉았다.” 조주스님도 그랬었거든요. 몇 년을 머리를 안 씻어서, 머리는 자라고 거기에 첩첩이 먼지랑 때랑 눌어붙어서, 그냥 첩첩이 쌓였다. 이런 표현이 있어요. 이것도 그와 같은 표현입니다.

 
   ‘마치 잔디풀을 갖다가 머리에다 얹어 놓은 것 같이 네가 그렇게 고심하면서 수행을 설사 독하게 한다 하더라도’ 이런 뜻입니다. ‘수행을 네가 그렇게 독하게 한다 하더라도’ 세수 한번 안 하고 머리 한번 안 깎고 그렇게 머리가 잔디밭이 되도록 공부를 한다 하더라도, 也只箇成知解宗徒(야지개성지해종도)라→ 知解宗徒. 알 知(지)자. 알 解(해)자. 이것은 알음알이. 그저 사변으로만 발달한 그런 宗徒가 될 뿐이다.

 
   이 禪家(선가)에서는 투철하게. 훤하게 깨달은 사람. 말 한마디 못 하더라도, 아무 표현할 줄 모르더라도 속이 환히 밝은, 그야말로 도를 환히 꿰뚫는 그런 사람을 필요로 하는 것이지, 머리 빨리빨리 잘 돌아가고 이론에 밝고  사변에 능하는 것을 여기서 바라는 바가 아니거든요.

 
   여기 “知解宗徒(지해종도)”라는 말은 아주 머리는 잘 돌아가고 이론에 밝고, 그러면서도 根本宗旨(근본종지)는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을 이렇게 지칭합니다. “知解宗徒” 너는 다만 “知解宗徒” 밖에 안 될 것이다. 그랬어요.

祖師滅後(조사멸후)에→ 정말 조사스님이 열반 하신 후에 會-入(회-입경락)하야→ 신회가 “京洛”은 서울이지요. 경락에 들어가서 大弘曹溪頓敎(대홍조계돈교)→ 그래도 워낙 이론에 밝으니까, 조계. 육조스님의 돈교 법문을 크게 드날리고, 著顯宗記(저현종기)→ 현종기라는 책을 저술  해서 盛行于世(성행우세)하니라→ 세상에 크게 성행했다.

 
   師見(사견) 諸宗(제종)이 問難(문난)하야→ 돈점품. 말하자면 여러 제자들이 자꾸 묻고, 또 漸(점)이 옳으냐? 頓(돈)이 옳으냐? 점점 닦는 것이 옳으냐? 아니면 한꺼번에 닦는 것이 옳으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아주 시비가 많고 그랬어요. 서로 자기 사상에 안 맞으면, 비방을 하고 모함을 하는 그런 일들이 그 당시 많이 생겼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정리해서 하는 말이지요.

 
   師見(사견) 諸宗(제종)이 問難(문난)하야→ 여러 宗派(종파)에서 와서 따지고 묻고 하는 것이지요.

咸起惡心(함기악심)이라→ 모두들 말이 딸리고 소견이 안 맞으니까 모두들 악한 마음을 품어서, 多集座下(다집좌하)라→ 와서 그냥 일부러 찔러보는 사람. 따지려는 사람. 해치려는 사람. 테러 하려는 사람 등등 별별 그런 불교안에 다른 사상 가진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座下(좌하)에 많이 모인 것을 보고는, 愍而謂曰(민이위왈)→ 불쌍하게 여기고서 그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學道之人(학도지인)은→ 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一切善念惡念(일체선념악념)을→ 모든 선한 생각 악한 생각을. 應當盡除(응당진제)라→ 응당히 다 없애야 된다. 도에 뜻이 있는 사람은 그 선한 생각 악한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지요.

 
   육조스님이 맨 처음에 법을 받아서 도망가다가 도명상좌에게 붙들렸을 때, 不思善(불사선) 不思惡(불사악). 그런 말을 했지요? 최초 법문이지요. 不思善不思惡하라.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 그랬을 때 무엇이 그대의 참 面目(면목)이냐? 그대의 참 모습이냐? 대개 우리는 善心(선심). 惡心(악심). 좋은 생각. 안 좋은 생각. 그 兩邊(양변)을 치닫고 있지요. 어디에 끄달려도 그렇게 끄달리고 사는데, 그런 것을 다 버렸을 때 너의 참 모습. 그것을 우리는 봐야 된다는 말씀이 있었는데,

 
   여기도 一切善念惡念(일체선념악념)을 應當盡除(응당진제)하라 다 없애 버려라. 無名可名(무명가명)을 名於自性(명어자성)이다→ 이름. 가히 이름 할 수 없는 것. [道可道(도가도)면 非常道(비상도)요. 名可名(명가명)이면 非常名(비상명)이라.] 그런 도교의 말이 있듯이 無名可名이라. 무슨 이름으로 이름 지을 수 없다 이 말입니다. 무슨 이름으로 지을 수 없는 것을 自性(자성)이라고 한다. 할 수 없어서 자성이라고 이름을 하는 것이지, 그것이 뭐 꼭 그 이름이 맞아서 쓰는 것은 아니지요.


   無二之性(무이지성)이→ 둘 아닌. 우리 자성은 하나지요. 하나인 그 성품이 是名實性(시명실성)이다→ 이것이 이름이 실다운 성품이다. 實性上(실성상)에→ 實性. 실다운 성품위에

建立一切敎門(건립일체교문)이니→ 그 실다운 성품. 오직 하나 뿐인 그 성품 위에다가 一切敎門을 건립해서. 성문교. 연각. 보살. 온갖 교리를 건립해서, 대승교 소승교, 뭐 삼승 십이분교니 사성제 팔정도, 12인연 육근. 육진. 육바라밀. 온갖 교리 37조도품 이니 별별 교리를 거기다 건립을 한 것이지요. 그것이 결국은 딱 점 하나라고도 할 수 없는 그런 그 자성. 사실은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인데요.

 
   無名可名(무명가명)이지요. 할 수 없어서 자성이라고 하지만, 이 자성은 물론 개개인의 자성일 수도 있고, 또 전체를 통괄해서 보면 法性(법성)일 수도 있고 그래요. 그 성품 하나 이것이야말로 실다운 것이다 이것이지요. 그 실다운 그것 하나에서 거기다 별별 교리를 다 건립한 것이지요. 그래서 그것이 참으로 있느냐? 참으로 있는 것 같이 그렇게 해석을... 오래 공부하다 보면 그런 교리가 실제로 있는 것 같이 여겨진다고요.

 
   법화경에서는 無亦無三(무역무삼)이라. 二乘(이승)도 없고 三乘(삼승)도 없고, 唯有一佛乘(유유일불승)이라. 오직 일불승 하나뿐이다. 實性. 이거 하나 뿐이다. 그랬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많이 나열해 놓은 것은, 근기 따라서 중생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입니다. “방편이다.” 방편으로 할 수 없이 그렇게 취향 따라서 근기 따라서, 나열해 놓은 것이지요.

 
   그러니까 관음기도 좋은 사람. 관음기도 하고, 지장기도 마음에 든 사람. 지장기도 하고, 나한기도를 하던지 산신기도를 하던지 칠성기도를 하던지, 각자 자기의 그 취향대로 그렇게 펼쳐놓은 것이지요. 펼쳐놓은 것이지 사실은 진실한 것은 이 實性(실성). 性品(성품). 이거 하나라는 것이지요.

 
   言下(언하)에 便須自見(변수자견)이니→ 이런 법문 한 마디에 곧 모름지기 스스로 봐야 된다. 이 實性. 자성을 봐야 된다. 自性自悟(자성자오). 자기의 성품. 자성을 스스로 깨닫는 것. 이것을 육조스님이 자주 말씀하시지요. 見性(견성). 성품을 봐야 된다. 自性自悟. 자성을 스스로 깨달아야 된다. 이런 말씀을 자주 하시는 것이 육조스님의 법문이지요. 便須自見. 스스로 봐야 된다.

 
   諸人(제인)이 聞說(문설)하고→ 설법하시는 말씀을 듣고, 總皆作禮(총개작례)하야→ 모두들 다 예배를 하고서 請事爲師(청사위사)하니라→ 따지려고 오고 해치려고 왔던, 다른 종파의 이론가들이 모두 스승으로 섬기기를 청 하고, 모두 그 밑에서 살기를 청하더라는 내용입니다. 전부 와서 귀의한 것이지요. 악심을 품고 와서는 돈교가 어쩌고 저쩌고 되도 않는 말이라고, 마구니라고 별별 욕을 다하는 것이지요.

 
  사상이 틀리면요? 부모죽인 원수보다도 더 크게. 사상 쪽으로 집착이 강한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덕산스님하고 용담스님하고 내용도 그런 것이지요. 유명한 덕산스님은 경학을 깊이 공부 했는데 특히 반야부경전. 그중에서도 금강경 공부를 많이 해서 금강경에 대한 연구 서적이 막 그냥 한 구루마 였지요.

 
   그런데 남쪽에 禪法(선법)이 있어서, 不立文字(불립문자) 見性成佛(견성성불). 문자 소용없다 그러고, 자기 자성을 깨달으면, 다 부처다. 다 모든 것이 끝난다고 하는 이론을 주장하는 禪家(선가)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서, 남방에 외도들이 부처님 이름을 빌어서 불교라고 한다고, 정말. 정말 충정에서 나온 소리입니다.


   정말 이거는 외도 중에 외도라고 막 그냥 화가 나고, 그 외도 때려 부수려고 사실은 왔지요. 왔다가 용담스님한테 비로소... 용담스님이 촛불을 건네 줬다가 훅 불어 끄는 그 순간에 마음이 환히 밝아져서는, 비로소 아! 자기 마음 깨달으니까 모든 문제가 다 해결인 것을 나는 공연히 이론에만 떨어져서, 불교니 불교가 아니니 그런 허망한 짓만 하고 있었다고 하면서 자기 연구 서적을 법당 앞에다 놓고 다 불태워 버리지요.

 
   불태워 버리는 그런 아주 정말 희대의 큰 사건이 있었지요. 그 근기가 대단 하지요? 또 그분은 패기도 있고, 생긴 것도 아주 거창하게 생겼던 모양입니다. 표현에 의하면 그 이빨은 마치 禽獸(금수). 칼을 세워놓은. 칼을 번뜩번뜩하게 많이 갈아서, 군사들이 칼을 진열해놓은 것 같이 이빨은 그렇게 보이고, 그 속에 입은요. 血盆(혈분)이라. 피를 잔뜩 담아놓은 큰 그릇과 같더라. 이런 식으로 표현을 했어요. 그 사람 됨됨이를 그렇게 표현했지요.

 
   그래서 덕산스님과 용담스님의 사례가 오늘 날 까지 높이 人口(인구)에 膾炙(회자)되고, 또 덕산스님의 그 법이 지금까지 잘 전해 내려오는 관례를 남기게 된 그런 연유가 되기도 했는데요. 자기 사상에 안 맞으면요? 정말 생사를 무릅쓰고 비방을 하고 없애려고 하고 그럽니다. 그런 분위기가 그 당시에 많았지요. 특히 육조스님은 오조스님의 법을 이어 받아서 15년이란 세월을 숨어 살았지 않습니까? 그만치 법을 펴기가 쉽지 않았던 상황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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