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님
2011.12.17 14:34

육조단경 강의 73 - 무비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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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3 강 - 宣詔品- 1

 

 
      九 宣詔品

 

   神龍元年上元日에 則天과 中宗이 詔云, 朕이 請安秀二師하야 宮中供養하고 萬機之暇에 每究一乘이러니 二師推讓云, 南方에 有能禪師하야 密受忍大師衣法하야 傳佛心印하니 可請彼問이라하므로 今遣內侍薛簡하야 馳詔迎請하오니 願師는 慈念으로 速赴上京하소서

 
   師- 上表辭疾하시고 願終林麓하신대 薛簡曰, 京城禪德이 皆云, 欲得會道인댄 必須坐禪習定이라 若不因禪定이면 而得解脫者 未之有也라하니 未審호이다 師所說法은 如何니이까

 
   師曰道由心悟어니 豈在坐也리오 經에 云, 若言如來 若坐若臥라하면 是行邪道니 何故오 無所從來며 亦無所去라하시니 無生無滅이 是如來淸淨禪이며 諸法空寂이 是如來淸淨坐라 究竟無證이어니 何況坐耶아

 
   簡이 曰 弟子回京하면 主上이 必問하시리니 願師는 慈悲로 指示心要하소서 傳奏兩宮과 及京城學道者하야 譬如一燈이 燃百千燈하야 冥者皆明하야 明明無盡케호리이다

 
   師云, 道無明暗하니 明暗은 是代謝之義라 明明無盡도 亦是有盡이니 相待立名故라 淨名經에 云, 法無有比라 無相待故라하시니라

 
   簡이 曰 明喩智慧요 暗喩煩惱니 修道之人이 ?不以智慧로 照破煩惱하면 無始生死를 憑何出離하오리까

 
   師曰, 煩惱卽是菩提라 無二無別이니 若以智慧로 照破煩惱者인댄 此是二乘見解며 羊鹿等機라 上根大智는 悉不如是니라

 
   簡이 曰, 如何是大乘見解니이까

 
   師曰, 明與無明을 凡夫는 見二어니와 智者는 了達其性이 無二하나니 無二之性이 卽是實性이라 實性者는 處凡愚而不減하고 在賢聖而不增하며 住煩惱而不亂하고 居禪定而不寂하야 不斷, 不常, 不來, 不去, 不在中間과 及其內外라 不生不滅하야 性相이 如如하야 常住不遷을 名之曰道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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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 宣詔品(선조품)

 
   나라에서 조칙을 내려서 육조스님을 한 번 모시려고 사람을 보냈지요. 보낸데 대한 내용을 여기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때가 706년 이예요.

神龍元年上元日(신룡원년상원일)에→ 당 나라 때 일인데요.“上元日”하면 정월 보름이 됩니다. 한자로 이렇게 상원이라고 그래요.

 
   706년 이니까 상당한 세월이 지난 때지요. 당 나라 측천천후. 중종은 당 나라 네 번째 임금이지요. 당태종-고종 그런가요? 측천무후라고 역사에 많이 알려진 황후인데요. 당 고종의 황후인데요. 여자가 아주 걸출한 인물입니다. 소설로도 많이 나오고 그러는데 폐위를 시키고 지가 뒤에 앉아서, 簒位(찬위)라. 21년이나 왕 노릇을 한 것이지요. 21년이나 자기가 뒷전에 앉아서 국가의 정치를 자기가 다한 아주 여걸 중에 여걸인데요. 어쨌든 그래도 허수아비 왕 이라도 왕을 모셔놓고 있지요. 옛날에 그런 예가 많았지요.

 
   우리 조선시대도 그렇고... 어린 왕. 천지도 모르는 왕을... 그렇다고 또 남의 손에 맡기기도 그렇고... 그러니까 뒤에서 조종을 하는 경우입니다. 이 측천이 그런 역사 중에 아주 대표적이지요. 그 어쨌거나

 
  則天(측천)과 中宗(중종)이 詔云(조운)→ 조칙을 내려서 말하기를 朕(짐)이 請 安秀二師(청 안수이사)하야→ 평소에 혜안국사라고 아주 유명한 스님입니다. 그 다음에 “秀”는 신수대사. 그 유명한 육조스님과 라이벌이 되었던 오조스님의 제자 신수대사.

 
   이 두 분을 청해서 宮中供養(궁중공양)하고→ 궁중에서 공양도 하고, 萬機之暇(만기지가)에→ 萬事(만사)를 경영하는 여가이지요. “萬機之暇” 국가를 경영하는 여가에 每究一乘(매구일승)이러니→ 매양 “一乘” 을 연구 했는데, 그런 신심이 있어서 불교공부는 아주 많이 했던 모양이에요. 그랬는데

 
   二師推讓云(이사추양운)→ 그 두 스님이 늘 추천하고 자기는 사양해서 말하기를 南方(남방)에 有能禪師(유능선사)하야→ 남쪽에 혜능선사가 있다. 그 분은 密受忍大師衣法(밀수인대사의법)이라→ 오조 홍인대사의 衣法을. 옷과 법을 “密受” 몰래 傳佛心印(전불심인)하니 可請彼問(가청피문)이라→ 그 분들이 늘 그렇게 사양을 하더라 이 말이지요.

 
   今遣內侍薛簡(금견내시설간)→ 지금 내시 설간 이라는 사람을 보내서 馳詔迎請(치조영청)하니→ 조칙을 내려서 영접할 것을 청하니, 願師(원사)는 慈念(자념)으로→ 원컨대 스님께서는 자비한 마음으로 速赴上京(속부상경)하소서→ 빨리 상경해서 우리가 스님의 법문을 들을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그랬어요.

 
   설간 이라는 사람이 그런 편지를 갖고 왔지요. 와서 그렇게 청하니, 師-上表辭疾(사-상표사질)이라→ “上表”는 표를 올린 것이지요. 왕이 그렇게 내렸으니까 회답을 하면서, 병을 핑계로 사양을 했어요. 사양을 하고는 願終林麓(원종임록)하신대→ “林麓”에서 마치기를, 내가 이렇게 산중에 살았으니 산중에 살도록 내버려 두십시오. 이렇게 그러기를 원한다는  내용을 보냈지요.

 
   그러니까 薛簡曰(설간왈)→ 설간이 말하기를, 京城禪德(경성선덕)이 皆云(개운) 欲得會道(욕득회도)인댄→ 경성에, 서울에 사는 선사스님들은 다 말하기를, 도를 알고자 할 진댄 必須坐禪習定(필수좌선습정)이라→ 반드시 모름지기 “坐禪” “習定” “좌선을 해서 선정을 익히라.”고  한다는 겁니다.

 
   若不因禪定(약불인선정)이면→ 만약에 선정을 인하지 아니 하면, 而得解脫者(이득해탈자)→ 해탈을 얻는 자가 未之有也(미지유야)라→ 선정을 안 익히면 해탈을 못 얻는다. 서울에 사는 스님들은 전부 그렇게 이야기 하는데, 未審(미심)호이다→ 글쎄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師所說法(사소설법)은 如何(여하)니이까→ 스님의, 육조스님의 설법은 어떻습니까? 이렇게 물은 겁니다.

 
   師曰(사왈) 道由心悟(도유심오)어니→ 도라는 것은 마음 깨달음을 말미암는 것이다. 또는 마음을 말미암아서 깨닫는 것이다. 뭐 꼭 좌선 해야할 필요는 없다 이겁니다. 豈在坐也(기재좌야)리오→ 어찌 좌선 하리요. 어찌 앉는데 있겠느냐? 도라고 하는 것은 마음 깨닫는 일이지, 그 앉는 것 하고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이것 심각한 이야기입니다.

 
   經(경)에 云(운)→ 경에 이르대, 若言如來(약언여래) 若坐若臥(약좌약와)라하면→ 금강경에 있는 말이지요. 만약에 말하기를 여래가 앉았다거나, 앉아있는 것이 “여래”라고 한다거나, “若臥” 아니면 누워 있는 것이 “여래”라고 한다거나, 이렇게 한다면, 是人行邪道(시인행사도)라. 그거는 사도를 행한 것이다. 여래를 잘 못 본거다 이겁니다.

 
   是行邪道(시인행사도)→ 이는 사도를 행한 것이다. 何故(하고)오→ 왜냐? 無所從來(무소종래)다→ 여래라고 하는 것은 어디로부터, 진리의 의미에서 부처님을 말할 때 “여래”라고 하거든요. 여래라고 하는 것은 어디로부터 온 곳이 없어. 亦無所去(역무소거)라→ 또한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다. 如如(여여)한 데서, 진리로부터 왔기 때문에 표현을 하자니 “왔다.” 라고 하지만, “온다.” “간다.”하는 그런 것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지요.

 
   그래 無生無滅(무생무멸)이라→ 생도 없고 멸도 없다. 그렇게 이해하는 것. 그것이 마음자리를 가만히 우리가 비춰보면, 이런 말이 이해가 됩니다. 우리 마음을 한번 살펴봐요. 無所從來(무소종래)지요. 지금 우리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듣고 있는 것이, 지금 마음을 활용하는 겁니다. 그래도 제일 가까이 알 수 있는 것. ‘아! 내가 지금 이 말을 듣고 있다.’ 그럼 아무것도 안 들을 때는 어디 갔겠지요. 그럼 “왔다.”고 할 때, 듣고 있을 때 왔지요? 어디서 왔어요? 어디 뭐 학교에서 온 것도 아니고 집에서 온 것도 아니고 어디 산에서 온 것도 아니고 말을 하자니 왔다고 그러지요. 또 안 들을 때는 어디 가 버렸지요 사실은...

 
   아무것도 듣지도 않고 보지도 않고 그럴 때가 있잖아요. 어딘가 가 버렸어요. 활동이 어딘가 가 버렸다고요. 잠잠해 졌어요. 그렇다고 어디 간 흔적이 있느냐 하면 간 것도 아닙니다. 말을 하자니 갔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亦無所去(역무소거)지요. 말을 들을 때는 틀림없이 生(생)긴 것은 사실인데, 어디 생긴 바[所(소)]가 없어요. 無生(무생)입니다.

 
   그럼 말소리를 안 들을 때는 消滅(소멸)했다고 일단 假定(가정)합시다. 소멸한 것도 물론 아니지요. 생긴 것도 물론 아니고요. 왔다고 표현했지만 온 것도 물론 아니고요. 아무 작용이 없을 때 갔다고 했지만 간 것도 물론 아니고요. 그러나 편의상 왔다고 하고, 갔다고 하고, 생겼다고 하고, 소멸했다고 합시다. 그렇지만 생긴 것도 없고, 소멸한 것도 없습니다. 이것은 그냥 우리 앉은 자리에서 증명될 수 있는 것이지요.

 
   바로 이것이 是如來淸淨禪(시여래청정선)→ 이것이 여래 청정선이다. 諸法空寂(제법공적)이 是如來淸淨坐(시여래청정좌)라→ 공적하다는 것. “諸法空寂” 이것은 무슨 사물이 공적하다는 것. 이것은 과학적으로 따져도 공적한 것을 알고, 요컨대 우리 마음이 공적한 자리. 이것을 우리는 예의주시 해야 하니까요. 온갖 말 듣고 또 안 듣고, 또 보고 안 보고, 그런 많은 활동을 해도 궁극에 와서는 뭡니까? “空寂(공적)”이지요.

 
   끝내는 공적이라고요. 그렇게 하루 종일 부단히 작용 했지만 끝내 공적한 자리라고요. 끝내 아무것도 없는 자리입니다. 그 마음은 아무리 써도 순리대로만 쓰면 하루 종일 써도 피로하지도 않아요. 이 마음 쓰는 것은... 그래 억지를 쓰니까, 용을 쓰니까 피로하지, 이 마음은 순리대로 그냥 보는 대로 보고 듣는 대로 듣고, 거기다 뭐 傑行(걸행)을 하고 그러니까 그렇지 사실은 피곤한 것도 없다고요. 왜냐? 공적하기 때문에요.

 
   諸法空寂(제법공적)이 是如來淸淨坐(시여래청정좌)다. 이것이 제대로 앉는 거다 이겁니다. 앉았다고 해서 또한 앉는 것도 물론 아니지만 좌선 하니까요.

究竟(구경)에 無證(무증)이라→ 우리가 증득한다. 깨닫는다. 하지만 깨닫기는 뭘 깨달아요? 끝내 가서는 증득한 것도 없어요. 何況坐耶(하황좌야)아→ 그런데 하물며 앉는 것이겠는가? 어찌 하물며 앉는 것이겠는가? 이거 참 좋은 법문입니다.

 
   簡(간)이 曰(왈)→ 설간이 말하기를, 弟子回京(제자회경)하면 主上(주상)이 必問(필문)하시리니→ 서울 가면 주상이 틀림없이 물을 것인데 願師慈悲(원사자비)로→원컨대 스님께서는 자비로서 指示心要(지시심요)하소서→ 心要. 마음의 요점을. 이제 뭔가 귀가 조금 열렸어요. 그래 이제 묻는 것도 이렇게 다르지요. 심요를 가르쳐달라 그랬어요.

 
   앞에는 서울에 있는 스님들은 전부 “坐禪習定(좌선습정)해야 된다.” 고 묻고, 자기 불교 상식으로는 그렇지요. 그것을 물었고, 여기 와서는 ‘아 이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돌아가니까 그 다음 질문이 벌써 달라졌어요. “心要” 마음의 요점에 대해서 지시해 주십시오.

 
   傳奏兩宮(전주양궁)과 及京城學道者(급경성학도자)하야→ 양궁과 학도자 들에게 “傳奏” 전하여 올리겠다. 가서 내가 스님의 좋은 법문을. “心要”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면 이것을 내가. 兩宮은 측천하고 중종이지요? 그 두 분과 그리고 경성에 불교공부 한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傳奏”하겠다. 전하여 올리겠다. 그래서 어떻게 했나하면 그 때만 해도 출판이나 방송 같은 것이 제대로 안 되니까요. 내가 가서 전하면 그 사람들이 또 전하고 또 전하고 이렇게 할 것이 아닙니까?

 
   譬如一燈(비여일등)이 燃百千燈(연백천등)이라→ 이것도 경전에 있는 말이지요. 비유컨대 하나의 등불이 백 개. 천개의 등불에 불을 펼쳐지지요. 마치 초파일 날 촛불 하나 딱 켜서, 그 하나에서 여러 개를 붙여서 이렇게 천개가 됐던지 만개가 됐던지, 그 천개 만개의 등불이 하나의 촛불에서 펼쳐져서 다 밝히듯이 그렇게 해야 돼요. 제가 그렇게 초파일 행사를 하려고 하니 평생 주지할 복이 있어야 하지요. 여러 곳에 켜는 것이 아닙니다. 딱 하나 켜는 겁니다. 촛불 하나...

 
   이것이 근거가 경에 이렇게 있는 겁니다. 촛불 한개 딱 켜야 돼요. 한개 켜서는 그 주변에 있는 사람이 그 촛불 하나에 와서 붙여가야 돼요. 전부 하나에 와서 붙여가야 된다고요. 전부 지대로 성냥 갖고 등불마다 다 켜는 건 아닙니다. 그러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譬如一燈(비여일등)이 燃百千燈(연백천등)”이라고 했잖아요?

 
   譬如一燈(비여일등)이 燃百千燈(연백천등)이라→ 하나의 촛불에 와서 두 명이나 세 명이나 붙여 가면 그 다음에 또 두 명. 세 명 붙여 가면 기하급수적으로 금방 확 퍼져 버리잖아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는 겁니다. 두 사람이 붙여가고 두 사람에서 또 두 사람이 붙여가도 이거 열 층계만 내려가면 계산도 못합니다. 그렇게 많이 퍼져 나간다고요. 그것이 불교의 어떤 이치하고 딱 맞는 것이고, 또 본래 경전에서 그것을 이야기를 했고요.

 
   譬如一燈(비여일등)이 燃百千燈(연백천등)이라. 이것이 경전에 있는 이야기인데요. 이렇게 붙여가는 겁니다. 그렇게 하듯이 이 법문도 그렇게 내가 가서 하면, 두 사람이 들으면 그 두 사람이 또 두 사람 모아놓고 듣고, 두 사람이 또 두 사람 모아놓고 듣고, 이런 식으로 하면 譬如一燈이 燃百千燈해서 冥者皆明(명자개명)이라→ 마음이 어두운 사람이 다 마음이 밝아져서 明明無盡(명명무진)케하오리이다→ 밝고 밝아져서 그 밝음이 다함이 없도록 끝없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렇게 설간이 “心要”를 물었습니다.

 
   師云(사운) 道無明暗(도무명암)하니→ 이 스님은 아주 순발력이 있어요. 대화를 하는 걸 보면요. 뭐 자기가 창작으로 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질문 해오는 거기에 딱 맞추어서 대개 대답을 합니다. 도인은 明과 暗이 없다 이겁니다. 밝힌다고 하니까 “明明無盡”이라고 하니까, “마음을 밝힌다.”고 하면, 우리가 그 말만 들으면 또 그럴 듯해요. 그런데


   道無明暗(도무명암)이라→ 도에는 明暗이 없다. 明暗은 是代謝之義(시대사지의)라→ 밝음과 어둠이 서로 교차하고 바뀌는 그런 의미지요. 어둡다가 불 켜면 밝고, 그 불을 끄면 또 어두워지고, 代謝 하는. 서로 번갈아 가면서 서로 교차하는, 그런 의미다 이겁니다.

 
   明明無盡(명명무진)도→ 밝고 밝음이 다함이 없는 것도, 亦是有盡(역시유진)이라→ 언젠가 다함이 있다 이겁니다. 그렇게 이해하면 안 된다 이것이지요. 등불은 우리가 그렇게 비유로서 법을 전한다. 할 때는 그런 어떤 상징성은 있지만, 도의 실체는 꼭 그와 같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비유로는 제일 근사한 비유지요. 그렇지만 도가 꼭 그러리라고 이해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뜻입니다.

 
   相待立名故(상대립명고)라→ 서로 상대 해가지고서 이름을 세운 것이다. 淨名經(정명경)에 云(운)→ 정명경에 말하기를. 유마경이지요. 法無有比(법무유비)라→ 법은 비교함이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 無相待故(무상대고)라→ 상대가 없기 때문이다. 상대가 없기 때문에 무엇에 비교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이겁니다.

 
   簡(간)이 曰(왈) 明喩智慧(명유지혜)요→ 밝은 것은 지혜에다 비유하고, 暗喩煩惱(암유번뇌)니→ 어두운 것은 번뇌에다 비유함이니, 修道之人(수도지인)이→ 도 닦는 사람이 ?不以智慧(당부이지혜)로→ 혹시 지혜로서 照破煩惱(조파번뇌)하면→ “照破” 번뇌를 비추어서 깨뜨리지 아니 하면, 지혜로서 번뇌를 깨뜨리지 아니 하면,

無始生死(무시생사)를 憑何出離(빙하출이)오→ 무엇을 의지해서, 무시겁래로 우리가 생사를 반복해오는, 생사윤회를 반복해오는 그것을 언제나 벗어날 수 있겠는가? 무엇을 의지해서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이거 좋은 법문입니다. 제가 보다가 별표를 세 개나 해놨는데요. 이거 진짜 요긴한 법문입니다.

師曰(사왈) 煩惱卽是菩提(번뇌즉시보리)라→ 번뇌가 곧 보리다. 우리 사람들이 번뇌 무명. 지금 온갖 번뇌가 많다. 온갖 망상 어쩌고 저쩌고 하는 그것이 진짜 보리다. 도다 이겁니다.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언젠가 우리는 하여튼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번뇌 없애고 보리가 따로 오는 것이 아니다 이겁니다. 번뇌 그 자체가 보리라고 하는 사실...

 
   無二無別(무이무별)이라→ 번뇌와 보리가 둘도 없고 다른 것도 없다. 둘도 아니요 다른 것도 아니다.

若以智慧(약이지혜)로→ 만약 지혜로서

照破煩惱者(조파번뇌자)인댄→ 번뇌를 照破한다. 비춰서 깨뜨린다고 할진댄, 此是二乘見解(차시이승견해)며→ 이것은 二乘. 小乘(소승)들의 소견이다 이겁니다. 이것이 차이점입니다.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불교적 상식은, 이 설간 이라고 하는 사람이 말한 것, 그대로입니다. 하~! 우리가 지혜의 등불을 밝혀서 어두운 번뇌를 제거한다. 초파일 되면 곳곳에서 그런 법어 나오지요. 등불은 왜 밝히느냐? 지혜의 등불을 밝혀서 어두운 번뇌를 쓸어버리고 세상을 밝힌다는 이런 식으로 이야기 하는 것이 대개 불교의 상식적인 소리이고, 그 상식적인 소리는 正法(정법)이 아니다 이겁니다. 이승들이. 소승들이 좁은 소견으로 하는 소리다 이겁니다.

 
   여기 “二乘見解(이승견해)”라고 했잖아요? 이승의 견해다. 법화경에 견주어서 이야기 한다면, 羊鹿等機(양녹등기)라→ 양거. 녹거 등 근기다. 羊車(양거). 鹿車(녹거). 牛車(우거). 聲聞(성문). 緣覺(연각). 菩薩(보살)의 견해다 이겁니다. 크게 봐줘서 보살의 견해다. 上根大智(상근대지)는→ 상근기의 큰 지혜는 悉不如是(실불여시)니라→ 다 이와 같지 않다. 우리 상식에도 지혜의 등불로 어두운 번뇌를 몰아낸다. 이렇게 하면 참 이해도 가고 좋은데 그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게 도가 우리가 생각한 그런대로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너무 또 쉽고 간단한 것이 번뇌가 그대로 보리다 이겁니다. 중생이 그대로 부처입니다. 사람이 그대로 부처라고요. 달리 다른 것 아무것도 없습니다. 중생이 바바뀌어져서 부처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그대로 부처입니다. 그냥 그대로 부처라는 사실을 아는 것뿐입니다.

 
   그렇다고 얼굴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무슨 뭐 굶고도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궁극에는 그것이 우리 마음에 이해가, 어쩌면 지금쯤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정상일지 모르지요. 어쨌든 이해가 아니 되어도 그것이 正法(정법)입니다. 그것이 大乘法(대승법)이고 불교의 궁극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 이 육조스님 말씀이 바로 그거 아닙니까? 羊車. 鹿車등의 근기다 이겁니다. 그런 이승 삼승들의 근기. 성문 연각들의, 소승들의 근기다.

 
   上根大智(상근대지)는 悉不如是(실불여시)다. 다 그렇지 않다. 진짜 제대로 불교를 이해하는 사람은 전혀 그런 생각 안 한다 이겁니다.

 
   簡(간)이 曰(왈) 如何是大乘見解(여하시대승견해)니이꼬→ 그러면 “大乘見解”는 뭡니까?

 
   師曰(사왈) 明與無明(명여무명)을 凡夫(범부)는 見二(견이)어니와→ 밝고 밝지 아니한 것. 밝고 어두운 것을 범부들은 두 가지로 본다. 대개 우리는 둘로 보지요. 우리는 똑같이 둘로 봅니다.

 
   智者(지자)는→ 지혜로운 사람은 了達其性(료달기성)이 無二(무이)라→ 정말 제대로 아는 사람은 그 성품이 둘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안다 이거지요. 밝은 데가 어두운 데이고, 어두운 데가 밝은데 라고 하는 그 사실을 안다 이것입니다.

 
   제가 이것을 더러 방송에서도 이야기하고, 책에도 이제는 이야기할 때가 됐다고 해서 이야기를 하는데요. 송광사에서 제가 문수전 에서 공부 하다가, 문수전 바로 옆에 관음전이 있어요. 그 전에 관음전 법당을 문수전 수좌스님들이, 참선하는 스님들이 그 관음전 관리를 했어요. 청소도 하고 예불도 하고 전부 그랬어요. 제가 그 송광사 문수전 에서 참선할 때, 관음전 부전을 제가 봤어요. 수좌들이 부전 봐봤자 염불 하지도 아니해요.

 
   가서 그냥 죽비 딱 딱 세 번 치고 그냥 절 삼배 하고는 거기서 참선을 하든지 아니면, 문수전에 와서 참선 하든지 그저 그렇게 하는 겁니다. 어쨌든 법당 관리는 문수전 선객이 하는데, 거기서 관리를 제가 했다고요. 어느 날 캄캄한데 뭐 어쨌든 일어나니까 너무 캄캄해요. 그 때는 전기도 안 들어올 때였어요. 늘 다니던 데니까 모서리에 문이 있는데 대문을 열고, 담에 뭐 문이랄 것도 없지요. 담 옆에 있는 작은 문을 열고 거기서 방향만 딱 잡아서...

 
   가서 손으로 더듬어서 관음전 제일 왼쪽 기둥을 만졌어요. 그 기둥 옆에 바로 문고리가 있어요. 문고리 잡고 들어가면, 눈 감는 것이 오히려 더 편해요. 워낙 캄캄하니까요. 아무튼 제 기억으로는 그랬어요. 늘 다니던 데니까요. 그거 뭐 눈 감으나 뜨나 그 때는 워낙 어두워가지고... 그래서 문을 열고는 들어가서 문을 닫고 들어가는데서 방향을 한 45도쯤 되게 틀어서 몇 보를 옮겨 가서 손을 뻗으면 탁자가 잡힌다고요.

 
   탁자위에 손 몇 번만 가면 성냥이 손에 잡힌다고요. 그래 성냥 켜면, 그렇게 캄캄 하던 곳인데 성냥을 그어 서 초에 붙이는 그 순간 그 법당 안이 환히 밝아지더라 이것입니다. 그런데 밝아지는 그것이 그렇게 캄캄하던 것이 밝음. 그 자체입니다. 그래 그 어둠이 어디로 나갔느냐 하면 나간 것이 아니지요. 문도 닫고 들어왔고 어디 문틈도 없고, 어둠은 전혀 어디 나간 것이 아닙니다. 그 어둠이라는 것이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 불 꺼 버리면 바로 어두워지는 겁니다. 어둠과 밝음이 한 자리입니다. 하나... 하나라고요.

 
   어두운 곳과 밝은 곳이 한 자리 그대로입니다. 한 자리 거기서 어둡기도 하고 밝기도 하는 것입니다. 둘이 아니에요. 절대 둘이 아니라고요. 그래 제가 거기서 한참 참선을 할 때가 되어서 그것이 참 크게 가슴에 와 닿았지요. 그래서 책에도 그 얘기를 쓰고 그랬는데요. 그것이 바로 이 이야기지요. 其性(기성)이 無二(무이)라. 둘이 없어. 어둡고 밝은 그 본체는 둘이 아니다 이겁니다.

 
   그 실체가 없는 겁니다. 밝음도 실체가 없는 것이고, 어둠도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번뇌니 무슨 지혜니 하는 것이 다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그냥 사람일 뿐입니다. 그 사람이 그냥 “어둡다.” “밝다.” 하는 것이지요. 그냥 법당일 뿐이다 이 말입니다. 법당일 뿐이라고요. 그냥 법당이라고 하는 그 사실인데, 그걸 갖고 우리가 “밝다.” “어둡다.”그렇게 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본성입니다. 그 법당이라는 것이 본성입니다.

 
   “어둡다.” “밝다.” 하는 것은 그냥 지나가는 것입니다. 한 순간 밝으면 밝고, 어두우면 어둡고 그냥 지나가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래 우리는 그 법당의 실체를 알아야 돼요. 법당의 실체를... 법당의 실체에 어둠도 지나가고 밝음도 지나가는 것입니다. 사람의 실체. 본성의 실체에 어둠도 지나가고 밝음도 지나가는 것입니다. 사람의 실체. 그것이 부처입니다. 오직 그것 하나뿐이라고요.

 
   그래 여기서 羊車. 鹿車하는 것은 二乘(이승). 三乘들의 가르침이거든요. 그러면 唯有一佛乘(유유일불승)이다. 오직 이 세상에 一佛乘 하나뿐이다. 無二亦無三(무이역무삼)이요. “오직 이 세상에 一佛乘 하나뿐이다.” 라는 것은 궁극에 가서 “사람 하나뿐이다.” 이겁니다.

 
   “사람 하나뿐이다.”= “부처 하나뿐이다.” 똑 같은 말입니다. 어쨌든 그걸 사람이라고 하든지, 부처라고 하든지요. 그것은 하나일 뿐이니까요. 그것은 밝음도 아니고 어둠도 아닙니다. 밝음이라 할 것도 없고 어둠이라 할 것도 없습니다. “밝아야 부처다.” ←이런 조건 없습니다. 어두우면 중생이고. 대개 불교의 우리 근기에 맞춘 이야기들이 “밝으면 부처”이고 “어두우면 중생이다.” 그런 말 많이 있어요. 그런 말은 전부 우리 근기에 맞지요. 그건 “어둠도 아니고 밝음도 아니다.”

 
   “어둠과 밝음은 그냥 지나가는 거다.” 법당의 실체를 우리가 알아야 돼요. 법당의 실체를... 거기에 법당 안이 밝던지 어둡던지 이거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겁니다. 밝히면 밝고 어두우면 어두운 겁니다. 우리 인간의 본성도 밝은 것도 아니고, 어두운 것도 아닙니다. 그래 “無二無別(무이무별)이라” 그랬지요? 

 
   번뇌와 보리가 “無二無別이라” 그러니 불을 켜서 “어두운 것을 밝혔다.” 이것은 이승의 견해입니다. 우리 상식에는 계속 그것이 박혀 있는 것입니다. “지혜의 불을 켜서 번뇌의 어두움을 밝힌다.” 계속 그렇게만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육조스님의 진짜 법문이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이승의 상식이 그냥 꽉꽉 박혀 있으니까요. 이 대목만 제대로 이해하면 불교 끝나는 겁니다.

 
   了達其性(요달기성)이 無二(무이)라. 그 성품이 둘이 아닌 것을 안다. 無二之性(무이지성)이→ 둘이 아닌 성품이 卽是實性(즉시실성)이라→ 곧 실다운 성품이다. 이것이 진짜 실다운 성품이지, 밝아야 좋고 어두운 것은 나쁘고, 이것이 실다운 것이 아니지요. 아주 변화무쌍한 것이지요. 그것은 허망하기 이를 데 없는 성품이지요. “밝다.” “어둡다.” 하는 것은 허망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지요.

 
   밝게 하면 밝고, 낮에도 영화나 보려면 커텐 쳐 버리면 캄캄해지지요. 얼마든지 어둡게 할 수가 있지요. 그러니 법당 그 실체는 여여한 것입니다. 거기에 누가 불을 켜서 밝게 했던지, 커텐을 쳐서 어둡게 했던지, 법당 그 실체는 아무 상관없는 겁니다. 그렇듯이 우리 인간의 본성은 잠깐 밝던지 어둡던지 그것은 아무 의미 없는 겁니다. 그냥 지나가는 것입니다. 허망한 현상이다 이겁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가, 이런 견해가 불교의 궁극적인 이치를 이해하는 데에 마지막의 걸림돌이라고나 할까요? 이 사람도. 설간 이라는 사람이 왕의 심부름을 하는 佛敎大使(불교대사)로 육조스님을, 최고의 선지식 육조스님을 만나러 보낸 사람인데, 그 당시 불교를 보통만 아는 사람이겠어요? 설간 이라는 사람이 불교를 보통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자기 아는 불교를 이야기한 것입니다. 이 설간 이라는 사람의 질문이 일반적인 불자들의 대표적인 소견입니다.

 
   實性者(실성자)는→ 실성이라는 것은, 處凡愚而不減(처범우이불감)하고→ (여기 나오네요. 하~! 좋은 말이다 참.) 실성이라고 하는 것은 범부. 어리석은 사람에게 있다 하더라도 “減”하지 아니해. 감소되지 않는다 이겁니다. 아무리 못난 사람. 무식한 사람. 없는 사람에게 있어도 그것은 감해지지 아니해. 在賢聖而不增(재현성이부증)하며→ 현인이나 성인에 있다고 해서 그것이 더 불어나는 것도 아니다. “不增不感(부증불감)” “不增不感” 매일 우리 외우는 것 아닙니까?

 
   處凡愚而不減하고 在賢聖而不增하며 住煩惱而不亂(주번뇌이불난)하고→ 번뇌에 머물러 있어도 혼란스럽지 아니해. 법당을 캄캄하게 했다 해서 법당이 무슨 어디 탈나나요? 탈 안 난다 이겁니다. “煩惱而不亂”입니다.

 
   居禪定而不寂(거선정이부적)하야→ 禪定에 居해도. 햇빛이 쫙 나고 전기불이 환하게 비쳤다고 해서 법당이 무슨 달라지는 것 있나요? 居禪定而不寂하야→ 禪定에 居해도 고요하지도 아니해요. 그 자리는... 이 대단한 법문입니다. 대단한 법문...

 
   不斷(부단) 不常(불상)→ “斷”은 없다 이겁니다. 없는 것도 아니고, “常”은 있는 것도 아니고, 不來(불래) 不去(불거)→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고, 또 不在中間(부재중간)→ 중간에 있는 것도 아니에요. 及其內外(급기내외)라→ 중간과 그리고 안. 밖에 있는 것도 아니다.

 
   不生不滅(불생불멸)해서 性相(성상)이 如如(여여)하야 常住不遷(상주불천)을 名之曰 道(명지왈 도)라→ 常住不遷. 늘 있어서 옮기지 아니해. 늘 그대로 그 자리에 그렇게 있는 것. 여천이라고 할까요? 여여한 하늘 그대로...

 
  하늘에 해가 지나가고 달이 지나가고, 구름이 지나가고 비가 오고 눈이 와봐야 하늘은 여여 하지요. 그대로지요. 구름 끼면 구름 끼었고, 바람 불면 구름 걷어지고, 구름 끼고 걷히고 하는 그것을 하늘이라고 안 하잖아요. 常住不遷을 名之曰 道라 좋은걸 많이 해버리면 좀 그러니까 여기까지 해놓지요. 이거 마음에 좀 잘 새겨야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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