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님
2011.12.17 14:37

육조단경 강의 75 - 무비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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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5 강 - 付囑品- 1

 

 
     十 付囑品

 

  師於太極元年壬子七月에 命門人하사 ?生 新州國恩寺하야 建塔하실새 仍命促工하사 次年夏末에 落成하고 七月一日에 集徒衆曰, 吾至八月하야 欲離世間하노니 汝等은 有疑어든 早須相問하라 爲汝破疑하야 令汝迷盡케하리라 吾若去後엔 無人敎汝하리라

 
   法海等이 聞하고 悉皆涕泣하되 惟有神會- 神情이 不動하고 亦無涕泣하니 師云, 神會小師가 却得善不善等毁譽에 不動하야 哀樂不生하고 餘者는 不得하니 數年을 山中에 竟修何道오 汝今悲泣이 爲憂何誰오 若憂吾의 不知去處인댄 吾自知去處니 吾若不知去處면 終不豫報於汝리라 汝等悲泣이 盖爲不知吾去處리니 若知吾去處면 不合悲泣이리라 法性은 本無生滅去來니 汝等은 盡坐하라 吾與汝說一偈하리니

 
   名曰, 眞假動靜偈라 汝等이 誦取此偈하면 與吾意同이요 依此修行하면 不失宗旨하리라 衆僧이 作禮하고 請師偈說하니 曰

 

      一切無有眞하니 不以見於眞이어다

      若見於眞者는 是見이 盡非眞이니라

      若能自有眞인댄 離假卽心眞이니

      自心이 不離假면 無眞이니 何處眞이리요

      有情은 卽解動이요 無情은 卽不動이니

      若修不動行하면 同無情不動하리라

      若覓眞不動인댄 動上에 有不動이니

      不動이 是不動인댄 無情이라 無佛種이니라

      善能分別相호되 第一義엔 不動이니

      但作如此見하면 卽是眞如用이니라

      報諸學道人하노니 努力須用意하야

      莫於大乘門에 却執生死智어다

      若言下相應하면 卽共論佛意어니와

      若實不相應인댄 合掌令歡喜어다

      此宗은 本無諍이라 諍卽失道義하나니

      執逆諍法門하면 自性이 入生死하리라

 
    時에 徒衆이 聞說偈已하고 普皆作禮하야 幷體師意하고 各各攝心하야 依法修行하야 更不敢諍이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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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 付囑品(부촉품)

 
   마지막 부촉품 이라. “부촉” 이라는 말이 참 좋은 말입니다. “부촉”. 당부한다. 말하자면 어떤 명령을 내리고, 지시를 하고, 부탁하는 것을 평소에 한다기보다, 죽음을 앞두고, 열반을 앞두고 어떤 중요한 사항에 대해서 당부한다는 것은, 상당히 눈여겨 볼만한 내용이지요.

 
   師於太極元年壬子七月(사어태극원년임자칠월)에→ 太極元年인 때는 서기로 712년입니다. 命門人(명문인)하사→ 문인들. 당신의 문인들에게 명령을 해서, 往新州國恩寺(왕신주국은사)→ 내가 新州國恩寺에 가서 탑을 세울 일이 있다. 新州國恩寺에 가서 탑을 세운다.

 
   建塔(건탑)하실새→ 탑을 세우려고 해서 仍命促工(내명촉공)→ 工人(공인). 탑을 세우는, 말하자면 기술자들. 일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재촉을 해서, 次年夏末(차년하말)에 落成(낙성)→ 다음해, 여름이 끝날 무렵에 낙성을 했다. 그리고 七月一日(칠월일일)에 集徒衆曰(집도중왈)→ 徒衆들을, 제자들을 다 모아놓고,


   吾至八月(오지팔월)하야→ 내가 8월 달 되면, 7월 1일에 낙성을 했지요? 그 한 해만에, 그 당시 탑을 세운다 하면 장비가 좋습니까? 여러 가지 어려울 텐데, 몇 년 걸릴 텐데 재촉을 해서, 여기 보면 공인에게 재촉을 해서 일 년 만에 다 세우고, 壬子七月에 그렇게 문인들이 가서 했으니까 7월 1일에 낙성을 했으니까, 일 년도 안 걸렸지요. 한 11개월 정도 걸렸다고 볼 수 있겠네요. 그리고 내가 8월 달에 세상을 떠난다.

 
   欲離世間(욕리세간)→ 세간을 떠나고자 하노니, 汝等(여등)은 有疑(유의)어든→ 의심이 있거든 早須相問(조수상문)하라→ 빨리 물어라. 爲汝破疑(위여파의)하야→ 그대들을 위해서 의심을 깨뜨려 주겠다. 의심을 破 해주겠다. 의심을 다 풀어 주겠다. 그래서 그대들로 하여금 令汝迷盡(영여미진)케하리라→ 미혹이 없도록. 미혹이 다 하도록 내가 하겠다.

 
   吾若去後(오약거후)엔→ 내가 만약에 간 뒤에 無人敎汝(무인교여)하리라→ 그대들을 가르칠 사람이 어디 있겠나? 잘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하니까 법해가 큰 제자지요. 육조스님의 법문을 전부 모아서, 육조단경을 편찬한 분이 법해입니다.

 
   法海等(법해등)이 聞(문)하고→ 법해 등이 듣고는 悉皆涕泣(실개체읍)하되→ 모두들 우는 겁니다. 아이 금방 탑 세운다고 재촉을 해서, 겨우겨우 부랴부랴 탑을 하나 세워 놓고는 그만 8월 달에, 한 달 후에 내가 가겠다고 하니까, 평생 모시고 살던 제자들이 울지 않을 수가 없지요. 다 울되 惟有神會(유유신회)가→ 신회라는 제자. 저 앞에 나왔었지요? (72강) 아주 똑똑하기로 유명한 그 제자가,

 
   神情(신정)이 不動(부동)하고→ 아무런 정신이나 마음이 전혀 움직이지 아니하고 딱 있는 거예요. 스승이 돌아가시겠다고 해도 그렇게 움직이지 않고 딱 있다. 그리고 亦無涕泣(역무체읍)→ 울지도 아니해요. 울지도 않으니

師云(사운) 神會小師(신회소사)가→ 저 신해소사가. 작은 스님이 却得善不善等毁譽(각득선불선등훼예)에 不動(부동)→ 선이다 선이 아니다. 또 헐뜯고 칭찬 하는데 움직이지 아니 해서, 哀樂不生(애락불생)하고→ 슬픔과 즐거움이 나지 아니하고, 신해가 그렇고 餘者(여자)는 不得(부득)하니→ 나머지는 다 그렇지 못 하다.

 
   數年(수년)을 山中(山中)에 竟修何道(경수하도)오→ 다투어서 수행한다고 하면서 무슨 도를 닦았느냐? 이겁니다. 뭘 울고불고 그렇게 야단이냐 그 말이지요.

汝今悲泣(여금비읍)이 爲憂阿誰(위우옥수)오→ 그대가 지금 슬퍼하는 것이 누구 때문이냐? 누구를 위해서 슬퍼하느냐?

 


   집안에 식구가 죽으면 막 울고 야단인데 누구 때문에 슬퍼하지요? 죽은 사람을 위해서 슬퍼해요? 거의가 안 그렇더구만요. 죽은 사람이 불쌍해서 우는 것이 아니고, 우는 사람 자신을 위해서 운다더만요 대개... 여기 “누구를 위해서 슬퍼하느냐?” 그랬어요. 阿誰(옥수)= “옥수”라고 발음하지요. “아수” 가 아니고, “옥수”. 爲憂阿誰(위우옥수)오→ 누구를 근심해서 하기 때문이냐?

 
   若憂吾(약우오)의→ 만약에 不知去處(부지거처)→ 내가 어디 가는지 몰라서 그렇게 염려스러워서 한다면,

吾自知去處(오자지거처)니라→ 나는 내 스스로 내 갈 곳 다 안다. 내가 가는 곳 다 알지 그거 뭐 모르겠냐? 괜히 걱정할 것 뭐 있느냐? 이겁니다. 吾若不知去處(오약부지거처)인댄→ 내가 만약에 갈 곳을 알지 못한다면, 終不豫報於汝(종불예보어여)리라→ 내가 너희한테 한 달 후에 간다는 소리를 왜 하겠느냐? 이겁니다. 내가 내 갈 곳도 모르고 어찌 내가 한 달 후에 간다는 소리를 너희들에게 하겠느냐? 당치도 않다 이것이지요.

 
   汝等悲泣(여등비읍)이→ 그대들이 슬피 우는 것이 盖爲不知吾去處(개위부지오거처)니라→ 대개 내가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는 것. 그것 때문이다 이겁니다. 그대들이 내 가는 곳을 몰라서 그래서 울지 정말 안다면, 영 기분이 좋아서 야단일 것인데, 울기는 왜 우느냐? 이것이지요. 若知吾去處(약지오거처)면 不合悲泣(불합비읍)이라→ 만약에 내가 가는 곳을 그대들이 안다면, 굳이 울 필요가 없지 않느냐? 슬피 울 필요가 없다.

 
   法性(법성)은 本無生滅去來(본무생멸거래)니→ 나는 이미 법성화 됐다. 진리화 된 사람이야. 그러니까 이 진리라는 것은 “本無生滅去來”다. 본래 “生 滅 去 來”가 없는 자리다. 그런 경지까지 이른 것이다. 나는 가도 가는 것이 아니야. 너희들이 가는 것 하고는 다르다. 그런 뜻입니다.

 
   汝等(여등)은 盡坐(진좌)하라→ 모두들 앉으라. 吾與汝說一偈(오여여설일게)하리라→ 내가 그대들에게 게송 하나를 설해 주겠다. 名曰(명왈) 眞假動靜偈(진가동정게)라→ 게송 이름을. 참되고 거짓되고. 움직이고 고요한. 그런 어떤 상대적인 문제에 대해서 내가 게송 하나를 설해 주겠다.

 
   汝等(여등)이 誦取此偈(송취차게)하면 與吾意同(여오의동)이요 依此修行(의차수행)하면→ 이것을 의지해서 이 게송의 사상대로 수행 한다면, 不失宗旨(불실종지)하리라→ 종지를 잃지 않을 것이다. “宗旨” 불교에서 잘 쓰는 말이지요. 근본 되는 취지. 깨달음의 종교에 있어서의 가장 근본 되는 취지를 “宗旨”라고 합니다. 종지를 잃지 아니 하리라.

 
  衆僧(중승)이 作禮(작례)하고→ 모두들 예배를 하고서, 請師偈說(청사게설)하니→ 그럼 스님! 게송을 설해 주십시오. 앞으로 한 달 후에 입멸할 것을 앞두고 이렇게, 게송을 설하고 하는 이런 마당이니까 그 자리가 참 얼마나 숙연하고, 비장감이 감돌겠습니까? 曰(왈)

 
   [一切無有眞(일체무유진)하니 不以見於眞(불이견어진)이어다→ 일체에. 모든 것에 “眞”이란 것은 없다. 無有眞이라. “無有眞” 진은 없다. 不以見於眞이라 진을 보지 말라. 진을 찾지도 말라. 그래놓고,

 
   若見於眞者(약견어진자)는→ 만약 진을 보는 사람은, “眞”. 참된 것. 참된 것이라는 것은 동요함이 없고. 변하지 아니하고. 생멸이 없고. 없어지지 아니하는 이것을 “眞”이라고 그러지요. 그것을 眞理(진리)라고 해도 좋고요. 무슨 참된 경지. 참된 세계라고 해도 좋고 그렇습니다. 변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것. 만약 그런 진을 보는 사람은,

 
   是見(시견)이 盡非眞(진비진)이니라→ “眞”을 본다고 하는 이 “見”이. 본다는 사실이, 모두가 “眞”이 아니다 이겁니다. 그 “眞”은 참으로 변하지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그런 “眞”은 본다고 하는 사실이 없는 겁니다. 그래 본다는 것은 이미 이것은, 다 “眞”이 아니다. 참된 것이 아니다.

 
   若能自有眞(약능자유진)인댄→ 만약 능히 스스로 “眞”이 있다면, 참된 것이 있다면, 離假卽心眞(이가즉심진)이라→ 거짓만 떠나 버리면, “離假”. 거짓만 떠나 버린 즉은 곧 마음이 진실한 것이다. 굳이 “眞”을 찾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거짓만 떠나 버리면, 거품만 걷어내 버리면 진짜가 생긴다 이것이지요. 물이 있듯이...

 
   不除妄想不求眞(부제망상불구진). 그래요. 망상도 제하지 아니하고, 진도 구하지 않는다. 不除妄想不求眞이라. 그래 여기는 거짓만 사라지면 진심은 드러나게 되어있다.

 
   自心(자심)이 不離假(불리가)면→ 자기 마음이 거짓을 떠나지 못하면, “眞”이 없어. 거짓이 있는 한은 진이 나타날 수가 없다 이겁니다. 無眞(무진)이니→ “眞”이 없음이니 何處眞(하처진)이리요→ 어디에 진이 있겠는가? 요는 거짓에 속는 그 단계를 우리가 넘어야 돼요. 거짓을 걷어내고 어디 버리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떠난다.” 이런 표현을 했지만, 거짓에 속는 그 단계를 넘어서야 됩니다.

 
   凡所有相(범소유상) 皆是虛妄(개시허망) 若見諸相非相(약견제상비상). 그랬잖아요? 모든 형상 있는 것은 허망한 것이니, 모든 相을 상이 아닌 줄로 본다. 그러면 상에 속고 사는. 상이라는 어떤 형상의 한계에서만 벗어날 수 있으면, 若見諸相非相(약견제상비상)이면 卽見如來(즉견여래)니라. 곧 여래를 본다 그랬어요. 똑 같은 이치지요?

 
   自心(자심)이 不離假(불리가)하면→ 거짓을 떠나지 아니하면 “眞”이 없음이니, 그냥 거짓을 보는 그 한계에 매어있다 이겁니다. 그러면 “眞”을 볼일이 있어도 보일 리가 없는 것이지요. 何處眞(하처진)이리요→ 어디에 진이 있겠는가?

 
   有情(유정)은 卽解動(즉해동)이라→ 情이 있는 어떤 존재는 움직이는 것을 알아. 또 無情(무정)은 卽不動(즉부동)이다→ 움직이지 않는다. 우리가 대개 有情物(유정물). 無情物(무정물). 그렇게 생각을 해도 좋습니다.

 
   若修不動行(약수부동행)하면→ 만약에 不動行. 부동행을 만약에 닦는다면, 同無情不動(동무정부동)하리라→ 그러니 무정이 움직이지 않는다. 목석이라고 합시다. 목석  같은 것은 “무정물” 이라고 일단 그렇게 치니까요 상식적으로는... 그러면 “목석”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서, 움직이지 않는 그것을 좋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을 흉내내면 뭡니까? 무정들이 움직이지 않는 것 하고 똑 같이 된다 이겁니다.

 
   그럼 “무정물”이 되는 것이지, 도 닦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지요. 도 실컷 닦아서 “목석”이 되는 것이냐? 이것이지요. 그것은 아니지 않느냐? 이것이지요. 그러니까 “不動行” “무정물”같은 그런 부동. “목석”이 되는 것. “목석”같이 되는 것을 우리가 “아이고 道人(도인)”이라고 그렇게... 목석 같이 돼버리면, “도인”이라고 우리가 말하는데 그것은 비꼬는 의미가 많지요 사실은...

그래서 “목석”같이 된 사람을 “도인”이라고 하면서 그 내용은 어떤 잘못된 “도인”이라는 그런 뜻이 담겨 있지요.

 
   若覓眞不動(약멱진부동)인댄→ 만약에 참으로 동요하지 않는 것을 찾을진댄, 動上(동상)에서 有不動(유부동)이니→ 動上에서 부동인줄 알아야 된다. 참 이것 멋진 말입니다. 부단히 움직이는 그 가운데서 “動”하지 아니하는 도리를 찾아야 된다. “動”하지 아니하는 이치가 있다는 겁니다. 물이 얼음이 되고 물이 되고, 흐리기도 하고 가만히 있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고 맑기도 하고 그렇지요? 그거는 “動”이예요. 그런 여러 가지 모습은...

 
   그런데 젖는다는 사실은 이것은 흐린 물이나 맑은 물이나, 흐르는 물이나 고여 있는 물이나 똑 같이 濕性(습성). 젖는 성품은 변함이 없다. 그것은 물이 출렁거리든지 가만히 있든지 간에, 그 젖는 성품은 똑 같거든요.

動上(동상)에서 有不動(유부동)이다→ “動”하지 아니하는. 영원히 변하지 아니하는 그런 도리가 있다. 그것은 비유로서 그렇고, 이것은 세상의 모든 존재들. 또 우리의 마음들. 우리 마음에 있어서 이렇게 이해를 해야 그것을 제대로 움직이지 아니하는 도리를 안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저 앞에서 유명한 구절이라고 그랬지요?

湛然常寂(담연상적)해서 妙用恒沙(묘용항사)라. ←(74강) 妙用恒沙는 “動”하는 것이지요. “不動”은 뭐라고요? “湛然常寂”이 “不動”한 것이지요. 그러면 “妙用恒沙” 부단히 우리가 온갖 사물을 분별하고, 망상 부리고, 이 생각 저 생각하고, 별별 마음 작용을 부단히 하는 그 가운데 항상 “湛然常寂”한. 空寂(공적)한 우리의 참 마음. 그것을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그것을 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動上(동상)에 不動(부동)이 있으니, 不動(부동)이 是不動(시부동)이면→ 不動. 동 하지 않는 것이 참으로 “不動”하는 것일진댄 無情(무정)이라 無佛種(무불종)→ 부처의 종자는 없다 이겁니다. 진짜 목석같이 “動”하지 아니하는 것을, “動”하지 아니하는 것 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無情物(무정물)이지요. 그것은 무정물이지, 그것을 문제 삼을 것 있느냐? 이겁니다. 그것은 부처의 종자가 없는 것이다 이겁니다. 참 아주 이치를 제대로 밝힌 대목입니다.

 
   이런 글 보기. 만나기 어려워요 사실은... 이렇게 짧게 말씀 하시면서 명확하게...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무심하고 움직이지 않고 목석처럼 된 것. 그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건 무정이거나 부처의 종자가 없음이라.

 
   善能分別相(선능분별상)호되→ 어떤 현상들을 잘 능히 분별 하지만, 第一義(제일의)에는 不動(부동)이라→ 바로 이것이지요. 우리가 춥고 덥고 시간이 흐르고 무슨 말을 하고, 그 말이 마음에 들고 안 들고, 맞는 말이고 틀린 말이고 이런 것 얼마나 분별 잘합니까? 제가 틀린말 하면 다 안 놓치고 다 알아요.

 
   어떤 현상 차별을 전부 “善能分別”이예요. 능히 잘 분별 합니다. 하지만 그 아주 열심히 분별 하는, 그 가운데 第一義. 말하자면 “湛然常寂(담연상적)”한 마음의 本體(본체). 그거는 “動”하지 않는다 이겁니다. 그거는 如如(여여)히 그대로 있는 거예요. 여여히 그대로 있으니까 쓸 일이 있으면 그냥 쏜살같이 나가서 쓰는 겁니다. 쏜살같이 나가서 쓴다고요. 그러니까 말이 아무리 빨리 바뀌고 상황이 바뀌더라도 일일이 감지를 다 하지 않습니까? 전부 감지를 다 하거든요.

 
   그렇게 활동할 수 있는 것이 “不動”의 어떤 心體(심체). 本心(본심)이 있기 때문에 그런 활동이 가능한 겁니다. 그래서 참 이 “第一義”라고 하는 말이, 이건 무조건 “第一義”예요. “第一義”인데 그 “第一義”는 우리의 그 “湛然常寂”한 “動”하면서도 움직이지 않는 본체적인 심체를 이렇게 표현한 것이지요. 그것은 “動”하지 아니한다.

 
   但作如此見(단작여차견)하면→ 다만 이와 같은 견해만을 쓴다면, 卽是眞如用(즉시진여용)이니→ 이것이야말로 眞如. 참답고 여여한. “참되고 여여”하다는 말은 변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아니하는 그런 작용이다. 이 게송이 “眞假動靜偈(진가동정게)” 이름을 붙여서, 우리 마음의 본체를 참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報諸學道人(보제학도인)하노니→ 여러 도를 배우는 사람에게 알리노니, 努力須用意(노력수용의)해서→ 노력하고  모름지기 마음을 써서, 莫於大乘門(막어대승문)에→ 대승문에 있어서 却執生死智(각집생사지)어다→ 도리어 생사의 지혜를 집착하지 말지어다.

 
   “生死智”라는 말은 生滅智(생멸지). 변동이 많고 생사를 따라가는 그런 지혜. “生死智”라는 말도 육조스님이나 쓰실 수 있는 말입니다. “生死智” 그러니까 지혜라고 할 것도 없고, 금방 있다가 없어지고 없다가 생기는 아주 그런 확실한, 불변하는 般若智(반야지)가 아니고, 엉터리 지혜를 “生死智”라고 합니다. 도리어 생사의 지혜를 집착하지 말지어다.

 
   “大乘門”이라고 하는 것은 법화경에서 흔히 “소승과 대승” 이것을 제일 명료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一佛乘(일불승)을 두고 “大乘”이라고 그러지요. 若言下相應(약언하상응)하면→ 만약 언하에. 내가 지금 이렇게 설명하고 있는 이 말에, 딱 뭔가 계합이 되면, “相應”이라는 말이 탁 계합이 된다. 딱 마음에 와 닿는다 이것이지요. 내 말이 마음에 와 닿을 것 같으면,

 
   卽共論佛意(즉공론불의)라→ 부처의 도리를. 부처의 이치를 같이 이야기할 수 있다. 共論佛意라. “佛意”를 공론할 수 있거니와 若實不相應(약실불상응)인댄→ 만약 실로 마음에 와 닿지 못한다면, “相應”하지 못 할지면 合掌令歡喜(합장영환희)어다→ 그냥 합장하고 기뻐하기나 하라 이겁니다. 기뻐하기나 하라. 이것도 화엄경의 표현하고 비슷해요.

 
   제가 교육원 숙소가 있는 동네에 가서 살다보니 佳會(가회)동이더라고요. 이름이 참 좋은 동네예요. 거기는 옛날부터 양반 동네지요. 뭐 재동 개동 가회동. 그러는데요. 그 부근에 조그마한 동네들인데, 그 화엄경을 표현한 내용 중에, 화엄경 안에는 그런 글이 없는데요. 청량스님이 화엄경의 경지가 아주... 화엄법회가 워낙 찬란하고 경지가 높거든요.

 
   부처님의 상수제자. 앞에서(74강) 유마대사에게 혼난 그런 사람들이 그런 화엄회상이 있다는 것만 들었지, 杜視聽於嘉會(두시청어가회)하여라. 아름다운 법회가 있다는 소리만 들었지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했다. 그런 표현이 있습니다. 그래 거기 가회가 나온다고요. 법화회상이나 화엄회상이나 그런 아주 멋진 법문이 설해지는 법회를 “佳會(가회)”라고 그래요. 부처님의 상수제자들은 화엄법회가 있다는 소리만 들었다는 겁니다.

 
   아! 훌륭한 법회가 어디서 열린다는데, 거기서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가는지, 누가 거기에 모였는지, 보고 듣는 것은 다 벙어리가 되고 맹인이 돼버렸다. 벙어리가 되고 맹인이 됐다는 표현들이 있습니다. 입법계품에 그런 사실이 있습니다. 그런 사실이 있는 것을 청량국사가 그것을 아주 간단하게 서문에서 그런 표현을 했지요. 여기에 바로 그거예요.

 
   合掌令歡喜(합장영환희). 若實不相應(약실불상응)인댄→ 만약 실로 가슴에 와 닿지 못 하면 그저 합장하고 즐거워나 하라 이겁니다. 좋아나 하라. 환희나 하라 이겁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의 십대제자들도 화엄회상이 있다는 소리. 아름다운 법회가 있다는 소리만 들었지 그 내용이 뭔지, 또 누가 모였는지 전혀 몰랐다. 合掌令歡喜(합장영환희)→ 합장하고 환희할 지어다.

 
   此宗(차종)은 本無諍(본무쟁)이라→ 이 宗旨(종지). 바야흐로 부처님의 근본정신이 전해 내려오는 이 근본취지에 대해서는, 근본취지. 여기에 대해서는 본래 시시비비 타툴 일이 없다. 뭐 옳다 그르다 그거 뭐 그런 말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 이것이지요. 그것이 하나도 필요치 않는 곳이다. 본래 다툼이 없다. 辨明(변명)할 일이 없다.

 
   諍卽失道義(쟁즉실도의)→ 옳다 그르다 맞네 틀리네 다퉈봤자 그것은 “道義”를 일어버리는 것이다. 도에 대한 이치를 잃어버린다. 本來(본래) 이 家門(가문)에는 다툼이라는 것이 없는 자리인데, 다툰다는 그 자체가 이미 도 하고는 거리가 멀다 이것이지요.

 
   執逆諍法門(집역쟁법문)하면 自性(자성)이 入生死(입생사)하리라→ 자기에게 “거슬린다.”고 하는 것에 집착해 서 “法門”을 닦으면, “執逆” 자기에게 거슬리는 “이론이다.” “사상이다.” 라고 하는 것에 집착해서 법문이 옳다 그르다 맞다 틀리다 이렇게 다툰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좋은 자성. 不生不滅(불생불멸)의 自性(자성)을 갖고 “生死”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된다. 아주 그 표현이 단언한 표현이지요? “生死”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된다. 그러니까 절대 다투지 마세요. 이것은 앞으로 한 달 후에 열반을 앞두고...

 
   이것은 원래 불교문중에 이런 이치에 대해서도, 다툰다고 하는 사실이 있을 수가 없지만, 또 이것은 제자들에게 은근히 그 이치를 두고 그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견제를 하는, 아주 큰 견책을 내리는, ‘너희들, 앞으로 다투기만 하면 그냥 안 둔다.’ 하는 그런 식으로 은근히 속뜻이  이중으로 담겨져 있지요.

 
   불법에 본래 다툼이 없는데, 너희들 만약에 내가 죽고 나서 무슨 전법의 문제라든지, 그 외에 다른 것을 가지고 다툰다는 것은, 그 좋은. 불생불멸. 생사를 超脫(초탈)하게 되어 있는 그 자성을 가지고 “生死”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되니까 행여 그런 일은 하지 말라는 아주 세련된 게송이고, 내용이 뛰어나고 또 끝머리에 아주 묘한 뉴앙스를 풍기는 것들도 참 인간적인 냄새도 나고, 참 좋아요 이 게송이...]

 
   時(시)에 徒衆(도중)이 聞說偈已(문설게이)하고→ 게송 설하는 것을 듣고 나서 普皆作禮(보개작례)하고→ 전부 일어나서 육조스님에게 예배를 올리고, 幷體師意(병체사의)하고→ 그리고는 또 아울러 幷體. “體”라고 하는 것은 붓글씨 쓰러 가면 “체 받는다.”고 그래요. “체 받는다.”

 
   “師”의 뜻을, 그러니까 “다투지 말라.”고 하는 것이라든지, 그 외에 위에서 일러준 뜻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師意”를 체 받는다. 하는 이 말이, 뒤에 “다투지 말라.”고 하는 불법에는 다툼이 없다고 하는 이런 것들을 우리가 생각할 수가 있는 것이 바로 그겁니다. “스승의 뜻을 체 받는다.”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겁니다.


   그 “체 받는다.”는 것은 사범이 써준 그대로. 그 획 그대로 우리가 흉내 내서 쓰는 그 일을 두고 하는 말이지요. 책본을 받아서 그걸 그대로 흉내 내서 쓰는데, 하나도 틀리지 않게 그대로 흉내 내서 그어야 되거든요. 그것이 익숙해 져야 돼요. 그래서는 남 글씨를 흉내 내는 것이 아주 뭐... 어떤 글씨도 마음대로 흉내낼 수 있도록 그렇게 된 뒤에. 체 받은 뒤에 그때야 자기 글씨가 나오는 것이지요. 그 체도 아무나...

 
   못난 것이 흉내 내서 쓸 줄 알면 안 되고요. 옛날 고첩을 자유자재로 그대로 흉내 낼 수 있을 때. 그런 단계를 거친 뒤에는 그때는 자기 글씨가 나와도 좋다는 것이지요. 그림도 그렇고 글씨도 그렇고 뭐든지 다 그렇지요. “師”의 뜻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各各攝心(각각섭심)하야→ 각각 마음을 거둬들여서,

依法修行(의법수행)해서→ 법에 의지해서 수행해서,

更不敢諍(갱불감쟁)이러라→ 이 다툰다는 말이 또 나오는데, 아마 육조스님이 말년이 되고 이제 곧 열반에 드시니까 뭐 다툴 꺼리가 좀 있었던 모양이지요?

 
   이해관계라든지, 무슨 법력 문제라든지 등등, 그래 놓으니까 이런 말을 했고, 또 幷體師意(병체사의). “스승의 뜻을 체 받았다.” 하는 이 말이, 뭔가 그 당시 말년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조금 외람되지만 좀 짐작할 수 있지 않겠나? 하는 그런 생각도 듭니다.

更不敢諍(갱불감쟁)이러라→ 다시는 감히 다투지 않더라. 않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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