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님
2011.12.17 14:46

육조단경 강의 77 - 무비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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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7 강 - 付囑品- 3

 

 
   師復曰, 汝等이 若欲成就種智인댄 須達一相三昧와 一行三昧니 若有一切處에 不住相하야 於彼相中에 不生憎愛하고 亦無取捨하며 不念利益成壞等事하야 安閒恬靜하고 虛融澹泊하면 此名一相三昧며 若於一切處行住坐臥에 純一直心으로 不動道場하면 眞成淨土라

 
   此名一行三昧니 若人이 具二三昧하면 如地有種에 含藏長養하야 成熟其實인달하야 一相一行도 亦復如是하니라 我今說法은 猶如時雨- 普潤大地요 汝等佛性은 譬諸種子- 遇玆霑洽하야 悉得發生이니 承吾旨者는 決獲菩提요 依吾行者는 定證妙果하리라 聽吾偈하라 曰

 

   心地含諸種하니 普雨悉皆萌이로다

   頓悟華情已하면 菩提果自成하리라

 
   師- 說偈已하시고 曰, 其法이 無二라 其心도 亦然하며 其道淸淨하야 亦無諸相하니 汝等은 愼勿觀靜과 及空其心이어다 此心이 本淨이라 無可取捨니 各自努力하야 隨緣好去하라 時에 徒衆이 作禮而退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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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師復曰(사부왈)→ 육조스님께서 다시 말씀하시기를,

汝等(여등)이→ 그대들이 若欲成就種智(약욕성취종지)인댄→ 만약에 種智를 성취 하고자 할진댄, 種智. 본래 “一切種智(일체종지)라고도 하고, 그냥 種智. 라고 하기도 그래요.  이것은 “根本智(근본지)” 그런 뜻으로 봅니다.

 
   근본은 “모든 지혜가 그 속에 다 갈무리 되어 있다.” 그래서 “종자지혜” 또는 “일체 종자의 지혜” 또는 “근본지혜” 이렇게 보는 것이지요. 그 근본지혜를 성취한다는 문제를 제일 큰 깨달음으로 보는데, 깨달음을 얻어야 이 “종지.” 또는 “일체종지.” 경전에는 일체종지라는 말을 참 많이 씁니다. 특히 화엄경에는... 일체 것이 다 그 속에 갈무리 되어 있는 그런 지혜! 모든 것을 다 꿰뚫어 아는 그런 지혜! 그래서 세상만사 모든 것을 다 꿰뚫어 아는 지혜! 그렇게 이해를 하면 됩니다. 그것을 성취 하려면,

 
   須達一相三昧(수달일상삼매)와 一行三昧(일행삼매)→ 일상삼매하고 일행삼매를 통달해야 된다. 꼭 그것을 통달해야 되는데, 若有一切處(약유일체처)에→ 만약 모든 곳에서 不住相(부주상)하며→ 상에 머물지 아니하면,

於彼相中(어피상중)→ 그 상중에서

不生憎愛(불생증애)라→ 상에 머물지 아니하면서 상중에서 증애를 내지 아니하고, 상에 머물지도 말고 또 그 상중에서. 여기서 “相”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눈앞에 나타난 그 현상들. 또 우리가 만나는 모든 문제들. 이런 것들을 흔히 “相”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현상” 할 때는 이런 상자를 아니 쓰지만, 우리 불교에서는 모양 상자를 형상 상자로 같이 보고 그래요. 거기에 “憎愛” 좋다 나쁘다. 나쁘다 좋다 하는 그런 생각을 내지 않는다 이겁니다. 어떤 사람을 보거나 어떤 사건을 보거나 어떤 사물을 볼 때, 거기에 증애심을 내지 아니하고, 또 亦無取捨(역무취사)하며→ 또한 취사심도 내지 아니하고, 取捨心(취사심). 대개 우리가 보면, “좋다.” “나쁘다.” 부터 먼저 떠 올리지요.

 
   대개 중생들은 “좋다.” “나쁘다.” 좋다. 나쁘다. 하면 좋은 사람은 만나고, 안 좋은 사람은 피해 버리고, 그것도 취사심이지요. 흔히 일으킬 수 있는 마음이 증애심. 또 증애심 뒤에 따르는 것이 취사심. 이겁니다. 신심명에도 보면 取捨揀擇(취사간택). 중생들의 병이 그 것이니까요. 그것을 내지 않고, 모든 것을 평등하게 그냥 보기만 하지, 또 알기만 하지 거기에 “좋다.” “나쁘다.” 그렇게 자기감정 개입시키지 말라는 것이지요. 정확하게 파악은 하되 “감정을 개입시키지 말라.” 그런 의미로 보면 됩니다.

 
   그래서 不念利益成壞等事(불념이익성괴등사)→ “나에게 이익이 있다.” 이것은 “나에게 덕이 되는 거다.” 成功(성공). 또 “나에게 손해를 끼치는 것이다.” 壞(괴). 이런 등등 상대적인 생각을 일으키지 아니할 것 같으면,

 
   安閒恬靜(안한염정)→ 편안 하지요. 그리고 마음이 한가해요. 좋으니까 좋은 것 취하려고 허둥대면 그것은 한가할 수가 없지요. 또 편안할 수도 없습니다. “恬靜” 이라는 것도 고요한 상태. 마음이 아주 편하고 고요한 상태. 뭐 좋은 생각도 나쁜 생각도 없이, 보면 보는 그대로 정확하게 판단만 하는 것이지요. 개인의 어떤 희로애락의 감정을 거기다 개입시키지 않고 판단만 하는 겁니다.  “安閒恬靜(안한염정).” 우리 정신상태가 아주 조용하고, 치우치지 않고, 감정이 개입되지 않고, 아주 좋은 그런 상태.

 
   虛融澹泊(허륭담박)하면→ “虛融”도 마음에 어떤 취사심이 없이, 텅 비고, 텅 비면 융통자재 하지요. “融”자는 막히지 않는다는 뜻이고, “澹泊” 이라는 것도 말쑥하고 깨끗한 그런 마음상태. 그렇게 될 것 같으면,

此名一相三昧(차명일상삼매)다→ 이것을 이름 해서 一相三昧라. 이거 다른 이들은 잘 안 씁니다.

 
   一相三昧. 一行三昧. 육조스님이 자유롭게 이렇게 쓰는 말이지요. 一相三昧. 하나로 통일된 삼매. 이런 뜻이지요. 일행이나 일상이나 같은 뜻입니다 사실은...

若於一切處行住坐臥(약어일체처행주좌와)에→ 또 만약에 一切處. 行 住 坐 臥 걸어 다니거나 머물러 있거나 앉았거나 누웠거나 하는데, 純一直心(순일직심)으로→ 아주 순일하고 곧은 마음으로,

 
   不動道場(부동도량)하면은→ 그 도량에 앉은 채 움직이지 아니하면, 이것은 “부처님께서 도량에 앉았다.” 도량이라고 하는 말은, 6년간 많은 스승을 찾아다니다가 또 고행도 하시고, 그러다가 최후 일주일 있잖습니까? 최후에 정정각 산에서 내려와서 목욕을 하고, 죽을 받아먹고 다시 정신을 차려서 고행 포기해 버리고, 포기가 아니지요. 그건 벌써 떠나버린 것이지요.

 
   완전히 중도적인 그런 입장에 서서 정말 아주 정상적인 선정에 들어서, 곧 바로 일주일후에 깨달음을 성취하는 그 순간 계셨던 자리를 “道場(도량)” 그래요. “道場”하면 의례히 깨달음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경전에는 늘 그래요. 그래서 도량에 앉아서 일주일간 움직이지 아니 했지요. 거기가 지금 보드가야 성도하신 자리에 큰 탑을 세워놓은 바로 그 자리를 말하기도 하고, 또 뜻으로는 그 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든지 부처님이 깨닫기 직전, 앉아서 누렸던 삼매! 그리고 그 어떤 정신상태! 이것을 흔히 이렇게 “不動道場” 또는 “도량에 앉았다.”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그것이 “純一直心”이지요. 아주 순일하고 곧은 마음. 그것은 고행도 아니요. 무슨 향락도 아니요. 그야말로 마음이 아주 편안한 어려움도 없고, 그렇다고 무슨 즐거움도 없고 그런 상태. 마음에 동요가 전혀 없는 바로 깨달음으로 나아갈 그런 어떤 상태. 그런 상태가 될 것 같으면 眞成淨土(진성정토)라→ 바로 참으로 정토를 이루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극락이라는 것이지요. “극락정토가 된다.”

 
   此名一行三昧(차명일행삼매)다→ 이것은 한결 같은 삼매. 저기는 마음이 한 모양인 상태. 여기는 어떤 정신상태가 “純一直心”이니까 한결 같은 그런 삼매다.

若人(약인)이 具二三昧(구이삼매)하면→ 이 두 가지 삼매를 갖춘다면,

 
   如地有種(여지유종)에 含藏長養(함장장양)하야→ 마치 땅에 有種. 씨앗을 심었다 이겁니다. 씨앗을 뿌렸다. 땅에다 씨앗을 뿌렸을 때, 그 땅에는 그 씨앗을 含藏하고 있습니다. 머금고 있어요. 땅이 갖고 있어요. 그리고는 어떻게 합니까? 자꾸 습기가 차면 차츰차츰 그 씨앗이 불러서 싹이 나지요. 그래서 長養한다. 키워내는 것이지요.

 
   “長養한다.” 싹이 자라난다. 자라서 成熟其實(성숙기실)인달하야→ 더욱더욱 성장하고 익어지면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는 것과 같이, 一相一行(일상일행)도→ 일상삼매나 일행삼매도 亦復如是(역부여시)하니라→ 또한 다시 그와 같다.

 
   그러니까 도량에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

“純一直心(순일직심)” 그리고 “安閒恬靜(안한염정)” “虛融澹泊(허륭담박)”한 그런 마음상태. 이것이 참 좋은 표현입니다. “安閒恬靜(안한염정)” “虛融澹泊(허륭담박)” 우리 마음이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어떤 좋고 싫은. 또 기쁨과 슬픔. 이런 상대적인 감정이 다 사라져 버린 상태에서. 마음에 아무 걸릴 것이 없는 상태로서 또 “純一直心(순일직심)”한. 그러면서 동요하지 않는 “不動道場(부동도량)” 동요하지 않는 그런 도량.

 
   부처님이 앉았던 그런 도량에 있는 마음상태를 잘 유지하면 그대로 열매를 맺게 된다. 순숙해서 그 열매가 成熟(성숙) 해진다. 그렇게 봐도 좋겠네요. 그렇게 돼서, 一相一行(일상일행)도 亦復如是(역부여시)한다.

我今說法(아금설법)은→ 내가 지금 설법하는 것은,


   猶如時雨(유여시우)가 普潤大地(보윤대지)요→ 때맞추어서 내리는 비와 같다 이겁니다. 때맞추어서 오는 비가 널리 대지를 흠뻑 적시지요. 윤택하게 푹 적신다. 그러니까 육조스님의 설법은 마치 때맞추어 내리는 비다 이것이지요. 그래서 대지를 흠뻑 적신다. 그 대지는 누구겠어요? 바로 우리들이지요.

 
   수호지에 “及時雨 松江(급시우 송강)” 제일 두목이 송강이지요? 그 사람의 호가 及時雨라고요. 때맞추어 내리는 비다. 그렇게 표현을 했는데, 아주 멋지게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108두령은 “인간의 108번뇌를 상징하는 것이다.” 해서 아주 깊이 있는 소설이지요. 그것이 뜻으로 보면... 여기도 육조스님께서 법문하는 것은 “及時雨(급시우)” 때맞추어서 내리는 비와 같다. “時雨”라는 것이 급시우지요. 때맞추어서 내리는 비.

 
   汝等佛性(여등불성)은 譬諸種子(비제종자)가→ 그대들이 부처의 성품을 개개인이 다 마음속에 지니고 있는 것은 마치 종자가. 씨앗이 비를 흠뻑 머금어서, 싹이 트는 일과 같다 이겁니다.

 
   遇玆霑洽(우자점흡)이라→ 비에 흠뻑 젖어서 불러서 싹이 나는 것을 만나는 것과 같다. 종자가 비를 잔뜩 만나 보세요. 얼마나 싹이 잘 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 제자들이 육조스님의 법문을 들으면 그렇게 불성의 싹이 자라난다. 아주 눈에 선히 어떤 현상으로서 보이듯이 그렇게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悉得發生(실득발생)→ 그럼 이제 싹이 난다 이것이지요. 모두들 發生 하는 것과 같음이니,

承吾旨者(승오지자)는→ 내 뜻을 받드는 사람들은

決獲菩提(결획보리)요→ 반드시. 결정코 보리를 얻을 것이고,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비를 뿌려주고 그대들이 제대로 된 종자라면, 비에 푹 젖어서 금방 發生 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될 것이 아니냐 이것이지요. 그래서 보리를 이룰 것이다.

 
   依吾行者(의오행자)는→ 依吾. 나를 의지해서 행하는 사람. 수행하는 사람은 定證妙果(정증묘과)→ 결정코 妙果를 이룰 것이다. 證. 증득할 것이다. 이룬다는 뜻입니다. 아주 틀림없이 “妙果” “佛果(불과)”를 묘과라고 합니다.  等覺(등각). 妙覺(묘각). 그러거든요.

 
   十信(십신). 十住(십주). 十行(십행). 十廻向(십회향). 十地(십지). 그러면 50位(위)이고, 그 다음에 마지막 等覺. 같을 등자. 말이 재미있어요. 覺하고 비슷하긴 해도 覺은 아니라는 뜻이지요. 妙覺. ←이것이 “佛果”입니다. 그래 이것을 “妙果” 이렇게도 표현합니다. 等覺은 아직은 覺에 유사하다. 覺과 같다. 아무리 같아도 “같다”고 하는 말은 그 자체는 아니지요.

 
   “같다”고 하면 그 자체는 아니고, 그 자체는 “妙覺(묘각) 이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거의 같은 상태에 까지 이르렀다. 표현을 그렇게 합니다. 나눠서 설명하면 그래요. 그것도 다 다른 입장에서 보면 말일 뿐이지만, 그래도 교리상 그렇게 나눠놓고 보는 것이지요. 여기서 “妙果”라는 것은 바로 “佛果”를 뜻하는 것입니다. 聽吾偈(청오게)하라 曰(왈)→ 내 게송을 다시 한번 들으라. 요약해서 게송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心地含諸種(심지함제종)하니→ 마음 땅이 여러 가지 종자를 함유하고 있으니, 普雨悉皆萌(보우실개맹)이로다→ 널리 비가 내려서 모두들 그 씨앗들이 전부 싹을 틔움이로다.

 
   頓悟華情已(돈오화정이)하며는→ 몰록 깨달아서 꽃의 정이 다 하면, “몰록 깨달아서 꽃의 정이 다 한다.” 꽃은 꽃으로서 일생을 다 마칠 것 같으면, 그 다음에 열매가 맺지요?

 
   菩提果自成(보리과자성)하리라→ 보리의 결과가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다. 저절로 성취될 것이다.] 이것이 일반적인 성불해 가는 과정을 이렇게 표현을 하고 있는데요. 이런 이야기는 지극히 상식적이기는 하지만, 법화경의 이치에다가 두고 보면, 꽃과 열매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으로, 연꽃의 특징을 그렇게 보거든요.

 
   그래서 아예 그 안에 무슨 뭐 “華情已(화정이)” 이것이 끝난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꽃의 시대가 막을 내리면, 그 다음에 열매의 시대가 온다. “菩提果(보리과)” 보리의 열매의 시대가 온다. 이렇게 볼 수가 있지요. 이 글은... 그런데 연꽃은 그렇게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지요.

 
   꽃의 시대가 따로 끝난 뒤에 그 다음에 열매의 시대가 오는 것이 아니라, 꽃이 맺힐 때 그 안에 이미 열매가 그 속에 같이 있다는 것. 이것이 연꽃의 특징인데요. 그것이 그야말로 완벽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가 있지요. 중생과 부처의 관계를 연꽃에다 비유를 한 것이... 여기도 꼭 그렇게 나누어서 이야기 했다기보다, 이것은 순서로서는 자연스럽고, 말은 아주 제대로 되어 있지요. 그러나 여기서 이야기한 것만 이해를 해도, 또 그렇게 우리가 밟아 나간다 하더라도 그것은 상당한 것이지요.

 
   師(사) 說偈已(설게이)하시고→ 스님께서 게송을 설해 마치시고, 曰(왈) 其法(기법)이 無二(무이)라→ 그 법이라고 하는 것. 이치라고 하는 것. 그것은 둘이 없는 것이다. 또 其心(기심)도 亦然(역연)하며→ 그 마음도 또한 그렇다. 둘이 없다 이것이지요.

 
   其道淸淨(기도청정)하야→ 그 도가 청정해서, 淸淨. 텅 비었다 이겁니다. 도라고 하지만 도라는 것이 무슨 건덕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마음으로부터 느끼는 것이고 누리는 것이고, 이미 있는 것을 느끼고 누리는 것이지, 뭐 따로 드러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지요. “淸淨”이라는 것이 그런 뜻입니다. 텅 비어서,

 
   亦無諸相(역무제상)이라→ 그래서 또한 어떤 모양도 있는 것은 아니다. “道” 라는 것이 무슨 형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겁니다. “道可道(도가도)면 非常道(비상도)”라고 그러지요. 도를 도라고 일컬을 때, 그것은 이미 제대로 된 떳떳한 도는 못된다. 유사한 도는 될지언정 떳떳한 도는 못된다. 노자의 첫 구절을 그렇게 해석을 흔히 잘 하는데요. 그렇지요. 여기도 일체상이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우리가 그렇게 말은 하지만, 텅 비어 있는 것이지요.

 
   其道淸淨(기도청정). 汝等(여등)은 愼勿觀靜(신물관정)과 及空其心(급공기심)이어다→ 그대들은 고요한 것을 관한다든지, 또는 그 마음을 비운다든지 하는 것. 이런 것 하지 말라 이겁니다. 이것은 일종의 수행입니다. “觀靜”이라는 것도요. “정환적” 원각경에도 “정환적”이라고 해서 관법이, 고요한 것을 관하는 것이 있고, 또 “지관”하는 것이 있고 그렇지요.

 
   옛날 식. 看話禪(간화선)이 생기기 이전 선법이 대개 “止觀(지관)”입니다. 止는 마음에 일어나는 온갖 망상을 다 멈추는 것이지요. 그래서 텅 빈 것. 또는 고요한 것을 觀하는 것. 그래서 이 “觀靜”이니 “空其心” 그 마음을 비운다고 하느니 하는 것은, 대개 “觀法(관법)”입니다. 이것이 전통관법인데요.

 
   이런 관법으로서는 제대로 깨닫기는 어렵다는 것이지요. 마음은 고요해지고 침착해지고, 사람이 점잖해지고 무게 있어지고, 어떤 사물을 볼 때도 제대로 보고, 어떤 일을 당했어도 아주 침착하고, 요즘 흔히 유행하고 있는 비파사나가 깊어지면, “觀靜” “空其心” 이 두 가지의 수행법에 가까워지지요.

 
   그런데 육조스님은 이런 것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느냐? 此心(차심)이 本淨(본정)이라→ 이 마음을 우리가 제대로 알면 본래 텅 비어서 깨끗한 것입니다. 그래서 無可取捨(무가취사)라→ 가히 취할 것이 있거나 버릴 것이 없습니다.

 
   마음을 비운다든지, 내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힌다든지, 지금도 우리 불교에서 “마음을 비운다.”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힌다.” “망상을 제거한다.”는 그런 식의 수행법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주 많아요. 그런 수행법도 있긴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것이 간화선에서나 이 육조스님의 정신에서 본다면 그것은 안 맞는 것이지요. 그런 것은요.

 
   그래서 우리 전통 간화선법에서 이번에 틱 낙한 스님이 오셔서 비파사나에 대해서 대중들에게. 불교를 모르는 대중들에게 상당히 많이 알리고, 또 불교에 대해서 상당히 많이 호감을 갖게 만들었다든지, 이런 것에 대해서는 큰 기여를 했어요. 기여를 했는데 불교의 수행법이 그것이 전부 인양 그렇게 이해하는 데는 참 문제가 많지요.

 
   엊그저께 나온 부산일보에도 기자가 와서, 그것을 묻더라고요. 틱 낙한 스님의 비파사나하고 우리 전통선 하고 어떻게 보느냐? 제가 분명히 거기에서도, 지면이 한정이 돼있어서 길게는 설명을 못했고, 설명한 것도 다 소개도 아니 했더마는...

 
   어쨌거나 그런 수행법은 사람이 침착해지고, 당장에 오늘 한 시간 공부해서 그 다음 시간에 써먹을 수 있는 것은 됩니다. 그 다음 시간에 써먹을 수 있는 그런 수행법은 되지요. 숨을 관찰하는 것이라든지, 내가 행동 하는 것을 관찰하는 것이라든지, 말하는 것을 관찰하는 것이라든지, 자신이 하는 것을 예의주시 하는 그런 관법입니다.

 
   아주 쉽고 간단하고 금방 효과 있고요. 그런데 그 효과가 적지요. 금방 효과 있는 만치 효과가 적습니다. 그래서 우리 전통선 에서 보면 이야기꺼리도 안 돼지요 사실... 전통 선에서는 확철대오에 목표를 두고 하는 선법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별로 이야기꺼리로 삼지를 않지만, 그러나 아주 대중성이 있는 선으로서는 상당히 먹히는 선이라는 것이지요. 비파사나가...

 
   그러니까 그 틱 낙한 스님 같은 이들이 우리나라에 초청을 받아서 오게도 됐고, 책도 많이 읽히고 하는데, 하여튼 왠지 저는 좀 마음에 덜 드는 것이 조작이 많아요. 우리나라는 춥고 덥고 하는데 어떻게 천천히 그렇게 걸어 다닐 수 있나요? 이쪽에는 안 맞다고요.

 
   추운 지방. 더운 지방. 춥고 덥고. 아주 더운데는 돼요. 계속 덥기만 하는 월남이나 태국이나 인도나, 이런데는 그것이 괜찮아요. 그런데 이쪽에는요. 북방 불교에는 그것이 안 맞습니다. 성격상 그것이 안 맞습니다. 그리고 공항에서 나오는데도 천천히 걸어가는데, 그거 저는 마음에 안 들어요. 그래 조작이 너무 많다 싶은 것이 탁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개인적으로 제가 책도 많이 사 주고, 책들 다 읽었지요? 그렇게 해서 내용을 다 알지만 그렇게...

 
   지금 이 시대에 이렇게 와서, 천천히 걸어가고 걸어오고, 어디를 가도 그런 식으로 걷는 그것이 저는 ‘아 이것은 조작이다.’ 싶은 생각이 딱 들더라고요. 하여튼 제가 보기에는 그래요. 참고로 들어두십시오. 여기도 팬들이 많겠지만요. 그래서 우리 총무원이나 교육원에서 그렇게 그 분을 초청하면...

 
   그 분이 훌륭하고, 聖人(성인)이라고 세계적으로 드러내 놓을만한, 자랑할 만한 것은 사실이고요. 저도 그렇게 자랑하는 사람이긴 한데요. 그런데 우리나라 불교 전통이 얼마나 깊고, 또 숨어서 드러나지 않게 도를 이룬 그런 도인들도 얼마든지 많이 있는데, 아무것도 없고 이제사 그 사람이 우리 한국에 비로소 무슨 선법을 전하는 것 같이, 그렇게 비쳐지는 일은 좀 곤란하다. 그렇게 이야기를 해서 정식으로 초청하는 것은 자기들 끼리 하는 걸로 하기는 했습니다마는...

 
   개인적으로 존경하고 좋아하고 하지만요. 선법은요. 여기 육조스님도 이런 것 “觀靜”하는 것 하지 말라고 “愼勿(신물)” 삼가이 하지 말라고 그랬지 않습니까? “觀靜”하는 것. 고요함을 관하는 것. 자기가 하는 행동을 예의주시 하는 것. 또 하나의 나를 뒤에다가 세워놓고 내가 하는 행동을 예의주시 하는 것. 그것 아주 가능한 일이거든요.

 
   내가 지금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자꾸 이 습관을 들이면,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또 하나의 내가 그걸 지켜보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내 행동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저절로 점잖아져요. 저절로 침착해져요. 저절로 발라진다고요. 정직해지고 발라지고 침착하고, 말이 생각 없이 툭툭 나가지 않고, 그것을 계속 내가 뒤에서 감정하고 평가하고, 예의주시 하고 조정하는 그런 훈련을 쌓기 때문에...

 
   그런 훈련을 쌓아 놓으면 사람이 아주 침착하고 그래요. 그런 점은 있습니다. 저절로 점잖아지지요. 걸음도 느릿느릿 해지고요. 빨리 가면 놓쳐 버리니까요. 천천히 가야된다고요. 빨리 가면 그 행을 못하잖아요. 가는데 팔려버리지요. 그러니까 안 팔리기 위해서 천천히 가는 것이지요. 안 빼앗기기 위해서... 걸음 걷는데 내가 거기에 빼앗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천천히 가는 겁니다. 그래 일을 해도 천천히...

 
   호미가 제대로 파질런지 모르겠어요. 땅에 팍팍 삽질을 해야 되는데 팍 하면 안 되잖아요. 천천히 눌러야 되는데, 그게 좀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우리 전통선 에서 보면... 그러면 내가 그걸 능가하는 그런 어떤 선수행이 되어 있느냐 안 되어 있느냐 하는, 그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가 달리 취급해야 되고, 우리가 알고 지켜온 한국의 전통 선은요. 그거하고 이야기할 꺼리가 안 됩니다. 아예 비교가 안 됩니다. 요즘 뭐 그걸 비교해서 이야기를 세미나도 하고 상당히 토론도 벌리고 그러는데, 여기 벌써...

 
   우리 간화선은요. 육조스님 당시 때는 없었습니다. 육조스님 저 후대손이 대승이니... 이 육조스님 선도 지금은 좀 “불합리한 점이 많다.” “병이 많이 붙을 수 있다.” 해서 간화선을 제창 했거든요. 육조스님은 사실은 ?照禪(묵조선)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름을 굳이 붙인다면 묵조선이라고요. 그런데 여기 고요한 것을 觀한다든지, 아니면 내 마음을 비운다든지, 자꾸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드러낸다든지, 요즘 가야산에 수행법. 지금 딴 데로 옮겼지요? 가야산에 있다가 계룡산으로 옮겼는가요? 여기 양산도 있었어요. 양산도 있고, 거 왜 수행 하는 것 신문에도 많이 나고 그러잖습니까? 거기는 “空其心(공기심)” 딱 이 수행법입니다.

 
   점을 하나 딱 찍어놓고, 내가 그 동안 살아오면서 경험 했던 것. 앉아 있으면 떠오른다고 그래요. 그 떠오르는 것을 그 자그마한 점을 큰 하나의 홀로. 블랙홀로 생각을 해서 거기다 집어 던지는 겁니다. 까만 점을 찍고 가만히 앉아서 그런 훈련을 하거든요. 앉아서 계속 집어 던지는 그런 수행을 가르친다고요.

 
   거기서 또 다른 한 방법으로는,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칼로나, 총으로나, 사살하고 칼로 잘라버리는 그런 수행도 가르치고 그래요. 갔다 온 사람들한테, 제가 또 궁금해서 일일이 묻지 않습니까? 두 번 세 번 묻거든요. 거기서 나오는 자료들 다 일일이 보고요. 그 유사 수행법이 아주 많습니다 요즘에... 아바따라든지... 상당히 있어요.

 
   그것이 마음속에 일어나는 망상들을. 어떤 망상이든지 망상들을 전부 검은 구멍에다가 다 집어 던지는... 그래 “空其心”이라. 마음을 비운다는 뜻이거든요. 육조스님이 이런 것 하지 말라고 그래요. “愼勿觀靜(신물관정)” 그리고 “空其心(공기심)” 이런 것 하지 말라. 왜냐? 마음은 본래 청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취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다.

 
   各自努力(각자노력)하야 隨緣好去(수련호거)하라→ 인연 따라서 가거라. 잘 가거라. 돌아가시면서 하시는 이야기이니까요. 時에 徒衆(도중)이 作禮而退(작례이퇴)하니라→ 일단 여기서 법문이 끝나고, 그 다음에 다른 이야기를 연결해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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