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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자타는 어진 여인이다.
몸과 마음의 어우러지는 길목을 잘 알아 이것은 마음이다 이것은 몸이다 라고 바로 알아 호흡과 호흡사이에 이어지는 마음도 아니고 몸도 아닌 경계를 깊이 알아채고 몸의 고통을 마음의 번뇌로 여기지 않고 마음의 번뇌를 몸의 고통으로 삼지도 않는다. 태어 난 모든 것은 길든 짧든 죽음을 의미하며 죽는 모든 것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태어 남을 의미하고,자기에게 있는 뼈와 골수를 갈아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먹고 마시게 하여도 그 사랑은 오래지 않아 변하고 이지러짐이 달의 차고 기우는 것과 같음을 사무쳐 깨우치고, 다만 하늘의 구름 보듯,땅 위의 아지랑이 보듯 그렇고 그렇게 인연을 대한다.

어느 10월 초의 느지막한 초가을 날,바람은 긴긴 시간 소슬하니 나뭇잎을 에워싸다가 풀어 놓은 것처럼 날라와 귀밑머리 털을 간지럽힐 때에 수자타는 긴 머리를 휘날리며 뱃고동과 이어진 항구의 기차역에 닿을 때 까지 자기의 여행이 마치 재촉하는 기차 방송 때문이라는 듯이 마지막 까지 망설이다 기차에 올라 시장에 사는 흰머리를 한 유마라는 장사꾼을 찾았다. 고백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에게 주어진 유동성이라는 여행자의 끼 때문에…

수자타가 유마의 감나무가 있는 집에 들어 섰을 때에 언제나 느껴지던 유마의 인기척이 고감도의 파동을 일으키며 수자타의 피부에 와 닿았다.
(휴우~ !)
수자타는 그제서야 기차 시간 내내 조바심을 품었던 마음이 바로 안도의 한 숨을 내 쉬기 위한 본능에 속한 것을 알고 예의 굽 낮은 빨간 구두에 온 체중을 싣고도 넘어 지지 않는 신기한 발걸음으로 한걸음씩 유마의 마당을 좁혀 들어 갔다.유마는 여느 때 처럼 시장을 바라보며 시장에 있는 듯 산 속에 있는 듯 알 듯 말듯한 모습으로 나무 의자에 앉아 있다.

수자타: 유마님,저..왔어요.

유 마: ^^

수자타: 유마님 많이 파셨어요?(아양 섞인 음성으로)

유 마: 나는 팔아 본 적이 없다.

수자타: ??
오늘 채소들을 팔지 못 했나요?

유 마:난 내 영혼들을 팔지 않는다.그렇듯이 난 채소들도 팔지 않는다. 그저 그것들의 생로병사의 고리에 내가 마지 못해 끼워져 있을 뿐이다.내 가게로 와서 채소들을 사가는 사람들과 채소들과 이 시장과 이 시장에 뭉쳐진 인연들의 생로병사에 내가 놓여 있을 뿐, 파는 것도 사가는 것도 없이 다만 저마다의 생로병사를 주고 받을 뿐이다.
그래 오늘은 어쩐 일이냐? 다 큰 처녀가 가을 바람이라도 타는 게냐?

수자타: 헤~,,, 유마님, 다 아심 시렁…
사실은 제가 일을 컴퓨터로 많이 하다 보니 그런 건지 몰라도 평소에 조금만 신경을 쓰면 어깨 죽지로부터 턱까지 신경통이 와서 어제 밤은 잠을 설칠 정도였답니다.
하도 아프길래 손가락으로 잘 닿지도 않는 어깨 죽지를 따라 쿡쿡 눌러 가며 어깨를 돌려가며 별 소동을 다 해 봤지만 힘만 들어 할 수 없이 비파사나 명상을 하였는데 신기하게도 마음이 편안 해지더니 그 다음부터는 잠이 와 버렸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어제 밤 생각을 해 보니 아무래도 신기하여 여쭈어 보려 왔습니다.
(에구.. 헉헉 헉.. 눈치 채실 라… 핑계)

유 마: 어떻게 명상을 했길래 그런 신통을 다 부렸느냐?

수자타: 예, 저는 아픈 곳을 따라 손을 돌리기를 포기하고 그 대신 들어 누운 채로 손을 아래 배에 다 둥그렇게 대고 엄지를 마주 이은 다음 마치 좌선 할 때 와 같이 다리를 어긋나게 꼬고서는 호흡에 의지하여 몸과 마음을 살폈습니다.

“이 아픔은 분명 어딘가에 있기에 아픈 것이다.그렇다면 그 어디는 어디에 존재 하는가를 찾아 낼 수만 있다면 나는 호흡의 기운을 거기에 보내어 아픔을 치유하여야 겠다” 고 생각하여 아픔을 찾아 다녔습니다.

먼저 아픔이 몸에 있을 거란 생각으로 몸을 뒤져 봤습니다.아픔의 시발점이라 여겨지는 어깨와 어깨의 근간이 되는 근육과 근육의 땅인 뼈와 뼈의 어미인 골수를 다 뒤져 봤습니다. 그러는 가운데도 아픔은 쑥쑥 간헐적으로 계속 이어졌습니다.자세히 관찰해 보니 아픔은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사이사이 골짜기 같은 안 아픔이 듬성듬성 골을 메우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다시 이 아픔과 안 아픔 중에서 어느 것이 진실한 것이고 어느 것이 진실치 못한 것인가를 사유 했습니다. 그런 순간 저는 아픔이 전개 될 때에는 몸서리치게 피하려고 하는 ,싫어 하는 마음을 보았고,이 싫어 하는 마음 때문에 안 아픔이 아직 오지 않았는데도 안 아픔을 찾아 대는 나를 보았습니다.

이 짧은 아픔과 안 아픔의 한 사이클 동안에 저는 구하나 얻어 지지 않는 괴로움이 바로 구함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을 알자 마자 저는 구함을 의지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아픔이 전개 될 때에도 아픔을 피하려고 아니하고 안 아픔을 기다리지 않는 태도를 견지 하려 했으며,안 아픔이 올 때에도 이 안 아픔이 진실한 것이라는 판단을 버리고 방관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저는 아픔이 몸에 있는 것도 아니요, 마음에 있는 것도 아님을 깨닫고는 아픔에 매달려 있는 나 자신만이 헛 수고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순간, 저는 느꼈습니다.비록 쑥쑥 쑤셔대는 아픔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지만,마음이 더 이상 소란스러워 지지 않더군요. 마음이 아주 편안했습니다.아픔이 제 삼자의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리고는 잠이 들어 버렸습니다. 유마님, 저의 간 밤의 것이 어떤 것입니까?

유 마: 너의 간 밤의 일을 왜 내게 묻느냐?
수자타: 제가 또 그런 아픔이 올 때에 계속 그러한 방법을 씀이 옳은 것입니까?
유 마: 그것은 옳은 것도 아니요, 그른 것도 아니다. 마치 간 밤이 옳은 것도 아니요 그른 것도 아닌 것처럼.

수자타: 말씀을 듣겠습니다.

유 마: 수자타야, 아픔은 옳은 것도 아니요, 그른 것도 아니다.
만일 아픔을 그른 것이라고 한다면 안 아픔을 정의(正義)로 보아 안 아픔을 구하게 되고, 구하게 되는 데서 다툼이 일고 이 다툼은 그런즉 正義의 다툼이 된다.그는 다툼이 정의를 위한 것인 줄 알고 드디어는 목숨도 걸게 된다. 이른 바 지하드 라 일컫는 것이다.

수자타: 유마님 그러면 아픔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존재 하는 것이기에 사람 마다 나라 마다 아픔을 느끼는 것이 아닙니까?

유 마: 아픔은 그냥 단순한 사건일 뿐이다.
사건은 시간과 공간의 좌표상에서 벌어지는 인과의 도리에 의한 것일 뿐이다.사건은 옳은 것도 아니요 그른 것도 아니다.

어깨가 아프다는 것은 어깨가 아프게 된 원인 된 시간이 공간의 좌표와 마주칠 때에 일어 나는 현상일 뿐이다. 이 사건이 몸과 마음의 범주에서 벌어 지면 사람들은 비로소 몸이 아프다든가 마음이 괴롭다든가 하고 고통을 호소 하게 된다.그러면서 정작 이것은 피 할 수 없는 사건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므로 쓸데 없는 헛 수고로 안 밖을 소란스럽게 하지만 도리어 불안과 공포만 조정 될 뿐이다. 마치 바다 한 가운데 떠 있는 조그만 배 안에서 여러 사람이 표류 할 때에 그 중 한 사람이 “우리는 이제 다 죽게 되었다” 고 소란을 떨면 곧 그 소란스러움은 다음 사람에게 전파되어 배 안은 불안과 공포에 이리 저리 술렁이다가 드디어는 자연사 하기 전에 전복 되어 죽는 것과 같다.

수자타야, 이 배 안은 본래 옳고 그른 것이 아니며,정의롭거나 불의 한 것이 아니건마는 소란스러움으로 인하여 배는 전복 되고 마는 것이다.이 소란스러움은 바로 안팎의 인연에 의한 것이다. 인연은 그러므로 모든 사건의 유무단상일이래출(有無斷常一異來出)그것 이니라.

바로 이러한 때를 당하여 佛子는 위로 신에게도 구하지 아니하고 아래로 땅의 권세에게도 구하지 아니하고 옆으로 부모 형제 친척 친구 연인 돈이나 권세에서 구하지도 아니하여 곧 바로 스스로 마음자리를 펴서 허리를 곧게 하듯 마음을 곧게 하고 다리를 무릎 위에 놓듯 모든 소란스러움(번뇌)을 몸과 마음 위에 올려 놓고 두 손을 포개어 마주 잇듯 안과 밖을 연결하여 호흡이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듯 아픔과 안 아픔이 착한 것도 아니고 악 한 것도 아닌 것을 알고 제행이 무상하고 제법이 무아인 이것은 깨달을 만하고 누릴 만 하다고 알아 차라리 數를 헤아리리라 하고 모질게 정진한다면 수자타야 누가 너를 여인의 몸이라 함부로 얕잡아 보며 어느 천신이 너를 악마의 경계에 인도 하리오!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비록 몸이 병들어 아픔에 있으나 실은 그렇게 보이는 것 뿐이요,비록 집은 가난 하여 그 이웃이 와서 도리어 그의 내일 양식을 걱정하나 스스로 늘 안심하고 있으며,마침내 죽음에 들어가나 주위 사람들로 하여금 열반을 보게 하느니라.

수자타: 유마님, 그렇지만 보는 사람들은 다 그 사람은 복이 없어 명을 다 하지 못하여 요절 했다 하고, 그 사람은 복이 없어 병들어 앓다가 죽었다 하고, 그 사람은 복이 없어 처자가 도망 갔다 하고, 그 사람은 좌선만 하느라 복이 없어 굶주리다 죽었다 하고, 그 사람은 복이 없어 하늘의 진노를 받아 이런 갖가지 재앙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어떻게 그의 행주좌와(行住座臥) 생로병사가 열반으로 보여 질 수 있겠습니까?

유 마: 수자타야, 참다운 보살은 요절 하지 않느니라.수자타야 이것은 마치 배 다운 배는 마침내 바다를 가로 질러 가는데 중간에 가지가지 폭풍을 만나나 부서지는 법 없이 저 쪽 항구에 이르는 것과 같으니라. 그럼에도 불구 하고 요절 한다면 그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무엇이 두 가지냐?
첫째는 스스로 받기 위함 이요,
둘째는 중생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니라.

스스로 받는다 함은 마치 저 눈 먼 거북이가 바다 한가운데서 나무토막을 만난 것과 같이 부처님의 이 거룩한 법을 만나 모처럼 생사를 초출하는 법을 얻어 일체가 다 한 마음의 소작임과 삼계가 공하여 인연으로 이루어짐을 알았거든, 일찍이 지은 모든 악업들을 유예 하지 않고 금생에 다 받아, 몸이 병들고 집이 가난하고 처자와 헤어지고 중간에 요절 하게 됨을 입의 주술이나 방언이나 간구함이나 기도나, 몸의 보약이나 보혈이나 생체개량의 과학이나, 심지어는 뜻의 사유나 선정(삼매)의 힘에 의하여서도 피하려 하지 아니 하는 까닭에 이것을 일러 스스로 받고 물리지 않는 까닭이라 하느니라.

중생들에게 보인다 함은 믿음 있는 자의 가는 길이 구차하게 병고를 면함에 있지 아니 하고, 믿음 있는 자의 마음이 빈부의 차고 기움에 따라 요동하지 아니 하고,믿음 있는 자의 고독이 처자와 함께 하거나 아니 하거나에 따라 채워 지거나 비워지는 것이 아니고,믿음 있는 자의 안심이 일정치 않은 죽음의 사슬에서 미리 벗어나 있는 것을 보이는 뜻이 없지 않으므로 이것을 일러 중생들에게 보이기 위함이라 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너는 함부로 드러난 너의 소견으로 보살의 행주좌와 생로병사를 말하지 말라. 함부로 들어 난 너의 소견으로 아라한의 행주좌와 생로병사를 말하지 말라. 함부로 들어 난 너의 소견으로 아나함의 행주좌와 생로병사를 말하지 말라. 함부로 들어 난 너의 소견으로 사다함의 행주좌와 생로병사를 말하지 말라. 함부로 들어 난 너의 소견으로 수다원의 행주좌와 생로병사를 말하지 말라.
크게 망어를 짓는 다거나 크게 사견을 낸 다거나 하게 되어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크게 뒤로 물러나게 되리라.

수자타: 유마님, 저야 그렇게 한다 치고 그러면 처자와 권속들이 배가 고플 때에 불자는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일가 친척이 몸에 병이 들었을 때 불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부모형제에게 죽음의 공포가 다가 왔을 때 불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런 것에 대하여 만일 속수무책이라면 불교란 쓸모 없는 가르침일 뿐일 것입니다.

유 마: 수자타야, 너무 그리 극단적인 생각에 몰두 하지 말라. 처자가 배 고프다고 남의 처자를 잡아다가 먹일 수는 없지 않느냐? 일가 친척이 병들었다고 당장에 의원을 만들 수는 없지 않느냐? 부모형제가 죽음이 가까웠다고 대신 죽을 수는 없지 않느냐? 속수무책인 것은 너의 그 각각의 일을 당했을 때의 답답한 마음이지 그 일들이 아니다.

마음을 너그럽게 가져보아라. 지옥의 화급함은 나의 처자가 배 고플 때의 일 보다 중하니라. 왜냐하면 지옥 중생들에게는 처자가 없다.그들은 앞 마음이 부모가 되고 뒷 마음이 子가 되어서 하루에 만번 죽고 만번 태어나는 일을 한다.이는 바로 지옥에는 교배 하는 즐거움조차도 없기 때문이다.처자가 없기 때문에 부모가 없다.부모가 없기 때문에 형제도 없다.형제가 없게 때문에 일가친척이 없다. 그렇다면 그들 지옥 중생들에게는 과연 처자와 부모형제와 일가친척을 비롯하여 일어나는 근심이 없으므로 지옥 중생들의 고초가 이 사바세계만 못 하겠다고 하겠느냐? 아니다. 지옥 중생들의 가지가지 고초는 견주어 말 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지옥이 이 사바세계 보다 낫다 하였으리라.

죽을 수 있다는 것이 차라리 위안인 그런 세계에서는 너는 어찌 하려느냐? 이것이 바로 너의 마음이라고 누누이 하는 까닭이다.일체가 다 나의 마음이다.소수의 피할 수 있는 것만 빼 놓고는 피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세상인데 뜻대로 안 되는 이 세상의 일을 각각의 일을 만날 때 마다 다 뜻대로 이루려 한다면 너는 그것들이 다 이루기도 전에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너의 죽음을 만나게 될 것이다.

불자라면, 마땅히 먼저 스스로를 구 하고 남을 구하려고 하거나, 먼저 남을 구하고 스스로를 구하려고 하는 데에 있어서 순차를 두어서는 아니 된다. 어진 마음으로 스스로를 돌보아라.반드시 남을 구하게 될 것이다.이것을 의심 하지 말라.네 한 마음 스스로 둥글게 어질다면 이미 온 세상을 구한 것이나 다름 없다. 수자타야,바로 그러하다. 네 한 마음 만일 공적 한 곳에 이르러 모양 없이 거닐고 흔적 없이 오간다면 어찌 따로 이 세상 일을 걱정하리오!

바로 알아라, 이 세상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먹지 못하여 배가 고파 죽는 것이지 달리 죽는 게 아니다.이것은 고치지 못하는 중생의 근본 불치병이다. 이는 큰 지위에 든 보살이라 할지라도 내가 먹어서 남의 배를 부르게 할 수 없느니라.

또 이 세상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병 들어 죽는 것이지 달리 죽는 게 아니다.이것은 감기를 고치고 암을 고친다 하지만 다시 감기가 들리고 암에 걸려 죽는 것과 같다.이것 또한 중생의 근본 불치병이니 설사 인류가 발달 하여 모든 병을 고친다 하여도 병에 드는 병은 고치지 못한다. 왜냐하면 큰 보살이라 할지라도 내가 병이 들어서 중생들을 병고에서 벗어나게 하지 못하는 까닭이니라.그러므로 불치의 병이라 한 것이다.

또한 이 세상 사람들은 다 나간 숨이 들어 오지 않으므로 죽는 것이지 달리 죽는 것이 아니다.숨쉬는 것은 가장 손 쉬운 만인에게 유일하게 평등한 일이지마는 이 가장 손쉽고 가장 평등한 일 조차도 힘겨울 때가 있으니 바로 그것은 나간 숨을 들이지 못하는 것이다.이 나간 숨이 들어 오지 못하는 것은 폐가 기계적인 일을 함에 있어서 독자적이고 독립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유기체적으로 여러 신체가 할당하여 도와 줌으로 인하여 신체의 최후 동작을 폐가 담당하여 하는 것인데 나간 숨이 들어 오지 못하는 것은 이 마지막 최후의 보루인 폐의 활동이 멈춤으로 인한 것이다.

사람이 태어 날 때에는 먼저 숨을 들여 마시고 죽을 때에는 마지막으로 내 쉬는 것이다. 그 일생을 돌아 보면 이렇게 최초의 들여 마심과 최후의 내 뱉음으로 이루어 진 것을 가지고 일생일대의 생사를 다투느니라. 즉, 너의 한 인생이 바로 딱 한 호흡에 의지하였던 바, 바로 태어나면서 처음 들이쉬는 숨과 내 죽을 때의 내뱉은 숨이니라.이 죽음은 또한 불치병이니 네 마음이 태어나고 태어난 그 마음이 죽는 것에 비하면 그리 놀랄 만한 것이 아니다. 큰 보살이라 할지라도 내가 숨을 쉬어서 남의 숨을 대신 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너와 나의 이 중생의 몸을 가지고 내 권속들의 일을 대신 함이겠으리오!

비록 금생에 나의 몸과 마음에 인연하여 권속들로 모였다 하지만 지난 생에 있어서 그렇게 만난 권속들을 다 따지면 이 세상 모든 산을 부수어 티끌로 만들어 헤아림이 오히려 수월할 것이다. 오늘의(금생의) 권속들은 어쩌다 그렇게 내가 대신 먹고 대신 숨쉬고 대신 죽어 구한다 하지마는 어제의(과거생의) 권속들은 어떻게 할 것이뇨? 가히 끝없는 사업이려니 도모할 수가 없는 일이니라. 너무 그렇게 그런 것들로 인하여 네 마음을 옥죄이지 말라.

구하라 얻을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열릴 것이다 고하는 말이 외도의 경전에도 있듯이 진리를 구하면 진리를 얻을 것이요 보리를 구하면 보리를 얻을 곳이요 쌀을 구하면 쌀을 얻을 것이고, 진리를 찾으면 진리를 찾을 것이요 보리를 찾으면 보리를 찾을 것이요 쌀을 찾으면 쌀을 찾을 것이고,진리의 문을 두드리면 진리의 문이 열릴 것이요 보리의 문을 두드리면 보리의 문이 열릴 것이요 곡간의 문을 두드리면 곡간의 문이 열릴 것이니 구하지도 찾지도 두드리지도 않는 이에게는 아에 그림의 떡일 뿐이니라.

살다 보면 어떤 때에 마치 누가 내 손과 발을 꽁꽁 묶어 놓기라도 한 것처럼 도무지 힘을 쓰지 못하는 환난을 만나기도 하려니와 이때에 마땅히 삼계(욕계 색계 무색계)가 다 꿈과 같아 인연의 화합물이요 일체가 다 내 마음의 소작임을 꿰뚫어 보는 지혜에 의지하여 색은 공과 다르지 아니하며 공은 색과 다르지 아니하고,그런즉 색은 곧 공이요 공은 즉 색이며 이와 같이 일체의 것에서 얻어 질 것은 마침내가 다 공하여 인연에 불과 하지만 그 인연조차도 공 하다는 깊은 지혜의 모태에서 사유를 행함이 불자의 올곧은 처세이니라.

수자타야,너의 권속과 일가 친척이 이 공한 성품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 있다면 네가 뜻대로 일을 도모하여도 좋다만 그렇지 아니 하다면 착한 마음에 안주하여 마음을 너그럽게 쓰느니만 못하니라. 한번 크게 웃어 제치고 호흡을 가다듬고 지난 일을 참회하고 착한 마음을 일으켜서 하나씩 풀어 나가려고 한다면 모든 화가 눈앞에서 복으로 변화하는 것을 볼 수 있으리라.

수자타: 유마님,사람들의 인지가 차츰 발달 하면서 과학자들이 작은 세계와 큰 세계를 연구하는 업적에 따라 종교가 찍 소리도 못하고 따라 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중세 때까지만 해도 종교가 과학을 눌러 왔지만 오늘날에는 과학의 결론에 종교가 따라가지 않으면 종교자체가 (성립 될 수 없을 정도까지는 아직 아니지만) 존속하기가 어려워 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 이렇게 나가다가는 언젠가는 종교는 100% 과학으로 대체되고 말 날이 올 것이라는 것도 미리 예견하여 두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차라리 종교라는 추상적인 정신활동 대신 아예 과학이라는 실증적인 것에 눈을 돌리는 것이 현명한 것이 아닐런지요?

유 마: ^^
네가 별 생각을 다 하는 구나. 네 말과 같이 인류가 이 지구라는 천체에서 시작 한 이래 인지의 발달 과정에 따라 처음에는 단순한 생존 그 자체였다가 차츰 생존에 유리한 섭리를 마주하여 신성을 부여 한 것이 바로 종교인데 아직 인류가 번창 하지 않았던 시대에는 부족이 곧 종교적인 집단이었다.종교가 부족 그 자체의 성질로서 모든 것을 주관하였다는 것은 다 알고 있는 史實이다.

그러나 네 말과 같이 차츰 사람들이 인지 정도가 발달 하여 그에 맞게 논리가 갖추어 지고 계산법이 발견되다 보니 어떤 원칙들이 세워졌는데 그것은 원인과 결과 사이에 항상 인과관계가 존재 한다면 그것은 과학이지 종교가 아니라는 결론에 당도한 것이다. 그 인과관계는 처음에 신이 관여하는 줄 알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어떤 원인만 주어 진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 데에는 아무나 할 수 있다는 데서 신성이 무너지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라는 것이 그렇다.신이라고 하는 존재는 인간의 경외심이 만들어낸 것 그 자체이다. 인간이 살면서 많은 자연현상과 닭과 계란 사이에 오가는 핑퐁식 사변에 빠지다 보니 거기에는 보이지는 않지만 거대한 어떤 주관자가 있을 것이라는 이차원적인 사고방식이 자연히 나오게 되는데 마치 태양을 쳐다보면 눈이 부시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태양이 아무런 힘도 가하지 않고 멀쩡한 사람의 눈을 멀게 하였으니 거기에는 신의 섭리가 있다고 하는 원초적인 경외심이 오늘날 인류의 신성 전부이다. 그러므로 옛날 고대인은 태양을 함부로 쳐다보면 눈이 아프다는 것 말고 따로 신성모독죄로 부족의 심판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오늘날 누가 이런 신성(?)에 희롱 당할 사람이 있겠느냐?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정신 병자로 취급 받을 것이다.

이것을 오늘날에 그대로 대입해 보면 과연 우리가 얼마만큼 인지가 개화 되었느냐에 따라 신성의 범위가 정해지는데,이것은 거꾸로 말하면 아직 우리의 인지정도가 덜 개화 된 상태에서 입에 거품을 물고 외쳐대는 저 소리들,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 했다느니, 이 세상은 하나님이 역사 하심에 따라 선지자들의 예언한 대로 굴러 가고 있다느니,예수가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었다느니,예수만 믿으면 천당 간다느니,하나님의 이름이 야훼라느니, 아니다,하나님의 이름은 알라라느니, 올라가면 그 이름이 비슈누라느니, 제우스라느니, 하며 온갖 망상을 굴리지만, 이러한 신성에에 대한 定義는 그것이 무엇이던지 간에 우리의 인지능력이 아직 도래 하지 않은 머나먼 미래의 것에 비하면 한참 뒤떨어진 것임을 본다면 얼마나 더 치졸한 것이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구나.

수자타야, 일만년 후가 도래 하겠느냐?

수자타: 말씀이라고 하십니까? 그것이 도래 하는 것은 제가 얼마든지 예언 할 수가 있습니다.일만 년 후는 바로 딱 일만 년 후에 도래 합니다.더 번거롭게 제게 묻지 마십시오.만일 십만 년 후가 도래 하는지를,백만 년 후가 도래 하는지를 제게 물으신다 하여도 저는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예언 할 수가 있습니다.그것은 도래 합니다.그야말로 시간 문제입니다.

유 마: ^^ 미안하구나. 네게 그만한 예언능력을 갖추었으리라고는 미처 몰랐다. 네가 말한 바와 같이 일만 년 후가 정확히 일 만년 후에 도래 한다면 그 때의 인류가 기록한 역사교과서에는 오늘 날의 신성들이 어떻게 기록 되겠느냐? 혹시 일 만년 후의 미래가 아직 인지능력의 개화에 모자라다면 십 만년, 십 만년이 모자라다면 백만 년으로 한다면 이 끝없는 인지의 도전 앞에서는 원래의 (현재의)신성은 그야말로 역사교과서의 한 페이지도 장식 하기 힘들 것이니라. 현재의 우리가 고대인의 그것에 비하면 보다 합리적이듯이 일 만년 후의 인류는 현재의 우리 보다 훨씬 진보된 합리를 가지고 있으리라는 것은 얼마든지 예견할 수 있다.

오늘 날의 과학 속도를 가지고 측정 한다면 100년 안에 인류는 태양계 내를 자유롭게 왕래 할 것이다. 1000년 이내에 인류는 태양계 전체에 골고루 퍼져 살 것이고,십만년 이내에 은하계를. 100만년 이내에는 다른 은하계까지 인류가 진출 할 것이라는 데, 이 ┍오직 예수! ┚ 라는 구호가 그때 가서 얼마나 원시적인 발상에 지나지 않겠느냐?

처음에 종교가 과학을 점령했듯이 분명 과학이 종교를 점령할 날이 올 것이다. 그 때에는 오늘날의 유일종교들은 박물관에나 가서야 볼 수 있을 것이나 오직 불교만은 처음과 중간과 나중이 한결 같이 사람들로 하여금 고통에서 벗어 나게 하는 지렛대 역할을 해 주리라 믿는다.

수자타: 왜 불교만은 예외입니까? 불교도 하나의 종교가 아닌가요?

유 마: 수자타야,불교는 그런 세속 종교와 다르니라.

수자타: 어찌하여 불교는 세속 종교와 다르다 합니까?

유 마: 수자타야, 세속 종교란 무엇이냐? 세속 종교란 ‘세상이 있다’ 하는 종교요 ,세상이 있다 하는 종교는’ 태초가 있다’ 하는 종교요, 태초가 있다 하는 종교는 ‘하나님이 태초에 세상을 창조하였다’고 하는 종교요, 하나님이 태초에 세상을 만들었다 하는 종교는 ‘세상의 변함에 따라 변질하는 종교’요,세상의 변함에 따라 변질 하는 종교는 일만 년 후나 혹 십만년 후에는 없어질 종교이니라.

그러면 왜 불교는 예외이냐?

불교는 ‘세상이 진실로는 있다 ‘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며, 세상이 진실로는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므로 ‘태초가 있다’고 가르치지도 않으며,태초가 있다고 가르치지 않으므로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였다’고 가르치지 않고,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였다고 가르치지 않으므로 ‘변질하는 것에 의지하라’고 가르치지 않고,변질 하는 것에 의지 하라고 가르치지 않으므로 일 만년 후에도 십 만년 후에도 백 만년 후에도 여여하느니라.

왜 그런가? 불교는 다만 본질로는 공함을 가르치고, 행법으로는 중도를 가르치고, 현상으로는 인연을 가르치며, 유위로는 악한 법은 그치고 착한 법은 키우도록 가르치며 무위로는 열반을 가르치는 까닭이니 이 모든 가르침의 목적은 오직 하나, 네가 괴로움에서 벗어 나기를 바라는 것이니라.

수자타야, 만들어 진 것은 변하여 부수어지나니 도자기가 언젠가는 부서지게 되는 성품을 갖추고 있는 것과 같으니라. 그러나 도자기 안의 허공은 도자기 속에 갇혔어도 오히려 부서지지 않나니 이러한 이치를 사무치게 깨달은 이는 聖人이라 하느니라.성인의 가르침에는 희론에 섞이지 아니 하고 희론에 섞이지 아니 하므로 ‘확실하여 그렇다’ 라고 하는 힘이 갖추어져 있느니라.

사무치게 깨달았다 함은 이치를 알았다 하는 것과 다르나니,이치를 아는 것은 지식에 불과 하나 깨달음은 몸체와 모습과 쓰임을 골고루 다 갖춘 존재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니라. 즉 원자탄 하면 원자탄을 만드는 이치와 터뜨리는 일과 부수어진 결과를 함께 말하듯이 깨달음 하면 이치가 곧 마음이고 마음이 곧 이치이며 마음 씀이 곧 마음이고 마음이 마음 씀이고 나타난 세계가 마음이고 마음이 곧 세계이니라.
그야 말로 깨달음이 곧 힘 이요 힘은 에너지이니 우주의 끝과 끝을 이으라면 가만히 미소 짓는 사소한 힘만으로도 어렵지 않게 잇느니라. 만일 이 일을 우리에게 하라고 한다면 태양을 수 백 개 또는 블랙홀을 수 천 개 사용 하는 막대한 에너지로도 다 하지 못하는 일이니라.

모든 것은 닯은 꼴을 가지고 있다.육체의 유기적인 운동은 마음의 생로병사를 닯아 있고,마음의 생로병사는 우주의 섭리를 닯아 있고, 우주는 다시 그 무엇인가를 닯아 있다.그 무엇이란 바로 이 마음이다.

수자타야,이 우주 삼라만상을 아무리 뒤져 보고 털어 보고 쪼개 보고 합쳐 보아도 한 덩어리의 진흙에 불과 하다.이 진흙을 아무리 뒤져 보고 털어 보고 쪼개 보고 합쳐 보아도 그것은 우주를 벗어 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안의 섭리라든지 그 밖의 형상이라든지 그것은 다 주관과 객관의 손뼉 치는 소리에 불과 하다는 말이다.

왜 우주는 팽창하는가? 그것은 우주가 팽창한다고 보아야 하는 존재의 일이다.그 존재가 인간이라는 것 밖에 달리 무슨 특별한 것이 있느냐?
왜 우리는 섭씨 100도를 끊는 점이라고 하는가? 왜 빚의 속도를 초당 30만 킬로미터라고 하는가?
왜 우리는 법칙들을 법칙이라 보는가? 물리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만든 원칙에 불과하다.인간은 자기가 만든 원칙(방정식)에 자기가 구속당하면서 우주를 연구하려고 한다.그러니까 당연히 우주는 물리를 닯게 되고 물리는 원칙을 닯게 되고 원칙은 나를 닯게 되고 나는 비로소 만족하게 된다.

수자타야,설령 네가 아무리 날고 기는 천재로서 천지개벽의 이론을 펼친다 해도 일생이 다 하고 나면 너의 우주는 끝이 난다. 실재의 이 우주가 그 수명이 백 천 만 억년이라 한들 너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너의 우주의 나이는 너의 일생의 나이이지 이 실재 하는 우주의 그것이 아니니라. 물론 너는 다시 다른 이름으로 다른 모습으로 다른 집에 태어 나리라. 그러나, 그것은 다른 우주이지 지금의 이 우주는 아니다.적어도 너에게만은 그렇다.

다시 태어 나서 하는 짓이란 전에 네가 한 짓들의 반복들에 불과 하다.너는 먹고 마시고 자고 섹스하고 배우고 取하고 그러다 다시 죽는다.이렇게 우주는 끝이 없다.공간적으로도 그러하고 시간적으로도 그러하다.왜냐하면 너의 이러한 반복적인 활동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다행히 인간으로만 계속 태어난 준다면 굳이 내가 지금에 이 일은 하여야 하고 저 일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할 필요가 없겠지만, 내가 이 일은 하여야 하고 저 일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하는 까닭은 다음에 내가 꼭 복덕 있는 인간으로만 태어나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있어서 나의 처자와 내 부모형제와 일가친척과 그들과의 유대감이 얼마나 사소한 것인가! 너무 크게 마음을 쓰지 않음이 좋으리라.

처자들도 다 저 나름대로 자기의 업을 가지고 태어 났으니 자기가 받아 먹을 만큼의 과보를 다 가지고 있느니라. “나의 것”이라 하는 너의 그 소견에 네가 떨어져 있는 것이지 그들은 “나의 것”이 아니다.그들 각자의 것이다.다만,서로 일정한 거리에서 돌아 주고 있는 상관관계에 놓여져 있을 뿐이다.마치 태양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서로 돌고 있는 행성들처럼. 네 말 처럼 과연 내 어린 아들이 배고파 우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것은 일생에 있어서 가장 괴로운 일일 것이다. 나가서 쌀을 구해 오는 것이 내 할 수 있는 일 전부인데 달리 더 무엇을 논하겠는가?

분명한 것은 그 어린 아들이나 나나 둘 다 죽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배고파 죽던가 병들어 죽던가 숨을 못 쉬어 죽던가 죽어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배불러도 아프지 않아도 영화구경을 가도 침대에 누워도 커피를 마시고 좋은 꿈을 꿨어도 속절없이 죽어 가고 있는 시체들이다. 너무 그렇게 몸 위주로 세상일을 도모 하지 말라.반드시 일을 당하여는 손과 발만 허우적 대다가 캄캄한 지경에서 일을 마치리라.

수행자들이 하루 한끼로 만족하고 세벌의 의복으로 사계절을 지내고 밥과 국과 반찬 한가지와 물 한 사발로 족하게 여기고 아플 때에 인연 있는 사람이 베풀어 주는 의약품으로 견디고 일생을 통하여 몸이나 마음에 아무 소득함이 없이 지내려고 하는 것은 멍청하거나 무식하거나 먹고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무능하거나 머리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몸을 살피기를 마치 상처와 같이 보라는 지혜자의 가르침에 의한 것이며 궁극의 남음이 없고 흔적이 없는 길을 가기 위한 것이다. 상처에 약을 바르고 솜을 대는 것이 상처가 소중해서 그러겠는가? 상처에 약을 바르고 솜을 대는 것은 방편으로 하는 것이니 상처를 그냥 놔두거나 아끼면 어리석은 짓이니라.

이른바 말씀 하시되, ‘비구여, 적은 것으로 크게 만족하라’ 하셨으니 어찌 너로 고통스럽게 하기 위하여 그런 말씀을 하셨겠는가? 오히려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로 하신 말씀인 것을…또한 이것이 어찌 승과 속을 가려 차별하여 그 과보가 나타나겠는가? 승이든 속이든 행한 대로 과보가 나타나는 것을….


그대여,
차고 기우는 것은 달이 아니라 너의 見이니
달은 본래 스스로 차거나 기울지 않건만,
다만 보는 너의 見이 차고 기움에 따라 달은 차고 기우는 것을,
바득바득 우기며 하는 말,저 달은 초승달이요 이 달은
보름달이라 하는구나.
옳구나 그대여,
너의 見이 바로 너의 뜻이요,너의 말이요,너의 몸이니,
누구를 탓하여 벗을 세우리오!
이 몸에는 부정한 것이 있다.
비록 그 몸이 정신을 싸 안고 있다 하더라도.
비린 생선을 싼 가죽에서는 비린 내가 나며
향기 나는 나무를 싼 가죽에서는 향내가 난다.
보라, 이것이 바로 이 몸과 정신의 일이다.
정신도 아니요 몸도 아니니 그대들은
부질 없이 몸과 정신의 편을 들지 말라.

수자타야,단풍나무 숲을 걸어 보아라.이 세상을 싫증 낼 만도 하련마는 여전히 단풍나무는 아름답구나.너와 내가 이 세상에 거닐은 지 이미 바닷물을 한 방울로 나누어 헤아릴 수 있을 만큼 보다 더 무수한 세월을 이 사바세계에서 노닐고 있건마는 단절된 기억의 파편들을 모은다는 어려움 때문에, 아니 저 과학자들이 말하는 열역학 제2의 법칙 -엔드로피는 시간에 따라 증가 한다는 법칙- 때문에 무수한 시간이 지나온 만큼 우리가 도리어 질서 정연해져 있다기 보다 무질서 해져 있어서 평화 보다는 전쟁에,기억 보다는 이 망각에 더 노출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이것은 과연 문명인가 아니면 문명이라 생각 하는 정신인가? 나는 알 수가 없구나


(이쯤 하여 유마는 또 그 목쉼과 잔기침으로 인하여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수자타는 유마의 집안으로 들어가 물을 따뜻하게 뎁힌 후 감 잎을 띄워 유마에게 가져와 들게 하고는 유마가 안으로 들어간 마당 툇마루에 혼자 앉아 이미 낙엽이 지는 감나무 그늘을 보며 유마의 뒷 그림자를 따라 눈길을 돌렸다. 아, 거기에는 남산 만한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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