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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마음

이때 청정혜(清淨慧)보살이 대중들 가운데 있다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 발에 이마를 대어 예를 올리고, 오른쪽으로 세 바퀴 돌고는 단정히 무릎을 꿇고 합장하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대비하신 세존이시여, 저희들을 위하여 이와 같은 부사의(不思議)한 일을 널리 말씀해 주시니, 이전엔 보지 못했던 일이며, 애초에 듣지 못했던 일이옵니다. 저희들은 지금 부처님의 훌륭하신 가르침을 받고 몸과 마음이 태연(泰然)하여 큰 이익을 얻었사옵니다. 바라옵건대 법을 들으러 온 일체 중생들을 위하여 법왕의 원만하신 깨달음의 성품을 거듭 설명해 주시옵소서. 일체 중생들과 모든 보살들과 여래․세존께서 증득하신 것에 어떤 차별이 있습니까? 말법 세계의 중생들로 하여금 이 거룩한 가르침을 듣고 수순하고 깨달아 점차 들어가게 하여 주소서.”
이렇게 말하고 오체투지하며, 이와 같이 세 번 청하여 거듭거듭 되풀이하였다.


그때 세존께서 청정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한 말이로다, 선남자야. 그대들은 지금 여러 보살들과 말법 세계 중생들을 위하여 여래께 점차(漸次)와 차별을 묻는구나. 그대들은 지금 자세히 들으라. 이제 그대들을 위하여 말해 주리라.”
그때 청정혜보살이 분부를 받들고는 기뻐하면서 대중들과 함께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기다렸다.
“선남자야, 원각(圓覺)의 자성(自性)은 본래 성품이 있는 것이 아니건만, 모든 성품을 따라 일어날 뿐이니, 취(取)할 것도 없고 증(證)할 것도 없어서, 실상 가운데에는 실제로 보살도 일체 중생도 없느니라. 왜냐하면 보살과 중생은 모두가 허깨비인데, 허깨비는 사라지고 마는 것이므로 취할 이도 증할 이도 없느니라. 비유하건대 마치 눈이 스스로 눈을 못 보는 것과 같아서, 제 성품은 그대로 평등하지만, 평등하게 만드는 이가 있는 것이 아니니라.
중생들이 미혹하고 뒤바뀌어서 일체 허깨비를 없애버리지 못하므로, 멸한 것과 멸하지 못한 것에 대해 허망하게도 애써 공부를 하는 까닭에 문득 차별을 나타내었거니와, 만일 여래의 적멸에 수순할 수 있다면, 실은 적멸도 없고 적멸하게 하는 주체도 없다.


선남자야, 일체 중생들이 끝없는 옛적부터 허망하게도 나[我]라고 생각하는 마음과 나를 사랑하는 마음을 내었기 때문에 잠깐잠깐 사이에 나고 사라지는 줄 스스로 알지 못했나니, 그러므로 미워함과 사랑하는 마음을 일으켜서 5욕(欲)을 탐하여 집착하게 되었느니라. 만일 좋은 벗을 만나 가르침을 받아 청정하고 뚜렷한 깨달음의 성품을 깨달아서 생겨나고 사라지는 이유를 밝히면, 곧 이 삶이란 그 성품만 공연히 번거롭고 피로하게 했음을 알리라.
만약 또 어떤 사람이 번거로운 고달픔이 영원히 끊어져서 법계가 청정해질 수 있었으나 그 청정하다는 견해가 장애가 되니, 그런 까닭에 원각에 자재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을 범부가 원각(圓覺)의 성품에 수순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선남자야, 일체 보살은 보고 아는 것이 장애가 되는 것임을 알고서 아는 장애를 비록 끊었으나 아직도 깨달음을 보려는 경지에 머물러서 깨달으려는 장애에 걸려 자재하지 못하나니, 이것은 보살로서 10지(地)에 들지 못한 이가 깨달음의 성품에 수순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선남자야, 비춤[照]이 있고 깨달음[覺]이 있으면 모두가 다 장애이니, 그런 까닭에 보살은 항상 머물지 않아야 함을 깨달아 비출 대상과 비추는 이가 동시에 적멸하게 되느니라. 비유하건대, 어떤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머리를 끊었다면 머리가 이미 끊어진 까닭에 끊을 것마저 없는 것과 같으니, 장애가 되는 마음으로 모든 장애를 스스로 멸한 뒤에는 다시는 끊을 것이 없느니라. 수다라(修多羅)의 교법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으니, 만일 달을 보았으면 가리키던 손가락은 마침내 달이 아닌 것임을 분명하게 아는 것과 같이, 일체 여래의 갖가지 가르침으로 보살들에게 열어 보이시는 것도 그와 같으니라. 이것을 일러 이미 10지(地)에 든 보살이 깨달음의 성품을 수순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선남자야, 일체의 장애가 곧 구경각(究竟覺)이니, 바른 생각을 얻거나 잃어 버리거나 간에 해탈 아닌 것이 없으며, 이루어진 법과 깨뜨려진 법이 모두 열반이며, 지혜와 어리석음이 통틀어 반야(般若)이며, 보살과 외도가 성취한 법이 똑같이 보리(菩提)이며, 무명(無明)과 진여(眞如)의 경계가 다름이 없으며, 계(戒)․정(定)․혜(慧)와 음욕ㆍ성냄ㆍ어리석음이 다 청정한 행이며, 중생과 국토가 동일한 법의 성품이며, 지옥과 천당이 모두 정토(淨土)이며, 성품 있는 것과 성품 없는 것이 한가지로 불도(佛道)를 이루는 것이며, 일체의 번뇌가 결국에는 해탈이니라. 법계 바다의 지혜로 모든 현상을 비추는 것이 마치 허공과 같나니, 이것을 여래가 깨달음의 성품을 수순하는 것이라고 하느니라.
선남자야, 다만 모든 보살들과 말법 세계 중생들이 일체 시각을 지내면서 허망한 생각을 일으키지 말아야 하며, 모든 허망한 마음을 쉬어 없애려 하지도 말며, 망상의 경계에 머물러 있으면서 분명히 알려고 하지도 말며, 분명히 알지 못하는 것을 진실이라고 여기지도 말아야 할 것이니라. 저 중생들이 이 법문을 듣고서 믿고 이해하고 받아 지녀서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으면, 이것이 깨달음의 성품을 수순하는 것이니라.


선남자야, 그대들은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은 중생들은 이미 백천만억 항하(恒河)의 모래처럼 많은 모든 부처님과 큰 보살들에게 공양하여 온갖 공덕의 씨앗을 심었나니, 나는 이런 사람을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성취한 사람이라고 말하느니라.”
그때 세존께서 이 이치를 거듭 펴시기 위하여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청정혜여, 마땅히 알아야 한다.
원만한 보리(菩提)의 성품은
취할 것도 없고 증득할 것도 없으며
보살도 중생도 없느니라.


깨달을 때와 아직 깨닫지 못할 때를 인해
점차와 차별이 있나니
중생은 아는 것의 장애를 받고
보살은 깨달음의 소견을 여의지 못하였다.


십지에 들어가 영원히 적멸하여
일체의 형상에 머물지 않고,
대각(大覺)만이 원만해지면
두루 수순한다 하느니라.


말법 세계의 모든 중생들이
마음에 허망한 생각 내지 않으면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런 사람은
현세의 보살이라 하나니,


항하의 모래알처럼 많은 부처님께 공양하여
공덕이 이미 원만해졌다 하나니
비록 방편이 많긴 하지만
모두가 수순하는 지혜라 하느니라.
 

출처 : 동국대학교 한글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