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위덕자재(威德自在)보살이 대중 가운데 있다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 발에 이마를 대어 예를 올리고, 오른쪽으로 세 바퀴 돌고 나서 단정히 무릎을 꿇고 합장하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대비하신 세존이시여, 널리 저희들을 위하여 이와 같이 깨달음의 성품을 수순하는 법을 분별하시어, 모든 보살들로 하여금 마음의 광명을 깨닫게 하시고 부처님의 원음(圓音)을 받들어 듣게 하시어, 닦고 익힘에 의지하지 않고도 좋은 이익을 얻었나이다.
세존이시여, 비유하건대 큰 성(城)에 출입하는 네 개의 문이 있어서 사방에 길이 열려 있어, 오는 이가 하나의 길에만 그치지 않는 것처럼, 일체의 보살도 부처님 국토를 장엄하거나 보리를 성취하는 것도 한 가지 방편만이 아닐 것이옵니다.
세존이시여, 바라옵건대 널리 저희들을 위하여 일체 방편과 점차와 아울러 수행하는 사람에게는 통틀어 몇 가지나 있는지 자세히 말씀해 주시어 이 모임에 모인 보살들과 말법 세계 중생들로서 대승을 구하는 이로 하여금 빨리 깨달아 여래의 큰 적멸 바다에 유희하게 하시옵소서.”
이렇게 말하고 오체투지하며, 이와 같이 세 번 청하여 거듭거듭 되풀이하였다.
그때에 세존께서 위덕자재보살에게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한 말이다, 선남자야. 그대들은 보살들과 말법 세계의 중생들을 위하여 여래에게 이와 같은 방편을 묻는구나. 그대들은 지금 자세히 들으라. 이제 그대들을 위하여 말해 주리라.”
그때 위덕자재보살이 분부를 받들고는 기뻐하면서 대중들과 함께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기다렸다.
“선남자야, 위없는 미묘한 깨달음[妙覺]이 시방에 두루하여 여래를 내나니, 일체의 법과 더불어 한 몸과 같이 평등한 것이어서 모든 수행에 있어서는 실제로 둘이 없느니라. 그러나 방편으로 수순하는 데는 그 수가 한량없이 많고, 그 돌아갈 바를 두루 거두려면 그 성품의 차별에 따라 세 가지가 있느니라.
선남자야, 만일 보살들이 청정한 원각(圓覺)을 깨닫고 나서 청정한 원각의 마음으로써 고요함을 취하는 것을 수행으로 삼으면, 모든 생각이 맑아지는 까닭에 식심(識心)이 번거롭게 요동했음을 깨닫고 고요한 지혜가 발생하나니, 몸과 마음의 번뇌[客塵]가 이로부터 영원히 소멸하여 안으로 적정(寂靜)하여 가볍고 편안함을 일으키느니라. 적정으로 말미암아 시방세계에 계신 모든 여래의 마음이 그 속에 들어나 나타남이 마치 거울 속에 훤히 나타나는 형상과 같나니, 이런 방편은 그 이름을 사마타(奢摩他)라 하느니라.
선남자야, 만일 모든 보살들이 청정한 원각을 깨닫고서 청정한 원각의 마음으로써 마음의 성품[心性]과 6근(根)․6진(塵)이 모두가 허깨비로 인한 것임을 깨달아 알고는, 곧 온갖 환(幻)을 일으켜 환이 되는 것을 없앨 때 모든 환을 변화시켜 환 같은 무리를 깨우쳐 준다. 그러니 환을 일으키는 까닭에 마음속으로 큰 자비의 경안(輕安)함을 일으킨다. 일체 보살이 이로부터 수행을 시작하여 차츰차츰 더해 가나니, 환이 되는 것을 관찰함은 환과 같지 않기때문이며, 환과 같지 않다고 관하는 것도 모두가 환이기 때문에 환의 모습을 영원히 여의느니라. 이것은 모든 보살들이 원만하게 하는 미묘한 행으로서 흙이 싹을 자라게 하는 것과 같으니, 이 방편의 이름은 삼마발제(三摩鉢提)10)라 하느니라.
10) 삼마발저(三摩鉢底)라고도 하며, 등지(等至)라 번역한다. 등(等)은 정력(定力)에 의하여 혼침(惛沈)ㆍ도거(掉擧)의 번뇌를 여의고, 마음이 평등 평정(平靜)함을 말하고, 정력이 이런 상태에 이르게 하므로 지(至)라 한다.
선남자야, 만일 모든 보살들이 청정한 원각을 깨닫고서 청정한 원각의 마음으로써 허깨비와 같은 모든 고요한 모습들을 취하지 아니하면, 몸과 마음이 모두 걸림이 되나 지각(知覺)이 없는 깨달음의 밝음은 모든 걸림에 의지하지 아니하는 것인 줄 분명하게 알아, 걸림과 걸림이 없는 경계를 영원히 초월할 것이다. 그러니 세계와 몸과 마음을 수용(受用)하되 모습은 티끌세상[震域]에 있는 것이 마치 종이나 북소리가 밖으로 울려나오는 것과 같아서, 번뇌와 열반이 서로 구애되지 않고, 미묘한 깨달음이 적멸의 경계를 수순함에 있어서는 자타(自他) 분별의 몸과 마음으로 미칠 수 없는 것이요, 중생의 수명도 모두 들뜬 생각이 되는 것이니, 이런 방편의 이름을 선나(禪那) NUM) 11)라 하느니라.
11) 선(禪)은 범어 dhyana. 음을 따 선나(禪那)라고 하며 줄여서 선이라 한다. 뜻으로는 정려(靜慮)ㆍ사유수(思惟修)ㆍ기악(棄惡)ㆍ공덕림(功德林)ㆍ정(定)이라 번역한다.
선남자야, 이 세 가지 법문(法門)은 모두 원각을 친근히 하고 수순하는 길이니, 시방의 여래께서 이것으로 인하여 부처님을 이루셨으며, 시방의 보살들이 일체가 같거나 다를지라도 모두 이와 같은 세 가지 업에 의지하나니, 만일 이를 원만하게 깨달으면 곧 원각을 이루리라.
선남자야, 가령 어떤 사람이 거룩한 도를 닦고서 백천 만억 아라한과 벽지불을 교화하여 깨달음의 경지[果位]를 성취하게 하더라도, 다른 어떤 사람이 이 원각의 걸림 없는 법문을 듣고 한 찰나(刹那) 사이에 수순하여 닦아 익힌 것보다는 못하느니라.”
그때 세존께서 이 이치를 거듭 펴시기 위하여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위덕이여, 그대는 꼭 알아야 한다.
위없고 큰 깨달음의 마음은
본제(本際)는 두 모양이 없건만
온갖 방편을 수순함에는
그 수가 한량없이 많으니라.
여래께서 총괄해서 보이심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번뇌 없고 편안한 저 사마타는
거울에 모든 형상이 비침과 같고,
환과 같은 삼마제(三摩提)는
새싹이 차츰차츰 자라남 같으며
적멸한 경계인 선나는
그릇 속의 종소리와 같도다.
위의 세 가지 미묘한 법문은
모두가 원각에 수순하나니
시방에 계신 모든 여래와
시방에 있는 모든 보살들이
이로 인해 부처님의 도를 이루셨나니
세 가지 일 원만하게 증득한 까닭에
구경의 열반이라 이름하느니라.
출처 : 동국대학교 한글대장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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